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하아, 하…….”
이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꿈이었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무의식 속에 있던 불안함이 튀어나온 건가, 아니면 예지몽인가…….
이준은 상체를 일으킨 후 꿈에서 찔렸던 목을 만졌다. 인간은 자신이 죽어갈 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다. 목에 흉기가 쿡 박히는 순간 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특히 경동맥은 급소라서 찔리면 저항해볼 수가 없다. 고꾸라진 후 보통 10초 안에 죽는다. 뜨거운 피가 뿜어지던 느낌이 생생했다.
이준은 커피를 진하게 내리고 창가에 섰다. 헐떡거리던 자신의 숨소리가 귓가에 박힌 것처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강서한과 약혼을 한 상태이고, 곧 결혼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 꿈이 실제이든 환상이든, 내 감정을 앞세워 그녀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안 보는 게 맞다. 춘천에도 가지 말아야 하고, 집안일에 발을 끊는 게 가장 좋다. 결론은 나 있지만 자꾸 시계를 보게 됐다. 춘천에 가기 위해 9시 전에 출발하려 했는데.
트레이닝 룸에서 한 시간 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운동을 해도 기분 나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찬물에 샤워를 하면서도 머릿속은 윤수아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 그녀와 함께 몸을 맞대고 있었을 때. 휘몰아치던 심장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녀도 함께 폭풍 속에 놓여 있었던 거다. 어쩌면 그때 죽는 것쯤은 이미 각오 했는지도 모르겠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은 후 이준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차키를 만지작거렸다.
도저히 심장과 머리가 그녀에게로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면, 그녀를 몰래 짝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괜찮지 않을까. 조용히 나 혼자 그녀를 바라볼 수 있다면 말이다.
결국 예지몽일지 모르는 꿈도 마음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준은 꿈에서 노끈을 감았던 손으로 차키를 쥐고, 집을 나섰다.
***
-아이 쌍년아. 입금이 안 됐잖아, 입금이!
고함소리에, 수아는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발이 벌벌 떨렸다.
“죄, 죄송합니다. 3일만 시간을 주세요…….”
-얼굴에 칼빵, 담배빵으로 구멍을 숭숭 뚫어놔야 정신 차릴래? 가랑이 벌려서 돈 버는 게 제일 빠르다니까 왜 말을 안 들어 처먹어, 이 년아!
“3일 후에 입금할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3일 후에 입금 안 되면 카페로 찾아가서 다 엎어버릴 거야. 네 년 머리채를 잡고 백화점을 한 바퀴 돌 거니까 그렇게 알아, 이 쌍년아!
전화는 무자비하게 끊겼다. 사채업자로부터의 전화를 받으면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눈물이 툭 터질 것 같았다.
“누구 전화야?”
등 뒤로 다가온 서한이 물었다.
“아, 별 거 아니에요…….”
춘천으로 가는 도중 휴게소에 잠시 들른 거였다. 수아는 얼른 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미안하지만 춘천을 다녀온 후 그에게서 받은 것들을 하나씩 팔아야 될 것 같았다.
“얼굴이 사색이 됐는데? 동생 때문이야?”
“아니요. 동생은 괜찮대요. 저도 괜찮은데요?”
수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서 아무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 동생 병원비를 위해서 노력하라는 강서한에게 사채 얘기를 꺼낼 수는 없다. 기대는 것도 옳지 못하고. 정말 신장이라도 하나 팔아서 끝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
수아의 근심과는 달리 날은 화창했다. 세 시간쯤 달려 춘천 별장에 도착했다.
주변의 경치와 어우러진 현대식 별장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정말 동화 속에 발을 내딛는 것처럼 고요하면서도 멋스러웠다.
수아가 인공 연못 속에 사는 붕어들을 보고 있는데, 두 사람을 발견한 나희가 다가왔다.
“어머. 수아랑 서한이 왔네.”
“어때? 여기 오니까 좋지? 공기도 좋고?”
서한은 고개를 까딱거려 인사했고, 수아가 대답했다.
“네. 정말 멋진 별장이네요.”
“내가 이곳에 애정이 많거든. 철마다 지시를 내려. 사람 안 사는 티가 나지 않도록 구석구석 손 보라고 말이야. 안 그럼 금세 거미줄 생기고, 해충들 천지라니까.”
나희는 신이 나서 자랑했다.
“피카소 작품도 있어. 좀 이따 보여줄게.”
수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피카소요?”
“응. 피카소가 엄청나게 다작했잖아. 입체파 화풍의 초창기 작품인데 하여튼 겨우 구했다니까. 7,8년 전에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에 실패했거든. 근데 작년에 도쿄 경매에 나온 거야. 얼마나 치열했는지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손에 땀이 나.”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으로 오는 차가 보였다. 수아는 괜스레 불안했다. 강이준이 진짜 올까. 그를 기다리는 마음인지,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인지 이제는 모르겠다.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99였는데, 그를 옆에서 훔쳐보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 1이 무섭게 증식되어 99를 덮어버린 것일지도.
