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32)

***

“하아, 하아. 늦지 앉게 도착하여 다행입니다, 전하.”

노르드발츠의 사령관 베르메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아누트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사실 그랑디아 성을 공격한 병사들은 총 군대의 반도 되지 않았다. 공성전이 무의미할 만큼 압도적인 대군이 온 것처럼 꾸며 적군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놓고 그랑디아 동부로 빠진 거다.

비아누트는 쿠엔틴이 이끄는 선봉대를 텅 빈 빈젤 평야를 가로질러 가게 했다. 그 자신은 기사단을 이끌고 레녹스로 향했다. 레녹스에 타릴루치 저택의 뒤쪽 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레녹스는 참전하라는 그의 서신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검은 천사가 전달한 그리즈의 편지에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고, 비아누트가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군말 없이 교각을 내려주었다.

무탈하게 산길을 빙 둘러 온 비아누트는 교전 전에 타릴루치 본가 뒤편 산에 도착했다. 엊그제 마할 타릴루치가 본가로 향했다는 서신을 받고 급히 수정한 계획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전쟁은 왕만 죽이면 끝날 것이다. 참전한 모든 가문이 반역하고 한 자리씩 꿰찬 전범들이니 말이다. 그랑디아 성이 함락당했다는 소식은 들었을 테니, 마할이 죽으면 투항할 게 훤히 보였다. 그게 비겁한 개들의 생존 방식이므로.

그렇다면 마할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쓰지도 못할 검을 쥐고서 벌벌 떠는 모습을 봐야겠는데.

비아누트의 눈이 저택 중앙을 빤히 훑었다. 기사들이 직사각형의 건물을 유독 감싸고 있다. 건물 앞에 또 다른 건물이 방패처럼 포탄을 막고 있는 형상이기도 했다.

수십 발의 포탄을 받은 뒤쪽 돌벽이 굉음을 내며 허물어졌다. 가운데 돌벽마저 종잇장처럼 쓰러지자 기사들이 빈틈을 메꾸려 우르르 몰려들었다.

비아누트는 손에 쥐었던 투구를 느릿하게 썼다. 망설임은 없었다. 사람 베는 걸 불쾌해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명백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출발하지, 중앙 건물로.”

“예,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그에게 방패를 건넨 베르메르가 산 중턱을 올려다보며 X 자를 그렸다. 포병 지휘관이 손짓해 돌벽을 몸으로 막은 적군에게로 포탄을 날렸다.

휑해진 돌벽 앞이 아수라장이 됐다. 적군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주인 잃은 팔다리가 저택 담벼락에 섬뜩하게 걸쳐졌다.

적군의 얼굴에 공포가 어리자 포병 지휘관이 사격을 중지시켰다.

비아누트는 방패를 받아 쥔 손으로 말고삐를 팽팽하게 당겨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검을 빼 들었다. 베르메르가 뒤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을 향해 힘차게 명령했다.

“중앙 건물로 돌격한다! 마할을 잡도록!”

비아누트가 검을 아래로 내리며 말을 끌어안듯 자세를 낮췄다. 말이 숲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이 빠르게 눈가를 스친다. 그는 이 바람의 온도를 좋아했다. 그랑디아 탑에서 공주를 올려보는 듯한 착각을 주곤 했으니까.

조금 더 빠르게 속력을 냈다. 어느덧 어슴푸레해진 시야로 적군이 다시 벽처럼 겹겹이 자리한 게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아군의 화살이 날아와 적군에게 박혔다. 적군의 대열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는 상체를 세우고 검을 휘둘렀다. 급격히 진해진 피비린내가 폐부의 숲 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밀집된 적군을 끝도 없이 베고 들어갔다. 빈틈이 생기자 아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주인 모를 팔다리가 허공을 떠돌고 핏줄기가 곳곳에서 분수처럼 튀었다. 투구를 뚫지 못한 절규들이 귀 앞에서 웅웅 울린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는 더 깊은 지옥에 발을 들였다. 눈앞에 회색빛 중앙 건물이 보였다.

망루에서 화살이 정신없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는 내내 쥐고 있던 방패로 옆을 막으며 중앙 성으로 달렸다.

그 순간 사자 석고상 두 개가 설치된 출입구에서 기사들이 우르르 나왔다. 잿빛 투구를 쓴 거구들 사이로 유독 뚱뚱한 몸집이 보였다.

실루엣만 스쳤을 뿐인데, 그의 눈에는 회색 머리 소녀가 어렸다. 예전부터 타릴루치 일가만 보면 그는 그랬다. 가져본 적도 없는데 뺏긴 듯한 기분을 느껴 왔으니까.

그 기분은 지금도 여전했다. 부상을 막기 위해 다물었던 입술이 포효하듯 열렸다.

“마할!”

그 포효가 등을 떠민 듯 마할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특유의 몸을 알아본 아군이 마할에게 몰려든다.

“마할, 마할이다! 마할을 잡아라!”

그사이에 마할은 반쯤 허물어진 담을 넘어서서는, 담벼락 저 멀리 주인을 잃은 말을 쳐다봤다.

마할을 쫓던 비아누트가 집요하게 한 목표만 쫓는 맹수처럼 담을 넘었다. 지금껏 빼앗긴 시간에 대한 보상이 필요했다. 그는 마할, 그 일가들의 시간을 거둬야만 했다.

비아누트의 갑옷으로 적군의 두꺼운 검이 날아든다. 쨍, 쨍! 버티다 못한 갑옷이 가로로 쩍 갈라졌다.

그는 담에 툭 걸린 적군의 팔꿈치를 검으로 내리치고서 마할을 뒤쫓았다. 뒤돌아보던 마할이 돌부리에 걸려 나자빠졌다. 갑옷의 무게 때문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조금도 귀족적이지 않은 꼴을 보며 비아누트는 비릿한 실소가 흘렀다.

퍽 궁금했다. 도망가서 뭐하게. 어디로? 가족들과 사이좋게 참수당하는 게 낫지 않나?

마할은 투구를 썼음에도 그를 알아보았다. 눈에 튀는 키와 투구를 썼음에도 엿보이는 살기 어린 눈 때문이다.

“네, 네놈. 여긴 어떻게?”

마할은 잠시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비아누트가 선득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모가지 가지러 왔지.”

“…….”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할 거야.”

그는 지금껏 그리즈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보석과 금화, 드레스와 티아라, 원한다면 대공령을 뚝 떼어 내어 선물할 의향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무엇을 선물하든 그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늘 불안해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므로.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선택한 여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앞까지 찾아왔다. 연심을 준 여인에게 선물을 준비하는 뭇 사내들이 그렇듯, 그 역시 어지러운 설렘을 느꼈다. 마치 그녀의 발목을 옥죈 굵은 사슬을 깨부수기 직전에 서 있는 듯했다.

그녀가 그를 잘 이용하고서 달아날 거라는 클라우디아의 말이 귓전에 맴돌지만 애초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에서 어디를 보든 끝내 그의 눈동자에는 그녀가 비칠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랑이 너무도 익숙했다.

저벅저벅 다가간 그가 투구의 눈구멍에 손가락 두 개를 찔러 넣었다. 그러곤 우악스럽게 벗겨 냈다. 이내 짐승의 목숨을 거두듯 검을 두 손으로 쥐고 거칠게 내려쳤다. 핏발이 선 마할의 눈에서 동공이 화악 열렸다.

그 순간 그의 옆쪽에서 적군이 검을 쥐고 달려왔다. 마할을 내려다보던 그가 방어할 겨를은 없었다.

차갑고 단단한 게 그의 옆구리를 스쳤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파란 눈에, 옆구리 끝 쪽을 관통한 장검이 맺혔다.

감정 표현에 박했던 그였지만 당장은 무던히 반응하지 못했다. 삼킬 새도 없이 잇새에서 거친 호흡이 터졌다. 배 속에서 치미는 고통에 낮은 신음이 이어졌다.

찰나의 순간 무수히도 많은 것들이 눈앞을 지나간다. 황망함, 분노, 허무, 햇살 아래에서 아름답게 웃는 그녀, 그리즈 베네딕트….

비아누트는 그녀에게 약속했다. 살아서 돌아갈 거라고, 돌아가는 길에 마할의 머리를 들고 갈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 없다. 처음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이, 그녀에게 한 약속이 되도록 둘 수 없었다.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그의 손이 적의 목을 비틀었다. 비아누트는 바닥으로 픽 쓰러져 부르르 떠는 적을 선득하게 주시하며 자신의 허리께에 꽂힌 검을 뽑아냈다.

“하아….”

날 선 검이 주르륵 빠져나가며 핏방울을 튀겼다. 그의 깨진 갑옷 안에서 사슬 갑옷이 스산하게 물결친다. 이내 찢어져 아래로 늘어진 사슬 갑옷 안쪽으로 농도 짙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어떤 때 다쳤던 것보다 상처가 깊었다. 생에 가장 어두운 하늘이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바이렌하그로 돌아갈 길이 아득해진다. 그의 손이 서둘러 마할의 머리칼을 쥐어 올렸다.

발걸음을 움직이며 몇 명을 죽였는지도 알 수 없다. 그때 지휘관 베르메르가 담벼락에 쌓인 시체들을 계단 삼아 넘고서 비아누트를 향해 달려왔다.

“하아, 하아, 대공 전하. 문제없으십니까?”

비아누트는 갑옷 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남의 것인 듯이 마할의 머리만을 건넸다. 평소와 다름없는 냉랭한 눈동자가 아수라장이 된 저택 중앙의 관각을 훑어보았다.

관각은 감시 용도로 지어진 둥근 탑이다. 마할의 머리를 걸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드높은 게 마음에 들었다.

“머리를 관각에 걸고 북을 치도록.”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베르메르가 임무를 빠르게 수행한 대공을 보며 잠시나마 안도했다. 이내 마할의 머리를 받아 들고 저택 안으로 달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침 숲에 잠복했던 포병들이 검을 들고 우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세가 확연히 유리해졌다. 비아누트는 숲 초입에서 편백나무를 등지고 느리게 앉았다.

숲의 초입 부근이다. 길쭉한 편백나무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썩 괜찮았다.

그는 검 끝을 흙바닥에 가볍게 꽂고 몸을 지탱한 채로 느슨하게 호흡했다. 비정상적으로 풀린 동공이 전장을 훑는다. 노르드발츠 연합군이 산 능선을 따라 포위망을 둥글게 좁혀 가고 있었다.

그랑디아 세 개의 깃발은 하늘에서 저문 지 오래였다. 바이렌하그 깃발은 더 드높게 추켜올려진 채였다.

그의 얼굴에 흡족함이 깃들었지만 숨은 조금씩 거칠어졌다. 투구의 입가를 올리고 숨을 크게 마신 그가 거추장스러운 장갑을 벗고 허리를 훑어봤다.

옆구리 끝에서 한 뼘 정도 안쪽에 생긴 부상이었다. 얼마나 위중한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출혈은 눈에 띌 만큼 심했다.

아군의 사기가 꺾일 테니 부상을 알릴 수 없는 상황이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바뀔 수도 있으므로 그는 한숨 돌리는 걸 택했다.

머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 의미 없는 웃음이 흘렀다. 미리 예감했던 불행이 기어코 오고 말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므로.

누구에게나 신께서 선사한 운명이 주어져 있다. 신께서는 그 운명을 거스르는 자를 너그러이 봐주지 않는다.

비아누트는 마할 타릴루치의 말로가 그 방증이라고 생각했다. 무역상의 삶을 거부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순간부터 마할은 머리가 잘릴 운명에 처했다고 말이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즈 베네딕트에게 주어진 운명은 무엇이었을지. 그 운명을 손수 거스르게 만드는 자가 어떤 형벌에 처해질지를.

아니, 사실 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은 죽을 운명이지 않나. 지금으로서는 그는 그리즈 베네딕트의 운명을 바꿔 주고 단죄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벌인 것처럼 몸에서 빠져나오는 피가 갑옷 하의까지 흥건히 적셨다. 뜨거운 피를 만져 보던 그는 이내 식어 가는 체온을 느끼며 낮게 호흡했다.

그의 눈이 저 멀리 회색 관각을 훑었다. 11층 높이의 최상층으로 마할의 머리통이 주르륵 올라가고 있었다.

둥, 둥, 둥! 평야에서 바이렌하그의 북소리가 울렸다. 평지를 흙보다 더 빼곡히 채운 시체들과 저택 앞에 쌓인 거대한 무덤을 보고 적군은 이미 투지를 잃었다.

그 순간 열 개의 횃불이 관각 최상층을 밝혔다. 마할의 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밝게 빛났다.

승리의 북소리에 두리번거리던 적장들이 마할을 발견했다. 그 광경을 빤히 주시하던 그는 자리를 참 잘 잡았다고 생각하며 느슨한 얼굴을 했다.

