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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그리즈는 노르드발츠 국왕이 보내준 왕실 교사들에게, 왕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교육받았다. 화법과 처세술, 교양, 품위 수업 등을 추가로 받느라 일주일이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래도 대공의 문관 브리언이 당분간 곁에서 조언해 준 덕분에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 브리언에게 그리즈는 하나의 쪽지를 건네고 조언을 구했다. 왕위에 오른 자신의 곁에서 일을 돕거나, 영지를 내려 줄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명단 안에 하녀 벨린과 검은 천사도 있었다.
그리즈는 벨린을 시녀로 삼고 싶었다. 그리고 검은 천사에게는 영지와 작위를 내려 주고 싶었다. 결과가 어쨌든 그가 목숨 걸고 지켜 준 건 명백하므로. 브리언은 대공과 상의해 보겠다며 명단을 가져갔다.
전쟁의 상처를 입은 그랑디아 성은 복원하는 중이라고 한다. 스테판은 여전히 행방불명인 상황이다. 그랑디아로 떠났던 디르크는 정원사를 찾고서 아델을 만나러 갔다고 한다.
대공 비아누트 못지않게 출혈이 심했던 쿠엔틴은 차츰 건강을 회복했다. 그가 대공의 대역을 수행하다가 얻은 상처를 영광스러워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늘 그랬듯 할머니는 방과 기도실을 전전했다. 대공은 대내외적으로 할머니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오늘은 바이렌하그의 승전을 축하하는 날이다. 대공저를 개방한다는 소식에 오전부터 백성들이 저택 앞에 몰려들었다. 잔치를 준비하느라 저택도 떠들썩했다.
고기와 감자, 옥수수, 밀 요리 등이 대공저 정원 곳곳에 차려졌다. 저녁이 되자 저택 안에서도 축하 연회가 열렸다.
각지의 귀족들이 선물을 들고 찾아와 방명록에 이름을 올렸다. 할머니도 대외 활동만큼은 거를 수 없었는지 연회장에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검은 천사 또한 나타났다. 단상 위 의자에 앉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초대받은 모양이었다.
그리즈는 반가운 얼굴로 검은 천사에게 다가갔다. 함께 노숙하다시피 하며 추레하게 지냈던 탓인지 그가 조금 낯설고 묘했다. 어쩌면 말끔한 모습이 대공 비아누트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만 차갑고 금욕적인 분위기의 대공과 다르게 검은 천사에게선 청량한 느낌이 났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일까. 스무 살은 됐을까. 대공과 나이 차이가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충직하고 상냥한 사람임은 확실했다. 그의 치료가 아니었다면 화상 상처에 염증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생각하던 그리즈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검은 천사가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파올라에게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파올라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누구 때문에 그리즈가 매음굴에 팔려 가게 됐는지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에게 그리즈는 도움을 주고 싶었다. 저택을 떠난 후부터 며칠간 그에게 도움받았으니까. 그가 대공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함구해야 하기에 죄책감이 든 이유도 있었다.
그리즈가 검은 천사와 눈을 마주쳤다. 검은 천사 역시 아름답게 치장한 그녀가 낯선지 쑥스러워하듯 고개 숙였다. 짧은 머리칼 밖으로 드러난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만 검은 천사의 표정에서는 미안함이 묻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디르크의 부친에게 납치당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구나. 그의 탓이 아닌데…. 자책하지 않게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때 어딘가에서 진한 시선이 느껴졌다. 묘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자 단상 위의 의자에 앉아 지켜보는 사내가 보였다.
머지않아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다.
평온했던 그리즈의 심장은 급작스레 뛰었다. 어제 노르드발츠 왕궁에 갔었던 그가 벌써 돌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브리언의 말로는 오늘 저녁 늦게 올 것 같다고 했는데….
왜 얘기해 주지 않았을까? 그가 온 줄 알았다면 준비를 서둘렀을 것을.
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유로운 눈동자에 오만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리즈는 그 눈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다. 수줍은 많은 그녀가 외부인과 대화 나누는 상황이 흥미로운 걸 테지….
그런데 그의 입술은 느긋하게 웃는 게 아니라 차갑게 다물려 있었다. 그리즈는 그 모습에서 낯섦을 느꼈다.
어쩌면 불쾌한 얼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홀로 상석에 앉아 있기 지루한 까닭에, 아니면 왕궁에서 퍽 신경 거슬리는 일이 생겨서….
그리즈는 검은 천사에게 향하던 발길을 틀어 단상에 올랐다. 반가움이 깃들자 도도했던 발걸음이 더없이 빨라졌다.
악사들을 지나쳐 상석 테이블 앞에 서자 그가 일어나 에스코트했다. 그리즈는 그가 내민 손바닥 위에 손을 얹은 채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뒤늦게 앉는 그를 바라봤다.
