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95)

<4화>

정말 그였다. 강이준……. 이준을 먼저 발견한 건 수아였다. 심장이 툭 터질 것 같았다. 몸에 힘이 쫙 빠지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약혼식장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꿈에서도 줄곧 그리워했던 남자였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그 순간들이 잊히지 않았다. 

1년 전 기적처럼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이 생겼고, 용기를 내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연히 파리에서 그를 만나 함께 보냈던 3일은, 초라하기 그지없던 자신의 삶에도 화양연화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 일대의 사건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화양연화. 

프랑스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배우보다 더 멋진 남자를 만나 뜨거운 연애의 감정을 느꼈던 것도 다시는 오지 않을 행운이었다.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가려 했는데 약혼식장에서 만날 줄이야……. 

강서한이 동생이라고 그를 소개하는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곳에서.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강이준, 그가 나를 모른다. 처음에는 모르는 척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다행한 일인데, 눈물겹게 감사한 일인데, 마음 한 구석이 이상하다. 아직도 그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일까. 

파리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곱게 나눠 가지고 있기를 바랐었다. 그렇게 가슴속에 묻고 각자 잘 살기를 바랐는데, 그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구면이냐고 묻다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수아 씨. 재고 정리 좀 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카페에서 진열장 쇼케이스를 닦고 있던 수아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무슨 정신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표정관리가 안 됐다. 수아는 창고로 가서 물건들을 정리하며 재고 리스트를 기록해 나갔다. 

수아는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제 8살인 동생 윤지안은 재생불량성 빈혈을 앓고 있어서, 혈액 병동을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다. 

잘 먹고 잘 쉬면 낫는 일시적인 빈혈이 아니었다. 골수에서 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희귀난치병이었다. 

4살 때부터 몸에 멍이 잘 들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을 쌕쌕거렸다. 자라는 중이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5살 때는 픽픽 쓰러졌다. 

그러면서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됐다. 경증에서 중증으로 발전했다고 했고, 그때부터 수혈을 받기 시작했다. 

수혈의 횟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 후 면역치료를 하게 됐는데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남은 방법은 사람들이 흔히 골수이식이라 부르는, 조혈모세포이식 뿐이었다. 

그마저 완벽하게 일치하는 골수를 찾지 못해서, 절반이라도 일치하는 수아의 것을 이식했다. 골수는 잘 생착하는 듯싶더니, 6개월 후 모든 수치들이 중증 혈액질환을 나타냈다. 

골수이식은 실패였다. 다시 예전처럼 수혈을 받지 않으면 한 달도 버티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재고물품 리스트를 체크하고 있는데 지잉지잉, 폰이 울렸다. 옆 침대에 있는 김민주라는 환자의 번호였다. 

갑자기 지안이 상태가 나빠진 건가? 병원에서 걸려오는 전화에는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언니, 나야. 지안이.

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놀랐잖아. 꼭 필요한 일 아니면 폰 빌려 쓰지 말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안 좋아한다고.”

-할 말이 있어서 3분만 빌려 주세요, 하고 공손하게 말했어…….

풀이 죽은 8살 아이의 목소리가 퍽 애처로웠다. 

“할 말이 뭔데.”

-미안해. 어제 너무 아파서, 그만 살고 싶다고 한 거.

“…….”

코끝이 찡해졌다. 살아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아이가 어제는 그만 살고 싶다고 했다. 너무 아프다고, 이렇게 아픈 건 싫다고 했다. 

신께 간절히 묻고 싶다. 이 고통을 우리에게 준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죽고 싶다’라는 말을, 우리는 죽음의 최전선에 내몰려 있으면서도 목구멍까지 삼키고 산다. 

살고 싶어도 맘껏 살지 못하는 우리는 하루하루 눈물겨운 투쟁을 해야만 내가 주인공이 되는 화려한 날이 아니라, 그저 그런 날이라도 살아볼 수 있다. 

우리의 살고 싶다는 말은 ‘잘’ 살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생존을 뜻한다. 꽃길 같은 미래를 바라지 않는다. 죽어가는 걱정에서만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아무 바람도 없이 그저 아파도 좋으니 곁에 있게만 해달라고, 따뜻한 체온을 가진 아이가 차갑게 식지만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이 남아있다는 것, 이것마저 우리에게는 간절한 희망이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에서 만났던 강이준에게 Annie, ‘기도하는 자’라는 이름을 말해줬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다.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답답한 현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수혈을 하도 많이 받다보니 지안의 몸에 철분이 쌓였다고 했다. 그걸 놔두면 아주 위험해서 철분을 빼내는 약을 먹어야 하는데, 이 약은 엄청나게 구토를 해대는 부작용이 있었다. 

