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32)

***

눈코 뜰 새 없이 지내다 보니 즉위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그사이 대공과 신혼처럼 하루하루를 살았다.

바이렌하그로 건너온 스테판은 노르드발츠에서 재판받고서 토스카르로 이송됐다. 그리즈는 굳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재판에 불참했다.

재판에 참석했던 관료들로부터 묘한 소문이 들려왔다. 스테판이 잡히던 날, 마리아라는 매춘부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마리아와 잠자리는 하지 않으면서도 거의 연인처럼 지냈다고 한다. 마리아가 재판장에 나타나 그가 참회했다고 증언해 줬다는 얘기가 있었다.

스테판의 포악한 심정을 알기에 의아해했던 그리즈는 의문을 흘려 넘겼다.

오늘은 그랑디아 왕궁으로 향하는 날이다. 새벽부터 짐 정리로 바빴다.

대공은 플뢰도르 대공저 착공 때문에 먼저 출발했다. 저녁쯤 그랑디아 왕궁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정오에 출발했는데 어느덧 저녁이 가까워져 있었다. 호화스러운 마차 안에 마차 바퀴 소리만 가득 울린다.

맞은편에 앉은 벨린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그러다 그리즈와 눈을 마주치고는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저… 왕녀 저하, 지금쯤 모두 도착하셨겠죠?”

아무래도 그랑디아에서 새로 만날 사람들이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그리즈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가슴속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뭉쳐 있었다. 각지에서 숨죽이고 살던 아버지의 추종자들도 초대했고, 유배당한 관료들도 불러들였다. 노르드발츠에서 지원해 준 관료들도 속속 도착하고 있을 텐데…. 대공이 곁에 없으니 초조하기만 하다.

얼어붙은 숨을 훅 내쉬는데 벨린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런데 왕녀 저하, 검은 천사님도 오늘 방문하시기로 하신 건가요?”

창밖을 내다보던 그리즈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인지 벨린의 얼굴에 우려가 깃들었다.

“저… 외람된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

“…….”

“대공 전하께서 검은 천사님을 그리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검은 천사를 가까이 두지는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즈의 생각도 역시 비슷했다. 검은 천사가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고, 자신을 닮은 그 얼굴을 좋아하지 않는 듯했으니까.

그때 벨린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은 연회 날 대공 전하께서 검은 천사님을 돌려보내는 걸 봤습니다. 왕녀 저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집사장님께서 못 본 걸로 하라고 하셨어요…. 이제야 말씀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왕녀 저하.”

멍하게 풀려 있던 붉은 눈의 초점이 벨린에게 맞춰졌다. 그 말을 곱씹던 그리즈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브람…? 브람이 왜 못 본 걸로 하라고 했을까.”

그사이 밖에서 군중들의 떠들썩한 외침이 들려왔다.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자 족히 수천 명이 넘을 듯한 인파가 길을 만들고 서 있었다. 넓은 길에는 붉은 카펫이 끝없이 깔려 있었고 그 끝에 그랑디아 성문이 자리했다.

드높은 담벼락 위쪽으로 그랑디아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본성이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돌아왔구나. 그리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베네딕트 여왕님 만세, 베네딕트 여왕님 만세!”

길을 빼곡하게 채운 군중들이 모두 똑같이 외친다. 그리즈는 무능력했고, 나약했고, 겁 많았던 자신이 좋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앞으로 남은 일은 모두에게 보답하는 일뿐일 것이다.

마차가 본성 앞에서 멈췄다. 백성들의 환호 덕분에 그리즈는 지친 기색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관료들과 시종, 시녀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리즈는 어렸을 때 자신을 돌봐 줬던 시녀장과 한동안 포옹하고 있다가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일정보다 늦게 도착한 까닭에 담소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작은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녀에게 인사하기 위해 찾아온 귀족들이 한 무리처럼 그녀를 뒤따라 들어왔다.

그리즈가 황금으로 치장된 상석에 앉자 귀족들이 뒤따라 앉았다. 주요 귀족들만 초대했음에도 족히 수십 명이 넘었다.