뼈와 근육뿐인 긴 다리가 의자 앞으로 삐쭉하게 튀어나온다. 넓고 각진 그의 상체도 의자 등받이 밖으로 훌쩍 벗어났다.
그리즈는 그와 비슷한 위엄을 내기 위해 몸을 부풀리듯 어깨를 쫙 폈다. 자세가 편해질수록 몸태가 초라해진다는 브리언의 말을 새기며 흐트러지지 않으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때 팔걸이를 짚고 버티는 그리즈의 손등을 그가 감쌌다. 그리즈는 후끈한 체온에 덮쳐진 손등을 내려다봤다. 긴 손가락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쓰다듬더니 슬며시 깍지를 꼈다.
간지러워…. 굳은 듯했던 그리즈의 자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대공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리즈는 그 잇새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요 며칠간 다정했던 그가 오늘 유독 서늘하게 보이니까.
그 순간 낮은 음성이 잘생긴 입술을 타고 번졌다.
“오랜만이네.”
오랜만…. 무엇이? 그리즈가 잘 다듬은 눈썹을 위로 살짝 올렸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하루 안 본 것뿐이지 않나. 오랜만에 무언가 느꼈다는 얘기인가?
점점 더 의아해지는 찰나 브리언이 단상으로 올라와 귀빈들에게 인사했다. 대기 중이던 악사들이 연주를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호화스럽게 꾸민 연회장에 승리의 노래가 웅장하게 울렸다. 듣기 좋은 북소리 덕분에 그리즈는 의아함을 잊은 채 전장에서 승리를 만끽하는 기분을 느꼈다.
연주가 끝나자 귀빈들이 열성적으로 손뼉을 쳤다. 고전할 것이 명백한 전장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대공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자 깊은 축하 인사와 다름없었다.
박수 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자 브리언이 대공에게 한 말씀을 요청했다.
대공은 짤막한 소감을 남겼다. 다음 전쟁에서도 승리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리즈는 그게 인간미 없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인사라고 생각했다.
이쯤 되자 궁금해졌다. 그가 열정을 다해 화를 내는 상황도 있을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그의 모습은 어떨까.
그러다 실없는 한숨을 쉬었다. 나도 참…. 남편 될 사내가 어떤 방식으로 화를 낼지 궁금해하다니…. 성격 나쁜 그와 붙어 지내다 보니 물들어 가는 모양이다.
아마 그가 화를 내는 건 평생 보지 못할 거다. 그 정도로 그를 도발하는 상황은 오지도 못할 테니까.
상념에 빠진 찰나 브리언이, 그랑디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 그리즈를 소개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단상 중앙에 서서, 미리 준비해 간 글을 읽었다.
글에 앞으로 그랑디아를 꾸려 나가는 마음가짐과 우호국들에 대한 감사를 담았다. 귀빈들이 그녀의 즉위를 아낌없이 축하해 줬다.
연회가 물 흐르듯 흘렀다. 넘쳐흐르는 음식과 음악을 누리자 어느덧 오후 6시가 됐다.
저녁에 가까워진 시간이지만 하늘은 밝기만 하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식사와 다과를 즐겼다.
그리즈는 노르드발츠 각지에서 찾아든 귀족들과 안면을 트느라 바빴다. 적잖게 긴장했지만 대공 비아누트가 곁에 있어 준 덕분에 큰 실수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무사히 인사를 마치자 대공은 국왕이 보낸 사신과 단상에서 대화를 나눴다. 플뢰도르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대공저 이전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듯했다.
그에게 돌아가려던 그리즈는 앞쪽 테이블 옆에 서 있는 검은 천사를 만났다. 안 그래도 대화하고 싶었던 참이었기에 그의 앞에 섰다.
이내 검은 천사에게 손등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검은 천사가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며 존경을 표했다.
“늦었지만 인사드립니다, 왕녀 저하.”
그리즈가 온화한 목소리로 인사에 화답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군요.”
검은 천사는 얼굴에 깨끗한 미소를 드리우며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면목 없지만 마님께 부탁드려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바이렌하그 산에서 폐를 끼친 일에 대해 왕녀 저하께 사과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
“제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할머니가 검은 천사를 초대한 게 아니라 그가 부탁했던 모양이다. 납치 사건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서…. 그리즈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경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진심이었다. 그가 목숨 걸고 싸웠다는 사실로 충분했으니까. 그녀의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가 깃들었다.
검은 천사는 잘 꾸민 여인에 면역 없는 사내처럼 주춤거리다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저… 왕녀 저하께 돌려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주머니의 끈을 여는 하얀 손이 긴장한 듯 떨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주머니 안에서 검은색 팔찌가 나왔다.
완전히 완성되지는 않은 팔찌였다. 그녀가 수녀원으로 향하며 밤마다 만들었던 물건이다. 언젠가 비아누트와 재회하게 되면 전해 주려 했다.
그런데 팔찌 매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만들다가 멈췄는데…. 납치당하던 날 숙소에 뒀던 걸 주웠던 모양이었다.
