<30화>
“역시 수아 씨. 손이 빨라. 홀 정리 좀 부탁하려고 했는데, 이미 다 하고 왔네.”
“설거지도 제가 할게요. 매니저님은 잠시 쉬세요.”
수아는 묵묵히 일만 했다. 언제나 그랬고, 오늘은 더더욱 손을 놀리지 않고 움직였다. 마음이 불안해서였다. 오전에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안을 담당하는 간호사였다.
-저 윤미숙 간호사예요.
수아는 움찔하며 목소리를 올렸다.
“네. 무슨 일이세요?”
-지안이 수혈하다가 열이 올라서 쉬고 있거든요. 그런데 열이 계속 안 떨어지고 있어요.
“아, 열이 몇 도예요?”
-38.5도예요. 해열제 맞고 있는데도 38도 밑으로 안 떨어져요.
“…….”
숨이 가빠졌다. 이제 지안은 수혈도 버텨내기 힘든 거다. 수혈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가만히 누워서 편하게 남의 피를 몸속으로 집어넣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몸 안에서는 꽤 복잡한 활동이 벌어진다.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들어오기 때문에 열이 나거나 가려움 등등 거부 반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금 쉬거나 부작용에 따른 주사를 맞고 다시 수혈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니 밥 먹듯 수혈하는 아이 곁에 계속 있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종종 이런 일이 있어 왔기에, 병원으로 달려갈까 하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몇 시간 동안 일을 하다가 30분가량 쉴 수 있게 됐다. 때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매장에서 파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들고 카페 구석에 앉았다. 서둘러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 지안이 보호자님.
“네. 우리 지안이 어때요?”
-열 떨어졌고요, 수혈 다시 하고 있어요.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걱정하실까 봐요.
“다행이다……. 잘 돌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일인데요 뭐. 제 폰으로 전화 걸어 주실래요? 지안이한테 곧 갈 건데, 목소리 들려드릴게요.
“어머나. 감사합니다.”
잠시 후 지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수아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천사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힘들었나 보다.
-언니. 나 괜찮아.
“응. 믿고 있었어.”
그리고 다음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수아는 목을 가다듬은 후에 말을 이었다.
“혼자 둬서 미안해.”
-…….
이 말을 할 때 제일 가슴이 아프다. 아픈 너를 혼자 둬서 미안해. 작은 너를 혼자 있게 해서, 모든 걸 혼자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 지안아.
지안은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다.
-원래 인생은 혼자 가는 거라며.
“풉.”
눈에는 눈물이, 입가에는 웃음이 났다. 그렇다고 아픈 8살짜리를 혼자 둬서는 안 되는 거야, 이 바보야. 내가 옆에 있어주지 못하니까 그딴 말을 한 거라고.
-오늘은 언니 일찍 안 와도 돼. 우리 병원에 종이 접기 선생님 오시는 날인 거 알지? 그거 배우러 갈 거야.
“수혈 받았으니까 오늘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배우고 싶어. 학교도 못 가는데…….
말끝을 흐리는 지안의 안타까움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지안아. 마스크 절대 내리면 안 돼. 시작하기 전에 손 씻고, 끝나고 손 씻고. 응?”
-알았어. 히히. 벌써 신난다. 귀여운 거 만들어 올게.
“응. 나중에 봐.”
마음 같아서는 아무데도 보내고 싶지 않지만, 지안이 기다렸던 일이라 주치의 선생님도 컨디션이 괜찮다면 가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하고 싶은 게 많으면 병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오늘도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식욕은 없지만 샌드위치를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강이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또 무시했다.
그는 아침에 ‘오늘 나 좀 보죠.’라는 문자를 보냈었다. 여지를 주면 안 된다. 전화도, 문자도 무시하는 게 나았다.
***
이준은 로건과의 일정 때문에 바빴다. 로건이 전통적인 한옥을 보고 싶다고 해서 한옥 체험을 해볼 수 있게 도와주었고, 지금은 서울 국내 건축전에 와 있었다.
로건이 화장실에 간 사이, 이준은 떨어져 나와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남기려는데, 신 비서가 다가왔다.
“대표님. 로건이 시차 때문에 좀 피곤하다고 합니다. 이 일정을 끝으로 숙소에서 쉬고 싶다고 하는데요.”
잘 된 일이었다.
“그렇게 하자.”
“아까 봤던 한옥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고요, 내일 밤은 호텔 대신 한옥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안 될 게 뭐 있어. 신 비서가 호텔 측에 알려 줘.”
