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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95)

<6화>

“어머. 너희들 왔구나.”

나희는 현관에서 썩 달갑지 않은 서한과 수아를 겉으로는 기쁘게 맞이했다. 수아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셨어요.”

“자주 보니까 이렇게 좋네. 일하고 온다고 수고가 많았다.”

나희는 수아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며 집안으로 이끌고는, 수아가 신고 온 낡은 구두를 흘긋거렸다. 구두 코앞이 닳아서 벗겨져 있었다. 어쩜 저런 걸 신고 오는지. 

뺨이 굳어질 뻔했으나, 이내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구포댁이 육회랑 연포탕을 했어. 음식 솜씨가 아주 좋거든. 수아 네가 아직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서한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했는데. 괜찮니?”

“네. 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서한은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아버지는요?”

“이제 오실 거야. 오늘따라 조금 늦으시네. 배고프겠다, 너희들.”

“괜찮습니다. 기다려서 같이 식사해야죠.”

집안에 들어온 수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라마 촬영장소로 써도 될 법한 대저택이었다. 

정원도 넓어서 깜짝 놀랐는데, 실내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천장이 워낙 높았다. 

대리석 바닥은 사람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깨끗했고, 새어머니의 취향인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람 기죽일 만큼 화려했다. 

고가의 미술품들을 위해 미술관 이상으로 세련된 조명을 설치하여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제대로 눈길을 받을 수 있도록 전시해놓은 것을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모네의 연꽃 그림이 걸려 있었고, 천장에서 내려오는 은은한 불빛이 신의 계시 마냥 다비드상을 정확하게 비추고 있었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수아가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을 눈여겨보고 있는데. 

“이준이도 온다고 했어.”

“…….”

나희의 말에, 서한과 수아의 표정이 동시에 사라졌다. 걸쩍지근한 얼굴이었던 서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준이가 온다구요? 몇 년간 이 집에 얼씬도 안 하던 녀석이 약혼식에도 오고, 오늘도 오고. 무슨 일이래요?”

“자주 봐야지. 가족인데.”

“…….”

서한은 이준의 존재가 늘 못마땅했다. 강 회장은 명석한 이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자신이 운동을 할 때는 이준과 강 회장이 비즈니스에 대해 의논하며 친밀해 보이는 게 싫었고, 이제는 자신이 아버지를 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준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해서 부아가 치밀었다. 

이준이 몇 년 동안 발걸음을 안 하기에 끝까지 그러기를 바랐다. 집안의 그 많은 재산도 자신의 몫이 될 테니까. 저 불여우 같은 안나희와 큰 싸움을 벌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방에 옷 걸어두고 나올게요.”

“그래, 알았어. 저녁 준비하고 있을게.”

서한은 수아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수아는 이준이 온다는 말 때문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왜 강이준이 여기 올 거란 생각을 못했을까. 그의 부모님 댁인데 말이다. 

강이준도, 강서한도 각자 집을 나와 살고 있으니 당연히 오늘은 보지 않을 줄 알았다. 앞으로 결혼을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보게 되는 걸까. 그때마다 간이 쪼그라들 텐데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 벌 있는 원피스 중에 하나는 많이 낡은 거여서 이걸 입었다. 흰 바탕에 주황색 꽃무늬가 프린트 된 이 옷은 프랑스 파리에서 입었었다. 

그는 날 기억하지 못하니까 괜찮겠지? 혹시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가방 이리 줘.”

“아, 네.”

서한에게 가방을 건네고 욕실에서 손을 씻었다. 그가 온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이후로는 집을 구경할 여유가 없었다. 

잠시 후 강 회장이 집으로 왔고, 거의 동시에 이준도 왔다. 수아가 쭈뼛거리며 그의 눈을 보지 않고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네. 자주 뵙네요.”

강 회장이 손을 씻으러 들어간 사이 서한이 이죽거리며 이준에게 인사했다. 

“우워. 갑자기 이 집에 있는 꿀단지를 탐내는 사람이 있네.”

“전부 다 형 거라고 생각했나 봐?”

“…….”

이준이 똑같이 이죽거리며 되받아치자, 서한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이준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미소 지었다. 

“농담. 나 죽으면 파티라도 할 사람처럼 왜 이렇게 얼었어?”

“…….”

이준은 서한의 어깨를 툭 한 번 치고, 지나쳤다. 이 새끼……. 서한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가볍게 어깨를 건드린 것에 불과했으나 제법 힘이 실려 있었다. 

이 자식은 이제 상당히 위협적이다. 자신의 선수시절 전성기 때처럼 몸을 불린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쉽게 저 녀석을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몇 년 전부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이기겠지만. 