“아…. 이건….”
그리즈가 팔찌를 받아 들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새카만 그림자가 그녀의 등을 느릿하게 뒤덮었다.
기분 좋은 어둠 속에서 로즈마리 향이 풍겼다. 그리즈는 대공 비아누트가 등 뒤로 왔다는 걸 깨닫고 긴장을 풀었다.
옆을 돌아보자 자신보다 머리 하나 이상이 더 있을 만큼 장신의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잘생긴 얼굴이다. 특히나 그리즈는 가로로 긴 그의 눈썹 선을 좋아했다. 결이 살아 있는 눈썹 앞머리를 볼 때마다 건드려 보고 싶은 충동이 드니까.
그때 대공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훌쩍 넘어서 길게 뻗어졌다. 이내 그가 검은 천사의 손가락에 걸린 팔찌를 쥐었다. 새파란 눈동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겉은 호기심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 팔찌가 왜 검은 천사에게서 나온 건지 궁금한 듯했다.
곧 그가 그리즈에게 느슨하게 물었다.
“저하께서 선물하신 겁니까.”
말끝이 높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리즈는 그가 건네준 팔찌를 받아 들며 대답했다.
“잃어버린 걸 돌려받았어요.”
대공은 짧게 아, 하고는 검은 천사를 살펴봤다. 예술 작품의 모양새를 파악하는 듯한 눈길이 이어졌다.
검은 천사는 누가 봐도 다정하고 청량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무표정조차 부드러워 보인다. 모든 이에게 사랑을 나눠 줄 것 같은 양지의 사제 같았다.
대공은 그 얼굴이 왠지 불쾌한 듯한 눈을 했다. 거둬지던 대공의 손이 그리즈의 손에 쥐여 줬던 팔찌를 다시 가져갔다.
그는 이내 팔찌를 손목에 차고서 느릿하게 조였다. 서늘한 목소리가 검은 천사를 향해 울렸다.
“돌려줘서 고맙군.”
이내 그가 살짝 고개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낮은 저음이 이어졌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아랫입술이 귓바퀴에 살짝 스친 것 같았다. 간지러워져 숨을 참는데, 그의 입술이 귓불을 지그시 물었다.
“흣.”
감각 체계가 고장 난 것 같다. 누구보다 품위를 중시하는 사내가 외부인의 앞에서 충동적으로 스킨십할 리 없으니까.
그때 대공 비아누트의 시선이 검은 천사에게 넌지시 닿은 듯했다. 대공의 입술이 묘하게 웃는 게 그려진다. 어깨로 툭툭 떨어지는 숨은 느긋한 웃음소리처럼 느껴졌다. 충동적인 스킨십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돌아가기가짜 여동생을 원하면
그가 이유 없이 행동하는 법은 없었다. 혹시 그에게 선물할 팔찌를 잃어버린 것을 작게 앙갚음하는 걸까. 아니면 용무가 끝난 연회가 지루한 건가.
그리즈는 기묘한 기분을 떨쳐 내듯 숨을 길게 내쉬며 대공에게 말했다.
“그, 그럼 조용한 곳에서 말씀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공.”
이내 그녀는 검은 천사에게 눈짓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 찰나 대공의 눈썹이 보기 좋게 이지러졌다. 그리즈는 그 이유를 찾으며 대공을 따라나섰다.
말을 걸어오는 귀빈들에게 적당히 인사하고 도착한 곳은, 연회장 옆의 드레스 룸이었다. 천장에 호화스러운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흑경과 화장대, 벨벳 벤치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즈가 그의 입술이 닿았던 귓불을 만지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드레스 룸의 문을 닫고는, 문을 등진 그리즈의 앞에 섰다.
그리즈는 그의 용건이 궁금했다. 노르드발츠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오늘은 다른 날과는 달라 보이니까. 예민한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시선이 아래로 향한 그의 눈 밑에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혹시 노르드발츠 국왕이 대공저의 이전을 막는 걸까.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그가 상의의 가장 위쪽 단추를 하나 풀었다. 보통 목 근처가 답답하면 하는 행동이었다.
이내 그의 손이 그리즈의 뒤쪽 머리칼 사이로 천천히 들어왔다. 단단한 손끝이 두피를 지그시 누른다. 그리즈는 목 뒤로 쭈뼛한 전율을 느꼈다.
“아….”
꽉 다물었던 그녀의 잇새로 탄성이 터져 나갔다. 그 소리에, 무표정한 초상화 같던 그의 얼굴이 허기로 물들었다. 오만했던 눈매가 사나워지며 그녀를 갈구한다. 그가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육체적으로 시달렸던 그녀가 순식간에 긴장했다.
순간 그가 소리를 삼키려는 듯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읏…. 일순간 문에 기댄 그녀는 등으로는 찬기를 느끼면서도 입술의 부드러움에 사로잡혔다.
