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준이 수아의 턱을 들어올렸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부딪쳤다.
이 여자의 냄새가 눈을 뒤집히게 만든다. 끝없는 욕정을 불러일으키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한다.
사랑을 넘어 중독 같은 감정이다. 내 몸이 부서지도록 너를 원한다……. 어김없이 심장은 찌르르하게 떨렸다. 입술을 집어삼키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느낌이 맞다면 턱 끝에 작은 점이 있을 거다. 턱을 들어 올려야 겨우 보이는 작은 점 말이다. 역시나 예상한 곳에 점이 있다.
“뭐, 뭐하는 거예요?”
“…….”
수아가 이준의 손을 쳐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수아는 경계태세를 취하고 이준을 노려봤다.
키스를 하는 줄 알고 숨이 넘어갈 뻔했다. 숨결이 교차되는 거리였다. 그가 정말 입술을 맞춰왔다면 거부할 수 있었을까. 나쁜 기집애. 미쳤어…….
이준은 어지러웠다. 데자뷰.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느낌은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결국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제발 뭔가가 떠올랐으면 좋겠는데…….
“으윽.”
갑자기 이준이 신음을 안으로 삼키며 비틀거렸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수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걱정했다.
“왜 그래요? 머리 아파요?”
“하.”
“어, 어떡해……. 사람 부를까요? 병원에 갈래요?”
“아니요…….”
“그럼 약 없어요? 약? 갖다 드릴게요. 말만 해요, 얼른…….”
“하아, 저기 세 번째 서랍에 두통약 있어요…….”
“네. 잠시만요.”
수아는 냉큼 뛰어가서 책상 서랍을 뒤졌다. 두통약이 보였다. 물은 어딨지? 아,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물을 한 잔 따르고 약 봉지를 뜯어서 이준에게 다가갈 동안, 이준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너무 아파 보여서 큰 병이 아닌가 걱정이 됐다. 수아는 손을 떨면서 가져온 것들을 건넸다.
“여기 약이요…….”
그가 약과 물을 마신 후 인상을 찡그리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언제쯤 괜찮아지려나. 평소에도 이렇게 아픈 걸까. 시중에 파는 두통약으로 통증이 잡히려나.
그가 턱을 꽉 다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수아는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간 어정쩡하게 서 있던 수아는 그 옆에 엉덩이를 대고 살며시 앉았다. 괜찮아지면 가야 되지 않을까. 계속 아파하면 119를 불러야 하니까.
사람이 아픈 건 정말 싫다. 지겹게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지안이 낮에 사경을 헤매던 날은 밤이 되어야 울 수 있었다. 고통을 1분도 나눠가지지 못하고 가슴만 졸였던 무능력함에 치를 떨면서, 울음마저 방해가 될까 봐 소리 죽여 울었다.
기도는 정말 힘이 있을까……. 그러나 무능력한 나는 언제나 기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도와주세요. 이 사람이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제가 이 사람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게 해 주세요. 부디 저를 이용하시고, 이 사람은 지켜주세요. 제발요…….
“……!!!”
눈을 감고 기도하던 수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어깨에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준이 머리를 기대온 것이다.
그는 아프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가. 아픈 사람을 밀어낼 수는 없는데…….
이준의 관능적인 냄새가 폐부로 깊숙하게 들어왔다. 고개를 조금이라도 돌리면 그의 이마에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파리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
“우읍…….”
이준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수아에게 입을 맞춰왔다.
그와의 키스는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좋았다. 어디서나, 무엇을 하는 중이건 황홀함을 선사했다.
그가 키스를 해올 때면 주변과 분리되면서 고요해졌다. 우리 둘에게만 완벽하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파리 시청에 와 있었다.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빨던 중이어서, 끈적한 크림이 손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응, 아이스크림 녹는데…….”
수아의 말에 이준이 입술을 떼어내며 피식 웃었다. 장난기를 머금은 그의 눈이 반짝였다.
“너, 대답 안 했어.”
