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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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그랑디아 왕궁.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성문이 백성들에게 개방됐다. 늘 외딴섬 같았던 성이 사람 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물론 위엄은 여전했다. 오늘 방문한 귀족 가문들의 깃발이 성벽 위에서 흩날리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전날부터 축제가 시작됐다. 덕분에 이른 시간부터 시장 거리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 음식 향기로 메워졌다.

그 사람 냄새는 그랑디아 내성으로 갈수록 진해졌다. 내성 앞이 여왕의 즉위를 기뻐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시장 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보다 더 조용했고, 사람들의 복장이 화려했고, 분수에는 포도주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성벽에 매달려 새싹을 틔운 담쟁이 넝쿨이 내성에 활력을 더했다.

그리즈는 넝쿨 사이에 자리 잡은 6층 창문 너머에 서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오늘도 여지없이 근사한 바이렌하그 대공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설렘에 잠을 설친 그리즈는 일찍이 준비를 마쳤다. 정신은 피로했지만 컨디션만은 최고였다. 어제 확인해 본 결과 몸무게가 더 늘었고, 늘 낮아서 걱정이었던 체온도 올랐다. 속옷에 피가 비치기도 했다. 드디어 아이가 찾아올 거란 예감에 날아갈 것 같았다.

다행히 헤어스타일과 화장, 드레스도 마음에 들었다. 특히 그리즈는 영원을 상징하는 하얀색 드레스를 만족스러워했다.

드레스는 앞이 트여 무릎 위가 보이는 디자인이다. 끝단은 뒤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위로 새겨진 황금 자수가 기품을 더했다.

흰 원단과 어울리는 하얀 피부가 진주처럼 빛났다. 누구든 그녀를 보면 말문을 잃고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그러나 급속도로 긴장한 그리즈는 대공의 어깨에 이마를 묻느라 바빴다. 막상 입장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걱정이 밀려오는 까닭이다. 무거운 드레스 때문에 넘어지지는 않을까. 연습한 대로 왕의 위엄을 뽐낼 수 있을까.

그리즈가 초조하게 그의 팔 쪽 옷깃을 쥐었다. 그러곤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작게 말했다.

“나…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가 그리즈의 목 뒤를 주무르다가 그녀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그래, 연습 많이 했으니까.”

그리즈가 고개를 들자 이마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뒤이어 닿는 파란 시선이 그녀의 긴장을 푸는 듯했다. 그녀는 어제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대공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뚜껑이 열리자 붉은 루비 귀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내 보석함에 모셔 두고 잊었던 걸 그가 가져온 모양이었다.

“아….”

그리즈는 귀걸이를 보자마자 유난히 냉혹해 보였던 그를 떠올렸다. 다만 이 귀걸이를 선물해 주던 날의 그는 태연해 보이면서도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를 마주한 날처럼, 심장이 설레는 건지 아픈 건지 모를 정도로 빨리 뛰어 댔다.

그 순간 그가 황금 귀걸이를 귀에서 빼 주곤 루비 귀걸이를 집었다. 그러곤 귓불을 부드럽게 만진다. 그의 손끝이 그날처럼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리즈,”

“…….”

“불안해질 때면 내가 곁에 있다는 걸 떠올려.”

그리즈는 흔들림 없는 저음에 안정감을 느꼈다. 다만 혼인할 때 혈육이 귀를 뚫어 준다던 바이렌하그의 전통이 조금 신경 쓰였다. 대공에게는 언제까지고 아내로 비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걸이는 아버지가 해 주시는 거라고 들었는데….”

그리즈가 넌지시 말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살피다가 검지로 뺨을 훑어주며 대답했다.

“내가 다 하려고.”

“…….”

“네 아버지, 오라버니, 기사 그리고 남편까지.”

이럴 때면 욕심 많은 사내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좋았다. 미소 지은 그리즈가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입술을 맞췄다. 그 찰나 노크가 울렸다.

“폐하, 식장에 입장하실 시간이 되어 모시러 왔습니다.”

