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셨습니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커튼 밖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즈는 뻐근한 온몸을 뒤척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옆에 앉아 있던 검은 천사가 우려스러운 얼굴을 했다.
“혹시 몽유병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리즈는 그의 흑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갓 잠에서 깨 시야가 흐릿하니 그가 꼭 대공 비아누트처럼 느껴졌다. 다시 눈을 감았다.
“저, 대공 전하는… 아직도 바이렌하그에 계시죠?”
대공이 다시 전쟁터로 나갈까 봐 하루에도 몇 번이고 묻는다. 늘 그랬듯이 검은 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갑자기 자해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제야 그리즈는 새벽의 일을 떠올렸다. 자해…. 그런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배에 매음굴 낙인이 있다는 걸 검은 천사가 알 리 없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잠시 멍해진 사이 걱정스러운 질문이 들려왔다.
“안 아프십니까?”
물론 피부가 타들어 갈 듯 찌릿하지만 아프기보다는 통쾌했다. 타인이 몸에 새겨둔 약점을 드디어 깎아 냈으므로 그녀가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생각보다는 안 아파요.”
검은 천사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마도 제가 치료해 드린 덕분일 겁니다.”
“치료요?”
그리즈는 모포를 살짝 들고는 네글리제를 걷었다. 허리에 면포가 감겨 있었다. 환부에는 찐득거리는 약초가 발려 있었다. 그 안을 살짝 들여다보자 벌건 생살이 드러난 게 보였다. 매음굴 문양은 흔적도 없이 타 버렸다.
환부를 보니 입술이 파르르 떨릴 만큼 쓰라렸지만 목구멍에서는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낙인이 사라졌다. 아니, 직접 없애 버렸다. 압박감을 느끼면 말을 더듬던 한심한 내가.
다만 당장은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부끄러움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신경 쓰며 대답했다.
“제가 또, 일을 만들었군요.”
그러곤 모포로 몸을 휘감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붉은 시선이 검은 천사에게 닿았다. 그리즈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던 이유를 알리고 싶었다. 다행히 검은 천사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배에 매음굴 문양이 있었어요. 그걸 없애고 싶었습니다.”
검은 천사는 모포 밖으로 드러난 그리즈의 정강이를 훑어봤다. 피부는 하얬지만 반들거리는 상흔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몽유병이 아니셔서 다행입니다. 오늘 밤은 묶어 두려 했거든요.”
“…….”
“물론 농담입니다.”
퍽 재미없게 농담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주무셔도 됩니다. 광장으로 식량을 구하러 간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님께서 보는 눈이 적은 새벽에 지원군을 보내시겠다고 하셨으니 내일 동틀 무렵에 출발하려 합니다.”
그가 나가자 그리즈는 어제 빨아 두었던 남색 원피스를 입었다. 검은 천사가 준비해 둔 옷이다. 속치마가 풍성히 덧대져 있었지만 가벼워서 좋았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창틀에 소지품이 담긴 보자기가 있었다. 그 옆에는 시든 꽃 한 다발이 자리했다. 어제 산기슭에서 딴 투구꽃…. 그리즈는 매음굴 아드리안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목화처럼 생긴 그 하얀 꽃이랑 투구꽃 뿌리를 럼주에 오래 끓이면 독이 되거든. 내장을 녹이고 피를 토하다 죽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 말이야.”
어제부터 쉼 없이 고민했다. 아드리안의 말이 사실일까….
며칠 전, 타릴루치에서 보낸 괴한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리즈에게 달려들었었다. 그때의 그리즈는 정말이지 살해당하는 줄 알았다. 아니, 살해되면 다행이다. 납치라도 됐다가는 바이렌하그의 약점이 될 터인데….
그리즈는 기뻐할 타릴루치 왕을 상상하다가 1층의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곤 주물 냄비를 집어서, 술통의 럼주로 안을 가득 채웠다. 검은 천사는 거실에서 밖을 살피느라 바빠 보였다.
그러니 이제부터 독약을 만들어 볼 거다. 한 번에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방으로 돌아와서, 냄비에 봄 송이와 투구꽃을 한 움큼씩 넣었다. 그 후 불씨가 꺼지려는 벽난로에 장작을 정리해서 넣고는 냄비를 올렸다. 혹시나 독성분이 수증기로 퍼질까 봐 창문을 열어 놓고 한동안 머리를 밖으로 빼고 서 있었다.
다행히 세 시간이 지나도록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후 5시. 냄비에 가득했던 럼주가 바닥이 자글자글하도록 끓여졌다. 그리즈는 냄비를 식힌 후, 모종삽으로 꽃들을 거둬 냈다.
그 후 작은 유리병을 가져와 냄비의 내용물을 따라 넣었다. 무시무시한 독이라고 얘기 들은 까닭에 색깔이 기괴할 줄 알았지만 액체는 예상외로 흔한 노란색이었다. 어쨌든 실패만 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짐짓 차분하게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을 누비던 쥐들이 쥐구멍으로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즈는 쥐구멍 앞에 독약을 한 방울 정도 따랐다. 꽃향기가 나니 관심은 보이겠지…? 어차피 달리 먹을 것도 없으니까.
그 후 그리즈는 방으로 돌아가서는, 치마 레이스 사이의 주머니에 독약 병을 숨겼다. 그때 벽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누군가가 출입문을 연 것 같았다. 음식을 구하러 광장으로 향했다던 호위병들이 돌아온 걸까?
저택이 복층 형식으로 지어진 까닭에 문을 열자마자 거실 상황이 보였다. 검은 천사가 면포로 땀을 닦는 중이었다.
“늦었군.”
출입문 앞에는 금발 머리 사내가 보따리를 든 채 서 있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대장.”
“무슨 일?”
“광장이 몹시 소란스럽더군요. 그렇게 많은 인파로 붐비는 건 올해 들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유는 알아냈나?”
“예. 다름이 아니라 광장 게시판에, 오늘 다섯 시부터 참수식이 거행될 거라는 안내문이 붙었습니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금발 머리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곤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율리아나 아가씨를 지키지 못한 죄를 저택 경비병들에게 물으시려는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검은 천사의 뒤태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뭐?”
“아가씨께서 저택을 나오시던 날에 저택을 지켰던 기사들을 참수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명단에 쿠엔틴 경도 계셨습니다.”
도무지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몇 번이고 곱씹었다. 대공 비아누트가 쿠엔틴을 참수하려 한다고…? 설마 그럴 리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검은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실까.”
“저, 이런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영내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전하께서 동생을 너무 사랑하시어 이성을 잃으셨다고요.”
난간 뒤에 숨어 대화를 듣던 그리즈는 차갑게 식은 손을 주물렀다. 그가 이성을 잃었다니.
그리즈가 창백한 행색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까부터 환부에서 치밀어 오르던 열통은 잊혀진 지 오래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쿠엔틴 경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주로 검은 천사와만 대면했던 귀족 여인이 다가오자 금발 머리 사내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였다.
“가, 갈색 개가 광장에 남아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아가씨. 그가 돌아오면 진상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갈색 개’라는 사내가 어떤 정보를 들고 오든 그건 쿠엔틴이 사망한 후일 것이다. 그리즈는 입술까지 하얗게 질렸다. 누가 귀에 대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똑같은 환청이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다.
“저 이런 말씀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영내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전하께서 동생을 너무 사랑하시어 이성을 잃으셨다고요.”
그녀는 불지옥에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머리에서는 진땀이 흐르고 온몸이 화끈거렸다. 숨 쉴 때마다 발바닥이 뜨겁게 아려서 도무지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정말 확실합니까? 정말 참수 명단에 쿠엔틴 경의 이름이 있어요?”
“그, 그건 제 눈으로 보았으니 확실합니다만….”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도 그리즈는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대공 비아누트가 쿠엔틴을… 머릿속이 새카맣게 타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명단에 쿠엔틴 경의 이름이 있다면, 그냥 참… 참수당하게 둘 수 없어요.”
하지만 당장은 버벅거리지 않고 말하기도 힘든 여인이 무얼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쿠엔틴은 기사였다. 그리고 기사는 전장에서 전사하는 걸 영광으로 여긴다. 자신이 모셔온 대공의 손에 참수당하는 것보다 더한 비극은 없었다. 그것도 기별도 없이 저택을 떠난 여인 때문에…. 발을 동동 굴리던 그리즈가 입을 열었다.
“제, 제가 대공 전하께 서신을 드리는 건 어때요? 제 필체를 알아보실 겁니다.”
검은 천사가 고심 끝에 대답했다.
“저, 아가씨. 어쩌면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동안 마님께서 대공 전하에 대해 자주 말씀해 주신 덕분에 저도 전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
“냉혹한 외면과는 달리 성정은 올곧으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마당에 이성을 완전히 놓으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검은 천사의 말이 맞긴 했지만 그리즈는 편히 마음 놓을 수 없었다. 때때로 대공 비아누트의 시선이 뜨거운 무언가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달궈진 분화구 곁에 있는 기분을 느꼈다. 망설임 없이 전쟁을 계획한 사람이니 분화구가 맞을지도 몰랐다.
초조하게 몇 시간을 기다렸다.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니 그가 이성을 놓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을 되뇌면서.
하늘이 어둑해졌을 때쯤 갈색 개가 돌아왔다. 거실 구석에 앉아 있던 검은 천사가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됐나?”
갈색 개는 이슬에 젖은 머리칼을 탈탈 털다가 검은 천사를 바라봤다.
“쿠엔틴 경께서 참수당하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럼?”
“참수당한 자들은 모두 처음 보던 자들이었습니다. 아아, 그중 낯익은 얼굴도 참수대로 올라왔습니다. 그, 매음굴 벙어리 포주…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하던 검은 천사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빌튼?”
빌튼? 매음굴 포주 빌튼? 그리즈가 두 눈을 크게 뜨는 찰나였다. 갈색 개가 손뼉을 탁, 하고 쳤다.
“아, 예. 그 이름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역시 그랬군.”
“바이렌하그 기사들에게 물어봤더니, 대공 전하께서 감옥을 비우고 계시다고 합니다. 범죄자들을 처형하는데 왜 기사들을 참수한다는 안내문이 붙었던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숨죽이고 대화를 듣던 그리즈가 긴장을 풀었다. 저택 경비병들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을 때였다.
“대공 전하께서는 참수식은 쳐다보지도 않으셨습니다. 몰려든 인파만 살펴보시더군요.”
그제야 검은 천사가 무언가 깨닫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래도 대공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부르시고 계신 것 같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여쁜 새를 다시 새장에 넣어 보호하시려고 그에 맞는 먹이를 준비하신 거야.”
그 모든 게 그녀를 데려가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얘기였다.
***
부엌에 쥐가 죽어 있었다. 하나, 둘, 셋… 다섯 마리.
그리즈는 뒤숭숭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누군가가 독약을 건드릴까 봐서 드레스를 벗지도 못했다.
잠깐 눈을 붙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창문이 와장창 깨지며 파열음을 냈다.
그리즈는 잠결에 벌떡 일어났다. 그때 1층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터졌다.
“적들이 왔습니다! 타릴루치 놈들이 또 쳐들어왔어요!”
문밖에서는 사내들의 고함이 번지고 있었다. 맞은편 침대에 앉아 있던 검은 천사가 검 손잡이를 쥐며 일어났다.
“망할! 매번 어떻게 알고 오는 거지?”
호위병들이 쉬던 방문이 쾅, 쾅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즈는 커튼 너머로 밖을 내다보다가 보자기를 열었다. 검은 천사가 며칠 전에 주었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그때 ‘왼손잡이’라는 별명을 가진 갈색 머리 사내가 방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저 멀리 갈색 개가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아가씨!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저택 뒷문에 퇴로가 있으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녀는 창문을 내다보며 급박하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이 생긴다면 노르드발츠 산 초입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습니다. 대장도 아가씨의 안전만 보장되면 바로 퇴각할 겁니다.”
그녀가 빨리 달아날수록 그들이 달아나기 편해질 거라는 얘기였다. 그녀는 왼손잡이와 갈색 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이내 드레스 치마를 휘감아 품에 안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뒷문으로 나가자 다행히 달이 환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가죽신 끝이 돌부리에 걸려 구를 뻔하기도 했지만 필사적으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그나마 내리막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몇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평지가 보였을 때쯤에는 품에 끌어안은 드레스가 한 몸처럼 느껴졌다.
“하아, 하아. 거의, 거의 다 왔어.”
그리즈가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말하는 찰나, 뒤따라오던 갈색 개가 비탈길로 미끄러졌다. 그녀는 시큰거리기 시작한 무릎에 힘을 주며 멈췄다.
“하아, 괘, 괜찮습니까?”
그러곤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탈길 아래로 손을 뻗어 봤다. 갈색 개는 흙바닥에 쓸려 나간 검을 찾는 중이었다.
“괜찮, 괜찮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검을 찾는 대로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리즈가 그의 주변을 살폈지만 도무지 검집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평지까지 내려간 왼손잡이가 그녀를 재촉했다.
“아가씨,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이 우리를 뒤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즈는 갈색 개가 부상을 입지는 않았는지 확인한 후에야 아래로 내려갔다. 바로 옆에 또다른 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산과 산 사이에는 곱게 다져진 내리막길이 길쭉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즈는 길을 시선으로 좇으며 숨을 크게 돌렸다. 그 순간 왼손잡이가 갈색 마차 앞에서 손짓했다.
“아가씨, 이리 오시지요. 대장께서 만일을 대비해 준비해 두신 마차입니다.”
이내 왔던 길을 돌아본 그리즈가 갈색 개를 찾다가 마차로 향했다. 왼손잡이가 어서 타라는 듯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는 어디선가 봤던 듯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디르크와 닮은 얼굴이다.
그리즈는 그가 디르크의 아버지인 빌리어트 타릴루치라는 걸 깨달았다.
달가닥, 달가닥!
마차 바닥의 비밀 공간에 갇힌 그리즈는 혼몽한 눈을 떴다. 시야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타릴루치 소굴에 도착해야만 바퀴가 멈출 기세였다. 아니면 그리즈 베네딕트가 사방이 꽉 막힌 나무 관 안에서 죽어 없어지거나.
마차 안에서 디르크의 아비를 봤을 땐 정말이지, 밑이 뻥 뚫린 감옥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듯했다.
왼손잡이가 모두를 배신했다. 아니, 지난밤에도 첩자가 들이닥쳤었던 걸 보면 처음부터 그들과 한패였는지도 몰랐다.
“네놈이, 네놈이 감히….”
뒤따라온 갈색 개가 풀숲에서 나온 첩자들을 마주쳤다. 다급해진 그리즈는 갈색 개를 향해 절규하듯 외쳤었다.
“함정입니다, 달아나세요!”
이곳이 갈색 개의 무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사의 감으로 모르지 않을 텐데도 갈색 개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으로 첩자 세 명의 숨을 끊었다.
그러나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첩자의 검에 등을 베였다. 피가 사방으로 튈 만큼 난도질당했다.
그리즈는 죽어 가는 갈색 개가 찬란한 환상을 보길 바랐다. 하늘의 신, 돌아가신 어머니, 혹은 가슴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사람을.
하지만 그는 죽어 가며 그리즈를 아프도록 바라보았다. 그러며 그가 했던 말이 지금도 그리즈의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크흑! 지, 지켜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가씨….”
나이 스물도 넘기지 못한 소년의 비통한 눈빛이, 떨리는 호흡이, 힘을 잃어 가는 목소리가 심장을 쥐어뜯었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감정이 복받치는 순간 마차 안에서 큭, 하는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디르크의 부친 얼굴이 웃고 있었다. 사람이 넷이나 죽었는데도 남의 일이라는 듯. 그리즈는 슬픔을 삼키고 분노를 흘렸다.
아랑곳하지 않는 시선이 그리즈를 살펴봤다. 이내 그랑디아 왕과 닮은 그녀의 눈매를 훑고는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 후부터 그는 그리즈를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의 정체를 거의 깨달았다는 방증인 것이다.
하인이 마차 바닥의 카펫을 걷고 나무 뚜껑을 열었다. 소지품 보따리와 단검을 뺏긴 그리즈는 손발이 묶이고, 입이 틀어막힌 채로 그 안에 처박혔다. 동굴 같은 곳이다. 절규조차 빠져나갈 틈이 없는.
이번 일이 위험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다만 감수하고 싶을 만큼 절박했었다. 혼자 저택을 떠나는 건 더 위험했고, 그렇다고 저택에서 대공의 생존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처음엔 암담했다. 이대로 대공의 발목을 잡느니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해 봐. 그렇게 가면 나는.”
때때로 절박하게 빛나던 파란 눈이 아른거리는 듯도 했다. 지금도 그 눈이 세상을 샅샅이 살피고 있을 것 같았다.
소지품 보따리 안에서 떨어진 박제 나비 액자가 달그락거렸다. 그때마다 그리즈는 마음을 다잡았다. 왜 내가 죽어야 할까. 이미 더러운 왕위찬탈자들 때문에 반평생을 고생했지 않나.
훗날 천국에서 그를 만난다면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최소한 나도 노력했다고. 나의 목숨 그리고 빼앗긴 왕관을 움켜쥐기 위해서.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벌레 같은 족속들의 손아귀 안에서는 더더욱!
쿵! 마차 바퀴가 돌부리를 스쳤는지 허공에 살짝 떴다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속치마 주머니의 약병이 허벅지를 툭 쳤다. 쥐들을 몰살시킨 독약이다. 어떤 일에 써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침없이 달리던 마차가 서서히 멈췄다. 그 후 몇 번이나 가다 서더니 나무 관의 뚜껑이 열렸다.
밝은 빛에 휘감겨 눈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즈는 눈을 꽉 감으며 바닥을 더듬어 나비 액자를 쥐었다.
우악스러운 손이 그리즈의 팔을 움켜쥐고는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입에 물린 재갈과 손발의 포승줄이 풀렸다. 그리즈는 눈부신 빛 사이로, 젊은 기사를 보았다. 끝이 뾰족한 십자가가 기사의 은색 갑옷에 새겨져 있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문양이다. 아버지가 직접 디자인해 선물했던 타릴루치 가문 문장이었으므로.