바람에서 떠도는 흙과 피 냄새가 더 진해진다. 적군의 울부짖음이 전장에 절망을 더했다.

그럴수록 그의 입가가 흡족하게 휘었다. 늘 비릿했던 전쟁의 끝맛이 오늘 유독 달게 느껴졌으므로.

아득한 눈앞으로 붉은 양탄자가 깔린 길이 환상처럼 보였다. 장엄하게 솟은 왕좌를 향해 발을 내딛는 여인의 형상이 점점 선명해지는 듯도 했다.

그 여인에게서 건드리면 깨질 듯한 유약한 모습은 느껴지지 않았다. 담대했고, 비장했다. 오늘 보았던 그녀의 모습처럼. 그 모습을 주시하는 그의 눈가에 만족이 깃들었다.

그랑디아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는 낯설었다.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그리즈 베네딕트는 언제나 수줍은 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연약한 몸이, 그에게 영원토록 보호하라고 늘 명하는 듯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명을 받아들였고, 명을 받드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때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침범한 거다.

그는 묘하게 성숙해졌던 붉은 눈동자를 곱씹었다. 그러나 그가 혼란을 느꼈던 건 아주 잠시였다. 금세 그녀가 여전히 그리즈 베네딕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눈동자 안에 수줍은 소녀가 치열하게 숨어 있는 게 보였으므로.

그의 눈이 다시 전장을 주시했다. 흐릿한 환상 속의 그녀는 저택 앞에 쌓인 시체 무덤을 한 발 한 발 밟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 위엄 있는 표정으로 무덤에 깃발을 꽂았다. 베네딕트 가문의 깃발이 웅장하게 펄럭이는 듯했다.

피에 흥건히 젖은 드레스 끝자락이 그 아래에서 흩날린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그는 아득히 먼 그곳으로 살짝 손을 뻗어 보았다.

피에 젖은 그의 잇새에서 웃음소리가 픽 빠져나갔다. 다친 곳이 눈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빛나기만 할 그녀가 더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는 검 손잡이를 두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일어나려 했다. 비틀, 일순간 머릿속이 핑 돌았다.

흘끗 본 흙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망할. 낮게 읊조린 그는 치미는 격통을 삼키며 팔로 나무를 짚었다. 천근 같은 몸을 끌고서라도 돌아가야 했다. 약속을 지킬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으므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

다음 날 동틀 무렵.

관각에 마할의 머리통이 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군이 투항했다. 비아누트는 바이렌하그의 지휘관들에게 뒷일을 맡긴 후 말을 타고서 빈젤 평야를 지났다. 당분간은 승리의 맛을 누릴 수 있도록 병사들에게 자신의 부상 소식은 알리지 않았다.

빈젤 초소 앞에 지원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대기 중이던 마차에, 지휘관 베르메르와 함께 올랐다.

마차 안에 브람과 의사가 타고 있었다. 그는 관각에서 거둬온 마할의 머리를 선물 상자에 넣었다.

갑갑했던 갑옷을 벗어 내자 브람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왕실 의사조차 창백한 얼굴로 혼비백산했다.

의사는 핏물이 밴 채 너덜너덜해진 상의를 칼로 찢었다. 전투로 탄탄해진 그의 상체가 땀과 피에 젖어 번들거린다. 짐승과 다름없어진 몸이 호흡할 때마다 거칠게 들썩거려졌다.

그러나 비아누트의 얼굴은 더없이 나른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거슬렸던 환부를 깔끔히 도려낸 듯한 기분이 든 덕분이었다.

의사는 옆구리 끝 쪽에 반 뼘 정도 난 환부를 진중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다 쇠꼬챙이 같은 도구로 가볍게 찔러 보더니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다행히 장기에는 문제없이 근육들만 손상된 것 같지만 출혈이 좀 심합니다. 대공 전하, 우선 지, 지혈부터 해야겠습니다.”

가방에 챙겨 온 약초 통을 꺼내는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바이렌하그의 대공이 제 손안에서 숨을 거둘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다.

픽 웃은 비아누트는 그는 의자 등받이에 한쪽 팔을 기댔다. 브람이 작은 대야에 물을 따르고는 물수건을 만들어 환부를 닦아 내며 물었다.

“전하, 우선 진통초를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좀 비좁겠지만 누워 계시겠습니까?”

무엇을 원하든 브람이 손수 이뤄 줄 기세였다. 그러나 비아누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브람이 당장 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대답할 가치를 찾지 못한 입술이 다물리자 브람이 새 물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베르메르가 한숨 돌리며 우직하게 말했다.

“바이렌하그까지 반나절 이상 걸리니 푹 쉬십시오.”

달그닥, 달그닥. 마차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종종 겪어 본 브람은 유연하게 대처했다.

“얼굴의 피를 닦아 드리겠습니다. 머리도 곧 감겨 드릴 수 있습니다.”

대공에게서 섬뜩한 살인광의 향취를 벗겨 내겠다는 얘기였다. 감흥 없는 그의 눈은 맞은편 의자 위의 선물 상자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저 상자의 주인에게로 향하는 길이다. 그 앞에 서려면 단지 사람다운 모습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그는 사색이 된 브람을 내려다봤다. 노곤함이 깃든 입술이 이내 천천히 열렸다.

“브람.”

“예, 대공 전하.”

“최고로 그럴듯하게 꾸며 줘.”

브람이 의아하게 두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매를 지그시 좁히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짐칸에 새 옷이 있는데 입으시겠습니까.”

비아누트는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시각, 바이렌하그.

그리즈는 그랑디아 성에서 머리가 세 개인 카스토르 석상을 찾자마자 바이렌하그로 향했다. 드디어 그 지옥을 빠져나왔다는 생각 덕분인지, 마차 멀미는 하지 않았다.

늘 환상 속의 천국 같았던 바이렌하그는 전쟁의 여파 때문인지 퍽 어수선했다. 전쟁 병기와 식량을 빠르게 싣고 나가느라 망가진 잔디를 하인들이 복구하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리즈는 창가에서 그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붉은 늑대로부터 대공이 그랑디아 동부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역시 참전할 거라는 서신을 받은 게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의 생사가 불분명해지자 붉은 늑대가 곁에서 머물며 그녀의 정신을 돌리려 애썼다. 그리즈는 붉은 늑대로부터 많은 정보를 전해 들었다.

디르크는 바이렌하그 4층 손님실에서 잠이 들었고, 타릴루치 일가들은 바이렌하그 감옥에 투옥됐다는 소식도 있었다. 감옥 안에 클라우디아도 함께 있다고 한다.

그리즈는 클라우디아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 궁금했다. 떨어지며 나뭇잎에 걸려 충격을 덜 받은 걸까.

어찌 됐든 붉은 늑대는 클라우디아가 개에게 얼굴을 물어뜯기고 다리 하나가 부러진 정도로만 다쳤다고 했다. 숨은 붙어 있으니 클라우디아의 처우를 고민해 보라고 했다.

정말로 복수의 시간이 온 것이다. 그러나 그리즈는 복수 방법을 상상하며 쾌감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붉은 늑대는, 그녀가 독약을 쓴 덕분에 바이렌하그는 많은 병력을 지켰다고 위로했다. 그리고 대공께서 그랑디아를 산산이 부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리즈는 좀처럼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화려한 문을 열자 창틀에 앉아서 벤치를 내다보는 그가 눈앞에 잔상처럼 비쳤다. 그의 입술에 어린 나른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거리를 좁히면 그가 선명히 보일 것도 같았지만 다가가지 못했다. 오전 7시. 늘 아름다웠던 하늘이 오늘따라 슬프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상에서 딸기 사탕 주머니를 열었다. 저택을 떠나며 돌려주었던 게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그리즈는 사탕을 하나 꺼내어 입 안에 넣고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탕을 곁에 두고 나눴던 평온한 대화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손잡는 건 한 개. 머리카락 만지는 것도 한 개. 그리고 같이 자는 건….”

“…….”

“같이 자는 건 다섯 개. 키스도 다섯 개요. 대화하는 건 안 주셔도 돼요.”

문득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허공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점수 매기라고 한 적은 없는데.”

그때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에게 점수를 매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끝내 서늘하게 굴었더라도 그를 마음에 담게 되지 않았을까. 예고 없이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머릿속으로 닥쳐오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으니까.

허공을 주시하는 그리즈의 잇새에서 서글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차라리 비틀린 사이로 지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랬다면 그는 여전히 이곳에 있을 테고, 무탈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초조한 심정에 몸서리치는 것보다는, 얼음처럼 차가운 사내를 견디는 게 더 쉬울 것 같은데….

그의 부고가 날아드는 게 자꾸 상상되어 숨이 막혀 왔다.

정오. 손으로 가슴께를 누르던 그리즈는 못내 밖으로 향했다.

대공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나마 덜 지옥 같은 곳에 있어야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무의식이 이끈 곳은 언덕 아래 호숫가였다. 쉼터로 내려가려던 그리즈의 발걸음이 홀연히 멈췄다.

오늘은 무척 햇살이 밝았다. 그 덕분에 한 발치 너머에서 감상해도 좋을 만큼 경치가 화려했다.

그리즈는 금실이 출렁이는 듯한 호숫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가족들과 호숫가를 거닐던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먼 기억이기 때문일까. 그저 물속이 차가울 거라는 생각과 그보다 더 차가웠던 그의 저음이 귓가를 뱅뱅 맴돌았다.

바람에서 진한 피비린내가 풍겨 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때 곧게 뻗은 오른쪽 길 저 멀리에서 저택 정문이 열렸다. 바이렌하그의 깃발을 위엄 있게 쥔 기수가 말을 타고 달려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아득한 환상이 떠오른 모양이다. 바이렌하그 대공의 존재감을 처음 느꼈던 그날의 시작도 이러했으니까.

허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리즈는 정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샤토 왕의 목을 말에 매단 채 선득하게 나타날 환상 속의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진한 먼지바람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리즈가 눈을 비비고서 허공에 바람을 훅 불었을 때쯤에야 먼지바람이 서서히 침잠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붉은색 마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모서리와 지붕 쪽이 황금 문양으로 장식된 걸 보면 안에 중요한 사람이 타고 있는 듯했다.

그러므로 허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마차가 그리즈의 앞에서 천천히 멈췄다. 목적지가 이곳일 리는 없을 텐데…. 문득 머릿속을 꽉 채운 예감에 그리즈가 호흡을 멈췄다.

끼익. 마차의 문이 열린다. 문 아래에서 깨끗한 가죽신을 신은 발이 유유히 돌바닥을 짚었다. 몹시 큰 신발은 사내의 것이었다. 설마, 진짜…. 하지만 대공은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때 사내의 작은 머리와 넓은 어깨가 문 위로 우뚝 솟았다. 아…. 수려한 이목구비를 보자마자 그리즈는 멎었던 숨을 아주 오래도록 내쉬었다. 가슴속 깊은 곳까지 침범하려 하던 불안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는 남색의 깔끔한 상하의를 입고 있었다. 가슴팍에 바이렌하그 문장이 새겨진 걸 보면 대공 정복인 듯했다. 상의 앞주머니에서 흔들리는 회중시계의 체인이 그를 조금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

한쪽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흑발이 선명하게 보이자 그리즈는 다시금 허상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의 몸 어디에도 전쟁을 치른 흔적은 없었으므로. 리본으로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든 그의 모습이 마치 출장을 다녀온 남편 같았다.

정말 그렇게 돌아온 듯 그가 어렴풋한 미소를 보였다. 그녀 역시 미소 짓고 싶을 만큼 기뻤지만 가슴이 아릿해져 그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확신이 깃든 발걸음이 그녀의 앞에서 멈췄다. 그제야 그녀는 어렵사리 미소를 지으면서도, 왈칵 차오르는 감정으로 눈가를 붉혔다.

처연한 눈 안에 커다란 사내가 가득 찼다. 차가운 인상이 보이는데 이상하리만큼 따듯하게 느껴진다. 울지 않도록 어르는 듯한 기분을 막연히 느꼈다. 그녀가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 나른하게 가라앉은 저음이 번졌다.

“돌아온다고 약속했지.”

“…….”

“돌아왔어.”

그리즈는 슬픈 눈으로 눈을 감았다. 그가 조금 미웠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말에도 전장으로 향했으니까….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만들어 놓고 돌아와 웃는 얼굴이 태연스럽기까지 했다.

탁해지도록 시달린 그리즈의 눈이 그가 원망스럽다고 말한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등 돌리지 못하도록 그의 손이 그리즈의 손목을 얽었다. 그가 엄지로 피부의 촉감을 느껴본다. 그러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시선을 맞춰 왔다.

“목소리 들려줘.”

귀족이므로 당연하게 은유적으로 돌려 말하던 습관은 보이지 않았다. 곧장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봤다.

여유롭던 그의 눈동자가 반응을 갈구하듯 빛났다. 고작 바람 한 번이 불어왔을 시간이 지났는데 그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계속 보니까. 다른 생각이 나는군.”

