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32)

***

새벽 2시. 빛마저 깊게 잠든 시간.

비아누트는 왕궁에 마련된 집무실에 있었다. 밤 10시쯤, 목욕 직후에 왔으니 네 시간이나 집무를 보는 중이다.

목욕 후 일상복을 원하는 대공에게 브람은 몸태가 훤히 드러나는 헐거운 셔츠를 입혔다. 바지도 허리 매듭과 단추 몇 개가 전부였다. 여인이 힘들여 벗기지 않아도 되는 옷이다.

때에 맞게 대공을 꾸미는 브람의 성향상 의도한 바가 있을 거다. 그 옷을 입은 주인이 새벽녘까지 집무실에만 머무르자 불안했는지 브람이 몇 번이나 그를 찾았다.

불편한 게 있냐고 묻는 브람에게 비아누트는 단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고만 말했다. 브람은 그랑디아에서의 첫 밤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기다릴 때면 그는 늘 그랬다.

지금껏 업무적인 서신에 답신을 보내며 진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만큼은 고요한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답신을 쓰는 중이다.

그 수단마저도 모두 정리하자 그의 눈은 다른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젖었던 머리칼에서 풍기던 물비누 향기는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브람이 새로 켜 둔 촛불은 이미 반이나 타 있었다. 이쯤 되자 애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정부의 심리를 퍽 알 것도 같았다.

물론 나쁘지 않았다. 상대가 그리즈 베네딕트라면 정부든 뭐든 되어 줄 용의가 있었으니 말이다.

비아누트는 그녀가 못된 짓을 해도 견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아무 짓도 안 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세 시간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비아누트는 의아해했다가, 심기 불편해했다가, 따듯하게 데워진 침대로 들어가는 감각을 떠올리며 짙은 숨을 흘리기를 반복했다.

그녀를 만나는 건 내일로 미루면 될 일인데 잠을 청하지 못했다. 전시에는 얼어붙은 숲에서도 잘 잘 정도로 무딘 그였지만 오늘 마주한 상황과 그녀는 퍽 낯설었으므로.

그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했던 말들이 맴돈다. 싫다는 말, 무례하다는 단어. 합방까지 거부했지 않나.

착하고 온순했던 그녀라면 오늘 안에 찾아와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다. 새벽 두 시의 그는 그 얼굴을 감상하고, 그 몸을 엉망진창으로 흐트러트리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어느덧 새벽 2시 반이 됐다. 비아누트는 으름장이 아니라 그녀가 정말로 잠든 것 같다는, 반갑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부작용이 최음 효과라는 회임환을 두 개나 품었는데.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유능한 왕실 의사가 완벽한 환을 만든 걸지도 모른다. 그 부작용을 겪는 것은 다름 아닌 비아누트였다. 아까 전 맛봤던 뜨겁고 비좁은 감촉이 손가락에서 맴돈다.

안을 파고드는 순간 예쁘게 무너지던 얼굴이 쉴 틈 없이 아른거리기도 했다. 그때부터 저릿거리던 하반신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눅눅해진 상태였다.

비아누트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한 얼굴을 했다. 핏줄이 가라앉지 않는 손은 답신들을 서류봉투에 넣어 봉인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묵직해진 바지 앞섶은 견딜 수 있었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녀가 속마음을 말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합방을 거부한 건 문제였다. 오해를 풀어 주려면, 연회에서 검은 천사를 돌려보내고, 탈스바그를 그에게 준 이유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네가 본능적으로 끌리는 상대를 조용히 파묻고 싶은 것뿐이라고 설명하면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할까. 그나마 네가 좋아하는 상대이기에 대신 아껴 주려는 것이라고 덧붙이면 좀 나을까.

여과 없이 생각하던 그가 미간을 좁혔다. 아마 고해 성사나 다름없을 것이다. 참회할 계획이 없는 게 문제였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예정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사내의 유려한 얼굴이 고뇌에 잠긴다. 선하고 정의로운 왕녀님을 따라 선해져야 하는데, 그가 살아온 방식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천사처럼 곤히 잠든 얼굴을 보면 착한 마음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집무실을 나와 7층으로 향했다.

층마다 서 있는 경비 기사들이 그를 보자 각을 다잡는다. 바이렌하그의 기사들이었다.

7층에 도착하자 웅장한 양문이 보였다. 그랑디아의 여왕, 그리즈 베네딕트의 침소였다.