그의 입술이 아주 느릿하게 아랫입술을 겹쳐 빨아낸다. 살짝 당겨졌던 입술이 제자리를 찾아가면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아랫입술을 핥아 올렸다.
무엇보다 이 시간만을 기다린 듯 구는 사내가 그녀를 압도했다. 나른한 신음을 흘리고, 뜨끈한 숨을 터트리고, 그녀를 문으로 몰아붙이는 그는 조금 전의 대공 같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열의에 스스로 불타는 사내 같았다. 굶주린 시선과 다급한 숨결에서 달콤한 맛이 났다.
“흣, 대공….”
문을 짚은 그녀의 손이 진땀에 주르륵 미끄러졌다. 뒤통수를 쥐었던 그의 손이 그녀의 목 뒤를 부드럽게 쥐고 입 맞추기 편하도록 얼굴을 살짝 들게 했다.
고개를 조금 튼 그가 그녀의 잇새로 혀를 넣었다. 말캉한 게 입 안을 부드럽게 휘젓는다. 멈춘 줄 알았던 심장이 고막 앞에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꼿꼿한 혀끝이 입천장을 쓸었다가 혀를 얽어 문지르자 그리즈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의 고개가 틀릴 때마다 풍겨 오는 로즈마리 향 때문일지도 몰랐다.
“읍, 흡, 으, 읍….”
그녀의 숨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감당 못 할 열기에 그녀가 비틀대고 나서야 그가 입술을 천천히 뗐다.
“아아….”
그녀는 그가 고개 숙이기 편하도록 단추를 풀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을 살짝 눌렀다.
화장대에 놓인 흑경이 우연히 보였다. 대공 정복을 입은 사내의 팔 옆으로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곱게 바른 입술이 지워져 있었고, 우아하게 꾸민 머리칼도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는 출타 중이었던 그가 돌아왔다는 걸 새삼 느끼며 살며시 웃었다.
“그런데 전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는 하고 싶었던 일을 모두 한 후에 용건을 꺼내 놓는 사내였다. 그 점을 이제야 떠올린 그녀의 물음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냥,”
“…….”
“예뻐서.”
집요한 시선이 그리즈의 얼굴 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후덥지근하고 짜릿한, 둘만의 계절에 휩싸인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런….”
무어라 대답할지 망설이던 그녀가 그를 올려다봤다. 그 역시 근사하다고 말해 줄까. 입술을 살짝 여는 순간 파란 눈이 그녀의 모습을 훑었다.
“내가 치장을 망쳤군.”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방으로 돌아가서 편히 고치면 돼요.”
어차피 연회도 홀가분히 마친 참이니까. 그녀가 고갤 끄덕이자 그가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느긋하게 말했다.
“간 김에 쉬어도 돼.”
“그럴까요?”
저음이 너무 나른하게 들려와서 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용건이 그뿐이면 나가도 되겠냐는 듯 그녀가 문손잡이를 쥐는 순간이었다.
“참,”
짧게 말한 그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명단 받았어. 브리언에게서.”
아 맞다. 잊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보낸 걸 이제야 받은 걸까. 그녀가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어때요?”
어쩌면 얼굴이 최근 들어 가장 환하게 웃고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직접 추진한 일이기도 했고, 처음으로 대공에게 부탁한 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는 유난히 반짝거리는 그녀를 보며 모호한 얼굴을 했다. 명단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닌데, 그렇다고 거절하려는 기색도 아니었다. 새파란 눈으로 그녀를 흡족할 만큼 감상하고서야 그가 대답했다.
“나쁘지 않더군.”
좋다는 의미도 아니었지만 그리즈는 신이 났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면 벨린에게도 그랑디아 왕궁에 함께 가게 됐다고 알릴 수 있을 테니까.
“정말요?”
숨넘어가듯 물은 그녀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까치발을 들었다. 그대로 날아갈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보상이라도 받은 양, 기뻐하는 그녀를 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대답하는 저음이 무척 다정했다. 조금 전까지는 화난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던 것 같다.
어느덧 저녁 7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녀는 벨린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 다시 치장하고 쉬다가 저택 앞으로 나왔다.
저녁 8시,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 시작됐다. 대공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른 그녀는 저택 정문 앞에서 내렸다.
돌길 옆 숲에 인파가 끝도 없이 몰려 있었다. 나팔수가 나팔을 불고 나서야 인파가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리즈는 대공을 따라 인파 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에 거대한 나무 십자가가 박혀 있었다. 십자가에는 타릴루치 일가들이 매달려 있었고, 발아래에는 짚이 쌓여 있었다.
반역자는 참수로 벌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교도는 화형으로 영혼마저 태워 버려야 마땅하기에 그녀가 그 법도를 따르자고 제안했다.
사실 대공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클라우디아가 그리즈를 개에게 던지겠다고 했을 때 진심으로 격분했던 건지, 저들을 개 먹이로 주고 싶어 했다. 다만 그리즈는 타릴루치 일가의 영혼마저 태우고 싶었기에 화형을 부탁했다.
