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서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 했다. 아랫입술이 불량스럽게 달싹거렸다.
서한의 끓어오르는 냄비근성을 자극하는 건 상당히 재미있었다. 이준은 건들거리며 말을 살짝 바꾸었다.
“뭐, 죽을 때까지는 아니고. 내가 이기면 그 호칭은 내가 부르고 싶을 때 부를게. 알다시피, 성격이 뻣뻣해서.”
“…….”
서한은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나희는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대화를 지켜보고 있자니, 간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수아는 어때? 누가 이길 것 같아?”
“……글쎄요. 저는 두 분 다 골프 치시는 걸 못 봐서요…….”
“음, 이준이는 거의 골프 안 칠 걸? 난 서한이가 이기는 쪽으로 걸어야겠네.”
나희는 싸늘한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난생 처음 서한의 편을 들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유치한 내기는 처음인데. 어때? 하는 거야?”
서한은 이미 승부욕에 절어 있었다.
“하죠 뭐.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내기 골프. 내가 이기면 당장 수아한테 형수님이라 불러.”
이준도 냉큼 대답했다.
“그래. 근데 내가 이기면 그 호칭은 부르고 싶을 때 부를게. 아, 그리고.”
“?”
“엄마한테 사과해.”
“…….”
서한이 또 눈을 부라렸다. 설마 안나희에게 성추행에 해당되는 말을 한 것을 들먹이려는 건가. 바로 옆에 수아가 있는데. 이 개새끼를…….
이준은 서한의 불안함을 짐작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때 말이야. 엄마 목걸이 훔쳐가서 술값으로 쓴 적 있잖아.”
나희가 눈에 빡 힘을 줬다.
“뭐? 내 진주 목걸이? 그때 서한이가 가져간 거였어? 난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
짐작하던 바가 아니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이것도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서한이 눈썹을 구기며 이준을 째려봤다. 이준은 여유롭게 말을 덧붙였다.
“많이 늦긴 했는데, 그거 사과하라고.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
“어쩔래. 할 거야?”
“…….”
짜증이 나서 이 자식을 갈아 마셔버리고 싶었다. 서한이 입으로 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휭 날렸다. 여러 번 앞머리가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미 도둑놈이 되어 버린 데다, 먼저 내기 골프 제안을 했으니 이제 와서 물러서기도 애매했다. 이기면 된다. 질 리가 없다.
“알았어.”
“오케이.”
이준은 서한의 눈을 또렷이 보며 약을 올리듯 슬며시 웃었다. 죽을 때까지 윤수아를 형수님이라고 부를 일은 없을 거다. 죽을힘을 다해 이길 거니까.
나희는 별장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불러올게. 뒤뜰에 계실 거야.”
또 어색하게 세 사람만 남겨졌다. 만나자마자 이러고 있으니, 수아는 땅으로 꺼지고만 싶었다.
강서한과 결혼하기로 한 마당에 강이준을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아직은 아버님, 어머님이라는 호칭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서한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살갑게 굴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수아는 자꾸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잠시 후 별장 앞에 다섯 사람이 모였다. 나희가 수아의 옷차림을 아래위로 훑었다.
“수아는 골프 웨어 없어?”
“…….”
청바지는 안 될 것 같고, 적당히 몸에 붙는 흰 바지와 반팔티를 입었는데 골프웨어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나 보다. 역시나 서한이 미간을 좁히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거봐. 옷 사러 가라고 했지.”
“…….”
난감해진 수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때 나희가 수아의 팔을 붙잡고 별장 안으로 이끌었다.
“수아야, 내거 빌려줄게. 안으로 들어가자. 골프 칠 때는 골프 웨어를 입어줘야 해. 꼭 패션으로만 입는 게 아니거든.”
도리어 강 회장이 나희를 가로막았다.
“남의 옷은 더 불편할 수도 있어.”
“어머. 제가 남인가요? 이제 시어머닌데?”
“사이즈도 안 맞을 거야. 다음부터 골프 웨어 입고 오라고 하면 되지.”
“골프 초보들이 더 골프 웨어를 입어야 된다는 거 몰라요? 기능성 옷을 입어 줘야 배우는 것도 빨리 는다구요.”
수아는 자신의 옷 때문에 또 왈가왈부하는 게 싫었다. 차라리 투명인간 취급을 하면 숨이라도 제대로 쉴 텐데……. 보다 못한 이준이 언성을 높였다.
“옷 잘 입는다고 골프 잘 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본인 하고 싶은 대로 두면 어디가 덧납니까.”
“…….”
