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32)

***

이틀 후 새벽, 바이렌하그 저택.

그녀가 사라졌다. 적어도 일주일 이상 출타할 예정이었던 대공이 급하게 귀환했다. 샤토를 완전히 점령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그러나 대공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없었다. 이번 승전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으므로.

저택 내에서 당연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 까닭에 쿠엔틴은 대공을 볼 낯이 없었다. 그리즈 베네딕트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증발해 버렸다. 납치된 건 아닌 듯했지만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정말 큰 문제는 대공의 반응이었다. 그가 잠을 자지 않은 지 약 50시간째.

그는 피로한 기색 없이 저택을 이 잡듯 헤집고 다녔다. 마지막으로 가족 석상실을 둘러보더니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돌아섰다.

결국 그녀가 떠난 이유는 찾지 못했다. 다만 하녀장 로렐로부터 그리즈 베네딕트가 첫사랑이라는 사내와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도 그가 평소처럼 느긋한 얼굴을 한 까닭에 쿠엔틴은 더 불안했다. 표정과는 달리 그의 눈은 서슬 퍼렇게 가라앉아 있었으므로. 그러나 아직은 그리즈 베네딕트가 나타나면 사라져 버릴 광기에 불과했다. 빨리 찾아내야 하는데 그녀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바이렌하그 초소들을 수소문하다 보니 어느덧 새벽 2시.

바이렌하그 대공은 정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잡혀 온 도적 네 명이 서 있었다. 후줄근한 행색의 잡배처럼 보였으나 그들 모두 그랑디아의 군수품을 소지하고 있었다. 도적의 탈을 쓴 첩자였다.

대공은 그들을 싸늘히 주시했다. 섬세한 속눈썹 때문인지, 주변이 밝을수록 유려해지는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거친 느낌이 강했다. 샤토에서의 전투로 턱에 시퍼런 멍이 들었고, 콧잔등에도 붉은 생채기가 생겼다. 한쪽 입술도 터진 상태였다.

이틀 동안 폭우가 쏟아진 까닭에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오랜만에 정원 등간마다 촘촘히 등불을 올린 까닭에 얼굴 상처가 선명히 드러났다.

그 때문에 하녀들이 법석을 떠는데 정작 대공은 태연했다. 오히려 쿠엔틴이 안절부절못하며 첩자들을 꿇어앉히려고 했다.

“무릎 꿇어.”

그러나 사내들은 국경 벽을 넘은 죄인 주제에 몸을 숙이지 않으려 버텼다. 하루 내내 예민했던 쿠엔틴이 첫 번째 사내의 무릎 뒤쪽을 걷어찼다.

“이 새끼가!”

대공은 이 상황이 퍽 지루했는지 미간을 좁혔다. 이내 상의 안쪽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의 커다란 체격에 사내들이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그 찰나 대공이 첫 번째 사내의 무릎을 검으로 베어 버렸다.

“크아아악! 으악! 큭, 으으으.”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정원에 메아리친다. 조금 전 목욕한 뺨에 핏줄기가 튀었지만 그는 감흥이 없다.

“알지, 잡혀 왔으면 겸손하게. 시간 끌지 말고.”

그의 머리 위에서 등불들이 반짝인다. 언뜻 보면 길 잃은 별똥별이 정원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웠고, 소름 끼쳤다. 정원 한쪽에 쌓인 시체 다섯 구가 더없이 선명해졌으므로. 스테판의 추천으로 저택에 취직한 첩자들의 시체였다.

무릎 꿇지 않고 버티던 놈들이 자의로 무릎 꿇었다. 대공은 다시 벤치에 앉으며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쳤다.

“어디 있지?”

그가 율리아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 것이다. 바이렌하그의 대공이 사라진 여동생의 행방을 집요히 추적 중이라는 소문이 이미 각지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에 선 사내가 아랫입술을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누가 알까.”

“저, 저희는 단지 바이렌하그에 숨어들라고 왕궁 관료 나리께 명령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넘어왔어요. 믿, 믿어 주십시오.”

“명령이라. 그 여인을 죽이라고 명령받았다면.”

“그, 그건….”

“죽였겠군.”

새파란 멍이 든 턱이 잔악하게 굳어졌다. 상상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고작 네놈 따위가.”

까만 신발을 신은 그의 발이 두 번째 사내의 손이 뒤로 꺾일 때까지 지그시 밟았다. 정원에 비명이 번졌다. 그제야 그는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 느릿하게 물었다.