화형식이 준비된 걸 보면 그가 그 말에 따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리즈는 고맙다는 듯 그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는 나무 단상에 올랐다.
베아트릭스는 못 본 사이 비쩍 마른 채로 그리즈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랑디아 성에서의 도도한 기세는 없었다. 그랑디아 성에 언어 능력을 두고 온 것처럼 하나의 문장을 반복해서 말했다.
“제발 목숨만은… 목숨만큼은 살려 주세요. 부, 부디 자비를 내려주십시오, 저하.”
왕가를 모함하고, 왕위를 찬탈하고, 이교 행위를 하고도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추하기 그지없었다. 그리즈는 베아트릭스를 싸늘하게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클라우디아를 찾았다.
클라우디아는 단상 옆 나무에 묶여 있었다. 그리즈의 눈동자가 클라우디아의 얼굴을 살폈다. 개에게 물어뜯긴 얼굴 곳곳에 잇자국이 나 있었다. 피부병에 걸렸는지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했다.
그리즈는 클라우디아를 저 상태로 그랑디아탑에 가둘 생각이었다. 남은 날들을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고, 후회하며 메말라 가게 두는 게 최선의 복수일 테니까.
그때 클라우디아가 그리즈를 보고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망할 년, 악마 같은 년! 죽어, 죽어 버려, 그리즈!”
썩어 가는 목소리가 미친 듯이 절규한다. 그리즈는 클라우디아가 머물 방에 거울을 넣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화형식 시작을 지시했다.
백성들이 타릴루치 일가들에게 돌팔매질을 시작했다. 스무 명 가까운 역적들의 몸이 피범벅이 되고야 기사들이 십자가 밑 짚에 불을 붙였다.
흥분한 사람들이 미친 듯이 환호했다. 극악무도했던 일가의 몰락을 지켜보며 희열에 찬 것일 터.
그리즈 역시 온몸이 벅차 왔다. 타릴루치 일가가 추악한 비명을 내지르고 공포로 몸을 떨고 있다. 콧대 높았던 클라우디아도 오열하며 호소하고 있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 제발 멈춰, 멈춰줘. 제발!”
가슴속을 꽉 막았던 응어리가 콰쾅! 부서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드디어 타릴루치 일가를 멸문시켰다.
눈앞에 무수히도 많은 광경이 겹쳐진다. 피바다로 변했던 왕궁, 참수당한 부모님, 말라죽은 형제들, 그 후 멸시당하며 살았던 9년의 세월까지.
그 광경들이, 타릴루치 일가를 태우는 불씨에 활활 불타올랐다. 그리즈의 온몸을 뜨겁게 만들고, 부서진 응어리를 녹여 없앴다.
그녀의 눈이 만인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나, 그랑디아의 왕녀 그리즈 베네딕트는 빼앗긴 왕좌를 되찾았고 역적을 멸문시켰다. 누구든 왕위를 넘본다면 똑같이 처형할 것이다. 모든 자비는 백성에게 선물할 것이기에 역적에게 줄 자비는 없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꺼질 때쯤 그녀는 다짐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왕위를 단단하게 굳힐 것이라고, 황폐해진 그랑디아를 풍요롭게 일궈 낼 것이라고 말이다.
절규와 환희와 탄 냄새가 가득한 피의 연회가 끝났다. 손님 배웅까지 끝낸 그리즈는 방으로 돌아왔다.
뒤따라 들어온 벨린이 그녀의 머리 장식을 떼어 주며 조곤조곤 말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저하. 중간에 힘들어하실 줄 알았는데 끝까지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하셔서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즈는 지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러다 문득 검은 천사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배웅할 때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에게 작위를 내릴 거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는데….
“그런데 벨린, 검은 천사는 언제 돌아갔니?”
그가 인사도 없이 돌아갈 인품이 아니었기에 의아했다. 그때 벨린이 꽃 장식을 테이블에 올리고는 말했다.
“검은 천사님이요? 한… 일곱 시 반쯤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제야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방에서 쉬고 있을 시간이구나.”
벨린은 그리즈의 드레스 뒤쪽 리본을 풀며 넌지시 말했다.
“희한하게도 검은 천사님이 대공 전하를 많이 닮으신 것 같아요. 아까 두 분이 서 계시는 걸 봤는데 혈육인 줄 알았지 뭐예요.”
너스레 떠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피로함에 넋을 놨던 그리즈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그랬니? 언제…?”
그 말에 벨린이 정신이 번쩍 든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예? 예… 그러니까 그게… 아까 연회장에서 봤던 것 같습니다.”
“아….”
아까 팔찌를 건네며 대화했던 걸 봤나 보구나.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기가짜 여동생을 원하면
고된 일정을 마쳤으니 한숨 돌리려던 참이었다. 어쩐 일인지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벨린이 드레스 리본을 다시 묶어 주고는 방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으로 파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녀 저하를 뵈러 왔다. 말씀 전해 드리렴.”