그가 키스하기 전처럼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공간에서. 흡사 말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입 맞추겠다는 협박과 다름없었다.

비로소 대공 비아누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된다. 그녀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뻗어 제 의지로는 처음으로 그의 뺨을 만져 봤다.

그가 작은 손의 향기를 느리게 맡았다. 그러곤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스치듯 대 보며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정신이 몽롱해지는 순간 그가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이내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대며 미간을 옅게 좁혔다.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창백했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가 감정에 예민한 소년처럼 느껴졌다. 빈틈을 보인다면 그 틈을 타 입술을 덮칠 것 같았고, 몸마저 원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도발에 그리즈는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을 참으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읏…. 저도… 저도 보고 싶었어요.”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걸 짐작했는지 그가 느슨하게 웃었다. 햇살이 그 모습을 환하게 비췄을 때, 바람이 불어와 흑발을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가 꽃밭에 풀썩 누워 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냉혹한 외모는 여전한데…. 그리즈가 손끝으로 그의 흑발을 살짝 만져 봤다.

꿈만 같은 시간이다. 대공 비아누트를 지켜 달라는 기도를 들어준다면 앞으로 어떤 부탁도 하지 않겠다는 기도를 신께서 들어주신 것 같다.

그리즈는 홀로 소망했다. 앞으로는 평온이 이어지기를. 다시는 그가 전장에 갈 일이 생기지 않기를….

그때 마차에서 내린 브람과 눈이 마주쳤다. 놀란 그녀는 대공의 뺨에 가져갔던 손을 뗐다. 그러나 뒤를 흘끗 돌아본 그는 개의치 않았고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 가져왔어.”

“선물… 이요?”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있겠냐는 듯 상자를 흔들어 본다. 안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어떤 선물일까.

전쟁터에서 가져온 것일 테니 평범한 선물은 아닌 듯했다. 전리품, 보석, 아니면 마할의 머리…. 하지만 내게 가장 큰 선물은 여지없이 당신인데.

떨리는 그녀의 눈이 그를 살펴봤다.

그런데 남색 상의 옆구리 쪽이 유독 짙었다. 자세히 보니 흥건히 젖어 있었다. 옷 섬유의 조직이 햇살에 빛나 보일 정도였다.

그녀가 눈가를 손등으로 비비며 그곳을 다시 응시했다. 이쯤이면 사라졌어야 할 환각은 슬프게도 더 선명해져 있었다.

무서울 만큼 짙고 선명한 피였다. 어째서 그게 그의 옆구리에….

그를 향해 반짝거리던 붉은 눈이 일순간 탁해졌다. 꿈을 꾸는 듯싶다. 아주 애통하고 잔혹한 악몽을.

옆구리의 핏물이 아래로 흐를 정도인데 그는 미소 짓고 있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손을 잡고는 느리게 내려다봤다.

“들어갈까.”

그녀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눈을 마주하자 그가 왜 그러냐고 묻듯 눈썹을 살짝 올린다. 그녀는 혼비백산하며 입술을 벌린 채 버벅거렸다. 그가 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쾅 내려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다친 걸까. 대체 어쩌다가….

애타는 입술만 움직이는 그리즈의 눈에 끝내 눈물이 맺혔다. 그가 선물로 가져온 자유가 슬프도록 무거웠고, 찬란했으므로.

그의 방으로 같이 들어갔다. 그는 곧 치료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말 역시 지켜질 거라는 걸 알지만 그리즈는 담담하지 못했다. 비아누트 대신 새파랗게 질린 손이 침대맡의 종을 정신없이 울렸다.

“우선 치료, 치료부터 받으세요. 제 앞에서 쓰러지시면 안 돼요.”

눈앞이 새카매지는 와중에 느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놓고 퍽 재밌는 모양이다.

아니, 자세히 곱씹어 보니 안타까움이 밴 탄식 같기도 했다. 어두운 시야로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을 때 브람과 의사들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정중한 노크조차 없었다.

평소라면 불쾌감을 표했을 그는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그녀만 응시했다. 창백한 얼굴이 흡사 잘생긴 인형 같았다.

정말 그가 저대로 굳어 버릴까 봐 덜컥 두려워졌을 때 브람이 그의 상의를 다급하게 벗겼다. 옆구리 쪽이 커다란 면포가 덧대어진 채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상, 상처를 다시 한번 소독하고 봉합해야겠습니다. 뜨거운 물과 면포를 넉넉히 준비해 주세요.”

의사들이 협탁에 도구를 풀어놓고 브람에게 말했다. 그리즈가 창틀에 딱 붙어서 하얗게 질려 있자 그가 나지막이 불렀다.

“이리와.”

브람이 다급하게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진땀을 흘리던 의사는 침대 아래쪽으로 가서 그의 두 다리를 쭉 당겨 눕게 했다. 그리즈는 시트 위로 스르륵 밀려 떨어지는 흑발을 멍하게 바라봤다.

헐떡이는 거친 숨이 그녀의 귀를 정신없이 찔렀다. 사그라들기 전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시야에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지만 시간은 어쩔 도리 없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그의 벽안이 허공을 멍하게 훑었다. 그러다 동공이 풀린 상태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즈는 그가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나른한 얼굴과는 다르게 눈길은 다급했으니까.

그의 낯선 모습을 보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안 돼, 지금은 우는 모습 보이기 싫은데. 아랫입술을 꽉 문 그녀가 그의 머리맡에 섰다.

그러곤 침대 위에서 늘어진 피 묻은 손을 잡았다. 무섭도록 차가운 한기가 손바닥에 배었기에 그녀는 온기를 불어 넣어 주듯 꽉 쥐며 말했다.

“저, 저 여기 있어요.”

“…….”

“여기, 여기 바이렌하그에, 전하의 옆에 있어요.”

단지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었을 뿐인데 눈가에 눈물이 가득 차 버렸다. 무너지듯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안해요. 모든 게 다…. 제가 했던 얘기들, 행동들, 모두….”

지금 와 돌이켜 보면 모든 게 실수 같았다. 첫사랑은 이미 끝났다고 선을 그어 버렸다면, 저택을 떠나 버렸다면, 홀로 제 갈 길을 갔다면 그가 피 흘릴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애타는 숨이 잇새에서 터지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그가 낮게 잠긴 음성을 흘렸다.

“전장에서, 대관식을 하는 너를 봤어.”

그의 파란 눈이 그때의 환상을 떠올리는 듯 아득해졌다. 대관식…. 살아남기도 벅찬 그곳에서 그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때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아름답게 웃고 있었어.”

“…….”

“그렇게 만들어 줄게.”

그녀가 웃을 수 있도록 살아 있겠다고 맹세하는 듯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사내의 미소가, 호흡이,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속 깊숙이 애틋하게 박혔다.

그때 브람이 돌아왔다. 비아누트는 한발 물러서는 그녀에게 협박을 끝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지, 방에서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눈을 선명히 뜨면 아래 흰자가 살짝 보이는 눈이다. 마주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싸늘함에 그리즈는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5일이 흘렀다.

왕실 의사는 그가 많은 피를 흘린 까닭에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봉합도 깔끔하게 되었으니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그리즈는 그가 깨어나지 못할까 봐 매일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그가 눈을 떴을 때 건강한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는 브람의 조언을 듣고는, 그의 곁에서 화상 상처를 함께 치료받았다.

다행히 그의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녀의 상처도 염증 없이 아물었다. 그를 밤낮없이 간호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때맞춰 식사한 덕분인 것 같기도 했다.

잠이 든 그의 얼굴이 좋은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기에 기다림이 힘겹지는 않았다. 혼자 말하고 답하는 일상이 차츰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대공을 간호하느라 디르크는 만날 겨를이 없었다. 몇 번 그녀에게 만남을 요청했던 디르크는 아델이 낳을 아이의 아버지인 정원사를 찾기 위해 그랑디아에 다녀온다고 했다.

디르크마저 떠나자 그녀는 더없이 고요한 일상을 보내게 됐다.

하지만 예고 없이 손님이 찾아오며, 고요한 하루가 뒤틀렸다. 손님은 다름 아닌 노르드발츠 국왕이었다.

그 사실을 알린 브람이, 어쩔 줄을 모르는 그리즈를 그의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다행히 대공은 깨우지 말라는 국왕의 명이 있었다고 했다.

국왕이 친히 그녀를 만나러 온 거라는 브람의 설명에 그녀는 가장 좋은 드레스를 입었다. 치장을 마치자 브람이 그녀를 1층의 중앙 접객실로 데려갔다.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두고 대형 소파가 마주 보고 있었다. 왼쪽 소파 중앙에 붉은색 망토를 걸친 노년의 사내가 위엄 있게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는 하얗게 샌 머리가 무색하리만큼 건장했으며 젊어 보였다. 대공 비아누트의 첫째 할아버지라고 들었는데…. 바이렌하그 가문의 내력이, 누가 봐도 빼어난 미남형 얼굴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즈는 접객실 안으로 발 들여서 안을 살펴봤다. 왕실 친위대가 벽에 줄 맞춰 서 있었고, 국왕이 앉은 소파 뒤에는 흑발의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리즈는 두 손을 모으고 소파 끝 쪽에 서서 두 무릎 꿇어 앉으며 상체를 낮췄다.

벨린이 그녀의 드레스를 정리해 주고는 접객실을 나섰다. 어수선했던 공간이 정리되자 그리즈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깔며 입술을 열었다.

“그리즈 베네딕트, 노르드발츠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본의 아니게 곧바로 맞이하여 드리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괜찮소. 짐이 기별 없이 왔기 때문이오.”

고개를 끄덕인 국왕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대의 얘기는 익히 전해 들었소. 짐의 조카 손녀 자리에 앉았던 일을 문책하지는 않겠소.”

그동안 바이렌하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국왕이 모를 이유가 없었다. 아마 국왕은 자신의 조카 손자인 바이렌하그 대공과 그리즈 베네딕트가 어떤 사이인지도 알고 있겠지.

혹시 그것 때문에 이곳까지 행차한 걸까. 바이렌하그 대공과 브리튼 공주와의 혼인을 다시 추진시키려 하는 건 아닐까.

그리즈는 바싹 마른 입술을 이로 살짝 물었다.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국왕이 보좌관에게 검은색 조각상을 받아 들어 유심히 살펴보다 말했다.

“그대가 이 조각상을 찾았다지?”

고개를 살짝 올려 살펴본 석상은 머리가 세 개였다. 카스토르…. 그리즈가 다시 고개를 숙이곤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수고가 많았소. 그런데 그대가 정말 베네딕트의 왕녀가 맞소?”

국왕의 화법은 예상외로 간단명료했다. 사심 없어 보이는 중저음에 그리즈는 굳은 입술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베네딕트의 왕녀… 그리즈 베네딕트입니다, 폐하.”

검지로 자신의 턱가를 매만지던 국왕이 소파 쿠션을 팔걸이 삼아 팔꿈치를 댔다. 그러곤 상체를 그리즈 쪽으로 비스듬히 숙이며 차분하게 물었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소?”

증명. 증명이라니….

너무 긴장한 까닭에 입술이 저절로 떨렸다. 이대로 목소리를 내면, 예전처럼 끝도 없이 말을 더듬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건 죽기보다 싫은데…. 대공처럼 강해질 수는 없겠지만 유약해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즈는 차라리 천천히 말하는 쪽을 택했다.

“그 조각상을 찾은 곳이… 그랑디아 성 최상층의 비밀 회의실입니다…. 성의 구조를 아는 고위 관료들과 베네딕트 일가만이 찾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국왕 역시 그랑디아 성의 비밀에 대해 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증거로는 부족하다는 듯한 표정이었기에 그리즈가 말을 덧붙였다.

“그랑디아의 토스카르에 저를 보살피던 시녀장이 유배되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시녀장이라면… 분명히 저를 알아볼 것입니다.”

관자놀이를 검지로 문지르던 국왕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대도 그 시녀장의 생김새를 기억하오?”

그리즈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한참이나 회상해 보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머리색은 갈색이었고, 눈동자는 초록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콧잔등과 광대에는 주근깨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렸을 적 실수로 시녀장의 무릎에 뜨거운 물을 엎었던 까닭에 아마도… 무릎에 화상 자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화상 자국이 없더라도, 왕녀가 뜨거운 물을 엎은 일을 시녀장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증거가 되지 않을까.

그리즈가 눈치를 살피는데 국왕이 보좌관에게 작게 속삭였다. 보좌관은 기다렸다는 듯 소파 위의 고서를 집어 펼쳐 보였다. 국왕이 고서를 받아 들고는 말했다.

“무례인 줄은 알지만 노르드발츠 군이 그랑디아 성의 비밀 공간을 샅샅이 뒤져 보았소.”