역시나 타릴루치 본가나, 그랑디아 왕궁으로 납치된 것 같았다. 그리즈는 빛 때문에 시린 눈을 똑바로 뜨고 문양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디자인한 것과는 문양이 달랐다. 십자가 머리 쪽에 왕관이 얹혀 있었다.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한 건지, 찬란한 왕관에서 왕의 위엄이 풍겨 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왕관이라니. 도둑들이, 감히.
이 문양을 만들고 흡족해했을 타릴루치 일가를 상상하자 피가 뜨거워졌다.
네놈들이 감히, 진심을 담은 아버지의 선물에 아버지의 왕관을? 왕관을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베네딕트 가의 씨를 말리려고 하기까지!
하늘이 두렵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분노로 이가 떨려 오는 찰나 기사가 말했다.
“내려!”
기선 제압하듯 우악스러운 어투였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그리즈는 대공의 음성을 환청처럼 들었다.
“내일 클라우디아가 나타나서 추궁하면 어떻게 하게.”
“…….”
“‘증명해 봐, 네가 율리아나인 거.’ 이래도 끝까지 버터야 되는 거, 알지.”
그때는 막연히 수긍했던 그 말의 의미가 이제야 선명해진다. 가득한 오답 속에서 정답이 비쳐진 듯했다. 대공의 말대로, 꿋꿋이 율리아나로 버티면 탈출 기회도 엿볼 수 있을 듯했다.
그래, 무사히 살아서 붉은 늑대라는 자를 찾아야지. 절대로 아홉 살배기처럼 무능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다.
그리즈가 기사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게 처음이었기에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이, 이거 놔!”
마차 밖으로 그녀를 끌고 내려가려던 기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뒤, 마차 문밖에서 베아트릭스 빈젤과 다른 귀족들이 언뜻 보였다.
그리즈 베네딕트로 추정되는 인물을 잡았다는 소식에 저마다 구경하러 온 듯했다.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입고, 값비싼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하고서.
이미 오전 티타임 때 모여 그리즈 베네딕트에 대해 의견을 나눴을 것이다. 어떻게 죽일지 작전을 짜면서. 독 안의 든 쥐를 서로 갖고 놀겠다고 하며 재밌어하면서.
그런 생각만으로 그리즈는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행복해하는 그들의 얼굴에 재를 뿌리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아니, 피눈물까지 흘리게 하고 싶었다. 용서를 구하며 바닥을 설설 기게 만들고 싶었다. 10년 넘게 쌓인 분노가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그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던 귀족, 비아누트와 스테판을 떠올렸다. 조금 더 침착하게 군다면 정말 그 혈통처럼 보일지 몰랐다.
“네… 네놈이 미친 게로구나?”
첫 호흡은 떨렸지만 끝 목소리는 생각보다 당당하게 울렸다. 그리즈는 목소리에 더 힘을 실었다.
“어찌 기사 따위가 대공 영매에게 함부로 손대는 건가? 감히!”
진정 더러운 손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부모와 형제, 시종들을 죽였을 우악스러운 손으로 이제 나까지?
그러나 이제 죽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발악할 테니까. 그럼에도 죽게 된다면 너희들도 모두 무덤 속으로 끌고 갈 거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영원토록 빠지지 않을 핏물이라도 튀기고 가고 싶었다. 그리즈가 떨림을 삼키며 이를 물었다.
“놓지 않으면 언젠가 네놈의 목을 비틀 거야. 내 장담하지.”
기사가 당황한 듯 목덜미에 움찔 힘을 줬다. 팔뚝을 쥔 그의 손힘이 스르륵 빠졌다.
“고맙군.”
옆에서 지켜봐 왔던 대공처럼 나지막이 말한 그리즈는 기사의 팔을 탁! 쳐 내고는 스스로 마차 밖으로 나갔다. 눈이 부셨다. 거침없이 끼쳐 오는 빛 사이로, 마차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뒤로 한발씩 물러나는 게 보였다.
옆에 장엄한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회색빛 벽돌을 불규칙한 원통처럼 쌓아 올린 성의 모습 낯익었다. 그랑디아의 내성이다. 그랑디아의 심장이 살고 있기에 모양도 심장과 비슷하다고 백성들이 칭송하곤 했던 그곳.
봄이 되면 외벽을 감싼 넝쿨에 핀 봄꽃이 싱그러움을 뽐내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말라 죽은 넝쿨 가지가 황량함을 뿜어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중병에 걸려 멈춘 심장처럼 느껴졌다.
늘 새벽처럼 찾아와 지저귀던 붉은 참새들도 떠나 버린 듯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온다. 아름다웠던 나의 집이 이 모양 이 꼴로. 분노로 시야가 흐릿해지는 순간, 옆쪽에서 여인의 인사가 들렸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군.”
살짝 고개 돌리자 살색 드레스를 입은 베아트릭스 빈젤이 보였다.
“드디어 다시 만났구나.”
베아트릭스의 옆에는 디르크의 부친이 있었고, 그 뒤에는 귀족 여인과 사내가 열 명 가까이 서 있었다. 대부분 타릴루치 일가일 터. 그리즈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았다. 머릿속으로 자신은 율리아나 바이렌하그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고 있었다.
“정말 불쾌하군요.”
“뭐?”
“이런 일을 벌이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정오의 빛을 흡수한 그리즈의 붉은 눈이 매섭게 빛났다. 피를 머금은 것처럼 섬뜩하면서도 기묘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유순하기만 했던 연회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당황한 베아트릭스가 눈매를 살짝 좁혔다가 미소를 유지하며 물었다.
“무사하지 못할 이유가 뭐니?”
그리즈는 이를 질끈 물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할머니와 오라버니께 이 사실을 고하겠어요.”
“네 할머니와 오라버니는 목이 잘려 죽었잖니?”
베아트릭스가 대답하자 그 뒤에서 비웃음이 번갈아 흘렀다. 그 소리가 고막을 푹푹 찌르자 그리즈는 없던 꼬리가 다리 사이로 말려 들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그리즈는 일부러 날카롭게 눈뜨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나는 율리아나야. 스테판과 외출하기 위해 하인들의 방에 불을 붙이고, 사냥을 좋아했던! 저런 쓰레기들이 쉽게 죽이지 못할 노르드발츠 왕의 조카 손녀.
그리즈의 입매가 예리하게 움직였다.
“내 할머니와 오라버니를 살해하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이면 됩니까?”
그 말에 정원 앞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녀가 타고 왔던 마차가 때맞춰 초소를 거쳐 나갔다.
그리즈는 시야를 가리는 뿌연 연기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베아트릭스를 무섭도록 노려봤다. 당황한 베아트릭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디르크의 부친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때 내성 안에서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을 본 디르크의 부친이 다시금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첫째 왕녀께서 이제야 나오시는군요.”
그리즈가 활짝 열린 성문 안을 주시했다. 금발의 태양 같은 여인이 막 출입구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찢어 죽일 클라우디아 타릴루치였다.
열 명이 넘는 시녀가 클라우디아를 뒤따랐다. 모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귀족 소녀들이다. 그랑디아의 신흥 세력일 거다. 베네딕트 왕가를 몰아내고 한 자리씩 차지한.
불공평했다. 그들의 머리 위를 똑같은 태양이 비춰 주고 있다니. 액자를 쥔 그리즈의 손이 분노로 차갑게 식었다.
반면에 클라우디아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걸음걸이가 느긋했다. 죄책감이나 불안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누구도 아닌, 그리즈 베네딕트로 추정되는 여인을 만나러 오면서. 권력욕에 미쳐서 그녀의 일가족을 몰살시켜 놓고, 검에 사지가 베여 나가는 사람을 보게 해 놓고, 이런 비극을 겪게 해 놓고 너는 즐거워…?
타오르는 분노에 불쏘시개를 넣듯 클라우디아가 미소 지었다. 세상을 다 가진 자의 행복한 미소. 그리즈의 눈앞에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광경이 펼쳐졌다.
“아버지, 우리가 해냈어요. 엄청난 금화와 보석들, 장엄한 왕좌도 이제 우리의 것이에요!”
그 당시 아홉 살 그리즈의 몸에는 포승줄이 칭칭 감겨 있었다. 그 앞에서 클라우디아는 보란 듯이 그리즈가 가장 아꼈던 사파이어 왕관을 쓰고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앞으로 펼쳐질 찬란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 보였다.
그 후 11년. 여전히 찬란한 삶을 사는 중이기에 그녀는 여전히 기뻐 보였다. 그리즈의 눈동자에 서글픈 독기가 어리는 순간이었다.
“율리? 율리!”
사내의 미성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성을 올려다보자 6층께에서 눈에 익숙한 금발 사내가 손을 흔들었다.
얼굴은 흐릿했지만 설핏 디르크처럼 보였다. 구류됐다는 말을 들었는데, 살아 있었구나! 안도하는 찰나 디르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금방 나갈게, 율리! 거기서 기다려!”
사람들에게 그녀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는 의사를 드러낸 것 같기도 했다. 언뜻 불쾌해하던 클라우디아가 그리즈의 앞에 섰다.
아홉 살 이후로 제대로 먹지 못한 까닭에 그리즈는 아담했다. 그런데 호사를 누리고 살았을 텐데도 클라우디아는 고작 반 뼘밖에 크지 않았다. 우러러보지 않을 수 있어 감사해야 할지. 그리즈는 금빛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걸 보다가 눈을 선명히 떴다.
클라우디아는 그리즈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다가 시녀에게 속삭였다.
“스테판 예비 후작도 나오시라고 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녀 저하.”
그러곤 그리즈의 턱을 살짝 들게 해 놓고서 얼굴을 다시금 주시했다.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잠시 허공을 응시하는 듯도 했다. 기억 속 그리즈 베네틱트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해 보기라도 하는 듯.
그러다 그리즈의 모친과 닮은 정갈한 눈썹을 뚫어지게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황빛 꽃물을 들인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
“역시나 얼굴이 낯익은 걸 보니 그리즈 베네딕트가 맞군요. 몇 년 동안 봐 온 저는 알아볼 수 있어요.”
디르크의 부친이 클라우디아의 옆에 서서 짐짓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녀 저하.”
“이 아이는 무어라고 대답하덥니까?”
뒤에 서 있던 베아트릭스가 한 걸음 나와 대답했다.
“뻔뻔하게도 바이렌하그 대공 영매처럼 굴더군요. 못 본 사이 연기력이 출중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즈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랑디아의 귀족들을 스산하게 살펴볼 뿐이다. 바이렌하그로 돌아가면 죽일 대상을 기억해 두려는 것처럼.
처음엔 비웃던 시녀들이 하나둘씩 눈을 피했다. 바이렌하그 대공 영매이자 노르드발츠 국왕의 조카 손녀가 맞을지도 모르는 여인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아는 거다.
그때 클라우디아가 시녀에게 손수건을 받아서 그리즈의 턱을 만졌던 손을 닦았다. 곧장 일부러 소리 내어 깔깔 웃으며 디르크의 부친을 올려다봤다.
“요망하군요. 감히 왕가의 면전에서 뻔뻔하게 연기를 하다니요.”
이내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돌려 그리즈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가의 웃음기를 지웠다.
“그래, 조금 전에 어떤 연기를 했는지 보여 보거라.”
스테판이 훤칠한 체형을 드러내며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권력의 개가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고도 결국 이곳에 오다니.
그럼에도 그리즈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가 멈췄다. 모두의 이목이 쏠린다. 독기어린 붉은 입술이 비스듬히 비틀렸다.
“클라우디아 타릴루치, 왕녀 저하.”
“…….”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무례를 참을 수 없군요.”
초라하고 힘없이 등장했던 여인의 존재감이 커진다. 율리아나 바이렌하그라는 이름에, 몰락한 왕족의 분노가 더해지니 그리되었다.
비웃음 가득했던 정원이 폭풍 전야처럼 고요해졌다. 간간이 들리던 숨소리조차 죽어 버렸다. 눈치를 살피던 클라우디아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무례? 지금 무례라고 했느냐?”
겁먹은 개가 짖는 법이다. 클라우디아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과장되게 웃었다.
“진짜 웃기는군!”
그러다 이를 으득 갈고는 손을 추켜올렸다. 역광을 받아 새카매진 손바닥이 그리즈의 뺨을 거침없이 강타했다.
철썩! 그리즈의 턱이 반대로 꺾였다. 그리즈는 뺨에 끓는 물이 쏟아진 듯, 화끈거림을 느꼈다.
“정말 웃겨. 신을 능멸하여 폐위된 주제에 감히 귀족 탈을 쓰다니?”
그리즈가 쥐고 있던 액자가 잔디로 떨어졌다. 클라우디아가 와장창 깨진 유리를 보다가 나비를 지그시 밟았다.
“이딴 건 대체 왜 갖고 다니는 거지?”
아름다운 검은 나비가 재처럼 으스러졌다. 잃어만 가는 삶에서 유일하게 남았던 것. 한 소년과 순수한 마음을 나눴다는 증명 같았던 게.
박제 나비가 창밖으로 속절없이 날아가는 환상이 보였다. 그리즈의 눈 밑이 표독스럽게 떨렸다. 바이렌하그에서 유일하게 가져온 추억까지 기어코 네가?
어렸을 적, 늘 내가 최고라고 말해 줬던 부모님이 네놈들의 손에 처참하게 도륙당했어. 나를 사랑해 줬던 형제들, 시녀들 또한 비참하게 죽었어.
나는 매음굴에서 11년 동안 폭행당했고, 정을 줬던 할머니에게 배신당했고,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사람을 내 발로 떠났어.
어디 그뿐일까? 나는 며칠 내내 이 산 저 산을 승냥이처럼 떠돌았어. 그러며 생살을 내 손으로 지졌고, 스물도 넘기지 못한 소년들이 잔인하게 베여 나가는 걸 보았어. 주검을 수습하지도 못했어. 웃겨? 너는 이게 웃겨?
차라리 죽어, 클라우디아!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아버지와 함께 죽어!
격노로 정신없이 떨리던 그리즈의 손이 클라우디아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10년 넘게 쌓인 울분을 클라우디아의 뺨에 꽂아 내린 느낌이었다.
속이 뻥 뚫린다. 그 안으로 쾌청한 바람이 드나드는 듯했다. 등 뒤에서 소녀가 응원하고 있을 것 같았다. 며칠 전 꿈속에서 봤던,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그 소녀가.
순간 타릴루치 쪽의 공간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율리! 율리, 잠깐만!”
그랑디아의 호위병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디르크가 전속력으로 뛰어왔다. 그리즈는, 급격히 당황하며 손으로 뺨을 가린 클라우디아에게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왕녀 저하께서 미쳐도 단단히 미치신 게로군요? 내가 일개 시종처럼 보이십니까? 아니면 제가 속한 노르드발츠 왕국이 우스우신 겁니까?”
그 순간 디르크가 그리즈를 등진 채 클라우디아를 몸으로 막아섰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숙덕거림이 울렸다.
앞니로 입술을 꾹 물었던 그리즈는 디르크의 옆에 서서 클라우디아를 노려봤다.
더 이상 겁먹은 개로 살아가지 않을 거다. 결국 죽게 되더라도 이들을 끌고 갈 거다. 피눈물이라도 흘리게 할 것이다. 두고 봐. 가슴 속에서 겹겹이 쌓인 살기가 입술을 타고 번졌다.
“그 누구도 이 율리아나 바이렌하그의 뺨에 손댈 수 없습니다. 설령 타국의 왕녀 저하라 해도 말이죠.”
클라우디아의 초록 눈에 그리즈가 비쳤다. 웃을 때는 더없이 유순하지만 표정이 없으면 도도하고 오만한 느낌의 얼굴이다.
그리즈는 뺨의 핏자국 때문에 더 강렬해진 자신의 얼굴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심심풀이로 하인들을 죽인 율리아나보다 더한 악인이 서 있는 듯했으므로.
그리즈 베네딕트가 정말 맞냐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어렸을 때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 같다는 우려가 이어졌다. 정말 바이렌하그 영애가 맞으면 어쩌냐는 물음이 들려오기도 한다. 가슴속에서 진한 희열이 솟구치는 기분이 든다.
“지금 저를 풀어 주시지 않으면 큰 문제에 직면하시게 될 겁니다. 노르드발츠 국왕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격노하시겠습니까?”
그녀가 기세등등하게 나올 줄은 예상 못 한 듯 클라우디아가 입술을 버벅거렸다. 그러다 도와 달라는 듯 스테판을 바라보았다.
“뻐, 뻔뻔한 베네딕트의 개가 연기 실력까지 좋아진 것 같은데, 스테판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율리아나와 혈육이니 그의 말이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스테판에게 쏠렸다.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떨리는 순간이었다.
“글쎄요. 율리아나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지금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군요.”
나른하게 말한 그가 클라우디아를 빤히 내려다봤다. 그 말에 클라우디아는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지금은 이득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스테판이 갈색 눈동자로 그리즈를 훑어보았다. 그러다 입술을 느릿하게 매만지며 묘하게 대답했다.
“저는 확실한 걸 원합니다, 왕녀 저하.”
무슨 대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스테판이 제대로 된 입장을 정하지 않은 듯했다. 아마도 클라우디아에게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내려는 속셈이겠지. 바이렌하그의 율리아나가 그랑디아의 왕녀라는 걸 증언해 주는 대가로 말이다.
그리즈는 클라우디아와 스테판이 더 갈등하기를 바랐다.
클라우디아가 실망한 기색으로 스테판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 얘기는 잠시 뒤에 다시 하도록 하죠.”
그러곤 사람들에게 연설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리즈 베네딕트를 어렸을 때부터 보살폈던 시녀장이 토스카르 유배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자를 재판장에 데려와 증인으로 세우면 모든 게 확실해지겠지요.”
그리즈가 한쪽 눈을 지그시 좁히며 물었다.
