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서한이 차를 출발시켰고, 이준 또한 시동을 걸었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강서한의 이죽거리는 얼굴이 싫다. 오래 전부터 그랬다. 죽이고 싶었다. 그런 강서한 옆에, 처음으로 시선을 빼앗겨 본 여자가 있다.
그녀가 누구인지 이름 석 자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은 맹렬하게 불타 오른 질투 때문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서한의 차는 주택가를 벗어나 큰 길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부앙, 이준이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옆 차선에서 서한의 차를 추월하여 핸들을 틀었다. 퍽!!!
반동으로 인해 몸이 꽤 흔들렸고, 그 후 이준은 핸들을 붙잡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속도를 낸 구간이 아니었으므로 사람이 다치는 인명사고가 날 리는 없었다.
굉음을 들으니, 머릿속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듯했다. 오래 전부터 몸은 부서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운동을 시작하면서 매일 몸은 사악한 것을 갈구했다.
나를 부서뜨리고, 가족을 깨뜨리고 싶어서 이상한 꿈을 꾸게 됐고, 그 여자를 강서한의 여자라 착각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꿈속의 애니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래, 저 여자는 나의 애니가 아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과거의 어떤 대화가 들렸다.
“같이 호텔에 갈래?”
“……그럼 같이 자야 돼요?”
“남자가 호텔에 가자는 말이 보통은 그 뜻이지, 아마?”
“저 만약에 그쪽이랑 자게 된다면, 처음이에요…….”
***
흥분한 서한은 차안에서 욕지거리를 끊임없이 내뱉었다.
“죽여 버릴 거야, 이 새끼를!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는 거야?”
“…….”
부딪칠 때의 소리가 컸던 것에 비하면 목이 약간 삐끗한 느낌 정도였다. 하지만 자동차 앞 범퍼는 둔탁한 소리를 냈으니 문제가 있을 거였다.
“미친 새끼. 어디 겁 대가리 없이 이 따위로 운전을 해? 개새끼, 창자를 끊어버릴 거야.”
“…….”
수아는 서한이 무서워서 진정하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서한이 신경질적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서한은 특히 운전을 할 때 난폭했다. 조금도 참지 못하고 클랙슨을 울려댔고, 보복운전도 서슴지 않았다.
이번에는 끼어든 차량의 과실이 상당했으니, 그는 이 도로 위에서 난투극을 벌일 지도 몰랐다.
수아는 바들바들 떨면서 차 밖의 상황을 살폈다. 인상이 잔뜩 구겨진 서한이 앞 차로 향했다. 멱살을 쥘 기세였고, 분명히 주먹다짐을 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앞 차의 주인이 문을 열고 내리자, 서한이 운전자의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차에서 강이준이 내린 거였다.
수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지? 왜 강이준이……. 우연인가. 아님, 일부러 사고를 낸 건가.
어두워서 차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서한은 머리꼭대기까지 났던 화를 조금 가라앉혀야 했다.
“너였어?”
이준도 서한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척했다.
“아, 형이었구나.”
“…….”
서한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 눈엣가시처럼 저 자식이 튀어나올 줄이야……. 역삼각형의 상체에 잘 발달된 근육이 셔츠를 잡아먹고 있어서, 웬 운동한 놈인가 했는데.
“급한 일 있었나 봐?”
“어, 좀.”
마땅히 화를 표출해야 될 상황에 참고 있으려니 서한은 배 안이 뒤틀렸다. 자동차 앞 범퍼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그렇게 튀어 나오면 어떡하냐.”
“미안. 사이드 미러를 늦게 봤네.”
“…….”
바로 미안하다고는 하는데, 그 눈빛이 도발적이었다. 전혀 굽신거리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마치 싸움을 걸 테면 걸어보라고 눈으로 말하는 것처럼 뻣뻣했다.
서한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복동생 강이준, 이 녀석 하나가 만만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머리통을 부수고 말 것이다.
지금은 수아도 있고, 예민해진 상태이니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어쩌다가 너랑 사고가 나냐. 우연도 기가 막히네.”
“그러게. 바쁠 텐데, 나 때문에 번거롭게 됐네.”
“어쩔 수 없지.”
이준의 차는 측면이 찌그러져 있었고, 서한의 차는 앞 범퍼가 문제였다. 두 사람은 2차 사고가 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놓고 각자 보험회사에 사고를 접수했다.
서한은 보조석 쪽으로 와서 수아에게 물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냥 택시 타고 갈래?”
“네. 그럴게요.”
수아는 제발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방을 챙긴 후 바쁘게 문을 열고 나왔다가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또 뵙네요.”
“……네, 그러게요.”
“다친 덴 없으세요?”
“없어요…….”
“어쨌든 미안하게 됐습니다.”
“…….”
