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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95)

<11화>

언제나 밤잠을 설치지만, 지안의 면역치료가 걱정되어 수아는 며칠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더 누워 있어봐야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서 수아는 몸을 일으켰다. 세수를 하고 병실로 돌아오니, 그 사이 지안도 깨어 있었다. 

“우리 공주님, 굿모닝.”

“머리 짧아서 공주 아니야.”

“머리는 곧 길어질 건데 뭐.”

“언제 길어지겠어?”

“금방이야.”

부디, 부디, 면역치료가 잘 되면 좋겠다. 보슬보슬 자라난 머리카락을 더 기를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머리를 빡빡 밀어야 한다는 건, 선택이 골수이식 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골수이식은 위험해서 마지막 보루로 남겨둬야 하는 일이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골수이식을 하기 위해서는 전처치라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건 보호자로서 보고 있기가 정말 힘들다. 

아이를 무균실에 집어넣고, 지독한 항암제를 투여해서 정상적이지 않은 골수 세포를 모조리 죽인다. 

면역력을 0으로 만들어야만 몸에 새로 들어오는 골수를 도리어 공격하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수이식을 위한 항암치료는 일반 항암치료의 10배로 힘든 과정이라고 했다. 

그때를 떠올리니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했다. 수아는 지안을 가슴에 꽉 안았다. 

“왜 이래. 숨 막혀…….”

“지안이가 너무 좋아서.”

“히히.”

지안의 몸은 말라서 옆구리의 갈비뼈가 오돌토돌한 것까지 전부 느껴진다. 수아에게는 제 목숨이 스러지더라도 지켜야 하는 존재였다. 

지안은 오늘부터 면역치료를 시작한다. 5일 동안 12시간씩 토끼혈청을 맞아야 했다. 

면역치료에 사용하는 토끼 혈청은 무시무시한 부작용이 따른다. 고열, 오한, 두드러기, 설사, 근육통, 피부 발진 등등. 겪어본 환자들마다 혀를 내두른다. 

지안의 몸에서는 자신의 면역세포가 아군에 해당되는 조혈모세포들을 공격한다. 피를 만들어내는 조혈모세포가 공격을 받다보니 늘 피가 극심하게 부족하다. 

토끼에서 추출한 항혈청이 매번 못된 짓을 벌이는 이 면역세포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들었다. 지난번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이 치료가 무용지물로 돌아가면 남은 방법은 골수이식뿐이다. 골수이식은 완치라는 극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지만 사망률도 무시할 수 없다. 

8살인 아이에게 두 번째 골수이식을 받게 하고 싶진 않았다. 피가 모자라지만 작은 심장이 이렇게 열심히 뛰고 있는데…….

그때 의사와 간호사가 함께 들어왔다. 주치의인 김석진 교수는 특히 지안을 예뻐했다. 

“지안아! 한 번 해본 거니까 잘할 수 있지?”

지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대답했다. 

“선생님. 저, 토끼 될까 봐 심하게 겁나요…….”

“착한 토끼가 지안이 도와주는 거야. 건강해지라고.”

“진짜 착한 토끼예요?”

“그럼. 모든 나라에서 인정한 최고로 착한 토끼들이야.”

“근데 저번처럼 귀랑 앞니 간지러우면 어떡해요? 귀가 길어지는 것 같았어요. 앞니에서 피도 나고, 진짜 너무너무 간지럽고 아팠단 말이에요…….”

“이번에는 아닐 수도 있어. 미리 겁먹지 마.”

“그 후로 당근은 꼴도 보기 싫어졌어요…….”

“그럼 반찬에서 당근은 빼달라고 할게. 선생님이랑 약속.”

“고맙습니다…….”

지안은 토끼가 될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저번에는 온갖 부작용에 시달렸다. 지안은 사람이 토끼가 되는 중이라서 이렇게 아픈 거라고 했다. 

지안은 소리 내어 울 힘도 없었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정말 나은지 아무런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옆에서 지안을 지켜보면서 수아는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덜덜 떨면서도 열이 올라서 해열제를 맞으면, 그 다음에는 두드러기가 올라와서 피부를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려워했다. 

세숫대야를 붙잡고 구토를 하는 아이의 몸에 스테로이드 연고를 아낌없이 발랐다가, 설사를 수없이 지려서 기저귀를 채우고. 

돌아서니 피부 내에 점 같은 출혈 모양의 자반증이 온몸을 덮어서 또 놀랐었다. 

면역력이라고는 거의 없어서 겪을 수 있는 부작용을 모두 겪으며 사투를 벌여야 했다. 지안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나도 그만 아프고 싶어. 이렇게 아프지 말고, 그냥 엄마한테 가면 좋겠어…….”

