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95)

<3화>

이준은 심장이 움찔거렸다. 매일 꿈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자신을 부서뜨리던 여자였다. 

눈앞에 나타난 것도 믿을 수 없을뿐더러, 강서한의 여자라는 것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이 또 한 번 이준의 심장에 생채기를 냈다. 

그녀는 꿈속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투명한 눈망울이 맑고 깊었다. 콧대가 반짝였고, 생기 있는 두 뺨과 살짝 벌어진 입술은 아름다웠다.

이준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녀는 어색한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수아라고 해요.”

“……저는 강이준입니다.”

이준은 머리가 멍했다. 내가 그동안 뭘 꾼 거지. 혹시 지금 꿈속으로 들어와 있는 건가. 

오늘은 다른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또 나를 부를까. 또 사라져버릴까. 이 여자가 정말 애니라고? 

미치지 않고 견디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얘는 내 동생이야. 잘 나가는 건축사무소 대표이고.”

“네…….”

어색한 분위기 속에 놓여 있는데 강 회장이 서한을 불렀다. 

“잠시만.”

서한은 이준과 수아를 두고, 혼자 강 회장에게 갔다. 인사할 곳이 워낙 많아서 인사가 큰일인 자리였다. 그녀가 당황할 정도로 이준은 그녀를 뜨겁게 응시했다. 

“혹시 우리가 구면입니까.”

“……아니오. 처음 뵈어요.”

“윤수아가 본명이에요?”

“네. 본명이에요.”

물을수록 머릿속은 더 엉켜졌다. 누군가가 휘휘 저어버리는 것 같다.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걸까. 꿈속에서는 선명했지만, 깨고 나면 항상 그녀의 얼굴이 흐릿했다. 

목소리는…… 그녀가 목소리를 냈던 적이 있던가. 웃음소리가 났었던가. 소리 없는 그녀의 미소에, 혼자만 그녀의 웃음소리에 둘러싸인 것 같은 환청을 느꼈던가. 

우습게 들리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준이 물었다. 

“혹시 영어 이름이 있습니까.”

“아, 해외에 나간 적이 없어서요. 생각을 안 해 봤어요…….”

“…….”

애니가 아니다. 아니야. 다행인 일이다. 이 여자가 애니라면 무서운 일이 벌어지게 될 거다. 

금세 서한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아버지가 소개시킬 사람이 많나 봐. 저리로 가자.”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났다. 이준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강서한과 윤수아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는 모습을 지켜봤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가 된 것 같았다.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도 없었고, 징그럽게 남아 있는 이 미련을 끊어낼 수도 없었다. 이토록 혼란스럽기는 처음이었다. 

나희가 다가와 이준의 어깨를 톡 쳤다. 이준은 황급히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신부는 뭐하던 사람이에요?”

“뭐, 카페 직원이라던데. 로얄 백화점 7층에 있다고 했던가.”

“…….”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웃음과 음악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가짜 같았다. 정신이 혼미했다. 이준은 호텔을 빠져나와 최영수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지금 정찬우랑 스파링 할게요.”

-알았어. 준비할게. 

잠시 후 이준은 격투기 체육관으로 왔다. 상반신을 탈의하고, 파이트 쇼츠를 입었다. 

187센티미터에 87킬로그램까지 불린 몸은 조각 그 자체였다. 오랜 시간 강도 높은 운동으로 다져진 가슴과 복근, 등 근육이 선명하고 굵었다. 

이준은 준비 운동으로 샌드백을 두드렸다. 주먹에 꽂히는 알싸한 느낌과 퍽, 퍽, 하는 둔탁한 소리만이 진짜인 것 같았다. 

40대 중반의 최영수 코치가 이준의 복싱글러브와 마우스피스를 챙겼다. 

“시합 준비하는 놈이라 풀스파링이야.”

“네.”

스파링도 힘을 적당히 쓰면서 기술 연습을 하는 일반 스파링이 있는데, 지금은 거의 전력을 다하는 풀파워 스파링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늘 연습 경기 상대는 두 달 후에 UF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에 도전하는 정찬우였다. 

“정찬우, 요즘 물 올랐어. 레슬러 출신이라 그래플링 기술 좋은 거 알지?”

“네.”

“비슷하게 가면 힘들어져.”

정찬우는 연습도 실전처럼 하는 선수라, 매너 없기로 유명해서 스파링 상대를 찾기가 힘들다고 했다. 링 위에 올라가면 눈이 돌아버리는 놈이었다. 

레슬링을 했기 때문에 메치고, 제압하고, 조르고, 누르는 그래플링 기술이 뛰어났다. 

“길로틴 초크 기술이 엄청 늘었다고 했어. 지금은 그거 써먹어 보려고 완전 달려들 거야. 걸렸다 싶으면 그립 제대로 완성되기 전에, 바로 사이드로 몸 빼.”

길로틴 초크는 상대방의 머리를 옆구리에 끼워서 목을 조르는 기술이다. 기도를 막아서 질식시키기 때문에 제대로 걸리면 30초를 넘길 수가 없다.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정신을 잃는다. 

“테이크다운 들어가려고 애쓰지 마. 길로틴 초크 걸릴 확률이 놓으니까. 본능적으로 움직이지 말란 말이야. 거리 두고, 펀치 날려. 킥으로 데미지를 만들라고. 넌 킥도 펀치도 좋으니까.”

“네.”

