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95)

<2화>

다음 날. 고민하던 이준은 약혼식이 열리는 그랜드 호텔로 향했다. 

강서한은 첫째 부인의 아들이었다. 강 회장의 바람기를 물려받은 것은 물론이고, 타고난 난폭한 성질 때문에 숱하게 사고를 쳤다. 

언젠가는 그룹을 위험에 빠뜨리게 될 거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불안한 강 회장은 이준을 옆에 두려 했지만, 이준은 집안을 나가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사업체를 꾸리고 자리를 잡았다. 

네이비 슈트를 입은 이준이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여태껏 본 적 없는 화려함에 실소가 터졌다. 

재혼하는 마당에 약혼식까지 성대하게 치르는 저 썩은 머리는 대가리라 불러야 되지 않을까. 재력을 자랑하고 싶어 죽는 꼴이었다. 

“벌써 재혼이네. 전처랑 헤어진 지 얼마 됐다고.”

“역시 강 회장님 핏줄은 남달라. 얼굴이 두꺼워서 철판이라 해도 믿겠어.”

“그래도 강 회장 닮아서 아들들 인물은 끝내주잖아. 오죽하면 여자들이 알아서 벗는다고 하겠어?”

듣지 않으려 해도, 집안을 조롱하는 소리들이 이준의 귓가에 콕 박혔다. 이준은 삐딱해진 표정으로 아름다운 얼음조각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지나쳤다. 

“약혼녀 측은 아예 볼 거 없는 집안이라고 들었는데요, 사람들이 제법 왔네요?”

“그러게. 지지리 궁상맞아서 강 회장이 싫어했다고 하던데.”

수군대던 사람들은 강 회장과 안나희가 다가오자, 입술을 꾹 붙였다. 60대 초반의 강정수 회장은 곱게 잘 늙은 탓에 웬만한 40대보다 매끈했다. 

안나희는 지역 미인대회 출신이어서, 꾸밀수록 화려한 외모가 돋보였다. 이준을 발견한 나희가 환하게 웃으며 빠른 발걸음으로 곁에 왔다. 

“그래, 잘 왔어. 이럴 때 얼굴이라도 꼭 내비쳐야지.”

이준은 언짢은 투로 말했다. 

“뭐가 이렇게 화려해요?”

“서한이가 이렇게 하고 싶다고 했어. 여자 쪽은 친척도, 친구도 없는데. 사람을 좀 사서 채워 넣었어. 형수 될 사람이랑 인사 나눴지?”

“아직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많은 자리였다. 이준은 공식적으로 또 ‘형수’라고 불러야 되는 여자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아서 그녀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나희는 불퉁한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다들 며느리감 얼굴은 예쁜데 어둡다고, 사연 있어 보인대. 그 말 들으니까 기분이 더 별로야. 이런 자리에서 방긋방긋 웃으면 좀 좋니.”

“…….”

“이렇게 차이 나는 결혼도 없을 거다. 나이만 어리지, 전문직도 아니고, 집안도 엉망진창이야. 부모도 다 돌아가시고. 아, 차라리 그건 잘 됐다 싶네. 근데 어떻게 여자를 골라도 이런 여자를…….”

“어머니는 꼭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

못마땅했던 이준이 정곡을 찌르자, 나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봤다. 

“그렇게 엄마 기를 죽이고 싶어? 안 그래도, 아직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꼴 보기 싫어 죽겠는데?”

“…….”

그때 강 회장이 두 사람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게 보였다. 

“아버지가 부르셔. 인상 펴고. 응?”

“어머니나 인상 펴세요.”

나희는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아버지 요즘 너 보고 싶다는 얘기 엄청 많이 하셔. 확실히 나이는 못 속이신다. 체력도 확연히 다르고.”

나희가 이준을 이끌었다. 이준은 굳은 얼굴로 강 회장에게 갔다. 

“녀석아.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이쪽은 JK자동차 회장님 내외시다. 인사드려라.”

“…….”

이준은 마지못해 고개를 꾸벅였다. 어울리지 않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오 여사가 이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쩜 이렇게 인물이 좋아요? 멀리서 보는데 빛이 나더라고. 역시 강 회장님네 차남이구나 싶었어요. 배우들 기죽이는 외모야. 세상에.”

아들 칭찬에, 나희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그 정돈가요?”

“어머. 자기는 자기 아들 얼굴이 어떤지도 모른단 말이야? 올해 서른둘이라고 했죠?”

“맞아요. 서른둘.”

“이제 결혼할 나이도 됐네요. 우리 윤아가 올해 스물여덟인데, 나이 차이가 딱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 윤아, 영국에서 박사과정 준비하고 있거든요. 좀 있으면 들어올 건데.”