오늘부터 여왕의 침소를 철저히 지키라는 명이 있었다. 그 명을 내린 게 바이렌하그 대공이다. 양쪽 문에 서 있는 기사가 대공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만, 만나 뵙게 되어 여, 영광입니다. 제 이름은 클렌시아 브라반….”

대공은 단지 그들에게 마땅한 선택을 알려 주기만 했다.

“열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겨 정리하는 대공의 기색에서 예민함이 풍겨 왔다. 곧장 침소의 문이 열리고 문틈의 바닥에 촛불 빛이 드리웠다. 사내의 두 발이 그곳을 저벅저벅 밟고 안으로 향했다.

바이렌하그에 있는 그의 방만큼이나 넓고 화려한 공간이다. 물론 비아누트는 방을 구경할 의사가 없었다.

그의 눈이 창가 쪽의 하얀 실크 캐노피 침대를 찾았다. 폭신한 침대 안에, 하얀 네글리제 차림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어두운 실루엣이 소리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내 그는 자신 쪽을 향해 누워 있는 여인을 내려다봤다. 깊게 잠든 얼굴을 보니 오히려 나쁜 마음이 든다. 정말 자고 있냐는 물음이 잇새로 나가려는 듯했다.

사내들이 흑심으로 손을 주무르는 걸 지켜보게 해 놓고, 그를 집무실에 방치해 두고, 최음 성분이 있는 회임초를 품은 채로도 그를 찾지 않고.

그런 그녀는 사내를 희롱하듯 잠결에 웃기까지 했다. 저녁 내내 냉혈한 같던 그의 얼굴이 기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는 의외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목 뒤까지 화가 치미는 게 어떤 감각인지 알게 됐고, 너보다 내 감정이 더 무겁다는 걸 깨달았고, 아래는 뻐근할 정도로 일어선 상태지만 괜찮았다.

네가 내 것으로 존재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욕구 불만에 시달린 몸 때문에 피로할 뿐이다.

그가 그녀의 옆자리에 비스듬히 누웠다. 커다란 몸이 깃털 매트리스 위로 부드럽게 침잠한다. 파란 눈이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깨지 않길 바라면서도, 눈을 뜨는 그녀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팔을 베고는 픽 웃었다. 미치겠다. 그녀의 옆에서라면 안도감으로 눈을 붙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는 점점 또렷해지는 정신을 막듯 눈을 감았다. 살짝 고개 숙인 반반한 이마로 그녀의 숨결이 끼쳐 온다. 그 숨이 미끈한 콧대를 훑고 쇄골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기분 좋게 느끼던 그는 입술을 살짝 열었다. 감각이 예민해지는 듯했다. 편히 내쉬었던 호흡이 점점 몸 안으로 감겨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가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속눈썹이 그득한 사내의 눈매가 오롯이 그녀를 담았다.

욕심 없던 눈동자로 위험한 것들이 박혀 든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혼란이 앞선다.

그의 눈은 이 공간이 섬처럼 고립되길 원하고 있었다. 어디서든 그녀는 대공 비아누트를 사랑할 테지만 그는 시선으로라도 그녀를 타인과 나누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숨결이 더 선명해진다. 쇄골을 타고 가슴팍으로 내려오는 듯했다.

비아누트는 이 무의미한 숨결조차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모조리 삼켜 자신의 것이 되길 바랐다.

열망이 가득한 손이 침대 시트를 손 안 가득 쥐었다. 그러자 헐거운 셔츠 목깃이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사내의 목덜미가 평정심을 지키기 위해 탄탄해졌다.

“하….”

곧장 뜨거운 탄식이 방 안을 아찔하게 채웠다. 눈가를 가린 흑발 사이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녀를 집요하게 찾았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안개가 낀 듯한 흐린 눈이 그를 마주 보기 시작했다.

그는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비로소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 반면에 멈춘 줄 알았던 심장은 엉망진창으로 가슴을 친다. 실수로라도 그녀에게 닿게 하지 않으려던 숨이 일순간 그녀를 확 덮쳤다. 그런 그의 귓가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

이 상황이 꿈인 줄 아는 모양이다. 그가 사나웠던 눈매를 풀며 대답했다.

“아니. 네 현실이지, 나는.”