“재판? 지금 재판이라고 했습니까?”
클라우디아가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도도하게 대답했다.
“그래, 내일 국왕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재판을 열 거야. 그 정도는 되어야 네가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싸겠지? 어렸을 때처럼 말이야.”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얘기하며 웃는 얼굴이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한데 그리즈보다 디르크가 더 불쾌해하며 미간을 좁혔다.
“율리, 일단 들어가자. 옷도 갈아입고 물수건으로 얼굴 좀 닦아야겠어.”
그가 그리즈를 데려가려 하자 경비병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고민하던 클라우디아는 그리즈를 잡지 않았다. 도발했을 뿐이다.
“운이 좋구나. 우리가 마차를 조금 더 빨리 찾았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텐데.”
마차…?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타릴루치에서도 그 마차를 습격하려 했던 건가?
그리즈의 가슴께에 뜨거운 불길이 번진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마차를 습격해 준 까닭에 살게 되었으니 운이 좋다고? 내가 운이 좋았다고?
디르크를 따라가던 그리즈가 태연히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그리즈는 밑도 끝도 없는 의심에 지겨움을 표하듯 일부러 미간을 좁혔다. 명확한 무시에 치를 떠는 클라우디아의 모습이 붉은 눈에 선명히 박혔다.
그리즈는 4층 디르크의 방에 도착했다. 여지없이 경비병들이 따라와 문 앞을 지키는 중이다.
그래도 그리즈는 율리아나라고 주장한 덕분에 감옥에 갇히지 않은 것만으로 뿌듯했다.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라도, 내일 재판 전까지는 감옥에 가둬 둘 수 없을 거다. 그 전에 이곳을 탈출해야만 하는데.
디르크가 시녀에게 요청한 새 드레스와 물수건이 도착했다. 디르크는 시녀가 나가자, 물이든 금색 볼에 면포를 넣으며 말했다.
“네게 묻고 싶은 게 많아.”
“…….”
“나중에 물을 테니까 모두 대답해 줘.”
무엇이 궁금하냐고 물으려던 그리즈는 입술을 멈췄다. 그가 사랑했던 율리아나는 없다는 걸 눈치챈 게 아닐까. 돌아가는 상황이 그러하니까.
하지만 왜 추궁하지 않는 거지? 왜 계속 감싸 주는 걸까.
그리즈는 그가 앉은 창틀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디르크는 물이 가득 든 볼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율리, 정말 우리 아버지한테 납치당한 거야?”
“응…. 오라버니 몰래 수녀원에 가려다가 납치당했어.”
대답한 그녀는 사람 한 명이 족히 누울 만큼의 넓은 창틀을 매만졌다.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정말로 소꿉친구 같았던 디르크가 완벽한 타인처럼 느껴졌다.
밖에서는 개들이 시종일관 짖어 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 그리즈가 신중히 물었다.
“재판이 끝나면 이곳 사람들이 나를 참수하려 하겠지?”
자신이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도 디르크가 모르는 척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디르크도 타릴루치 일원이지만 부친을 증오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대공 비아누트가 아델을 보호하고 있기도 하지 않나.
다만 그리즈는 그를 속여 미안한 마음 때문에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보던 디르크가 대답했다.
“아마 죽이지는 않을 거야. 국왕 전하께서 너를 죄인으로 만든 후에 바이렌하그와 협상하시려 할 것 같아. 매년 흉년이라 기사들 먹일 음식도 부족한 처지거든.”
그리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디르크… 저… 감옥에 갇혔었다는 얘기 들었어.”
디르크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싱그러웠던 황금빛 눈동자가 유난히 지쳐 보였다.
“두 번 갇혔다가 오늘 다시 풀려났어. 아마 오늘 아버지가 나를 또 회유하며 재판장에서 네가 율리아나가 아니라 말하라고 압박하겠지.”
디르크가 흠뻑 젖은 물수건을 한 손으로 쭉 짰다. 그런데 창틀을 가볍게 짚은 다른 손의 네 번째 손가락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손가락은 왜 그러니? 다쳤어?”
“아, 이거? 그렇게 됐어. 고문을 좀 당했더니 손끝이 썩어 들어가서 묶어 놨는데 한 마디가 알아서 떨어졌어.”
그리즈는 위로조차 해 주지 못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숨소리가 퍼석하게 갈라졌다.
디르크는 젖은 면포로 그리즈의 머리칼에 묻은 먼지를 닦아 주며 얼굴을 살폈다.
“율리, 나는 기사가 아니야.”
“…….”
“손가락 한 마디쯤 없어도 잘 살 수 있어.”
머리칼을 쓸던 젖은 면포가 이번엔 뺨으로 옮겨 왔다. 디르크의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마치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율리아나가 아니라도 괜찮아, 나는, 나는 그냥 너를….
그리즈가 뺨에 닿은 면포를 쥐어 들며 시선을 피했다.
“고마워, 디르크. 내가 닦을게.”
고개를 끄덕인 디르크는 허전해진 손으로 창틀을 짚었다. 입술이 착잡하게 웃는 듯했다.
“바이렌하그 대공 전하께서 나를 진즉 탈출시켜 주시려고 했어. 내가 아버지를 설득하려다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된 거야. 아버지께서 아델을 찾으려고 각지에 용병들을 풀었거든. 그걸 막으려다가 그만….”
그리즈는 여전히 화상 때문에 화끈거리는 골반 부근을 매만졌다. 나도 나지만 너도 참….
고요해진 방 안에서 디르크의 미성이 울렸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나쁜 소식부터 말해 줄게.”
“응….”
“네가 오고 난 후 성내 경비가 더 삼엄해진 것 같아. 오늘부터 마차를 샅샅이 수색한다고 하니 몰래 빠져나가기가 힘들 거야.”
“좋은 소식은?”
“바이렌하그 대공 전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성내에 잠입해 있어. 지금껏 그자와 쪽지를 주고받고 있었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는지, 쪽지를 석상 입안 같은 곳에 넣어 놓으면 알아서 가져가는 듯해.”
대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붉은 늑대일 거다. 그리즈가 면포를 뒤집어 접어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디르크, 그럼 그 사람에게 부탁해서 탈출하자, 우리.”
디르크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더 늦기 전에 나가야겠어. 여긴 지옥이나 다름없거든.”
“지옥?”
“스테판은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제물을 바쳤어. 처음엔 회의감을 좀 느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이곳에 남기로 마음먹은 것 같아.”
지옥? 제물? 이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디르크, 그게 무슨 말이야?”
무언가를 고민하던 디르크가 뒤늦게 작게 속삭였다.
“타릴루치 가문은 밤의 신을 섬기고 있어. 머리가 세 개에 온몸이 새카만 신 말이야. 그 신 덕분에 그랑디아의 권력을 가졌다고 믿고 있거든.”
그리즈가 눈을 크게 떴다. 머리 세 개의 새카만 신? 아…. 예상 못 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정말 타릴루치는 그 신이 자신들을 왕으로 만들어 줬다고 믿고 있는 건가? 아버지의 어리석음이 그들을 왕으로 만들어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 손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머릿속에 밤의 신이라는 단어가 맴돈다.
밤의 신…. 주로 바다를 이용해 여러 나라를 오가는 무역상들이 밤의 신을 섬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야간 폭풍에 배가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종교를 남에게 덮어씌워 그토록 잔인하게 죽일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기에 차라리 생각을 멈췄다. 지금은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래, 탈출. 탈출만 생각하자.
디르크가 붉은 늑대에게 보낼 쪽지를 썼다. 이곳을 나갈 마차를 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즈는 그가 쪽지를 보내고 올 동안 방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가 방문을 열자 문 옆에 서 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디르크는 그들에게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말한 후 방을 나섰다.
그 찰나 그리즈는 그리즈는 안이 둥글게 뻥 뚫려서 전경이 들여다보이는 성 내부를 살펴보았다. 때맞춰 맞은편 방의 문이 열리고 여인 한 명이 나왔다. 문틈으로 드레스를 입은 앳된 얼굴의 여인들이 족히 서른 명 가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 상태로 방문이 닫히고 시간이 흘렀다. 디르크가 무사히 쪽지를 보내고 돌아오자 그리즈가 속삭이듯 물었다.
“디르크, 그런데 맞은편 방에 있는 여인들은 뭐야?”
디르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전하의 밤 시중 시녀들.”
“뭐?”
찢어 죽일 인간. 저렇게 많은 여인들을 데려다가 밤 시중을 들게 한다고?
그것만으로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디르크가 말을 덧붙였다. 다른 방에서는 어린 소녀가 등에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타릴루치 식 교육법이라고 한다. 지옥이 따로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거다.
“더 지옥 같은 걸 알려 줄까?”
디르크가 창문 앞에 섰다. 그리즈가 그 옆에 서서 밖을 내다보자 디르크가 성벽 너머의 요새 같은 건물을 가리켰다.
“저 멀리 왕실 기사단 보이지? 기사단 옆에 작은 막사들을 왜 쳐 둔 건지 아니?”
담에 가려져 훤히 들여다보이지는 않았지만 기사단 옆에 갈색 막사들이 보였다. 글쎄, 무얼 하는 곳일까. 지금도 사내들이 들락날락하는 걸 보면 인기 많은 곳인 것 같은데. 배식소인가?
디르크가 그 짐작을 처참히 깨부쉈다.
“기사들의 욕정을 풀어 주는 초소래. 3년 전쯤에 처음 세워졌어. 흉년으로 굶주린 기사들이 왕실에 적의를 가지는 게 두려워서 여인이라도 마음껏 취하도록 만든 거야.”
그리즈는 막사를 세어 보았다. 성벽에 가려진 막사를 빼도 어림잡아 마흔 개가 넘는데.
디르크의 말이 이어졌다.
“세금을 내지 못한 백성들의 딸자식과 아내들이 저곳에 있어. 내지 못한 세금만큼 몸으로 갚아야 나올 수 있는 거야.”
“뭐?”
“그나마도 나오지 못하고 죽는 여인들이 더 많아. 식량이 너무 부족해져서 신선한 고기나 빵은 꿈꿀 수 없거든. 밤 시중 시녀들 역시 오래된 빵으로 연명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려서 죽는다고 해. 이곳에서 굶어 죽지 않는 건 왕실 귀족들뿐이야.”
“…….”
“왜 유일신께서는 이들을 벌하지 않으실까. 나만큼 게으르신가? 풍년이라도 들게 해 주시지.”
얘기를 듣던 그리즈는 퍼석한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뜨거워진 분노가 새하얗게 타기 시작한 느낌이 든다. 설마 왕관만 쓰면 쉽게 왕이 되는 줄 알았을까. 기름진 음식으로 몸을 키우면 없던 권위가 생겨나는 줄 아는 걸까.
잦아들었던 몸 떨림이 다시금 시작됐다. 자격도 없는 짐승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게 또 너무 분해져서.
이어진 디르크의 말이 그 분노에 불을 지폈다.
“가장 꼭대기 층에는 열 살 아래의 고아들을 모아 둔 방도 있어. 밤의 신에게 바칠 제물들이라고 해. 그렇게 제물을 바치다 보면 밤의 신이 마음에 드는 제물의 몸을 통해서 부활할 거라고 믿고 있거든.”
그때 막사에서 사내가 네글리제만 입은 여인을 끌고 나왔다. 이내 머리채를 쥐고 흔들더니 땅에 패대기쳐 놓고 죽일 기세로 발길질을 해 댔다.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은 사내가 화를 내는 이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인이 면전에서 기침했거나, 싫어하는 티를 내는 등의 시답지 않은 이유로 폭행하는 거라는 방증 같았다. 저 사내를 폭력적으로 만든 건 여인의 태도가 아니라 여인의 무방비한 처지일 뿐.
“겁대가리 없는 년!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를 이따위로 갚아?”
“따라와, 이 망할 계집!”
매음굴 포주 빌튼의 격노가 그리즈의 고막을 찌르는 듯했다. 눈을 감으니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리즈는 맹렬히 괴로워졌다. 창밖의 여인은 계속 발길질당하고 있을 것이므로.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겠다. 돌아가서 레녹스에 제대로 서신을 보내고 지원을 요청해야지.
하지만… 그 이후에는…?
의문이 드는 순간 본성 옆의 식당이 부산스러워졌다. 들통을 산더미처럼 실은 수레 앞에 시종들이 삼삼오오 몰려드는 중이다. 디르크가 그곳을 보며 말했다.
“오늘 만찬이 열릴 거야. 바이렌하그 군과 노르드발츠 군이 그랑디아 국경에 엊그제부터 진을 쳤거든. 아마 대공께서 네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응하신 걸 거야. 노르드발츠 국왕 폐하도 조카 손녀의 소식에 대외적으로 가만히 계실 수 없으셨을 테고.”
“…….”
“그러니 누구도 당장은 너를 해칠 수 없어. 네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전쟁이 일어날 테니 말이야.”
그때 시종 한 명이, 먼저 꺼낸 들통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게 보였다. 그러곤 다른 시종들을 시켜 들통을 포도주 창고에 굴려 넣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랑디아에 위험한 상황이지. 그 때문에 전하께서 타릴루치 본가로 대공들을 불러들여서 회의 중이야. 그사이에 기사들이 이탈하는 걸 막고자 식량을 풀 생각이겠지.”
이내 식량을 실은 수레가 줄줄이 도착했다. 그 광경을 주시하던 디르크가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우리에게는 다 좋은 소식이야. 기사들이 음식에 들떠서 해이해질 테니까. 그 틈을 노려서 붉은 늑대가 준비한 마차에 올라타자. 우린 할 수 있어, 율리.”
시종들이 넘쳐나는 식량에 행복해할 동안, 성벽 너머의 여인은 여전히 걷어차이고 있었다.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던 조금 전보다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리즈는 저 여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그리즈는 이 시간 타릴루치 가문의 일원들이 어디에서 어떤 호사를 누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운이 좋았다고? 정작 운이 좋았던 것은, 정치에 지친 아버지를 현혹해 권력을 쟁탈한 너희들이지 않나?
아니, 어쩌면 그들의 말대로 그리즈 베네딕트는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타릴루치를 향한 살의가 맹렬히 불타는 지금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리즈가 치마를 자연스럽게 더듬으며 독약 병을 확인했다. 손바닥으로 단단하고 둥근 병이 만져진다.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이 병을 깨트리지 않으려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하지만 안도감은 잠시였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차라리 깨져 버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어제와 엊그제, 아니 평생 그랬듯이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기만 하면 될 텐데.
그래, 늘 그랬듯이, 옆에서 누가 맞으면 조용히 자리를 피했듯이. 곰팡내가 나는 구석에서 벌벌 떨며 소란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폭력을 방관하며 드는 죄책감은, 나 역시 저만큼 맞았다는 생각으로 덮어 버리면서.
그랬던 지난날의 매음굴 마리아가 그리즈의 눈앞에 떠올랐다. 한심하게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 속에서 어렴풋이 빛나던 생각들이 읽혔다. 사실은 그들을 구하고 싶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건 너무 슬프니까. 그들의 마음속에서 시들어 가는 꽃을 피우고 싶어. 언젠가 만났었던 아름다운 나비도 내게 그렇게 베풀어 주었으므로.
무지막지하게 맞던 여인이 몸을 쭉 펴고 누웠다. 사내가 손짓하자 다른 사내들이 여인을 끌고 나가다가 정문 옆 수레에 던져 넣었다.
누군가의 딸자식 혹은 아내가 잡초처럼 뜯겨 버려졌다. 그녀가 세금을 내지 못한 죄로 죽은 거라면, 그녀를 겁탈하고 때려죽인 저들의 죄는 무엇으로 치러야 할까.
독약 병을 쥔 그리즈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타릴루치의 개들, 죽어야 마땅한.
타릴루치의 지시하에 저들이 그랑디아의 백성들, 그리고 바이렌하그의 기사들과 대공을 위협하도록 둘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언젠가부터 발목을 옥죈, 보이지 않는 족쇄를 손수 부수고 싶기도 했다. 저들을 제대로 흔들면 이곳을 탈출하기도 쉬워질 거다. 그러니 오늘 정말 운 좋은 날이 아닌가. 하루 내내 떨리던 그리즈의 입술에 강한 힘이 깃들었다.
“디르크, 나 할 말이 있어. 듣기 싫으면 듣지 않아도 돼.”
타릴루치의 디르크는 부친의 말만 잘 따르면 작위를 이어받을 사내였다. 그러나 가문을 증오하고 있었고, 부친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율리아나가 맞다는 입장 때문에 손가락까지 잃었으니 얘기를 들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내게 독약이 있어.”
디르크가 무슨 말이냐는 듯 금빛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를 주시하던 붉은 눈동자가 기사단 앞 수레에 떨어졌다.
“나는 그 독약을 기사와 귀족들이 먹을 음식들에 타고 싶어. 배부른 돼지들은 쓰러지고, 배고픈 백성들은 달아날 수 있도록 말이야. 네 부친이 배부른 돼지라면 함께 죽을지도 몰라. 아니면 발각돼서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디르크는 혼란스럽게 입술을 버벅이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그리즈는 담담하게 물었다.
“기사들과 귀족들의 저녁 식사 시간이 몇 시니?”
늘 자상하게 즉답했던 디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후 3시. 조금 약해진 햇빛 속에서 먼지들만 떠돌았을 때였다.
“…여섯 시.”
“…….”
“하지만 율리, 진심이니?”
사실 자신은 없어. 마음 같아선 방금 내뱉은 말도 주워 담고 싶어. 사람들이 힘들 때 왜 기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해. 기도에는 목숨을 걸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정말 나는 이런 공포가 지긋지긋해. 한때 내 백성들이었던 자들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도 견딜 수가 없어. 꿈속으로 찾아와서 슬피 우는 영혼들이 점점 늘어만 가. 너는, 너는 이런 삶을 견딜 수 있어? 그리즈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디르크, 나는 하고 싶어.”
