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내가 당신을 안아본 것 같아서 그래.”
“…….”
수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대화는 위험했다. 이준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계속 들려왔다.
“머리는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신의 냄새, 목소리, 웃음 모든 것들이 낯이 익어. 데자뷰, 그런 기시감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것들이 내 몸에 박혀 있는 것 같아.”
“…….”
“내가 미친 걸까.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걸까. 뭘 것 같아?”
“…….”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것 자체가 뭔가를 숨기려는 것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수아는 천천히 몸을 돌려 이준을 바라봤다. 파고드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당신은 전자이길 바랄 거야. 내가 미친 거. 그지?”
“…….”
눈동자가 흔들릴 뻔했다.
“근데 나는 후자,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 목숨을 걸고 싶어. 그러니까 난 또 미친놈인 거야. 이제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가 없어. 둘 다 해당되니까.”
“…….”
이준은 강렬한 눈빛으로 수아를 응시했다. 그동안 어떻게 참아왔나 싶을 정도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내 몸이 당신을 지독하게 원해. 그러니까 날 좀 이해시켜 봐. 나도 이런 내가 설명이 안 돼서 미치겠으니까.”
“…….”
그의 머리는 기억을 잃었다. 하지만 몸은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거였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지만 그의 말을 괘씸한 것으로 치부해야만 했다.
“무례하시네요.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어려서 우습게 보여요? 아니면 날 가지고 놀고 싶어요? 미친 소리 그만 둬요. 강서한 씨가 알면 난리 나요. 어쩌면 우리 둘 다 죽을지도 몰라요.”
“…….”
숨이 막히도록 답답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묻어둔 말들을 내뱉으면 조금이라도 갈증이 해소될 줄 알았으나, 더 큰 갈증이 목을 메어왔다. 이준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당신 눈은 왜 항상 슬퍼 보일까.”
“…….”
꿈속에서 너는 언제나 웃고 있는데……. 그러니까 자꾸만 곁을 서성이게 된다.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서.
수아는 이준의 시선을 피하며 제 발끝만 보고 있었다. 슬픈 눈……. 슬픔의 감정을 매일 들키고 있었구나.
속여지지 않는 감정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므로 억장이 무너진다. 언제쯤이면 당신을 슬프지 않은 눈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날 기억하지 마. 날 경멸하지 마.
수아는 애써 그를 뒤로 하고 카페로 돌아왔다. 직원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아 씨. 괜찮아?”
“네. 괜찮아요.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또 죄송하다는 말을 하게 된다.
“수아 씨가 죄송할 게 뭐 있어. 아까 매니저님도 없어서 많이 당황했겠다…….”
“그 여자가 성격이 개떡 같기로 아주 유명한 여자래. 백화점에 종종 오는데, 올 때마다 아무 직원 하나를 붙잡고 난리를 친다더라고.”
“VVIP라서 백화점 측에서도 내치기는커녕 비위 맞추려고 엄청 노력하다가, 최근에는 너무 갑질을 해대니까 힘들었나 보더라고요.”
수아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저 이제 괜찮아요. 다들 고마워요. 저는 재고 정리하러 창고에 갈게요.”
“너무 힘든 일만 도맡아서 하려고 하지 마.”
“제가 원래 정리하는 거 좋아해서요.”
“그러다 쓰러질라.”
“안 쓰러져요.”
동생 때문에 쓰러지면 안 돼요. 라는 말을 꾹 삼키고 수아는 창고로 움직였다. 웃지 않아도 되니까 재고 정리가 나았다.
한 마디도 못하고 서 있는데, 강이준이 그때 나타날 건 뭐야. 창피해. 그 여자에게 욕을 듣는 것도 싫었지만, 강이준에게 그 모습을 들키는 건 더 싫었다.
정말 등신처럼 보였겠다……. 한 번도 당당한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 어떡하라고.
진상 손님들 중에 간혹 심한 사람이 있다. 며칠을 괴롭히다가 컴플레인을 걸어서 결국 그만두게 만드는 악마들. 종종 보거나 들은 터여서 내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지잉지잉, 폰이 울렸다. 발신번호는 간호사 이현정이었다. 지안이 상태가 나빠졌나? 놀라서 냉큼 통화버튼을 눌렀다.
-언니. 나 지안이.
“아, 난 또…….”
-미안. 바쁜데 전화해서.
“아니. 괜찮아. 왜 전화했어?”