“더 할 말 있나?”

“그, 크흑! 그, 그뿐입니다.”

대공이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붉은 상처가 간지러운지 손으로 쓱 훑었다. 손끝에 조금 전 튄 피가 묻었다. 이내 눈을 느긋이 감은 채로 손수건으로 꺼내어 얼굴의 피를 닦았다.

“이자들을 그랑디아로 돌려보내.”

그 말에 사내들이 반색했다. 냉혹하게 웃은 그는 뺨에 보조개까지 드러낸 채였다.

“머리만.”

이내 손수건을 바닥에 툭 던져 버리고는 저택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목욕을 마친 대공의 다음 행선지는 그녀의 방이었다. 방은 며칠 동안 변함이 없었다. 단지 그녀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하얀 강아지가 튀어나와서는 대공을 반겼다. 강아지를 품에 안은 대공은 작은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느리게 마셨다가 그대로 참는다. 공기에 남은 향기를 몸으로 흡수시키려 하는 듯했다.

그러다 가슴팍의 얕은 자상을 감싼 붕대가 거슬렸는지 미간을 좁힌다. 표정은 무감각했지만 그럼에도 괴로워 보였다.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압도적인 통증을 느끼는 듯했으므로.

쿠엔틴이 침대 옆에 서서 그를 지켜보다가 보고를 시작했다.

“소식통에 의하면 스테판 님께서 그랑디아 왕궁으로 넘어가신 것 같습니다. 아예 개종까지 하실 생각이신지, 새로운 신에게 제물을 바치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붉은 늑대의 얘기로는 그 종교가 어린아이를 제물로 쓰는 것 같다고 합니다.”

대공의 숙부 스테판은 겉과 속이 다르고 비열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다. 다만 그 역시 유일신의 신도이기에 모든 교리를 지켜왔다. 심지어 미혼자의 금욕 교리마저 지킬 정도로 독실했었다. 물론 변태적인 유사 행위로 성욕을 달랜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원래의 성정은 학자처럼 곧았었는데 개종하려 살인까지 하다니. 하물며 혈통을 중요시해 지금까지도 마땅한 반려자를 찾고 있는 사내가 왕위 찬탈자 곁에 붙어서? 오보인가? 아니면 정말 권력욕으로 미쳐 버린 걸까?

평소 같았다면 대공 역시 진상을 파악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창가를 훑더니 1인용 테이블을 주시했다. 마치 이곳을 쉼 없이 오가며 매만졌을 그녀를 그려 보는 것 같았다.

쿠엔틴은 그를 이 세상으로 끌어들일 만한 사실을 떠올렸다.

“저, 대공 전하. 우리 측 수석 의사가 왕실 의사로부터 회임과 관련된 약을 받았다고 합니다. 급한 사안이라고 말해 둔 까닭에 전하께 보고드리기 위해 대기 중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곳으로 호출하겠습니다.”

대공이 긍정하고 잠시 뒤, 의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의사는 대공의 어두운 눈가를 살펴보더니 작은 병을 내밀었다.

“회임초를 정성 들여 달여서 응축한 환입니다. 갓 수확한 회임초를 달여 마시는 게 가장 효과가 좋으나 수확기가 여름인 까닭에 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품질 좋게 말린 회임초조차 구하기 힘들어 브리튼까지 다녀온 것 같습니다.”

대공은 병을 받아 들고 안을 들여다봤다. 끈적끈적하고 투명한 환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 있었다.

“하루에 하나씩 먹이면 되는 건가?”

“그것이… 직접 드시는 것보다는 배 안 깊숙한 곳으로 품게 하시는 것이 효과가 좋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사람에 따라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부작용?”

“저… 최음 효과 때문에 남편이 없는 자가 사용하기에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사가 대공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가장 효과가 좋은 형태이고, 이건 저만 아는 사실이지만 첫째 왕녀께서도 이 환을 사용하시고 바로 회임하셨다고 하니 효능은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공은 물에 젖어 유독 짙어진 흑발을 쓸어 넘기더니 미간을 좁혔다.

“효능보다는 부작용이 적은 게 좋겠군.”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전하.”

대공의 파란 눈동자가 허공을 주시했다. 차분한 듯 공허했다. 그의 잇새에서 나른한 질문이 흘렀다.

“세쌍둥이도 가능할까.”

