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95)

<27화>

물소리가 거세어서 귀가 멍한데도, 지안의 말은 또렷하게 들렸다. 


“언니. 엄마 죽일 때 어땠어?”

“…….”


원망을 넘어 징그러운 원수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넌 죽어도 돼.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봐.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지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키워왔는데. 너를 위해서였는데. 지안은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언니도 살고 싶지? 엄마도 살고 싶었을 거야.”

“…….”

“그러니까 언니도 그냥 죽어.”

“…….”

“내가 그 나뭇가지에서 언니 손을 떼어내기 전에.”

“…….”


수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얼굴이 온통 젖어 있었지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간절하게 살고 싶었으나, 살고 싶어 욕심을 부리는 것도 버러지 같았다. 


지안이 자신에게 죽으라고 한다면 언제든 목숨을 버릴 수 있었다. 오랫동안 짓눌려왔던 죄책감으로 가슴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으므로. 


눈물이 가득 찬 수아의 눈에 지안의 모습이 흐릿하게 담겼다. 곧 수아는 나뭇가지를 스스로 놓았고, 물살에 떠내려갔다. 

아직도 몸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언젠가는 그 악몽이 현실이 되지 않을까. 

수아는 먹먹한 눈으로 지안을 바라봤다. 

“언니. 오늘은 언니가 특별하게 더 예뻐.”

“아이스크림 사 줘서?”

“응.”

지안이 반달 눈매를 접으며 활짝 웃었다. 

***

며칠이 지났고, 가족들과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준은 벽시계를 확인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당신을 안아본 것 같다는 말을 해 버렸으니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봐야 하나. 날 어떤 눈으로 볼까. 역겨운 도련님쯤으로 생각할 테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몇 년간 집안에 발을 끊었다가 지금은 뭐하나 노리고 있는 도둑놈처럼 집에 들락거리는 꼴도 우스웠다. 

그런데도 퇴근을 준비하는 이준의 손이 바빠졌다. 낯짝이 두꺼워도 보통 두꺼운 게 아닌 거다. 그만큼 윤수아가 보고 싶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신 비서가 들어왔다. 난감한 얼굴이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데. 웬만하면 내일 처리하자.”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공항으로 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

“왜.”

“로건이 지금 막 한국에 도착했답니다.”

“내일 오전에 도착하기로 했잖아. 왜 이제 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메일을 다시 확인했는데요, 분명히 로건이 내일 오전 10시 20분 도착이라고 했는데, 잘못 전달한 것 같습니다.”

“하아. 미치겠네…….”

일이 틀어져도 항상 차분함을 유지하던 이준은 속이 탔다. 하필이면 왜 오늘인가. 일주일을 기다렸는데. 

기다릴 수밖에 없어서 기다린 것이지, 기다릴 만해서 기다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식사 자리는 포기해야 했다. 

“후, 픽업하러 가자.”

이준과 신 비서는 같은 차로 움직였다. 미국인 로건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건축가였다. 작년에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만났다. 

이준은 내년에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개최되는 최대 규모의 건축 전시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한국은 좁다. 무대를 세계로 넓히려는 계획은 처음부터 품고 있었다. 

얼마 전 정부에서 미국 건축 전시회에 참가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기업 중 10개를 선정했는데, 이준의 아우름 건축사무소도 뽑혔다. 작은 기업이지만 대기업 속에서 선전한 결과였다. 이례적으로 기사에 여러 번 실리면서 기대를 받기도 했다. 

로건이 한국에 들어올 때 그를 대접하며 국제 건축에 대한 유효한 정보를 알아두는 게 도움이 될 거였다. 국제적으로 탄소 배출 저감에 기여하는 기업에 우호적이다 보니 신재생 에너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유지보수가 편리한 혼합소재 수요도 늘고 있어서 소재 개발이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야 했고, 건설 디지털 부분은 절대로 뒤처져서는 안 됐다. 로건이 들려 줄 정보가 절실했다. 

이준은 예약해둔 호텔에 전화를 걸어 오늘 밤부터 투숙할 수 있도록 한 뒤 나희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저, 집에 못 가요.”

-어머. 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네가 좋아하는 해산물 구하려고 수산시장까지 다녀왔는데.

“지금 문제가 생겼어요. 내일 오기로 한 고객이 오늘 도착했어요.”

-아니 왜. 그 사람 개인 일정 때문에 빨리 온 거 아니고?

“아니요. 제가 한국에서의 스케줄을 전부 도와주기로 했는데, 소통에 착오가 있었나 봐요. 그래서 지금 공항으로 가는 중이에요.”

나희는 기운이 빠져서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 너무 서운해……. 엄마가 너 보려고 상 차리고 있는데. 