그녀가 무엇을 꿈꾸든 그녀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건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였다. 그는 그 사내가 그녀의 꿈보다 더 많은 걸 실현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잘생긴 얼굴에서 그 생각을 읽었는지 잠에 취한 채 미소 지었다. 비아누트의 얼굴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던 고뇌들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예 완전히 녹여 내려는 듯이 달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떻게 여기 계시는… 그런데 저… 너무….”

“…….”

“덥네요.”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이 은은하게 빛났다. 그걸 느꼈는지 그녀가 이불로 땀을 닦다가 흠칫 놀랐다.

“으읏….”

불시에 흘러나온 야한 신음이 사내의 음심을 자극한다. 셔츠 아래로 살짝 드러난 장골 능선이 선명해졌다. 그 상태로 그는 언젠가 들었던 왕실 의사의 말을 곱씹었다.

“저… 최음 효과 때문에 남편이 없는 자가 사용하기에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러나 가장 효과가 좋은 형태이고, 이건 저만 아는 사실이지만 첫째 왕녀께서도 이 환을 사용하시고 바로 회임하셨다고 하니 효능은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왕실 의사가 부작용 없는 환을 만든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즈 베네딕트의 인내심이 완벽했던 것이다. 그의 가슴팍이 무질서하게 오르내렸다.

원래부터 그의 몸은 그녀의 옅은 숨결만 닿아도 흥분할 정도로 정직했다. 그 몸의 주인이 하필 비아누트라는 게 문제였다.

그는 그녀를 달래어 허겁지겁 자신의 씨를 품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흐트러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다. 오늘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안락함을 맛보느라 바빴으므로.

그러며 하루를 돌아보자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는 듯했다. 오늘 유독 까맸던 그녀의 드레스 아랫단이 비아누트의 눈앞을 스쳤다.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그녀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도 같았다. 치마 아랫단이 먼지에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고, 미소로 긴장을 숨기며 성 곳곳을 바삐 돌아다녔겠지. 그는 둘만 남았을 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뒤늦게 생각해 냈다.

“힘들었지, 오늘.”

그 말에 그녀가 긍정하듯 눈을 부드럽게 감았다 떴다. 그는 손을 살짝 위로 뻗었다. 촛불에 드리운 그림자가 그녀의 어깨를 포근하게 안아 주는 듯했다.

그녀는 움찔하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많이 더워?”

“그냥… 견딜 수 있을 만큼요.”

대답한 그녀가 그의 눈가를 가린 흑발을 옆으로 넘겨 줬다. 차분하게 감겼던 그의 눈이 떠지며 방탕한 기색을 흘렸다. 단지 그녀의 손길이 스쳤다는 이유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허기를 느낀 그가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손등에 입술을 댔다. 그 잇새에서 안쓰러운 목소리가 번졌다.

“회임초 때문인 것 같군.”

그녀는 손을 아찔하게 움찔거리기만 했다. 회임초 때문이라는 걸 예상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 조금 망설이더니 그의 입술을 피했다.

“오늘… 갑자기 회임초를 주신 이유가 궁금해요.”

사실 엊그제 그녀의 건강 상태를 진찰한 왕실 의사가 회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에게 회임초가 전달되는 건 단지 시간문제였다.

그때 그녀의 입술이 다시금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때까지는 뽀뽀도 없어요.”

시트 위에 늘어져 있던 그의 손이 네글리제 끝단을 건드렸다. 그의 시선은 무방비하게 드러난 허벅지로 따라붙었다.

눈동자 속에 감춰져 있던 충동이 일렁이자 그녀가 허벅지를 맞붙였다. 그러곤 애타게 맞물리는 그의 입술을 살피다가 노파심으로 말했다.

“이대로 다가오시면… 대공을 못… 못살게 굴지도 몰라요.”

못살게 군다. 그는 그 말이 듣기 좋았다. 그랑디아의 왕이자 바이렌하그 대공의 부인이 될 네가 그러고 싶다면 기꺼이. 그가 입매를 휘어 올리며 물었다.

“어떻게 못살게 굴 거지?”

얼만큼의 부작용을 느끼는 건지, 하얀 어깨에 열꽃이 핀 게 보였다. 이불로 그 몸을 가린 그녀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방법은 딱히 생각해 보지 않은 모양이다. 그저 이불에 얼굴을 숨기고는 눈만 빼꼼 내보였다.

그만이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부드러워진 그의 저음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리즈, 어떻게.”