오늘만 아홉 명을 죽인 사내의 관심사가 세쌍둥이라니.

그러나 요새 대공이 계속 이런 식이었기에 쿠엔틴은 놀랍지 않았다. 농담도 진담처럼 하는 대공 때문에 의사는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예? 예…. 영양실조나 피임차 때문에 월경하지 않으시는 거라면 이 환으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사료됩니다. 다만 세쌍둥이까지는… 부군의 능력, 아니… 신의 뜻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대공은 의사를 무감각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치료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는 입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비정상적이게도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동안 후계 생산에 대한 욕구가 없었음에도. 어쩌면 미쳐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수고했어. 나가 보도록.”

그의 말이 떨어지자 의사가 나갔다. 또다시 방 안이 고요해졌다. 문이 닫힐 때까지 어려 있던 그의 미소가 점점 흐려진다.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대공은 미간을 좁히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곤 검은색 로브 안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탁한 눈동자가 쪽지를 오래도록 읽었다. 그러며 담담했다가, 흔들렸다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제가 너무 주제넘은 꿈을 꾼 것 같습니다. 행복하세요. 그뿐입니다.

갑자기 담담한 웃음소리가 방 안에 번졌다. 웃을 때 유독 유려해지는 대공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흐느낌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랐다.

어쩌면 선득하기도 한 소리는 예상보다 서서히 멎었다. 점차 새벽녘의 바람 소리가 커진다. 그때 대공의 저음이 방 안을 메웠다.

“행복하래.”

“…….”

“그뿐인 것 같군, 고작.”

한 치의 오차 없이 잘생긴 얼굴이 진심으로 서늘해졌다.

이내 그는 핏줄이 불거진 손으로 눈썹의 상처를 매만졌다. 얼굴이 손에 가려진 까닭에 그가 지금도 웃고 있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나는 불행하길 바라는데, 그 여인이.”

“…….”

“그래야 더 빨리 돌아올 거야.”

그의 눈동자에 선득한 광기가 어려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가려고.”

그녀가 지금 지옥에 있다고 해도 망설임 없이 뒤를 쫓을 사내처럼 보였으니까. 그 모습을 본 쿠엔틴은 곧이어 보고하려 했던 정보를 꾹 삼켰다.

사실 조금 전 바이렌하그 숲 속 민가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낯선 무리가 숲속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여인도 한 명 있었다고 했다.

아쉽게도 여인이 스카프로 머리칼을 가린 까닭에 머리 색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산행에 서투른 듯했고, 검은 머리 사내가 여인을 애인처럼 챙겼다는 얘기가 있었다.

쿠엔틴은 그 사내가 검은 천사라고 짐작했다. 그녀가 사라지던 날 검은 천사가 저택에 왔었고, 그가 떠난 후 그녀 역시 사라졌다. 하필 대공과 형제처럼 닮은 사내와….

쿠엔틴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아도 대공이 아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일쯤 영내에 소문이 돌기 시작할 테니까.

그 사실을 지금 그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쿠엔틴은 파괴적이지 않은 결과를 원했다. 그녀가 떠난 동선을 따라 인력을 배치했으니 내일쯤 더 확실한 정보를 알 수 있을 터였다.

“전하, 샤토에서 주둔 중인 병력은 어떻게 하는 게 좋으시겠습니까?”

“대기시켜.”

며칠 안으로 그녀를 찾아내고 전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의 의지가 비쳐 보였다. 하긴 그녀가 사라진 직후에 관문들을 막아 버렸으니 그녀는 아직도 바이렌하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쿠엔틴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대공이 눈매를 나른히 좁히며 말했다.

“내일까지 광장에 참수대를 준비해.”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참수? 대체 누구를 참수하시려는 건지….

쿠엔틴은 대공의 새카만 속을 들여다보는 걸 포기하고 수첩에 메모했다. 대공은 피로한지 손등으로 속눈썹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가 침대에 떨어진 봄 송이 한 줄기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낮에 그녀가 따 두었던 것이었다.

봄 송이는 환각과 최음 효과가 있는 식물이다. 적정량을 먹고서 시간이 지나면 숙면도 가능할뿐더러, 벌레 퇴치 효과가 있는 덕분에 정원에서 키우고 있었다.

평소에는 봄 송이에 관심도 없던 대공이 솜털 같은 꽃송이를 따서 향을 맡았다. 향기가 좋은 모양이다. 나른하게 호흡하더니 꽃송이를 잇새에 지그시 물었다.

