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김없이 그녀다.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향해 웃는다. 그 예쁜 미소에 심장이 찌르르하게 뛴다.
내 눈은 그녀만 따라다닌다.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달 같다.
그녀의 투명한 피부에서 광채가 난다. 적당히 숱 많은 반달눈썹, 인형처럼 커다란 눈동자, 도톰한 눈밑 애교살, 오똑한 콧날과 집요하게 괴롭히고 싶은 입술, 발그레한 뺨까지 완벽하게 사랑스럽다.
이 세상에 그녀보다 아름다운 건 없다. 그녀만큼 반짝이는 것도 없다. 그녀만큼 나를 미치게 하는 존재도 없다. 내 목숨과 바꿀 수도 있다고, 몇 번이나 다짐한다.
그녀가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가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애니.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입을 맞추고 싶어서, 뜨겁게 안고 싶어서 나는 그녀에게 홀린 것처럼 다가선다.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심장에 칼날이 박히는 지독한 통증을 느끼며 나는 비틀거린다.
나는 그녀에게 가 닿고 싶어 매번 파도처럼 부서지는 고통을 겪는다.
“하아…….”
이준은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날은 밝았고, 시각은 5시 27분이었다.
다시 그녀의 꿈을 꾸고 싶어서 눈을 감아 보았으나, 전혀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이불을 걷고 일어난 이준은 거실로 나갔다.
펜트 하우스의 아침은 채광이 뛰어나 모든 사물의 실루엣이 선명했다. 눈을 뜨면 그의 꿈속 여자 애니만 첫눈처럼 사라진다.
한동안 그녀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매일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의 얼굴은 형체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굴까. 1년간 나를 괴롭히는 여자, 애니.
애니라는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사춘기 소년처럼 여자 꿈이나 꾸고 있으니 한심했다. 그런데 이처럼 매일 만나다 보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여자일까. 그저 환상 속에서 만나는 여자인가. 이름도 확실한 건지 알 수가 없는데 찾을 수는 있을까.
깨어나면 애니의 얼굴은 흐릿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녀를 알아볼 수 있기는 할까.
나이가 서른둘인데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여자에게 홀려 있다니. 그것도 지독하게 말이다.
그녀는 환상통 같았다. 환상통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사람이, 사라진 오른쪽 다리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
신체의 일부나 장기가 상실 또는 절단된 상태임에도 뇌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해서 생기는 헛통증이다.
애니는 상실한 신체의 일부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깊게 박히고 있다. 환상이 아니라고 발악하고 싶은 것처럼.
왜 꿈에서 만난 여자에게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됐는지, 이성적인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그녀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던가. 아니, 기억에 없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이준은 커피를 내렸다. 짙은 커피 향이 펜트 하우스에 퍼졌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던 자아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
아우름 건축사무소의 대표 강이준. 187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와 건장한 몸은 절로 후광을 뿜어냈다.
완벽한 슈트핏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몰고 다니는 그는 국내 재계 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해진그룹의 차남이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재벌가를 뛰쳐나와 혼자 건축 사무소를 설립하고 남들에게 최고로 인정받기까지, 단 5년 만에 해낸 남자였다.
송하 국제도시에서 짓는 260억짜리 도서관 건축설계 공모전에서 이준의 작품이 채택되면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크고 작은 공사를 연이어 맡았고, 건축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됐다.
곧 퇴근시간이었다. 이준은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 한복판에 선 이준은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 혼자 나무처럼 우뚝 섰다.
낯선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던 이준은 빽빽한 속눈썹을 천천히 내리고, 눈을 감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매끈한 피부에, 아직 남아 있는 노르스름한 햇살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이준은 빛의 잔상 속에서 흐릿한 얼굴을 떠올리며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나타나. Annie…….”
‘Annie'는 ’기도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 이름대로, 애니라는 이름은 입술 밖으로 내기만 해도 목안에서 작은 떨림이 일었다.
몇 초 후 이준이 눈을 떴다. 시야에 그녀가 들어오기를 바랐지만, 어디에도 그녀와 비슷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습관이었다. 언제 어느 때나 그녀가 나타나길 바라며 눈을 감고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는 일은.
어느새 신정훈 비서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건넸다.
“퇴근 안 하실 겁니까.”
“해야지.”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이준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5년 째 그를 보필하고 있는 신 비서는 이준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었다.