그들 모두가 그리즈의 미모를 칭찬하느라 바빴다.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한 아부였지만 그리즈는 젊은 사내들의 얼굴에서 진심을 보기도 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정리되자 인사가 시작됐다. 그 후에는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 대한 대소사를 얘기했다.

화두는 자연스레 그리즈의 혼인으로 넘어갔다. 관료들은 그녀의 혼인을 축하하면서도 각국의 왕자들에게 미리 구혼 받지 않은 점을 아쉬워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의상 구혼이라도 받아 보라는 제안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 말에 그리즈는 불쾌한 티를 내며 관료들의 입을 막았다.

어느덧 티타임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때 연회장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바이렌하그 대공이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즈는 연회 내내 가득했던 피로가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사내가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의 발길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기품 있는 미소만으로 귀빈들에게 인사하던 그가 그리즈와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에게 잘하고 있었느냐 묻는 듯하던 파란 눈이 그녀의 왼쪽에 앉은 검은 천사를 발견했다. 대공은 여전히 품격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아주 찰나의 순간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조금 전 벨린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연회에서 그가 검은 천사를 돌려보냈다는 얘기…. 그 후 며칠 동안이나 그런 기미도 내비치지 않은 이유가 뭘까.

그와의 사이에 말 못 할 비밀이 생긴 느낌이 든다. 그리즈가 침울한 눈으로 대공을 주시했다.

대공은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창틀에 기댄 모습이 우아했다. 탄탄한 목울대가 유려하게 떨리자 귀족 여인들의 시선이 여지없이 그에게 닿았다.

반면 젊은 사내들의 시선은 그리즈를 향해 있었다. 싱그럽고 신비로운 미모에 홀린 듯했다. 대공 비아누트를 만난 후로 농염함이 더해진 까닭에, 목덜미를 붉힌 사내도 많았다. 정작 그녀는 퍽 울적한 얼굴로 자신의 남편 될 사내를 보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유난히 어두워 보이는 그의 눈이, 둘 사이의 비밀을 새카맣게 부각하는 듯했다. 서운한 기분이 짙어지자 그리즈는 그에게 내내 달라붙었던 시선을 애써 떼어 냈다.

그러곤 그녀의 주변을 빙 둘러싼 사내들과 담소를 나눴다. 그들의 형제자매에 관한 얘기, 취미 생활에 대한 얘기 등. 물론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새파란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세세히 살피고 있었으므로.

소란스러웠던 연회가 둘만의 세상으로 바뀐다. 아득한 기분으로 그리즈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곁눈으로 본 그는 허기진 입술로 포도주를 쭉 들이켜고 있었다. 가득 차 있었던 포도주병이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저렇게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브람은 그 이유를 알까. 그리즈는 당장 달려가 이유를 묻고 싶은 이유를 견디며 티타임을 마쳤다.

사람들이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손등에 입맞춤하기 시작했다. 새카만 사내들의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맛보듯이 매만졌다.

대공은 창유리에 팔꿈치를 기댄 채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시종에게 럼주를 주문했다. 그때 브람이 들어와 대공에게 귓속말했다. 말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오는 그리즈의 귀에도 들려왔다.

“대공 전하, 노르드발츠 왕궁에서 서신이 도착하였습니다.”

맨 뒤에 서 있던 검은 천사가 그리즈의 손등에 입 맞출 차례였다. 브람을 내려다보던 대공의 눈동자가 그녀의 손등으로 향했다.

그가 아닌 사내의 입술이 그리즈의 손등에 닿기 직전이었다. 창밖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까닭에 그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대공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나른했던 두 눈이 뜨겁게 일렁인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 숙이자 구겨진 눈썹이 선명해졌다. 파란 눈동자 아래로 드러난 흰자 때문에 살기마저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망할. 요새 늘 부드러웠던 저음이 그런 식으로 폭발하는 것 같았다. 무심코 그를 본 그리즈는 온몸에 힘을 줬다. 그녀의 손을 쥔 검은 천사가 그 점을 느끼고 입술을 멈췄다.

그 찰나 대공이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옆으로 뻗어진 팔꿈치가 창틀의 꽃병을 무자비하게 쳤다.