“정찬우 앵클록은 세계에서 제일이야. 발목뼈 부러져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버티지 마. 알았어?”

“네.”

앵클록은 아킬레스건에 압박을 주는 기술로, 고통이 엄청나다. 이 순간에도 이준은 강서한과 윤수아를 떠올리고 있었다. 

강서한은 아시아 최초, 지금까지 유일한 UF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동양인 중에서는 최고로 싸움을 잘하던 놈이라는 뜻이다. 

전성기 때는 187센티미터, 92킬로그램에 달했었고, 모든 기술에 능한 레전드급 선수였다. 쓰레기 같은 인성도 전무후무했다. 아킬레스건을 다친 건 자업자득이었다. 

엄마 안나희에게 천박한 말들을 쏟아내던 개새끼. 엄마에게 섹스파트너를 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던 미친놈. 

벼락이 저 새끼 머리에 꽂히기를 얼마나 기도했던가. 어릴 때 한 번 달려든 적이 있었다. 숨이 끊어질 정도로 맞았다. 

때마침 아버지가 와서 말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두 다리로 서 있을까. 그 후로 목숨 걸고 운동을 했다. 

강서한의 경기 동영상을 수천 번은 봤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수도 없이 했다. 지금 싸운다면, 절대로 지지 않는다. 운동을 시작한 목표는 오직 강서한을 이기기 위해서였으니까. 

곧 연습 경기가 시작됐다. 정찬우는 이미 죽자고 달려들 기세였다. 이준도 그를 강서한이라 생각하자,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최 코치와 상대편 김 코치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탐색! 일단 탐색! 스텝 유연하게! 복싱 스텝! 가볍게!”

“들어갔다 빠지고! 거리 유지! 정찬우! 반응 보고 들어가! 탐색하라고!”

하지만 두 선수는 눈치싸움을 금방 끝내버렸다. 접근전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레그킥! 바디 킥! 이준아, 타격을 노려! 원투, 원투, 펀치 더 뻗어!” 

“정찬우, 디펜스! 가드 안 올려? 숙여서 피해야지! 차분하게! 또 흥분한다! 너무 크게 휘두르지 마!”

“같이 흥분하지 마 강이준! 거리 유지하고! 잡히면 안 돼! 인사이드킥! 데미지 쌓아! 카운터 노리고! 킥 받아치고!”

“정찬우! 임팩트 없는 공격은 버티고! 돌려 차기! 강이준 오른손과 거리 두고!”

“강이준, 미들킥 딥 방어! 가드 막고! 스텝 살아 있어, 좋아! 상대를 쪼으고 들어가야지! 그렇지! 킥으로 페이크 모션! 좋아! 몰아넣어!”

“정찬우! 빠져 나와! 강이준 오른쪽 펀치가 핵이야! 빈틈 주지 마! 리드잽! 스텝 밟아야지! 어퍼컷! 정직하게 들어가면 어떡하자는 거야!”

“강이준, 니킥으로 햄스트링 차! 데미지 만들어! 레그 킥! 레그 킥! 퍼부어!”

연습 경기지만 두 남자는 실전 이상으로 전투적이었다. 한 달 이상 굶은 짐승들처럼 눈동자가 살벌했다. 

“정찬우! 파고들어! 가드 안 올려? 맷집 좋다고 맞고 있을래?”

“정찬우 힘 빠졌어! 강이준! 타격을 짧게 끊어서 날려! 펀치 연타! 페이크 공격 좋아!”

“뭐하는 거야, 정찬우! 왜 흔들려? 중심이동! 흔들리잖아! 사각으로 빠져!”

그러다가 기회를 잡은 이준이 휘청하는 정찬우 몸 위에 잽싸게 올라탔다. 

“강이준! 상위 포지션 좋아! 각도 만들어! 길로틴! 길로틴! 그립이 정확하게 들어갔어! 눌러눌러! 좀 더!”

이준이 정찬우의 목을 옆구리에 끼워서 눌렀다. 

“정찬우! 빈틈 주지 마! 턱 조이고! 턱! 턱! 야이 새끼야!”

바닥에 누워서 목조임을 당하던 정찬우가 도저히 못 버티겠다고 매트를 탁탁 손으로 쳤다. 항복의 사인인 탭아웃이었다. 

이준이 그립을 풀자, 정찬우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벌게진 채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괴물들의 사투 같았던 연습경기는 강이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땀방울이 가슴 근육과 복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준은 탈의실로 와서 숨을 쌕쌕 내쉬었다. 

몸을 격하게 써도 애니에 대한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잡생각들이 증발하고, 결정체처럼 남은 애니는 더욱 간절해졌다. 

꿈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기 중에 부유하는 느낌을 종종 받았었다. 먼지처럼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알콜중독자들이 느끼는 몽환상태로 산 기간이 꽤 되었다. 

그래서 이제 뭐가 뭔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천치가 된 건가. 미쳐가는 과정인 건지, 미쳐버린 건지 알 수가 없다. 

아까 약혼식 때 본 윤수아는 노출이 거의 없었다. 드레스는 단정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그녀의 여성스러운 몸매는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왜…… 봉긋한 가슴, 잘록한 허리라인, 도자기처럼 유려하게 벌어지는 골반, 매끈하고 긴 허벅지. 드레스 속에 감춰져 있던 그녀의 은밀한 몸을 본 것 같을까. 

왜 그녀를 안아본 것 같냐고. 그것도 아주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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