그만 아프고 싶다는 말은 희망이기도 했고, 절망이기도 했다. 그만 아프고 얼른 낫고 싶다고 했다가, 그만 아프고 엄마 곁으로 가고 싶다고도 하는 것이다. 

조그만 아이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는 이 세상이 미워졌다. 가슴을 쥐어뜯고 싶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면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를 드렸었다. 

수아는 링거가 주렁주렁 달린 지안의 팔을 보면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면역치료가 잘 되기를. 

***

퍽, 퍽, 퍽, 이준은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두들겼다. 세 시간째 지치지도 않고 주먹을 혹사시키는 중이었다. 

주먹에 꽂히는 둔탁한 느낌만이 실제인 것 같았다. 몸이 부서지고 찢겨져야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준은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서 윗몸 일으키기를 했다. 땀방울이 굵은 상반신을 거꾸로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머리카락까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몸을 움직이면 머릿속이 비어야 하는데, 모든 생각의 가지들이 윤수아에게로 향한다. 결국 윤수아에게 가 닿고 싶어서 발광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귀에 착 감기는 예쁜 목소리를 가졌다. 다른 여자와 혼동했을 리 없다. 그럼 내가 미친놈인가. 

그 다음은? 그래서 그녀와 함께 호텔로 갔나? 내가 그녀의 처음을 가졌나? 

생각은 여기에 머물러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꿈에서도 느꼈던 성적 욕망은 현실에서 아주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고 있었다. 

윤수아의 손, 뺨, 입술, 가슴, 허리, 엉덩이 등등. 전부 만지고 싶고, 입안에 넣어보고 싶다. 깊게 사랑을 나누었던 것 같다……. 

볼수록 마음이 커질 것 같은데 감당할 수 있을지, 겹겹이 쌓인 의문이 풀린다면 그 뒤에는 강서한과 어떻게 해야 하는지.

Rrrrr~~~ 아까부터 걸려오고 있는 엄마 안나희의 전화를 무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준이 전화를 받았다.

“왜요.”

-엄마 전화 좀 거르지 말라고 했잖아. 왜 이리 쌕쌕거려. 운동 중이니?

“네.”

-이번 주 수요일에 아버지 생신이야. 그때는 꼭 와야 되지 않겠어? 이준아. 나 좋자고 이러는 거 아니야. 너도 알고 있지?

“…….”

이준은 대답 대신 호흡을 골랐다. 

“강서한은 와요?”

-오겠지. 그 놈은 뭐 하나라도 얻어가려고 눈이 시뻘게서, 아버지 말이라면 바짝 엎드리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넌 왜 그렇게 계산적인 데가 없냔 말이야. 아버지는 너한테 애정이 더 많으신데.

이준은 코읏음 쳤다. 

-진짜야. 아버지는 너 만난 날에는, 잘 때까지 네 얘기만 하셔. 너한테 그룹을 물려주고 싶다고.

“저는 관심 없습니다.”

나희가 예민하게 목소리를 올렸다. 

-왜 이렇게 답답한 소릴 해? 너 그게 돈으로 환산하면 얼만 줄 아니? 너는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가 될 수 있는데, 왜 철없는 소릴 하고 있냐고!

“자식들이 다 컸다고 해서 자식 교육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부모라면 죽을 때까지 몸소 보여주면서 가르쳐야 될 것도 있는 법입니다.”

-네가 이렇게 잘 자랐는데 내가 뭘 더 가르치니? 난 너한테 돈이라도 물려주고 싶어. 강서한이 채가기 전에 너도 좀 달려들란 말이야!

“술, 도박에 미친 사람만 정신병자인 줄 아세요? 돈에 미쳐도 정신병자예요.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날카롭게 파고드는 말에, 나희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하여튼 아버지 생신 때 와. 무조건 와. 그렇게 알고 있을 거야. 끊을게.

이준은 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다시 철봉에 거꾸로 매달렸다. 피가 머리로 쏠리면서 며칠 전 나희와 수아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림 좋아하니, 수아야?”

“아, 조금요.”

“친아버지한테 성폭행 당하다가 아버지를 죽였던 여자애. 그게 뭐더라……. 아!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그 작품, 아니?”

“네…….”

“그 작품이 어디 있더라…….”

“……루.”

“로마 바티칸 미술관! 다음에 이탈리아에 가서 그 작품을 보고 싶어, 난.”

분명히 윤수아의 입술이 루브르를 말하려고 했었다. 그때 묘한 느낌이 관통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모나리자’일 것이다. 그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러니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림이 어디에 전시되어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해외에 나가서 직접 본 경우에는 그림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루브르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안다는 건, 그림을 아주 좋아하거나 직접 봤거나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이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는 해외에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혹시 그 말이 거짓이라면…….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싶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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