설마 드시려고? 그래 봤자 천민들이 밤놀이용으로 먹는 식물인데. 하물며 금욕하셔야 하는 분께서….

미끈한 잇새에 걸쳐진 꽃송이가 그의 입 안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목울대가 느릿하게 흔들리며 꽃송이를 삼켰다. 이내 그는 몸에 걸친 검은색 상의를 벗고 그리즈 베네딕트의 작은 침대에 누웠다.

멍하게 서 있던 쿠엔틴은 쫓겨나듯 방을 나섰다. 그러곤 문을 느리게 닫으며 문틈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였다. 손가락 사이에서 벌어진 입술이 비쳤다. 타들어 가는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각성 효과에 걸맞도록, 가슴의 큰 근육이 더욱 단단해졌다.

붕대가 상처를 꽉 조이건만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새파란 눈이 어딘가를 주시한다. 왜인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쿠엔틴은 뒤늦게 낮게 탄식했다. 대공이 환각제를 통해 그리즈 베네딕트를 만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므로.

저택을 나선 지 이틀째 새벽. 그리즈는 부쩍 야윈 모습으로 웅크려 자고 있었다.

고작 이틀이지만 많은 일을 겪었다. 저택을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렌하그의 감시병을 맞닥뜨렸다. 검은 천사는 걸어갈 것을 제안했고, 그리즈는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감시병이 숲길을 장악한 까닭에 산길로 가야 했다. 울창한 나무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그 좋던 나무 향이 흙냄새와 뒤섞여 역해지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일까. 빗물이 철벅 철벅 흘러내리는 까닭에 풀 바닥이 너무도 미끄러웠다.

다행히 운 좋게 빈집을 찾아 눈을 붙였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문제였다. 혹시 몰라서 레녹스에 보낼 서신을 써서 검은 천사에게 건넸지만 하루를 날리다시피 했다.

그 이후에도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이렌하그 광장을 빙 돌아서 또다시 산을 올랐다. 앞으로 두 개의 세 개의 산만 더 넘으면 노르드발츠가 나올 거라고 한다.

이틀간의 고행 끝에 잠시 멈춘 곳은 산 중턱의 빈 저택이다. 사용하지 않은 지 몇 개월은 되어 보였다. 그나마 방마다 침대도 있고 공간도 넓기에 여덟 명의 호위병도 함께 머물 수 있게 됐다.

호위병은 원래 열두 명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지 않는 선에서 사람을 호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틀 만에 네 명이나 전사했다. 새파랗게 어린 소년과 노르드발츠에 아내가 있다던 사내 그리고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사내 둘….

빈집을 떠난 후 다시 거세진 폭우를 피해 민가에 들른 게 화근이었다. 민가 주인이 수상쩍게 행동하더니 어딘가로 전령조를 날렸다. 그 비 오는 날씨에….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괴한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타릴루치의 첩자들이 바이렌하그에 포진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첩자들에 의해 네 명이 전사했다.

그들이 숨을 거두기 직전 하나같이 비슷하게 말했었다. 바이렌하그를 위해 목숨 바칠 수 있어 영광이라고.

그 찬란하고 맹목적인 영혼들을 떠나보내며 그리즈는 극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금껏 무작정 삶의 욕구로 움직였던 자신의 영혼이 추하게 비쳤으므로.

그녀는 살아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여겼다. 아버지의 추종자가, 혹은 타릴루치의 반대 세력이 타릴루치를 무너트려 주길 바라기만 했다. 그들의 희생과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당장은 다리의 피부병과 얻어맞은 몸이 더 아팠으니까.

목에, 심장에, 배에 검을 꽂은 채로 숨을 거두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현실감이 들었다. 격통이 찾아왔다. 대공 비아누트도 전장에서 이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밤새 잠을 설쳤다. 눈 떠 보면 똑같은 새벽. 작은 방에서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만 울린다.

매음굴 문양이 새겨진 피부가 유난히 욱신거리는 날이다. 그리즈는 몸부림치다가 일어나 벽난로를 바라봤다.

깜빡, 깜빡. 그리즈가 눈꺼풀을 열자 붉은 눈동자에 난롯불이 맺혔다.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저 불은 누가 붙였을까.

알 수는 없었다. 그녀 자신의 몫은 아니었으므로.