쨍그랑! 꽃병이 창 아래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연회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황할 법도 한데 그는 품 안에서 유유히 손수건을 꺼냈다. 이내 고개를 살짝 꺾어서 목덜미에 튄 물을 느릿하게 닦아 냈다.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그리즈는 그가 꽃병을 일부러 깬 것이라 착각할 뻔했다.

연회장을 관리하던 시종들이 다급히 다가와 그를 살폈다. 그는 감흥 없이 괜찮다고 답하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새카맣게 타 버린 듯 어두운 시선은 그리즈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즈는 그가 정말로 괜찮은지 확인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입 맞추지 않았지만 그리즈의 손이 검은 천사의 손바닥 위를 스르륵 벗어났다. 검은 천사 역시 옆을 돌아보며 방금 일어난 일을 파악했다.

대공은 아랫입술까지 튄 물방울을 닦고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마찬가지로 손수건을 꺼내어 그의 바지를 닦아 주던 브람이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노르드발츠 국왕 폐하께서 대공저 이전에 대해 완전한 승인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빨리 답신하실수록 플뢰도르 내의 제반 시설 건설이 빨라질 것 같습니다.”

대공의 눈은 그리즈와 검은 천사 사이의 안전거리를 확인하는 듯했다. 곧 그는 검은 천사가 다른 사람들처럼 퇴실하려는 분위기를 보고 나서야 연회장을 나섰다.

브람이 그리즈에게 상황을 전하고는 대공을 뒤따랐다. 대공이 서 있던 창가에는, 깨진 꽃병을 치우는 시종들만이 남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그리즈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대공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의 대공이라면 꽃병이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그동안 많은 사건을 겪다 보니 습관처럼 불안해진다. 혹시 정말로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아닐지. 가령 노르드발츠 국왕이 곤란한 일을 지시했다거나, 아니면 외교 문제가 생겼다거나. 그리즈가 차가워진 손을 맞잡는 순간이었다.

나가려던 검은 천사가 뒤돌아 그리즈에게 말했다.

“저하, 저… 외람되오나….”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하께 긴밀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미성이 조심스레 귓가로 밀려들었다. 귓속말에 가까운 걸 보면 중요한 얘기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리즈는 시녀장에게 눈짓하고는 연회장에 딸린 접객실로 검은 천사를 데려갔다. 문이 닫히자 따스한 강물 속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이 고요하고 아늑해졌다.

마주 본 검은 천사는 실크 소재의 하얀 상의를 입은 모습이었다. 어깨만 넓고 마른 듯한 몸에 잔 근육이 도드라져 보였다.

비아누트 못지않게 뼈대가 탄탄한 몸이 살짝씩 움직이며 어떻게 말을 꺼낼지 망설이는 듯했다. 고개를 숙이고 목덜미를 붉힌 채였다. 함께 산기슭을 오를 때에는 감정 없는 사내인 줄 알았는데….

긴장한 그를 보자 대체 무슨 말을 할까 싶어 덩달아 호흡이 버거워지는 것 같았다. 사내를 올려다보던 그리즈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찰나였다.

“저… 다름이 아니오라 저하께서 제게 작위와 영토를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황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어느덧 저무는 태양에 집중하며 담담히 대답했다.

“응당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검은 천사는 하얀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어깨선을 무의식적으로 봤다가 시선을 떨궜다.

“영, 영광스럽게 생각하오나 분에 넘치는 선물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곤 일순간 달아오른 귀를 식히듯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사이 그리즈는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뒀던 대답을 꺼냈다.

“그대가 바이렌하그에서 나를 호위하고, 화상 상처를 치료해 준 일에 대한 보상입니다. 부담 없이 받는다면 내가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흘끗 본 검은 천사는 곤란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의아한 일이다. 왕이 작위와 영지를 내릴 때면 초기 자금과 하인들도 함께 보낸다. 주인은 영지의 운영을 살피기만 하면 된다는 걸 그 역시 알 텐데 어째서 곤란해하는 걸까.

어쩌면 확실히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제대로 설명해 주려던 참이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유독 무거워 보이는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실은….”

