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뭔가가 심장을 쿵 박살내는 것처럼 격한 통증이 일었다. 이 결혼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숨을 참고 턱을 꽉 물고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준이 지옥을 맛보고 있을 때 서한은 감격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
“네 나이도 있으니까 하고 싶을 때 보내는 게 맞지. 청첩장 한 번 더 돌리는 게 뭐 그렇게 무안한 일이라고.”
“이렇게 빨리 결정 내리실 줄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러게. 나도 많이 늙었나 보다. 이렇게 금세 마음이 바뀔 줄은 몰랐구나.”
수아는 응당 고맙습니다, 라고 말해야 하건만 그 말이 목구멍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니고, 스스로 내린 결정인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빨리 해야 지안의 병원비에 대한 부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것이므로 허락해주시길 바라고 있었다.
지안이만 살릴 수 있다면, 사랑 없는 결혼쯤은 열 번도 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강이준이 약혼식장에 나타난 순간부터 그 마음에 균열이 가고 말았다. 사랑 없는 결혼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강이준을 다시 만나면서 가슴은 무서운 열병을 앓고 있었다. 제발 심장이 굳어버렸으면. 이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것만 같다.
서한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버지의 말씀에 왜 가만히 있냐는 뜻이었다.
“고맙습니다…….”
수아는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했다. 나희는 웃으며 짝짝짝 박수를 쳤다.
“축하해. 얘들아. 그러니까 부모한테 잘 하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그러잖아. 너희가 집에 자주 오고, 여행도 같이 가고 하니까 아버지 기분이 너무 좋으신 거지. 그렇죠, 여보?”
“내가 고집을 부려서 뭐하겠어. 젊은 사람들 앞길 막는 것밖에 더 돼?”
“잘 생각하셨어요. 여보.”
나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뜻에 따르는 척할 뿐이었다. 좀 더 두고 보자고 했지만, 강회장은 자꾸 마음 약한 소리를 해댔다.
언제나 꼿꼿한 성격으로 자식들을 끝까지 이길 것 같았는데 한 번 쓰러진 후 확연히 달라졌다. 아마도 죽음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가보다.
그럼 나한테나 좀 잘할 것이지. 회사에 빚만 쌓고 있는 서한을 돕는다고 큰돈을 덥석 내놓더니, 또 곧바로 결혼을 시켜줄 건 뭐야. 다 퍼다 낼 생각인가.
짜증이 나서 잠이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혼자 와인이라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켜야지. 이제 갈수록 참기가 힘들다. 살랑거리면서 웃어야 하는 안주인 행세가 지겹고 버거웠다.
“아버지. 되도록 빨리 결혼하고 싶습니다. 다음 달을 넘기고 싶지 싶은데요.”
“그렇게 해. 좋은 호텔을 예약할 수 있을지가 문제겠구나.”
이 자식이 장가를 못 가서 환장했나. 나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놀라워했다.
“여보. 그렇게나 빨리요? 그럼 한 달 밖에 안 남았잖아요.”
서한은 이골이 났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어차피 한 달 후에 하든 일 년 후에 하든, 사람들은 씹어댈 게 뻔해요. 뒷담화 좋아하는 사람들 실컷 하라고 하죠 뭐. 전 상관없습니다.”
“그렇기는 한데…….”
나희가 말끝을 흐렸다. 강 회장은 서한의 말에 동의했다.
“서한이 말도 맞아. 어차피 1년 후에 결혼해도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댈 거야.”
“…….”
그렇다고 한 달 후에 결혼을요? 하고 되물으려다가 나희는 입을 닫았다. 입끝이 씰룩였다. 당신은 이제 정신이 나가버렸네요. 죽음이 그렇게 무섭던가요.
물론 심장 혈관이 막혀서 죽는 사람도 많다. 그나마 빨리 발견해서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병이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밉디 미운 강서한에게 돈을 퍼붓고 있다. 이 미친 남편이. 자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하여튼 서한의 행동 때문에 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했다.
강 회장이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이혼이 요즘 뭐 큰일도 아니지만 정신없이 약혼하고 결혼하면, 누가 봐도 눈살 찌푸릴 일이야. 한 번은 크게 욕을 먹을 수밖에 없어. 대신 이혼하지 말고, 자식도 낳고, 잘 살면 된다. 보란 듯이 살아 봐.”
“네. 고맙습니다. 아버지.”
서한은 기분이 좋아서 입이 찢어질 듯했다. 한 번도 수아의 몸을 가져보지 못했기에, 내일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싶었다.
수아는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지기 어려운 여자였다. 스킨십을 할 때마다 움찔대니 서한도 기분이 팽 나빠지고 말았던 거다.
그러나 19살 때부터 봐왔던 수아를 포기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강 회장이 이맛살을 구기며 수아에게 물었다.
“동생이 많이 어리다고 했나?”
“네. 8살이에요.”
아프다는 말씀은 차마 드리지 못했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는데, 속사정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돌봐주실 분은 없고?”
“네…….”
