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95)

<14화>

서한이 자신의 방문을 열어 젖혔으나 수아는 없었다.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복도 끝 넓은 공간에 그림이 몇 점 걸려 있는데 그걸 구경하고 있으려나. 

서한은 방에서 나와 그림이 걸려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도 수아는 없었다. 테라스에 화분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디 갔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서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프랑스에서의 첫날밤에 대한 기억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어디 갔지…….”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며 중얼거리는 서한의 목소리가 수아의 귀에 꽂혔다. 들킬까 봐 온몸의 신경세포가 곤두섰다. 

서한의 큰 체구 때문에 발자국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어디쯤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발자국이 이준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수아는 숨을 죽였다. 이준이 눈앞에서 수아의 숨을 꽉 틀어막으며 또렷하게 눈을 맞춰왔다.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을 참고 있는데. 

밖에서 문고리를 아주 천천히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수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온몸에 소름이 번졌다. 

수아는 저도 모르게 이준의 손목에 제 손톱을 세워 박으며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참아냈다. 작게 딸칵딸칵, 하는 소리가 났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또 딸칵거리는 소리가 두세 번 더 들렸다. 천만다행이었다. 좀 전에 이준이 문을 잠가놓지 않았다면 발각됐을 것이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후 서한은 발걸음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이준이 수아를 놓아주자, 수아는 심호흡을 터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

수명이 10년쯤 단축된 것 같았다. 숨을 어떻게 참았는지도 모르겠다. 갈비뼈가 뻐근하게 아팠다. 

“혹시나 물으면 제일 끝에 있는 욕실에 있었다고 해요. 엇갈린 것 같다고.”

“……네.”

이렇게 퍼져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수아는 겨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방을 나왔다. 반대편 계단으로 1층에 내려가니 서한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어디 있었어? 찾았는데.”

“끝에 있는 욕실이요. 엇갈렸나 보네요…….”

“난 또…….”

난 또, 그 다음 말은 뭐였을까. 수아는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왜 노크도 하지 않고 강이준의 방문을 열어보려 했을까. 뭔가를 감지했나?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강서한은 항상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조심해야 한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은 형제가 아니다. 재산이 너무 많은 집안인데다 이복형제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강이준과의 과거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나를 죽이려고 할 거다. 들킨다면 죽어 마땅하지 않을까. 나는 얼마나 멍청한 여자이기에 이런 불구덩이로 뛰어드는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지만 수아는 식탁으로 갔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이 가득했다. 곧 식사가 시작됐다. 

“여보. 생신 축하해요. 100세까지 꼭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 아셨죠?”

“그게 욕심 부린다고 되나.”

“제가 스케줄 짜 드리는 대로 건강관리 잘 하시면 되구 말구요.”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밥상 위에서 어색한 덕담이 오갔다. 

“수아야. 네가 선물한 시계, 아버지가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셔. 어쩜 이렇게 안목도 높니.”

“……다행이에요.”

수아는 나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강서한, 그가 산 것이면서 수아가 산 거라고 선물을 내밀었다. 

강회장과 나희는 수아의 형편을 알고 있었으므로 서한의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파악했을 거였다. 더욱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밥이라도 잘 먹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진수성찬이건만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건 어려운 숙제 같았다. 스무 번을 씹고, 꾸역꾸역 넘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 있는 이준의 오른 손목에 핏자국이 두세 군데 보였다. 티셔츠 소매 끝 부분이라 수저를 사용할 때 상처가 드러났다. 

내가 그랬나 봐. 아까 방에서 강이준이 내 입을 틀어막았을 때였나 보다. 너무 놀라서 무의식중에 손톱을 박았던 것 같은데……. 

저 정도면 많이 아팠을 거다. 미안해서 어쩌지……. 나만 신경 쓰느라고 그가 다친 걸 몰랐잖아. 

아니나 다를까. 상처를 발견한 나희가 눈을 크게 뜨며 걱정했다.

“이준아. 손목이 왜 그래? 찍힌 자국이 깊은 것 같은데?”

“아, 별 거 아니에요.”

이준이 티셔츠 소매를 내리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완전히 덮이진 않았다. 

“뭐가 별 거 아니야? 어쩌다 그랬어? 피가 제법 났겠는데?”

“괜찮아요.”

“안 괜찮아. 밥 먹고 엄마 좀 봐. 소독하고 연고 발라야겠어.”

“…….”

수아는 여러모로 마음이 불편해서 숟가락을 쥔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쥐구멍에 숨을 수만 있다면, 숨어서 영원히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강이준이 뭔가를 기억하기 시작한 건지, 단순히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추궁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느껴졌었다. 

안 돼. 날 기억하면 안 돼……. 정말 잠깐 욕심을 부렸어. 나에게는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이었으니까. 

그래서 당신 머릿속에 한 조각의 추억으로라도 존재하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그것마저 큰 욕심이었겠지. 

