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95)

<25화>

“하, 이건 또 누구야? 뭔데 당신이 끼어들어?”

재력이 있어 보이는 남자가 직원 편을 들자, 여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게다가 힐을 신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이준이 불같이 화를 냈다. 

“여기가 당신 마음에 안 들면 아무나 붙잡고 시비 거는 데야?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면서 화풀이를 하고 있어? 당신 가방이 직원 인권보다 우선이야?”

“아니, 이 사람이 정말! 당신은 이 여자 서방이야, 뭐야!”

“서방이다. 어쩔래!”

“…….”

수아는 얼어붙었다. 호흡도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기세에 여자는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여자는 더 발악했다. 

“감히 이것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아름푸드 사장 딸이야! 로얄 백화점 VVIP회원이라고!”

여자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컸다. 오히려 침착해진 이준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더 잘 됐네. CCTV화면 기사에 뿌리지 뭐. 불매운동 신나게 당해 보던가. 보안 요원!”

“…….”

불매운동이라는 말에 여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국내 굴지의 식품 기업 아름 푸드 창업주의 딸 장민주였다. 

갑질 기업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면 소비자들 눈에 밉상이 된다.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 하면서 무서운 게 없던 민주는 갑자기 아버지가 불호령을 내리면서 해외로 추방시킬까 봐 두려워졌다. 

하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버렸고, 자존심에 바로 꼬리를 내릴 수도 없었다. 보안 요원이 달려왔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민주는 오만하게 굴었다. 

“이 남자 뭐야? 왜 이 따위야? 손님 관리 제대로 안 해?”

민주와는 달리 이준은 차분했다. 

“저기 CCTV 확인하시면 상황 바로 아실 겁니다. 고객관리팀에 연락해주세요, 지금 당장. VVIP 회원 한 사람 영구 제명시켜 달라고요. 카페 직원이 폭행을 당했으니까.”

“영구 제명? 이런 미친! 내가 이 백화점에 돈을 얼마나 뿌리고 있는데!”

민주는 분을 참지 못해 악을 써댔다. 수아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늘 하던 대로 죄송합니다를 연발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어쩌다가 강이준이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안 요원이 세 사람을 고객 관리팀으로 불렀다. 민주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팔짱을 꼈다. 

“나, 아름푸드 사장 딸이에요. 장민주.”

“하.”

이준이 코웃음 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누구다, 라고 떠들고 있는 모양새가 한심했다. 

“이 직원이 날 불편하게 해서 따지고 있는데, 이 남자가 갑자기 끼어들었어요. 잘못된 건 시정하라고 따질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말도 못 해요? 나 정말 불쾌해서 이 백화점 앞으로 못 다닐 것 같은데 어떡할 거예요? 조회해보세요. 나 이 백화점 VVIP니까. 내가 써대는 돈이 얼마큼인지 확인해 봐요.”

소란이 생각보다 커져서, 고객관리팀장과 본부장이 왔다. 본부장이 이준을 알아보더니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 저희 백화점에 어쩐 일이십니까.”

“쇼핑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민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준과 본부장을 번갈아 봤다. 이 사람이 대단한 사람인가? 본부장은 팀장에게 작게 말했다. 

“해진 그룹 강정수 회장님의 차남이십니다.”

“…….”

해진 그룹이 로얄 백화점의 지분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민주는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CCTV 확인 좀 해 주세요. 이 여자가 직원을 폭행했습니다.”

“포, 폭행이라니요.”

민주는 처음으로 이준에게 존댓말을 썼다. 

“밀대를 직원 얼굴에 던진 건 폭행이 아닙니까!”

“…….”

이준이 사납게 으르렁대자 민주는 입술을 꾹 붙였다. 증거자료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노여워하는 얼굴이 떠올라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잠시 후 사건을 들은 아름푸드의 장동철 사장이 고객관리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준을 바꿔달라며 사정했다. 이준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 모드로 바꾼 후 통화를 했다. 

-장민주 아버지 되는 장동철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아이고, 높은 분의 자제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자식 놈을 제대로 못 가르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마땅히 찾아뵙고 사죄 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전화로 용서를 구하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자식 놈 혼쭐을 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한참이나 어린 남자에게 사죄하는 것이 듣기 좋지는 않았다. 민주는 얼굴을 붉히며 혼자 씩씩댔다. 이준은 동철의 사과에 눈도 까딱하지 않았다. 

“헌데 어떡하죠? 이 정도로는 분이 안 풀릴 것 같거든요. 똑같이 따님 얼굴에 걸레를 집어던진다면 모를까 말입니다.”

저 자식이……. 민주가 이준을 확 째려봤다. 