그리즈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 고서는 무얼까. 궁금해지는 순간 고서를 읽던 국왕이 다시 고서를 테이블에 내려 두며 말했다.

“그곳에서 베네딕트 왕가의 가계도를 찾았소. 그리즈 베네딕트의 특징으로는 검지와 중지의 길이가 비슷하다고 적혀 있군.”

소파 뒤에 서 있던 보좌관이 그리즈의 옆에 다가와 섰다. 눈치를 살피던 그리즈가 손을 쫙 펼쳐 보여 주자 손 길이를 확인하고는 다시 소파 뒤로 가서 말했다.

“저 여인도 검지와 중지의 길이가 거의 비슷합니다.”

그때쯤에야 그리즈는 노르드발츠 국왕이 자신의 혈통을 확인하러 온 것임을 느꼈다. 가슴속에 가득 찼던 긴장이 조금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을 때였다.

“그대가 비아누트의 작위를 지키려 다시금 성안으로 뛰어들었다지?”

“그렇습니다.”

“정말 비아누트의 작위를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궁금하군.”

처음에는 명료하게만 느껴졌던 국왕의 화법이 불시에 날카로워졌다. 이유 모를 허를 찔린 그리즈는 고개를 살짝 들고 국왕의 의중을 살폈다. 그 눈을 노련하게 주시하던 국왕이 말을 이었다.

“타릴루치가 이교도라는 증거를 찾아 누명을 벗고 그대가 왕좌에 오르기 위함이 아니었는지 물었네.”

아…. 그러니까…. 그리즈는 짧게 한숨 쉬었다.

타릴루치에게 복수하고 왕좌를 되찾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그게 가문을 위하고, 부모님을 위하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고민 없이 대공 비아누트를 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마음을 증명할 길이 없어 애석할 따름이었다.

“제게 가장 값진 것은 바이렌하그 대공 전하입니다.”

그리즈가 처음으로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을 살피던 국왕이 소파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대며 대답했다.

“어찌 됐든 타릴루치의 폭정을 멈췄으니 참된 일을 했다는 건 인정하오. 우리가 바라보는 게 같다면 서로가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겠군.”

협력자라니…? 소파 쪽을 흘끗 올려다보는 그리즈의 시선에 의문이 깃들었다. 순간, 국왕이 보좌관에게 명했다.

“그랑디아의 새로운 왕에게 성대한 즉위식을 선물하고 싶군.”

그 주인이 바로 너라는 듯, 국왕의 시선이 그리즈에게 닿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얘기에 그리즈는 숨을 멈췄다. 그랑디아의 왕좌를 되찾으려면 앞으로도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홉 살 이후로는 빵 하나를 얻는 것도 어렵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멀게만 느껴지던 왕좌가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랑디아의 새로운 주인…. 즉위식…. 애써 억눌렀던 그리즈의 숨이 들쑥날쑥 터져 나왔다.

“진짜… 제가… 왕좌를 되찾을 수 있습니까?”

국왕은 그런 그녀를 온화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대보다 서열이 높은 후계가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한 거잖소.”

꿈길을 걷는 듯 아득해진 눈동자가 복받쳐 흔들렸다. 그 눈을 응시하던 국왕이 나지막이 물었다.

“황송한가?”

“그렇습니다, 폐하.”

“그럼 짐이 청을 하나 하지.”

청이라니? 흔들리던 붉은 눈이 국왕을 주시했다. 국왕은 소파 뒤에 서 있던 젊은 사내를 불러 소파 옆에 서게 하고는 위엄 있게 말했다.

“노르드발츠의 다섯째 왕자, 알렉산더르 반 바이렌하그요. 그대가 왕자와 혼인하여 짐에게 진심을 보여 주시오.”

“…….”

“만약 거절한다면 짐의 조력자가 될 의사가 없다고 간주하겠소. 그렇게 되면 짐은 그대의 앞길을 막느라 꽤 바빠지겠군.”

그리즈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랑디아의 왕좌에 오르는 대신 노르드발츠의 왕자와 혼인하라니. 일순간 눈앞이 새카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자 국왕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더니 알렉산더르를 훑어보며 물었다.

“혹시 왕자의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요? 바이렌하그 대공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어딜 내놔도 손색없을 사내요.”

국왕의 말은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바이렌하그 가문의 내력인지, 알렉산더르 역시 흑발의 예민해 보이는 미남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를 보는 그리즈의 눈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이미 대공 비아누트에게 남김없이 준 까닭이었다.

“국왕 폐하, 아뢰옵기 송구합니다만….”

이미 한 사내를 선택한 그녀는 다른 사내의 앞에서 서늘하고 아름다운 석상에 불과했다. 고민조차 없는 냉담한 목소리가 접객실을 차분하게 메웠다.

“제 마음이 원하는 건 바이렌하그 대공뿐입니다. 이런 제게 어찌 폐하의 소중한 분을 두려 하십니까.”

완곡한 거절이었다. 국왕이 흥미롭다는 듯 웃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마음이 원한다라.”

“…….”

“그 마음, 영원토록 지킬 수 있으시오?”

그 물음에 그리즈는 확신에 찬 얼굴로 답했다. 단언컨대 언제든 맹세할 수 있었다. 하늘의 유일신과 전장에서 죽어간 바이렌하그의 병사들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 그의 부모님의 앞에서도 굳건하게.

“맹세할 수 있습니다.”

말 더듬지 않기 위해 고장 난 오르골처럼 늘어트렸던 목소리를 유독 당당하게 냈다. 그 목소리를 곱씹어 보는 듯했던 국왕이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짐이 그대의 앞길을 막아선다 해도?”

그리즈는 고갤 들고 국왕을 응시했다.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제 마음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악심을 품은 자는 언젠가 마땅한 벌을 받는 법이다. 그랑디아를 망친 악인의 말로를 직접 보고 느낀 직후였기에 그리즈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요구를 거절당한 상황임에도 국왕의 얼굴에 불쾌감은 없었다. 맹렬하기까지 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오히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

“욕심으로 믿음을 배신할 인품은 아닌 듯해 마음에 드는군.”

그리즈가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두 눈썹을 살짝 올렸다. 의아해하는 순간 국왕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그대의 마음을 증명해 주기를 바라겠소.”

그제야 그리즈는 국왕이 비아누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했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 순간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국왕이 들어오라고 명했고, 검은색 의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보좌관에게 귓속말했다. 보좌관이 그 말을 전하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문이 열리고 파올라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파올라 바이렌하그,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뒤에 있던 브리언까지 인사를 마치자 국왕이 회중시계를 확인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짐, 빌리엄 반 바이렌하그는 베네딕트의 그리즈를 그랑디아의 적법한 주인으로 인정하려 하오. 브리튼과 아레하와도 이미 협의한 사항이니 앞으로는 법도에 맞는 예를 갖춰 드리기를 바라오.”

이전보다 수척해진 할머니가 초연하게 명을 받들었다. 그때 대공 비아누트가 깨어났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대공을 만나고 싶은 기색의 국왕은 그리즈의 앞날을 축복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만남을 마쳤다.

접객실을 나온 그리즈의 얼굴이 조금 들떠 있었다. 노르드발츠 국왕에게 혈통을 인정받은 직후였지만 그보다는 대공이 깨어났다는 소식 덕분이었다.

다만 뒤따라 접객실에서 나온 할머니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까닭에 그리즈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할머니와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앞으로 영영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할머니가 어깨에 두른 레이스 망토의 위치를 고치고는 살짝 고개 숙였다.

“곧 그랑디아를 다스리는 자리에 즉위하시겠군요. 마음을 다해 축하드립니다, 그랑디아의 왕녀 저하.”

그녀가 노르드발츠 국왕이 명한 대로 예를 갖췄다. 그리즈는 미동 없이 서 있었지만 내심 낯섦을 느꼈다. 그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할머니가 넌지시 물었다.

“스테판이 며칠째 행방불명입니다. 혹시 대공에게 들으신 얘기가 있으신지요.”

그리즈는 달갑지 않은 이름을 듣고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없습니다.”

그러곤 이만 가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입을 열며 그리즈를 붙잡았다.

“송구하지만 왕실 법도에 맞는 예를 받으시려면 그에 맞는 위엄을 갖추셔야 합니다.”

“…….”

“앞으로는 은연중에 몸을 낮추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왕녀 저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으니 친할머니로부터 진심 어린 조언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파올라 바이렌하그는 필요에 의해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인물이 아닌가. 그리즈의 눈빛이 더없이 단단해졌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공허하게 바닥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초연히 말했다.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하면 언제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미동 없던 그리즈는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그저 돌아섰다. 등 뒤에서 회한이 서린 한숨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국왕은 대공과의 대화를 마친 후 조용하고 빠르게 돌아갔다. 권모술수에 능한 백전노장 같은 느낌이라, 만남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악한 인품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카 손자인 대공의 부상이 걱정되었기에 친히 걸음 한 느낌이 든 덕분이기도 했다. 또 혈기왕성한 대공이 미혼을 고수한 채로 전장에 뛰어드는 걸 막고자 그리즈 베네딕트의 즉위를 돕는 듯했으니까.

방에서 티아를 돌보던 그리즈는 대공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공은 창가에 서 있었고, 브람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복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저번과 비슷한 대공 정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지난번과는 다르게 재킷 안에 단추가 빽빽한 조끼를 입고 있었고, 재킷 가슴팍에는 스카프와 연결된 체인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그가 다친 지 고작 5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의사가 보름 정도는 걷지 말고 쉬게 하라고 당부했는데…. 그가 회복이 빠른 편이라고는 했지만 일러도 너무 일렀다.

일을 마친 브람이 밖으로 나갔다. 대공은 창틀에 살짝 기대어 앉아 그리즈를 바라봤다. 그녀를 반가워하는 눈동자가 선명히 빛나는데, 정작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혹시 악몽을 꾼 걸까. 그를 향해 걷던 그리즈는 방 중앙에 멈춰 서서 조심스레 물었다.

“저… 악몽을 꾸셨나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세요.”

어쩌면 국왕과의 대화에서 문제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긴장한 심장이 조여 오는데 특유의 저음이 귓속으로 끼쳐 왔다.

“그렇습니다. 왕녀 저하.”

국왕으로부터 그리즈 베네딕트에게 예를 갖추라고 그 역시 명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불편한데…. 꼭 그와의 사이가 새롭게 변화된 것 같아서.

그래도 몸에 배게 하고자 티 나게 불편해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보다는 웃음기 없는 그의 표정에 온 신경이 쏠려 있던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기분이 안 좋다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미동 없던 그가 창틀 뒤쪽으로 상체를 살짝 기댔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에 햇살이 비친다. 창틀에 무수히도 많이 갖다 놓은 꽃병과 어우러져 천국의 풍경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에 뭐라고 말했더라….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잘생긴 입술이 움직였다.

“잠에서 깨자마자 기분이 좀….”

“…….”

“더러웠을 뿐입니다.”

그는 지금껏 사용하던 격식 있는 단어가 아닌 사나운 단어를 택했다. 의아해하던 그리즈가 자신의 눈가를 손등으로 쓱 쓸며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그새 잊으셨습니까.”

잊다니, 무엇을?

“아….”

어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그를 깨우고 갈 것을…. 고개를 살짝 숙였던 그리즈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말을 흐렸다.

“하지만 국왕 폐하께서 방문하신 까닭에….”

대외적으로는 과묵하고 점잖은 그였지만 이럴 때는 꼭 온기에 집착하는 소년 같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에게 무심할 때면 손을 지그시 물곤 했던, 그랑디아에서 키웠던 성미 나쁜 늑대개와 비슷했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걸어서 그의 앞에 섰다.

“그래도… 다시 돌아왔잖아요, 저도.”

그 말에 굳어 있었던 그의 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왜인지 햇볕에서 쉬는 나른한 짐승 같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바닥에 닿았던 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확 꽂혔다.

“처음이군요. 제가 잡지 않아도 돌아오신 게.”

존대하는 그에게서 묘한 공기가 풍겨 온다. 금욕적 분위기가 더 깊어진 것 같은데, 눈빛은 더 뜨겁다. 마치 그가 애초에 갖고 있었던 강압적 성향이 파란 눈동자 속에 모조리 갇힌 듯했다.

그 눈을 마주한 그리즈는 왜인지 애가 타는 듯한 감정 또한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잠든 그를 두고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홀로 일어났을 그를 막연히 상상해 봤다. 그가 가장 처음 느꼈을 게 무엇이었을까.

그러다 텅 빈 침대를 떠올렸다. 그녀가 떠나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보았을…. 갑자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심장을 쿵쿵 치기 시작했다. 목숨 걸고 자유를 되찾아 주기는 했지만, 그가 그리즈 베네딕트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그저 지그시 응시하거나, 잠자리하거나, 집요하게 굴어 왔으니까. 전장으로 향하던 순간에도, 이대로 헤어져도 미련 없을 것처럼 담담하게 떠났을 뿐이었다.

