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95)

<24화>

“지안이가 자기 언니 등에 빨대를 꽂고 있으니까 언니 얼굴이 어둡지.”

“참 안 됐어. 꽃 같은 나이 아니야? 스물두 살이면…….”

지안은 창밖을 보며 며칠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빨대를 꽂다. 등에 빨대를 꽂다……. 아무리 생각해도 빨아먹는 거다. 내가 언니를 쪽쪽 빨아먹고 있는 거. 

지안은 슬픈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나마 출석 반, 결석 반이라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결석이 훨씬 많아졌다. 

친구들이 내 이름도 잊어버리겠네. 또 사람들한테 주워들은 말이 있는데……. 

“언니 결혼해?”

지안의 소변량을 체크하던 수아가 멈칫했다. 결혼은 미리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언니가 결혼한다는 의미를 잘 모를 거고, 원하는 결혼이 아니라 입 밖에 내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소문이 났을까. 

“……아마도 그럴 거야. 당장은 아니고.”

조금 전 지안은 마지막 토끼 혈청을 맞았고, 지금은 고용량 스테로이드 수액을 맞는 중이었다. 지안은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그럼 나는 누구랑 살아?”

“누구랑 살긴. 언니랑 살지.”

“…….”

시무룩하게 꾹 다물려 있던 지안의 입술이 조금 후에 열렸다. 

“나 때문에 결혼하는 거야?”

“뭐? 누가 그래?”

“…….”

수아가 앙칼진 목소리를 내자, 지안은 눈을 뻐끔하게 뜨면서 입을 닫았다.

“언니가 결혼해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거 없어. 넌 신경 안 써도 돼. 그리고 너 때문에 결혼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날 싫어할 수도 있잖아…….”

“…….”

또 한 마디 했다가 지안은 수아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 같아서 침묵했다. 

친구들도 나를 어려워하는데……. 아픈 애가 옆에 있으면 마음대로 놀지도 못한다. 실수로 어딘가를 툭 치게 되어 다칠까 봐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가 나면 잘 멎지 않으니까. 

수아는 속상한 마음을 다스리며 애써 거짓말을 했다. 

“그 사람은 너 안 싫어해. 오히려 지안이 보고 싶다고 했어.”

“정말?”

“응.”

“…….”

지안은 큰 시름을 놓게 되어서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수아는 지안의 볼록한 이마를 어루만졌다. 

“머리 아픈 건 어때? 열은 없는데.”

“괜찮은 것 같아.”

“아프면서 괜찮다고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런 거짓말은 언니가 화낼 거야.”

“아이구, 무서워라…….”

지안이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수아가 미간을 좁히고 눈에 힘을 줬다. 

“장난치는 거 아니거든?”

“…….”

조그만 아이가 제 몸만 신경 쓰면 될 것을, 어른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괜찮다고 할 때가 있어서 단단히 주의를 줘야만 했다. 그런데 지안이 수아의 손을 잡으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서 미안해…….”

“…….”

지안의 이런 말들이 가슴에 툭툭 돌을 던진다. 수아는 지안의 두 뺨을 만지며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아픈 건 미안한 게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응?”

“…….”

“그리고 언니한테 미안해야 되는 게 아니라, 너한테 미안해야지.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재미있는 걸 배울 시간에 병원에만 있으니까.”

“난 자꾸 언니한테 미안해…….”

“그런 말은 언니가 싫어해.”

눈꼬리가 처진 지안을 보고 있으니 속이 상했다. 수아는 지안을 꼭 껴안았다. 지안의 얇은 손목과 손등에 링거가 꽂히지 않는 날이 올까. 

작은 몸은 그대로지만 마음은 부쩍 자라는 게 보인다. 그 배려가 싫다. 자신의 목숨을 민폐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다. 

그냥 애처럼 투정부리고 떼를 쓰면 좋겠는데 한 번씩 애어른 같은 말을 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우리에게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는 건 아닐까. 아이지만,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이러는 건 아닌가 싶어 예민해진다. 그때 주치의인 김 교수가 들어왔다.

“우리 지안이, 오늘은 어때?”

“괜찮은 것 같아요.”

수아가 조바심을 내며 김 교수를 바라봤다. 

“선생님. 오늘은 호중구 수치 어때요?”

“260. 어제와 비슷합니다.”

“…….”

수아와 지안의 얼굴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호중구는 백혈구의 주성분인데, 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포이다. 

정상 수치는 2천에서 7천. 이 수치가 낮다는 건 백혈구 수가 적어서 면역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호중구 수치가 500이하이면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 

누구는 약물에 바로 반응이 와서 호중구 수치가 1천, 2천이 됐다가 급락하기도 하던데, 제발 오르내리기라도 했으면. 한 줌의 희망이라도 보여줬으면 싶다. 