살기 위해서 이 약을 먹는 건데, 이 약은 모든 음식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다 토해내고 위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지안은 머리맡에 세숫대야를 놓고 끊임없이 토했다. 

기진맥진한 지안은 목과 입안이 헐어서 피를 쏟았고, 눈에 실핏줄도 터졌다. 지켜보는 사람은 대신 아파주지 못해 마음이 찢어진다는 걸 네가 알까. 

수아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살짝 냉랭하게 말했다. 

“미안하긴 해?”

-응. 많이. 내가 그런 말 하면 언니는 힘이 빠질 텐데, 크게 잘못했어. 생각할수록 작은 잘못이 아니더라고.

“…….”

-반찬에서 당근을 뺀 건 작은 잘못인데, 약을 안 먹겠다고 고집부리는 거랑, 죽고 싶다고 하는 거. 이건 큰 잘못이야. 

지안은 또박또박 예쁜 목소리로 큰 잘못과 작은 잘못을 구별했다. 우리 지안이는 말을 잘 한다. 일기장에 지안의 커가는 모습을 기록해나가는 것이 참 즐겁다. 

“앞으로 그러지 마. 응?”

-알았어.

“오늘 구토는 몇 번 했어?”

-한 번. 약 토하지 않으려고 심하게 노력했어. 얼마나 노력했게?

“얼마나 노력했는데.”

-약 먹을 때마다 한 시간 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어. 천장만 보고.

지안은 오늘 철분 빼는 약을 1/2로 줄였다. 

“아유, 정말 잘했네.”

-사는 게 아주 지겨워질 뻔했는데? 

“그걸 견뎠으니까 오늘 컨디션이 좋아진 거잖아. 하여튼 잘했어. 우리 공주님.”

-히히. 보고 싶어. 빨리 와. 

“응. 나도 보고 싶어. 지금은 일 해야 되니까 끊을게.”

수아는 배시시 웃으면서 통화를 마쳤다. 

***

그녀다. 바람에 애니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린다. 하늘거리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애니가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목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귀를 기울여보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기다란 눈매가 접히고, 입가에 보조개가 패인다. 


저 예쁜 웃음이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번 생은 너를 위해 살겠다고 또 다짐한다. 독이 퍼진 것처럼 심장이 움찔거린다. 


이곳이 유럽인 것 같은데 뿌옇게 보여서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광장처럼 넓은 공간에 사람이 많다. 프랑스 파리 시청? 이탈리아 로마 베네치아 광장?


그녀가 손짓한다. 다가가 떨리는 손을 뻗으면 그녀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나는 또 휘청거리며 혼자 서 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슬픔과 절망에 신음하면서. 

“하아…….”

이준이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5시 21분. 애니가 그 여자 윤수아라는 건 확실하다. 항상 같은 꿈이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배경이 해외인 것 같다. 또 새로운 것을 알려주려나. 

좀 더 떠올려 보려 해도 머릿속은 백지가 된 뒤였다. 이준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흩날렸다. 

10대 때부터 형을 죽이고 싶었던 욕망, 그것의 발현인가. 너무 강렬한, 금지된 욕망이었기에 애니를 윤수아라고 착각하는 것인가. 

정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내가 결국 강서한을 죽이도록, 나의 무의식이 꿈속에 애니를 삽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지몽처럼 말이다. 만나기도 전인 1년 전부터 그녀를 꿈속으로 불러내 사랑하게 되었으니. 

미쳤다……. 죽이고 싶은 이복형의 여자를 탐내고 있다. 결국 파국으로 이르는,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나는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애니에 대한 갈증이 이제는 참아지지 않는다. 매일 소금물을 퍼마시는 것 같다. 

게다가, 왜 내가 당신을 안아본 것 같지……. 망할 욕정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여자를 안아본지가 꽤 되었으니까. 

출근한 이준은 신 비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신 비서가 오자마자 이준이 대뜸 물었다. 

“신 비서. 그때 내 사고 말이야.”

“네.”

1년 전쯤 이준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내가 그 전에 어디를 다녀온다고 했었지?”

“이탈리아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고민하시다가, 이번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쭉 둘러볼 거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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