“그럼 같이 살아야 된단 말이지?”
“…….”
사정을 뻔히 알면서 물어보시는 거라, 바늘에 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강 회장이 흐음, 짧은 한숨을 내뱉었고, 수아는 더욱 고개를 떨구었다.
“하여튼 성질도 급하긴. 네 놈이 결정한 일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네.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날짜는 되도록 빨리 좋은 날로 잡아주세요.”
“그래. 지금 당장 전화해 보마.”
잠시 후 다 같이 일어섰다. 서한은 가방을 가지러 다녀온다며 2층 방으로 올라갔고, 강 회장은 호텔을 예약하는 것 때문에 서재로 들어가 통화를 했다.
나희도 주방으로 간 뒤여서, 이준과 수아가 어색하게 남겨졌다. 이준이 대뜸 말을 건넸다.
“번호 좀 줘요.”
“…….”
잘못 들었나. 누가 다가올까 봐 수아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폰 번호 좀 달라구요.”
“……네?”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 숨이 막혔다. 강서한이 내려올까 봐 조마조마해서, 수아는 눈을 굴리며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이준도 목소리를 줄였다.
“할 말이 있어요.”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살아 있어서 수아의 음성이 기어들어갔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때 나희가 다가왔다.
“왜 그러고 있니?”
이준이 무심한 투로 대답했다.
“아, 제가 번호 달라고 했어요.”
“그래. 가족인데 번호 정도는 서로 가지고 있어야지. 수아야. 왜 그렇게 굳어 있어?”
“……네. 번호 교환 하려고 했어요…….”
왜 혼자만 이렇게 당황하고, 식은땀이 흐르는지. 매번 이럴 때마다 앞이 캄캄해졌다.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까.
수아는 그에게 번호를 불러줬다. 이준이 그 번호로 저장을 했고, 수아의 폰이 지잉 한 번 울렸다.
“저장해둬요.”
“……네.”
손이 떨려서 무엇 하나 제대로 터치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얼마나 두껍기에 이 집에서 이럴 수 있는 건데. 곧 서한이 내려왔고, 통화를 끝낸 강 회장이 서재에서 나왔다.
“서한아. 날 잡았다.”
“우와. 정말요?”
“다음 달 10일. 아주 좋은 날인데, 때마침 파혼한 커플이 있어서 겨우 예약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희는 체념하며 억지로 웃었다.
“어머나. 이렇게 빨리……. 축하해, 수아야. 서한아.”
“네. 고맙습니다…….”
오늘이 9월 9일. 그러니까 하룻밤 지나면 딱 한 달이 남은 거다. 답답한 가슴은 끝을 모르고 차가운 바다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비를 맞는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사랑 없는 결혼을 택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앞으로 평생.
몸이 축 늘어져서 무거웠다. 수아는 걸어지지 않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준, 서한, 수아는 현관을 나와 차로 향했다.
“조심해서 들어 가.”
“그래. 또 보자.”
이준과 서한이 인사했고, 수아는 목례만 하고 싶었으나 이준이 기어이 말을 건넸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네.”
“또 뵐게요.”
“……네.”
서한은 또 두 사람을 놀리고 싶어서 키득거렸다.
“우리 수아는 만나서 하나도 안 반가웠다는 얼굴이야. 어쩌면 좋냐. 만날 때마다 이러네.”
“그러게. 내가 싫으신가 봐.”
수아는 이 상황이 싫어서 빨리 집에 가고만 싶었다. 서한은 굳이 수아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며 짓궂게 물었다.
“이준이 싫어? 솔직히 말해 봐. 어떤 면이 싫어?”
“…….”
“얘가 좀 재수 없지? 말수도 없는데 잘난 척도 좀 하고. 그지? 응?”
“…….”
싫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가 싫지 않아서 이 결혼이 벌써부터 끔찍했다.
수아는 입술을 꾹 붙이고 가느다란 숨만 내뱉었다. 이준이 몰릴 때마다 신이 난 서한은 거만하게 떠들었다.
“우리 수아가 이렇게 내성적이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네가 이해해라.”
“나도 성격이 데면데면한데 뭐.”
갑자기 서한의 폰이 울렸다.
“잠시만.”
서한이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서한이 옆에 있었기에, 이준과 수아는 딱히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준이 폰을 꺼내더니 귀에 갖다 댔다. 그런데 이준의 눈은 수아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빨리 오고 싶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었어요.”
“…….”
뭐, 뭐하는 거지. 통화하는 건가.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렸는지 모르겠는데.”
“…….”
이준은 서한의 의심을 피하려고 다른 누군가와 통화하는 척하면서, 수아에게 할 말을 전하고 있는 거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수아의 동공이 크게 일렁거렸다.
이준의 매끄러운 저음이 수아의 심장 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
도대체 날 얼마나 흔들려고 이러는 거야…….
서한과 등을 진 수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작게 고갯짓을 했다. 이러지 말라고. 제발 이러지 말아 달라고.
이준의 올곧은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목소리는 훨씬 고집스러웠다.
“전화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