나이는 두 살 어리지만, 이준에게는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신 비서가 백미러로 그를 흘긋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여자 분, 계속 찾으시는 겁니까.”
“…….”
조금 전 길거리에서 중얼거리고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찾을 방법이 없으니, 기적을 바라며 이러고 있는 중인데.
“뭐 하나 제대로 된 정보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게. 신 비서가 보기에 내가 이상해?”
“아니요.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그럼 왜 이런 꿈을 꿀까?”
“정신과 의사가 말했잖습니까. 억눌려 있던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무의식이 뭔가 말을 건네고 있는 거라고요.”
“무의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꿈에 집착하는 미친놈이 되어 가고 있다. 정신과 상담도 몇 번을 가봤지만, 딱히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하긴 의사가 환자의 내면을 어떻게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겠는가. 나도 모르는 나의 내면을.
Rrrrr~~~ 이준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어머니 안나희였다. 이준은 조금 고민을 하다가 늦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준아. 내일 형 약혼식은 와야지.
“…….”
이준의 미간이 사납게 좁혀졌다. 대답이 없자, 나희가 달래는 투로 말했다.
-꼭 와. 아버지가 기다리셔.
“…….”
-아버지 성격 알잖아. 형 약혼식까지 안 오면 앞으로 너 안 보려고 하실 거야.
“안 봐도 상관없어요.”
쓰레기 같은 인간들…….
나희는 안달하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엄마는? 엄마도 안 볼래, 너?
“…….”
-네가 이렇게 굴면, 아버지가 엄마를 얼마나 닦달하는지 알잖아. 그런데도 뻣뻣하게 굴 거야?
“…….”
이준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가족은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단어였다. 바퀴벌레처럼 혼외자식이 등장하는 역겨운 집안. 차라리 고아였으면 싶었다.
“그 놈은 재혼인데 약혼식까지 한답니까. 어쩜 그렇게 아버지를 쏙 빼닮았습니까.”
-여자가 마음에 드나 보지. 스물 둘이래.
“어디서 멍청한 여자 하나를 구했나 보네요. 어린 나이에 돈 밝히는 걸 보니.”
돈이 좋아서 실실대는 여자이거나 비즈니스 계약을 위한 결혼임이 분명했다.
-장소와 시간 보내줄 테니까 내일 30분만이라도 얼굴 비춰. 응?
“…….”
-엄마 구박 받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꼭 와야 돼. 알았지?
“…….”
이준은 제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씨근덕대는 숨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준은 창문을 열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무리 숨을 쉬어 봐도 가슴속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엄마 안나희는 강정수 회장의 두 번째 부인이었고, 강 회장은 결혼을 통해 얻은 배 다른 아들 둘 외에, 지금까지 드러난 혼외자식만 해도 여섯이었다.
사람들은 강 회장의 혼외자식이, 강회장이 죽을 때까지 스무 명은 족히 나올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버지는 개새끼라는 말이 딱 적절했다. 여자들이 가랑이를 벌려주면 어김없이 여자의 몸에 제 것을 들이박고 구르는 짐승이었다.
첫째 부인이 그의 바람기 때문에 울화병에 걸려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도 술집 여자와 뒹굴고 있었다고 했다.
어릴 적 안나희는 너무 가난해서 연탄을 피우고 죽은 엄마와 동생 사이에서 혼자 숨이 붙은 채로 발견된 탓에, 일찍 탐욕에 눈이 멀었다.
강 회장을 만난 순간부터 그의 첩이라도 좋으니 그 옆에서 죽겠다고 결심한 여자였다. 안나희는 강 회장의 숱한 계집질에도 꿋꿋하게 두 번째 부인의 자리를 지켰다.
이준은 그런 개 같은 집안이 제발 망하기를 바라며 몇 년 전 집을 나온 거였다.
집안사람들과는 아예 인연을 끊고 싶은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엄마 때문에 난감했다. 그곳이 무덤인 줄 정말 모르는 걸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돈에 제대로 미치면, 불이 붙은 돈마저 껴안고 죽는 것이 인간이다. 제 몸이 타들어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갑자기 창밖의 풍경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쓸쓸함이 몰려왔다.
그런데 강서한, 그 미친놈의 두 번째 약혼식이라. 하……. 이준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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