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달도 구름 속에 가려져서 칠흑처럼 어두웠다. 모든 사물의 실루엣이 흐릿하고 공기마저 음습했다.
오직 시뻘게져 있는 이준의 눈만이 비현실적으로 빛났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남자로서 쓸 만해? 아줌마의 신음소리는 얼마나 쌔끈할까.”
“아줌마. 내 앞에서 그런 표정 짓지 마. 발정나겠어.”
“내가 아버지 침실에서 떡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 아줌마가 집을 비웠을 때 말이야.”
그 개자식의 혓바닥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만 궁리한 적이 있다.
손목을 칼로 그어서 자살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던가. 덜 아프고 확실한 방법으로 죽고 싶으니까 말이다.
일단 손목을 칼로 그으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너무 아파서 손목을 붙잡고 미친놈처럼 방을 뛰어다니게 되는데, 빨리 죽지도 않을뿐더러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고통스럽다고 했다.
자고 있을 때 강서한의 손목을 그어 버릴까. 가장 많이 생각했던 방법이었다.
한 번 덤벼들었다가 강서한에게 죽도록 맞은 후 운동을 시작했다. 태풍이 와도 운동을 거르지 않았다. 지금은 주먹으로는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강서한은 전성기 때 187센티미터에 92킬로그램이었다. 이준의 키는 서한과 똑같고, 몸무게는 87킬로그램이다.
운동선수처럼 하루에 10시간씩 운동을 할 수 없으니 더 이상 몸을 불리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강서한의 경기 영상을 수천 번은 재생시켜 봤다. 질 리가 없다.
이준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꽤 오랜만이었다. 뿌연 연기를 들이마시니, 빈속에 술을 몇 잔 마시는 것처럼 알싸한 느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뻗어 나갔다. 나쁘지 않았다.
곧 어둠을 뚫고 고급 외제차 한 대가 도착했다. 이준은 강한 헤드라이트 불빛에 미간을 찡그렸다. 몸은 긴장으로 탄탄해졌다.
헤드라이트가 꺼진 후 서한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서한의 손에는 쇠 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왜 사람도 잘 안 다니는 곳에 나를 불렀냐. 죽이게?”
“하.”
이준이 실소를 터뜨렸다. 역시 으슥한 곳에 불러낸 이유를 눈치 챈 거다.
“맨손으론 자신 없나 봐?”
“네가 뭘 들고 왔을지 모르니까 혹시나 해서 가지고 온 거야.”
“보시다시피 맨손이야.”
저녁 늦게까지 온 비 때문에 땅이 질척댔다. 격투기의 기술 같은 것들이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난타전에 힘과 체력으로 승부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서한이 입매를 삐딱하게 만들며 눈에 살기를 드러냈다.
“나를 죽이려는 이유나 물어보자. 아니다. 이유를 알 것 같으니까.”
“…….”
“어릴 때부터 나를 죽이고 싶어 했을 거야. 네 엄마 때문에. 그지?”
“…….”
서한은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윤수아 때문에.”
“…….”
서한을 노려보는 이준의 눈동자가 강렬해졌다.
“네가 윤수아를 좋아하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나를 죽이고 싶은 거잖아.”
“…….”
정확했다. 이준이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네가 죽어야 수아가 살 수 있으니까.”
“하.”
너, 라는 단어가 서한을 빈정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형이라는 말을 하기 싫어서 어떻게 견뎠을까. 씨발…….”
“이 순간을 위해서 참았지.”
서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준이 주먹을 꽉 쥐며 서한을 노려봤다.
“그런 식으로 수아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됐어. 그러니까 네가 죽어줘야겠어. 수아를 위해서.”
“미친 새끼. 개소리는 저승에서 지껄여!”
서한이 이준의 머리를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빛에 반사된 쇠가 번뜩였다. 이준은 상체를 가볍게 뒤로 젖히며 피했다.
“넌 나한테 한 주먹거리도 안 돼, 이 새끼야!”
흥분한 서한이 쇠파이프를 여러 방향으로 휘둘렀다. 휘익, 휘익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서한의 몸은 중심이동이 느렸다. 바닥이 질퍽거려서 움직임을 크게 취할수록 몸의 반동이 커서 빈틈이 많았다.
이준이 옆구리로 들어온 쇠파이프를 피하며 발로 차버렸고, 그것은 땅에 힘없이 떨어졌다.
“오늘 죽어야 될 놈은 강이준 너야, 씨발!”
서한이 킥으로 가슴을 찍으며 들어올 때 이준은 충격을 받아내며 서한의 발을 붙잡고 뒤로 밀어붙였다. 한 발로 뒷걸음질 치던 서한이 뒤로 벌렁 넘어졌다.