그리즈는 다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검에 찔려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던 사내가 이 정도의 일에 애 닳는 듯한 눈을 하고 있다.

그가 표현하지 않은 감정들이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쌓여 있다는 증거 같았다.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에 대한 감정, 저택을 떠난 이유 등을 차근차근 풀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쪽지만 남겨 두고 떠난 건 진심이 아니었어요. 사실 저택을 떠나며 정말 많이도….”

“…….”

“울었… 습니다.”

또다시 혼자라는 걸 느낄 때마다 저택을 떠나온 걸 후회하기도 했다. 정말 떠나는 게 최선이었을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그리즈 베네딕트가 또 사라졌다는 소식에 그가 지을 눈빛을 상상하자 새벽이 더 어두워졌다.

그리즈는 그 하늘 안에서 빛나는 은하수를 덧없이 바라봤다. 그럴 때면 유독 스스로가 초라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를 떠나왔어도, 그의 눈빛을 닮은 어두운 은하수에 의지하며 새벽을 지새우는 게 너무나도 비참했다.

앞을 내다봐야 하는데…. 하필 지나쳐 온 게 대공 비아누트였기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틸수록 이상하게도 그가 머릿속에서 더 선명해졌다. 그리즈는 그걸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했다.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고칠 생각은 없었다. 정신없이 산을 오르며 유일하게 행복했던 순간이었으므로.

“저는, 저는… 늘 저 자신에게 부족함을 느껴요….”

작게 입을 연 그리즈가 길게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심해서… 낯선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워했거든요. 시녀들의 도움 없이는 활동하기도 힘들었었습니다.”

“…….”

“그때는 당연하게 느껴졌어요. 어린 나이였고, 어머니께 과분하게 사랑받았었고… 어떤 실수를 저지르든 제 지위 덕분에 용서받을 수 있었으니까…. 제 부족함을 채울 생각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시간은 그녀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잠시 고개 숙였던 그리즈가 그를 처연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매음굴로 가게 되었을 때야, 부족하지 않은 나를 만들기 위해서 시간을 써야 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 버렸고, 저는… 타인을 곤란하게 만들며 써 버린 시간을 아까워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어요….”

그걸 깨달았을 때쯤 매음굴을 탈출했고, 바이렌하그 대공저에 오게 됐던 거다. 그리즈 베네딕트의 무덤을 본 순간을 떠올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 저를 좋아해 주는 당신의 존재가 기쁘면서도 때로는 과분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희귀한 보석 같았어요. 상처 많은 제 몸을 더 남루하게 비추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심 보석이 탐났던 모양이다. 그 보석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저택을 떠났다. 부족함을 채우고 당당히 그의 앞에 서고 싶었으니까. 그래,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는 심정이었다.

그렇기에 태어나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이라는 걸 해 봤다. 매 순간이 힘들었고, 두려웠기에 디르크의 부친에게 잡혔을 때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그리고 또 살고 싶었다. 우습게도, 죽고 싶은 이유와 죽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같았다. 매 시간 뒤바뀌는 생각 속에서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그 이유 역시, 어디선가 그리즈 베네딕트를 찾고 있었을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 때문이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을까.

“제가, 제가….”

“…….”

“탑에서 꽃과 나비를 좋아한다고 얘기했었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랑디아 성에서 탑으로 이송되며 특별한 경험을 했으니까….”

반정이 일어나던 날의 기억은 거의 지워진 상태였다. 머릿속에 맴도는 건 잔인하게 죽어 간 사람들뿐이다.

다만 폐위된 후에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 늘 아름답다며 칭송하던 사람들의 눈빛이 잘 갈린 칼날처럼 서늘해진 순간이었다.

하루아침에 스스로가 도마 위의 식재료, 혹은 곧 버려질 짐짝처럼 느껴졌다. 그 눈을 마주 보며 그리즈는 배신감과 공포에 떨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랑디아탑으로 향하던 마차에서 특별한 것을 보았다. 푸르른 꽃과 나비…. 왕녀였을 때에도 싱그러움을 뽐냈던 꽃과 나비가, 그녀가 천민보다 못한 신분으로 전락한 순간에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즈가 그날의 풍경을 떠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반정이 일어난 후, 그랑디아탑으로 유배되던 길에 마차 창문으로 들어왔던 햇살이 기억나요.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던 꽃과 나비도…. 꼭 내게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어요. 보잘것없어진 나라도 여전히 사랑해 주겠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

“그리고… 탑에서 만났던 당신 역시 제게….”

그 소년 역시 그렇게 말하며 안심시켜 주는 것 같았다. 왕녀가 아니어도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며, 살아가야 할 자격이 있다며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비좁은 창문으로 들어온 기도상과 빵이 그 증거였다.

“그러니까 저는….”

바이렌하그 저택을 떠난 이후에 많은 사내를 봤다. 그리고 그리즈는 그들이 사내라는 공통점만으로 대공 비아누트를 떠올렸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그녀의 온몸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런 사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까. 그리즈는 이 마음을 모두 꺼내 놓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장황했고, 어렵고, 길기만 하다. 그녀의 입술이 마땅한 말을 간절하게 찾다가 멈췄다.

붉은 눈동자가 그의 눈을 찾았다. 언제나 어려 있던 두려움과 긴장이 사라지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그 눈을 천천히 주시했을 때였다. 곱게 닫혔던 그녀의 잇새에서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사랑… 해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에 모든 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저택을 떠나며 남겼던 쪽지는 결코 진심이 아니었고. 삶에 있어 간절히 원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 당신이라고. 이 마음은 영원토록 바뀌지 않을 거라는 마음 또한….

순식간에 얼굴이 터질 듯이 뜨거워졌다. 부끄러워져 숨고 싶은데 햇살은 점점 밝아진다. 손으로 뺨을 만진 그리즈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신기했다. 그의 얼굴, 몸, 목소리 어느 곳도 ‘사랑스럽다’라는 표현에 어울릴 만한 구석이 없는데….

그런 그를 보며 사랑한다는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리즈 베네딕트는 정상이 아닌 게 맞을지 몰랐다. 그럼에도 이대로가 좋았다. 그녀의 입가에 조심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너른 방에 햇살과 함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한 폭의 그림처럼 미동이 없다. 어쩌면 공기 없는 공간에서 굳어 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짙고 긴 속눈썹이 느리게 떨린다. 그조차 사랑스럽다고 느껴졌을 때, 커다란 손이 간지럽다는 듯 자신의 귓가를 만졌다.

늘 그리웠던 파란색 눈동자가 진하게 빛난다. 찬란한 천국에 갓 발들인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정말로 진귀한 보석 같았다. 그 아름다움에 취한 기분이 드는 순간, 귓가를 만지던 손이 자신의 가슴팍을 지그시 눌렀다.

뾰족한 목울대가 느리게 떨린다. 잇새로 낮은 숨을 느슨하게 흘린 그가 봉합한 옆구리 근처를 내려다보고서야 말했다.

“상처가….”

“…….”

“터질 뻔했군요.”

그의 앓는 듯한 저음에서 애틋하고, 기쁘고, 어지러운 감정들이 배어 나왔다. 그게 너무 적나라하게 와닿았기에 그리즈는 잠시 숨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이제는 고쳐야 할 습관이기도 했다.

그녀에게서 그 표정을 읽은 그는 손으로 창틀의 화분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곤 다리를 살짝 벌리고는 창틀을 두 손으로 짚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가까이 오세요.”

그리즈는 어깨너비로 벌어진 긴 다리를 내려다봤다. 문득 이 다리 사이로 들어가며 치욕을 맛봤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때와 다른 기분이 드는 게 신기했다. 긴장한 채로 미소 지은 그녀가 그의 다리 사이로 천천히 들어가 섰다.

남색 바지 허벅지 부근에 근육이 탄탄히 잡히는 게 보였다. 그녀 역시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근육들이 몸속에서 팽팽히 조여지는 듯했다. 그녀가 묘한 숨 막힘을 느끼며 그를 살짝 올려다봤다.

그는 평소처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마주 보려 하는 그를 향해 숨넘어가도록 말했다.

“사랑… 사랑해요.”

시선을 살짝 떨구자 푸른 핏대가 탄탄한 목 근육 사이에서 펄떡이는 게 보였다. 미동 없는 그의 표정이 정직한 건지, 그의 몸이 정직한 건지 알 수 없어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애욕이 깃든 시선이 얽혀 들어온다. 이내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는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봤다.

멀리 있을 때는 누구보다 나른해 보이던 사내는 가까워질수록 관능미를 드러낸다.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내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퇴폐적인 눈빛이 잇새를 헤집는 듯했다.

당분간은 대공과 스킨십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브람이 신신당부했기에, 그리즈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느슨하게 웃은 그가 허벅지를 살짝 닫아 그녀의 골반을 고정하고는 여유롭게 물었다.

“대답, 듣지 않고 가실 겁니까. 왕녀 저하.”

몹시 정중한 말투와는 달리 눈빛은 도발적이었다. 시선을 피한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 해, 해 주세요.”

떨리는 입술을 훑어본 그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시간이 멈춘 듯이 느껴지는 순간, 그녀의 아랫입술을 아주 느리게 빨았다. 사내의 거친 숨결이 입 안으로 침범한다. 쭈뼛, 온몸의 솜털이 서는 기분에 그녀는 쓰러질 듯 그의 어깨를 잡았다.

“흣, 대, 대공 전하….”

흡사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빨던 그가 눈매를 나른하게 좁히며 대답했다.

“그대… 라고 부르셔야지요.”

상대를 당장 바닥에 눕힐 듯이 굴고 있으면서 아이를 어르듯 말한다. 혼란을 느낀 그녀는 그의 어깨만 쥐며 고개를 피했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이번엔 귓가로 향했다. 잘생긴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야가 어두워지니 감각이 살아난다. 젖은 입술이 귀 옆의 머리칼을 헤집고 귓불을 쭉 빨자 허벅지 안쪽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아….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고 싶었다. 그 순간에도 그의 입술이 귓바퀴를 느리게 훑더니 그녀의 목덜미 깊숙이 묻힌 채 열렸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도.”

말만으로 표현하기 허전한 듯 목덜미를 지그시 무는 입술이 느껴졌다. 잠자고 있던 감각을 깨우는 애무에 그리즈가 다급하게 말했다.

“흣, 그, 그만….”

애원 섞인 신음을 흘리고서야 입술이 아찔하게 떨어졌다. 허리를 감싸려던 그의 손이 다시 창틀을 짚었다.

“화상 상처는 어떠십니까.”

거친 숨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묻는다. 아니, 여인의 몸 상태를 알아보려는 듯했다.

하지만 화상 상처가 생긴 걸 알리지 말라고 브람에게 부탁했었는데…. 당황스러워하던 그녀가 대공의 옆구리 부근을 바라봤다.

그의 벽안은 화상 상처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타는 눈빛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 눈빛을 느낀 그리즈는 숨을 참으며 그를 살펴봤다. 유독 하얗고 차가운 톤의 피부가 보인다. 그러나 귀 끝은 분홍빛으로 물든 게 보였다.

그가 그런 몸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낮게 호흡한다. 마치 너만 괜찮으면 몸을 맞대도 좋다는 뜻 같았다. 아무 때나 여인에게 몸을 내어 주는 쉬운 사내처럼. 그리즈 베네딕트만이 아는 모습일 테지만….

얼굴을 붉힌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화상 상처… 아직은 아파요.”

사실 화상 상처보다는 그의 부상이 걱정됐다. 혹시나 그의 상처가 터져 버리면 브람을 볼 낯도 없으니까….

대답을 들은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그녀의 마른 몸을 살피더니 창틀 옆의 종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인을 부르는 벨이었다. 긴 검지가 손잡이를 살짝 짚었다.

그 순간 그녀는 남색 바지를 내려다봤다. 골반과 허벅지가 접혀 맞닿은 부분을 빳빳한 무언가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게 흥분한 그의 중심부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5일간, 자고 있음에도 그의 몸은 잠자지 않았다. 물수건으로 팔을 닦아 주려 살짝만 손을 대도 그의 아래가 순식간에 커지고 딱딱해졌다. 그 순간에도 그는 민감한 몸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평온하게 잠자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는 그저 하인을 부르려 하고 있다. 귀가 뜨거운지 손바닥으로 귀를 꾹 누르고 낮게 호흡하는 것 외에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문득, 그런 그를 편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그리즈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저… 제가… 도, 도와드릴까요?”

그의 눈동자가 무엇을 도와줄 거냐고 묻는다. 그녀는 오래전 새벽녘 그가 이 방에서 했던 수음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방법은 모르지만 일단 하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손이 그의 좁은 골반 근처를 쓱 훑었다. 뜨겁고 길쭉한 게 손끝을 스친다.