두 남자의 묘한 신경전에, 수아는 더욱 긴장됐다. 수아가 이준의 얼굴을 흘긋거리며 그의 감정을 읽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가끔 또렷하게 부딪쳐 오는 눈동자가 낯설었다. 날 기억한다면 저런 눈으로 보지는 않을 텐데……. 설마, 계획적인 걸까? 

머리로는 의심하면서, 가슴은 대책 없이 떨렸다. 그는 첫눈에 반했던 얼굴 그대로였다. 

파리에서 봤던 어떤 서양인보다, 그리고 어떤 동양인보다 흠 잡을 데 없는 외모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남자. 

귀티 나게 잘생긴 얼굴은 수많은 여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고막을 휘감는 목소리는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훤칠한 키와 건장한 체격 덕분에 압도적인 비율을 자랑하면서 패션 센스도 좋았다. 게다가 함께 있는 내내 다정하고 따스했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이 좋아서, 매분 매초 심장이 움찔거렸다는 걸 그는 알까. 

나는요, 당신의 모든 것을 기억해요. 

그때 나희가 손짓했다. 

“얘들아. 식탁에 앉으렴.”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파티를 해도 될 만큼 넓은 식탁이었지만 수아는 이준과 맞은편에 앉게 됐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안나희는 강 회장을 추켜세우며 그의 기분을 맞추기에 바빴고, 적당한 대화가 오고 갔다. 나희가 눈웃음 지으며 수아를 바라봤다. 

“편하게 수아라고 불러도 되지?”

“그럼요. 편하게 부르세요…….”

“음식 입에 맞아?”

“네. 전부 맛있어요.”

“이준아. 네가 와서 아버지 기분 엄청 좋은 거 보이지? 평소에는 안 웃으시는 양반인데.”

그 말에, 서한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서한이도 수아랑 자주 와. 수아도 이제 우리 가족이잖아.”

“……네. 그럴게요.”

서한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준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질이 느렸다. 

윤수아가 입고 있는 흰색에 주황색 꽃무늬 원피스. 저 옷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여자들의 옷을 유심히 보고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왜 눈에 박힌 것처럼 선명한 느낌이 들지? 혹시, 꿈에서 봤던가? 

이준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아주 엷게 신음했다. 맞다. 꿈이다……. 꿈에서 그녀가 저 옷을 입고 있었다. 유럽의 광장 같은 넓은 곳에서. 

작년에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그러니 그 배경은 이탈리아일 텐데. 윤수아는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다고 했고. 

하, 아무리 퍼즐을 맞추려 해도 커다란 조각이 맞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너는 이토록 강렬한데, 정말 그 꿈은 환상인가. 

“와인 한 잔 정도는 하지, 그래?”

“네. 그럴게요.”

수아는 서한이 건네는 빈 와인 잔을 받았다. 맞은편에 있는 이준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웠다. 

서한이 와인을 따라 주는데, 갑자기 와인이 콸콸콸 나오면서 수아의 원피스에 검붉은 와인이 제법 튀었다. 

“이런, 실수했네.”

“괜찮아요.”

“티가 많이 나는데.”

서한이 물티슈를 건넸다. 수아는 물티슈로 원피스 앞자락을 닦으며 서한이 무안해할까 봐 덧붙였다.

“싼 거라서 괜찮아요. 빨면 돼요.”

“이제 싼 거 입지 마. 비싼 거 사줄게.”

“안 그래도 돼요…….”

와인 잔을 입에 가져가던 서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잔을 탁 놓았다. 상당히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내가 안 괜찮아. 그 옷, 오늘 입고 버려.”

“…….”

물티슈를 쥔 수아의 손이 멈칫했다. 하필이면 입고 있는 옷을 버리라고 하니, 수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혼자만 발가벗겨진 것 같았고, 몸에 걸친 싼 옷에 대한 불만이 네가 싸구려라는 말로 들렸다. 어떻게 해도 이 사람들에게 걸맞지 않으니. 

그때 한숨을 쉬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준이 끼어들었다. 

“싼 게 어때서. 편하고 어울리면 되지.”

서한이 못마땅한 얼굴로 대들었다. 

“내 여자야. 나랑 같이 다닐 거니까 보는 눈들이 있다고.”

서한은 얼어붙은 수아에게 꾸짖는 듯한 음성으로 말을 보탰다. 

“윤수아, 네가 싸구려를 입으면 나까지 싸구려가 돼.”

“…….”

수아가 모멸감에 눈시울이 붉어질까 봐 숨을 죽이고 있는데. 이준이 서한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비싼 옷을 입어야 자기 자신이 꼭 비싸진다고 생각하나 봐? UF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강서한의 자존감이 어디 갔을까.”

“…….”

이번에는 서한의 인상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이준은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눈으로 수아를 보다가 매끄럽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 그쪽은 뭘 입어도 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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