그의 시선은 그녀의 목덜미를 훑고 있었다. 새파란 눈빛만으로도 달아오르는지 그녀가 눅눅한 신음을 흘렸다.

“아…. 그러니까, 그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애욕이 커진다. 그가 팔꿈치로 침대를 짚으며 일어나서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두 무릎을 꿇었다. 바지 위에 닿은 허벅지 안쪽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그녀의 속옷 안 상태가 어떨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괴로움이 깃든 그의 손이 자신의 쇄골 부근을 훑어내렸다. 그녀의 질퍽한 안을 치덕거리던 감각이 아래로 치민다. 아까부터 빳빳해져 있던 끝머리에서 선액이 흐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상체를 숙여 그녀를 품에 가둔 채로 그녀의 대답만 기다렸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온 그가 좀처럼 보이지 않던 반응이었다.

잠시 멍했던 그녀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할딱이며 말했다.

“당신을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저는… 앞으로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었으면 해요.”

비아누트는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말을 더듬는 대신에 느리게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아 아깝지만 그래도 천천히 열리는 예쁜 입술을 볼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그때 회색 긴 머리칼 사이로 작은 귀 끝이 드러난 게 보였다. 잔뜩 열이 올라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진실을 원하는 그녀를 상대로 비아누트는 귀 끝을 핥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중이다. 어쩌면 진실은 의외로 단순할지 모른다. 그가 그녀의 귓불에 입술을 댈 듯 말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비밀이라.”

곧 정말 비밀이 담긴 것처럼 묵직한 저음이 이어졌다.

“네 강아지가 한 마리 늘어났다는 사실일까.”

그는 집요한 숨결로 하얀 목덜미를 휘감았다.

“주인이 목줄을 매어 주면 산책하고, 위협하는 상대를 물어 죽이고.”

“…….”

“주인이 데려온 다른 개 역시 물어 죽이는 그런 종이지.”

그러니 검은 천사를 가만히 놔둘 수 있겠냐고 그의 눈이 묻는다. 그녀는 혼란에 물들어 갔다. 그의 말을 이해했지만 믿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가 회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줬다. 그러곤 아까부터 입가에서 맴돌던 단어들을 꺼냈다.

“사랑해, 그리즈.”

“…….”

“네가 세상에 하나뿐이라서 그랬어. 누구와도 나눌 수 없거든.”

그녀의 귓불을 스치던 입술이 목덜미를 머금었다. 사내의 숨이 낮게 속삭인다.

미안해. 그리즈.

그녀가 숨을 멈추곤 입술만 버벅거렸다. 오만하기로 유명한 그가 사과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마디가 가는 손이 하얀 상의 등 쪽을 쥐었다. 그녀가 숨을 다급하게 터트리고는 대답했다.

“저… 오해했어요. 저 모르게 안 좋은 일을 처리하시려는 줄 알고…. 그런 줄도 모르고….”

약 기운에 들뜬 숨으로 생각을 전하려 애를 쓴다. 그 모습을 섬세히 살피는 파란 눈이 애욕으로 물들었을 때였다.

“당신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요…. 제겐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녀가 가장 소중하다는 말에 연심을 담았다. 불안정한 그를 녹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길 원했다.

“당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 알고 있어요? 이제야 당신 옆에 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됐는데 내가 어찌….”

“…….”

“나는 영원 그 자리를 선택할 거예요. 맹세할 수 있어요.”

선이 고운 얼굴에 비장하기까지 한 미소가 어렸다. 그 모습을 보던 파란 시선이 넋을 놓았다.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그는 이 순간 속에 갇히길 원했다. 언젠가 손수 만들었던 박제 나비처럼 되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이름 모를 보석처럼 빛났다. 흡사 영원한 독점과 소유라는 의미를 지닌 보석일 듯했다.

그 눈빛을 한 그는 네글리제 어깨끈을 내렸다.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 그녀가 아찔한 얼굴을 했다. 작고 하얀 몸은 솜털까지 세울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언젠가 이런 꿈을 꿨던 것도 같다. 꿈속의 그는 그녀를 흡족할 만큼 감상한 뒤에야 아래를 엉망진창으로 드나들었었다.

그때처럼 악취미를 느낀 그가 가슴 위쪽을 입술로 훑었다. 진땀 밴 피부에서 체향이 풍겨 온다. 달콤한 향기에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하아….”