“수아야. 색채의 마술사 구스타프 클림트, 알지?”
나희는 아직 차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아, 네.”
“그 그림을 하나 가지고 싶어서 병이 나는 거 있지……. 최고로 인기 있는 그림은 1700억에 거래된다나.”
그때 나희가 차를 발견했다.
“어? 이준이 차네? 오기로 한 거였어?”
“…….”
나희는 환하게 웃었고, 수아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준이 차에서 내렸다.
주말이라 슈트가 아닌 편한 옷차림이었다. 슈트를 입은 그가 상위 1%의 비즈니스맨 같았다면 지금은 캐쥬얼 브랜드의 모델 같았다.
훤칠한 키와 체격을 가졌는데, 미소년의 느낌도 물씬 풍겼다. 파리에서처럼 말이다. 웃음이 귀에 걸린 나희는 다가가 이준의 팔을 붙들었다.
“말을 하고 오지 그랬어. 안 오는 줄 알았네.”
“주말에 할 일이 없어서요.”
서한이 약간은 빈정대며 인사했다.
“정말 자주 본다. 거참, 희한한 일이야.”
“그러게.”
“사람이 너무 확 바뀌면 죽는다잖아. 돌연사 조심해.”
서한의 말에, 나희는 인상이 확 찌그러질 뻔했지만 겨우 표정관리를 했다.
“서한아. 죽는다는 농담까지 하고 그러니. 소름 돋잖아.”
“맞잖아요. 몇 년간 집에 발을 끊었던 녀석인데, 이렇게 부지런히 집 문턱을 드나들다니.”
그때까지도 이준과 수아는 서로를 보고도 못 본 것처럼 데면데면하게 있었다.
“인사 좀 해라. 아무리 안 친하다지만 형수를 본체만체 하냐.”
“…….”
이준이 무심한 듯 수아에게 눈길을 던졌다. 시선을 확 꽂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잘 지냈어요?”
“안녕하세요…….”
수아가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대답했다. 서한은 또 놀리고 싶어졌다.
“우리 수아, 또 당황했어? 끝까지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강이준이 와서? 푸하하.”
나희는 눈을 살짝 흘기며 수아에게 물었다.
“어머. 수아야. 진짜 그랬니?”
“…….”
수아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입술을 꾹 붙이고 있었다.
“말이라도, 도련님 자주 뵙자고 해 좀. 이준이도 붙임성 없는데 너까지 그래야 되겠니.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가까이 지내 봐.”
그런 일은 물 건너갔다는 듯 서한이 코웃음 쳤다.
“두 사람 절대 도련님, 형수님이라고 부를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준이는 무뚝뚝하고, 수아는 붙임성이 없고.”
“그래도 수아가 서한이 너와 결혼할 사인데, 그러는 게 아니지. 이제 가족인데 호칭이 얼마나 중요하니. 수아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네, 라고 수아가 대답하려는데, 서한은 나희가 괜히 수아한테만 그러는 것도 듣기 싫었다. 서한은 수아에게 대답하지 말라고 눈짓을 줬다.
“수아한테만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죠. 수아는 아직 어려요. 이준이가 나이가 많으니까, 좀 더 어른스럽게 굴어야죠. 이준이가 먼저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
이준은 대답이 없었다. 호칭 때문에 나희와 서한이 실랑이를 하거나 말거나 트렁크에서 골프 가방을 꺼냈다.
서한은 그런 이준을 괘씸하게 보고 있었다. 강이준과 윤수아, 두 사람이 친해지는 것도 꼴 보기 싫겠지만, 지금처럼 이준이 수아에게 형수라고 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여자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건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성격 탓이라 해도, 녀석이 마지못해 형수라고 부르는 걸 보면 기분이 조금 좋아질 것 같기도 했다.
녀석이 싫어하는 것을 굳이 시키고 싶은 놀부 심보였다. 서한은 골프를 꾸준히 치고 있어서, 골프는 자신이 있었다.
운동신경을 타고 났기에 프로골퍼가 아니라면 지지 않는다. 내기는 더더욱. 서한이 이준 앞을 가로막고 섰다.
“나랑 한 판 붙어야지?”
“…….”
골프 가방을 어깨에 둘러맨 이준이 서한의 눈을 못마땅하게 응시했다. 서한의 입가에 삐딱한 웃음이 걸렸다.
“내기 한 판 하자. 내가 이기면 오늘부터 수아한테 당장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걸로. 어때?”
“…….”
형수님. 죽어도 싫다. 죽어도……. 속으로 으르렁대던 이준은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내가 이기면, 그 호칭 죽을 때까지 안 써도 되나?”
“…….”
도발이었다. 순간 서한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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