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혹시 영어 이름이 있습니까.”
“아, 해외에 나간 적이 없어서요. 생각을 안 해 봤어요…….”
그녀가 해외에 나간 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왜, 왜 거짓말을 했을까. 뭘 숨기기 위해서. 그런 것은 숨겨야 될 필요가 없는데.
그렇다면 그녀는 1년 전 프랑스 파리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나는 1년 전에 이탈리아 피렌체를 다녀왔고. 동선이 교차할 가능성이 생겼다.
유럽은 열차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이탈리아에서 스위스, 프랑스로 이동하기가 쉽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준의 맥박이 빨라지고 있었다.
“작년 5월에 다녀온 거 맞지? 5월 10일이라고 사진 날짜도 찍혀 있던데?”
“아, 그걸 보셨네요…….”
더 이상 침묵할 수가 없었다. 수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5월 10일이라……. 이준은 수아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으나, 수아는 이준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듣고 있던 서한이 심드렁하게 질문했다.
“파리에 갔다 왔었어? 나한테 말한 적 없잖아.”
“물은 적도 없어서요…….”
“그랬었나.”
나희는 수아를 추켜세웠다.
“하여튼 수아가 대단해. 그 책이 여행서적 중에는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하거든. 그래서 리뷰 쓴 사람들 엄청 많았을 텐데 수아가 1등으로 뽑혔다니까. 글 솜씨도 좋은가 봐.”
“운이 좋았어요…….”
일과 지안의 병간호에 지쳐 있지만 수아는 가끔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었다. 여행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다른 나라의 땅을 밟는 상상을 하는 것이 수아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러다가 빛나는 프랑스, 라는 책을 읽게 됐다. 좋은 책을 만나면 가끔 출판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벤트에 응모하곤 했는데, 이 책은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1등으로 뽑히면 무려 프랑스 왕복 티켓을 준다고 했다. 출판사에서 이렇게 큰 상품을 걸고 이벤트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수아는 며칠에 걸쳐 꼼꼼하게 리뷰를 써서 이벤트에 응모했다. 그것이 1등으로 뽑힐 줄은 몰랐다.
어쨌든 프랑스에 다녀왔다는 걸 들은 강이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의심하고 있는 걸까. 아, 날 기억하면 안 돼.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수아는 이 얘기를 끝내고 싶었지만 나희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화거리를 만난 거여서 들떠 있었다.
“운이라니? 운만으로 그게 돼? 어림잡아 몇 천 명은 목숨 걸고 리뷰를 썼을 거 아니야. 그 작가가 TV에도 출연한 적이 있어서 책이 얼마나 유명했니? 빛나는 이탈리아, 빛나는 프랑스, 스페인, 핀란드, 나 그 책 다 가지고 있거든. 개정판도 가지고 싶어서 얼마 전에 또 샀는데, 리뷰 뽑힌 사람을 보고 세상에. 이게 누구야……. 나 깜짝 놀랐잖아.”
“…….”
“프랑스에 혼자 갔었어? 어디 둘러 봤니? 아! 너 그림 좋아하니까 루브르 박물관에 갔지? 오르세 미술관도 갔었어?”
“……루브르만 갔다 왔어요…….”
수아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이준은 복잡한 실타래 중에 한 가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윤수아가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루브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유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하나의 의문이 해결됐지만 백 가지 의문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윤수아와 내가 해외에서 만났던 걸까……. 날짜를 확인해야 했다.
그때 책 얘기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서한이 끼어들었다.
“자, 이제 우리 게임 시작할게요.”
“응. 그렇게 해. 나도 모르게 책 얘기가 나와서 말이 많았네.”
진땀을 흘리던 수아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거짓말이 들통났기에, 쫓기는 사람처럼 마음이 초조했다.
곧 강이준, 강서한 두 사람의 내기 골프가 시작됐다. 탁! 골프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엄청난 거리를 날아갔다. 나희가 손뼉까지 치며 칭찬했다.
“우와. 굿샷. 역시 서한이 힘 좋아. 프로들이랑 어울리더니, 진짜 프로가 다 됐네? 비거리로 치면 프로 골퍼들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서한은 기분이 좋았지만 겸손한 척했다.
“뭐 골프가 힘만 좋다고 되나요. 정교해야죠.”
이준도 첫샷을 준비했다. 적당히 자세를 취하다가 부드럽고 힘 있게 스윙을 했다. 탁!
“나이스샷. 이준이도 힘은 만만치 않아. 대단해.”
골프는 집중해야 하는 스포츠인데 이준은 당최 집중이 되지 않았다. 또 조각 하나를 맞춰보려고 머리를 부단히 굴리는 중이었다.
작년에 5월 4일부터 2주간 휴가였다. 유럽을 다녀온 후 사고가 났던 날은 5월 16일. 휴가 끝나기 이틀 전에 귀국 했었다.