말을 흐리는 하얀 얼굴에 고민이 드리웠다. 어쩐지 묘한 비밀이 담긴 듯도 했다.

그리즈는 또다시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 그 자신이 바이렌하그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들은 걸까 싶어서. 사실을 물으면 무어라 대답해야 하지. 한 나라의 주인이 된 이상 거짓말은 할 수 없는데….

긴장한 그리즈가 메마른 입술을 매만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연 검은 천사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꺼냈다.

“사실… 며칠 전 바이렌하그 대공 전하께서 제게 탈스바그 후작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경황이 없어 바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제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즈가 듣기 좋은 미성에 귀 기울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바, 방금 무어라 말했습니까. 바이렌하그 대공이 탈스바그 후작 자리를요…?”

“예. 바이렌하그 대공 전하께서 현재 공석인 탈스바그 후작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

“저 역시 연고 없는 그랑디아보다는 제가 나고 자란 바이렌하그에서 지내는 게 어떨까 하여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왕녀 저하께 누가 되지 않는다면… 제게 내리신 작위를 거둬 주시기를 간곡히 청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즈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버벅거렸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대공 비아누트가 어째서 검은 천사에게 영지를….

그것도 숙부인 스테판이 관리했던 탈스바그라면 바이렌하그 내에서도 대규모의 영지일 것이다. 그가 검은 천사를 혈육으로 품기로 결정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앞에 대공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시녀장이 당황한 모습으로 그 뒤에 서 있는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대공이 그리즈와 검은 천사를 쓱 훑어보고는 안으로 발 들이려 했다. 새파랗게 질린 시녀장이 뒤에서 다급히 말했다.

“대, 대공 전하. 외람되오나 예비 국왕 폐하는 바쁘시니, 송구하지만 대화에 문제가 생길지도, 방해될지도 모르고….”

시녀장은 대공 비아누트가 베네딕트가의 왕권을 쟁취해 온 사내라는 걸 아는 까닭에 횡설수설하기만 했다. 대공도 시녀장이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강경하게 대처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했군.”

방해하기 위함인데. 그의 입술이 그렇게 덧붙이는 듯했다.

미끈하게 걸어 들어온 그는 시녀장이 따라 들어올 틈도 없이 접객실 문을 닫았다. 청량했던 공기가 서늘하게 침잠한다. 그리즈는 초식 동물이 사는 계곡에 맹수가 난입한 듯한 착각을 느꼈다. 커다란 사내가 가까워질수록 스산한 적의가 끼쳐 온다.

새파란 시선은 검은 천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검은 바지를 입은 긴 다리가 한 발 한 발 사내에게 향한다. 거리를 좁히려는 목적보다 사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리즈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것도 집무라면 집무인데….

그때 그가 서로 마주 본 검은 천사와 그리즈의 옆에 멈춰서서 서늘하게 말했다.

“또 보는군.”

검은 천사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로 고개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대공이 품격 있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들을 살피던 붉은 눈이 대공에게서 멈췄다. 남성미 가득한 체격만으로 그는 이미 검은 천사를 압도하고 있었다.

사실 복장부터 검은 천사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가 입은 상의 어깨에 금장식이 당연하게 얹혀 있었다. 황금 단추에는 바이렌하그 문장이 찍혀 있었고, 가슴팍에는 대공 인장이 금실로 자수 놓여 있었다.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 넘긴 까닭에 그의 얼굴은 더 없는 냉혈한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선한 분위기의 청년을 보며 씹어 먹을지, 보내 줄지를 무자비하게 고민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가 검은 천사에게 탈스바그를 준다고 했다지 않았나. 부친의 피를 나눈 형제로서 검은 천사를 보살펴 주기로 결정한 게 아닌가?

그리즈가 의아함을 느끼는 찰나였다. 그때 바닥만을 주시하던 검은 천사가 대공을 올려다봤다. 온순했던 눈빛에 묘한 반의가 서렸다.

그 눈을 흥미롭게 살피던 대공은 피하지 말라는 듯 검은 천사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당황한 검은 천사가 시선을 피하자 고개 숙여 눈을 빤히 마주치며 물었다.