이준의 말 한 마디에 대충 상황은 정리됐다. 다른 사람들은 표정관리를 했지만 수아는 울적하고 창피했다. 그나마 이준이 논란을 빨리 종식시켜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곧 다섯 사람은 필드 위에 섰다. 관리가 잘 된 싱그러운 잔디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드넓은 자연을 소유한 것처럼 느껴져서, 골프는 부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골프 웨어를 입은 강이준은 영앤리치의 표본 같았다. 그의 우월한 핏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골프를 잘 모르는 수아의 눈에는 이준의 연습 스윙마저 완벽하게 보였다. 샷을 치기 전 백스윙 동작부터 유려하게 회전하는 자세까지 군더더기 없었다. 실제로 기술과 힘이 좋아 장타를 쭉쭉 뽑아냈다.
“윤수아. 이리와 봐.”
“……네.”
서한의 부름에, 수아는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골프 그립을 이렇게 잡아 봐. 세 손가락을 그립에 걸고, 엄지와 검지는 살짝 걸쳐.”
“……이렇게요?”
“그렇지.”
딱히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거절할 핑계도 마땅치 않았다. 참여하는 시늉이라도 보여야 했다.
그런데 서한이 수아의 자세를 잡아주려다 보니, 뒤에서 수아를 안은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 이렇게 잡고. 엉덩이를 조금 뒤로 빼자. 척추가 40도에서 45도쯤 되도록 숙여야 해.”
수아는 서한의 스킨십이 싫었다. 언제나 서한과는 조금도 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했다.
“무릎을 약간 구부려서 균형을 맞춰. 엉덩이와 배에 힘 넣어. 코어의 힘이 중요하니까 잘 버티고.”
생각보다 쉽지도 않았다. 자세를 잡아준답시고 서한이 엉덩이와 배에 손을 대서, 수아는 깜짝깜짝 놀랐다.
“스윙자세가 좋아야 임팩트가 좋아. 공을 잘 때려 맞춘단 소리야. 백스윙이 뒤로 처지면 안 돼.”
아씨, 돌겠네. 진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이준의 눈이 매우 사나웠다.
분명히 강서한의 여자인데, 내 여자를 강서한이 성추행하고 있는 것처럼 아주 미쳐버릴 것 같다.
골프채로 강서한의 머리를 박살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이준은 씨근덕거리는 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째려보고 있었다.
“윤수아, 어딜 봐. 왼쪽 다리에 체중을 실어야지.”
그러다가 수아와 이준의 눈이 마주쳤다. 수아는 괜히 불에 덴 것처럼 뜨끔했다.
이준은 눈길을 거두지도,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머릿속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이 꼴을 보려고 춘천에 왔을까. 안 왔어야 했는데……. 몰래 짝사랑하겠다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그게 안 되고 있잖아, 젠장…….
강이준이 불편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와중에, 수아는 서한이 시키는 대로 골프채를 몇 번 휘둘렀다. 역시나 잘 되지 않았다.
골프채 헤드 부분에 작은 공을 맞추는 것도 어려운데 아주 잘 맞춰야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멀리 날아갔다.
심심풀이로 한두 번 해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운동이었다. 나희와 강 회장이 옆에서 대화를 나눴다.
“지금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저녁에는 비가 온다죠?”
“비가 오는 날 바비큐도 좋지.”
“더 운치 있죠. 오늘은 무슨 와인을 따는 게 좋을까요?”
“글쎄.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따.”
두세 번 스윙을 해본 서한이 어깨를 쫙 펴며 이준을 불렀다.
“강이준. 이 정도면 대충 몸은 풀지 않았어? 이제 시작해볼까?”
그때 갑자기 나희가 끼어들었다.
“아참! 나 수아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수아가 의문스럽게 나희를 바라봤다.
“수아야. 너 작년에 프랑스에 갔다 왔지?”
“…….”
수아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프랑스에 가본 적 있느냐가 아니고, 갔다 왔지? 라고 묻고 있었다. 쉽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확실하게 알아낸 건지, 대충의 짐작인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수아는 식은땀이 나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이준은 당황한 수아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이 서 있는 이준의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굴러갔다. 분명히 그녀는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 이게 뭐지?
나희는 맞췄다고 확신하며 웃었다.
“빛나는 프랑스. 그 책 리뷰, 너 맞지? 작년에 너 리뷰 쓴 거 1등으로 뽑혀서 프랑스 왕복 티켓 받았던데? 개정판에 네 리뷰랑, 사진도 조그맣게 나와 있더라. 에펠탑에서 찍은 거 말이야. 긴가 민가 했는데 너 맞구나.”
“…….”
“내가 여행 서적이랑 미술 서적은 자주 읽거든.”
“…….”
기적처럼 생긴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의 출처를, 나희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수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준은 수아의 뺨이 굳어지고 입술 끝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꿈이 현실로 스며드는 기묘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