-기사가 나가지 않도록만 해주시면 저희가 직접 찾아뵙고 사과의 말씀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준도 민주를 노려보며 말을 덧붙였다. 

“저한테 사과하실 일이 아니구요. 이건 따님께서 카페 직원 분께 직접 사과하셔야 될 문제 아닙니까? 아버지가 따님 대신 사과를 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따님은 입이 없습니까, 손발이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럼 제 딸 좀 바꿔 주십시오.

이준이 통화하라고 민주에게 눈치를 줬다. 통화내용은 그대로 다 들리는 상태였다. 

“아빠…….”

장동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년이 나가기만 하면 왜 사고를 못 쳐서 안달이야? 등에 부모 업고 지랄 떨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해! 1년 동안 카드 끊어버릴 줄 알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집에 들어오는 즉시 짐 싸서 다시 미국으로 가! 집안에 먹칠하지 말고!

민주는 울먹이는 말투였다. 

“아빠. 내 말 좀 들어 봐……. 이거 엄마가 선물로 준 건데…….”

-가방이 중요해? 정신 차려, 이 썩을 년아! 그 분 화가 풀리도록 제대로 사과해! 이걸로 기사 나가면 넌 죽을 때까지 내 재산 한 푼도 못 쓸 줄 알아! 

전화는 툭 끊어졌다. 민주는 한참 동안 눈치를 보다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내가 경솔했어요.”

“…….”

“정말 미안해요.”

“…….”

일을 크게 키우는 게 싫은 수아는 그녀를 용서할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용서하지 않아도 돼요.”

“…….”

이준 때문에 다급해진 민주는 어쩔 수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생일 선물로 사준 건데, 제일 아끼는 가방이라서 눈이 돌아버렸어요. 무례하게 굴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

돌아가신 엄마의 선물이라는 말이 면죄부가 될 리는 없지만, 수아는 그녀도 엄마가 없구나 싶어 조금은 안쓰러웠다. 모질지 못한 수아는 그녀를 용서했다. 

“네. 알았어요. 이제 괜찮아요…….”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잠시 후 수아와 이준은 고객관리팀을 나왔다. 사실 이준은 무례한 그 여자를 좀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한 수모는 몇 달을 잠 못 이룰 만큼 치욕스러울 텐데, 선처한 수아가 못마땅했다. 본인이 용서한다고 하니, 옆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어서 잠자코 있었을 뿐이었다. 

분이 풀리지 않아서 이준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복도에서 수아가 꾸벅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이런 일에 나서지 마세요.”

이준이 미간을 좁히며 수아를 봤다.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태도. 

“왜요. 당하는 게 재미있습니까.”

“…….”

이준의 말은 가시처럼 뾰족했다. 

“되지도 않는 말로 트집을 잡아서 인신공격을 하는데, 그게 당할 만 했어요?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울 것 같았으면서.”

“…….”

수아는 지금도 울고 싶었다. 창피해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오늘 13시간을 일하고 최저시급인 11만 3천원을 벌어요. 당신처럼 부잣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절대 이해 못해요. 보통 사람들은 고작 이 돈을 벌기 위해 간과 쓸개를 두고 나오거든요. 

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수아는 감정을 추스른 뒤 대답했다. 

“저는 서비스 직종이라서요, 참고 사는 법을 배우는 게 저한테는 훨씬 도움이 돼요.”

“서비스 직종이라고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을 대우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할수록 본인의 위치가 더 낮아진다는 거 모릅니까.”

“그렇다고 화날 때마다 일일이 맞대응할 순 없어요. 일이 더 커지면 결국 저만 손해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냥 지나쳐 주세요.”

“하.”

비웃던 이준이 삐딱하게 되물었다. 

“못 지나치겠다면?”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

“나설 이유라…….”

이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분통이 터진다. 스물둘 밖에 되지 않은 이 여자의 보호자가 되어주고 싶은데, 마땅한 이유가 없다.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고, 잃어버린 기억이 그녀와 확실하게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저 형의 여자를 호시탐탐 넘보는 죽어 마땅한 동생이 아닌가. 난잡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제에 아주 개족보를 만들려고 환장한 놈인 셈이다. 

나설 이유, 그녀의 문제에 나설 이유, 지금으로서는 그 이유가 있을 리 없다. 

그녀가 돌아서는데 가슴속에서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곁에 두어도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없으니, 꿈속에서처럼 사라져버릴까 봐 조바심이 일었다. 결국 그 말을 해버렸다. 

“내가 당신을 안아본 것 같아서 그래.”

“…….”

아프게도 허공을 가르는 이준의 음성에, 수아의 발걸음이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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