“그대도 나와 왕녀 저하의 혼인식에 참석하러 온 건가.”

차가운 저음이 ‘혼인식’이라는 단어를 짙게 강조하는 듯했다. 오늘 아침까지 그리즈가 보았던 다정한 사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검은 천사의 반응이 재미있어 살펴보는 건지, 정말로 악의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당황한 검은 천사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흔들렸다. 그런데도 그리즈가 나서서 자신을 막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대변해 주려는 찰나 따스한 미성이 울렸다.

“그런 이유도 있고 예비 국왕 폐하께 긴히 말씀드릴 부분도 있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대공의 냉랭한 저음이 이어졌다.

“우연이군. 나도 그런데.”

그보다 더 급한 용건이 있으니 비키라고 명하는 것 같았다. 턱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사색이 된 그리즈가 그의 손목을 쥐었다. 왜 동생을 겁주시는 건지…. 붉은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주체 못 할 혈기를 터트릴 것 같던 대공이 억누르듯 이를 물었다. 미끈한 턱에 근육이 뭉친다. 어쩔 줄을 모르던 검은 천사가 고개를 더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디 제 청을 받아들여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지 서러운 얼굴이다. 하얀 얼굴에서 풍겨 오는 유약한 분위기 때문인지 달래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생각을 읽는 듯한 파란 눈이 그리즈를 훑었다. 그리즈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천사가 접객실을 나섰다.

폭풍 전야 같던 공간에 그와 단둘이 남게 됐다. 그는 소파에 앉아 그리즈를 주시했다.

예민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그를 보자 그리즈 역시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안 먹던 술까지 마셨고, 뭔가 숨기는 눈치니까.

검은 천사는 작위를 거부하고 가 버렸다. 그리즈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움직여지는 체스 말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내 얼어붙어 있던 분홍빛 입술이 불만스럽게 움직였다.

“이건… 너무해요.”

대공은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며 기대어서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받치곤 물었다.

“뭐가 너무하지?”

그리즈는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물다가 대답했다.

“검은 천사는 대공의 이복동생이잖아요. 저는 좀 가여운 마음이 들어요…. 게다가 대공도 제게 무언가를 숨기는 눈치이고…. 그래서 저는….”

말을 채 마치지 않았는데 방 안에 스산하게 그의 숨결이 깔렸다.

“가여우니까 손도 잡아 주고 안아 주고 싶은가 보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리즈가 손을 저으며 부정하려 했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해소하려는 듯 손가락 사이로 나온 흑발을 지그시 쥐며 말을 이었다.

“내가 대신해 줄게, 그거.”

어둡게 침잠한 눈동자가 그녀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알지, 그 대신 너는, 나를.”

그리즈는 대공에게는 손해일 거래를 곱씹었다. 그는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는 눈빛을 짓고 있다. 그녀였다. 그리즈 베네딕트….

하지만 그건 그가 이미 손에 얻은 여인이다. 탈스바그 영지를 떼어 주면서까지 얻으려 할 필요가 없는데….

계산 불가능한 난제에 그리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순진한 어린양을 꾀어내는 뱀처럼 느긋하게 물었다.

“어때. 편하겠지.”

뭔가 있는 것 같다. 느껴지는 것은 그뿐이었다. 대공을 세세히 살피던 그녀가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당신이 내게 비밀을 만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나는… 그게 뭔지 알고 싶어요.”

그게 무슨 얘기냐는 듯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그녀는 석양에 드러난 목울대를 주시하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당신이 검은 천사에게 탈스바그 영지를 내려 줄 거라는 소문, 나도 들었거든요. 연회 때도 당신이 검은 천사를 돌려보냈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리즈는 그가 감추려는 게 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혹시나 안 좋은 일이 터진 건지 불안했다.

그가 그리즈 베네딕트를 위해 전쟁을 치렀듯, 또 다른 일에 휘말린 거라면 알아야만 했다. 이제 그 어떤 일이든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 대공 혼자 감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짐을 나도 덜어 줄 수 있어요, 이제.”