“녀석이 아직 결혼 생각이 없을 거예요.”

지겨운 대화가 계속될 것 같아서, 이준은 목례를 하고 그들 곁에서 멀어졌다. 사람이 꽤 많았다. 습관처럼 애니를 찾고 싶어졌다. 실제 존재할 거라는 기대는 희박하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었으면 싶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갈망은 커져만 갔다. 누가 보면 정신병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그녀가 이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으므로 어디에서든 염원이 닿을 수 있기를 바랐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돕는다고 했던가. 너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사라지지 않고, 두 눈을 마주할 수 있다면 좋겠다. 연회장에서 이준이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애니. 나타나…….”

그때 하프 연주가 시작됐다. 청아한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하프는 마치 천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타나, 제발…….”

기도문을 읊듯 간절한 음성이었다. 곧 눈을 뜬 이준이 시야 속에 들어온 사람들을 훑었다. 

기대가 별로 없는데도, 언제나 실망스럽다. 역시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슴이 꺼지는 듯했다. 

이준은 무알콜 칵테일을 한 잔 들고, 하프 연주를 들었다. 그러다가 제법 떨어져 있던 강서한과 눈이 마주쳤다. 

이준을 발견한 서한이 다가왔다. 건들거리는 웃음이 또 거슬렸다. 저 깡패새끼…….

강서한은 전직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이었다. 동양인 최초, 그리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그 타이틀을 달았던 전설의 싸움꾼이었다.

“왔냐. 당연히 안 올 줄 알았는데.”

“…….”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잘 지냈고?”

“뭐, 그럭저럭.”

불려 다니며 인사하는 게 귀찮아서 이리 온 것 같았다. 몇 년 만이라 이준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한은 말을 건넸다.

“약혼녀 봤어?”

“아니.”

“완전 쌔끈한데. 남자 경험도 없는 애야. 숫처녀라고.”

“…….”

미친놈. 인간의 대화가 항상 고급스러울 필요는 없지만, 강서한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저질이었다. 입이 시궁창인 놈이었다. 서한이 으스대며 말을 이었다. 

“내가 3년 동안 공을 좀 들였어. 19살 때부터 지켜봤거든.”

“…….”

유부남인 채로 집적댔다는 뜻이니,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정녕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을 모르는 파렴치한이다. 

강서한은 이준의 엄마 안나희에게도 야릇한 눈길을 보내던 미친놈이었다. 

‘아줌마는 좀 맛있게 생긴 거 알아?’

‘아줌마 가슴이 하도 탱탱해서, 우리 아버지가 찍찍 싸겠네. 아버진 좋겠어.’

‘아버지가 딴 여자 가랑이에 저렇게 열심히 박고 다니는데, 아줌마는 젊은 애인이라도 구해야 되지 않아? 이왕이면 아버지도 맛 보고, 나도 맛 봐. 어때?’

이준이 격투기를 하게 된 건 강서한 때문이었다. 저 미친놈에게서 엄마를 보호하려면 저 놈과 붙었을 때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했다. 

이준은 십대 중반부터 평일에 세 시간씩, 주말에는 여덟 시간씩 체육관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어려서부터 강서한은 모가 난 성격 탓에 싸움을 자주 일삼았다. 그때마다 아버지인 강정수 회장이 뒤를 봐주었는데, 두드려 패서 원한을 샀던 놈들이 수십 명은 됐다. 

그 중 억울했던 놈 하나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술에 완전히 취해 있던 서한의 아킬레스건를 칼로 끊었다. 

그때 강서한은 이미 유명한 선수였으므로, 사건은 세계적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걸을 수는 있었지만 운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선수 생활은 서른을 넘기지 못했다. 

그 후 강서한은 해진 건설의 상무로 취임했고, 지금은 사장으로 지내고 있었다.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이제 가족이니까. 수아 데리고 올게.”

“…….”

가족이라는 말에 습관적으로 가슴이 턱 막혔다. 가장 경멸하는, 버러지 같은 놈을 남들 앞에서는 ‘형’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때마다 입안에 쓴 물이 올라온다. 

서한은 저만치에서 나희를 따라다니며 인사를 하고 있는 그녀를 데리러 갔다. 단아한 드레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준은 무알콜 칵테일을 입안에 머금고 심드렁하게 꽃을 보고 있었다. 꽃을 몇 트럭은 갖다 부어놓은 것 같았다. 

기분은 엉망이었지만 너무 많은 꽃들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천국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몽환적인 느낌이 들면서 다시 꿈속의 애니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강서한에게 시선을 던졌다. 순간…… 둔기가 후두부를 강타한 것처럼 숨이 멎었다. 

강서한 옆에 있는 그녀 때문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그토록 찾아 헤맸던 꿈속의 여자, 애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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