바지 매듭 끝을 잡아 풀어 내리자 앞섶 위가 들떴다. 정말로 개나 다름없을 만큼 불거진 중심부가 소리 없이 앓는 듯했다.

그때 그녀가 문 쪽을 바라봤다. 붉게 물든 얼굴에 일말의 불안이 어려 있었다.

“밖에 기사들이 서 있을 거예요.”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그들에게 들려줄 수 없겠다는 듯, 그녀가 달아나려 엎드렸다. 비아누트는 그녀를 굳이 잡지 않았다. 단지 오만한 눈으로 매듭을 내려다봤을 뿐이었다.

“묶어 줘, 그럼.”

그가 참는 걸 무척 잘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그녀가 멈칫했다. 그러곤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앞섶으로 손을 뻗어서 매듭을 만졌다.

열이 오른 붉은 눈동자는 묵직하게 찬 앞섶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등이 앞섶을 쓱 쓸며 남근의 크기를 가늠해 본다.

그러다 가장 안쪽까지 찔러 줄 수 있다는 걸 느꼈는지 초조한 눈짓을 지었다. 작은 얼굴 안에서 이성과 본능이 오가는 듯했다. 애타게 네글리제를 쥐었던 그녀가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그래도… 할까요?”

그는 흥분한 숨을 태연히 삼키며 대답했다.

“기사들이 소리를 들을 텐데.”

우려스러운 말과는 다르게 그의 검지가 그녀의 속옷 틈을 쓱 훑었다. 속옷 밖으로 물기가 묻어날 정도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으며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시간도 늦었어.”

오늘 그녀에게 한 말에 거짓은 없다.

비아누트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빠짐없이 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가 가려는 듯 침대에 두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그녀와 빤히 눈을 마주치며 매듭을 묶으려 했다. 어쩔 줄을 모르던 그녀가 그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읏, 저 잠깐만….”

“…….”

“사실 저… 아래가 너무, 너무….”

안쪽의 뜨거움을 해소해 주지 않으면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냉정하게 맞물려 있던 그의 잇새가 열리고 낮은 탄식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바지 앞섶을 열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얼굴을 자세히 보자 눈동자의 초점도 풀려 있었다.

“해, 해 주세요….”

다급함으로 물든 그녀의 손이 네글리제 아랫단을 살짝 올려 속옷을 내보였다. 그는 그 광경을 미동 없이 보다가 그녀의 뺨을 어르듯 만지며 속옷을 벗겼다.

몸에 걸친 옷들이 아까부터 거슬렸다는 점은 그녀도 동의할 거다. 이내 그녀가 멍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누워서 다리를 열었다.

진입을 재촉하듯 허리를 살짝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눈은 꿈을 꾸듯 몽롱해져 있었다.

보채는 듯한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눈매를 가늘게 좁힌 그가 그녀의 검지를 쥐어 길쭉한 틈을 훑으며 말했다.

“앞으로 계속 회임초를 쓰려면….”

“…….”

“내가 없을 때 혼자 푸는 법도 알아야 할 텐데.”

관능적인 파란 눈이 혼자 해 보라는 듯 그녀를 부추긴다. 그녀는 홀린 듯이 손가락을 움직이려 하다가 근사한 사내와 눈을 마주치고는 얼굴을 붉혔다.

평소 같았으면 그대로 망설이고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쫓기듯이 손을 움직였다. 분홍빛으로 물든 손이 가슴을 손 안 가득 쥐고 주무른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가 시선을 끌었다.

그는 목 안이 퍼석할 정도로 갈증을 느꼈다. 세상의 온갖 재물을 가져 놓고 왜 그리즈 베네딕트만을 향유하고 싶어지는지 알 수는 없다.

착하게도 그녀는 늘 원하는 걸 주었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 대한 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흡족함이 깃든 입술이 젖꼭지를 슬며시 물고 살짝 당겼다. 그녀의 의식이 흐릿해지는 게 보였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공평하다면 공평했다.

그는 그녀가 스스로를 완전히 놓게 할 작정인 듯, 꼿꼿한 유두를 느릿느릿 핥았다. 혀끝으로 자극적인 맛이 스며든다.

단맛, 죽여주는 맛. 굶주린 혀가 분홍빛 과실을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풍만한 가슴이 유독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하응, 읏, 아, 아!”

숨넘어가는 듯한 신음 소리가 침대를 메웠다. 버둥거리던 그녀가 두 발로 매트리스를 다급하게 짚고 하반신을 들썩였다.

