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쪽은 뭘 입어도 빛나.
서한은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무슨 뜻이냐? 묘하게 들리네.”
“20대 초반, 뭘 입어도 예쁠 나이라고. 오해했어?”
“…….”
이런 걸로 오해하면 속이 좁아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애매해진 서한은 와인을 한 모금 크게 삼켰다.
흑심을 드러낸 건가 싶어 발끈했지만 또 저렇게 대꾸하니,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이 자식은 사람을 교묘하게 건드린다.
수아에게 마음을 둔 건 아닐 것이다. 항상 자신과 반대편에 서서 돌을 툭툭 던지곤 해왔으니까. 까불다가 언젠가는 내장이 짓이겨져서 죽을 줄 모르고.
나희가 얼어붙은 분위기를 바꿔보려 노력했다.
“수아야. 얼룩제거제 줄게. 와인 색이 너무 짙어서 그대로 놔두면 세탁해도 색이 완전히 안 빠질 것 같은데.”
“네, 고맙습니다…….”
나희가 곧 얼룩제거제를 가지고 왔고, 수아는 그것을 받아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이제 숨이라도 쉬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불편한 자리에서, 이준의 말이 또 수아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쪽은 뭘 입어도 빛나. 내 눈엔 그래. 이런 말로 들렸다.
미쳤어, 단단히 미쳤나 봐……. 수아는 욕실에서 얼룩제거제를 옷에 뿌리면서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어떻게 이런 마음으로 강서한이랑 결혼하지? 평생 시동생을 짝사랑하기라도 할 거야? 어쩌려고 이래? 강서한이 알기라도 하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물론 강서한에게는 한 번도 가슴이 뛴 적 없다. 언제나 그는 무서웠다. 인상을 잘 써서, 같이 있으면 주눅이 들었다.
그가 손이라도 잡으면 피부에 소름이 돋고, 마지못해 키스를 할 때는 정말 싫었다. 결혼할 때까지는 잠자리를 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지만 언제 강간이라도 당할지 모른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서 앉아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와인 자국이 제법 옅어졌지만 수아는 욕실에서 시간을 꽤 지체하고 있었다.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오가고, 언제 그 가시가 자신에게 돌아올지 몰랐다. 그 중에 가장 힘든 건 강이준을 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마음 한 가닥이 요동친다.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천만다행한 일인데, 왜 가끔 눈물이 날 것 같지…….
머리와 가슴이 이토록 다르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나온다.
윤수아. 진짜 끝장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리려고 이러니. 정말 이기적이야. 그가 기억하면 어쩔 건데? 좋은 추억이었다, 비밀로 간직하자, 약속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수아는 진정되지 않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욕실을 나오는데, 문 앞에서 강이준과 딱 마주쳤다.
서로의 숨결이 교차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수아는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내뺐고, 몇 초 동안 공기는 경직되어 있었다.
음, 이준이 목을 가다듬고 얼어붙은 수아에게 말을 건넸다.
“얼룩 많이 지워졌네요.”
“……아, 네.”
수아가 어색한 눈인사를 건네고 이준을 지나치려는데, 그때까지도 수아에게 눈을 떼지 못한 이준이 말을 이었다.
“우리 집 식구들이 좀 그래요.”
“?”
수아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이준을 올려다봤다. 이준의 까만 눈동자와 수아의 반짝이는 다갈색 눈동자가 부딪쳤다. 또 움찔 떨렸다.
“있는 척하려고 갖은 허세를 떠는데, 머릿속은 싼 티 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상처 받지 마요.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면 적당히 그렇게 해요. 스스로 당신을 지키라고.”
“…….”
네, 라고 할 수도 없고, 됐어요, 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가슴은 따뜻해졌다. 편이 되어주려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기억은 못 해도, 내가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충분해. 날 기억하지 못해도 이걸로 충분하다.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나한테. 수아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이준을 지나쳤다.
이준은 잠시 동안 숨을 들이킬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부딪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그녀의 향을 흠뻑 맡게 됐다. 좀 더 맡고 싶어서, 말을 붙이긴 했는데…….
왜 그녀의 살 냄새가 코에 박혀 있는 것 같은가. 잘 익은 복숭아에서 나는 달달한 향. 목덜미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그녀의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키는 듯 아찔했다.
몸이 탄탄해졌다. 자극적인 느낌이 하체에서 퍼져나갔다. 그녀를 안아봤던 느낌, 이건 설명할 수 없지만 한창 젊은 나이기에 성욕 때문인가 했다.
