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오~~~ 그럼 윤수아, 대답해야지. 도련님 함께 춘천에 가요, 해야지?”
“…….”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같이 가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수아는 히히덕거리는 서한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준의 시선을 피하며 땅만 바라봤다. 서한이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수아는 이래도 말이 없다. 대쪽 같지 않냐? 네가 불편해도 너무 불편한가 보다. 어떡하냐.”
이준은 피식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그러게. 친해져야겠네.”
“그럴 수 있으려나. 하하하.”
너무 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절대 아니었다. 수아가 얼굴을 들었을 때 이준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같이 갈게요.”
“…….”
수아의 동공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이준은 서한에게도 말했다.
“주말에 보자, 형.”
“풉, 알았다.”
형이라고 부르는 건 죽어도 싫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커져가는 궁금증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치 그 호기심은 외부에서 날아와 발아한 씨앗이 아니고, 내부에서 생겨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세 사람은 어떻게 되려나.
***
지안은 면역치료 3일째였다. 역시나 부작용이 심하기로 유명한 약물답게 토끼혈청은 지안의 온몸에 두드러기를 퍼부었다.
50원, 100원짜리 동전 크기의 두드러기가 몸을 덮으면서, 지안은 간지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가렵다고 했다.
때로는 피부가 찢기는 것보다 간지러운 것이 더 참기 힘들 때가 있지 않나. 수아는 안쓰러워서 발을 동동 구르며 스테로이드제 연고를 듬뿍 발라줬다.
그러기를 두 시간쯤. 이렇게 넘어가나보다 했는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고 아무것도 없을 텐데 또 헛구역질을 했다.
수아는 부지런히 세숫대야를 받쳐주고, 지안의 등을 쓰다듬었다. 10번 이상 토를 한 지안은 거의 탈진 상태로 축 늘어졌다. 정말 어린 아이가 겪기에는 가혹했다.
이제는 더 토할 힘이 없는지 눈꺼풀이 가물가물 떨리고 있었다.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수아는 착 가라앉은 지안의 앞머리를 넘겨주며 지안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네가 아픈 시간에도 언니는 변함없이 널 사랑해. 아니, 더 많이 사랑해. 그러니까 힘을 내 줘, 지안아.
우리의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리는 것이 속상하지만, 반드시 좋은 날들이 올 거야. 믿자, 꼭 믿자. 우리 절망하지 말자. 언니도 어떻게든 버틸게.
눈으로 말하는 것을 읽었는지, 곧 잠이 들 것처럼 감기던 지안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잠 안 와?”
“잠은 무슨……. 병원에서 할 일이 없어서 매일 자는데…….”
아픈 와중에도 궁시렁거리는 게 귀여워 죽겠다.
“많이 힘들지?”
“이 정도면 괜찮은 거야…….”
“…….”
괜찮지 않은 걸 아는데. 억지로 이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위해서.
이제는 오한이 슬슬 오는지 지안은 춥다고 했다. 수아는 이불을 목 끝까지 꼼꼼하게 덮어줬다. 지안은 조그만 몸을 웅크리고 비를 맞은 아기새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자꾸만 엄마 생각 나.”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안이 걱정 말라는 듯 수아와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엄마 따라 안 갈 거야.”
“…….”
수아는 울컥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마 전에 너무 아파서 엄마 곁으로 가고 싶다고 했던 아이는 이렇게나 열심히 자라고 있다.
고통을 참으면서 성장해야 하는 지안의 운명이 가련하지만, 이 순간이 참으로 행복하다. 우리의 선물 같은 시간은 항상 이렇게 극적이다.
정신없이 아픈 가운데 잠깐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저 ‘존재하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너의 체온과 나의 체온이 아직 맞닿을 수 있고, 또렷한 눈으로 서로를 응시할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음이 감사하다.
우리의 소망은 자꾸 작아진다. 그저 존재하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수아는 이불 속에 손을 넣어 지안의 앙상한 손을 꼭 잡았다. 이것 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고마워. 예쁜 내 새끼. 힘내야 해.”
큭큭 웃던 지안이 똑부러지게 대답했다.
“언니 새끼 아니야. 엄마 새끼야.”
“이제는 내 새끼야. 오구오구 예쁜 내 새끼……. 지안이는 강아지보다 훨씬 귀여워.”
“아이 참, 그 정도는 아니야…….”
이불 밖으로 손을 내서 손사래를 치면서도 싫지 않다는 듯 긴 눈으로 웃고 있다. 이런 애교쟁이를 보았나.