이준이 서한의 몸 위에 날쌔게 올라타서 주먹으로 연타를 날렸다.
“앗! 악! 윽! 윽!”
서한이 가드를 세워 얼굴을 막으며 버텼지만 무자비한 핵주먹에 눈썹이 찢어지고 코피가 줄줄 터졌다.
앞이 잘 보이지 않던 서한은 남은 힘을 쥐어짜 이준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며 기술을 걸었다. 이미 힘이 많이 빠진 상태여서 기술은 제대로 걸리지도 않았다.
이준은 서한의 오른 팔을 관절 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꺾어 부러뜨렸다. 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으으윽…….”
서한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생각보다 싸움은 훨씬 빨리 끝났다. 딱히 짜릿한 쾌감은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이 역겨울 뿐이었다.
이준은 숨을 고르며 준비해온 굵은 노끈을 뒷주머니에서 꺼냈다. 직접 손으로 목을 조르고 싶진 않았으므로 노끈을 챙겨왔다.
값싼 동정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됐다. 그럼 또 수아가 위험해진다. 이준이 제 손에 노끈을 한 바퀴 감으며 차갑게 말했다.
“죽어.”
“하아…… 풉.”
얼굴이 피떡이 된 서한이 난데없이 큭큭 웃기 시작했다. 갈비뼈가 두세 대 부서졌을 것이다. 큭큭거리며 상체를 들썩이는데 꽤 아픈 것 같았다.
그런데도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서한은 계속 웃었다. 사형수에게도 마지막 말을 할 기회를 주는 법이니 기다려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습한 공기에서 매캐한 냄새가 났다. 달은 보이지 않았다. 시꺼먼 구름만 덩치를 키워가고 있는데 이 기괴한 상황에서도 이준은 수아가 보고 싶었다. 아주 간절하게.
“아하하하…….”
정신병자처럼 한참 웃던 서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회한의 눈물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눈물 때문에 이준이 마음을 바꿀 리는 없었다. 안쓰럽지도 않았다. 그런데 서한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윤수아. 임신했어.”
“…….”
이준의 동공이 멈췄다. 갑자기 주변이 암흑으로 바뀌는 듯했다.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머리는 멍했다. 귀에서는 이명이 들렸다.
“……뭐라고?”
“10주 됐어.”
이준은 울분을 토해내듯 숨을 내뱉었다.
“씨발……. 그런데도 수아를 팼어?”
“그게, 이준아…….”
서한이 아파서 인상을 온통 구기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두 무릎으로 기어와서 멀쩡한 왼쪽 팔로 이준의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그땐 몰랐어, 정말. 그러니까 이준아 부탁 좀 하자. 나 좀 살려주라…….”
“…….”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줘. 제발……. 내가 이렇게 빌게. 내가 지금부터 수아한테 잘할게. 수아는 애 반드시 낳을 거야. 알잖아. 수아 착한 거……. 흑흑흑. 수아가 혼자 아이를 키우게 할 수는 없어…….”
“…….”
서한은 피와 눈물이 범벅이 되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러진 오른팔은 덜렁거렸고, 서한은 신음을 참아내며 움직일 수 있는 왼쪽 팔로 이준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바닥까지 내려간 인간의 처절한 최후였다.
“나는 네가 부러웠어. 너는 엄마가 있잖아. 널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 있는 엄마……. 나는 천덕꾸러기처럼 자라서, 삐뚤어져야만 누군가가 나를 봐줬어. 그래서 내가 엉망이 됐나 봐. 흑흑흑……. 이준아. 이제 내가 곧 애 아빠가 돼. 그러니까 나 좀 살려주라…….”
“…….”
“내가 이렇게 컸지만 애한테는 정말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나한테도 그런 기회는 한 번쯤 있어야 되지 않겠냐……. 나도 인간답게 살아봐야지. 노력할게, 수아한테도. 더 이상 수아 눈에서 눈물나지 않도록 할게……. 맹세할게. 정말 내가 달라질게. 흐윽흐윽…….”
“…….”
이런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 옳은가. 인간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서한에게 벌을 내릴 자격 또한 없다. 그러나 강서한이 살아 있는 한, 수아는 살지도, 죽지도 못할 거였다.
이준은 어지러웠다.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서한을 죽이고 죗값을 받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수아가 임신을…….
이준은 서한을 등지고 돌아섰다. 하늘이 원망스러워서 암흑 같은 허공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뻥이야, 이 개새끼야.”
“……윽.”
날카로운 것이 이준의 목 경동맥을 찔렀다. 이준이 숨을 헐떡거렸다. 뜨거운 피가 물줄기처럼 솟구쳤다.
이준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서한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고막에서 흩어졌다. 이준의 망막 속에 새겨진 슬픈 얼굴의 수아가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