그런데 그녀의 향, 이건 실제다. 언젠가 맡아봤던 냄새다.
마르셸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이 마들렌 쿠키의 향을 맡으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되는데, 후각이 무의식을 건드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간이 시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착각을 일으키는 것에 비하면 후각은 꽤 믿을 만한 감각인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욕실에 들어가는 순간 의문은 거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욕실에 퍼져 있는 그녀의 냄새를 폐부 속으로 깊게 들이마셨다.
피부, 두피, 발끝, 목덜미, 모든 곳에서 찌릿찌릿한 소름이 번져나갔다. 이 향기는 1년 간 맡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무의식이 기억하는 냄새인 것이다. 내가 정말 그녀를 안았었나? 당신은 실제 내 곁에 존재했던 거야? 환상통이 진짜였던 거냐고.
그 꿈은, 꿈이라고 하기에는 감정이 너무 깊고 풍부하다.
이걸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그녀에 대해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을수록 혼란은 가중되었다. 생각해내려 할수록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한참 후 이준이 돌아왔다. 식사는 끝나 있었다. 구포댁이 상을 치웠고, 티타임을 가지기 위해 거실에 있는 테이블로 옮기려는 찰나였다.
나희가 잘 가꿔진 정원에 조명을 켰다. 집안에서 식물원을 감상하는 듯했다.
또 버튼 하나를 누르자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왔고, 음악에 맞춰 분수대의 물줄기가 높아졌다 작아졌다 하며 춤을 추었다.
수아는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지안이 보면 정말 좋아할 텐데.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아픈 아이를 두고 일도 하고, 혼자 볼 일도 보러 다니고, 미안할 때가 참 많다. 그래도 이해해 줘. 언니는 너 살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거야.
곧 굵은 나무를 베어 만든 테이블 위에 향이 좋은 홍차와 커피가 놓였다. 접시 위에 다채로운 과일들이 그림을 그린 것처럼 예쁘게 놓여 있었다.
이 집 며느리가 되려면 과일도 묘기 수준으로 깎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기 아까울 만큼 보기가 좋았다. 강 회장이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이준아. 애비를 도와줄 생각은 정말 없는 거냐.”
“그 문제는 여러 번 확고하게 말씀드렸을 텐데요.”
서한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듣기 싫은 소리였다. 서한의 표정을 눈치 챈 나희가 서한에게 과일을 권했다.
“서한아. 애플망고 먹어 봐. 오늘 사온 건데 맛이 아주 제대로야.”
“……네.”
서한은 대답만 하고,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식사는 끝났으니 적당히 눈치를 봐서 결혼을 빨리 시켜달라고 얘기를 꺼내볼 참인데, 강 회장과 이준의 대화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 두통은 괜찮고?”
“거의요.”
“하필이면 그런 사고를 당하다니. 운이 없었어.”
나희는 옆에서 거들었다.
“운이 없었다고만은 할 수 없죠. 몸은 거의 다치지 않았잖아요.”
이준에게 무슨 사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수아가 처음으로 먼저 질문을 했다.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고를 당하셨어요?”
나희가 수아에게 포크로 애플망고를 찍어 건네며 설명했다.
“딱 1년 전이었나?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어. 며칠 동안 의식이 없었지. 몸은 멀쩡했는데 말이야. 그러고는 그 전에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기억 못하더라고. 이준아. 아직도 그래?”
“…….”
이준이 별 대답 없이, 눈을 내리깔고 커피를 마셨다. 긍정이었다.
“난 엄마도 못 알아보나 싶어서 간이 철렁했어.”
“…….”
수아는 그제야 그의 상태가 이해되었다. 어쩌면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닐까. 얄팍한 의심도 했는데, 정말 교통사고로 인한 기억상실인 것이다.
그 덕분에 강서한과 결혼할 수 있으니, 신의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날 기억한다면, 날 형수로 받아들일까? 아마 추억이고 뭐고 간에, 볼썽사납게 싸울지도 모른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서한이 강 회장을 당돌하게 바라봤다.
“저희 둘, 빨리 결혼하고 싶은데요.”
“…….”
강 회장은 수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이가 어린 것 말고는 눈에 차는 데가 없었다.
약혼식이라도 한 후 시간을 벌면서 서한의 마음이 변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서한이 조금도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내니 짜증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강 회장의 팔자주름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도 불편한 듯 숨을 죽이고 눈동자를 굴려댔다. 그때였다.
“결혼은 좀 이르지 않나?”
“…….”
삐딱한 목소리로 끼어든 건, 이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