수아가 눈을 살짝 흘기며 웃었다.
“와. 양아치다…….”
“뭐가.”
“같이 사는 게, 바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는 한국에 들어가면 같이 살자고 3일째 조르는 중이었다. 그럴 때마다 수아는 웃음으로 무마했다. 결심을 굳힌 이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깐만 기다려.”
“어디 가는데요?”
그는 대답을 해주지 않고, 광장 한가운데로 나갔다. 어디에서 쏟아져 나온 것처럼 사람들이 많았다. 그늘은 적당히 시원했고, 볕 아래는 적당히 따스했다.
찰떡처럼 붙어 있던 그가 잠시만 자리를 떠도 허전했다. 수아는 저 멀리로 가 버린 이준을 바라봤다.
그에게서는 빛이 났다.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에서도 아우라를 발산하는 남자였기에, 매력적인 동양인에게 눈길을 보내는 여자들이 많았다.
이렇게 멋진 남자와 파리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길거리에서 키스를 하고……. 꿈만 같았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하는 짓이 좀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활짝 웃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무슨 일을 벌이는 거야? 궁금했다.
잠시 지켜보던 수아는 이준에게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때 이준과 대화를 하던 서양인 남자가 수아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My name is Peter. Your boy friend…….”
집중해서 들었지만 영어를 잘 하지 못했으므로 간간이 그의 말이 들렸다.
“You're so beautiful…… He says he loves you.”
그렇게 말을 한 후 그는 웃으며 떠났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남자친구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전해달래요. 뭐 이런 뜻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어떤 여자가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프랑스인인 듯했다. 수아를 포근하게 안아주고는 불어로 말했다.
“Vous êtes très belle…… Votre petit ami est génial…… Il vous aime beaucoup…….”
파리로 오기 전에 고등학교 때 배웠던 프랑스 교과서를 몇 번 봐둔 게 다행이었다. 당신은 무척 아름답네요. 남자친구가 당신을 사랑한대요. 조금 전에 들었던 영어와 비슷했다.
그녀가 이준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기에, 이준의 말을 대신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 남자였다.
“Lei è molto bello…… Ti sta amando…….”
일본 여자도 다가왔다.
“あなたは本当に美しいです…… 彼があなたを愛しています.”
그 후 터키, 필리핀, 스웨덴, 브라질 사람들이 다가와서 각국의 언어로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당신의 남자친구가 당신을 무척 사랑한다고 전해달래요. 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 언어라 해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준과 수아가 만난 지 3일 째 되는 날이었다.
이런 게 프러포즈인지는 모르겠지만 쉴 새 없이 전율이 흐를 만큼 행복했다. 감동적인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그건 슬픔의 눈물이기도 했다.
내일이면 그를 떠날 것이다. 나는 행복해지면 안 되니까. 나는 언젠가 나 자신을 죽일 예정이었으므로.
이준이 햇살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멈춘 후 수아를 바라봤다. 눈부신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수아에게 이준의 말을 대신 전해줬던 사람들은 프러포즈의 끝이 궁금해서, 가지도 않고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준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애니. 내가 너한테 첫눈에 반했어.”
“…….”
“미쳤다고, 너한테. 이제 어쩔 거야?”
“…….”
그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나랑 같이 살자. 딱 100년만. 응?”
“…….”
언어가 달라도 프러포즈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행복한 수아의 눈에 눈물이 넘칠 듯 고였다.
주황색 꽃무늬 원피스가 바람결에 나부대서, 수아는 치마 자락을 붙잡고 그를 보며 웃었다. 수아가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당장 그를 껴안고 키스해주고 싶었다.
엄마가 나를 용서해준다면 진심으로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 하지만 엄마는 돌아가셨고,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니 그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으로 남을 남자였다.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박제된다면 좋겠어. 당신의 품안에서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어…….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수아는 턱을 꽉 물고 눈물을 참았다. 이준이 오월의 봄날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애니, 거기 있어. 내가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