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탈리아였단 말이지……. 꿈속 배경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광장인지 프랑스의 파리 시청인지 헷갈렸는데.
이준은 커피를 진하게 내린 후 창가에 섰다. 1년 전 사고가 있었다. 해외를 다녀온 직후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캐리어를 끌고 택시를 탔는데, 고속버스가 택시 뒤를 들이받은 거였다.
눈을 떴을 때 에어백이 제대로 작동했고, 차가 반파된 것에 비하면 몸은 움직일 만했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의식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차에서 매캐한 가스 냄새가 났다. 뒤 트렁크에서 불이 붙은 거였다. 이준은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으로 가서 축 늘어진 택시기사를 끌고 나와 안전한 곳에 눕힌 후 이준은 의식을 잃었다. 차는 곧 불길에 휩싸였고,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곧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몸의 상처는 타박상, 찰과상 정도에 불과했으니 의료진들은 운이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이준은 깨어나지 못했다. MRI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오랜 수면 상태라고 했다.
그로부터 5일 후 이준은 밀린 잠을 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깨어났다. 그러나 사고 전 대략 일주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딜 다녀왔는지, 가서 무얼 했는지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여권과 폰, 노트북, 신분증 같은 것들은 불에 타서 새로 장만하거나 재발급해야 했다. 기억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단기 기억상실은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납니다. 편하게 일상으로 돌아가 있다 보면 어느덧 그날의 기억들이 떠오르실 겁니다. 영구적으로 복구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어요.”
의사의 말에 끄덕이며 이준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1년에 서너 번은 혼자 유럽을 다니면서 건축물과 미술관을 구경했었다. 건축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일주일뿐인데 뭐 어때. 몇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사진을 찍고, 드로잉을 했을 게 뻔하다. 그동안의 작업물들이 아까웠지만 찾을 방법이 없으니 포기해야만 했다.
이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주머니에 들어있던 열쇠고리를 꺼내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반질반질 닳아 있는 열쇠고리는 천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양이었다.
흔한 디자인이지만, 골동품처럼 낡고 허름해서 더욱 경건해 보였다. 사고가 났을 때 이 물건만은 살짝 그을렸을 뿐 부서지지도, 박살나지도 않았다. 참 신기했다.
어디서 샀는지, 어떤 경로로 얻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억이 나지 않으니 사고 전 마지막 여행에서 가지게 되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이것은 소중한 물건이었을까…….
그 사고 이후 현실에서 몽환적인 느낌을 자주 받는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이 느려지고, 뿌옇게 보일 때가 있다. 뇌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거다.
그러면서 애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런 상상도 해봤다. 혹시 애니는 여행 중에 만났던 여자일까.
어김없이 피식, 비웃음이 나왔다. 로맨스를 꿈꾸고 있었던가. 아버지나 강서한이나, 가족력이 징글징글한데 말이다.
여행 중에 한 번도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 늘 혼자 다녔다. 그랬기 때문에 그 일주일간 기억을 상실한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국내에서 원나잇을 여러 번 해봤지만, 동물들의 교미 같은 행위였다. 누구여도 상관없고, 성욕을 발산하는 도구로서 상대의 몸을 이용하는 본능적인 섹스였다.
섹스 후에 그 상대가 간절하게 느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돌아서면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꿈속 애니는 강력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마치 몇 년을 만났던 연인에 대한 감정 같았다. 여자와 깊은 감정을 교류해본 적이 없으므로, 사고 후유증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왔는데 애니를 실제로 만나게 되다니……. 누가 머리를 조종하면서 가지고 노는 걸까. 어느 누가. 도대체 왜.
***
수아는 카페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앞치마에서 지잉지잉, 진동이 울렸다. 발신번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수아는 복도로 뛰어나가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네.”
-뒤질래, 이년아? 이자가 입금 안 됐다고. 씨발, 누구는 땅 파서 먹고 사나.
누가 들을까 봐 수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죄송해요. 다음 주 화요일에 입금할게요. 제발 한 번만 부탁 드립니다…….”
-이년이 뽕이라도 맞고 사창가에서 굴러봐야 정신을 차리지. 씨발, 하루에 30명씩 상대해서 가랑이가 너덜너덜해지고 굳은살 박혀봐야 남의 돈 귀한 줄 알 거야. 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입금 안 되면, 한국병원으로 가서 아픈 네 동생 장기부터 도려낼 줄 알아.
