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런 건 어디서 주웠어?”
“나도 몰라. 어디서 난 건지.”
이준이 대충 기분 나쁘다는 투로 대답하며, 서한에게 달라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 그때…….”
서한은 교통사고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한은 검지에 열쇠고리를 걸고 뱅뱅 돌리다가, 놀리듯 이준에게로 톡 던졌다.
“하여튼 그 물건은 진짜 없어 보여. 창피해.”
“신경 끄시지.”
얼마 후 티타임이 끝났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서한은 고집을 부리던 것과는 달리, 강 회장에게 꼬리를 내리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강 회장 눈 밖에 나봐야 좋을 게 없었다.
“이준이는 올 거니?”
“글쎄요.”
나희의 물음에, 이준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강서한 옆에 있는 윤수아를 보고 있는 게 힘들었다. 끝도 없이 궁금해지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서한과 수아가 인사를 하고 나갔고, 이준은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챙길 것이 있었다. 요즘은 노트북으로 스케치를 하지만 대학 때는 스케치북을 썼다.
틈만 나면 메모를 하고 밑그림을 그려두곤 했는데, 그 스케치북이 큰 캐리어를 가득 채울 정도는 되었다. 서툴지만 아마추어 때의 자유로운 드로잉을 보면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시간. 안방으로 들어온 나희는 몹시도 언짢았다. 가면을 쓴 듯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강 회장에게 질문했다.
“진심이에요? 애들한테 일주일에 한 번 오라고 한 거?”
“어. 뭐 잘못됐어?”
“애들이 곤란해 하는 거 봤잖아요. 사람 초대하는 거, 일도 많구요.”
“구포댁이 할 건데 당신은 뭐가 불만이야? 그리고 애들이랑 잘 지내면 좋지. 언제는 서한이, 아들처럼 생각한다 안 그랬어?”
나희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입매는 일그러져 있었다. 예민하게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억지로 눌렀다.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죠. 그러니까 얘기하는 거잖아요. 애들이 얼마나 바쁜데요, 고작 우리랑 저녁 한 끼 먹는 걸로 일주일에 한 번씩이나 오라 가라 해요?”
“서한이가 저렇게 나오니까, 진짜 며느리가 될 만한 여자인지 아닌지 두고 보려는 거야. 이 얘기는 더 이상 입 밖에 내지 마.”
“……알았어요.”
천천히 등을 돌린 나희의 얼굴이 표독스러워졌다. 괘씸해…….
강서한을 아들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자식은 금수(禽獸)다. 그 수치스러운 말들을 참아낸 건 분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이 집안으로 들어온 후 배운 게 없어서 천박하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다.
그런데 서한이 패륜적인 말을 한다는 것을 알리면, 또 그 화살은 나희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애미가 저러하니 의붓아들이 색마가 되었다고 하겠지.
서한은 밖에 나가기만 하면 주먹에 피를 묻히고 오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난폭한 놈이었다. 이미 인성은 글러먹은 놈이어서 오늘도 개가 짖는구나 하며 넘겼을 뿐이다.
어쨌든 집에서 곱상하고 색기 흐르는 차림을 하고 있어도, 남편이라는 사람은 밖에서 계집질을 하고 돌아다녔다. 자식이라면 정신병원에라도 처넣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강 회장은 첫째 아들이라고 꽤나 감싸고 돌면서, 서한의 사고들을 숱하게 돈으로 막았다. 합의금만 해도 10억은 훌쩍 넘어간다.
사람들은 바퀴벌레처럼 혼외자식이 나오는 집안이라고 얕잡아봤다. 하, 틀린 말은 아닌데, 첫째 아들 강서한이야말로 바퀴벌레처럼 발로 밟아 죽이고 싶은 녀석이다.
분해서 참고 산 만큼 건물이라도 몇 채 더 가져야 성질이 풀릴 거였다. 나희는 작게 씩씩대며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
딸칵, 수아는 안전벨트를 채웠다. 매주 이렇게 만나야 한다고?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모임일 것이다. 두 시간이 스무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빨리 지안에게 가고 싶은데, 서한은 아직 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있었다. 수아가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서한과 눈이 딱 마주쳤다.
욕망이 짙은 서한의 눈빛을 보는 순간 수아는 가시가 걸린 것처럼 목안이 따끔했다.
“……출발 안 해요?”
“뭐가 이렇게 급해.”
서한이 능글맞은 목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내가 키스에 애달파질 줄은 몰랐다.”
“…….”
수아는 불안해서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렸다. 서한이 수아의 안전벨트를 풀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이렇게 남자를 무서워 해. 스킨십은 무서운 게 아닌데. 좋은 거지.”
“…….”
