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내게 남은 날들을 모두 버리고 단 3일만 살아도 된다면 말이다.
그는 잠이 든 듯했다. 숨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그의 잠을 깨울까 봐 수아는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호흡도 조심스러웠다.
얼마 후. 잠이 들었을까. 두통이 거의 사라진 것 같았다. 이준은 수아에게 기댔던 고개를 바로 들어올렸다. 수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네…….”
“원래 자주 아파요? 병원에 가서 검진 받아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평소에는 괜찮아요.”
교통사고 이후 가끔 두통이 있긴 했지만,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픈 경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망치로 내려치는 것처럼 끔찍했다.
“무리하지 마시고, 들어가서 쉬셔야 될 것 같아요.”
“…….”
두통이 지나고 나니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에 몸이 열렬하게 반응했다. 함께 있고 싶다는 갈망이 피부를 곤두서게 했다. 이 순간만이 살아 있는 기쁨을 선사한다.
그녀를 기억하든 못하든, 그녀에게 풍덩 빠져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저는 그만 가볼게요…….”
“…….”
수아가 일어섰다. 아쉽지만 붙잡을 구실이 없었다. 이준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수아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아까보다는 빗방울이 굵었다. 뛰고 싶지는 않았기에 빗속을 걸었다. 빗방울이 머리와 마음을 식혀줄 거라는 기대는 어김없이 빗나갔다.
강이준에 관련된 것은 어떤 것도 차가워지지 않는다. 늘 뜨겁고, 설레고, 아찔한 것이 가슴속을 한바탕 휘저어놓는다.
처음으로 느껴본 사랑이라는 감정을 봉인하려니, 숨이 끊어질 만큼 명치가 아팠다.
그런데 몇 걸음을 걷다가 불쑥 손목을 붙잡혔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손목을 감싸는 체온에 화들짝 놀란 수아가 몸을 돌려 이준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빗속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이준의 묵직한 음성이 빗줄기 사이로 또렷하게 전해졌다.
“강서한, 사랑합니까.”
“…….”
이준이 수아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아는 목에 가시가 푹 박히는 것 같았다. 손목을 비틀어 빼낸 뒤 눈을 피하고 대답했다.
“결혼할 거예요.”
“…….”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이준이 되물었다.
“강서한, 정말 좋아합니까.”
“당연한 걸 물어보시네요.”
“그 당연한 걸, 왜 대답을 피합니까.”
“…….”
거짓으로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이어서, 말을 돌린 것이 화근이 됐다. 수아는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그러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저랑 말장난 하고 싶으신가 봐요. 그 사람, 아주 많이 사랑해요. 이제 됐어요?”
“…….”
수아는 눈물이 툭 터질까 봐, 빗속에 그를 세워두고 별장으로 뛰었다. 다시 붙잡힌다면 무슨 말을 해버릴지도 몰랐다.
사랑을 숨기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어서, 스물두 살의 나이가 싫었다. 이십 년쯤 확 나이를 먹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면 지금보다 감정 조절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고,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 파리에서 헤어진 후 강이준을 멀리서 딱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짓궂은 신은 그를 눈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의 기억이 돌아온다면 나를 경멸하겠지. 그러니까 제발 나를 기억하지 마…….
수아는 별장 2층으로 올라왔다. 손님용 빈방에 들어와 혹시나 싶어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살며시 걷었더니, 이준은 그때까지 빗속에 서 있었다. 마치 화석처럼.
2층 빈방에 불이 켜진 것도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쳐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급히 커튼을 닫는 수아의 손끝이 떨렸다. 이준이 붙잡았던 손목에서 자꾸만 온기가 느껴졌다.
수아는 뜨끈한 물에 샤워를 하고,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밤새 심장이 두근거렸다.
***
다음 날. 서한은 눈을 뜨자마자 강 회장을 찾아갔다. 강 회장은 정원에서 골프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어제 술을 마시면서 자금난 문제를 상의하려고 했지만 가족이 다 모인 자리라 아버지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보였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침을 먹고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는 말을 붙여봐야 했다.
“할 말 있어?”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양반이었다. 서한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본론을 꺼냈다.
“2년 동안 부채가 많이 늘어난 상황입니다.”
“그럴 테지. 내놓을 만한 실적이 없었으니.”
“그래서 전환 사채를 2천억 정도 발행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에라이. 뭐가 어째?”