무거운 짐을 드는 일이나, 물 떠오는 일도 다른 누군가의 몫이다. 그녀의 몫은 그저 사람들을 따라 걷는 일뿐이다. 그리고 수녀원에 도착해 보호 받는 일뿐일 것이다.

그냥 이대로, 바이렌하그 저택에서처럼 차려진 음식을 먹고,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매음굴 문장을 들킬까 봐 홀로 목욕하게 될 것이다.

많은 몫을 가진 자에 비하면 자유롭지 않나? 그런데 왜 비좁은 감옥에 갇혀 절규하는 기분이 드는지.

깜빡. 붉은 눈동자에 맺힌 불길이 커졌다. 그녀는 또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왜 이리도 한심하게….

눈에 맺힌 불길이 서서히 타오른다. 멍한 얼굴의 그녀는 홀린 듯이 불 앞에 섰다.

“아가씨, 뭐 하십니까.”

뒤에서 검은 천사의 미성이 들려왔다. 미동 없이 서 있던 그녀는 블로우 포크 대신 가져다 둔 모종삽을 주시했다. 불길 옆에서, 모종삽의 삽 쪽이 함께 타오르는 중이었다.

“꼭 불길에라도 뛰어들려는 뒷모습 같군요.”

“…….”

“지금이라도 주무셔야 합니다. 내일도 고행길일 테니까.”

알고 있지만 갑갑해서 잠을 이룰 수 없다. 어딜 가든 눈앞으로 쇠창살이 보인다. 점점 몸을 옥죄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네글리제를 허리까지 올려 젖혔다. 점점 의문이 강해진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다.

답을 알지 못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은 있었다. 두렵지만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모종삽을 집고는 골반 쪽을 내려다봤다. 잉크로 새겨진 문양이 보인다. 수년 가까이 정신을 옭아맨, 지긋지긋한! 타릴루치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찍히지 않았을 낙인.

이 낙인에 비극적인 저주가 걸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 사람의 인생과 성격이 이렇게 무너져 버릴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없애 버리고 싶었다.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타릴루치 왕의 이마에 고스란히 옮겨 붙이고 싶기도 했다. 수치스러운 낙인을 평생 생기고 살아야 할 사람은 그자이니까.

그런데 왜 내가…, 왜 그자 대신 내가!

그리즈는 불길에 달아오른 삽을 매음굴 문양에 거침없이 댔다. 치이이익! 일순간 눈앞에서 번개가 쾅! 쾅! 내리친다. 텁텁한 탄내까지 진하게 올라왔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온몸으로 차오르는 울부짖음을 삼켰다.

너무도 간절하게 탈출하고 싶었다. 깊고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그 안의 비좁은 감옥 속에서.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섬뜩한 쇠창살 문을 상상했다. 그러곤 문을 부수고 나와 하나하나 죽이기 시작했다. 폭력적인 관리자들, 음흉한 눈빛의 방문객들, 멸시하던 귀족들, 소심하고 겁 많은 잡역부까지!

모두 해치우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새카맣고 누추한 감옥 창살들이 곁눈으로 훅훅 지나갔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즈는 그곳까지 다다라 위를 올려다봤다.

허겁지겁 구덩이를 올랐다. 흙이 얼굴로 떨어지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흠뻑 젖은 이마에서 선선한 바람이 느껴진다. 탈출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때, 몸이 아래로 주춤하며 기울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커다란 쇠 구슬과 연결된 족쇄가 발목에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그리즈는 그 족쇄가 마지막으로 남은 장애물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너무 무겁고 거대해서 스스로 풀 수가 없었다. 구덩이 벽을 쥔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이러다 다시 떨어지고 말 거다. 안 돼, 제발… 제발!

그 순간 구덩이 밖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아주 하얗고 작은 손이었다.

족쇄를 보며 후들후들 떨던 그녀는 구덩이 밖을 올려다봤다. 아홉 살 남짓한 소녀가 미소 짓고 있었다. 머리에는 빛나는 티아라를 쓴, 회색 머리 소녀….

아름다웠다. 그리고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눈동자를 파르르 떨던 그리즈는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어둡고, 눅눅하고, 누추했던 구덩이가 으드득 깨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빨리, 빨리! 조금만 더! 그녀는 다급히 구덩이를 빠져나와서 소녀의 손을 제대로 맞잡았다. 태어나 처음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관통하는 듯했다. 여전히 족쇄가 발목을 옥죄고 있건만 몸이 가벼워진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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