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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95)

<12화>

해진 건설 사장실. 강서한은 두바이 입찰 지원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입찰에 성공한다면 두바이에 77층 초호화 호텔, 호텔과 연결된 60층 레지던스를 시공하게 된다. 

레지던스에 입주하는 주민들은 전세계 최고의 부호들로, 호텔식 서비스를 받으면서 살게 될 것이다. 무려 1조 5천억에 육박하는 프로젝트였다. 

163층으로 세계 최고층을 자랑하는 부르츠 칼리파, 현존하는 최고의 호텔이라는 버즈 알 아랍을 지은 기술자들까지 스카웃해서, 지구에 없는 꿈의 초호화 건물을 설계했다. 

지상 1층부터 7층까지는 투명 유리와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울 예정이었다. 그러니 밖에서 보면 흡사 공중에 떠있는 마법의 건물처럼 보일 것이다. 

서한은 사장으로 취임한지 2년째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후광 때문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들을 뒤집어야 했기 때문에 이번 입찰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벽시계를 보니 오후 4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6시 30분에는 아버지의 생신 때문에 가족 모임에 가야 한다. 서한은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화점 다녀왔어?”

-아니요. 아직요. 

“…….”

-그냥 제 옷 입고 가면 안 될까요? 깔끔한 걸로 입을게요.

서한의 목소리가 예민하게 높아졌다. 

“명품 매장에 들렀다 오라고 얘기했잖아. 옷, 구두, 가방 좀 사라고. 사주겠다고 하는데도 왜 그래? 그리고, 아직도 안 갔으면 도대체 언제 가겠다는 거야?”

수아는 낮은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지안이가 치료 중이라고 말했잖아요. 굉장히 힘든 치료인데 눈을 뗄 수가 없어서요…….

“네가 옆에 있다고 애가 낫는 게 아니잖아. 내가 간병인 붙여준다고 했는데, 네가 안 하겠다고 한 거고.”

-…….

수아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참 인정머리 없는 말이었다. 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지만, 억지로 붙이려 해도 되지 않았다. 

8살짜리 아이가 목숨이 오가는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는데 가엾지도 않은가. 간병인에게 맡겨놓고 쇼핑을 다녀오라니……. 

울음이 날 것 같았지만 더 부탁해볼 수가 없었다. 

-지금 준비해서 나갈게요. 이모한테 부탁할 거예요. 간병인은 됐어요.

“그래, 그럼.”

가까운 곳에 엄마의 자매인 정희 이모가 사신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라 금전적으로 도와주시지는 못하지만, 종종 지안을 돌봐주시곤 했다. 

“로얄 백화점 7층에 쥬피터 매장으로 가서 괜찮은 걸로 몇 벌 사. 미리 말해뒀으니까 옷, 신발, 가방, 액세서리 전부 가져가면 돼. 네가 싼 티 나면 나도 곤란해지니까 제발 말 좀 들어.

-……알았어요.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기분이 누더기 같았다. 그는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도대체 나의 어디를 좋아하는 걸까.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뻔하다. 젊은 몸뚱이를 원하는 거겠지. 이 까짓 것, 쓰레기처럼 보란 듯이 던져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어떻게 해서든 결혼 전까지는 잠자리를 하지 않는 게 그나마 몸값을 떨어뜨리지 않는 일일 것이다. 

오늘 지안은 점심을 먹고 토를 한 번 했고, 그 후로는 별 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아는 정희 이모와 교대를 하고, 로얄 백화점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급했다. 쇼핑도 해야 하고, 생신 모임에도 늦어서는 안 됐다. 

“우와. 완전히 다른 분 같으세요. 정말 우아해요~~~”

“핏이 너무 좋으신데요? 입는 옷마다 인생 드레스예요, 손님.”

직원 두 명이 수아에게 붙어서 여러 벌의 옷을 권했다. 수아는 난생 처음 VVIP 손님 대접을 받았다. 

그녀들의 입에 발린 칭찬이 하나도 달갑지 않았기에 대충 아무거나 골랐다. 옷 몇 벌과 구두, 작은 귀걸이, 가방을 하나 샀는데 1년 치 병원비가 훌쩍 넘었다. 

강서한에게 뭔가를 받을수록 거지가 되는 기분이다. 받은 만큼 그의 발아래에서 개처럼 기어야만 하니까. 

그런데 오늘도 강이준을 만나게 될까. 병원에 있을 때는 지안을 살피느라 이 걱정까지 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병원을 벗어나니 생각은 온통 강이준에게로 쏠렸다.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눈을 마주칠 수 있을까. 보기만 해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데…….

신은 나를 가지고 놀고 싶으신가 보다. 어디까지 나를 내몰고 싶으신 거예요……. 수아는 흐릿한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Rrrrr~~~ 강서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 샀어?