벨린이 눈치를 살피자 그리즈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지는 않았지만 친히 찾아온 집안 어른을 문전박대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방으로 들어온 할머니는 파랗게 질린 혈색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기만 했다. 좋지 않은 용건으로 온 거라는 걸 짐작했을 때 상기된 목소리가 울렸다.
“드릴 말씀이 있어 급하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왕녀 저하.”
문득 할머니의 우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할머니의 모든 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눈치껏 벨린이 자리를 피했다. 긴장한 붉은 눈이 할머니의 표정을 훑었다.
“어쩐 일이신지요.”
백전노장 같던 이전과는 달리 오늘의 할머니는 지나치게 얼어붙어 있었고,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증이 드는 찰나 할머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말씀 드리기 어렵지만 스테판이….”
“…….”
“아레하에서 잡혀 바이렌하그로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스테판…. 그리즈는 입술을 닫았다.
그대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스테판에게 해 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무의미한 고요가 계속되자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휩쓸리지 말자…. 그리즈가 창밖을 내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거 잘됐군요.”
걱정으로 굳어 버린 듯했던 할머니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찌 그리도 매정하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아는 대공이라면 스테판을 처형할 겁니다.”
스테판을 살리고자 이곳까지 발걸음 한 듯했다. 애석하게도 그리즈는 대공에게 스테판의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바이렌하그 영내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제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저 하얗게 질린 손을 주무르는 할머니를 보고 있었다. 이 이상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머니와는 영영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때 할머니가 손등으로 눈가를 꾹 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없었다면 왕녀 저하는 지금도 오르파담에 계셨을 것입니다.”
대화를 끝낼 수도 없도록 다급한 말이 이어졌다.
“스, 스테판은 이미 떠돌이 생활로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상태라고 합니다. 잠깐 권력에 눈이 멀었던 거라고 여기시고 부디 자비를 내려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이유야 어쨌든 대공의 자리를 넘보는 자를 무작정 풀어줄 수 없었다. 대공과 상의해야 할 문제라고 대답하려는데 당당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브람입니다. 왕녀 저하를 뵙기 위해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차갑게 식은 저음이 이어졌다.
“비켜.”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불쾌감이 깃든 대공의 눈이 방 안을 훑었다. 그리즈를 찾는 게 아니었다. 파올라의 뒤태에 멈춘 눈동자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파올라가 그를 돌아봤다.
이 저택에서 가장 가까운 혈육인 그들은 그 누구보다 멀었다. 그리즈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파올라가 대공에게 말했다.
“아레하에서 스테판을 잡으셨다고요, 대공.”
계속 방에만 있었을 텐데 바깥일을 아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대공은 이미 예상했던 건지 여유롭게 대답했다.
“여전하시군요, 할머니.”
“내 아들에 관한 일입니다. 왕녀 저하께 아낌없이 자비를 부탁할 것입니다.”
아들에 관한 일이라면 뒷조사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잇새에서 나온 목소리는 더없이 싸늘했다.
“내 자리를 탐낸 반역자에 대한 일이기도 합니다.”
할머니의 손이 초조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대공…. 남은 평생 자식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이 할미가 가엽지도 않으십니까.”
“…….”
“스테판에게 죄를 물으셔야 하겠다면 차라리, 차라리 유배를 보내 주세요.”
“유배라니. 그럼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주 정중한 협박이었다. 어쩌면 진심 가득한 제안일지도 모른다.
손자를 보는 할머니의 눈동자에 만감이 깃들었다. 서운함과 서러움, 갑갑함. 깊숙이 스며든 심연까지 보였다.
“그래야만 한다면, 저 역시 가겠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목소리가 떨려 오자 그리즈는 기도실에서 눈물 흘리던 파올라를 떠올렸다. 우는 얼굴이 자연스러웠던 걸 보면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닐 터.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스테판을 기필코 처형해야만 하는지 궁금해진다. 이미 화형식을 끝낸 마당이 아닌가. 그가 아니었다면 그리즈 베네딕트는 지금도 잡역부 마리아로 살고 있을 텐데…. 숙부를 참수하면 대공의 평판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말마따나 스테판을 유배 보내는 방법도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리즈가 대공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 그랑디아에 토스카르라는 섬이 있어요. 반역자를 유배 보내기에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사방이 바다인 토스카르라면 탈출도 힘들 테니까…. 경비병에게 감시를 맡기면 문제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즈가 냉혈한 같은 그를 따스한 눈으로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혈육이니 조심스럽게 처벌할수록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또다시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때 처형해도 늦지 않잖아요….”
지위와 돈, 모두의 신뢰마저 잃은 스테판이 악행을 저지를 수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 말에 그는 불만족스러워 보이면서도 무언으로 동의했다. 그녀에게 약할 뿐이다. 이미 권력을 막강하게 보강한 마당에 숙부를 꿋꿋이 처형해야 할 이유도 없을 터.