하기 싫어도 해야만 했다. 바이렌하그가 언제 그랑디아와 전쟁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그러니 적들을 줄일 수만 있다면….
언제나 그려 왔던 먼 미래가 그리즈의 눈앞에 그려졌다. 동물들과 유유히 산책하는 풍경.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 바람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연모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 짓고, 일상에 대해 얘기한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강아지들이 살이 오른 것 같아, 혹은 어제 가꾼 꽃이 더 자란 것 같아. 그렇게 시답잖은 얘길 나누면서.
그런 하루를 살 수만 있다면 무엇을 걸어도 좋았다. 작은 희망이라도 지필 수 있다면 위험을 감수해 보고 싶었다.
“있잖아, 나. 무척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대공 비아누트…. 그가 샤토로 떠나던 날 보았던 뒷모습이 그 어떤 때보다 강인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그리즈는 느꼈다. 저 사내는 끝내 목표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그게 그가 무사히 돌아올 거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디르크, 나는… 나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을까 봐 너무 무서워.”
방 안이 한동안 고요해졌다. 햇살을 받은 디르크의 얼굴이 허탈하게 이지러졌다.
상처받은 얼굴 같다고 생각했다. 그를 슬프게 만들 의도는 조금도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다시 개 짖는 소리가 울렸다. 디르크는 고개를 슬쩍 젓고는 짐짓 미소 지었다. 이내 붕대를 감은 손가락에 관심을 돌렸다.
“가끔은 손가락이 있는 것처럼 아파. 희한하지? 썩어 들어가서 감각이 없는 손마디를 잘라 낸 건데.”
“…….”
“하지만 그냥 놔두면 온몸으로 퍼졌을 염증이었어. 의사도 잘라 낸 자리가 아프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
늘 선했던 디르크의 눈동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가 아델을 찾고 있어. 언젠간 찾아내서 죽이도록 놔두고 싶지 않아. 내가 도와줄게. 네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
“너 혼자 그런 일을 성공시키기는 무리일 것 같아. 끝에 가서 마음 약해질 수도 있잖아.”
그 말을 들은 그리즈는 자신이 율리아나가 아니라는 걸 그가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잔인한 율리아나라면 이런 일을 재밌어할 테니까.
아마 이곳을 무사히 떠나서 제대로 물으려는 것 같았다. 그래, 무사히 떠나서.
오후 3시가 가까워진 시각. 시종들이 슬슬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다. 시기를 놓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그리즈가 식량 창고를 주시하다가 작게 말했다.
“우리둘 다 없어지면 경비병들이 찾기 시작할 거야. 나 혼자 다녀올게.”
“율리, 그건 불가능해.”
아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단지 특이할 뿐인 이 성에는 비밀이 있었다. 증조부께서 이 성을 세우실 때 무수히도 많은 비밀 공간과 탈출로를 설계하시고 지도로 남기셨다.
어린 그리즈는 증조부의 초상화 뒤에 숨겨 있던 비밀 지도를 때때로 훔쳐 성을 탐험하곤 했었다. 지도는 반정이 일어나던 날 불타서 사라져 버렸을 테지만 말이다.
“아니, 창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창밖으로?”
그리즈가 고갤 끄덕였다. 이곳은 어렸을 적 내 놀이터였다는 말을 삼키면서.
이내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창 아래에 넓은 돌판이 계단처럼 이어져 있었다. 시종들은 이 벽 장식 같은 돌판에 화초를 올려 두곤 했지만 그런 용도가 아니다.
그리즈가 대담하게 창밖으로 몸을 빼고는 돌판 위로 올라갔다. 4층인데! 디르크가 경악하는 찰나 그녀는 벽에 나선형으로 난 홈을 손잡이 삼아 짚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즈는 3층 목욕실 창문으로 들어갔다가 바닥의 비밀 통로를 열고 계단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바람 때문에 치마가 뒤집혀 잠깐 중심을 잃었으나 다행히도 1층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인적이 뜸할 때를 노려 식량 창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곤 포도주 열 통 가량과 소금 간을 해 놓은 고기, 우유에 독약을 떨어트렸다.
훗날 타릴루치 일가가 이 일을 추궁해도 증거는 없을 거다. 그들은 뻥 뚫린 병력을 복구하기도 벅찰 터.
목적을 마친 그리즈는 사냥에 첫발을 뗀 사자처럼 조심조심 벽 속의 비밀 계단을 헤매다가 약병을 베아트릭스의 방 창틀에 버렸다.
이내 성의 1층 목욕실부터 연결된 비밀 통로를 거쳐 디르크의 방으로 돌아왔다. 쓰러질 듯 창백했던 디르크가 그제야 제대로 숨 쉬는 것 같았다.
“율리? 율리! 어떻게 됐어? 나 너무 걱정돼서 미치는 줄 알았어.”
창문 밖으로 나갔던 건 그녀가 맞았지만 돌아온 건 그녀와는 달랐다. 눈빛이 조금 매서웠고, 초연했다. 마치 첫 사냥을 완벽히 마친, 어린 맹수처럼.
디르크는 손수건으로 진땀을 닦더니 붉은 늑대의 답장을 확인해 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리즈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잠깐 의식이 끊겼던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얬다. 갑갑했던 가슴 속은 후련했다.
한 시간이 지났다. 창밖에서 보병들이 독약이 든 식재료를 마차에 실었다. 아마 영내 초소로 가져가려는 것일 터. 그때쯤 디르크가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서 속삭였다.
“붉은 늑대의 답장이 와 있었어. 여섯 시 안으로 성 뒷문에다가 마차를 준비시킬 거래. 우리는 뒷문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몰래 타면 될 것 같아. 의자 안에 수납 공간이 있는 마차로 준비한다고 해.”
그제야 그리즈가 움직였다.
“아아, 다행이구나.”
“그런데 율리, 혹시 성 뒷문으로 나가는 길도 알고 있어?”
“조금 헤매다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길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거든.”
“나도 이곳에 오래 머물었지만 비밀 공간이 있는지는 몰랐어. 아, 종종 그런 곳을 찾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은 나는데 다들 창고인 줄 알았지, 그게 길인지는 몰랐어. 아마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거야.”
그리즈와 디르크는 벽에 붙어 앉아 소곤소곤 속삭이고 있었다. 그때 고요한 분위기를 깨듯 노크가 울렸다.
“안에 계시지요? 시녀 메이디아입니다.”
그리즈는 일순간 철렁 내려앉는 심장 부근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렸다. 갈색 머리칼의 메이디아가 정중하게 말했다.
“왕녀 저하께서 아가씨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만약 거부하셔도 억지로라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디르크가 말렸지만 경비병들이 그리즈를 억지로 끌고 갔다. 그리즈는 시녀들의 손에 목욕을 당했고, 새 드레스를 억지로 입게 됐다.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어느덧 5시 반이 됐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4층의 소규모 연회장이었다.
그리즈는 끌려가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직사각형 테이블의 끝 상석에 앉아 있던 클라우디아가 그리즈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새 작전을 바꾼 건지 격식을 차린 채였다.
“드디어 왔군요.”
타릴루치 일가와 다른 귀족들이 테이블에 앉은 채로 그리즈를 살펴보았다. 그리즈 역시 그들을 마주 보았다. 6시 이후부터 이곳의 기사들과 귀족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질 거다. 그 전에 마차에 올라야 빠르게 탈출할 수 있을 텐데. 그리즈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식사할 수 없습니다. 며칠 동안이나 꼼짝없이 갇혀 있다 보니 속이 좋지 않습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지요.”
저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연회장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뒤돌자마자 하얀색 양 문이 쿵 닫혔다. 천장의 대형 샹들리에가 찰랑거린다. 신경을 긁는 소음 사이로 클라우디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부디 즐겁게 식사했으면 좋겠군요.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죠.”
그리즈는 이마에 난 진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바늘로 찌르는 듯 등이 따가웠다.
“협박입니까?”
살짝 뒤를 돌자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게 보였다. 클라우디아가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그래도 그리즈가 앉지 않자 비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스테판 예비 후작이 조금 전에 성을 나섰습니다. 어디로 향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베아트릭스가 느긋이 홍차 향을 음미하며 물었다.
“어디로 향했습니까, 왕녀 저하.”
클라우디아가 상석에서 유유히 일어났다. 금발과 잘 어울리는 분홍색 보석 티아라가 찬란하게 빛났다.
“스테판 예비 후작이 조금 전 제게 중요한 사실을 알리더군요. 저 여인을 오르파담 매음굴에서 사 와서 율리아나로 둔갑시켰다고 합니다. 상심한 어머니를 병상에서 일으키기 위해서 말이죠.”
베아트릭스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과장되게 놀라는 척했다.
“그런, 그럼 저 자가 매춘부라는 말씀이십니까?”
클라우디아는 영롱한 빛깔의 진주 팔찌를 여유롭게 매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맞습니다. 하물며 저 여인이 바이렌하그 대공을 유혹해 그랑디아와 전쟁을 일으키려 한 역적이라고 합니다. 스테판 예비 후작은 그걸 막으려다가 누명을 쓰고 그랑디아로 오게 된 겁니다.”
식사에 초대된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리즈를 노려봤다.
“정말이지 악마가 따로 없군요.”
결국 클라우디아가 스테판에게 권력을 나눠 주기로 약속한 눈치였다. 압도적으로 이길 재판을 지켜보고 소문내게 하기 위해 타국의 귀족들도 초대한 것 같았다. 몇몇 손님들의 드레스 복식이 이국적이었다. 그들을 설득하듯 클라우디아가 똑똑히 말을 이었다.
“스테판 예비 후작은 저 여인이 더러운 창부이자 이교 행위로 멸문당한 왕족이라는 걸 증명해줄 증인을 데리러 갔습니다. 사실 정말 불쾌합니다. 천민들과 몸을 섞었을 창부와 한 방에 있게 될 날이 오다니요? 내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 줄 겁니다.”
그리즈는 얼음물에 처박힌 기분을 느꼈다. 피부는 차갑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뛴다. 귓전에서 심장 소리가 들리는데 일정한 박자가 없었다. 내쉬는 숨이 심장박동에 떠밀려 훅훅 터진다. 시야에 검은 점들이 환각처럼 생기기 시작했다.
정신을 놓으면 이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안 돼, 아직은. 그리즈는 부서질 듯한 마음을 다잡으며 이겨냈다. 곧 식사가 도착할 것이다. 고고히 버티고 있으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클라우디아를 보게 될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에 찌릿한 전율이 일렁인다. 굳게 닫혔던 그리즈의 입술이 힘 있게 열렸다.
“숙부의 말을 믿습니까?”
더 이상 누구에게도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피해자가 되어 울고 싶지도 않았다. 배신당해 좌절하는 일도 지겨웠다. 그런 건 이곳에 오기 전까지 충분히 겪었으니까.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배에 있던 매음굴 낙인 또한 내 손으로 지워 버렸는데 두려울 게 뭘까. 옛날처럼 네 말에 휘둘리며 전전긍긍할 것 같아?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빛나기 시작했다.
“다들 알고 계십니까? 나의 숙부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가문을 배신했습니다.”
바이렌하그에서 울며불며 유지하려 애썼던 자세가 이제야 빛을 발한다. 고개를 꼿꼿이 든 그리즈는 귀족들을 고고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숙부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도 할 겁니다. 할머니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마저 박차고 그랑디아로 넘어온 사람이니 말이지요.”
클라우디아가 픽 웃었다.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었지만 눈빛엔 당혹감이 깊게 배어 있었다. 그녀의 말을 반박하고 싶어 하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어디 한번 떠들어 봐. 그리즈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랑디아의 식량난 때문에 볼모로 잡혀 온 돈줄이자 피해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런 피해는 여러분들도 입을 수 있습니다.”
내내 잠자코 있던 디르크의 부친이 목덜미를 붉히며 고함쳤다.
“입 닥치거라!”
화기애애했던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다. 미동 않던 그리즈는 창 너머 탑의 시계를 주시했다. 5시 40분. 곧 그랑디아의 병사들이 죽어 나갈 거다. 바이렌하그에서 납치해온 대공 영매는 방을 나가지 않았고, 독약병은 베아트릭스의 방에 있다.
이제, 어쩔 거지? 클라우디아와 디르크의 부친, 베아트릭스를 보는 그리즈의 눈매가 예리하게 좁혀졌다.
입술을 버벅거리던 클라우디아가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저, 저 창부가 저런 식으로 바이렌하그 대공도 유혹하여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겁니다.”
그때 시종과 시녀들이 노크하고는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흥분감을 가라앉히려는 듯 클라우디아가 심호흡하고는 저녁 식사로 사람들의 관심을 돌렸다.
“어제 스토멘에서 특별히 공수해 온 식재료로 식탁을 꾸렸습니다. 다들 시장하실 테니 식사를 즐겨 주시지요.”
스토멘? 스토멘이면 그랑디아 남부에 있는 바닷가 마을인데?
불길한 예감이 그리즈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순간 시종이 거대한 접시를 들자 시종장이 디쉬 커버를 열며 말했다.
“메인 요리는 소금에 절인 치즈 크랩입니다.”
그리즈가 요리를 제대로 확인하려 식탁 앞에 섰다. 해산물 스파게티, 정어리구이, 조개 샐러드 등이 식탁 위에 줄줄이 세팅됐다. 어디에도 고기 요리는 없었다. 독약을 먹고 가장 먼저 쓰러져야 할 자들이 살아 있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리즈가 쓰러질 듯해 빈 의자에 앉았을 무렵 클라우디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스토멘산 최고급 진입니다. 도수가 높아서 조금만 먹어도 취하니 적당히 즐겨 주시지요.”
포도주도 없다니. 그리즈는 열 명이 넘는 귀족들을 불안정하게 주시했다. 디르크의 부친과 베아트릭스가 흡족하게 미소 짓는 중이다.
빨간 머리 시녀 두 명이 개인 접시에 치즈 크랩을 놓아 주기 시작했다. 연회장에 갇힌 이방인 그리즈는 새로운 계획을 바삐 짜기 시작했다.
그때 왼쪽 출입문이 열리고 문관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급하게 들어왔다. 그러곤 클라우디아에게 귓속말했다.
“왕녀 저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손님…?
클라우디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손님이라니?”
문관이 갈색 손수건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귓속말했다. 클라우디아는 치즈 크랩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멍하게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무언가가 쿵! 하며 출입문에 부딪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집중됐다. 그리즈 역시 고개 돌려 문 쪽을 주시했다.
문이 열리자 무척 크고 어두운 그림자가 바닥에 새겨진다. 그림자는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점점 거대해졌다.
문 사이로 손님의 형체가 드러나자 그리즈는 숨을 멈췄다. 가장 먼저 사내의 흑발이 보였다. 얼굴에는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였다.
갑옷을 입은 사내의 팔뚝에 감긴 대공 휘장이 펄럭인다. 기도하는 성녀를 지키는 첫 번째 검이 빛났다. 바이렌하그 대공만이 찰 수 있는 표식.
새파랗게 굶주린 그의 눈이 그리즈 베네딕트를 찾았다.
사흘 전, 새벽 바이렌하그 대공저.
며칠 전까지 봉오리에 불과했던 작약이 개화했다. 열린 그녀의 방 창문으로 작약 향기가 진하게 풍겨 들어왔다.
비아누트는 그 바람이 그녀가 있는 곳에서 온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그래야만 머릿속이 편해지는 까닭이다.
그녀의 존재감을 느낀 까닭에 그는 잠시 나른해졌고, 더 공허해졌다. 그의 하루는 늘 그렇게 시작됐다.
어느덧 봄의 향기가 짙어졌다. 봄, 전쟁의 계절. 지금쯤 치열하게 전쟁하고 돌아왔을 시간.
비아누트는 다른 의미로 전쟁하고 있었다. 목욕한 후 연회장을 찾아서 그녀가 앉았던 의자를 바라봤다. 유독 긴장했던 모습과, 하얀 손난로를 안겨 줬던 순간의 그녀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는 기억 속에서 그녀를 짜내다가 가족 석상실로 향했다. 그곳에 발 들이면 베네딕트의 자장가가 들려왔으므로.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그녀를 찾다가 언덕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두막에서 선물처럼 떨어져 내렸던 작은 몸을 떠올렸다.
바람은 그때처럼 향기로운데 그녀는 없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서야 그는 저벅저벅 걸어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창틀에 앉아 정원의 벤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회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허상이 보이는 것 같다. 언젠가 그 끝이 귀를 간질였던 감각에 다시금 귀 끝이 뜨거워지는 듯도 했다.
비아누트는 며칠간을 그렇게 살았다. 저택 곳곳을 둘러볼 때마다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와닿을 뿐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가 출타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녀가 확신했었다. 샤토에서 돌아오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했기에.
오전에는 견딜 만했다. 향긋한 봄바람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무심코 뒤돌아볼 것 같았으므로.
해가 뜨면 그는 노르드발츠 전역을 돌았다. 인근 야산들과 숲, 항만, 바다 건너 아레하를 수색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우려 속에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바이렌하그의 젊은 대공이 여동생을 사랑한 나머지 이성을 잃었다고.
자세한 내막을 아는 쿠엔틴조차 비아누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십여 년간 그리워했던 첫사랑을 만난 직후였다. 그가 그녀의 존재를 안 것은, 그러니까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그들의 우려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천국에 가기 위해 기도한다. 그곳에 가면 행복할 것 같다는 예감만으로. 그렇게 10년, 20년, 아니 한평생을 바친다.
그에게는 그렇게 기도하다가 천국의 문턱에 다다른 상황과 비슷했다. 부드러운 빛을 느끼고, 기분 좋은 바람의 향기를 맡고, 안락함을 느끼던 찰나였다. 가장 평온했던 날의 향수마저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 발 들이려던 순간 천국이 떠나 버린 것이다. 여전히 그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한다. 이미 조금 맛보았기에 굶주린 채로 찾아 헤매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어긋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바이렌하그 대공은 강하고, 금욕적이고, 늘 바른 판단을 내려 왔다. 요새 하루가 멀게 몸에 피를 묻히지만 불필요한 살인은 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됐다.