-나 오늘 피검사 수치 300넘어서 아이스크림 먹어도 된대.
“우와. 축하해. 아이스크림 사갈까?”
-응.
“너 또 이름 기억 못 하지?”
-응. 이름은 까먹었어.
“뭔지 설명해 봐.”
-오늘은 무슨 맛이 먹고 싶냐 하면, 입안에서 정신없이 톡톡 튀는데 체리 시럽 조금 들어간 거.
“슈팅수타.”
-맞아. 또 밀크 초콜릿이랑 다크 초콜릿이랑 바삭바삭한 초코볼까지 들어간 거.
“엄마는 지구인.”
-응! 이건 사과 맛인데 민트 맛도 나서 사르르 녹는 거.
“애플민트.”
-응. 그렇게 세 가지. 까먹지 말고 똑바로 사와야 돼.
“알았어. 좀 이따 봐.”
지안의 목소리가 밝았지만 수아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골수이식을 준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 기적적으로 국내에서 기증자를 찾는다면 지안이 수술비용만 천만 원 내외일 거다. 두 번째 골수이식이라 보험 적용이 되는지 의문인데, 그게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타인에게서 이식을 받을 때 채취비만 700만원이다. 채취 비용과 이식 조정비 등등 천만 원 정도가 보험 적용이 안 된다.
그리고 골수이식 후 합병증 예방을 위해 어떤 날은 지안이 치료에 하루 200만원이 든 적이 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주치의가 그때마다 다른 약을 처방하는데, 보험적용이 안 되는 약을 쓸 경우에는 상상도 못하는 비용이 발생한다.
해외에서 골수를 찾을 경우는 나라마다 다르고, 3천만원에서 5천만원 이상의 추가 비용도 들 것이다.
오늘처럼 13시간을 일해서 평소보다 3,4만원 더 버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마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뼈가 부서지도록 일할 수밖에 없다. 투덜거릴 시간도 없다.
그런데도 머릿속은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 강이준은 왜 이곳에 왔을까. 무엇 때문에.
***
“이야~~~! 아이스크림이다!”
지안이 마스크를 내리고 기뻐했다. 별을 박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을 보니 피곤함이 싹 가시는 듯했다.
지안은 2주 가량 호중구 수치가 좋지 않아서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난 지안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기 시작했다.
“배 아프니까 다 먹으면 안 돼.”
“알았어.”
지안은 입가에 크림을 묻힌 줄도 모르고 배시시 웃었다. 행복이 전염되는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 몇 숟가락에 긴 눈이 없어지고 입꼬리가 승천하고 있다. 이렇게 귀여운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아, 톡톡 튀어…….”
지안은 어깨를 달싹달싹 움직이며 팝핑 캔디가 주는 짜릿함을 만끽했다. 문득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해서, 수아는 애달프게 지안을 바라봤다.
엄마가 지안을 임신했을 때 낳지 말라고 끝까지 모진 말을 한 것이, 아이를 아프게 한 것 같다.
엄마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고, 그게 뱃속에 있던 지안에게도 전해진 것이 아닐까. 어젯밤에도 악몽을 꾸었다.
날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수아는 빠른 속력으로 흐르는 강물에 빠져 있었다.
왜 물에 빠졌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정신없이 휩쓸려 가다가 겨우 얇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고, 수아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구해주세요! 사람 살려요~~~! 풉.”
아무도 없었다. 폭포처럼 거대한 물소리가 무서웠다. 힘은 점점 빠져서 곧 나뭇가지를 손에서 놓치고 떠내려 갈 것 같았다.
목구멍까지 물이 차올랐고, 머리를 물 위로 내놓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도 안간힘을 써서 버티며 누구든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살고 싶었다.
그런데 가까운 바위 위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서 점점 드러난 실루엣은 윤지안이었다. 수아는 안도하며 지안을 불렀다.
“어푸, 푸, 지안아! 사람 좀 불러 와! 언니 좀 구해 줘!”
“…….”
“지안아! 윤지안! 아푸, 푸, 언니 물에 빠졌다고!”
“…….”
이상했다. 지안은 아주 침착하게 팔짱을 끼고 수아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수아는 애가 탔다. 몸은 차가워지고, 물살이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겨우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는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지안아! 어푸, 빨리 사람 좀 불러 와! 제발! 언니 죽을 것 같단 말이야!”
“…….”
그때 지안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경멸을 담은 눈동자가 수아를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언니. 엄마 죽일 때 어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