서한의 입꼬리에 비스듬한 웃음이 걸렸다. 수아는 이 때가 가장 싫었다. 서한의 손이 몸을 더듬을까 봐 수아는 뻣뻣해졌다.
“잡아먹으려면 벌써 잡아먹었어. 긴장 좀 풀자.”
“…….”
서한이 수아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난 하루 종일 윤수아 몸 위에 올라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 윤수아는 얼마나 맛있을까. 네 처음을 찢어놓을 때 어떤 기분일까.”
“…….”
“너 남자 경험 없어서, 남자를 무서워하니까 내가 참고 있는 거야. 아주 특별하게 배려해주는 거라고. 아껴놓고 있는데 나도 한 번씩은 욱해. 참아본 적이 있어야지.”
“…….”
강서한이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때면 속이 메슥거렸다. 게다가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라는 말은 스스로 한 적이 없다. 3년 간 지켜 본 강서한의 짐작이다.
침도 삼켜지지 않을 만큼 불편했다. 이실직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니까 키스 정도는 후하게 해줘야 돼.”
“…….”
서한이 수아의 턱을 들어올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서한의 눈동자와 마주칠 때마다 가장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게 나았다.
그래야만 소름 돋는 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다. 수아는 제 옷자락을 꼭 붙들고, 눈을 감았다.
이준은 주차해 놓은 차를 향해 걸어가다가 강서한의 차를 발견했다. 아직 집안 차고에 있었다.
서한의 차와 자신의 차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주차되어 있었으나, 서한의 빨간색 애스턴 마틴의 창문이 슬쩍 열려 있었다.
그 틈 사이로 두 사람의 키스하는 모습이 보였다. 체격의 차이가 압도적이었으므로, 흡사 괴물이 여자를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이준은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머리가 뱅그르르 도는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심장을 손에 쥐고 터뜨리는 것 같았다.
격한 가슴 통증 때문에 이준은 비틀거렸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둬야 했으나 몸이, 눈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이준이 차에 올라탔다. 뺨이 제멋대로 씰룩였다.
차를 먼저 출발시킬까 말까. 두 사람이 더한 짓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이준의 숨소리가 거칠어져만 갔다.
서한의 차 안은 싸늘했다. 두 사람의 몸은 떨어져 있었다. 수아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시선을 떨구고 숨조차 안으로 삼켰다.
서한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딸칵딸칵 소리를 내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그렇게 싫어?”
“아뇨…….”
“그럼 키스하려고 할 때 꼭 그런 표정을 지어야 돼?”
“…….”
조금 전 서한은 키스 직전 멈추었다.
“죽을 것 같은 표정이잖아, 너.”
“…….”
서한이 눈썹을 사납게 올리며 까칠하게 말했다.
“내가 네 젖통이라도 움켜쥐면 그땐 어쩔 건데. 물어뜯을래?”
“…….”
“어쩔 거냐고. 내가 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박으면 어떡할래. 발로 차서 죽일래? 나랑 자는 건 상상해 봤어?”
“…….”
가장 끔찍한 상상이었다. 뱀을 껴안고 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나 아주 거친 놈이야. 하룻밤에도 몇 번씩 해야 잠이 오는 놈이라고. 넌 평생 내 몸 밑에 깔려 있어야 되는데, 네 몸이 아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내가 너 안 놔줄 건데. 앞으로 어떡할래?”
“…….”
“하, 너 하는 꼴 보니까 내가 아주 툭하면 바람을 피우고 다니겠네. 네가 만족은 못 시켜줄 거고, 내가 딴 데서라도 풀고 다녀야지. 안 그래?”
“…….”
그렇게 해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다.
“입이 붙었어? 왜 한 마디도 못해? 도대체 나랑 결혼할 생각은 있는 거야?”
“…….”
공격하고, 무시하고, 빈정거리는데 어느 틈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모두 배려 받지 못한 말인데.
빨리 지안에게 가고 싶을 뿐이었다. 수아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결혼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하, 답답해서 죽겠네. 진짜…….”
할 말이 없어진 서한이 차를 출발시켜서, 그나마 고마웠다. 수아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지안을 생각했다.
지안이와 같이 있다 보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때까지 참자, 참자. 눈물이 나올까 봐 수아는 필사적으로 턱을 깨물었다.
서한의 빨간색 애스턴 마틴이 주택가를 벗어나 큰 길로 들어섰을 때였다. 난데없이 고급 외제차 한 대가 작정한 듯 앞으로 확 끼어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서한이 앞차를 들이받았다.
퍽!!! 드물게도 빨강과 파랑, 두 대의 애스턴 마틴이 사고를 낸 거였다.
서한이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 질렀다.
“이 개새끼!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