그러나 정작 그는 날이 어두워지면 봄 송이에 취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그녀의 환상을 보고는 흥분 상태로 눈을 뜬다. 그녀가 가까이에 있었을 때는 넘쳤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까닭이다.
그는 깊은 허기 때문에 묵직해진 아래를 내려다보곤 했다. 그리고 뜨거운 지옥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피부의 감촉을, 표정을 떠올리며 달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헤아릴 수 없게 사정한 후에야 이성을 되찾는다. 정서적인 불만족을 정욕으로 해소하는 성벽이 생긴 것도 같았다. 새벽, 짐승처럼 온몸을 눅눅하게 적시고서야 눈을 붙일 수 있으므로.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녀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바이렌하그 광장에서의 유인책을 써 봐도 무의미했다.
그날 새벽 쿠엔틴이, 바이렌하그 산에서 그녀를 닮은 여인이 한 무리의 사내들과 나타났었다고 보고했다. 그때쯤 비아누트는 노르드발츠 일대를 수색하느라 넘겨 뒀던 오류를 직시했다.
그녀가 첫사랑과 떠났다는 소문이 저택 내에 돌고 있었다. 소문의 진원지를 찾자 하녀장 로렐이 나왔다. 그의 추궁에 로렐은 눈물을 머금고 사죄를 반복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그리즈 베네딕트가 앉곤 했던 벤치였다. 그가 이미 무수히도 많은 그랑디아의 첩자를 죽였던 자리. 느긋이 기다리던 비아누트는 검을 빼 들었다.
“원한다면.”
로렐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경직됐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조모의 방을 태연히 주시했다.
하녀들이 발을 동동 굴리는 복도 창 안에서 조모의 방문이 열렸다. 백발의 여인이 빠르게 걸어 나왔다.
역시. 그는 하녀 장이 자의로 그런 소문을 냈다고 여기지 않았다. 소문 때문에 목이 잘려 나간 사람들을 봐 온 자가 입조심을 하지 않은 게 모순적이지 않나.
조모가 그리즈 베네딕트의 정체를 눈치챈 건 짐작하고 있었다. 전쟁 준비로 소홀히 대처했던 게 실수였다. 타릴루치만큼 위협이 될 줄 모르고.
검을 거두자 서러운 울음소리가 멈췄다. 그 뒤에서 조모의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은 대공을 전쟁에서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말은 비아누트가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기가 막힌 말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서서히 질식해 가고 있었으므로. 조모는 그의 구원이 되지 못했다.
“율리아나를, 협박해서 데리고 가신 겁니까.”
“아뇨, 제 발로 떠났습니다.”
“혼자 보내셨습니까.”
“친히 검은 천사를 붙였습니다.”
검은 천사는 바이렌하그 대공을 닮았기로 유명한 자였다. 단지 경호를 맡겼다기에는 조모의 의도가 명확하게 보였다. 비아누트가 의자에 등을 기대어 조모를 주시하다가 미간을 좁혔다.
“장난이 심하시군요, 할머니.”
“왜요, 불안하십니까?”
불안하다니. 도피에 지친 그녀가 자신을 닮은 사내와 바람이라도 피웠을까 봐?
비아누트는 그녀가 떠난 지 사흘 후, 그는 그녀의 방 책상에서 박제 나비 액자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주제넘은 꿈을 꿨다는 쪽지를 남긴 그녀가, 떠나면서도 그를 탐냈다는 증거였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이다. 그리고 비아누트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불안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전쟁터에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뒤흔들었을 뿐이니 말이다. 기꺼이 당해 줄 수 있었다. 그게 그녀가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를 위해 벌인 일이라면.
그는 다른 것이 불안했다. 그의 몸 반도 안 되는 작은 몸으로 고행할 그녀가 불안했다. 아마도 지금쯤 떠돌이 짐승처럼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헤매고 있을 거다. 돈과 권력, 기꺼이 목숨 또한 아끼지 않으려던 사내 대신 나비 액자를 챙긴 것으로 만족하면서.
비아누트는 욕심이 없다는 게 그녀의 단점이 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샤토로 출정하던 날 그녀가 걸어서 떠나지 못하도록 밤새 괴롭힐걸.
그의 입가에 어지러운 원망이 어렸다. 그러나 눈치채지 못한 조모는 집요하게 그를 몰아세우려 했다.
“대공, 다시 한번 묻지요. 그 아이가 대공과 닮은 사내와 함께 있는 게 불안하십니까?”
그녀가 이 밤에도 다른 사내와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속내가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검은 천사는 대공의 여인을 건드릴 만큼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다. 사실 비아누트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 같기도 했다.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든, 그녀를 찾아 곁에 둘 테니까. 추궁은 나중 문제였다. 이를 지그시 문 그는 싸늘하게 반문했다.
“할머니께서는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조금도 불안하지 않은지 궁금했다. 손자가 단 하루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런 일을 벌이고도. 그랑디아에 무수히도 많은 적을 진 여인을 고작 몇십 명에게 맡겨 놓고도?
11년 전 슬픈 얼굴로 불탄 시체를 가져와 놓고도.
비아누트는 쿠엔틴에게 지시를 내렸다.
“조모의 방과 기도실을 수색해.”
개인적인 영역까지 침범해서라도 실마리를 찾으라는 명을 덧붙였다. 그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 못 한 듯 놀란 눈치면서도 조모는 막지 않았다. 그녀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렐을 일으켜 세웠을 뿐이다.
한참 뒤, 쿠엔틴이 검은 천사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찾아왔다. 서신 안에는, 전일 새벽 타릴루치의 첩자들에게 습격당해 단원 네 명을 잃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바이렌하그 광장 뒷산 중턱의 민가에서 대기 중이니 단원을 충원해 달라는 요구가 덧붙여져 있다.
그는 쌓인 질문과 분노를 다음으로 미뤘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보니 하루 전에 온 서신이다. 지금도 그녀가 그 민가에 머물고 있을 게 확실했다. 그는 당장 말을 타고 바이렌하그 광장으로 질주했다.
산 중턱에 부상자가 쓰러져 있었다. 민가 앞마당에는 낯선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민가 뒤편의 흙길에 발자국들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자 검은 천사와 심복들이 보였다.
젖은 흙바닥에 마차 바퀴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바퀴 자국의 시작점에는, 보자기와 봄 송이가 핏물에 흠뻑 젖은 채 떨어져 있었다. 마치 그녀가 피 흘리며 버려져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천사는 명백한 실수를 죽음으로 사죄하려 했다. 하지만 비아누트는 그 광경을 보지도 않았다. 기사들에게 마차를 찾으라고 명하고는 첩자 중 숨이 붙어 있는 자를 붙잡아 정보를 짜냈다.
배후에 디르크의 부친이 있다고 했다. 그 놀랍지도 않은 소식과 함께 그는 마차가 다른 국경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정보를 전해 받았다.
해가 뜨기 무섭게 노르드발츠 국왕을 만나 그랑디아 출진 의사를 다시금 밝혔다. 장고하던 국왕은 타릴루치 가문이 이교도라는 증거를 찾는다는 전제하에 2만 기사와 3만 보병, 5천 궁병을 내렸다. 그의 대공 작위가 걸렸다.
소식을 들은 쿠엔틴과 기사단장들은 기뻐했지만 비아누트는 여전히 냉혈한 같았다. 천국을 누리려면 다시 손에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마땅한 시기를 기다리는 게 퍽 지옥 같았으므로.
이틀을 샤토에서 버티자 그는 11년 전부터 비슷한 형벌을 반복해서 받는 착각을 느꼈다. 점점 더 가혹해지는 듯했다.
그렇기에 그는 신의 장난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녀에게 연심을 품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기로 했다. 한 계절의 마주침 끝에 그녀가 영원히 그리워할 봄날의 강렬한 나비가 어떨지.
그러니까 좌절하고, 절망하고, 애태우는 건 이 생애 한 번뿐이다.
비아누트는 가진 모든 걸 태울 의지로 자신의 왕녀에게 향했다. 그녀가 빼앗긴 세월, 나라, 추억을 되찾고 그녀를 영원토록 품에 안고자.
그리즈는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살인귀 같은 사내의 모습이 눈에 각인된다. 탈출 의지는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다급하게 흘러가던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아니, 그가 멈추게 했다. 피에 흠뻑 젖은 얼굴이, 시선을 압도하는 몸이, 진한 살의에 그리즈는 마비되었다.
공간마저 희미해지는 듯했다. 이곳은 어디일까. 탐욕적인 타릴루치가 득실거리는 그랑디아가 아닌 것 같다. 그가 이곳까지 나타날 수가 없는데.
그런 그녀를 뒤흔들 듯 그가 붉은색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을 새겼다. 사내의 미끈한 얼굴에 환희가 깃든다. 그리즈는 바이렌하그에 가득했던 로즈마리 향을 다시금 느꼈다. 일순간 너무 진해져 눈앞이 아득해졌다.
“오, 오라버니? 이곳에는 어떻게….”
심장이 뛰는 건지, 경련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물에 빠졌다가 구조된 듯, 숨이 벅차 헉헉거렸을 뿐이다.
그녀가 말하고, 숨 쉬자 굶주린 눈이 안도했다. 그 눈과 마주하자 그녀 역시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으므로. 뜨끈한 숨결이 뺨에 훅훅 꽂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사람들의 잡담 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기사들조차 검을 빼려 들자 연회장이 새벽처럼 가라앉았다.
“바, 바이렌하그 대공? 이곳엔 어떻게?”
클라우디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타국에서 온 귀족 여인들은 대공의 얼굴을 곁눈질하느라 바빴다.
반면 그리즈는 그에게서 검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비열한 개들이 대공 비아누트의 손에 죽을까 봐 따로 받아둔 듯했다.
그럼에도 태연한 그의 태도가 타릴루치 일가를 극도로 긴장시켰다. 디르크의 부친이 달려 나가서는, 문밖에서 쓰러진 경비병의 검을 뽑아 왔다.
그때 그가 그리즈를 보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누군가의 핏물이 깃든 쇠 신발에서 핏방울이 가늘게 튄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자국이 어렸다. 출입구 밖에서부터 이어진 선득한 족적은 그리즈의 옆에 닿고서야 멈췄다.
이내 연심인지 원망이 담겼는지 모를 저음이 느릿하게 울렸다.
“안녕, 율리아나.”
“…….”
“데리러 왔어. 행복하지 못해서, 내가.”
그리즈의 눈앞에는, 헤맬수록 광기에 물들어 가는 사내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을 마지막 쪽지까지.
제가 너무 주제넘은 꿈을 꾼 것 같습니다. 행복하세요. 그뿐입니다.
피에 젖은 대공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떠졌다. 파란 눈이 그리즈를 주시한다. 비로소 완벽한 목적을 이룬 듯 희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리즈는 추격당하는 듯 위태로워졌다. 그가 샤토에서 바이렌하그로 돌아와 율리아나를 찾고 있다고 얘기 들었었다. 그러다 이성을 놓았다는 얘기와 그가 자신의 심성을 이용해 광장으로 불러내려 했다는 것도 안다.
그리즈는 그랑디아보다 더 먼 곳에 있었어도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됐을 듯한 예감을 느꼈다. 그 사실에 위안이 찾아왔다. 그건 묘한 일이었다.
“오라버니…. 혼자 오셨나요?”
담담하게 말했지만 불안하게 떨리는 입술을 막을 수 없었다. 독약을 먹은 기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하면 이 사내까지 궁지로 몰릴지도 몰랐다.
대공은 그리즈의 옆에 앉아 있던 사내에게 서슬 퍼렇게 말했다.
“비켜, 주겠습니까.”
금발 사내가 도망치듯 일어나 옆으로 빠졌다. 대공은 당연한 듯 그녀의 옆에 앉아 클라우디아를 주시했다.
얼어붙은 채 눈치를 살피던 클라우디아가 짐짓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혼, 혼자 오신 것 같군요. 하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저는 바이렌하그 대공을 초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뜨겁게 맞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일순간 차갑게 움직였다.
“협상하러 왔다고 하니 보내 주더군요. 작은 문제도 있었지만.”
복도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쿵쿵 울렸다. 철컹철컹, 갑옷이 다급히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랑디아의 기사들 같았다. 클라우디아가 문밖으로 그들을 내다보다가 안도하며 물었다.
“협상이라니요?”
그러다 이해하겠다는 듯 고갤 끄덕거리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아아, 대공 영매를 데려가고 싶으신 게로군요? 그랑디아의 국왕 전하께서 요직들과 함께 잠시 출타 중이시어 제가 응대하겠습니다. 차린 건 없지만 대공께서도 식사부터 즐겨 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그는 냅킨을 집어 무릎에 얹고는 볼에 따라진 물에 손을 씻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닦아 내며 그리즈를 주시했다. 클라우디아의 높은 음성이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바이렌하그 대공께서 영매를 무척 귀애하시나 보군요. 그런데 오시는 길에 무엇을 죽이신 겁니까? 설마 사람은 아니겠지요? 우리 그랑디아에서는 살인자를 극형에 처하니 말이지요.”
그는 냅킨에 물을 적시고는 얼굴을 닦으며 클라우디아를 주시했다.
“바이렌하그에서는 납치범도 극형에 처합니다만.”
타릴루치 일가의 시선이 대공에게 꽂혔다. 그리즈 역시 그를 살펴보았다. 눈썹에 세로로 긴 상처가 새겨져 있었고, 콧잔등에도 상처가 길쭉하게 나 있었다.
역시 그 상처를 살펴보던 클라우디아는 더없이 평온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뭐, 어쨌든 오늘 저는 무척 기쁩니다. 바이렌하그에서 손님들도 오셨고, 3년 전에 주문한 새 티아라도 받게 된 덕분이지요.”
상황만 살피던 베아트릭스가 그제야 입술을 열었다.
“정말 아름다운 티아라군요, 왕녀 저하. 보는 귀족마다 왕녀 저하를 담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3단으로 구성된 티아라였다. 티아라 전체에 수천 개의 핑크 다이아몬드가 수놓아져 있었다.
하지만 핑크 다이아몬드라니. 그걸 채굴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피가 배어 붉게 물든 거라는 소문이 돌 만큼 불길한 보석인데.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찬 귀족 여인이 부군에게 살해당했던 까닭에 죽음의 다이아몬드라고도 불리는 값비싼 보석이다.
모르지 않을 텐데도 클라우디아는 도도하게 미소 지으며 재력과 배짱을 과시했다.
“나는 그런 소문이 정말 유치하게 느껴집니다. 고작 물건 따위가 사람을 죽게 만들다니요? 뭐, 그렇다 해도 전지전능하신 우리의 신께서 지켜 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건배하죠.”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즈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식사장이라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리즈가 얼굴에서 불안을 지우며 일부러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듯, 며칠 내내 마차에 갇혀 있었던 까닭에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식사 생각은 없습니다.”
말 한 번 더듬지 않는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던 대공이 길쭉한 손으로 자신의 눈썹 상처를 매만졌다. 어디선가 또 개 짖는 소리가 났다.
클라우디아는 이를 지그시 물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귀족끼리의 대화는 끊지 않는 게 관례라고 생각한 탓인 듯했다.
“대공 영매께서 잘생기고 훤칠한 오라버니를 따라가고 싶으셔서 마음이 급하신가 봅니다? 바이렌하그 영내에 추악한 소문이 돌던데 조금 수상하군요.”
그의 입술이 픽 웃었다.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나는군요.”
붉은 머리 시녀들이 다시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식어 버린 음식들을 교체하고 술잔을 채웠다. 어느덧 6시. 그리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반면 클라우디아는 티아라 덕분인지 기분 좋게 응수했다.
“그럼 대공께서 내놓으실 제안이 무엇인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준비한 음식이 아까우니 식사하실 분들은 하도록 하세요.”
이내 클라우디아는 시녀가 따로 준비한 육포 접시를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곤 시녀가 창문을 열자 창밖으로 육포를 툭툭 던지며 말했다.
“1층에 나의 귀여운 아이들이 있습니다. 브리튼에서 데려온 투견인데 성격이 맹렬해서 사람도 물어뜯지요. 물론 내게는 똥개처럼 꼬리를 흔듭니다.”
“…….”
“나는 그 아이들을 심심하게 만들지 않고자 종종 더러운 범죄자들을 장난감으로 주고 있어요. 저 여인이 대공 영매가 될지, 더러운 범죄자가 될지는 협상 내용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대공 비아누트가 얇은 사슬 장갑을 벗고는 허리에 찬 가죽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구석에서 기다리던 문관이 봉투를 갖고 클라우디아 앞에 섰다. 클라우디아가 봉투의 인장을 뜯고는 서류를 부드럽게 훑었다.
“밀 200수레와 젖소 500마리, 말 100필과 천만 골드라…. 나쁘지는 않군요.”
그리즈는 기막힌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한 영지의 1년 이상 수익이다. 그 어마어마한 조건이 나쁘지는 않다고?
대공이 깔끔하게 이행하겠다는 듯 여유로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유리한 입장의 클라우디아는 호락호락하게 응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정정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랑디아는 대공 영매를 납치한 게 아닙니다. 가출해서 길 잃은 영매를 보호했을 뿐이지요. 그러니 그에 따른 보상, 금화 3천만과 약간의 조약도 해 주셔야겠습니다.”
대공은 클라우디아가 더한 이득을 챙기려들 줄 알았다는 듯 넌지시 물었다.
“무슨 조약 말입니까.”
“음… 그러니까….”
잠시 말을 흐렸던 클라우디아가 문관과 귓속말을 주고받던 끝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바이렌하그의 플뢰도르 통치권을 우리에게 넘겨주면 좋겠군요. 물론 플뢰도르 내의 고대 성당과 다섯 개의 기사단도 그랑디아가 인수하려 합니다.”
납치한 여인을 돌려주며 클라우디아는 천문학적인 보상액을 요구했다. 바이렌하그의 군사력을 와해시킬 작정으로 요구하는 것일 터.
