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강 회장이 감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넌 골프를 거의 안 치면서 실력은 그대로구나.”
“운이 좋았어요.”
이준은 그 후 감을 잡고 공을 쭉쭉 홀로 넣었다. 이글과 버디는 흔하게 기록했다.
수아는 골프에 문외한이었지만 조그만 구멍으로 공이 그림처럼 빨려 들어가는 것만은 정말 놀라웠다. 속으로 탄성을 지르고, 작게 박수를 치며 그들을 따라다녔다.
이 넓은 잔디를 유유히 걸어 다니는 그들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대자본가의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수아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분위기가, 그들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오리 주제에 백조들 노는 곳에 낀 것 같아서 스스로가 짐짝 같았다. 9홀을 돈 후 그늘막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수아는 그늘막과 좀 떨어진 곳에서 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이 목소리가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안아. 언니야. 몸은 어때?”
-그냥 그래. 딱히 아프지는 않고. 언니는 뭐했어?
“출장 간다고 했잖아. 여기서도 일했어.”
-커피 만들고 청소하고?
“응. 여기 새로운 커피 가게를 열었거든. 그런데 직원들도 전부 새로 뽑은 사람들이야. 아직 손발이 안 맞아서 허둥댈 수 있으니까 원래 일을 많이 해봤던 사람이 출근해서 도와주는 거지. 문제점이 있으면 고쳐주면서.”
아픈 아이를 떼어놓고 놀러왔다고 할 수는 없어서 거짓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안아, 미안해…….
-우리 언니 힘들겠다.
“병원에 있는 지안이보다는 안 힘들어. 걱정 마.”
-근데 등에 빨대 꽂는 게 뭐야?
“응?”
-내가 언니 등에 빨대 꽂고 있어?
“…….”
잠깐 당황해서 말이 안 나왔다가,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해!”
지안은 화들짝 놀라며 사과했다.
-아, 나쁜 말이구나……. 미안, 못된 말을 배워서.
수아의 음성이 아프게도 흔들렸다.
“누가 그런 말 했어?”
기가 팍 죽어버린 지안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병원 복도에서 들었어. 아는 사람 아니고. 앞으로 그런 말은 안할게…….
“……아니야. 언니가 화내서 미안해. 넌 몰라서 물어본 건데.”
눈물이 핑 돌 만큼 욱한 것 때문에 사과를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지안이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때문에 힘들지?
“하나도 안 힘들어, 하나도. 왜 네가 언니 걱정을 해? 지안이는 지안이 걱정만 하면 되는 거야.”
-알았어. 그럴게. 앗, 간호사 언니 오셨어. 전화 끊을게.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왜 조금 전에 눈물이 날 뻔했을까. 지안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우길 수는 없어서가 아닐까.
수아의 나이는 고작 22살이었다. 곧 나이차가 16살 나는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사랑한다면 나이차가 무슨 문제겠냐마는…….
지안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 내 이기심만 생각해볼 때가 있다.
지안이가 없다면 내가 훨씬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과 동시에 뾰족한 바늘이 온몸을 찌른다.
인간은 한없이 무거우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가벼울 수 있는 존재다. 철저하게 두 얼굴이 필요한 모순 덩어리.
엄마를 그렇게 떠나게 만들었으면서…….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거야. 아니, 꼭 지옥으로 떨어지길 바라, 윤수아.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길 바라.
남은 삶이 길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것마저 욕심이겠지. 이렇게 살다가 죽어. 강서한 옆에서 죽으라고.
***
“프로 골프 선수의 최전성기를 보는 것 같은데요.”
캐디의 극찬 속에서 내기 골프는 이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서한도 잘 쳤지만 완패였다.
“내가 이겼네.”
“……치사한 자식. 계속 골프만 치러 다녔던 거 아니냐?”
“그럴 시간이 있었어야지. 어쨌든 내 마음대로 하면 되지?”
“…….”
윤수아를 형수님이라 부르는 문제에 대해 묻는 거였다. 서한이 삐딱하게 눈썹을 끌어올렸다. 이준은 서한의 어깨를 툭 한 번 건드렸다.
“인상 쓰지 마. 결혼하면 그렇게 부를 테니까.”
“…….”
물론 두 사람이 결혼할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엄마한테 사과해. 아버지가 있을 때 말이야.”
“…….”
이준이 서한을 지나쳐갔다. 어깨를 툭 건드린 손길이 왜 이렇게 재수 없게 느껴지는지, 이가 갈렸다.