“다 나으면 애견 카페도 갈 수 있어.”
“정말?”
“그럼. 그때는 강아지 마음껏 만져도 돼.”
“아, 그럼 진짜 좋겠다…….”
지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지안은 강아지한테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면역력이 약한 환자는 동물을 만지지 않는 게 좋다. 동물은 고유의 기생충이나 세균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이나 식물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가급적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하고, 항상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면역력이 약하다는 건 고립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 나으면 집에 강아지를 키울 수 있을지도 몰라.”
“우와……. 우리 반에 강아지랑 고양이 키우는 애들이 7명이나 있어. 애들이 사진 보여줬는데,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하나도 안 지겨웠어.”
“공부는 지겹다며.”
“…….”
수아의 공격에, 지안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눈꺼풀을 활짝 열고 방긋 웃던 눈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작년에는 학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근데 학교 가자마자 공부가 지겹다고 하면 어떡해.”
“…….”
지안은 이불 속에서 잡고 있던 수아의 손을 슬며시 놓으며 중얼거렸다.
“아, 나 또 치즈 몇 장 먹은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네…….”
“…….”
지안은 수아의 눈을 피해 몸을 돌려 누웠다. 그 모습이 엄마 같기도 해서, 수아는 웃음이 났다.
면역치료 효과가 부디 좋았으면. 보들보들 손에 들어오는 머리카락들이 무사했으면 좋겠다.
지안의 등을 바라보던 수아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내려앉았다. 이런 아이를 떼어놓고 춘천에 1박 2일로 가야 한다. 도저히 못할 짓이었다. 수아는 병실 밖으로 나가서 서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알아. 무슨 일이야? 먼저 전화하는 일 도통 없으면서.
말이 쉽게 나오진 않았다.
“……지안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요. 이틀 더 치료를 받아야 되는데 옆에 있어 주고 싶어요. 내일 춘천에 가는 거.”
서한이 단번에 말을 잘랐다.
-안 돼. 같이 가야 돼.
“…….”
참으려 했지만 울먹이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린 아이가 아프잖아요. 오늘 하루 종일 부작용에 시달렸어요. 두드러기 올라와서 고생하고, 토하고, 덜덜 떨고 이제 겨우 숨 좀 돌리고 있는데, 어떻게 여행을 가요?”
-수술도 아니고, 면역치료잖아. 나도 알아, 그게 뭔지. 면역치료 중에 사망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들었어.
어쩜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지? 할 수만 있다면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화가 나서 몸이 뻣뻣해졌다.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고철 덩어리예요? 사망률이 높을 때만 보호자가 옆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는 매순간 주사 바늘이 무섭고, 아프고, 서러워서 보호자를 찾아요. 왜 아이 옆에 있어 주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 해요?”
수아가 울분을 토해냈지만 서한은 덩달아 열을 올렸다.
-참나. 내가 나 좋자고 이러는 거야? 내가 아버지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 아버지가 쉽게 지갑 여는 줄 알아? 영감탱이가 얼마나 재고 따지는데!
“…….”
-너까지 가서 얼굴 비춰야 아버지 기분이 나아질 거 아니야. 그래야 네 동생 병원비도 나올 거고! 너도 네 생각만 하고 앉아 있을 게 아니라, 할 일은 해야 되지 않겠냐고. 병원비가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닌데.
“…….”
병원비……. 이런 식으로 걸고 넘어지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제가 생각이 좁았어요…….”
-내일 9시에 데리러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네…….”
수아는 전화를 끊은 후 흘러내린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결혼을 하게 되면 한 집에 있는 지안이를 짐짝 취급할 것 같다. 어떡하지……. 그래도 지안이를 살리는 게 우선이잖아.
강이준과 1박 2일로 여행을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앞이 캄캄했다. 그의 행동이 무척이나 수상하다. 다 알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나를 괴롭히려는 마음에 일부러?
이래서는 안 되는데, 강서한의 방에서 강이준과 몸을 맞대고 있었을 때가 자꾸만 떠올랐다.
두 개의 심장이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세차게 뛰어서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어둠속에서 빛을 내며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우리가 사랑에 빠졌던 파리에서의 그때와 똑같다고 느껴졌다.
그를 붙잡고 그리웠다는 말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안다.
그러니 나는 죽어 마땅한 여자다. 남편이 될 사람의 동생을 평생 짝사랑할 예정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