일순간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을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딸랑. 한 번 울렸다가 뚝 끊기는 소리 뒤에 낮은 신음이 번졌다. 단정했던 그의 흑발이 헝클어져 있었다.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가 그녀를 바라본다. 눈썹조차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온전히 마주 보게 되자 그리즈는 시선을 피하듯이 바닥에 무릎 꿇고는 그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제가 도와드릴….”

긴장한 손이 바지를 아찔하게 쥐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 손을 주시한다. 급격히 어두워진 눈빛이 손끝을 탐욕스럽게 훑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삼켜 버릴 듯하다가 금욕적으로 빛났다. 혼란스러워지는 순간 그의 입술이 차분하게 열렸다.

“바닥이 차갑습니다.”

“…….”

“일어나세요.”

분명히 거절인데 목소리는 눅눅했고 허스키하게 잠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하얀 손이 불붙은 듯 열정적으로 그의 바지 앞섶 단추에 닿았다.

“하, 할 수 있어요….”

그가 눈매를 살짝 좁히며 바지 앞섶을 주시했다.

“글쎄, 열 수나 있으실지.”

앞섶에 매듭 두 개와 단추가 있었다. 어째서 브람이 그의 몸을 보물처럼 꽁꽁 싸맨 건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서늘한 반응을 보자, 없던 오기가 생겼다. 흥분했으면서도 철벽같은 그를 흐트러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손을 움직이는 듯했다.

그녀가 단추 뒤쪽으로 검지를 넣어 천천히 열었다. 하나 더, 또 하나 더…. 그리고 덜덜 떨려 오는 손으로 매듭 끄트머리를 잡아 풀어 내렸다.

그는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리더니 문 앞에서 탁 멈췄다.

“부르셨습니까, 대공 전하.”

브람의 목소리였다. 어쩔 줄을 모르던 그리즈는 바닥을 향해 길게 뻗은 그의 종아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머리 위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식사를 준비해.”

가차 없는 말에 그리즈가 흔들리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그런 그녀를 살펴보고 있다. 지난날의 나쁜 성미가 들여다보였을 때였다.

“한 시간 후에.”

당장은 처음으로 아양을 떠는 애완동물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투였다. 이따금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누르는 걸 보면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그의 오만함을 벗겨 보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브람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그녀가 바지 앞섶을 넓게 열었다. 빈틈이 생기자 그의 것이 장대하게 튀어 올라왔다. 손 한 뼘이 우스울 정도로 크게 발기해 있었고, 기둥은 굵직해져서 핏대가 우둘투둘하게 뭉쳐 있었다.

둥글게 말려 있는 표피 안쪽으로 붉은 끝머리가 살짝 보였다. 그 위에 선액이 고인 광경이 드러나자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선명하게 와닿았다.

시작은 호기로웠지만 머리가 마비된 것 같았다. 저렇게 큰 게 몸 안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이제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신음 같은 낮은 웃음이 머리 위에서 번지고 나서야 그리즈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래가 드러난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여유롭다. 추궁당하는 쪽은 오히려 자신 같았기에 그녀는 오기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기둥을 가볍게 쥐었다.

축축하게 젖은 피부와 비슷한 감촉이 손바닥에 얽혀 들어온다. 손을 아래로 당기자 표피가 부드럽게 벗겨졌다.

그녀는 불그스름한 끝머리를 보다가 숨을 훅 내쉬었다. 여인의 안이 얼마나 비좁든 뚫을 수 있을 만큼 팽팽했다. 꼭 교접에 특화된 종마 앞에 무릎을 꿇은 기분이 들었다.

“그, 그럼… 할게요.”

그리즈는 여유가 사라진 잘생긴 얼굴을 상상하며 무릎을 꿇고 섰다. 이내 뭉툭한 끝머리에 입술을 살짝 댔다. 작은 요도가 눈앞에서 살짝 커지며 선액을 흘렸다.

그곳에 혀를 대고 둥글게 훑자 창틀에 넓게 펴져 있던 그의 손가락이 주먹 쥐듯 말려 들어갔다. 붉게 물든 손가락 마디가 보인다. 그의 기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에 그녀는 키스하듯 입술로 끝머리를 꾹 눌렀다가 쭉 빨아 당겼다.

별안간 올려다본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있었다. 흥분한 숨을 내쉬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마에 식은땀이 살짝 맺힌 게 보이는데….

혼란이 깃든 손이 그의 상의 단추를 아래에서 위로 풀었다. 가슴팍까지 풀자 옆구리에 깨끗하게 붙어 있는 면포가 보였다. 그녀는 짐짓 우려스럽게 말했다.

“혹시 통증이 느껴지신다면 언제라도 말씀….”

시간이 멈춘 듯이 앉아 있던 그가 ‘ㅅ’ 자로 벌어진 상의 앞섶을 더 열어젖혔다. 이내 다리 사이에서 우악스럽게 솟아오른 성기와 옆구리를 번갈아 보다가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훑었다. 그러곤 다시 발기한 것을 내려다봤다. 진짜 통증은 그곳에서 느껴진다는 듯했다.

그 눈빛에서 흥분감을 읽은 그리즈는 차오르는 걱정을 삼켰다. 정말로 기분이 이상해지려 한다. 손안에 쥐어진 것이 바삐 드나들었던 통로가 근질거려왔다. 그가 손끝 하나도 대지 않았는데 눅눅하게 젖어 드는 듯도 했다.

그녀는 잇새로 터져 나가려는 비음을 막듯 귀두를 머금었다. 그러곤 싸한 맛을 느끼며, 혓바닥으로 부드러운 살갗을 휘감았다.

사내의 진한 신음이 무방비하게 번졌다.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 고스란히 흘러나온 듯했다.

“하, 그리즈. 이런….”

그녀가 돌아왔다는 걸 확인하듯 부르는 저음이 듣기 좋았다. 그녀가 화답하듯 기둥을 반쯤 머금고 빨아올렸다.

“아아….”

환락에 깃든 그의 시선이 뺨에 닿는다. 그녀는 굵은 것을 제대로 머금기에는 작은 입술로 더 벌리며 끝머리에 혀를 굴렸다.

창틀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하체가 탄탄하게 들썩여진다. 머리 위에서 낮은 신음마저 떨어지자 그녀의 아랫배로 진한 전율이 올라왔다.

그때 더 팽팽해진 끝머리가 입천장 깊숙한 곳에 지그시 닿았다. 일순간 숨 막히는 기분에 그녀가 기둥을 다급히 빨아내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애무를 채근할 줄 알았던 그는 불안정한 얼굴을 했다. 거칠어지던 숨을 태연히 삼키고는 아주 낮게 물었다.

“숨 막혀?”

그녀가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파란 눈 안에 쌓인 욕망을 억눌렀다. 그러곤 그녀의 턱을 검지로 훑다가 천천히 들어 올려 그녀를 일어나게 했다. 그의 시선이 옮겨간 곳은 분홍색 드레스 가슴 쪽이었다.

이내 가슴께에 지그재그로 조여진 끈을 응시하더니 리본 끝자락을 쥐었다. 탁, 매듭이 풀리자 끈이 늘어지며 가슴이 밀려 나왔다.

잠시 금욕이 깃든 듯했던 눈동자가 다시금 어지러워졌다. 손등으로 자신의 이마를 쓱 훑은 그가 상의 단추를 풀려다가 멈칫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여인의 몸이 얼마나 야위었는지 확인하면서도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고립된 열망이, 새파란 눈동자에서 어둡게 빛난다. 이내 그는 오히려 단추를 하나 잠그고는 그녀의 드레스 앞섶만 완전히 풀어헤쳤다. 네글리제까지 내려가자 가슴이 앞으로 쏠려 나왔다.

그는 손으로 넉넉히 쥘 수 있을 만큼 풍만한 가슴을 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빳빳하게 발기해 복근을 누르고 있던 중심부가 무방비하게 꺼떡거린다. 헉헉거리는 듯한 호흡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즈의 목덜미에 솜털이 쭈뼛 섰다. 심장마저 쿵쾅거리는 순간 그가 젖꼭지를 응시하며 검지로 귀두를 쓱 훑었다.

흐윽, 하는 숨소리가 낮게 번진다. 이로 물었던 입술을 탁 푼 그가 기둥을 쥐고는 뿌리까지 거칠게 쥐어 내렸다.

얇은 표피가 질척질척 밀려 올라가며 귀두를 자극한다. 기분 좋은지 그의 하반신이 짐승처럼 들썩여지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그를 엿보는 것 같았다. 아니, 가슴에 닿은 시선 때문에 애무받는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눈앞에 있는 굵은 것이 질구를 슬슬 비비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분명 그를 흐트러뜨리겠다고 했는데 자신이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젖꼭지에 사내의 숨이 스치자 그 감각은 더 진해졌다.

그리즈는 두 손을 모아 겹쳐 쥔 채로 어깨를 움츠렸다. 팔뚝까지 내려간 드레스가 유두에 스쳤다. 잇새로 들뜬 소리가 예고 없이 터져 나왔다.

“으읏….”

움직임을 멈춘 그의 목에 핏대가 터질 듯이 팽창한 게 보였다. 곧 그는 왼쪽 젖꼭지와 맞닿은 드레스를 보다가 검지로 옆쪽 가슴을 지그시 눌러 유두를 빼냈다. 거칠한 감각이 주는 자극에 그리즈는 흠칫 놀랐다.

“아읏, 저….”

그 반응에 그의 숨소리가 급작스레 거칠어졌다. 꼭 잠자리에서 내는 소리와 비슷해 그리즈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순간 단단한 검지가 유륜을 둥그렇게 긁었다. 안 돼…. 가슴을 부르르 떨던 그녀는 안쪽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는 하, 하지 마세요….”

반대로만 행동하던 늑대개처럼 그의 손이 유두를 문지른다. 그녀가 목덜미를 빨갛게 물들이며 달아나려 하자 그가 그리즈의 허리를 휘감아 당겨 안았다.

가슴 위에 닿는 호흡이 진하게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복잡한 심경을 담은 것처럼 흔들렸다.

그리즈는 그가 수음으로 해결하지 못할 만큼 흥분했다는 걸 직감했다. 엉망진창이 된 그의 호흡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거칠게 무너지는 그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의 입술이 가슴에 우연히 닿았다. 뜨끈한 자극에 그녀가 흠칫하는 사이, 그가 어두운 욕망을 얼굴에 드리웠다.

어떤 순간에도 여유로운 비아누트와는 다른 사내 같았다. 지금의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했고, 시달리는 듯했고, 굶주려 보였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여인의 체향을 고스란히 맡고 있기 때문인지 몰랐다. 눈매를 나른하게 좁힌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한 시간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이 가슴 위에서 퍼진다. 그리즈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네? 한 시간이라니….”

그가 결국 아랫입술을 가슴에 깊게 묻고 훑어 올렸다.

“저하께서 제 열흘을 가져가셨으니까.”

이내 그는 드레스 밑단으로 손을 넣어서 무릎과 허벅지를 훑고는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낯선 손길이 숱이 적은 체모를 천천히 훑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어떡해…. 그녀가 비좁은 감옥에 갇힌 것처럼 발끝을 오므렸다. 그사이, 굵은 검지가 꽉 다물린 틈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즈는 다리를 오므리고 있으니 그의 손이 점막에 딱 맞물려 멈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끝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미끄러지며 곧장 음핵을 찾았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녀가 당황할수록 그의 음성이 달아올랐다.

“이런, 제가 그리도 탐이 나셨습니까.”

그 말을 듣자 정말 그의 몸을 보고 이렇게 된 것만 같았다. 아니, 그게 사실인 듯한 기분에 오히려 인정할 수 없었다.

“저는 단지, 단지….”

뺨이 아플 만큼 뜨거워지는 순간 다리 사이의 음핵이 지그시 눌렸다. 아…. 좋은데 버거운 느낌이 아래로 훅 끼쳐 올라온다. 그녀는 그를 거부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흥분감으로 부푼 듯한 가슴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그의 잘난 얼굴이 묘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게 정말 위안이 됐다. 여유를 잃은 그의 모습을 본다면 적어도 목적은 이루는 것일 테니까. 그리즈는 들뜬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그 눈을 마주한 그가 매력적인 눈매를 좁히며 검지로 아래쪽 점막을 부드럽게 훑었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사내를 탐내며 축축하게 젖은 입구가 대답을 대신했다. 만족스러운 손가락이 그곳을 지그시 눌렀다.

그녀가 속내를 들켜 버려 부끄러워할 겨를은 없었다. 살짝 열린 채 사내를 불러 대던 질구에 굵은 손가락 두 개가 박혀 들어왔다.

이미 지나치게 큰 그의 것을 맛본 몸이었다. 그때처럼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안쪽이 버겁게 욱신거려왔다. 허벅지가 자연스레 맞붙으려 했다. 그럴수록 허벅지 안쪽으로 느껴지는 건 아래와 연결된 커다란 손뿐이다.