그가 침묵으로 동의하자 노심초사하던 할머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테판을 유배 보내는 쪽으로 대화가 마무리 지어지는 찰나 그가 턱 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앞으로 저는 그랑디아의 재상을 겸직할 생각입니다. 바이렌하그 저택은 플뢰도르에 새로 지으려 합니다.”
할머니는 손수건으로 진땀을 닦고는 짐짓 평온하게 대답했다.
“나, 나쁘지 않은 계획이군요. 그럼 지금의 바이렌하그 저택은 별장으로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공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할머니께서는 이곳에서 지내시게 될 겁니다.”
세 사람이 있는 방 안이 다시금 고요해졌다. 간간이 당혹감이 깃든 숨소리가 울렸다.
아무래도 손자가 떠나리라는 건 상상하지 못한 것 같다. 할머니가 다시금 충격에 물든 눈으로 대공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아무, 아무리 대공이라도 나를 뒷방 노인네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대공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할머니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당황한 할머니가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내, 내가 왕녀 저하를 저택 밖으로 보낸 일 때문에 나를 벌주시려는 겁니까?”
설마 그뿐일까. 그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것 같았다. 그는 헝클어진 흑발을 한쪽으로 쓸어 넘기며 느긋하게 말했다.
“검은 천사가 내 이복동생이라는 소문도 지금까지 돌더군요. 물론 할머니를 신뢰했을 때는 흘려 넘길 수 있는 소문이었습니다만.”
“…….”
“사실입니까.”
그의 파란 눈동자에 불신이 깃들었다. 할머니가 손수건을 꽉 쥐고서 입술을 버벅거렸다.
“그, 그건….”
이내 퍼석하게 마른 잇새에서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검은 천사는… 대공이 후사를 잇지 못하고 전사하실까 우려하여 남겨 놓은 보루입니다.”
대공은 예상 못 했던 일도 아니었는지, 여유롭게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내 대용품이라.”
“…….”
“유쾌하진 않군요.”
9년 전에 일어난 마차 사건에 대해서는 그나마 그가 모르는 눈치였다. 알았다면 단지 불신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그리즈가 머리칼을 귀 뒤로 슬쩍 넘기며 파올라를 곁눈질했다.
파올라는 혹시나 그리즈가 마차 사건에 대해 말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손자를 그리도 무서워하시면서 왜 그런 일을 저질러서는…. 앞으로도 악행이 세상에 드러날까 봐 밤잠을 설치게 될 터인데.
다만 그리즈는 할머니가 자신을 죽여 은폐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걸 보면 말 그대로 바이렌하그를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겠지…. 그 점은 존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즈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을 내리기로 했다. 파올라가 남은 평생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내 노쇠한 손이 후들후들 떨리는 광경을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머니는 바이렌하그 저택에 남고, 스테판은 토스카르로 유배 보내는 것으로 대화가 마무리 지어졌다. 함께 가 볼 곳이 있다는 대공의 말에 그리즈는 그를 따랐다.
도착한 곳은 처음 발 들여 보는 1층 쉼터였다. 넓은 테라스에 꽃밭이 꾸며져 있었다. 하늘을 석양과 달과 별이 수놓은 까닭에 아름다운 꿈속에 발 들인 착각이 들었다.
오롯이 둘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걸 암시하듯 회색 담벼락이 드높게 자리하고 있다. 비로소 안도한 그리즈가 꽃들을 구경했다.
왼쪽에는 오색의 튤립이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중앙에는 풍성하게 개화한 라넌큘러스가 보였다. 팬지와 이름 모를 들꽃들도 어우러져 거대한 꽃바구니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그는 별천지에 홀린 여인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중앙 테이블로 걸어갔다. 테이블에 홍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를 뒤따르는 그리즈는 홍차보다 향기로운 풍경에 취했다.
정말로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아래에서 상쾌한 꽃향기가 진하게 풍겨 오고, 꽃보다 아름다운 사내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선 그리즈가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이곳은….”
“청혼하려던 곳이었는데.”
“…….”
“너무 급했어.”
그제야 그리즈는 그의 청혼이 그날의 계획엔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빈틈없는 그의 계획이 어긋나도록 만든 게 나라니…. 그리즈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어슴푸레한 빛에 유려한 이목구비가 빛나고 있었다. 짙은 속눈썹 아래로 그늘진 눈매가 무엇보다 매력적이다. 더 이상 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찔하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찰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얼굴이 창백하군.”
“아….”
그리즈가 무심코 뺨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너무 생각이 많았었나 봐요.”
“숙부에게는 나도 사람을 붙일 거야.”
“…….”
“허튼짓하면 그대로 죽는 거지.”
그는 걱정 많은 아이를 달래 주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사탕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엄지와 검지로 쥐었다. 새빨간 사탕이 그리즈의 아랫입술에 톡 내려앉았다.
