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95)

<21화>

이건 뭐지? 소리가 증폭되어서 빗소리와 탱고 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잃어버렸던 파리에서의 기억인가……. 

비가 와서 당황하고 있는 수아에게 내가 다가갔던 것 같다. 윤수아는 작년에 스물한 살이었겠지.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는데 열 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흑심을 품었던가. 나도 강서한과 똑같은 족속일까……. 

타들어가는 벌건 숯을 보고 있으니 몽환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이럴 때마다 몸이 어디 있는지, 흘러가는 시간 속에 갇혀버린 것만 같다. 

***

서한은 강 회장과 와인을 꽤 마신 후 뻗어버렸다. 그와 한 방을 쓰는 게 처음이라 덮치면 어쩌나 며칠 전부터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수아로서는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수아는 방에 불을 끄고 나왔다. 어디에 있어야 될까. 처음 와본 곳이라 잘 알지도 못하겠고, 일단 밖으로 나가 숨이라도 실컷 들이마시고 싶었다. 

수아는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에 불이 켜져 있어서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잘 가꾸어진 예쁜 꽃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낮에는 마음껏 감상하지도 못했는데. 수아는 허리를 숙여 장미향을 흠뻑 맡았다. 

지금은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어?”

상체를 펴다가 별장 옆에 있는 조그마한 건물을 발견했다.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는 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마구간인가? 왜 갑자기 말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는데, 말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안이가 말을 너무 보고 싶어 하니까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다. 

수아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 마구간은 아니었다. 목공소 같다고나 할까. 

나무를 깎고 자르는 절단기가 한쪽에 있었고, 벽에는 망치, 드라이버 등의 공구들이 빼곡했다. 그리고 뒤편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 선반, 액자, 작은 수납장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와…….”

수아가 입을 막으며 감탄을 터뜨렸다. 왼쪽 선반에 미니어처 하우스들을 발견했다. 

누가 만든 걸까. 너무 귀여워서 숨 막히잖아……. 

미니어처 하우스가 5개는 됐다. 가운데 있는 것은 2층짜리 주택 안에 방과 거실, 주방, 다락방까지 알차게 구성되어 있었고, 작은 소품들이 가득했다. 오븐도 있고, 멋진 식탁도 있고, 흔들의자와 인디언 텐트도 있었다. 

누구나 살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집이었다. 몸이 작아져서 이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집 걱정도 없고 좋을 텐데……. 

“진짜 예쁘다…….”

또 감탄하고 있는데, 불쑥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 리모컨 있어요.”

“?”

수아는 난데없이 들린 이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이준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조각처럼 다듬어진 탄탄한 팔 근육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의 은밀한 몸을 잘 알고 있다……. 

“리모컨 누르면 불도 켜져요. 오르골에서 음악도 나오고. 편하게 구경해요.”

“…….”

편하게 구경하라지만 편할 수가 없었다. 이게 강서한의 취미일 리가 없는데 생각 없이 들어와 버린 거다. 

그를 보자마자 냉큼 나가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수아는 쭈뼛거리며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리모컨이었다. 

안에 버튼이 10개는 있는데, 이 작은 버튼을 어떻게 눌러야 할지 참으로 곤란했다. 하나를 누르려고 하면 서너 개가 손끝에 닿았다. 

굳이 말을 걸고 싶진 않은데 궁금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어떻게 눌러야 해요?”

“2층 굴뚝에 보면 작은 침 같은 게 있어요. 바늘처럼 생긴 거.”

“아…….”

수아는 가느다란 침을 빼내서 1층, 2층으로 나누어진 버튼을 하나씩 눌렀다. 

어머나. 거실에 불이 켜졌다. 또 그 옆에 것을 누르니 주방에 불이 들어왔고, 침실도 밝아졌다. 수아는 미니어처 하우스에 진심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또 뭔가를 누르니 오븐이 웽 돌아갔다. 10초 후에 삐 소리가 나더니 오븐 문이 툭 열렸다. 정말 조심스럽게 손톱 끝을 세워 오븐을 열었더니 그 속에서 치킨이 나왔다. 

우와, 이런 게 있다니…….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너무 신기해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정말 말을 걸고 싶진 않은데, 또 말을 걸게 됐다.

“이거 직접 만드신 거예요?”

“네.”

“전부 다요?”

“네. 오래 됐어요.”

수아는 경외의 눈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그 옆에 있는 미니어처 하우스를 구경했다. 

이번에는 동물농장인지 마구간도 있고, 소와 닭도 있었다. 버튼을 누르니까 불이 켜지고, 꼬끼오~ 히이잉~ 하는 소리도 들렸다. 

마구간의 문이 번쩍 열리면서 말이 한 마리 불쑥 튀어나왔다. 아, 깜짝 놀랐잖아……. 키득, 수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천재인가 보다. 이런 걸 손으로 직접 만들다니.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거지? 수아는 재빨리 까만 버튼을 눌러봤다.