서한이 눈을 살벌하게 뜨고 이준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어떻게 하면 저 뻣뻣한 목을 꺾어버릴 수 있을까. 아니, 목을 찔러버리고 싶다.
날카로운 것을 목에 콱 박아서 피가 철철철 흐르는 것을 보고 싶다. 바닥에 고꾸라져서 의식을 잃어가는 것을 동영상이라도 찍어서 제 엄마 나희에게 보여주고 싶다.
점점 화가 난다. 저 자식과 한 판 제대로 붙고 싶은데, 이기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먼저 스칠 때가 있다. 강이준, 저 놈에게만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UFC 챔피언을 먹었던 내가 왜 이렇게 됐나. 주먹으로 세상을 제패했던 내가……. 서한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치익치익~~~ 꽃처럼 아름다운 마블링을 자랑하는 소고기와 커다란 랍스터가 구워지고 있었다.
곧 비가 올 예정이었으므로 비를 피할 수 있는 야외 테라스였다. 나희가 수아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물었다.
“수아야. 랍스터 구워 먹어 봤니?”
“아니요.”
“정말 별미야. 이거 공수해온다고 애 좀 먹었어. 와인은 어때?”
“아, 맛있어요…….”
“그렇지? 몇 년 전에 여행 다니면서 알게 된 분인데, 그 분이 와인 수입하는 회사 회장님이시더라고. 그 분이 해마다 좋은 와인을 선물로 보내주시거든. 이건 샤또 마고 빈티지 한정판이라서 구하려 해도 구할 수가 없는 와인이야.”
“…….”
“그리고 와인 창고에 어마어마한 물건이 하나 있어. 로마네 꽁띠. 세상에서 제일 유명하고 제일 비싼 와인.”
“…….”
“경매 나왔을 때 산 거야.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극도로 적게 생산하는 와인이거든. 희소성이 있으니까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건데, 경매에서 9200만원에 샀어.”
그냥저냥 듣고 있던 수아가 눈을 크게 떴다.
“한 병에요?”
“응. 와인 애호가들이 평생 한 번이라도 먹어보고 싶어 하는 와인이야. 매년 우리나라에 딱 29병만 들어와.”
“…….”
수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1억에 육박하는 와인이라니. 돈으로 집이나 차를 사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마시고 사라지는 와인에 1억을……. 클래스가 틀린 사람들이었다.
“우리 이준이가 결혼해서 색시 데려오면 따려고 아껴두고 있는 거야. 어머.”
나희는 갑자기 제 입을 살짝 막으며 곤란해 했다.
“이런 말 하면 서한이 화낼 것 같은데. 못 들은 걸로 해. 알았지?”
“아, 네.”
“진짜 약속 지켜 줘.”
“네. 알겠습니다.”
너무 비싼 와인과 너무 비싼 음식은 수아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준이 언제 거짓말에 대해 물어올지 몰라서 눈을 마주치기도 겁이 났다.
그는 날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듯한데. 며칠 전에 초면이 확실하다고 너무 강하게 부정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그는 기억을 하지 못하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했으면 됐을 것을.
와인을 두세 잔 마신 서한이 심드렁하게 나희를 바라봤다.
“죄송했어요. 고등학교 때 진주 목걸이 훔친 거.”
“돈이 필요하다 그러면 돈을 줬을 텐데. 왜 그랬니.”
“그 나이 때쯤 다들 그렇지 않나요. 뭘 훔쳐보고 싶고, 탈선을 저지르고 싶고. 아마도 그랬겠죠.”
내기 골프에서 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과한 것이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강 회장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서한이 저지른 사건들을 돈으로 막아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차라리 집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건 그나마 나은 일이었다. 밖으로 새어나갈 일이 없으니까.
그때 비가림막에서 조금 벗어나 있던 수아가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어? 비 온다…….”
수아는 손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톡톡톡, 손바닥을 두드리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이준은 그런 수아의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보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 쏠려 있고, 눈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라면 분명히 사랑에 빠졌을 것 같다. 윤수아라면…….
그러다가 갑자기 이준이 미간을 좁혔다.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현재 수아의 목소리에 이어, 과거 수아의 목소리가 고막 안에서 맑게 울려 퍼졌다.
“어? 비 온다…….”
“같이 와인 한 잔 할래요? 내가 살게요.”
“…….”
“와인 마실 수 있는 나이에요?”
“얼마든지요. 저, 스물 한 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