그러니 제발 알려 달라며 그녀의 눈빛이 외쳤다. 그 눈을 가만히 주시하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바이렌하그에서 할머니를 돌볼 자가 필요했을 뿐이야.”

탈스바그는 바이렌하그 대공저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는 여전히 충성심 높은 검은 천사를 탈스바그에 두고 할머니를 보살피게 할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뿐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즈가 조르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비아누트….”

그는 등받이 뒤로 고개를 젖힌 채, 자신의 목 뒤를 주물렀다. 느리게 흔들리는 목울대가 무언가를 삼켜 내는 것 같았다.

이내 그는 두 무릎에 팔을 걸치며 상체를 살짝 숙여 앉아서는 애타는 눈으로 그리즈를 보기만 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거친 숨결이 몸을 끌어당기는 착각이 든다. 그리즈는 굳게 마음먹고 한 발 더 물러났다.

“나는… 우리 사이에 비밀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아요.”

그가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았다는 게 이 대화의 결론이었다. 그리즈가 서럽고 서운한 마음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당신이 모든 걸 말할 때까지… 그때까지….”

태어나 풍족하게만 살아온 그에게 위협이 되도록 무언가를 제한해야겠는데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수입이 끊겨도 이미 넘쳐흐를 만큼 돈이 많았고, 권력과 명예도 마찬가지였다. 저 사내가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녀 쪽이었다.

어떻게 하지…. 초조하게 입술을 물던 그녀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 합, 합방은 없어요.”

냉정하게 돌아서는 그녀의 등으로 기막힌 탄식이 흘렀다. 한계치까지 예민해진 저음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리즈.”

움찔한 그녀가 무심코 뒤돌아봤다. 대공은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는, 다리 사이의 소파를 검지로 톡톡 쳤다.

“이리 와 앉아.”

검은색 바지 앞섶으로 무언가가 묵직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게 단단하게 선 남근이라는 게 느껴졌다.

외모는 올곧은 사제처럼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그의 몸은 욕정 가득한 짐승에 가깝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었다. 저기 앉으면 그가 응징하듯 온몸을 헤집을지도 몰랐다.

회임을 간절히 원하니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가 속내를 말해 주기 전까지 참고 싶었다.

어찌할 줄을 모르던 그리즈가 작게 입을 열었다.

“싫… 싫어요.”

소파를 건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대신에 묘하게 가라앉은 저음이 들려왔다.

“싫다니.”

그가 미간을 좁히며 손등으로 자신의 눈가를 훑었다. 적잖게 열이 오른 듯, 목덜미의 핏대가 펄떡이는 게 보였다.

곧 그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시가 크기의 유리병을 꺼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유유히 움직였다.

“그럼 이건 어때.”

“…….”

“회임초인데.”

그의 눈동자가 그리즈의 몸을 훑는다. 그동안 회임하겠다며 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을 한 덕분에 부쩍 살이 올라 있었다.

그리즈는 그 시선을 느낄 겨를 없이 눈을 크게 떴다. 회임초라니…! 대공 몰래 구하려 했었지만 제철이 아닌 까닭에 구할 수 없었는데….

이 상황에서 회임초를 내미는 건 반칙이다. 다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가 보여 주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끌리듯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 당분간 그와 합방할 생각은 여전히 없지만 회임초는 미리 먹어 두고 싶었다.

“회임초…. 주세요.”

작게 말한 그녀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 그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기만 했다.

그녀의 숨결에 다시 설움이 배고 나서야 그가 병을 쥔 손을 넌지시 내밀었다. 그녀가 병을 쥐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여린 손목을 휘감고서는, 그녀가 휘청이는 사이 소파에 눕혀 버렸다.

“흣!”

벗어나려는 허벅지를 가두듯, 그의 무릎이 소파 바깥쪽을 눌렀다. 요새 들어 늘 밝기만 했던 그리즈의 시야가 새카만 그림자에 뒤덮였다.

“대, 대공, 읏, 잠깐. 이건 반칙이에요.”