대공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다 픽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플뢰도르의 기사단은 나를 섬깁니다. 타릴루치에게 충성을 맹세할 자가 없을 겁니다.”
고고한 그의 태도에 클라우디아 역시 미소 지었다.
“기사들은 개와 비슷해요. 맛있는 음식을 주고 잘 길들이면 누구나 섬기죠.”
대공의 입가에 서늘한 보조개가 드리웠다.
“그렇게 개에게 물려 죽은 주인이 많습니다.”
이를 질끈 문 클라우디아는 날 선 눈빛을 드러냈다.
“제안에 응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면 조카를 원하는 음흉한 숙부에게 영매를 보낼 생각이니까요.”
대화를 듣던 그리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한다고? 누가 누구를….
그 순간 복도 끝에서부터 허겁지겁 달려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누가 이리도 호들갑일까? 클라우디아의 혼잣말이 들리는 찰나 무장한 기사가 달려 들어왔다.
“왕녀 저하, 큰, 큰일 났습니다! 기사들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있습니다!”
기사는 귀족들의 식사에 끼어든 걸 인지하지 못할 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날 선 검을 쥔 채 출입구에 서 있던 디르크의 부친이 물었다.
“방금 뭐라 하였느냐? 기사들이 피를 토한다고?”
“예, 처음에는 한두 명이 그러더니 갑자기 급속도로 번진 걸 보면 역병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식자재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클라우디아는 대공 비아누트를 보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사단 내의 문제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 닥치도록 해!”
그리즈는 마른 침을 차분히 삼켰다. 올 게 왔다. 침, 침착하자. 불구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살피다가 떠나면 문제 될 게 없겠지.
디르크의 부친이 기사단 사내를 따라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가 성을 흔들었다. 전쟁을 알리는 봉수대들에 불이 일제히 켜졌다. 밖에서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터졌다.
“바이렌하그 군대가 전방 초소에 나타났다! 다들 제 위치로! 빨리!”
기품 있게 포크와 나이프를 쓰던 귀족들이 일제히 멈췄다. 시간이 멎은 듯했다. 그들의 심장을 움켜쥘 것처럼, 땅에서 진동이 쿵! 솟아올랐다.
테이블이 들썩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삐걱, 삐걱. 미리 촛불을 붙여 놓은 샹들리에가 바람 앞의 그네처럼 일렁였다.
쿵, 쿵, 쿵!
발 맞춰 전진하며 방패로 바닥을 치는 진군법이다. 그리즈는 성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대군이 왔다는 걸 느꼈다. 압도당한 심장이 땅의 울림과 엇박자로 뛰었다.
“우! 우!”
기사들의 포효가 하늘을 찔렀다. 하늘마저 파괴할 기세였다. 마침 쩍 갈라진 구름 사이에서 햇빛이 사방으로 번졌다.
놀란 귀족들이 사색이 되어 일어났다. 의자들이 발작하듯 뒤집혀지는 와중에, 클라우디아가 호위병들이 모인 출입구로 달려갔다.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시선이 만감을 담고 있었다. 어떻게? 왜? 그러다 섬뜩하게 멈추며 기사단장에게 꽂혔다.
“식재료? 대체 뭘 먹은 게지? 바이렌하그는 또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게야?”
혼란이 깃든 클라우디아의 눈이 기사단장과 바이렌하그 대공을 번갈아 훑었다. 대공의 속셈을 알아볼 사람이 자신밖에는 없기에 달아날 수도 없고, 조용히 회의할 수도 없는 상황인 거다. 기사단장이 뻘뻘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속삭였다.
“다, 다진 고기 수프와 샐러드 그리고 포도주를 배급했습니다. 포도주는 들통에 있던 원액에 물을 타서 용량을 몇 배로 늘렸을 뿐이라고 합니다.”
가까스로 대화를 엿들은 귀족들이 식탁의 메뉴를 훑었다. 샐러드를 먹은 갈색 머리 귀족이 사색이 되는 찰나, 기사단장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말을 이었다.
“식, 식사를 마친 병사들이 갑자기 목구멍이 너무 뜨겁다고 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음식을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각 생활관에 배급된 후였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병사가 주, 죽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행정실에 들러 전하께 상황을 보고드리라고 명했습니다.”
그리즈는 운동장 같은 식량 창고를 미친 듯이 오갔던 순간을 떠올렸다. 포도주를 수십 통씩 채워 넣은 거대한 나무통마다 독약을 붓고, 쌓인 고기들에 독약을 탄 물을 뿌렸을 땐 사실 두려웠다. 헛수고가 되지는 않을까. 여기서 죽게 되면 얼마나 비통할까. 눈앞이 아찔했다.
어마어마하게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타릴루치의 악행을 막고 이곳을 탈출할 시간을 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병사가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정말 해낸 건가?
온몸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검 한 자루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내가. 내가 정말로 타릴루치의 병력을 막대하게 도려냈다니!
그리즈의 숨이 벅차게 터져 나왔다. 반면 클라우디아의 숨은 내쉴수록 짧고 거칠어졌다.
“정말 바이렌하그 군대가 쳐들어온 게 맞나? 그랑디아에서 바이렌하그까지는 반나절 이상이 걸리는데, 게다가 몇십 개의 초소에서 보고가 들어왔을 터인데?”
기사단장이 역삼각형 모양의 갈색 수염에 묻은 피를 닦으며 소곤거렸다.
“플뢰도르 초소에서 보낸 서신이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하나, 노르드발츠 병력이 진군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바이렌하그 군대는 샤토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클라우디아는 목덜미를 뻘겋게 달구며 이를 으득 물었다.
“이런, 야비한, 망할!”
그러곤 대공 비아누트를 증오하듯 노려보았다.
그의 벽안은 분노로 가득 찬 클라우디아의 목 핏대를 주시했다. 그러다 창 너머 시계탑으로 유유히 시선을 옮겼다. 시계는 커다란 초록색 판에 세 개의 금판이 엇갈려 배치된 모양이다. 금침이 양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봄의 보름날, 오후 6시 30분.
봄이면 저녁 9시는 넘어야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늘이 바이렌하그의 투지를 가리기에 너무나도 밝았다. 살기 가득한 기세에 압도당한 클라우디아가 초조하게 벽을 짚었다.
“바이렌하그 대공, 대체 무슨 속셈인 겁니까? 설마 그랑디아 성에서 죽을 작정으로 오지는 않았을 테고.”
그 순간 출입구에서 사부작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디르크의 부친이 검을 든 채로 다가서며 말했다.
“피를 토한 병사들도, 바이렌하그의 짓이 틀림없습니다. 당장 대공을 잡아 공격을 멈추도록 해야 합니다.”
“…….”
“알베르, 대체 친위대는 언제 오는 게냐!”
초조하게 마른세수를 하던 기사단장이 목에 건 뿔피리를 불었다. 우우우웅! 영역 전쟁에서 위기를 느낀 짐승의 울음 같았다.
이내 기사단장은 자신이 가죽 갑옷을 내려다보고는 대공 비아누트에게 검이 있는지 확인했다.
전신 갑옷만 입은 대공 비아누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로 창 너머만 내다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창유리에 비친 적들을 주시하는 중이다.
바이렌하그 군사들이 진군할 때마다 접시가 들썩거렸다. 대공의 눈동자는 넓은 식탁을 훑었다.
맞은편, 베아트릭스가 앉았던 자리에 나이프가 있었다. 그러나 집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일순간 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그리즈의 팔뚝을 쥐어 일으켰다. 그러곤 갑옷을 입어 더 커진 몸 뒤에 숨겼다. 마치 목적은 그뿐이었다는 듯.
새파란 눈동자가 벽난로 앞에 서 있는 빨간 머리 시녀를 응시했다. 기다렸다는 듯 시녀가 자신의 분홍색 치마를 끌어 올렸다. 날이 갈고리처럼 휜 검이 허벅지에 장착되어 있었다. 검날이 섬뜩하게 빛난다. 그 검이 디르크 부친의 목을 뒤에서 낚아 당겼다.
“큭! 흐….”
튀어나오려던 비명이 다시 삼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디르크 부친의 금색 눈이 깜빡여졌다. 목덜미에 빨간 빗금이 생겼다.
그 사이로 피가 주르륵 떨어진다. 베아트릭스가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아악! 오라버니! 모, 목에서 피가!”
끔찍한 광경에 그리즈는 대공의 갑옷 허리 부분을 강하게 쥐었다. 손에 진땀이 난 까닭에 주르륵 미끄러진다. 클라우디아와 베아트릭스의 절규가 고막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대공 비아누트의 두 발 아래로 머리통이 툭 떨어졌다.
“숙부? 숙부! 아아악! 숙부!”
“오라버니? 오라버니!”
쿵, 쿵! 심장 박동에 맞춰 디르크 부친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창가 벽의 사자머리 석고 조형물까지 시뻘겋게 적셨다. 거구의 몸이 툭 쓰러지며 테이블을 덮친다. 그리즈의 붉은 눈이 피와 뼈와 살에 불과해진 사내를 똑똑히 바라봤다.
그녀는 그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죽음이란 고통스럽고 두렵고 안타깝고 처참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뇌에 들인 시간에 비해 죽음은, 늘 간단했다. 죽음이라는 두 글자만큼이나.
그녀는 자신과 대공의 인생이 오늘 그렇게 간단히 정의되길 바라지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려 정신없이 노력했다. 대공은 그냥 쳐다봤을 뿐이지 않나? 빨간 머리 시녀는 누구지? 어째서 디르크의 부친을 죽인 거지?
후들거리는 무릎에 힘주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 순간 출입구에 서 있던, 또 다른 붉은 머리 시녀가 단검을 클라우디아의 목에 대며 뒤에서 제압했다.
“조용히 따라와! 네년도 저놈처럼 썰리기 전에.”
그랑디아의 호위병이 누구를 경계해야 할지 모르고 몸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꿨다. 클라우디아가 질질 끌려 창가까지 들어오며 격노했다.
“망할, 젠장할!”
이어 미친 듯이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년들, 네년들이 감히?”
“…….”
“이런, 이따위 짓을 꾸미려고 대공 영매와 함께 식사할 거냐고 물은 게냐? 대체 어떤 놈이 첩자를 입궁시킨 게야? 대체, 대체! 아악, 망할!”
클라우디아를 제압한 여인이 검날로 목을 쓱 긁으며 싸늘하게 응수했다.
“입 닥쳐.”
그때 대공의 앞에 서 있던 시녀가 하얀 테이블보를 걷었다. 그러곤 그 안에서 장검을 꺼내어 두 손으로 받쳤다.
빨간 야생마 같던 여인의 머리가 온순하게 조아려졌다. 그녀의 잇새에서 충직한 목소리가 낮게 번졌다.
“신, 붉은 늑대. 주인을 뵙습니다.”
그리즈가 눈을 크게 떴다. 붉은 늑대? 이 여인들이 붉은 늑대였다고?
대공 비아누트는 검집에서 검을 빼 들어, 날을 확인했다. 클라우디아는 몸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망할 친위대는 언제 오는 거야! 젠장할 똥개 새끼들! 밥 처먹인 보람도 없는 것들!”
그 찰나 긴 복도에서 사내들의 발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쇳소리도 함께였다. 무장한 왕실 친위대였다.
그런데 서른 명도 되지 않았다. 친위대의 인력이 독약 때문에 분산된 것 같았다. 그리즈는 가슴 속에서 진한 전율을 느꼈다.
그 순간 키 큰 붉은 늑대가 클라우디아를 내보이며 검으로 목덜미를 슬슬 긁었다.
“출입문을 넘어 들어오면 너희들의 왕녀는 죽을 거야. 이럴 시간에 탈출한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겠군.”
바이렌하그의 대군이 그랑디아 성으로 진군하는 중이다. 그런데 성을 방어하기도 전에 그랑디아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친위대는 투지와 충성심을 잃었다. 그 점을 느낀 기사단장이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감히, 적들의 말을 들을 셈이냐? 투항하는 새끼들은 내 손에 죽을 거다.”
대공 비아누트의 입술이 비스듬히 틀어졌다. 그때 복도에서 거구의 하인들이 스무 명 가까이 나타났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손에는 검과 도끼, 철퇴 등의 섬뜩한 무기를 쥔 게 보였다.
클라우디아가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저, 저자들은 뭐지? 병력을 채우기 위해 온 게냐?”
기사단장이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하인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친위대를 향해 내달린다. 사람들이 도륙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대공의 심복들 같았다. 그리즈는 복도에 있던 시선을 거뒀다.
베아트릭스가 디르크 부친의 시체만 덧없이 바라보는 게 보였다. 타릴루치 일가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벽에 달라붙어 있다. 타국 귀족 여인들은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서 발발 떠는 중이다.
친위대를 전멸시킨 대공의 심복들이 밧줄을 가져와서 그들을 묶기 시작했다. 심복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대공 앞에 반 무릎을 꿇었다.
“복무 기사단 2대대장, 라이히.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살인귀처럼 라이히의 온몸이 새빨갰다. 그 때문에 유독 도드라진 눈 흰자를 내려다보며 대공이 물었다.
“밖의 상황을 전해.”
라이히가 예를 갖추곤 일어나 말했다.
“성내 병사들 반 이상이 쓰러졌고, 살아남은 자들은 동료들을 먹일 물을 퍼 오느라 바쁩니다. 정보병들에 의하면, 아군도 샤토 초소 쪽 병사들이 전멸한 까닭에 일찍 도착한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성벽을 지키는 병력은 5천이 채 되지 않습니다.”
“누가 한 짓이지? 고맙기는 하군.”
“그 점은 아직 알 수 없으나 덕분에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해졌습니다. 신께서 도우신 걸까요?”
작게 이어지는 대화를 듣던 그리즈가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다 대공에게 속삭였다.
“제가… 제가 고기와 포도주에 독을 탔습니다.”
흡족해하던 그의 뒤태가 일순간 굳는 듯했다. 돌아본 새파란 시선이 그리즈에게로 혼란스럽게 쏟아져 내렸다.
믿을 수 없는 얘기에 ‘네가?’라고 되묻는 듯했다. 그동안 주눅 들고 회피하고, 말 더듬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던 여인이 설마 그랬을 리가.
애초에 이 일로 그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착해서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인이 취향이라면, 그 취향에 완벽히 어긋나는 일을 저지른 것이므로.
그러나 그리즈는 저택을 떠나며 완벽한 방패를 잃은 상황이었다. 너무 두려웠고 절박했고 분노로 속이 끓었다. 타릴루치 가문에게 두 번은 짓밟힐 수 없었고, 짓밟히는 사람들도 너무 가여웠다. 꼭 매음굴에서의 마리아를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야만 했어요.”
잇새에서 번진 목소리가 퍽 당당했다. 당혹스러운 상황에서도 귀족적 미소를 유지하던 그의 입술이 굳었다. 그의 눈은 앞에 선 여인이 그녀가 맞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우려가 어린 눈이 묻는다.
그러다 들켰으면, 감옥에라도 갇혔으면, 큰일이라도 당했으면?
이내 그는 오늘따라 유독 붉은 그리즈의 눈을 응시했다.
“설마 네가 그랬을 리가.”
그리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시선을 피했다.
“제가 했어요.”
그의 눈은 그녀의 시선을 갈구하듯 깊어졌다. 그러다 집을 떠나기 전과 달라진 눈동자 색을 훑었다. 그동안 억눌러 왔던 열의를 일시에 태우듯 붉은색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생기 넘쳤다.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오늘에 가장 강렬히 저항하는 듯했다.
그의 눈은 책망을 잊었다. 그리고 낯선 열기에 믿을 수 없이 빠져들어 갔다.
단단한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부재로 쌓인 얘기들, 그 외에도 비정상적으로 달아오른 감정들. 굳게 맞물렸던 그의 입술이 뒤늦게 열렸다.
“가출하더니 악마가 다 됐군.”
딱 거기까지였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가장 조용한 곳에 놓아둔 듯. 그가 가로로 긴 눈매를 찌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성벽 상황은 어때.”
그가 등졌던 라이히가 옆으로 와서 보고를 이어 갔다.
“우리 측은 방패 병을 선두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대열을 맞춰 전차병과 포병을 이동시키고도 있습니다. 공성용 사다리가 도착하는 대로 준비가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밧줄로 손발이 묶인 클라우디아를 보며 물었다.
“투항할 생각이 있는지 묻고 싶군.”
대공의 서늘한 눈가에 살기가 어렸다. 다른 사람처럼 굴던 그리즈가 숨을 꾹 삼켰다.
예전부터 저 눈이 자신을 마주 볼 때면 그리즈는 깊은 두려움을 느꼈었다. 무감각한 냉혈한의 눈이, 때로는 어떤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으므로.
그러나 클라우디아는 제 분을 삭이느라 그 살기를 느끼지 못했다.
“투항? 웃기지도 않는 얘기야. 나의 그랑디아는 절대로 네놈들에게 지지 않아. 아버지께서 군대를 이끌고 오실 테니까. 그때가 되면 네놈들은 가루가 되어 있을 게야! 특히 바이렌하그 대공, 네놈은 몸통에 장검 두 개가 박혀 죽을 운명이지. 우리가 왕좌를 얻었을 때처럼 분명한 계시를 받았으니 무사히 넘어갈 리가 없어.”
클라우디아는 정말 일어날 일을 예견하듯 확신에 차 있었다. 저주 같기도 했다. 그리즈는 불길한 예감을 막연히 느꼈다.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단지 관례상 항복 의사를 물었던 듯, 라이히에게 지시했다.
“계획대로 진행해.”
그때 젊은 사내가 다급히 걸어와 라이히에게 귓속말했다. 라이히는 사내가 말한 정보를 대공에게 작게 알렸다.
“전하, 수하들이 퇴로의 정리를 마쳤습니다.”