까끌한 바지 앞섶에 비부가 닿는다. 파란 눈이 그곳을 응시했다. 평정심을 유지하던 호흡이 티 나게 흔들렸다.

그때 살짝 접힌 앞섶이 점막을 지그시 건드리자 음핵이 충혈돼서는 벌벌 떨렸다. 살살 핥아 주면 깊은 오르가즘을 느낄 상태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읏, 아아. 좋아….”

그걸 갈구하는 그녀의 비부가 앞섶을 슬며시 누르고 비비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엎드려 있던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셔츠를 걸친 상체가 신음하듯 유연하게 들썩거려졌다.

제아무리 이성적인 사내라도 버티지 못할 상황일 거다. 그녀가 음탕하게 다리를 벌린 채 가장 민감한 성감대를 자극해 주고 있었다. 오로지 절정을 느끼기 위해 흔들리는 가녀린 허리가 그의 시야에 맺혔다.

고고했던 그의 숨이 툭툭 끊겼다. 이내 그는 제대로 갖고 놀라는 듯 바지 앞섶을 내리고 중심부를 꺼내 줬다.

굵다란 성기가 억세게 솟아올랐다. 얼마나 안달이 나 있는지, 스스로 표피를 벗은 귀두가 선액으로 흥건했다.

그녀가 흉물스러운 그것을 보고는 애타게 신음했다. 약 기운으로 이성을 놓아 버린 듯했다. 두 팔로 시트를 짚어 하반신을 더 들어 올리고는 두 무릎 안쪽에 사내를 가뒀다.

그러곤 발기해서 배꼽 위까지 달라붙은 기둥을, 젖은 곳으로 느릿하게 비벼 댄다. 닿기만 해도 좋은지, 눈가를 쾌감으로 물들인 채였다.

“아아, 읏, 아, 흣, 비, 비아누트….”

그가 눅눅한 저음을 흘렸다. 아래가 그녀와 빈틈없이 결합하길 원한다. 비좁은 구멍을 방탕하게 드나들고, 자신의 흔적을 깊숙이 배게 만들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지금껏 그녀와 만나며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지만 오늘은 강도가 달랐다.

그녀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기둥이 배에 딱 달라붙은 채로 느릿하게 쓸려 올라갔다. 뜨겁고 질퍽한 감각이 뿌리까지 삼켜 주겠다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비아누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쥐었다. 그러곤 본능적인 요분질을 멈추게 했다.

그의 시야에 드러난 구멍에서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때맞춰 질구가 벌름거린다. 거칠게 찔러 주면 극도로 기분 좋게 만들어 주겠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을 때 그녀가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흣, 저 더 이상은 못, 못 참겠….”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모를 거다. 허벅지 안쪽과 비부가 붉게 달아올라서는 사내를 부르고 있었다. 흠뻑 젖어 버린 통로는 뭐라도 물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 같았다. 어서 가득 채워 달라는 듯한 표정에 그는 초조한 얼굴을 했다.

그러곤 보상을 주듯 귀두를 입구에 맞추었다. 한껏 민감해진 끝머리에 미끈거리는 감각이 치솟자 그의 목덜미에 근육이 잡혔다.

그는 딱딱하게 뭉친 애욕을, 젖은 틈새에 거칠게 박고 싶은 충동을 견디듯 자신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불그스름한 귀두에 선액이 고인다. 그 상태로 점막을 슬슬 긁다가 더 내리자 끝머리가 입구에 부드럽게 걸렸다.

“읏…. 아, 조, 좋….”

그녀가 만족스러워하며 머리칼을 쥐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허리를 푹 내려서 굵은 것을 삼켰다.

이내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안을 달래기 시작했다. 빠듯한 구멍이 중심부를 물고 조이자 그의 목울대가 관능적으로 흔들렸다.

“하아, 그리즈.”

굵은 것이 어떻게 먹히고 있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직접 확인하려는데 반쯤 엎드린 상체 때문에 셔츠가 교접부를 가렸다.

그는 상체를 세워 무릎 꿇으며 셔츠 아랫단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쓱 끌어올려 잇새로 물고 고개를 떨궜다.

번들거리는 기둥이 시야에 드러났다가 구멍 속으로 삼켜지고 있었다. 씨물을 삼키러 온 요부에게 이용되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상대가 그녀이기에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하지 않은 것에 대한 포상처럼 진한 쾌감이 아랫배까지 올라왔다.