벨린의 목소리였다. 스무 살, 제 나이처럼 굴던 그리즈는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를 지웠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자 시녀들이 와르르 들어와서는 그리즈의 치장을 살폈다. 비아누트는 분홍색 꽃물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눌러 닦으며 방을 나섰다. 시녀 두 명이 그녀의 등 뒤로 가서 드레스 뒤쪽을 잡아 올렸다.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1층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즈는 계단에서부터 이어진 붉은 카펫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 맑았다. 따스한 햇살과 풀 냄새, 새소리를 느끼다 보니 어느덧 중앙 예배당에 도착했다.

종교 행사를 치르는 공간에 걸맞게 무수히도 많은 사람이 카펫 양옆에 서 있었다. 그때쯤 시녀들이 드레스 끝단을 카펫에 내려 두고 길게 펼쳤다. 어제 이미 예행연습을 했던 그리즈는 그대로 카펫 위로 걸어 나갔다.

들쑥날쑥 서 있는 사람들 속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바이렌하그의 하인들,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그리즈에게 눈빛으로 인사했다. 마치 그녀의 앞날에 축복만이 가득하기를 기도해 주는 것 같았다.

작은 몸을 압도했던 불안감이 옅어진다. 그러자 딱딱했던 걸음걸이가 점차 느긋해졌다. 그제야 그녀는 길게 늘어선 카펫 안쪽에 자리한 예배당을 들여다보았다.

신성한 곳인 까닭에 일반 백성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그녀는 공기가 장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예배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하얀 벽면에 신성함을 풍기는 12 천사의 석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 의자에 초대받은 귀족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 속에서 할머니 파올라가 미소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다. 그리즈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햇살 덕분일까.

무심코 올려다본 천장 유리창에서 햇살이 내려오고 있었다. 중앙 천장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세로로 길게 자리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카펫 양옆에 열을 맞춰 서 있는 기사들이 검을 교차시켜 드높이 들었다.

그 안에서 쿠엔틴을 찾은 그리즈는 긴장을 완전히 풀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때 단상 아래 계단에 서 있는 그랑디아의 재상, 비아누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때맞춰 오르간 소리가 울렸다. 단상 뒤쪽에서 성가대의 노랫소리까지 들려오자 그리즈는 정말 천국에 도착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단상 앞에 서자 주교가 성서를 읊었다. 그 후 몇 가지 절차가 이어졌다.

주교는 성수를 그녀의 두 손에 바르는 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그녀를 소개했다. 그러곤 노르드발츠의 국왕과 브리튼, 아레하 왕의 지지 서신까지 읽은 후에 그리즈에게 왕실의 검을 내렸다.

그녀가 그 검을 받아들자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명백하게 공표했다.

“그랑디아의 왕녀 그리즈 베네딕트, 폭우를 이기고 태어난 자. 누구보다 공정하고 지혜로운 자. 유일신의 이름으로 그대를 그랑디아의 왕으로 받들리니….”

“…….”

“단상에 올라선 이는 한 여인일 뿐이나, 내려서는 이는 그랑디아의 새로운 국왕일 것이오.”

크고 무거운 황금 왕관이 회색 머리 위로 내려앉자 모든 이가 일어나 존경을 표했다. 멀리서 백성들의 외침이 웅장하게 울렸다.

“여왕 폐하 만세, 만세!”

축복이 담긴 성가대의 노래가 성스럽게 바뀌며 혼인식을 알렸다. 긴장한 기색의 그리즈가 돌아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이 느끼는 행복감이 전해져오는 듯했다. 그녀 역시 마음속에서 만감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런 기분을 느끼기까지 무려 9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 세월 동안 그리즈는 상처 입었고, 메말랐고, 볼품을 잃었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침입자가 날아들면서부터 아주 많은 게 변했다. 그녀는 그 침입자를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아름다운 나비였다. 그 나비가 그녀의 황폐한 세상에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고,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그 존재감만으로 서서히 변해 가기 시작했다.

혹한의 날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고, 오로라를 바라게 됐다. 창밖에서 폭우가 내릴 때면 무지개를 기대하게 됐다. 아름다운 세상을 좇던 소녀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즈는 그 세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를 갖고 싶었고, 지키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마음을 다시금 새기며 대공을 응시했다.

또다시 둘만의 시간 속에 빠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벅찬 숨을 내쉰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되찾은 세상 속에서 그가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그러므로 그녀는 의심할 여지 없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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