귓속말 같은 소곤거림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랑디아 동부의 타릴루치 본가로 적군이 집결 중이라고 합니다. 빈젤과 막시마, 카시라트, 토스카르의 공작가와 그랑디아 각지의 후작가 등, 베네딕트 가문을 몰아냈던 반정 세력이 투합한 듯합니다. 집결하여 진군하는 걸 막기 위해 쿠엔틴 경께서 군사를 이끌고 먼저 동부로 출발하셨습니다.”
클라우디아는 출입구에 무덤처럼 쌓인 시체들을 주시하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지? 비열하게 이용하려 들지 말고 차라리 죽이지그래?”
손톱만큼의 여유가 깃든 목소리가 피의 연회장에 번졌다. 아마 자신이 존귀한 포로라고 여긴 덕분일 터. 물론 대공의 견해는 아주 많이 달랐다.
“죽이다니. 남은 평생 빌어먹게 해야지.”
그러기 위해 굳이 지옥까지 발들인 사람 같았다. 선득한 그를 보며 클라우디아의 입매가 표독스럽게 굳었다.
“바이렌하그 대공, 왜 그렇게 내게 화가 났지? 저년이 네가 찾아 헤매던 그리즈 베네딕트가 맞기 때문인가?”
얘기를 듣던 그리즈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년, 저년. 왕위를 찬탈한 주제에 감히. 그리즈는 대공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한 발 옆으로 나왔다.
“그래, 맞아.”
위풍당당한 기세와는 달리 대답은 퍽 담담했다. 뒤이어 그리즈의 입가에 멸시 어린 미소까지 어리자 클라우디아가 혼절할 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길길이 날뛰었다.
“맞아? 맞다고? 네가 그리즈 베네딕트가 맞아?”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디아의 눈에 붉은 핏발이 폭발적으로 얽혔다.
“역시,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저년은 그리즈 베네딕트가 맞았어.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망할, 명분이 뭐라고!”
루비 목걸이를 건 클라우디아의 목이 보석처럼 붉어졌다. 그리즈 베네딕트의 존재를 확인하고 극도로 흥분한 까닭일 터.
“바이렌하그 대공, 타릴루치가 왕좌에 오르지 않았다면 저년과 정상적으로 만날 수 있었을 것 같아? 내가 보기엔 불가능해. 저 울보에게 날 선 검 같은 당신은 그저 두려운 존재일 테니까. 당신을 아주 잘 이용하고서 달아날 거라는 걸 내 장담하지. 아니면 자상한 사내들과 몰래 붙어먹을 거야. 그리즈 베네딕트는 호의에 유독 쉬운 앞마당 강아지 같은 애였거든.”
대공을 흔들어 시간을 끌려는 시도였다. 다만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리즈는 곧장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 온순한 성격 때문에 클라우디아와 스스럼없이 지냈고, 폐위당하고 나서도 순순히 탑에 갇혔다. 그 후 매음굴까지 제 발로 향했고, 할머니 파올라에게까지 정을 주었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악의 없는 성격을 잘 이용했던 건 너였잖아. 내가 누굴 이용한다고…?
늘 주눅 들기 바빴던 그리즈가 눈을 똑바로 떴다. 클라우디아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대공보다 그리즈의 말이 빨랐다.
“네가 말한 앞마당 강아지. 그 강아지 때문에 성 병력이 반 이상 날아간 건 알아?”
“뭐?”
“병사들이 뭘 먹고 죽었을 것 같니.”
클라우디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식었다.
“무슨 소리지? 음식에 문제가 있었던 게 너 때문이라는 말이야?”
“…….”
“방에 갇혀 있었는데 네가 어떻게? 헛소리 그만 지껄여!”
그리즈가 싸늘한 얼굴을 했다. 온갖 보석들을 시녀들에게 선물하고 아버지께 벌을 받던 울보가 그럴 줄은 몰랐겠지. 이제 고작 스무 살에, 어렸을 때도 어리숙했으니 방심했겠지. 그녀의 눈앞엔 지난 11년의 수모가 빠르게 스쳤다. 담담했던 눈동자에 진한 독기가 어렸다.
“내가 평생 벌벌 떨 줄 알았어? 그것도 내 부모님을 죽인 네 가문 앞에서?”
그 광경을 본 클라우디아는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미친, 미친! 너 지금 크게 실수한 거야. 왠지 알아? 아버지께서 다시 성을 장악하면 내가 너를 찢어 죽일 거니까!”
찢어 죽인다고? 그리즈의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였다.
“이 방에 네 숙부의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 근데 그거 아니? 내가 11년 전에 맡았던 피 냄새에는 발끝도 못 미쳐. 내쉬는 숨이 비리고 역할 정도였어. 아침에 봤던 친척들과 시종들 그리고 시녀들의 피 냄새를 맡고 비참하게 헛구역질하는 기분이란 게 어떤지, 너희들도 곧 알게 될 거야.”
식량 창고에서 독약을 타기 전에는 심경이 괴로웠다. 그러나 그리즈는 11년 전에 맡았던 진한 피 냄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참상을 만든 타릴루치 일가와 동조자들이 함께 몰살하길 바랐다. 남의 불행을 파먹고 사는 벌레들! 너희들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매일매일 피눈물을 흘릴 테니까.
그리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어때, 지금도 웃기니?”
분노에 몸을 떤 그리즈가 클라우디아의 티아라를 사정없이 벗겨 냈다. 이걸 몇 년 동안이나 기다렸다지? 고작 이런 짓이나 하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짓밟은 거니?
우리가 해냈다며 환하게 웃던 클라우디아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그녀에게서 엄청난 금화와 보석들, 장엄한 왕좌를 완벽히 뺏고 싶었다.
그리즈는 이제 자신이 웃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는 걸 느꼈다. 마른 손에 쥐어졌던 티아라가 개들의 육포처럼 창밖으로 내밀어졌다.
“웃으려면 마음껏 웃어. 어차피 너는 끝났어, 클라우디아.”
클라우디아가 앞으로 묶인 손을 올려, 헝클어진 금발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그러곤 그리즈의 손끝에 걸린 티아라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내, 내 왕관, 3년이나 고대했던 내 왕관, 내놔.”
절박하게 묻는 듯했다. 설마 이 성 만큼의 가치가 있는 귀품을 밖으로 내던질 건 아니지? 감히 너 따위가?
클라우디아가 부들부들 떨수록 그리즈는 진한 희열을 느끼며 생각했다. 너도 소중한 게 눈앞에서 짓밟히는 심정을 한 번 느껴 봐. 내가 느낀 좌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그리즈가 검지에 걸쳤던 티아라를 보란 듯이 툭 떨어트렸다. 그 광경을 멍하게 본 클라우디아가 이를 으득 물며 일순간 그리즈에게 달려들었다.
“망할, 망할 년! 죽어, 죽어!”
밧줄에 묶인 채 잠자코 있던 베아트릭스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왕녀 저하, 왕녀 저하! 고정하십….”
붉은 늑대가 그리즈를 보호하듯 안고서 클라우디아의 손을 쳐냈다. 중심을 잃은 클라우디아의 엉덩이가 창틀 뒤로 쭉 빠졌다.
“아악, 아아악!”
클라우디아가 신은 하얀 구두의 두 바닥이 창틀에 얹어진 채로 보였던 게 마지막이었다. 마른 몸이 뒤로 쏠리며 미끄러지듯 창밖으로 떨어졌다. 개 짖는 소리와 비명이 맹렬하게 뒤섞였다. 아니, 사람의 비명이 아니라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그리즈는 지난 11년이 맺힌 눈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끔찍하다는 듯 흔들리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대공이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확고한 대처가 흡족한 기색이지만, 그리즈 베네딕트가 맞는지 자꾸 얼굴을 확인한다.
그러다 탑의 시계를 한 번 더 보고는 라이히에게 지시했다.
“살아 있는지 확인해서 데려오도록.”
라이히는 명을 받든 후 부하들을 시켜, 밧줄로 줄줄이 엮인 포로들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그러곤 살라드(Salade, 기사가 쓰는 투구)와, 장갑 등의 갑주와 대공의 검을 찾아와 그를 중무장시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그리즈는 불현듯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다가오는 그리즈를 가만히 살피다가, 바이렌하그 휘장을 떼어 라이히에게 주며 물었다.
“퇴로의 상황은?”
피부가 까만 편인 붉은 늑대가 면포로 갈고리 검의 피를 닦다가 고개 숙였다.
“아군이 확보 중입니다. 퇴로는 두 곳으로, 첫 번째 퇴로는 이미 괴멸된 성 전방 초소와 연결된 지하 터널입니다. 타릴루치 가문이 밤의 신을 모시는 제단을 찾다가 발견한 곳인데, 전쟁 시 탈출로로 계획된 곳 같습니다. 현재 터널 앞에서 군대가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붉은 늑대가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두 번째 퇴로는, 성 후문 숲 속 약초상의 집과 연결된 지하 터널입니다. 대공 전하의 두 번째 계획대로, 밖에 아가씨를 안전하게 모실 병력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왜 퇴로가 두 곳이지? 그리즈의 호흡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붉은 늑대가 다시금 입술을 움직였다.
“두 분께서 각각 성을 빠져나가시는 대로, 퇴로를 통해 병사들이 진입하여 내성을 장악하고 적군의 뒤를 칠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각각…? 함께 가는 게 아니야? 군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니….
그리즈는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쇠 장갑을 끼는 그를 바라보았다. 역광을 받은 몸 테에 어둠이 서려 있다. 구름이 담뿍한 하늘이 그와 대비됐다. 애꿎게도 아름다운 광경에 말문이 턱 막혔다.
반정이 일어나기 전날 오로라가 떴다. 가슴을 감동으로 물들였던 그날의 파동은 사실 신께서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었었다.
그리즈는 슬프고도 잔혹한 선물을 다시는 받고 싶지 않았다. 애써 먹구름이 몰린 하늘을 찾았다. 왼편 저 멀리, 아마도 바이렌하그 군이 멈췄을 곳에 있었다. 그들이 그 아름다운 지상 낙원에서 저 지옥으로 발 디뎠을 터인데….
전쟁의 참상을 두렵도록 본 것 같은데 이제 시작이다. 많은 사람이 분노와 절규 그리고 핏덩이로 변한 몸을 놔두고 하늘로 먼 여정을 떠날 거다. 신의 보살핌이 없다면 그 역시…. 그리즈는 왈칵 차오르는 불안을 삼키지 못했다.
“우리… 같이 가는 거 맞죠?”
어디로 향하든 함께 죽으면 같은 천국에 도착한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서로를 찾으려 헤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에게 못다 한 얘기가 너무나도 많기에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리즈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저 데리러 오신 것도 맞죠? 그러려면… 제대로 데려가셔야 해요.”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도 많은 얘기를 담고 있었다. 두근거리듯 떨리다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내 신비로운 남색 홍채가 균열처럼 도드라지더니, 나지막한 저음이 울렸다.
“같이 가자고?”
같이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운 호흡과 배신감 어린 눈빛이 그리즈의 얼굴에서 뒤섞인다. 그리즈 베네딕트는 대공 비아누트를 절대 떠나지 못할 거라는, 당연했던 믿음이 깨진 듯했다. 원망이 깃든 그의 입술이 다시금 서늘하게 열렸다.
“그렇게 떠나 놓고.”
그는 약점 찾기에 능한 맹수였다. 그가 찾은 최선의 단어들에 그리즈는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를 전쟁터로 보내기 싫은 심정이 목구멍에서 정체됐다. 괴롭게 일그러진 붉은 눈매를 그가 세세히 살펴보았다.
살짝만 더 건드려도 울 것처럼 젖어 있었다. 날카로워졌던 그의 입술이 빠르게 맞물린다. 느긋하게 다잡았던 듯한 호흡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이미 너를 잃어 본 나는 사실 너를 이해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기사들이 피에 젖었던 그의 검 손질을 어느덧 마쳐 갔다. 그리즈를 궁지로 몰곤 했던 파란 눈의 시선은 출입구 옆 벽에 닿았다.
피로 얼룩진 석고 벽에 그리즈의 그림자가 흐리게 어려 있었다. 창가의 꽃병이 그녀의 배에 불룩하게 더해졌다. 마치 넘칠 만큼의 애정을 먹고 부푼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은 아득한 환상을 걷듯 흐릿해졌다. 차가운 쇠 장갑에 갇힌 검지가 허공을 훑었다. 그림자 속의 배를 느껴 본다. 한 번, 두 번…. 냉정했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짙고 고운 속눈썹이 유려하게 가라앉았다가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한 번, 또 한 번. 그는 여전히 안온한 환상 속 어딘가에 있었다.
그리즈는 그곳이 절망의 길을 걸어야 닿을 수 있을 만큼 먼 미래라는 걸 알았다. 어쩌면 영영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종착지였다.
그러나 그랑디아의 탑에서부터 그는 그곳에 가겠다고 결심했는지도 몰랐다. 무력한 소녀의 손을 겹쳐 쥐고서, 강인하게.
그랑디아의 하늘에 바이렌하그 가문의 노래가 거침없이 울렸다. 그리즈는 슬픈 예감을 느꼈다. 끝내 대공 비아누트는 저들의 부름에 응할 것이라는 것을.
이날을 기다리며 미소 지었을 소년의 얼굴이 속절없이 그려진다. 그리즈의 눈에서 주체할 도리가 없는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에게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가 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 명이라도 고귀한 대의를 지키도록 보낼 수 있도록.
내쉬는 호흡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지금 가면, 지금 가시면….”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는 그 모습을 애타는 눈으로 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쇠 장갑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가 손을 거둔다. 그 손으로는 차마 그녀를 만질 수 없겠다는 듯.
그는 태연히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늘 냉혹했던 저음이 처음으로 부드럽게 번졌다.
“살아서 돌아올게.”
“…….”
“네가 찾지 않아도, 나는.”
눈물 맺힌 그리즈의 입술이 거침없이 떨렸다. 애가 타서 부서질 것 같았다.
“저와 같이 가요. 지금 전쟁터로 가시면….”
그를 막으려 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녀는 고귀한 대의와 그랑디아의 왕좌보다 그가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녀 역시 고결한 피를 밟고 올라서는 날을 기다렸지만 그게 그의 피가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마저 바칠 거라고 다짐했음에도 그의 죽음에는 비겁해지는 게 애석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모조리 잃은 지 11년이 흘렀다. 그들의 죽음에 무뎌졌지만 그들과 함께 느꼈던 하늘이나 향기, 계절을 마주할 때면 지금도 가슴의 상흔이 달아오른다.
가만히 있다가도 쓰라려지는 상처의 흔적이 두려웠다. 꽃과 나비를 볼 때마다 울고 싶지 않았다.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절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즈가 독해진 연심을 뱉어 냈다.
“지금 전쟁터로 가시면, 다시는 전하를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장을 마치고 일어난 그가 그리즈를 내려다보았다. 입술이 가까스로 여유를 잡고 있었다.
애타는 열망을 담은 눈은 천천히 감겼다가 떠졌다. 서늘했던 눈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말 원망이 어렸다. 그러나 그의 저음은 늘 그랬듯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 악마가 된 게 맞군.”
그는 작은 악마를 응징하듯, 그녀의 머리를 감싸 쥐어 부드럽게 누르며 지나쳤다. 머리칼에서 쇠 장갑이 천천히 떨어진다. 잿빛 검지가 헝클어진 회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건드려 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텐데.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한 것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그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듯 그는 얼굴을 악의로 물들였다.
“그랑디아 동부로 출진을 준비해.”
정말 그렇게 향한다. 분노와 적의와 살기로 가득할 거대한 무덤으로.
그리즈는 담대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 깜빡 떴다. 그를 스친 바람에서 진한 피 냄새가 났다. 한 계절을 함께했던 나비가 영영 날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퇴로로 향하는 길. 그리즈는 넋 놓고 생각했다. 바이렌하그로 돌아가 수면초를 먹고 잠들어 버려야지. 그 전에 식사부터. 아니, 그 전에 화상 상처 치료부터. 티아가 잘 있는지도 확인해야지. 그가 키우는 강아지는 살아 있는 건가?
그런데… 대공 비아누트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도돌이표였다. 절망을 떨쳐 내려 노력해도 아직은 방법을 잘 모른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 눈물이 수도 없이 맺혔다가 메말랐다.
또다시 눈물이 고이려 하자 그녀는 생각을 돌렸다. 그래, 디르크. 디르크는 어디에 있을까.
“디르크, 혹시 디르크를 만났나?”
그리즈가 얼이 빠진 채로 물었다. 붉은 늑대 중 키가 큰 여인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디르크님….”
“그래, 디르크는….”
“연회장으로 향하는 왕녀님을 구하려 하시다가 다시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혼란을 틈타 저희 측이 감옥에서 빼냈지만 자꾸 왕녀님에게 가시려고 해서….”
“…그래서?”
“아, 물론 대공 전하께서 왕녀님을 찾으러 오실 거라는 말씀을 듣고는 먼저 퇴로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실의에 빠지신 듯해 보이시더군요.”
그리즈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늑대가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랑디아의 왕녀님.”
“…….”
“대공 전하께서는 기필코 돌아오실 겁니다.”
어느덧 퇴로가 있는 지하 창고에 도착했다. 붉은 늑대는 뒤따라온 열 명의 호위 기사들을 보다가 그리즈를 응시했다.
“저는 할 일이 있어 성에 남아야 합니다. 이 길을 쭉 따라가시면 바이렌하그의 기사들을 만날 수 있으실 겁니다.”
“어떤 할 일…?”
“타릴루치가 밤의 신을 섬긴다는 사실은 왕녀님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국왕 폐하께서 대공 전하께 군사를 내리시며 명분을 요구하셨어요. 저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그 제단을 찾아야 합니다. 찾지 못한다면 대공 전하의 작위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제단… 이라니?”
“다른 나라들이 이 전쟁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노르드발츠가 명분 없이 그랑디아를 공격했다는 게 밝혀지면, 그걸 빌미 삼아 물어뜯으려 들지도 모릅니다. 제단을 찾지 못한다면 만들기라도 해야 합니다. 이교도들이 밤의 신을 어떤 식으로 모시는지 알 수 없으니 들통날까 봐 우려스럽지만….”
