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95)

<13화>

머스크 계열의 매력적인 체향과 함께 이준이 등 뒤로 다가왔다. 수아의 맥박이 정신없이 빨라졌다. 

뻣뻣해진 수아가 몸을 천천히 돌려 그를 바라봤다. 빛이 모인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리워했던 이 남자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으니, 꿈인 듯 황홀했다. 

왜 붙잡은 건지 불안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껴안으며 처음으로 느꼈던 쾌락의 절정이 떠올랐다. 

허벅지 사이가 찌릿하면서 온몸으로 에너지가 뻗쳐나가던 그 느낌. 왜 그걸 떠올리고 있는 건데. 미쳤어, 윤수아…….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른 수아는 마른 침을 삼키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고개 좀 들죠.”

“…….”

눈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건지도 몰랐다. 중요한 질문을 할 것 같은데……. 이준이 방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터치해서 불을 켰다. 

빛 때문에 잠깐 눈이 부셨다. 

“우리가 약혼식 때 진짜 초면이었습니까?”

몸이 흠칫 떨렸지만 들켜서는 안 됐다. 수아는 숨을 참으며 이준의 눈을 또렷하게 바라봤다.

“……네. 왜 그러시죠?”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이준이 수아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어쩐지 초면이 아닌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말입니다.”

“저는 처음이었는데요.”

“확신해요?”

“네.”

거짓말 때문에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린 그가 빈정거리는 듯했다. 

“그것 참 희한하네.”

“뭐가요.”

“누가 초면이 아닌 것 같다, 라고 하면 보통은 그런가요? 하면서 생각해보는데. 처음이라고 확신하시네.”

“…….”

너무 부정한 것이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었다. 수아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지어냈다. 

“저는 눈썰미가 뛰어나요. 스쳐 지나갔다면 모를 테고, 한 마디라도 대화를 나눠봤다면 기억하거든요. 게다가 행동반경이 넓지 않아서요, 어디선가 봤다면 기억 못할 리가 없어요.”

“…….”

“누구와 착각하고 계신가 봐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의 눈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친 소리인 거 아는데……. 

내가 왜 당신을 안아본 것 같지. 이 말은, 입 밖으로 절대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수아로서는 나름 최선의 방어였다. 강이준이 날 기억했으면, 하고 바랐던 한 가닥의 욕심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날 절대 기억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서 주저앉고만 싶었다. 

***

서한은 나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다들 아직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서, 너 기다리고 있으니까 일 보고 오렴.

“아니요. 전화상으로 해결했어요. 지금 집 앞에 다 왔어요.”

-그래? 그럼 빨리 상 차릴게.

“네.”

서한은 전화를 끊은 후 코웃음을 쳤다. 새엄마라는 가면을 쓴 이 여자는 내가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운동을 못하게 됐을 때, 강서한은 뿌린 대로 거둔 거라며 전화로 신나게 떠들어대다가 딱 걸렸었다. 

그때 얼어붙은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화병이 있었다. 

그 화병으로 저 여자의 머리를 내리치려다가 겨우 참고, 그 여자가 아끼는 그림을 찢어버렸다. 

두려움에 질려서 벌벌 떠는 얼굴을 보며 서한은 악랄하게 지껄여줬다. 

“네 새끼도 이렇게 만들어 줄 거야. 씨발…….”

내가 죽이고 싶을 텐데도, 아버지 앞에서는 꼬박꼬박 챙기는 척한다. 과연 누구의 증오가 더 깊을까. 이 집안에서 살아남는 건 누구일까. 

집안에 주차한 후 정원을 가로지르며 서한은 무섭게 타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적당히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지어야 할 시간이었다. 서한이 안으로 들어서자, 앞치마를 두른 나희가 웃으며 맞이했다. 

“지금 상 차리고 있어. 수아는 네 방에 있을 거야.”

“네. 올라가서 데리고 내려올게요.”

서한은 2층으로 올라갔다. 

***

손에 쥐고 있던 수아의 폰이 지잉지잉 울렸다. 발신자는 강서한이었다. 

이준의 방에 있던 수아는 깜짝 놀랐다.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이며 고민하던 수아가 전화를 받으려 하니 이준이 검지를 펼쳐 쉿, 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방 밖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누군가가 2층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 어떡해. 강서한인 것 같은데……. 숨통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눈을 굴리던 수아가 이준의 귀 앞에서 속삭였다. 

“여기 있으면 오해받을 거예요. 나갈게요.”

“이미 늦었어.”

이준이 방의 불을 끄고, 문고리 옆에 있는 작은 잠금장치를 톡 눌렀다. 

“이, 이러면 더 오해를…….”

수아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이준이 수아의 입을 틀어막고 몸으로 수아의 상체를 눌렀다. 

