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서한의 미간이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이 개새끼가 어디서 까불어. 서한의 눈이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준이 옅은 웃음을 머금은 듯한 얼굴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약혼식 한지 얼마 됐다고. 아버지도 청첩장 돌리기 곤란하시지 않겠어?”
씨발. 육성으로 터질 뻔했다. 서한은 입안에서 맴도는 욕지거리를 억지로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씨, 몇 년 동안 집안에 발을 끊었던 놈이, 아버지 생각을 그렇게까지 한다고? 하, 지나가는 개가 웃겠네.”
“그러게. 근데 갑자기 내가 효자가 된 게, 속이 뒤틀려?”
강 회장이 엄한 목소리를 냈다.
“이 녀석들아. 어떻게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으르렁대?”
이준이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싸우는 거 아닙니다. 의견차이일 뿐이에요. 아버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약혼식 한 지 며칠 됐다고, 결혼식 청첩장 돌립니까.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
서한이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혼한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약혼식을 성대하게 했다. 곧 결혼도 한다고 하면 혀를 차며 손가락질 할 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돌아서면 잊는다. 남의 집 자식이 어떻게 살건, 남 얘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뭘 해도 씹어대기 바쁘다.
그런 것에 신경 쓰면서 살아오지 않았다. 다만 결혼은 가족의 입장이 걸린 문제이니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수아는 아무 할 말이 없어서 눈을 내리깔고 커피 잔만 만지작거렸다.
“이준이 말 중에 잘못된 거 하나도 없다.”
인정하지만, 강 회장이 이준의 편을 드는 모양새가 되니, 서한은 또 발끈했다.
“아버지. 저도 나이가 있잖습니까. 이미 한 번 실패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좋은 사람이 생겼으니 하루라도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이혼이 흠이 아닌 세상이라고 해도 그렇지, 도리라는 게 있다. 쇼핑하는 것도 아니고 이혼, 약혼, 결혼을 1년 만에 다 하는 경우가 어디 있다더냐. 애비 더러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라는 거야?”
“…….”
강 회장이 언성을 높이니, 서한이 한 박자 늦게 말대꾸 했다.
“남의 눈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게 전부 나 혼자 잘 되자고 이러는 거야?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걸 왜 몰라? 회사 이미지는 어떻게 하고? 자나 깨나 회사 생각 한다는 놈이 어째 사리분별을 못하는 게야?”
“…….”
강 회장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길게 보면 손해다. 서한은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강 회장은 쯧쯧쯧 혀를 찼다.
이미 재계에서 강서한은 난폭하고, 입이 험하기로 유명했다. 강 회장이 번지르르한 얼굴로 계집질만 하고 다녔다면 서한은 사건사고도 숱하게 치고 다녔다.
그러니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재혼 자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강 회장이 수아를 흘긋거렸다.
저런 여자 밖에 안 남았을지도 모른다. 심성이라도 곱다면, 서한이 삐뚤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려나.
그러나 사람은 수박처럼 겉으로 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법. 솜털이 보송할 것 같은 저 어린 여자의 속이 어떤지는 두고 봐야 알지 않겠나. 머리 검은 짐승은 함부로 들이는 게 아니니까.
강 회장은 한 발 물러서는 것처럼 온화한 말투였다.
“그럼 일단 집이라도 자주 와. 일주일에 한 번.”
“네? 일주일에 한 번이요?”
서한이 말끝을 올리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좀 지켜보겠단 뜻이야. 너 하는 걸 봐서, 결혼을 빨리 당길지 말지 생각을 좀 해볼 테니.”
“…….”
이 영감탱이가 안 하던 소리를 한다. 무슨 꿍꿍이지……. 서한은 혼란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옆에서 나희도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이 양반이 왜 이러지. 진심인건가.
일주일에 한 번씩이나 강서한을 봐야 한다는 게 부아가 치밀어서 미칠 것 같았지만, 나희는 꾹 참고 부드럽게 얘기했다.
“너희들한테 말 안했지만, 아버지 얼마 전에 쓰러지셨어.”
이준과 서한이 조금은 놀란 눈으로 나희와 강 회장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알리지 말라고 해서 말 안했어. 갑자기 숨 쉬기가 힘들다고, 가슴을 붙잡고 꺽꺽 하는데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김 기사가 업고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갔더니 심장으로 가는 혈관이 막혔대. 스텐트 시술 받고 괜찮아지신 거야.”
