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체육관이었다. 파이트 쇼츠를 입은 이준은 샌드백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발로 찼다.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같은 에너지가 가슴 속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이 에너지를 진탕 쏟아내야 잠들 수 있을 거였다. 굵은 근육들은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결혼. 두 사람의 결혼이라……. 개새끼 중에서도 최악인 강서한에게 윤수아를…….
이준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억장이 무너지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붙잡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결혼을 막을 것이다. 이준은 철봉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렸다. 땀방울이 매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내 여자가 윤수아여야 하는 이유……. 1년 동안 꿈에 나와서 내 마음을 몽땅 가져갔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게 이유인데, 그러면 윤수아가 이해된다고 할까?
하, 실소가 터졌다. 그냥 설명할 수 없으므로, 설명을 집어치워야 한다.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없다. 어차피 사랑은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쯤 강서한과 헤어졌을까.
***
지안의 수다 주머니에 수다가 고여 있었나 보다. 친구도 없고,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럴 테지. 한참 재잘거리던 지안은 졸리는지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이제 1년 정도 자라서 그나마 남자애들만큼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있는데……. 수아가 지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우리 지안이한테는 좋은 냄새가 나.”
“언니가 좋은 샴푸 사줬잖아…….”
제일 싼 거야. 세일해서 1+1으로 산거거든.
“그것 때문은 아니고, 지안이한테 원래 좋은 냄새가 나.”
“그래?”
수아가 지안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절한 바람이었다.
“지안아. 다 나아서 꼭 학교에 가자.”
“…….”
지안의 얼굴에 천천히 웃음이 가셨다. 지안은 슬픈 빛을 띤 눈동자로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눈을 감았다.
아마 학교 친구들이 보고 싶을 거다. 선생님을 좋아하고 잘 따랐는데. 지금은 병문안도 조심해야 해서 아무도 못 오게 했다. 면역력이 약해서 사람과의 접촉도 위험했다.
수아는 지안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가슴을 토닥였다. 이 작은 가슴에 얼마나 많은 아픔과 한을 채워야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부디 그것들을 제가 겪게 하시고, 지안이는 완치되게 해 주세요.
걱정이 있어도 애는 애다. 지안은 곧 잠이 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니, 강이준에 대한 생각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보고 싶었어요.”
“전화할게요.”
보고 싶었다는 말까지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도 미쳤고, 나도 미쳤다. 심장이 떨려서 죽을 뻔 했단 말이야……. 이 감정을 들켜서는 안 된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
언제 전화를 한다는 걸까. 서한과 있을 때 연락이 오면 어찌 할지 생각만 해도 살이 떨렸다.
그런데 갑자기 무음으로 해 놓은 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차마 저장하지 못한 그 번호, 이준의 것이었다. 당장 전화를 걸겠다는 뜻이었어…….
폰을 손에 꼭 쥐고 있던 수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 더 걸려오다가 전화는 끊어졌다. 끝이길 바랐는데, 문자가 들어왔다.
[만나서 얘기 좀 해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궁금하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듣건, 내가 괜찮을 리가 없잖아.
수아는 답을 보내지 않았다. 강서한을 생각하면 결혼이 끔찍해서 시간이 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강이준을 생각하면 시간이 빨리 흘러야 했다.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제발 결혼 후이기를.
***
다음 날. 서한은 사장실로 출근한 후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저예요.
“어디야?”
-카페예요.
“벌써 출근했어?”
-네. 아침에 일찍 나왔어요.
“오늘 언제 마치는데.”
-7시쯤이요.
“그럼 일 마치고 반지 맞추러 가자. 원하는 제품이 없을 수도 있어서 급해.”
-……네. 알았어요.
“아, 근데.”
서한은 짧은 한숨을 뱉어내고 말을 이었다.
“넌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말은 언제 할 거야? 한 번도 그런 말을 안 하더라. 스물두 살. 어린 거 아는데 할 건 하자, 쫌. 나이가 무기는 아니잖아.”
-…….