몸이 겹쳐지면서 이준의 체향과 숨결이 수아를 달아오르게 했다. 미치도록 그리웠던 향기였다. 숨을 마음껏 들이마실 수도, 내쉴 수도 없었다. 

생을 딱 한 번만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1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그를 만났던 시간으로. 

“같이 호텔에 갈래?”

“그럼 같이 자야 돼요?”

“남자가 호텔에 가자는 말이 보통은 그 뜻이지, 아마?”

“저 만약에 그쪽이랑 자게 된다면, 처음이에요…….”

“나가자, 지금.”


수아는 이준과 함께 빗속을 뛰었다. 호텔을 향해. 


모텔도 아니고 프랑스 파리의 호텔에서 남자와 첫날밤을 치르게 되다니, 이쯤 되면 꽤 괜찮은 팔자 같기도 했다. 


손목을 붙잡았던 그가 손에 깍지를 껴왔다. 차갑던 빗방울이 따뜻해졌고, 머리 위에 방어막이 생긴 것처럼 빗방울이 도로 튕겨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낭만적인 기분에 휩싸여서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유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순간을 즐길 수 있으며, 심지어 게을러도 되는 무한의 자유.  


비를 피해 뛰어다닐 뿐인데, 춤을 추는 것처럼 근사하게 느껴졌다. 꽉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이대로 달나라까지 뛰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숨이 가빠지는 것도 좋았다. 가슴은 두근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희열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호텔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줬다. 


비에 홀딱 젖은 그는 위험할 정도로 섹시했다. 속눈썹이 젖어 있어, 새까만 눈동자는 보석 같았다. 얼굴과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리는데도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빛이 났다. 


“앗.”


호텔 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가 두 팔로 벽을 짚어 가두었다. 이글거리는 눈이 수아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공기는 금세 야릇해졌고,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줬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기다렸다는 듯 수아는 고분고분해지고 말았다. 


“어딜 먼저 예뻐할까.”

“…….”


수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쿵쿵거리는 제 심장소리를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나 오늘 나쁜 놈 될 것 같은데.”

“…….”


그가 살짝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애매했다. 혹시 나쁜 남자를 따라온 건 아닐까 뒤늦게 걱정이 됐다. 


설렘과 같은 크기로 느껴지는 불안함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의 목소리는 색기가 넘쳤다. 착한 수컷인지, 못된 수컷인지 분간이 잘 안 됐다. 


“한 번 가지고 안 될 것 같단 말이야. 근데 처음인 여자를 데려왔네.”

“…….”

“이거 어떡하지. 고민하는 중이야, 지금.”

“…….”


이준이 수아의 턱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서로의 모습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국에 가면 같이 살자, 우리.”

“…….”


수아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왜 놀라.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잖아. 네가 날 미치게 만들었다고.”

“…….”

“나도 이런 적 처음이야. 대신 오늘 나쁜 놈이어도 이해해.”

“…….”


협박인지 부탁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이준이 수아의 입술을 부드럽게 덮었다. 입술 겉면에서 파르르 약한 전기가 일어났다. 


이준의 숨소리는 상당히 과열되어 있었지만 수아가 처음인 걸 배려하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물고 부드럽게 괴롭히다가 입안으로 혀를 밀고 들어왔다. 수아는 살짝 입을 벌려 그의 혀에 제 속살을 맞대어봤다. 짜릿했다. 


수아는 조금씩 혀를 비비고 입술을 빨면서 움직임을 키워나갔다. 그는 수아가 은밀한 경험을 즐길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 


첫 키스는 너무나 달콤했다. 와인의 향이 남아 있어서 향기롭고, 감미로웠다. 


타액을 주고받는 소리는 물방울이 터지는 소리 같았다. 이렇게 예쁘게 들릴 줄 몰랐다. 키스가 이렇게 황홀한 거였나. 


점점 더 고조되고 있는 숨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적막이 가득한 공간에 숨소리와 타액이 섞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뺨을 감싸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목덜미 뒤를 받치며 키스의 강도가 농밀해졌다. 고개를 약간 비틀어 입안을 꽉 채우며 그가 사납게 휩쓸었다. 


잡아먹히는 것 같아서 호흡이 달리는데도, 행복하게 잡아먹히고 싶은 생각이 들 줄이야. 


남자와 가슴이 맞닿아 있는 것도 처음인데 왜 이렇게 좋을까. 심장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같은 속도로 뛰었다. 


잠시 후 그의 오른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고, 왼손이 수아의 재킷 속 가슴을 움켜쥐었다. 


“흐응…….”


화들짝 놀란 수아의 입술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민망해서 수아는 귓불까지 뜨거워졌다. 그가 놀리는 것처럼 눈앞에서 짓궂게 웃었다. 


“몸이 너무 솔직한데.”

“…….”

“그래서 더 좋다고.”

“…….”


착한 수컷인지, 못된 수컷인지 또 아리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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