이런 감각을 줄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그는 잇새에서 젖어 들어가는 셔츠를 더 강하게 문 채 엄지로 음핵을 비벼 줬다. 움푹 들어간 그녀의 아랫배가 음란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곧 그녀가 숨을 멈추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읏, 대공, 거기, 흣, 너무 좋, 아!”

그녀가 움직임이 느려졌던 허리를 일순간 다급하게 흔들었다. 그러다 기둥을 반쯤 물고는 그대로 멈췄다.

안쪽이 황홀하게 울부짖으며 요동친다. 넣기만 했는데도 절정을 느낄 만큼 민감해진 그녀의 몸이 그의 가슴팍을 거칠게 오르내리게 했다.

그는 흑발을 쓸어 넘기다가 지그시 쥐었다. 그녀의 몸과 얼굴, 숨결과 신음 소리가 그의 취향을 하나하나 건드린다. 몇 시간 전부터 사정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중심부가 못 견디도록 뜨거웠다.

그는 능란하게 꿀렁거리는 굴곡진 복근에 힘을 주며 허리를 뒤로 뺐다. 팽팽한 귀두가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와서는 음핵을 지그시 문질렀다.

발기한 크기만큼 열렸던 구멍이 와락 좁혀지는 광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가 이를 무는 찰나 끈적한 씨물이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마치 영역을 표시하는 수컷의 것 같았다. 더 좋은 씨를 주기 위해 준비하는 듯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흡하던 그는 하얀 덩어리를 비부에 펴 발랐다. 자신의 정액으로 더럽혀진 광경을 보는 파란 눈에 만족감이 어렸다.

곧장 그는 그리즈의 허리를 감싸 안고 뒤집어 엎드리게 했다. 거추장스러웠던 셔츠가 그의 몸에서 벗겨져 나갔다. 곱상한 얼굴과는 다르게 관능미 넘치는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커다란 흉통에 밴 땀을 셔츠로 닦고는 상체를 그녀의 등으로 낮췄다.

흥분감이 깃든 입술이 그녀의 귓불을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있던 기둥이 하얀 아랫배를 찔렀다.

그의 잇새에서 짧은 신음이 번졌다. 굵은 성기가 음란하게 끄덕거리며 선액을 흘려 댄다. 그는 스스로가 짐승이 된 착각을 느끼며 말했다.

“미치겠군.”

“…흣.”

“뭐가 돼도 좋아서.”

그래, 평정심을 잃어도 괜찮을 정도로 그녀를 안는 게 좋을 뿐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 아이는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증거에 불과했으므로.

애석하지만 꼭 아이가 아니어도 증거는 많았다. 당장은 그녀의 건강을 살펴야 했기에 천천히 가져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사내를 그녀가 씨를 뿌리지 못해 안달인 종마처럼 흥분시켜 놓은 거다.

그는 그 점을 알아챌 겨를도 없이 그녀의 어깨에 턱을 댔다. 굵은 물건이 예고도 없이 질구를 쭉 벌리며 뿌리까지 들이닥쳤다.

거침없는 난입에 그녀가 아랫입술을 벌벌 떨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반밖에 맛보지 않았던 안쪽은 굵은 걸 물고 만족스럽게 벌름거렸다. 전율을 느끼는 등허리에 여린 솜털이 바싹 일어섰다.

그는 그 등허리를 자신의 하복부로 쓰다듬듯 맞댄 채 허리만을 흔들었다. 억누르지 못할 만큼 흥분한 숨결이 그녀의 머리칼을 파고든다. 빳빳하게 선 성기는 질벽을 거칠게 밀어 올리며 그녀에게 진한 쾌감을 선사했다.

“으읏, 아, 흣! 아, 너무 깊, 아, 이러다, 읏!”

멈춰 달라 애원하는 말투인데 중간중간 섞이는 교성은 비아누트를 더 보챘다. 안에서 더 단단해진 성기가 여린 점막을 점점 격렬하게 치덕거린다.

그러다 툭 불거져 나온 열점에 맞물리자 그녀가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늦게 알아 버린, 진하고 강렬한 맛에 취한 얼굴 같기도 했다.

“읏, 아, 아! 흐읏….”

그녀가 허벅지를 바르르 떨며 엎어져 버렸다. 비아누트는 그대로 달아나려는 듯한 그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맞붙여 허리를 끌어안았다.