제발, 날 기억하지 말아 줘……. 나한테는 이 결혼이 필요해. 절실하다고……. 

이준이야말로 혼란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윤수아는 초면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의문을 계속 파고들어야 하는가. 단순한 꿈이고 착각일 수도 있다. 무의식 속에 가족을 박살내고 싶은 금지된 욕망이 이 일을 지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당신에게 자꾸만 끌린다. 아까는 입술을 훔치고 싶어서, 당신의 입술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순간 선을 넘을 뻔했다. 미친놈……. 

당신의 살 냄새는 왜 이렇게 매력적인가. 왜 이렇게 짜릿한가. 몸에 향기로운 기름을 들이붓는 것 같다. 

오랫동안 그럭저럭 참을 만 했던 성욕이 이제는 곤욕이다. 몸과 마음이 통제되지 않는 사춘기 소년이 된 것 같다. 

아까 상체를 맞대고 있을 때는 멋대로 가슴을 파헤치고 싶었다. 가슴을 물고 빨고 욕심껏 탐하고 싶어서 온몸이 화가 나 있었다. 

당신을 만나기만 하면 가슴 속에 태풍을 품은 것처럼 거대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친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이었다. 

“여보. 국물이 약간 튀었네요.”

나희가 물티슈로 강 회장의 티셔츠를 닦아주며 말했다. 

“우리는 이번 주말에 춘천 별장에 다녀올 거야. 1박 2일로. 아버지 운동 겸 해서, 골프나 실컷 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려고. 너희도 같이 갈래?”

“…….”

“…….”

다들 침묵했다. 그럴 줄 알았던 나희는 강 회장을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여보, 이 봐요. 나이 드니까 자식도 다 필요 없어요. 다들 저렇게 바쁘다니까. 옆에서 챙겨주는 마누라가 최고죠?”

눈치를 보던 서한이 뒤늦게 끼어들었다. 

“갈게요. 수아랑.”

“…….”

네가 왜. 나희는 어이가 없어서 싸늘해졌다가, 이내 반기는 척했다. 

“정말 같이 온다고? 1박 2일인데?”

“네.”

“와. 난 너무 좋아. 자식들이랑 같이 여행하는 부모들 보면 정말 부러웠거든. 이준이 너는?”

나희에게는 이준이 오지 않는다면, 강 회장과 둘이 가는 것보다 훨씬 못한 여행이었다. 역시 이준은 나희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글쎄요, 골프에 별로 흥미가 없는데요.”

“……그래, 그럼 넷이 가 보지 뭐.”

수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물어보지도 않고 스케줄을 잡아버리면 어떡해. 일도 해야 하고, 지안이 병간호는 어떡하라고……. 

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가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가야 하는 신세였다. 곤란해진 수아는 눈동자만 요리조리 굴렸다. 

서한은 회사에 긴급한 자금이 필요해서 강 회장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대뜸 회사에 찾아가서 말을 하는 것보다 하루 정도 기분을 맞추면서 말을 꺼내는 게 나을 듯해서 여행에 따라가겠다고 한 거였다. 

식사를 마친 후 서한, 수아, 이준은 현관을 나와 차고로 향했다. 서한이 잠깐 그들에게서 떨어져 통화를 하는 사이, 수아가 이준에게 말을 걸었다. 

수아의 눈은 이준의 손목 상처를 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많이 아프셨을 텐데…….”

그때 통화를 마친 서한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뭐가 미안해?”

이준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처리하며 대충 둘러댔다. 

“금방 발을 밟아서.”

서한이 특유의 가벼워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 우리 수아는 너무 깍듯해서 가까이 하기가 힘든 스타일이지 좀. 우리가 이렇게 100년을 만나도 두 사람 입에서 형수님, 도련님이라는 말이 나올까? 이준이 너도 뻣뻣하잖아. 큭, 언제 형수님이라고 부를래?”

“…….”

서한은 두 사람을 놀리는 것에 재미가 들려 있었다. 

“윤수아. 도련님이라고 해 봐. 도련님, 춘천에 같이 가요, 해 봐.”

“…….”

“얼른. 도련님, 우리 같이 놀러 가요 해보라니까. 하하.”

“…….”

수아는 굳어진 얼굴로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강이준과 1박 2일이나 같이 있다가는 심장이 터져 죽거나 질식할지도 모른다. 서한은 계속 짓궂게 웃었다. 

“거 봐. 우리 수아는 이렇다니까. 이준아. 너 있으면 수아가 되게 불편한가 보다.”

이러나 저러나 난감한 수아는 겨우 입술을 떼어냈다.

“바쁘실 텐데 왜 굳이 같이 가자고 해요…….”

그때 이준이 수아를 곧은 눈으로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자고 하면 갈 생각인데요.”

“…….”

그를 보고 있자니, 수아는 심장 안쪽이 저릿했다. 또 다시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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