그런데 지안의 호중구 수치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막막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잠시 후 수아는 김 교수를 따라 나가 복도에서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 약물에 반응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떡하죠?”

김 교수도 지안을 워낙 아끼는 터라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일단 이식 코디네이터에게 조혈모세포 이식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기증자를 찾아보라고 지시해놓았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국내에 없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찾아보고 없으면, 바로 해외에서도 찾아보라고 하겠습니다.”

“네…….”

끔찍한 골수이식. 그마저 유전자 형질이 일치하는 사람이 없어서 절반만 일치하는 수아의 것을 이식했다가 실패했다. 

타인과 유전자가 일치할 확률은 2만분의 1이다. 1년 사이에 지안이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누군가가 골수 기증 서약을 했을까. 기적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야만 했다. 

***

이준은 퇴근하는 길이었다. 차가 정지신호에 서 있을 때마다 손은 습관적으로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만지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기도를 하고 있는 천사의 모습에서 경건하고 절실한 느낌이 전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내 마음도 그러하니까. 

기억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다시 상담을 가봐야 하나. 쓸데없는 짓일 게 뻔하지만 답답해서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다. 

그리고 벌써부터 그녀가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일주일 후에 가족들과의 식사가 잡혀 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려면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신부는 뭐하던 사람이래요?”

“뭐, 카페 직원이라던데. 로얄 백화점 7층에 있다고 했던가.”

갑자기 나희의 말이 떠올랐다. 멀리서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갈까. 갈증이 더 나겠지만 말이다. 이준은 백화점 쪽으로 차를 돌렸다. 

***

수아는 오늘부터 13시간씩 근무하기로 했다. 원래 그렇게 해주지 않는데, 어떻게든 돈을 더 벌어야 했으므로 점장님께 사정을 한 거다. 

손님도 많았고, 일한지 10시간쯤 되니 다리가 붓고 아팠다. 

“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 한 잔이요.”

“네. 알겠습니다. 진동벨로 알려드릴게요.”

수아는 주문을 받고 얼른 커피를 뽑았다. 진동벨을 들고 커피를 가지러 온 그녀에게 수아는 웃으며 말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30초쯤 지났을까. 

“꺄악~~~!”

20대 후반의 그 여자 손님이 소리를 빽 질렀다. 커피를 몽땅 쏟아 바닥은 엉망이었다. 여자는 명품 가방에 묻은 커피를 닦고 있었고, 수아가 밀대를 들고 다가갔다. 

“안 다치셨어요? 이건 제가 닦을 게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 그녀가 수아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야!”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따뜻한 거 달라고 했잖아!”

당황한 수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네. 손님께서 주문하신 대로 나갔는데요…….”

“내가 언제 뜨거운 거라고 얘기했어? 따뜻한 거 달라고 했지! 이건 혀가 델 정도로 뜨거운 거잖아! 내 명품가방 원단 변하면 어쩔 거야!”

그녀는 뜨거운 커피 때문에 가방에 변형이 올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수아의 음성은 자꾸만 작아졌다. 

“……손님. 카페에서는 차가운 음료와 뜨거운 음료 밖에 없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시라고 말씀을 드렸고요…….”

“그럼 내가 개돼지라서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거야? 나 진짜 미치겠네! 이년 때문에!”

“미지근한 음료는 주문할 때 미리 말씀을 해 주셔야 돼요…….”

“그래서 말했잖아! 따뜻한 거 달라고! 네가 말귀를 못 알아 처먹었으면서 왜 내 탓을 해? 이 가방이 얼마짜린 줄 알아? 네가 6개월치 월급을 털어 부어도 못 사는 거란 말이야!”

“……뜨거우니까 조심하시라고 말씀 드렸는데…….”

“이 쓰레기 같은 기집애가 끝까지 말대꾸를 하고 지랄이야!”

여자는 수아가 가지고 온 밀대를 홱 빼앗더니, 밀대의 바닥 걸레 부분을 수아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앗.”

걸레로 따귀를 맞은 것처럼 따끔했다. 수아의 얼굴에 걸레의 물기가 잔뜩 묻었다. 

“여기 점장 나와! 이 기집애 잘라버리라고 할 거야! 점장 어딨어?”

“…….”

답답하게 이런 상황에서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소처럼 일하고도, 누가 욕을 하면 벌벌 떨면서 가만히 있게 되는 내 자신이 너무 싫다. 

화를 내면서 받아치기는커녕 얼굴이 새빨개지고, 무서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쏟을 것만 같았다. 

수아가 얼굴에 묻은 오물을 손등으로 닦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서릿발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얄 백화점 사장 불러줄 테니까 거기서 떠들어대, 이 미친 여자야! 너 같은 건 백화점 출입 아예 못하게 만들 거니까!”

눈앞에 강이준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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