이번에는 푸릉, 푸릉, 뿌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말이 응가를 눴다. 신기하게도 눈살을 찌푸릴 만한 냄새가 났다……. 

이것도 만든 거란 말이야? 똥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지? 그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니 말의 응가가 바닥으로 쏙 빠졌다. 배변처리가 된 거다. 대단해…….

우리 지안이가 보면 배꼽 빠지겠다고 웃겠네. 그 선하고 예쁜 웃음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마지막 남은 버튼을 누르니, 아름다운 성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귀여운 닭이 입을 벌리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평화롭고도 완벽한 미니어처 세상이었다. 

우와, 진짜, 진짜 천재다……. 수아는 이준의 뒷모습을 존경스럽게 바라봤다. 

이준은 목공작업 중이었다. 가족들에 대한 원망이 불길처럼 번질 때, 삐딱해진 마음이 누군가에게로 뻗쳐나갈 때, 이곳에 와서 그 작은 것들을 하나씩 만들었다. 

엄청나게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미움을 안으로 삭일 수 있었다. 세상에 없는 물건이다. 

전선을 연결하고, 사용가능한 리모컨을 만들고, 무엇 하나 제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이준은 집에서 쓸 와인 거치대를 만들고 있었다. 각도 절단기로 나무 단면을 좀 더 세밀하게 절단해 나갔다. 사포로 까칠한 면을 다듬으면서 설계도면을 확인했다.

목공은 대단히 섬세한 작업이다. 머릿속이 비워져 간결해진다. 그런데 윤수아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 전동드릴을 쥐고 나사를 박다가 도로 놓았다. 

이준은 미니어처 하우스에 빠져 있는 수아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녀를 마음에만 담아두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강서한과 결혼하기로 했으므로, 그게 옳았다. 그런데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욕심이 난다. 선을 넘고 싶다. 

조금 전 서재에서 엄마 안나희가 말했던 책을 가지고 왔다. 그곳에 윤수아의 사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같은 시기에 같은 도시를 방문했을 뿐인데. 수만 명이 오가는 도시에서 누군가를 스쳐지나간다는 것, 서로를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확률로 치자면 제로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모든 것이 미치도록 설레게 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내가 윤수아에게 첫눈에 반했을 것이다. 저 몸을 안지 않고는 미칠 것 같은 갈증을 느꼈겠지.

원나잇으로 여자에게 빠져들 리가 없다고 자신했건만, 윤수아라면 가능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시간이 멈춰지는 것 같으니까. 

그녀의 숨이 공기 중에 퍼뜨려지는 것만으로도 향긋한 내음에 심장이 움찔거린다. 

그때 수아가 뒤를 돌아 이준을 보며 방긋 웃었다. 수아는 미니어처 하우스 때문에 이준에 대한 경계심이 와르르 무너진 상태였다. 조금 들떠서 재잘거렸다. 

“진짜 대단해요. 이런 건 어디서도 본 적이 없어요. 너무 재미있는 소품이에요.”

“…….”

사랑은 영혼에 타투를 새기는 것처럼 진한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나는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미 사랑하고 있으므로. 

이준이 몇 걸음 다가왔고, 두 사람의 거리는 2미터 정도로 좁혀졌다. 그리고 이준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펼쳐서 탁자 위에 놓았다. 

“프랑스에 갔다 왔었네요?”

“…….”

수아는 그와 불편한 사이였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 타이밍이었다. 정곡을 찔린 수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수아의 눈이 정신없이 굴러다니다가 탁자 위에 펼쳐진 책으로 향했다. 작년 5월 10일. 에펠탑 아래에서 찍은 사진이다. 

출판사에서 인증샷도 보내달라고 했었다. 더 이상의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이준이 사진을 가리키며 보란 듯이 톡톡 쳤다. 

“해외에 나간 적 없다고 했었는데.”

“…….”

“나한테 숨기는 거 있죠?”

“…….”

이준의 취조 같은 질문에, 수아의 숨소리가 가늘어졌다. 

“……아니요. 숨기는 거 없어요.”

“그럼 왜 거짓말 했어요?”

“그냥 약혼식 때 정신이 없어서, 대화를 길게 하지 않으려고 그랬을 거예요. 누가 뭘 물어도 무슨 정신으로 대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나쁜 의도는 없었을 거예요.”

“…….”

“실례했습니다. 이만 나가볼게요.”

이곳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얼굴이 달아오른 수아가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출입문을 향해 움직였다. 묵직한 그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잠깐만. 거기 서요.”

“…….”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멈추라는 명령을 받은 것처럼. 등 뒤로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아는 긴장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이윽고 다가온 이준이 수아 앞에 섰다. 이준의 커다란 손이 수아의 자그마한 얼굴로 올라왔다. 수아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뻣뻣해진 몸은 그를 거부하지도 못했다. 

이준이 수아의 턱을 쥐었다. 그의 싱그러운 숨결이 수아의 입술 근처로 쏟아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