저 말이 진심일까? 사고는 정말 우연인가. 너무나 태연해서 뭐가 뭔지 도무지 헷갈렸다. 흔들리는 수아의 동공을, 이준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가볼게요…….”
수아는 땅을 보며 꾸벅 인사하고, 종종걸음으로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이준이 수아의 뒷모습을 눈에 새기고 있었다.
조금 전 머릿속에서 들렸던 여자의 목소리는 윤수아였다. 남자는 저 자신이 맞았고.
빗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비가림막 위로 빗방울이 쏟아졌고, 바닥에서 찰박찰박하는 물소리도 들렸다.
갑자기 왜 그게 들렸을까. 잃어버린 기억일까? 일주일간의 기억상실,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해외에서 원나잇을 했다고 해도, 그렇게 풍덩 빠져버렸다고?
이준의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윤수아는 분명 해외에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대화, 그 후에 어떻게 됐을지 몹시도 궁금하다. 성경험이 없는 여자와 처음으로 잠자리를 했나? 가만. 약혼식 때 강서한이…….
“약혼녀 봤어?”
“아니.”
“완전 쌔끈한데. 남자 경험도 없는 애야. 숫처녀라고.”
“…….”
“내가 3년 동안 공을 좀 들였어. 19살 때부터 지켜봤거든.”
“…….”
뭔가 이상했다. 두 사람이 아직 잠자리를 하지 않았나? 동거도 많은 요즘 여자 남자의 과거 연애가 별 문제가 될 리 없다.
하지만 정말로 남자 경험이 없는 여자라고 믿고 있다가 거짓임을 알게 됐다가는, 강서한의 난폭함이 폭발할 수도 있다. 숫처녀라고 자랑하듯 지껄여댔으므로.
잔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시감이 스쳤다. 내가 윤수아랑 잔 게 사실이라면, 그래서 윤수아의 살냄새가 익숙한 거라면…….
머지않아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이준은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바라봤다. 어지러웠다. 무엇이 진짜이고 환상일까.
***
언니바라기인 지안은 수아의 귀가를 기뻐했다. 수아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병아리 같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우리 반 애들이 나한테 반반이라고 불러.”
“우와. 얼굴이 반반해서 그렇구나? 우리 지안이 예쁘니까. 맞지?”
지안의 눈꼬리가 살짝 처졌다.
“아니. 학교 가는 날이 반, 안 가는 날이 반이라서.”
“……그런 뜻이야?”
수아도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응. 나는 이제 애들이 반반이라고 하는 거 싫어.”
“그래. 보란 듯이 나아서 매일 학교에 출석하자. 응? 우리 지안이 할 수 있어. 이번 치료 잘 받고 나으면 놀이공원에 가자.”
“아싸! 신난다~~~! 언니, 나랑 약속한 거야!”
“그럼. 우리 지안이가 타고 싶은 놀이기구는 전부 타게 해줄 거야.”
수아는 지안의 이마에 입을 쪽 맞췄다. 지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면역력이 약해서 항상 마스크를 끼고 있는데, 마스크 안에 있는 입이 얼마나 웃고 있을지 짐작이 됐다.
며칠 후부터 지안은 면역치료를 받기로 했다. 당분간 퇴원을 하지 못하는 스케줄이다. 수아가 지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지안은 긴 눈을 접고 방긋 웃어보였다.
지난 번 골수이식을 준비하면서 빡빡 밀었던 머리가 이제 한 뼘 정도 자라났는데. 또 빡빡 밀어야 될까 봐 노심초사하게 된다.
“언니. 내일 일하러 안갈 거지?”
“응. 지안이 옆에 있어야지.”
“우와. 나 완전 기쁜 날이다. 아하하.”
“그러니까 잘 견디자. 응?”
“알았어~~~!”
지안을 재운 후 수아는 보호자용 침대에 누웠다. 아까 그 열쇠고리를 본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천사. 그걸 간직하고 있었구나.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강이준과 파리에서 3일을 보낸 후 마지막에 그를 떠나오면서, 펜던트 열쇠고리를 탁자 위에 놓아두고 왔다. 그 옆에 다급하게 쓴 쪽지도 펼쳐두었다.
[우리에게는 이별이 나을 거예요.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할게요. -애니-]
과거가 되지 않는 기억이 있다.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추억이라 묻어두고 싶지 않아서 보고 또 꺼내보고 하다 보면, 내가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인지 과거 속에 멈춰 있는 사람인지 헷갈린다.
그 시간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서 목구멍까지 울음이 그득 차오르면, 이 삶이 끝나는 날이 있으리라. 죽음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는 말을 믿어보기로 한다.
지안이가 병을 이겨낸 후 다 크면, 그때는 내 스스로 목숨을 버릴 자유도 있을 테니까.
윤수아, 제멋대로 그를 떠나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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