쭉 펴진 다리 위에서 그의 하반신이 엉망진창으로 흔들렸다. 풍만한 엉덩이가 찰박거리며 밀렸다가 쉴 새 없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버겁게 신음했지만 안쪽은 황홀함에 젖은 듯했다. 거칠게 내벽을 훑는 굵을 것을 꽉 물고서 전율을 느낀다. 어서 아까보다 진한 절정을 달라는 것 같았다.

비아누트의 허벅지에 탄탄한 근육이 잡혔다. 이미 등 근육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 뒤였다.

허릿짓이 빨라지자 회색 머리칼이 미친 듯이 흔들린다. 그 안에서 그녀의 체향이 풍겨 오자 그가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숨을 마셨다.

폐부에 최음제가 쌓이는 것 같았다. 온몸으로 전율이 번진다. 그때 쫄깃한 구멍이 그의 것을 깊숙하게 빨아들이곤 격렬히 조였다. 사정욕을 느낀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입술로 정신없이 물었다.

그러곤 그녀가 위로 밀릴 정도로 안을 푹푹 쑤셔 댔다. 뜨끈한 귀두가 자궁구를 훑어 올리자 그녀가 입술을 벌린 채로 숨을 멈췄다.

곧장 거칠게 긁기 시작하자 입술이 무너진다. 그는 제 것을 받아들이기도 빠듯한 안쪽이 벌벌 떨려 오는 걸 느꼈다.

“하….”

그의 허리가 절제를 모르고 난잡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붉은 끝머리가 가장 깊은 곳에서 더 커졌다. 일순간 난폭하게 줄어들며 씨물을 흩뿌렸다.

그는 그 상태로 꿀쩍거리는 안을 천천히 문지르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얼굴은 터질 것처럼 빨간데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르듯이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극악무도한 몸으로 그녀를 달래 가며 밤새도록 안았다.

시간은 어디에서든 공평하게 흐른다. 바이렌하그 대공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그리즈 베네딕트가 그랑디아의 왕으로 즉위하는 날이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대공저 사람들이 모두 초대됐다.

저택이 새벽부터 어수선했다. 물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미소로 물들어 있었다.

다만 한 사람만 유일하게 웃지 않았다. 그건 바로 홀로 대공저를 지키게 된 파올라 바이렌하그였다.

파올라 역시 즉위식에 초대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파올라는 그리즈가 자신의 축하를 바라고 초대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남편 될 사람의 조모를 초대하지 않기도 난감하니, 선택권을 준 것일 뿐일 테지.

그랑디아까지 거리가 멀기에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할 수도 있었다. 어느덧 그래도 되는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파올라는 참석을 택했다. 손자의 혼인식이 즉위식 뒤에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파올라는 손자가 진심으로 웃을 때는 어떤 얼굴일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즈 베네딕트가 왕관을 쓰는 얼굴도 보기를 바랐다.

저택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 아이는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때로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왕좌에 오르는 게 왜인지 뿌듯했다. 가슴속에 미안함과 애틋함이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차 사건에 대해서라면 지금도 할 얘기가 많았다. 파올라는 그때의 자신과 바이렌하그를 나약하게 느꼈고, 그러므로 지켜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런 처지에 누구보다 평화를 원했기에, 전쟁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는 그리즈를 제거하는 걸 선택한 거다. 가슴 속에 남은 죄책감은 파올라가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그렇지만 파올라는 이제 참회의 기도를 멈추고 축복의 기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아이가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지 않아도 자신의 세상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이나.

치장을 마친 파올라가 창가를 바라봤다. 창가 앞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이 있었다.

뒤로 풍성하게 늘어진 치마 끝단이 마치 불사조를 연상시켰다. 드레스를 감상하는 파올라의 눈이 흐뭇하게 휘었다. 그때 뒤에 있던 로렐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선물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드레스는 그리즈를 위해 파올라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전달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래, 오늘이 아니라도 전해 줄 수 있을 날이 언젠가 올 거라 믿는단다.”

캄캄했던 하늘이 어느덧 어슴푸레 밝아졌다. 늦지 않으려면 지금 출발해야 한다. 파올라가 문으로 향했다.

“이제 가자꾸나.”

오랜 시간 마차를 타야 하니 고된 여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파올라의 얼굴엔 근심이 지워져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