강 회장이 손에 쥐고 있던 골프채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노여움으로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이때만큼은 서한의 목소리도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회사 입장에서는 손실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돈을 빌려 준 투자자들에게 주식으로 대신 갚으려는 것이었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보통은 갑자기 주식 숫자가 많아지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회사의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
“대기업이 쪽팔리게 전환 사채를 써? 은행 문턱이 높은 중소기업들이나 하는 짓을? 그렇게 궁지에 몰렸다는 거야?”
“위기를 잘 극복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고얀놈. 쯧쯧쯧…….”
강 회장은 혀를 차면서 먼 산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녀석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서 내년에는 사장직을 내놓아야 될 수도 있는데, 전환 사채 발행은 더욱 뼈아픈 실책이 될 지도 몰랐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강 회장은 심호흡을 하면서 화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박 실장이랑 상의해보마. 늦어도 다음 주 금요일 안에는 강남 지점장이 전화를 줄 거다.”
어두웠던 서한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못난 자식 끝까지 거둬주셔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명심해.”
“네. 알겠습니다.”
서한은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저 녀석이 언제 앞가림을 하려나. 강 회장에게 서한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제 엄마가 일찍 죽은 후 유모가 부족함 없이 키우긴 했지만, 강 회장은 자식을 방치하다시피 했었다.
부친의 반대 때문에 안나희는 이준을 낳고 몇 년이 지난 후에 겨우 이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때 사춘기였던 서한은 나희의 속을 참 많이도 썩이고, 반항했다.
나이가 들어보니, 자식의 부족한 점은 모두 부모 탓이다. 바로 잡는다는 것이 매번 문제가 드러나면 감싸주기에 급급한 모양새가 되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것이다.
가끔은 시한폭탄 같은 녀석이 부디 살인만은 하고 다니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부모는 살인을 저지른 자식의 허물까지 덮어주고 싶지만, 이것만은 세상이 침묵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강 회장은 씁쓸해져서 한숨을 토해냈다.
***
아침을 간단히 먹은 후 짐을 쌌다. 수아는 짐이랄 것도 없었다. 가방 하나를 들고 별장을 나섰다.
세 대의 차가 각자 서울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서한은 강 회장과 조금 떨어져 나와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중이었고, 나희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수아는 이준과 어색하게 남겨져 있어서 폰을 보는 척했다. 이준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잘 잤어요?”
“…….”
상큼한 향에 깜짝 놀란 수아가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굿모닝 인사를 할 시간도 아닌데, 눈을 뚫어지게 보며 말을 거는 저의가 뭐란 말인가.
이준은 서한과 강 회장에게 시선을 둔 채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난 잘 못 잤어요. 누가 신경 쓰여서.”
“…….”
그 ‘누구’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기에, 수아는 몸이 확 더워졌다. 이쪽으로 사람들이 올까 봐 눈을 열심히 굴려야만 했다.
이준은 차에 오르기 전이라 차키에 달린 열쇠고리를 만지고 있었다. 그 행동이 수아를 더욱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침을 삼킬 수도 없을 만큼 수아는 얼어붙었다.
잠시 후 인사를 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서한의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
“잘 해결 됐어.”
“다행이에요…….”
“뭐, 잘 될 줄 알았지만. 아버지가 자식새끼를 버리기야 하겠어?”
“…….”
수아는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니 어색하게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머릿속은 조금 전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
이준의 신경 쓰인다는 말에, 수아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었다. 곧 남편이 될 사람을 두고, 도련님이 될 남자와 이게 무슨 짓인가…….
강서한이 없다면 충분히 설렐 수 있는 상황이겠지만, 등에 칼이 꽂힐까 두려웠다.
그리고 이준이 만지작거리던 펜던트 열쇠고리……. 납작한 타원에 천사가 기도하는 모습이 새겨진 열쇠고리만 보면 수아는 숨이 막혔다.
그걸 보지는 못했겠지……. 파리에서 열쇠고리와 함께 그 옆에 써둔 쪽지는 읽었을 것이고, 펜던트 안에 있는 진짜 편지는 아직 숨겨져 있을 것이다.
부디 발견되지 않기를. 아니면, 최소한 결혼 후에라도 발견되기를.
펜던트 옆에 움직이는 긴 버튼이 있는데, 그것을 돌리면 타원이 정교하게 반으로 갈라지며 안이 열린다. 그 가운데 틈 사이에 편지를 넣어두었다.
아주 오랜 시간 후에 우리의 추억이 퇴색되어질 즈음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적어도 몇 십 년 후이기를 바랐다. 평생 발견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쓴 것이다.
펜던트가 열린다는 사실은 나도 몇 년 동안 알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가 모르기를.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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