“네. 알겠습니다.”
국제 건축 동향에 대해서는 꽤 좋은 정보를 얻었기에 오늘은 이쯤으로 끝내도 괜찮을 듯했다. 오후 5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로건을 호텔로 데려다 준 후 신 비서와도 헤어졌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전화를 집어던지고 싶은 걸 이준은 겨우 참았다. 카페로 가야 했다. 마음은 급한데 퇴근길에 차가 정체되면서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갔다.
벽에 머리를 쾅 박아버리면 기억이 돌아오려나. 그 기억 속에 윤수아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나는 진짜 정신병자인가.
그런데 날 보는 당신의 눈이 어쩐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이게 착각인 거야?
이준은 차가 정지신호에 섰을 때 문자를 보냈다.
[지금 카페로 가고 있어요.]
직원실에서 퇴근을 준비하던 수아는 이 문자를 보고 경악했다. 열이 확 올랐다. 문자에 응답을 하는 것 자체가 여지를 주는 것 같아서 답을 안 하려고 했는데.
[안 돼요. 오늘 반지 맞추러 가기로 했어요.]
곧바로 강이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아는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진작 전화 좀 받죠?
“우리가 따로 통화해야 될 사이가 아니잖아요.”
-할 말이 있다고 했을 텐데요. 지금 다 와 가요.
수아는 화들짝 놀라서 목소리를 조금 키웠다.
“지금 서한 씨 오기로 했어요!”
-오지 말라 그래.
“미쳤어요?”
-일 생겼다고 둘러대요. 일단 나부터 만나요.
“아,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그쪽은 나 못 말릴 거야. 그러니까 강서한한테 오지 말라 그러라고. 좀 이따 봅시다.
“안 돼요…….”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꼬리에 불이 붙은 것 같은데 어떻게 꺼야 할지 발이 절로 동동 굴려졌다. 이번에는 수아가 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아,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둘 중에 한 사람은 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수아는 서한에게 냉큼 전화를 걸었다.
뭐야……. 강서한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진동으로 해놓고 못 보는 걸까. 어떡해. 두 남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수아는 가방을 들고 재빨리 카페를 나왔다. 강서한이 카페로 온 적은 없었지만, 만약에 이곳으로 온다면 두 남자가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가는 정말 큰일이 난다.
수아는 7층에서 1층으로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벗어나야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백화점 정문을 나오자마자 누군가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어.”
수아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눈앞에 강이준이 서 있었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지 않았다.
그는 파란색 애스턴 마틴을 바로 앞에 주차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이 거부할 수 없는 상큼한 냄새와 함께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 왔다고 했잖아요.”
당황한 수아는 애원하듯 말했다.
“아, 저기, 서한 씨 오고 있어요. 제발 그냥 가 주세요. 네?”
이준의 눈빛과 목소리가 극악할 정도로 집요했다.
“타요. 오늘은 죽어도 못 보내니까.”
“지금 거의 다 왔을 거란 말이에요.”
“걱정 되면 강서한한테 전화해요. 사정이 생겼으니까 오지 말라고.”
“아, 정말 어쩌려고 이래요…….”
수아가 이준에게서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벌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가 날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얄팍한 욕심을 아주 잠깐 냈었다. 그에 따른 책임은 지지도 못할 거면서……. 일단 두 남자가 만나서는 안 됐다.
“이거 좀 놔요. 전화할게요.”
몸으로 막아선 이준이 수아의 손목을 놓아주었고, 수아는 서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
“저기 서한 씨. 갑자기 일이 생겼어요.
서한의 목소리가 바로 예민해졌다.
-무슨 일?
“매니저님이 할 말이 있다고, 일마치고 보자고 하셔서요……. 같이 밥을 먹어야 될 것 같은데요.
-아씨, 뭐야. 진작 말을 하지.
“너무 죄송해요. 정말 이런 적이 없는데, 퇴근할 때 말씀하셔서요…….”
-나 백화점 다 왔는데.
“네? 다 왔어요?”
수아가 고개를 돌리니 가까운 곳에서 서한의 빨간색 스포츠카가 보였다.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강이준과 같이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됐다.
수아는 본능적으로 바로 앞에 있는 이준의 차에 몸을 욱여넣었다. 이준이 빠르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때 서한은 백화점 앞이었다. 순간 서한의 눈썹이 매섭게 구겨졌다. 저 앞에 파란색 애스턴 마틴. 설마 강이준의 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