사탕이 입술에 닿았을 뿐인데도 입 안이 달았다. 분홍빛 입술이 살짝 열렸다. 잇새에서 숨결이 작게 새어 나왔다.
그사이 그의 검지가 입술 안으로 사탕을 굴려 넣었다. 달다…. 진하게 밀려오는 딸기 향에 그리즈의 속눈썹이 그윽하게 떨렸다.
유유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인 그가 부드럽게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과 땅에서 올라오는 꽃향기와 그의 시선에 경계가 허물어져 내린 것 같다.
홀린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 역시 사탕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그가 달콤한 간식은 싫어하는 줄 알았기에 그리즈가 눈을 크게 떴다.
음. 낮게 소리 낸 그가 사탕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러곤 웃는 얼굴이 갓 성인이 된 소년 같았다.
심장이 제멋대로 뛴다. 사탕의 단맛이 더 이상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떨리는 숨을 내쉰 그리즈가 그의 앞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이마에 내려앉는 사내의 숨결에 현기증이 나는 것 같다. 그녀의 작은 귀 끝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 달아요. 저번 것보다….”
새파란 시선이 벌어지는 잇새를 훑었다. 그에게서 픽, 하는 웃음소리가 부드럽게 새어 나왔다. 짓궂게도 그가 어린 왕녀를 보살피는 집사처럼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먹여 드려야겠군요.”
그리즈의 눈매가 보드랍게 떨렸다. 아이 같은 대접을 받는데 어째서 기분이 나른해지는 걸까.
그때 그가 입술을 천천히 겹쳤다. 목덜미가 뜨끈해진다. 이내 입술을 뗀 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한동안 너른 가슴팍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박동이 거칠던 심장이 계속 그 울림을 유지한다. 그녀가 뒤척이듯 가슴팍에 얼굴을 묻을 때마다 더 거칠게 뛰고, 또 뛰었다.
꽃이 만개한 정원에 달빛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9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야 그리즈가 뺨을 살짝 떼고 그를 올려다봤다.
“벌써 아홉 시네요…. 아쉽지만 이제 가 봐야 해요.”
그는 이유를 묻듯 두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리즈가 아쉬워하며 말을 이었다.
“연회 준비를 하느라 공부가 밀렸어요. 그랑디아 역사에 관한 책을 모두 읽어야 하고, 왕실 법도도 복습해야 해요. 그 외에도 교양서적과 처세술 서적 등. 머릿속에 넣어야 할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리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회임초는 언제 주실 건가요?”
사실 그와 며칠 전 잠자리한 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혼인하기로 한 이상 후사 준비를 서둘러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그가 줄 생각이 없어 보였으므로.
참수식이 끝나면 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기다리고 있지만 오늘도 회임초를 받지 못할 것 같았다. 혹시 잊은 걸까. 그리즈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분명히 가야겠다고 말했는데 그는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식은 홍차를 유유히 마시고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를 댔다.
이내 귀 옆 머리칼에 손을 넣어서 머리를 받쳤다. 굵고 긴 손가락 사이로 흑발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리즈가 그 광경을 넋 놓고 보는 찰나 무심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야, 살찌는 거 봐서.”
그의 눈동자가 그리즈의 마른 어깨를 훑어봤다. 아이를 원하는 듯했던 그가 이렇게 남 일처럼 굴 줄은 몰랐기에 그리즈는 사색이 됐다.
“하지만 만약에… 살이 안 붙으면요?”
출산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여인이 출산하다가 숨을 거두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리즈는 자신의 건강 상태가 최고조라 느꼈다. 회임초를 먹는다고 해도 언제 효과가 나타날지 알 수 없기에 미리 준비하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먹고 싶어요. 관료들이 원하는 만큼이나 저도 아이를 원하고 있거든요….”
그녀의 입술이 애가 타 바짝 마르기 시작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팔을 무심히 뻗어 그녀의 손목을 쓱 끌어서 자신의 무릎 앞에 세웠다.
“그리즈.”
“…….”
“나는 잘 모르겠군.”
손목을 풀어 준 그의 손이 쇄골로 훤한 어깨를 훑었다.
“네 몸 상태보다 중요한 게 뭔지.”
미간을 살짝 좁힌 그가 그리즈를 한쪽 무릎에 앉혀 놓고 목덜미를 지그시 물었다. 뜨끈한 입김에 젖어 들자 유연한 감옥에 갇힌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
또 집요한 애무로 정신을 쏙 빼놓을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리즈가 몸을 앞으로 뺐다. 그러자 그가 상체를 그녀의 등으로 지그시 숙여 덮치며 이번엔 귓가에 입술을 댔다.
“왜 중요한지 직접 설명해 봐.”
“…….”
“세 시간 줄게.”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세 시간 동안 함께 있자고 말한다. 정신을 빼놓으려는 게 아니라,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은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등으로 전해져 오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