“저 없어도 똑같이 대접 잘 하시고요.”

-늦게라도 올래? 아예 못 오니?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말씀을 못 드리겠어요.”

-그래. 혹시나 좀 늦어도 올 수 있으면 와.

“네. 그럴게요.”

이준도 기분이 착잡했다. 백미러로 이준을 살피며, 신 비서가 조금 의아하게 물었다. 

“요즘 집에 자주 가시네요?”

“……뭐, 아버지 건강도 예전만큼 좋지는 않으시고 해서.”

얼버무렸으나 신 비서는 의문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곧 공항에 도착했다. 40대 중반의 로건은 비서 없이 혼자 와 있었다. 

“Oh, Jun. I'm so sorry.”

“It's okay. I didn't have an appointment just in time.”

로건은 늘 비서와 함께 다니다 보니 지리에 특히 문외한이라고 했다. 그의 비서는 아내의 출산을 위해 2주간 휴가를 냈고, 로건은 한국에 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It's good to see you early. Welcome.”

이준은 그를 픽업해서 예약해둔 호텔로 데리고 갔다. 

***

나희가 서한과 수아를 반기는 척하며 안으로 이끌었다. 

“이준이는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구나.”

서한이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오늘도 참석하면 필히 다른 속셈이 있는 겁니다. 그 자식도 대놓고 아버지 발바닥을 핥을 줄 아네요?”

나희는 기분이 상했지만 꾹 참았다. 

“그럴 리가 있겠니.”

수아는 그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마음은 이내 심란해졌다. 

표현해서도, 들켜서도 안 되지만 사실은 그가 보고 싶다.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보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해야 참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1년을 어떻게 견뎠을까. 난 살아 있었던 걸까. 죽었던 걸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대가, 크게 치르게 될 거야. 윤수아. 

***

이준은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다. 로건은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하고, 또 미안하다며 이준에게 자꾸만 퇴근하라고 했다. 

이준은 그에게 내일 일정을 간략하게 말해준 뒤 호텔을 나왔다. 신 비서도 퇴근을 시켰고, 혼자 남았다. 

지금이라면 그리 늦지 않았을 것 같았다. 마음은 급한데, 비가 내리면서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배달 오토바이가 신호위반을 하면서 끼어들었다. 끼이이익~~~!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면서 차는 갓길에 섰다. 다행히도 부딪치지 않았고, 오토바이는 쌩하니 가 버렸다. 

이준이 쌕쌕 숨을 내쉬며 아찔했던 순간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고막 속에서 자신의 과거 목소리가 들렸다. 영어였다. 

“저기 주황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 제 여자 친구예요. 프러포즈를 하려고 하는데, 세계 각국의 언어로 그녀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어요.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도요. 부탁해도 될까요?”

“오, 완벽한 프러포즈예요. 저까지도 행복해지네요. 기꺼이 동참할게요.”

이번에는 조금 서툰 불어였다.

“당신이 괜찮다면 저기 서 있는 제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 하는 것을 도와주실래요? 당신의 언어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은데요.”

“제가 이때까지 본 프러포즈 중에 제일 멋진데요? 오케이. 얼마든지요.”

그리고 소리가 사라졌다. 이게 뭐지. 프러포즈를 했던가…….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것이 사람을 아주 돌게 한다. 파편 같은 것들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는데. 기억이 돌아오려고 하는 것인가. 제발…….

이준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강 회장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실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나희가 벌떡 일어나며 반색했다. 

“어머. 이준아! 일이 빨리 끝났구나. 배고프지?”

“아니요. 대충 먹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같이 차 한 잔 해.”

배도 고프지 않았고, 혼자만 밥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같은 공간에서 윤수아의 얼굴을 1초라도 새겨 넣고 싶었다. 돌아서면 그리워질 것이므로. 

하루가 1년처럼 길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었다. 오늘 그녀는 흰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한 송이의 백합 같았다. 맥박이 빨라졌다. 

서한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빈정댔다. 

“밥도 먹었으면서 집에 왜 왔을까.”

“내 방에서 가져갈 게 있어서.”

“아버지 방에서 가져가는 게 아니라?”

“하. 내가 도둑질이라도 하길 바라는 거야?”

강 회장이 언짢은 기색을 비췄다. 

“그만해, 그만.”

“…….”

“안 그래도 다 같이 모였을 때 말을 하려고 했는데.”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가. 이준은 커피 잔만 꼭 쥐고 있는 수아의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장 목공실에 둘이 있었을 때처럼 턱을 들어 얼굴을 빤히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오늘따라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달짝지근했다. 

강 회장이 마른 침을 삼킨 후 서한을 보며 본론을 꺼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빨리 결혼해라. 허락하마.”

“…….”

이준의 가슴속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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