“네.”

-지금 백화점 앞에 거의 다 왔어.

“기다리고 있어요.”

곧 서한의 차가 왔고, 수아는 차에 올라탔다. 서한은 수아를 보더니 대단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안목이 있네. 재벌집 며느리 행세 제대로 하겠는데?”

“…….”

“얼마나 좋아. 이제 아무도 무시 못 하겠다.”

“…….”

수아는 억지로 엷게 웃었다. 너무 비싼 옷들이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의 목을 조여 오는 돈을 이런 식으로 쓰는 건 하나도 기쁘지 않은 일이다. 

사채빚을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는 사이에 차는 고급 주택가로 들어섰고, 그의 집에 도착했다. 수아가 차문을 열려는데, 서한의 폰이 울렸다. 

“어. 김 실장.”

-이거 어떡하죠? 입찰 제안서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주셔야 될 게 있습니다.

바로 서한의 미간이 구겨졌다. 

“집에 다 왔는데. 아니야, 지금 갈게.”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워낙 중요한 문제이니 이 말을 듣고는 밥이 넘어가지 않을 거다. 서한은 다시 안전벨트를 채우며 수아에게 말했다. 

“너 먼저 들어가 있어. 나는 회사에 잠깐만 갔다 와야겠다.”

“저 혼자 들어 가라구요?”

“둘 다 늦으면 좀 그렇잖아. 너라도 먼저 가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아, 그럴게요.”

집안에는 강이준이 있을지도 몰랐다. 서한과 있는 것도, 이준과 있는 것도 극도로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빨리 갔다 올게.”

“네.”

수아가 넓은 정원을 가로지른 후 현관에 도착했다. 나희가 문을 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 왔구나. 근데 서한이는?”

“안녕하셨어요. 서한 씨는 여기까지 왔다가 갑자기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 와서요. 빨리 갔다 온다고 했어요.”

“아이고, 바쁘구나. 어서 들어와.”

“네.”

나희는 확 바뀐 수아의 옷차림을 흘긋거렸다. 역시 옷이 날개다. 기품이 흐르면서 우아하고 여성스러웠다. 

이 애는 강서한 옆에서 얼마나 탐욕을 부릴까. 원래 없는 애들이 돈맛을 알게 되면 정신을 못 차린다. 만만찮은 기집애일 수도 있으니 주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희는 인자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배고프지 않다면 서한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네. 기다릴 수 있어요. 저는 괜찮아요.”

“그래, 이왕이면 가족끼리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좋지 않나 해서. 아버지한테도 얘기할게.”

“네. 그동안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을까요?”

“없어. 구포댁이 준비 다 했어. 넌 2층에 있는 서한이 방에 가서 구경 좀 하고 있을래?”

“네. 그럴게요.”

혼자 있을 수 있게 됐고, 강이준도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수아는 나선형의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방이 대여섯 개는 되었다. 이번에는 반대쪽 계단으로 올라왔더니, 강서한의 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두 번째였던가, 세 번째였던가. 

수아는 긴가 민가 하는 어느 방문 앞에 섰다. 여기였던 것 같은데…….

수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불은 켜지지 않은 상태였고, 해가 떨어지고 있어서 적당히 어두웠다. 

시원한 바람이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수아는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어슴푸레한 정원에 하나 둘씩 오렌지 빛 가로등이 켜지는 걸 지켜봤다. 

“아, 너무 예쁘다…….”

수영장에도 무지개 빛 조명이 들어와 물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편하게 있어보는 시간이었다. 

1,2분 사이에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방안에도 불을 켜야 할 것 같아서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방안에 있는 욕실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욕실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뭐, 뭐야? 강서한은 아직 안 왔는데? 여기가 그 사람 방 아닌가? 

수아가 경직된 사이, 욕실 문이 열렸다. 

“…….”

“…….”

세상에. 강이준이 상체를 탈의하고 짧은 반바지를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욕실에 불이 켜져 있어서 어두운 가운데서도 실루엣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봤던 그의 맨몸이 눈앞에 있었다. 아찔했다. 수아는 당황해서 눈을 끔뻑이며 말을 더듬었다. 

“미, 미안해요. 서한 씨 방인 줄 알았어요. 나갈게요.”

서한의 방도, 이준의 방도 지금은 사용하는 방이 아니었다. 옷 몇 가지와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착각한 거였다. 

얼굴이 새빨개진 수아가 시선을 떨구고 문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수아가 문고리에 손을 뻗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꽉 붙들었다. 

“잠깐만요.”

“…….”

손이 왜 멈춰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등지고 있는 수아의 눈동자가 갈대처럼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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