“…….”
“아버지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까 가족끼리 좀 더 자주 보면 좋지 않겠어?”
“…….”
서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화목한 가족을 원하시는 겁니까?”
“얼마나 좋아? 난 며느리랑 쇼핑하고, 아들 내외랑 해외여행 다니면서 늙고 싶어. 가족보다 더 좋은 게 어딨니.”
“…….”
“이준아. 너도 와서 아버지 자주 뵈어. 돈이야 있을 만큼 있으니 우리가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부모한테 자주 얼굴 비추는 게 효도야. 우리 죽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
이준은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렸다. 아버지의 병환이 과오를 덮을 수는 없다. 100세까지 꼿꼿할 것 같던 사람이 쓰러졌다는 말에, 조금 의아했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 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나쁜 행실을 덮어주고, 장점을 부각시켜서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건 분명히 잘못됐다. 죽음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별개여야 한다.
“우리도 다른 가족들처럼 노력해 보자. 서한아. 이준아. 응?”
“…….”
서한이 살짝 코웃음 쳤다. 이준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강서한의 저질스러운 말들을 엄마는 잊어버린 건가.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지? 그게 용서가 되는 말들이었나.
엄마는 그저 아버지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아버지의 기분을 추켜세우면서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고 싶은 것이다.
불쌍한 여자였다. 욕심이 넘쳐 추했다. 이런 엄마 밑에 크면서, 이런 엿 같은 집안에서 자라면서, 나도 정상 범주를 넘어서버렸나. 화목한 가족이라니. 이런 개 같은…….
나희가 억지로 화제 전환을 했다.
“그림 좋아하니, 수아야?”
“아, 조금요.”
“난 그림 엄청 좋아하거든.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보면 정말 가슴이 찌릿찌릿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 우리 다음에 미술관에 같이 가자.”
“네…….”
배운 것 없는 나희가 재벌가에 들어와서 철저하게 무시당하다가, 어떻게 하면 좀 고상해 보일까 싶어 눈을 돌린 것이 회화였다. 암기 과목 공부하듯 달달 외운 것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뭐냐면, 아…… 항상 그 여자애 이름이 잘 생각 안 나.”
“음, 뭔데요……?”
“너무 예쁘게 생겼는데, 14살 때부터 친아버지한테 성폭행 당하다가 아버지를 죽였던 여자애. 그 뭐지, 아!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
“난 그거 보러 미술관에 꼭 가고 싶어. 스탕달이 그걸 보고 정신 착란을 일으켰잖아. 그래서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말이 생겼고. 혹시 그 작품, 아니?”
“……네.”
“교과서에서 봤나 보구나. 그 작품이 어디 있었더라…….”
나희가 미간을 찡그리며 기억하려 애쓰고 있었다.
“루.”
“로마 바티칸 미술관! 다음에 이탈리아에 같이 가서 그 작품을 보고 싶어.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거든.”
이준은 수아의 입술이 아주 작게 루, 라고 말하는 것을 읽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로마 바티칸 미술관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는 것을.
순간 이상하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이 느낌이 뭘까…….
그때 이준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한이 이준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상체를 굽혀서 서한은 그것을 주웠다.
차키와 열쇠고리가 함께 떨어진 거였다. 서한이 열쇠고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냐.”
“이리 줘.”
이준이 미간을 좁히며 손을 내밀었다. 서한이 이준의 손바닥 위에 열쇠고리를 올려놓을 듯하다가, 다시 얄밉게 가져가며 키득거렸다.
“아, 뭔데. 좀 보자.”
“…….”
서한이 열쇠고리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낡아도 한참 낡은, 불에 그슬리기까지 한 열쇠고리였다. 천사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 타원 속에 새겨진 것이었다.
그걸 본 수아는 흠칫 놀랐다. 들숨을 가까스로 삼킨 수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도 수아가 극도로 당황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리 내.”
예민해져 있는 이준 때문에 서한은 놀림거리를 하나 잡은 것처럼 신이 났다.
“강이준이 폼 안 나게 왜 이런 걸 달고 다녀? 쓰레기장에서 불에 타고 남은 거라도 주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