“…….”
-알아들었냐고, 이 쌍년아?
“죄, 죄송합니다…….”
수아는 몸서리치면서 머리를 한참이나 조아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 한 통을 받았을 뿐인데, 탈진한 것 같다.
후, 후, 심호흡을 내뱉는데 뒤늦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일을 계속 해야 하니, 눈이 벌게지기 전에 마른 침을 삼켰다.
사채빚까지 있다는 걸 알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을까. 잔뜩 밀려 있는 병원비를 강서한이 해결해줬다.
앞으로 들어갈 지안의 병원비를 위해서는 결혼이 꼭 필요했다. 그런데 사채는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막막했다.
또 지잉지잉, 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강서한이었다.
-저녁에 우리 집에 가자.
“오늘 저녁이요?”
-어. 결혼 빨리 시켜달라고 하려고.
“……알았어요. 갈게요.”
-옷은 뭐 입었어?
“그냥 원래 입던 옷이요. 청바지에 티셔츠…….”
-원피스 같은 건 없어? 아니야, 됐어. 그냥.
그가 한숨을 푹 내쉰 후 전화를 끊었다. 누추한 옷차림이 싫은가 보다.
집에서 기다리다가 부모님을 뵈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일하다 가는 건데 옷이 괜찮을 리가 있나. 갑자기 가자고 했으면서.
일하는 동안 머릿속을 꽉 채운 건 강이준이었다. 1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그를 만난 이후부터 쭉 그래왔다.
몸과 마음을 다 내준 건 강이준인데, 그의 형 강서한과 결혼한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여자가 되고 있다.
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으니까.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아는 티셔츠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디저트를 많이 구웠는데 안 좋은 냄새가 나려나. 집에 가서 옷 갈아입을 시간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집으로 데리러 오실래요?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그래, 그럼.]
수아는 퇴근 후 부리나케 집으로 갔다. 옷도 몇 벌 없지만 청바지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오래된 구두도 꺼내 신었다. 강서한의 문자가 왔다.
[집 앞.]
수아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고 서한의 차에 올라탔다. 혀로 훑어 내리는 듯한 시선이 싫어서 수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얼굴 좀 보자.”
“…….”
수아는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쭈뼛거리며 서한을 바라봤다. 눈을 한 번 마주치고 어색하고 웃고는, 시선을 무릎으로 떨구었다.
서한이 차를 출발시켰고, 얼마간 대화가 끊겼다. 서한은 핸들 위에서 손가락을 한참 동안 까닥거렸다. 그의 기분이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아서 수아는 더 긴장이 됐다.
“왜 우리 사이는 이렇게 좁혀지지 않을까.”
“…….”
삐딱하게 눈썹을 들어 올린 서한이 수아를 힐긋거렸다.
“섹스를 안 해서 그런 거라는 생각 안 들어?”
“…….”
“내가 네 빛 3천 갚아줬잖아. 앞으로 들어갈 치료비도 대줄 거고. 그런데 넌 어떻게 다리 한 번을 안 벌려 주냐.”
“…….”
수아는 안전벨트를 꼭 쥐고 눈을 내리깐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런 배려 없는 대화가 대부분이어서 항상 혼나는 기분이었고, 그를 만나면 물 한 모금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불편했다.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말 그대로 갑과 을이었으므로. 차안의 공기는 더욱 냉각되어서 숨도 내뱉기 어려웠다.
***
이준은 퇴근길에 엄마 안나희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네. 말씀하세요.”
-지금 서한이랑 수아 오기로 했는데. 혹시 시간 되니?
“…….”
-저녁 안 먹었으면 먹으러 오라고.
“…….”
나희는 이준이 강 회장 눈 밖에 나지 않기를, 그래서 더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기를 필사적으로 바랐다.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아들의 대답이 없자, 나희는 겸연쩍어하며 말을 이었다.
-바쁘면 안 와도 돼. 얘들이 갑자기 오기로 해서, 나도 정신이 없네.
“…….”
-엄마 전화 거르지 좀 말고. 저녁 잘 챙겨.
“갈게요. 지금 당장.”
-정말 온다구?
“네.”
짧게 대답한 후 이준은 전화를 끊었다. 차를 급하게 유턴했다.
그녀를 볼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녀를 기다려온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아니, 내 삶 전체가 그녀 하나를 위해 숨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그녀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애니인지, 윤수아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그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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