새하얗게 빈 몸속이 전율로 가득 찬다. 이 정도로도 좋은데 그 굵은 것이 들어오면….

여인의 안쪽 가득히 씨를 뿌리기 위해 점점 박혀 들어오던 그의 것이 점점 절실해진다. 아니, 오늘은 그래선 안 되는데….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는 지금의 감각만 고스란히 느끼기로 했다.

그 순간 손가락이 부드럽게 빠졌다가 질구를 쭉 따라 들어왔다. 체모를 매만지던 엄지까지 비부를 헤집고는 음핵을 누르자 그녀는 다급하게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아읏, 으, 흐읏!”

그때 그가 고개를 그녀 쪽으로 틀어서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다정한 사내를 좋아하신다던데.”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건 잠시였다. 다정…. 그런 적이 있기는 했는데…. 그리즈가 입술을 몇 번 붙였다가 떼며 작게 대답했다.

“그건 어렸을 때 얘기예요… 하지만 지금은….”

그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풀며 눈매를 좁혔다.

“사실이었군.”

지금은 많이 온순해졌지만 본래 성격은 그렇지 않은 사내였다. 상대를 괴롭히면서 즐기는 악취미까지 있기에 두려워지는 찰나였다.

그가 그녀를 한쪽 허벅지에 앉히고서 입술을 겹쳐 왔다. 이내 혀를 그녀의 입 안으로 넣어 부드럽게 휘젓더니 숨을 느슨하게 내쉬며 말했다.

“그럼 내가 해 보려고.”

나른하게 풀린 얼굴은 다정한 사내의 것이 맞았다. 그러나 안쪽에서 기분 좋은 지점을 찾아 문지르는 손끝은 더없이 방탕했다. 마치 오늘 원하는 만큼 만족시켜 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단단한 손끝에서 배어 나온 전율에 눈앞이 흐려졌다.

“아응, 읏, 아, 아…!”

고개가 절로 뒤로 꺾이자 그가 목덜미를 지그시 물었다. 아득해진 시야로 미간을 살짝 좁힌 눈썹이 보였다.

다정해지겠다더니….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속옷을 벗긴 손가락이 입구를 슬슬 넓혔다.

밑을 내려다보자 음란한 광경이 들어왔다. 그녀의 몸이 사내의 허벅지에 걸터앉아서는, 다리를 벌리고 손길을 아래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 팔은 사내의 어깨를 휘감고 매달린 채였다. 사내가 반듯했던 앞섶을 풀어헤친 채로 하반신을 드러낸 게 보였다.

아까보다 더 빳빳하게 발기한 까닭에 고환이 들려 있었다. 너무도 음란한 모습을 보자 안쪽이 와락 줄어들어 손가락을 조였다.

“으읏….”

얼마나 젖은 건지 그의 손가락이 미끈거리며 포개지는 게 느껴졌다. 저항조차 하지 못하게 된 그녀는 그의 뒤쪽 머리칼을 부드럽게 쥐며 어깨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었다. 그 움직임에 그가 그녀의 무릎 뒤쪽에 팔을 넣어 들고는 다리를 벌리게 하며 마주 앉게 했다.

그리즈는 창틀에 무릎 꿇다시피 한 채로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그 순간 그가 햇살에 뽀얘진 가슴을 입술로 머금고는 기둥을 쥐었다.

빳빳한 귀두가 음핵을 질척질척 문질렀다. 손끝과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움이 예민한 곳을 애무한다.

그리즈는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허덕였다. 귓전에서 터지는 낮은 숨소리가 자극을 더 했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감각을 뭉툭한 끝머리로 느끼며 만족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 순간 그가 그리즈의 허리를 쥐고서 아래로 느리게 잡아 내렸다. 번들거리는 끝머리가 방향을 그녀의 아래로 틀며 음순을 빠듯하게 열었다. 그녀가 색다른 자극에 입술을 떨 시간도 없이 입구가 꽉 틀어막혔다.

안 돼, 그래도 너무 큰데…. 멈칫한 그리즈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드레스 아래를 걷어 올린 채 결합부를 흡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공으로서 책상에 일거리를 쌓아 둔 상태인데도, 이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듯했다. 윤기 나는 흑발이 헝클어졌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채였다. 그녀는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잡티 하나 없는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땀에 젖는 걸 보고 싶었다. 불규칙한 신음을 듣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사실은 굵은 것을 깊숙이 맛보고 싶어 하는 몸이 충동질하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워하던 그리즈가 굵은 것을 향해 살짝 앉았다.

비좁은 입구가 팽팽한 귀두의 크기만큼 열렸다가 빽빽한 상태로 멈췄다. 그대로 더 앉자 사내의 끝머리가 질벽을 지그시 벌리며 더 딱딱해지는 게 느껴졌다. 일순간 짜릿한 열통에 허벅지 안쪽이 부르르 떨렸다.

“흣, 너무 커요. 이 이상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창틀을 짚은 손에 힘주어 하반신을 살짝 들고는 허리를 흔들었다. 굴곡진 복근이 유연하게 물결친다. 실처럼 가늘었던 질구가 버겁게 열렸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아, 아흣, 아, 아!”

부끄러움이 엄습하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일하는 하인들이 보이고, 그녀는 창틀에 무릎을 댄 채 비부를 훤히 벌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 눕듯이 앉은 사내가 기둥을 삼켜 대는 비부를 감상하듯 보고 있었다. 입구 쪽에서 얕게 문질러 대는 통에 안쪽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진해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다 못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억지로 얼굴을 마주 보게 할 줄 알았던 그는 입술로 그녀의 귓가를 느리게 훑기만 했다.

그리즈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뚫는 빳빳한 것이 보였다.

기둥이 반쯤 번들거리며 젖어 있었다. 멀건 물은 기둥 아래쪽으로 흘러내리다 못해 뿌리에 맺혀 있었다.

앉은 상태로 그렇게 만들어 버린 사내가 몹시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가쁘게 호흡하던 그녀가 탄탄한 목덜미를 충동적으로 물었다.

“하.”

입구를 가볍게 자극하던 추삽질이 급작스럽게 깊어졌다. 안을 꽉 채운 굵은 것에 혼미해진 그녀가 그의 목덜미에 혀를 굴렸다.

특별한 충동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 순간 그를 완벽히 갖고 싶어졌다. 젖은 입술과 무너지는 숨, 애타다 못해 달아오른 몸까지도.

기둥을 반쯤 머금은 상태로 느리게 주저앉아 버렸다. 허전했던 길목이 숨 막힐 만큼 꽉 채워진다. 머리는 위기감을 느끼는데, 몸은 정신없이 파헤쳐지고 싶어 했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 살이 그의 장골 능선에 살며시 닿았다.

그가 거친 숨을 터트렸다. 금장 장식이 화려하게 달린 재킷 앞섶 사이에서 가슴팍이 엉망진창으로 들썩여지는 게 보였다. 그 안으로 손을 넣은 그리즈는 옆구리에 걸쳐진 상의 끝단을 가슴팍까지 올렸다.

입술에 닿은 사내의 목덜미가 일순간 탄탄해졌다. 손톱으로 젖꼭지를 살짝 건드리자 그의 목울대가 묘하게 흔들렸다.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더없이 자극적이다. 이 땅의 주인인 그가 그녀의 밑을 자처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강한 기를 꺾고, 논리를 잃은 채 신음을 흘리는 모습이 잘 길들인 맹수 같았다.

그리즈가 홀린 듯이 엉덩이를 위쪽으로 들었다. 사내의 양물이 주르륵 빠져나가자 안쪽이 허전했다. 몸이 깊은 갈증을 느끼며 절로 내려앉았다.

“아, 읏….”

단단한 끝머리가 질벽의 열점을 쓸며 빈틈없이 들어온다. 스치기만 해도 황홀한 그곳을 곧 치덕거려 줄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즈는 그간의 불안이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과거의 기억과 전쟁의 참혹함마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대공 비아누트의 존재감이 커진다. 아래에서부터 깊은 충족감이 차올랐다.

“아아…. 좋아요….”

그녀는 뜨겁게 피어난 불씨에 오롯이 집중했다. 몸이 붕 뜬 것처럼 아득해졌다. 새벽 내내 건조했던 공기에서조차 단맛이 났다.

그 공기를 느릿하게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붉은 입술이 벌어져 있었다. 잇새로 흐르는 신음이 말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좀 더 깊게…. 그리즈.

그에게 여전히 조종당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굶주린 신음이 원하는 대로 더 깊숙이 앉으며 몸을 빠듯하게 열었다.

“아흣! 읏….”

순식간에 아래가 벅차 왔다. 그리즈의 하얀 피부가 눅눅하게 젖고, 발끝이 모여든다. 늘 수동적이던 하반신이 열기에 물들었다. 넓은 어깨를 두 팔로 안은 그녀가 그대로 매달려서 허리를 부드럽게 흔들기 시작했다.

“아, 읏, 흐읏!”

안쪽 어딘가에 전율이 모여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한 허벅지가 부르르 떨렸다.

탐욕에 젖은 파란 눈이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번들거리는 비부가 흉흉한 중심부를 맛있게 삼키며 미끈거리는 물을 흘리고 있다.

“하아…. 그리즈.”

그의 잇새로 신음이 녹아내린다. 그리즈는 그에게 더 깊게 안겼다. 사내의 달뜬 소리가 음핵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가 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더니 슬며시 고개 숙였다. 유두에 그의 혀끝이 닿는다. 땀에 젖은 사내의 하반신이 느린 추삽질을 시작했다.

“으읏, 아, 흣…!”

잔뜩 흥분한 귀두가 열점을 부드럽게 지분거리자 그녀의 눈매가 아득하게 풀려 버렸다. 안쪽을 드나드는 그의 것도 좋았고, 유두를 엉망진창으로 쓸어올리는 혀도 좋았다. 온몸이 성감대로 변한 것 같았다. 짜릿한 기분에 입술이 절로 움직였다.

“읏, 아, 하읏. 기, 기분이, 이상, 흣!”

쾌감을 삼켜 대는 비부가 바르르 떨렸다. 그녀의 몸이 더 큰 쾌감을 느끼려 안쪽을 와락 조였다. 숨을 멈춘 그녀가 그의 옷깃을 다급하게 쥐었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아래에 박힌 사내만 살아난다. 짐승의 것처럼 불그스름한 성기가 비좁은 구멍을 음란하게 치덕거리는 게 보이는 듯해 미칠 것만 같았다.

“읏, 너무, 뜨겁, 흣, 아….”

진한 전율로 일렁이는 안쪽을 막을 수가 없다.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그를 갈구하며 조여들자 그가 굵은 것을 푹 박아 줬다. 질퍽하게 젖은 통로가 씨물을 쥐어짜 내듯 요동친다.

“아, 아응…!”

빳빳한 것이 열점을 거칠게 긁어 대기 시작했다. 솜털이 쭈뼛할 만큼의 전율이 솟구쳤다. 안 돼, 안 돼…. 허벅지 안쪽이 떨리는 순간, 끝머리가 자궁구에서 빈틈없이 맞물렸다.

“아, 아응, 아읏! 으으으응!”

숨 막히는 포만감이 아랫배에서 끼쳐 온다. 구멍이 절로 그의 중심부를 탐했다. 집중할수록 오르가즘이 더 진해지는 것 같았다. 안쪽을 꽉 조이자 굵은 것이 딱딱해졌다. 그게 그녀의 허리를 절박하게 흔들게 했다.

“흐읏, 읏, 아아…. 거기 너무 좋, 좋아요. 흣!”

그뿐 아니라 오늘의 모든 게 좋았다. 화창한 날씨와 뜨끈한 공기, 눅눅해진 그의 목덜미, 탁하게 헐떡이는 그의 숨소리, 땀에 젖은 흑발까지.

그리즈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가 복숭아처럼 붉어진 그녀의 뺨을 입술로 물었다가 놓으며 그녀를 안고 일어났다.

“으읏!”

그의 것이 빳빳하게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허전함을 느낄 새 없이 그가 창 앞에 있는 책상의 의자를 빼내어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를 책상에 눕혀 놓고는 아주 자연스레 드레스를 벗겼다.

천 조각에 불과해진 드레스가 책상 옆으로 툭 떨어졌다. 그녀는 젖은 하체로 찬 공기를 느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창문을 등진 인영이 보인다. 열린 다리 사이로 커다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왕위에 오를 그녀를 존중하려던 그의 태도는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밀부를 훤히 볼 수 있도록 두 다리를 벌리게 해 놓고 허벅지 안쪽을 훑는 손길만 느껴질 뿐이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고 몸을 흔들자 한껏 예민해진 가슴이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파란 눈동자가 빛났다.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가 엄지로 음핵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읏, 으응, 앗, 흣!”

유독 달게 느껴지는 저음이 귓가를 스쳤다.