노르드발츠의 명문가 바이렌하그의 주인이 할 만한 반칙도 아니었다.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사내는 그녀의 몸 위에 자리 잡은 채, 병의 코르크 마개를 입술로 가져갔다.

이내 마개를 이로 느긋하게 물어서 빼내고는 병 안에서 회임초 세 알을 꺼냈다. 몹시 끈끈한 느낌의 진주색 환이다. 어떻게 보면 거미줄 같기도 했다.

환을 집은 엄지와 검지가 그리즈의 입술로 다가왔다. 입술이 순순히 열리자 환이 입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왔다.

첫 식감은 실타래처럼 퍼석했다. 하지만 혀가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단맛과 쓴맛이 어우러진 묘한 맛이 입 안을 뒤덮는다.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인데 나쁘지 않았다. 그리즈가 계속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많이 먹을수록 좋은 거예요?”

그 말에 그의 얼굴이 묘하게 미소 지었다.

“입으로 먹는 게 아니라던데.”

“그럼요?”

그가 두 개의 환을 한 번에 집어 그리즈의 아랫입술에 댔다. 그러곤 먹어도 될지 아닌지 살피는 예쁜 얼굴을 보더니 환을 턱밑으로 굴렸다.

그 찰나 부드러운 손길이 치마를 걷고 속옷을 끌어 내리고 있었다. 회임초를 쥔 손이 그곳으로 아찔하게 직행한다. 너무 갑작스러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대, 대공, 지금 뭐 하시는….”

다리 사이의 길쭉한 틈으로 끈적한 알 두 개가 굴러 내려오는 느낌이 든다. 그걸 피하고자 골반을 들었는데 오히려 진입을 도와주는 꼴이 됐다.

젤리처럼 말캉한 감각이 음핵을 살살 눌러 내렸다. 그녀의 잇새로 숨결이 흘러넘치려 한다. 뒤늦게 아랫입술을 문 그녀가 허벅지 안쪽을 맞붙였다.

“흣, 잠깐….”

그 순간 동그란 것 두 개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예고 없는 난입에 흠칫 놀라는 사이 단단한 검지 끝이 입구에 맞물려서는 환과 함께 쭉 파고들었다.

“아….”

그의 손가락이 그냥 나가기가 싫은지 안쪽의 약점을 지그시 문지른다. 그 손길에 무너지는 그녀의 얼굴을, 새파란 눈이 주시했다.

갈망하는 듯했다. 아니, 이대로 가둬 두고 싶어 했다. 그런 눈으로 사내는 교성이 터져 나오려는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췄다.

“이쪽이 효과가 좋을 거라더군.”

천천히 빠져나간 검지가 음핵에 살짝 닿았다. 분명 그곳을 건드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느낌인데 의외로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사내의 잘생긴 얼굴이 그녀를 보며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 얼굴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지만 그리즈는 머릿속을 뒤덮었던 불안과 불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단 네 글자만이 잇새를 타고 나왔다.

“무, 무례해요.”

안으로 잠깐 들어간 것만으로도 검지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란 듯이 그녀의 눈앞에 드러내고는 태연하게 물었다.

“글쎄, 무례한 게 누굴까.”

단지 네게 좋은 처방을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럴 거냐고 묻는 듯했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그의 혀가 검지를 맛보듯이 핥았다. 젖은 잇새에서 흥분한 숨결이 번져 나왔다.

아주 잠시나마 그리즈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사내를 갈구하도록 몸을 달궈 놓고, 잠자리에서 극도로 만족시켜 줘서는 이 상황을 없던 일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와 보낸 시간만큼 민감해진 몸 때문인지 그 방식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와 관련이 있기에 물 흐르듯 넘어갈 수 없어 애석했다. 그리즈가 오늘따라 유독 뜨겁게 느껴지기 시작한 몸을 억누르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속…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으실 때까지 합방은 없어요.”

너무 깊어서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녀는 흠뻑 빠져 휘둘리고 싶은 충동을 뒤로하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흐트러진 드레스를 곧장 정리하고 접객실을 나섰다. 걸을 때마다 아랫배 안쪽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든다. 그의 손길에 휩쓸리면 늘 그랬기에 이상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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