“결혼 허락을 해주시는데도, 아버님 소리가 안 나오면 어떡하냐. 어른 기분도 좀 맞추고 해야지. 너 몸만 오는데 동생 아픈 것까지 아셔 봐. 아버지 또 넘어가실 거야.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도록 살랑거리면서 웃고, 먼저 말도 붙이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 그게 그렇게 어려워?”
-갑자기 허락해주실 줄 몰라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카페 일도 그만두라고 하실 거야. 며느리가 최저시급 받고 일하고 있으면 우리 집 체면이 안 서니까.”
-……저기, 하는 데까지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시면 안 될까요?
“애는 안 낳을 거야?”
-…….
누군가가 목을 탁 치는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도 하나는 낳기를 바라시던데. 자식 낳고 잘 살아보라고 하셨잖아. 내 나이도 있으니까 애도 하나 있으면 좋겠고.”
-…….
“아들. 난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목욕도 같이 하고, 운동도 가르쳐 주고 하게.”
-음, 생각하고 있었어요……. 딸일지 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거고요.
“그래. 어쨌든 저녁에 보자.”
-네.
전화를 끊은 후 힘이 쭉 빠졌다. 불쑥 다가와 버린 결혼이 피부로 와 닿기 시작했다.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결혼 후에는 한 순간도 내 뜻대로 살 수 없을 거였다.
아이를 낳는 건 그와 몸을 섞어야 하는 일이 먼저인데……. 처녀가 아니라는 걸 알면 어떡하지? 그가 날 죽이려 들 것 같다.
50년 전도 아니고, 결혼하면서 이런 걱정을 하는 여자도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강서한과는 몸을 섞고 싶지 않다. 그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몸은 얼음처럼 굳어버린다.
아직은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았다. 지안이를 돌보는데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인데 지금 아이를 낳으면 지안에게도, 아이에게도 미안해질 것 같다고…….
그때 지잉 문자가 왔다.
[오늘 나 좀 보죠.]
이준이었다. 오늘 보자고? 이쪽에서, 저쪽에서 숨통을 조여 왔다. 어떡해야 되지?
***
서한은 뜻대로 되는 듯하면서도, 조금씩 어긋나는 윤수아 때문에 예민해져 있었다. 손바닥 안에 다 들어온 것 같은데 왜 아직도 불안할까. 역시 잠자리를 하지 않아서인가.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서한은 고개를 들었다. 비서 정주희가 부사장실에 들어와 있었다.
“아, 통화 중이신지 모르고 들어와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정 비서가 서한의 책상 위에 커피를 놓았다. 정 비서는 여우같은 목소리에 헤픈 웃음을 얹었다.
“커피 달라고 하셔서요. 오늘 새로 들어온 예가체프예요.”
서한이 정 비서의 몸매를 아래에서 위로 느리게 훑었다. 손바닥 정도 길이의 짧은 치마에, 상의는 몸에 붙는 실크 블라우스였다. 몸의 실루엣이 완전히 드러나는 의상이었다.
정 비서는 그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드셔보세요.”
서한이 커피 잔을 들어 향을 맡다가 한 모금 넘겼다.
“어때요? 향이 정말 좋죠?”
“…….”
정 비서는 상체를 조금 숙여 얼굴을 제법 가까이 들이밀었다. 요것 봐라…….
여자가 꼬리를 치는 행위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서한은 얄팍한 웃음을 머금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향이 다르네.”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정 비서가 가슴골이 깊이 파인 의상으로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정 비서가 돌아서서 나가는 것을, 서한은 야릇한 눈길로 응시했다.
3개월 전 새로 입사한 정주희의 옷차림이 조금씩 과감해지고 있었다. 특히 오늘은 브래지어 안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두 덩이의 가슴은 손에 쥐어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크고 탐스러웠다.
어제의 입술은 반짝이는 주황색이었다가 지금은 새빨갰다. 정 비서는 특히 가슴과 엉덩이가 돋보이는 옷을 입는다. 얼굴도 색기가 넘치면서.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던 서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입술을 제 혀로 날름 핥으며 중얼거렸다.
“그 년, 참 맛있게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