“귀엽네.”

그의 눈앞에서 구멍이 욱신거리며 음란한 통로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질척거리는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질구를 살살 문질러 주던 그가 손가락 두 개를 쭉 넣으며 안달 난 듯한 표정을 지웠다.

“준비한 선물이 집무실에 있는 게 아쉽군.”

“흣, 서, 선물이요?”

“회임초.”

무어라 대답하려던 순간 손끝이 질벽을 부드럽게 훑어 올렸다. 아랫입술을 문 그녀가 두 무릎을 곧추세웠다.

“아읏, 가, 간지럽…. 회, 회임초…? 이따 주, 주세요. 아, 흣.”

여전히 굶주려 있는 파란 눈이 그녀의 무릎을 훑었다.

“아니, 지금은 너무 말랐어.”

“그래도 빨리 먹는 게….”

그는 질퍽거리는 감각에 취한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내 그녀의 무릎을 벌려 책상에 붙이게 하고는 상체를 숙여 몸을 겹쳤다. 느슨하게 풀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감당하기도 벅차 보이는데.”

후끈한 열기가 그녀의 몸을 감싼다. 그녀는 풀린 눈을 가리며 대답했다.

“아읏, 할 수 있어요.”

그가 쌓인 양피지를 끌어다 그녀의 뒤통수에 넣어주며 입술로 목덜미를 훑었다.

“그거 다행이군.”

낮은 음성에 답하려 했을 때, 안쪽의 손가락이 빠져나가다가 입구를 긁었다. 빈자리를 채워 주듯 그의 성기가 구멍을 꾹 눌렀다.

긴장한 그녀가 살짝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가 가슴팍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허리를 깊숙하게 쳐올렸다.

“으, 흣!”

머리 위 방향으로 떠밀려 올라가려던 몸이 그의 손에 붙잡혔다. 숨을 훅 내쉰 그가 하반신을 뒤로 크게 뺐다가 구멍을 거칠게 탐하기 시작했다.

“아, 아, 아! 흣, 너무 깊, 으읏!”

분홍빛 점막이 기둥에 딸려 나왔다가 정도로 박혀 들어간다. 그리즈가 버겁게 헐떡이며 허벅지 사이로 그의 골반을 조였다.

추삽질을 막으려 한 건데 아래로 정신없이 치닫는 움직임만 끼쳐 왔다. 다정한 사내가 일을 마친 후에 금수가 되어 제 몸에 올라탄 듯한 기분에 몸 전체가 어지러웠다.

“읏, 갑, 갑자기, 아, 으흣!”

그녀의 목소리는 버거웠지만 아래에서는 끈적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엉덩이까지 젖자 그녀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의 책상 위에 누워 있었다. 쌓인 서류 뭉치 가운데에 파묻혀 사내의 성기로 안쪽을 마구 긁히는 중이다. 그게 몸을 뜨겁게 만드는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귓전으로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사내의 신음이 흘러들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말을 잃은 채로 허릿짓에 빠진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양피지를 제대로 베고 시선을 내렸다. 음란하게 움직여지는 사내의 엉덩이 근육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를 막으려던 그녀의 다리는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그만큼 흥분했다는 증거 같았다.

그녀는 허공에서 흔들리던 다리를 아까처럼 책상에 딱 붙였다. 그가 더 흥분한 기색으로 상체를 낮추며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 순간에도 비부가 계속해서 파헤쳐지며 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아, 그리즈. 그리즈….”

그리즈는 대답할 여력 없이 입술을 떨었다. 굵은 것이 엉망진창으로 박혀 드는 아래가 울부짖으면서도 황홀해하고 있었다.

“흣, 저, 기분 좋, 또 갈 것 같….”

아까보다 더 진한 쾌감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즈가 고개를 위로 꺾으며 헐떡이자 그가 그녀의 손을 끌어 음핵을 긁게 했다.

“계속 만져. 멈추면 알지.”

낮은 목소리가 흡사 잔혹한 악당 같았다. 협박에도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자 그가 하복부로 손등을 눌러 자극해 줬다.

그녀는 음핵이 짜릿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눈을 꽉 감았다. 그 순간 그가 유두를 거칠게 핥으며 빈틈없이 닥쳐 왔다.

“아!”

손으로 음핵을 훑자 전율이 점점 커진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표정으로, 아랫배까지 채워진 그의 것을 느꼈다. 눈앞이 붉게 물들며 방탕한 쾌감이 솟구친다. 아…. 짧게 신음한 그녀가 다급하게 골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응, 으읏, 아, 아! 으응!”

그 모습을 모두 본 그가 입술을 겹쳤다. 탐닉하는 듯했던 그간의 입맞춤과는 달랐다. 상대를 핥고 빨고 씹어 먹으려는 듯한 입술이 거칠게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칼이 정신없이 흩날리며 뺨을 간질이는데도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절정을 느끼는 그녀의 숨결을 삼키다가 가장 어두운 곳까지 침범했다.

그는 그곳이 마음에 드는 듯 황홀한 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녀의 입 안에서 낮게 신음하며 허릿짓을 멈췄다.

그 순간 그녀의 엉덩이를 치던 고환이 강하게 수축했다. 반사된 햇빛에 윤이 흐르는 그의 하반신에 솜털이 일어섰다.

“흐으, 흐으, 아, 하아….”

앓는 듯한 소리가 느슨하게 이어졌다. 흑발 사이로 드러난 귀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목에는 새파란 핏대가 강렬하게 펄떡였다. 그 상태로 입술을 뗀 그가 안을 유연하게 치덕거렸다.

얼마나 많이 사정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참이나 등을 들썩이던 그는 이내 흥분감이 여전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쿵쿵, 거센 심장 소리가 박자 없이 울린다. 그리즈는 그 소리가 몸속까지 전해져 오는 감각을 느꼈다.

들떠 있던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제야 그녀는 축축하게 젖어 버린 온몸을 알아차리며 작게 심호흡했다.

그가 상체를 살짝 드는 찰나 옆구리가 보였다. 면포가 여전히 깨끗하게 붙어 있었다.

다행이다…. 그녀는 여전히 벅찬 숨을 늘어지게 쉬며 말했다.

“계속… 이렇게 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래가 뻐근해서 곧 걷기도 힘들어질 테지만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버거웠던 불순물을 모조리 빼낸 듯 개운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르는 손길을 느끼며 말했다.

“제가 그랑디아로 가면… 꼭 오세요. 아니면… 제가 이틀에 한 번씩 갈지도 모르니까.”

가벼운 농담처럼 으름장을 놨지만 내심 마음이 복잡했다. 그에게는 바이렌하그를 지휘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어쩌면 한 달에 한 번도 만나기 힘들어질지 모르겠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이 듣기 좋은 듯, 눈매를 좁혔다가 풀며 말했다.

“내가 안 보러 가면 지금보다 더 야위겠군.”

이내 그녀의 분홍빛 유두를 검지로 부드럽게 훑으며 말을 이었다.

“조만간 바이렌하그 대공저와 중앙 부처를 플뢰도르 쪽으로 옮길 거야.”

그리즈가 풀려 가던 눈을 선명히 떴다.

“정말요? 하지만… 국왕 폐하께서 계신 노르드발츠와는 멀어질 텐데….”

그 말에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거 마음에 드는데.”

그리즈는 그가 보이는 것처럼 홀가분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바이렌하그는 그의 고향이다. 모든 부처 또한 근거리에 있는 이곳을 두고 옮기기로 결정한 거다.

처음에는 삐뚤빼뚤하게 느껴졌던 그의 애정이 점점 직선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걸 요새 들어 느낀다. 그리즈가 벅찬 숨을 내쉬었다. 깨어나기 싫은 꿈을 꾸는 것 같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고서 고맙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한참 뒤에야, 풀린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잣말했다.

“그랑디아로 돌아가게 되다니….”

“…….”

“기쁘지만 좀 긴장돼요. 입관식을 앞두고 있고 또… 처음이라서 그런지.”

그가 가만히 얘기를 듣다가 땀으로 젖은 흑발을 느릿하게 쓸어 넘겼다.

“신하들은 많은 입관식을 봤을 텐데.”

“아….”

그 말을 들은 그녀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신하들은 왕을 모시는 게 처음이 아닐 거다. 토스카르에 유배됐던 신하들도 그랑디아 왕궁으로 복귀시키기로 했으니 안심해도 좋을까.

그래, 그들에게 도움받고 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긴장을 풀었을 때쯤, 그가 몸을 떼고 그녀의 아래를 정리해 줬다.

그녀는 햇빛이 내려앉은 커다란 실루엣을 보며 심장 부근을 매만졌다. 어렸을 적 세워뒀던 막연한 꿈이 하나둘씩 이뤄지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제 새로운 꿈을 가져야 할 시기일지 모른다. 새로운 꿈이라….

그렇다면 누군가의 의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뿌리가 깊어서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은 나무 같은 사람이 어떨까. 대공 비아누트가 곁에 있으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저… 부탁이 있어요.”

그때 바지를 추슬러 입은 그가 그녀의 무릎 뒤에 팔을 넣고는 그녀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 안아 올렸다. 그녀는 침대로 옮겨지며 비밀 얘기를 하듯 속삭였다.

“당신을 그랑디아의 재상으로 임명하고 싶어요….”

그는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이내 짐짓 평소처럼 차분한 저음이 울렸다.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혼돈의 시기, 당장은 짐이 될지도 모르는 자리를 그에게 무작정 떠맡길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쩜…. 그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침대에 풀썩 눕혀지며 대답했다.

“대공 빈젤 작위와 영지를 드릴 수 있어요. 나라를 복구한 후에는… 아낌없이 지원할 거예요.”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재킷의 단추를 모두 풀어 냈다. 제안이 내키지 않은 얼굴이다. 그래도 어떤 사내든 탐낼 만한 자리인데…. 그녀가 네글리제만 입은 몸을 이불로 덮으며 서늘한 얼굴을 살폈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원하시는 걸 드릴게요.”

“원하는 것이라.”

새파란 눈동자가 무언가를 그리는 듯했다. 그게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때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갈색 주머니를 꺼냈다. 한눈에 봐도 사탕 주머니였다.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는 사탕에 관심을 돌렸다. 안 그래도 기운이 빠져 뭐라도 먹고 싶은 참이다. 이내 상체를 일으켜 앉아서 손을 내밀며 그의 눈을 바라봤다.

손바닥을 주시하는 파란 눈이 묘하게 빛난다. 애욕과 기쁨, 애틋함, 어두운 감정들이 한 데 섞여 보석처럼 보였다. 빠져들 듯했던 그리즈는 정신을 다잡듯 이불을 꼭 쥐었다. 지금은 그를 어떻게 해서든 재상으로 모셔야 하니까.

그녀가 사탕을 달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모습을 느긋하게 보던 그가 갈색 주머니를 열었다.

이내 안으로 들어갔던 그의 검지 끝에 예상 못 한 것이 걸려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리고, 동그란 것. 중앙에 다이아가 박혀 있는, 반지…. 그리즈는 일순간 벅찬 숨을 터트리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살다 보면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찰나가 있다. 공들여 먹이를 주던 철새가 손끝에 내려앉거나, 하늘 저 너머에서 무지개를 보는 찰나, 혹은 내가 원했던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찰나….

반면에 불현듯 가슴속에 그림처럼 박혀 버리는 풍경도 있다. 이 저택에 오던 날 달빛 아래에서 출정식을 했던 사내의 모습. 사람의 머리를 말에 걸고 돌아왔던 대공 비아누트. 오로라 아래에서 키스를 퍼붓던 그의 모습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의 그가 가슴속의 모든 찰나를 뒤덮고 깊숙이 박혀 왔다. 하마터면 저 반지를 그의 유품으로 받을 뻔했기에…. 그런 그가 살아 돌아와 너무나도 아름답게 웃고 있어서….

잔잔히 미소 지었던 그녀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가 그리즈의 손바닥을 천천히 뒤집고는 네 번째 손가락을 쥐었다. 그녀가 눈물을 참으려 손가락에까지 힘을 주자, 손가락 위쪽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았다.

찬란한 반지가 약지 끝을 부드럽게 훑고 들어갔다. 그는 맞춘 듯이 딱 맞는 반지를 보다가 손깍지 끼며 속삭였다.

“내가 줄게. 네가 원하는 건 모두.”

“…….”

“나와 혼인하든, 하지 않든.”

손등에 입술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 낮춘 얼굴이 보였다. 짙은 속눈썹이 햇살에 빛난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그런 그의 입술이 손등에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앞의 사내를 한 폭의 그림처럼 새겼다.

그가 처음으로 준 선택권의 맛은 너무나도 달고, 따듯했고, 아름다웠다. 그리즈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누르며 화답했다.

“혼인… 할 거예요. 당신이 무엇을 주든, 주지 않든.”

그건 절대 변하지 않을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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