언제 비행기를 탔던가. 그걸 알아내야 하는데…….
서한의 두 번째 샷을 위해 다함께 움직이는 와중에 이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신 비서였다. 이준이 조금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신 비서.”
-다음 주 스케줄 조정 때문에요. 다음 주 월요일 10시에 있을 회의를 화요일 10시로 미뤄야 될 것 같습니다.
“왜.”
-연산시 도시 경관 설계팀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환경 단체에서 스포츠 테마거리 특화 사업을 반대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살던 동물들이 터전을 잃는다고 우려하고 있다는데요.
“거기에 살던 동물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한다는 게 우리 생각이잖아.”
-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환경 단체 대표를 비롯해서 몇 분을 저희 사무실로 오시라고 해서, 미팅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시에서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설득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고요.
“알았어. 그렇게 미팅 잡아. 그리고 지금 당장 부탁할 게 있어.”
-네. 말씀하십시오.
자신의 과거 행적을 알 수 있는 루트가 갑자기 떠올랐다.
“골프 중이라 지금 당장 확인을 못해서 그러는데. 내가 이용하는 항공사와 유레일 홈페이지에 로그인해서 작년 5월에 탔던 비행기 편이랑 철도 시간 좀 알려 줘. 아이디랑 비번은 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할 때 쓰는 거랑 똑같아.”
-네. 확인해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사이 서한은 두 번째 샷을 쳤다. 홀에 가깝게 아주 잘 쳤다. 이준도 샷을 치기 위해 움직였다.
재벌가에서 골프는 기본이라 어느 정도 배웠었다. 운동 신경이 좋아서 아마추어 중에서 거의 최고 실력이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땀을 흘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운동이 적성에 맞아서 골프는 거의 손을 놓고 있다 보니, 아직 감이 돌아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머리는 온통 딴 생각 중이었고.
탁! 이준의 두 번째 샷이 이상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어떡하니…….”
나희가 안타까워했고, 서한은 깔깔 웃었다.
“벙커에 빠졌네? 강이준,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하하하.”
“…….”
“하프 라운드만 할까? 아니다. 지금부터 수아한테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겠어?”
“…….”
서한이 이죽거렸다. 이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 비서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 윤수아와 여행 루트에서 교차점이 있을까.
서한의 차례가 되어 이동하는 중에, 신 비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준은 따로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유레일은 타신 적 없습니다.
“열차는 타지 않았다고?”
-네. 비행기 편으로만 움직이셨습니다. 저한테는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둘러보겠다고 하셨는데요, 아마도 고민하다가 마음이 바뀌셨었나 봅니다.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 5월 9일 파리 기준 17시 20분에 내리셨습니다.
“…….”
가슴이 두근거렸다. 파리에 갔었단 말이지……. 꿈속에서 본 곳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광장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 시청이었던 거다.
-그리고 파리에 갈 때, 한국으로 돌아올 때, 딱 두 번만 비행기를 이용하셨고요. 프랑스 국내선이나 열차를 타지 않으신 걸로 봐서 거의 파리에만 계셨거나, 그 근처만 다니신 것 같습니다.
온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알았어. 수고했어.”
이준은 전화를 끊었다. 윤수아가 에펠탑에서 찍은 사진이 5월 10일이고, 나는 5월 9일에 파리에 도착했다. 확실한 접점이 생겼다.
그리고 이 도시 저 도시를 꽤 다녀보는 편인데, 파리에만 거의 있었다면 마음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게 윤수아일까…….
“와. 나이스샷. 홀에 가까워졌는데?”
서한의 샷이 이번에도 좋았다. 이준의 차례였다. 이준은 모래에 빠져 있는 공을 치기 위해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이준이가 공을 칠 때마다 맞바람이 심하게 부네. 바람이 내 편인가.”
서한의 비아냥에, 이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드라이브 탄도를 조절해야지.”
“하. 어디 한 번 해 봐.”
바람의 방향과 속도에 따라 공의 궤도를 달리하여 샷을 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맞바람이 거세었다. 티를 낮게 꽂고, 스윙의 거의 최저점에 공을 맞춰야 했다. 총알처럼 바람을 뚫는 낮은 궤도를 만들어야 맞바람에 맞서면서 날아간다. 홀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꽤 멀었다.
수아가 골프채를 쥐고 공을 치기 위해 준비하는 이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아의 시선에, 이준의 몸은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도시 파리. 여행하고 싶은 도시 1위로 꼽히는 파리에서 우리가 만났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가능성은…….
탁! 모래알이 허공에 흩날리면서 공이 낮은 궤도로 뻗어나갔다.
“우와……. 어머나, 강이준! 퍼펙트 샷!”
나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준이 벙커에서 홀로, 공을 바로 꽂아 넣은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