말끝을 흐렸던 붉은 늑대가 애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브리튼 왕실 서고에는 자료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지만 저희가 구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다 근심 가득한 그리즈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본성 지하를 수색해 봤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을 터인데…. 혹시 밤의 신의 예배당으로 쓸 만한 곳을 알고 계십니까?”
밤의 신 예배당이라…. 그리즈가 의미심장하게 눈매를 좁혔다.
그랑디아 성에는 제단으로 쓸 만한 비밀 공간이 무척 많았다. 성을 설계하신 증조부께서 보물을 모으시는 걸 좋아하셨고, 비밀 얘기를 해도 들키지 않을 비밀 공간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하에도 비밀 공간이 많았다. 붉은 늑대들이 찾은 퇴로 두 곳과 고대 서고, 전쟁 시에 여인들을 숨기기 위한 대피 공간도 있었다.
기억상으로는 넓었던 대피 공간을 예배당으로 쓸 만했다. 하지만 그곳은 공기가 너무 탁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밤의 신, 밤의 신이라….
혹시 넓고 쾌적한 그곳이라면…. 고갤 들어 천장을 응시하던 그리즈가 눈을 크게 떴다.
“저기… 생각나는 곳이 있어.”
호위 기사들이 반가운 기색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붉은 늑대 역시 화색을 보이며 정중하게 물었다.
“위치를 설명해 주시면 저희가 찾겠습니다.”
그리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벽 안쪽도 수색해 봤어?”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는 눈치였다. 하긴 벽 안쪽에 무언가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을 테지. 아마 말로 설명 들어도 찾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즈는 다급한 기색을 드러냈다.
“성을 수색하며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중앙 성은 비밀 공간이 많아. 설명이 불가능해. 내가 가는 게 빠를 것 같아.”
급하게 나가려던 그리즈의 무릎이 짚 바구니를 탁, 쳤다. 귀리가 주르륵 쏟아진다. 붉은 늑대가 귀리를 주시하다가 어렵사리 만류했다.
“하지만 위험하십니다. 헤매도 좋으니 저희에게 기회를 주시면….”
이들의 걱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대공 비아누트의 작위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됐다. 군사를 보내 준 노르드발츠 국왕이 곤란해지기라도 하면…. 그리즈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왕좌가 놓인 방까지만 무사히 가면 돼. 그 왕좌에 열쇠가 있어.”
붉은 늑대는 의아하게 갸웃하더니 혼잣말하듯 말했다.
“왕좌 말씀이십니까? 그곳에는 정말로 왕좌밖에는 없었는데….”
키 큰 호위병이 투구를 고쳐 쓰며 붉은 늑대에게 물었다.
“왕좌라면 이곳에서 가깝지 않습니까?”
붉은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차피 병사들은 도망치거나 성벽으로 했으니 험난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즈가 먼저 창고를 나서자 붉은 늑대와 호위병이 머뭇거리다가 뒤를 따랐다. 이내 그들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빠르게 올라 1층 복도로 나갔다. 장대한 기둥 옆으로 둥글게 뻥 뚫린 전경이 보였다.
바닥에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고, 방문이 도둑맞은 것처럼 열려 있었다. 사방에 즐비했던 금 촛대는 자취를 감췄다. 하인, 하녀들이 클라우디아의 소식과 바이렌하그 군의 규모를 듣고 제 살길을 찾아 훔쳐 간 것 같았다.
복도에 있는 건 피를 토하고 쓰러진 주검들뿐이다.
“이쪽, 이쪽이야. 빠르게 달리는 게 좋겠어.”
초연히 호흡한 그리즈는 둥근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금으로 치장된 하얀 문이 보였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드넓은 천장이 그녀를 반겼다.
반지를 반으로 뚝 잘라 놓은 것처럼 앞으로 휜 방이다. 중앙에는 사람의 하반신 높이의 계단이 있었다. 그 위에 황금 왕좌가 자리하고 있다. 때때로 아버지가 앉아 관료들과 회의하며 왕의 위엄과 권위를 풍겼던 곳이었다. 그녀가 석고 계단을 밟고 천천히 올라섰다.
왕궁의 모든 것이 변해 있는데 왕좌는 변함이 없다. 모든 비극이 이 왕좌에서 비롯된 것만 같다. 한숨 쉰 그리즈가 금색 등받이를 쥐고, 뒤로 꺾었다.
철커덕! 벽에서 기묘한 소리가 울렸다. 철갑으로 무장한 호위병들과 붉은 늑대가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런데 기이한 문양의 석조물이 얽힌 천장에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넓은 창틀 위에서 계단이 드르륵 내려왔다.
“와악!”
키가 작은 호위병이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가 투구의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리즈는 불안한 눈으로 출입구를 살피다가 창틀 위에 올라섰다.
성인 한 명이 가까스로 설 만큼 비좁은 곳이다. 예배당을 찾기 위해 발 들여야 할 미로이기도 했다.
“이곳이야. 계단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으니 잘 보고 오도록 해.”
피가 말라붙은 하얀색 구두가 나무 계단을 밟았다. 벽을 짚은 그리즈는 횃불로 안을 비춰 봤다. 여섯 개의 나무 계단이 돌계단과 이어져 있다. 케케묵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먼지가 많으니까 숨은 되도록 크게 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작게 말한 그리즈가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디딜수록 오라버니들과 숨바꼭질했던 기억이 살아난다. 조심스러웠던 보폭이 커졌다. 이내 그녀는 그때처럼 숨차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하아…!”
어둡고 넓은 공간에 사람들의 벅찬 숨소리가 메아리친다. 그렇게 돌고 돌아 3층에 도착하자 쉼터처럼 평평한 곳이 나왔다. 왼쪽으로 계단이 쭉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시작점이 뚝 끊긴 채 위로 쭉 이어진 계단이 자리했다.
속도 때문에 격차가 벌어졌던 붉은 늑대가 도착했다. 한숨 돌렸던 그리즈는 잠시 머뭇거렸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발을 굴리며 시간을 더듬고 있었다. 어서 도착해야 할 터인데. 만약 그곳이 아니라면 다른 곳을 찾아 나서야 하니까!
초조한 붉은 눈이 두 갈래의 길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 오른쪽 계단에 첫째 오라버니의 환영이 흐리게 비쳤다. 짧은 회색 머리의 소년이 짓궂게 웃으며 손짓한다. 무어라 속삭이는 듯도 했다. ‘이쪽이야, 이쪽!’ 그리즈는 홀린 듯이 벽의 스위치를 내렸다.
드르르륵! 위쪽 벽에 매달려 있던 나무 계단이 내려와 오른쪽 계단을 이어 줬다. 그리즈는 이미 도착해서 숨을 돌리던 사람들의 숫자를 셌다. 11명. 붉은 늑대 한 명은 대공에게 퇴로를 안내하러 갔으니 총 11명이 맞았다. 이내 안심하고는 오른쪽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선형의 계단을 빙글빙글 달려 올라갔다. 숨이 거칠어지자 입 안으로 자근거리는 먼지들이 끼쳐 들어온다. 이마에서는 검은 땀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그런데 왜 이리도 가슴은 시원한 걸까. 달리는 두 발에 속도가 붙었다.
6층 지점에서 또다시 쉼터가 나왔다. 앞의 벽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위까지 파여 있는 곳이다. 장대한 홈 안에는 거대한 나무 상자가 있었다.
상자 위에는 굵직한 쇠사슬이 걸려 있었고, 벽에는 나무 상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안한 레일이 달려 있었다. 증조부가 만든 탈것이었다. 그리즈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하아! 제대로 온 것 같아! 이곳이 맞아!”
처음 보는 형상에 사람들이 저마다의 눈치를 살폈다. 머리 위가 새카만, 거대한 미로에 압도된 듯 말이 없다. 상자 안에 올라탄 그리즈는 빨리 타라는 듯 손짓했다. 이내 열 한 명이 모두 타자 손을 밖으로 뻗어 스위치를 올렸다.
철컹! 천장에서 도르래가 돌며 사슬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즈가 쥔 횃불에 뽀얀 먼지가 일렁였다. 쉼터와 계단들이 발에서 멀어지자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어, 어어! 이, 이거 괘, 괜찮은 겁니까?”
그리즈는 과거의 기억에 들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찰나 한없이 돌아가던 도르래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드르르륵! 사슬과 레일 바퀴가 탁, 멈추며 상자를 고정했다. 손등으로 땀을 닦은 그녀가 사람들을 비집고 반대로 몸을 돌렸다.
“거의 다 왔어. 이제 이 문만 열면 돼.”
“문이요?”
벽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비켜섰다. 그리즈는 나무에 박힌 걸쇠를 풀었다.
끼익! 나무판이 문처럼 열렸다. 기묘한 빛이 새어 나오는 하얀 문이 존재를 드러냈다.
“성안에 이런 곳이 있었을 줄이야!”
사람들이 놀란 토끼 눈을 떴다. 제발, 제발. 그리즈는 이를 강하게 물며 하얀 문을 밀었다.
끼익, 끼이이익!
기괴한 천국이 비밀스럽게 열렸다. 그리즈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둥근 벽면을 둘러봤다. 넓은 공간이 오색 빛으로 물들어 있다. 뻥 뚫린 천장에서는 흐릿한 빛이 원기둥처럼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원기둥의 중앙에 못 보던 석고 단상이 자리한 게 보였다. 그 단상 위에 십자가가 역방향으로 꽂혀 있다.
그리즈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틀어막았다. 붉은 늑대가 찾던 제단처럼 보였다. 정말, 정말인가? 내가 제대로 찾은 건가? 가슴속에서 찌르르한 전율이 도는 찰나였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탈것에서 내려,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졌다.
“맙소사! 그랑디아의 왕녀님께서 예배당을 찾아 주신 것 같아요!”
그때 붉은 늑대가 단상 옆 테이블의 조형물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곳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것 좀 보세요.”
머리가 세 개인 짐승이었다. 아니, 짐승이 아니라 사람인 것도 같았다. 반반씩 섞인 것 같아 더없이 끔찍했다. 저런 것이 11년 전, 어머니의 방에서도 나왔었는데. 그리즈가 이를 질끈 무는 순간 붉은 늑대가 말을 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왕녀님! 그런데 예배당이 이곳에 있을 줄은 어떻게 예상하신 겁니까? 저희끼리 찾았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찾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랑디아의 중앙 성이 총 9층으로 이뤄져 있다고 알고 있지만 비밀의 10층이 있었다. 건축에 천부적인 감각이 있으셨던 증조부께서 만들어 둔 비밀 회의실이다. 과거에는 이곳에 베네딕트 일가나 요직들이 모여 대소사에 대한 밀담을 나눴다고 한다.
그리즈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밤의 신이라는 말을 듣고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이곳이 생각났어. 이곳이 아닐까 봐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다행이야.”
숨을 돌린 그리즈는 단상을 주시했다. 소년의 갑옷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그곳을 둘러싼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에 맴도는 게 전율이 아니라 소름인 것 같았다. 그리즈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단상에 올라섰다.
붉은 늑대와 호위병들도 넓은 단상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하얀 단상에 세 개의 흑옥석이 주먹만 하게 박혀 있다.
그리즈는 단상 중앙에는 적힌 글자를 바라보았다. ‘카스토르.’ 어릴 적 클라우디아가 카스토르에 대해 말해 준 기억이 있다.
카스토르는 항해자의 수호신으로 쌍둥이자리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쌍둥이자리의 별이 두 개로 보이지만 선택 받은 자들에게는 세 개로 보인다고 했다. 유일신을 버리고 이런 사신교에 빠져들다니…. 그리즈가 미간을 좁혔을 때였다.
“이, 이것 좀 보십쇼!”
거꾸로 매달린 갑옷 아래에 피가 새카맣게 굳어 있었다. 숨을 크게 마신 그리즈의 폐부로 거북한 냄새가 끼쳐 들어왔다.
갈색 머리의 호위병이 미간을 좁혔다. 이내 검을 뽑아 들고는, 거꾸로 매달린 소년의 갑옷을 툭 쳤다.
안에 무언가 든 것처럼 소리가 묵직했다. 아니, 육중하게 흔들리는 걸 보면 사람이 들어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작은 갑옷이 맞을 만한 소년이. 호위병의 입술에 분노가 깃들었다.
“망할, 대체 이곳에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요?”
붉은 늑대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가 놓으며 대답했다.
“디르크 님께서 스테판 님이 며칠 전에 제단에 제물을 바쳤다고 알려 주셨어. …안타깝게도 그 제물 같군.”
소녀의 허리에 장검 두 개가 X 자로 교차되어 꽂혀 있었다. 잔학한 광경을 보고 그리즈는 숨을 참았다.
미간을 좁힌 호위병이 검집의 끝으로 투구의 입가를 쓱 올렸다. 새파랗게 질린 소년의 입가가 드러났다. 목에 새겨진 누군가의 이름도 선명하게 보였다.
무언가 말하려던 사람들의 입술이 일제히 굳었다. 그리즈 역시 눈을 크게 뜨며 붉게 새겨진 글귀를 읽었다.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의 영혼을 제물 안에 가두어 주소서….
경직된 붉은 눈이 소년을 찌른 검을 바라보았다. 클라우디아의 저주가 섬뜩하게 되풀이됐다. 대공 비아누트가 몸통에 장검 두 개를 박고 죽을 거라는…. 피가 타들어 가는 감각이 시작됐다.
세 시간 뒤, 그랑디아 동부 타릴루치 본가 앞.
해가 질 무렵이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
빛과 어둠이 혼재한 평야가 전운으로 달궈졌다. 그 중심에 선 타릴루치 저택이 거대한 위용을 뽐냈다.
드높은 저택 위에는 대포가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택 위 망루에도 궁병들이 자리 잡고 살기를 내뿜었다.
회색 벽 앞에는 수만 군사가 대열을 갖춰 서 있었다. 빈젤과 막시마, 카시라트, 토스카르의 깃발이 웅장하게 휘날린다.
바이렌하그와 노르드발츠의 깃발은 맞은편에서 휘날렸다. 병력은 얼핏 대등했지만 바이렌하그의 지휘관들은 불리한 형국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군의 위치가 석양빛으로 노출된 반면 적군의 위치는 산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
그래도 다행히 그랑디아 성에서 승전보가 울렸기에 노르드발츠 연합군은 기세등등했다. 최전방의 방패병과 대열 틈에 자리한 포병들의 얼굴에도 두려운 기색은 없다.
불안해하는 쪽은 오히려 그랑디아 연합군이었다. 해가 지면 노르드발츠 군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터.
바이렌하그 기사들은 야전에 능한 자들이었다. 샤토의 야만족에 압승한 이유도, 깊은 밤 급습한 덕분이었으므로.
살인광이라고 소문난 바이렌하그 대공이 8년 전부터 야만족의 족장이 바뀌는 족족 죽여 왔기에 방심한 것부터 실수였다. 부친을 죽인 복수를 하는 줄 알았지, 바이렌하그가 샤토로 발들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랑디아의 공작들 중 그 누구도 말이다.
그러므로 마할 타릴루치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전투를 끝내라고 명했다. 그 찰나 잠시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빛을 드러냈다.
그랑디아 연합군의 시선이 바이렌하그 휘장을 두른 자에게 쏠렸다. 바이렌하그 대공의 머리에 막대한 포상이 걸려 있기 때문일 터.
지휘를 맡은 빈젤가 사령관이 뿔피리를 불었다. 각 가문의 깃발이 위로 들렸다가 바닥에 거칠게 꽂힌다. 그 광경을 본 그랑디아의 지휘관들이 목청 높여 포효했다.
“돌격하라! 바이렌하그 대공의 목을 가져와라!”
선공을 지시하는 북소리가 거침없이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바이렌하그의 방패병이 방패를 들어 올렸다. 궁병 지휘관이 깃발의 방향을 보다가 손짓했다. 후방에 있던 궁병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바람을 힘입어 날카로워진 화살이 달려오는 노르드발츠 기마병들에게 사정없이 꽂혔다. 그 순간 저택에서 포탄이 날아왔다. 쿵, 쿵! 방패의 잔해와 흙더미가 사방으로 튀어 올라왔다.
대열이 흐트러지자 노르드발츠의 기마병 지휘관이 진격의 북을 울렸다. 둥둥, 둥둥! 흥분을 억누르던 말들이 앞발을 거침없이 쳐든다. 그랑디아의 연합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수만 병사들이 물결처럼 달려와 한데 어우러지는 듯했다.
그러나 바이렌하그의 휘장을 찾은 적군이 중앙으로 쏠렸다. 휘장을 두른 사내는 갑옷의 표식을 정신없이 확인하며 베느라 바빴다.
그 순간 서슬 퍼런 창을 쥔 병사가 말을 탄 채 전속력으로 돌진해 왔다. 기다렸다는 듯, 대공의 말 옆구리에 화살이 푹 꽂혔다.
순식간에 평야를 장악한 절규에, 말의 울부짖음은 들리지도 않았다. 적군의 창이 그의 갑옷을 거침없이 내리쳤다. 말을 탄 채 엇갈려 있던 두 사내가 반동으로 말에서 푹 떨어졌다.
그의 갑옷 허리춤이 쾅! 깨져 떨어져 나갔다. 그 틈에 보병이 눈을 번뜩이며 허리춤으로 장검을 찔러 넣었다. 사내가 괴롭게 몸을 비틀었다.
“크흑, 망할!”
옆에 서 있던 바이렌하그 4기사단장 빌리엄이 보병의 머리를 벴다. 이내 말에서 뛰어내려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쥐여 줬다. 빌리엄의 숨찬 목소리가 고함처럼 터졌다.
“쿠엔틴, 쿠엔틴! 괜찮아?”
쿠엔틴은 내내 차고 있던 대공 휘장을 떼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타릴루치 저택 뒤의 산 중턱을 바라보았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백 대의 포탄이 저택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별똥별이 강렬하게 떨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