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32)

***

다시 눈을 떴을 땐 밖이 소란스러웠다. 이마가 축축이 젖은 기분에 그리즈가 눈을 떴다.

벨린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대야를 올려놓은 채 물수건의 물을 쭉 짜는 중이었다.

그리즈는 칼칼하게 잠긴 목을 느끼며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벨린, 뭐 하니?”

물수건으로 대야를 툭툭 치며 물기를 빼던 벨린이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혹시 어제 대공 전하께 늦게까지 체벌 받으셨나요?”

체벌이라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혹시 뭔가 아는 걸까? 그녀가 확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심장이 갑자기 급격하게 뛰는 까닭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욱신거리는 고막으로 벨린의 대답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대공에게 체벌당해서 아픈 줄 알고 간호하고 있었던 건가? 율리아나가 외출증을 숨겨 뒀다가 들켰다는 말을 전해들은 걸까.

그나저나 지금 몇 시지? 그리즈가 침대 구석을 더듬어서 그가 예전에 주었던 회중시계를 열어 보았다.

아침 8시였다. 문득 그가 새벽께에 떠날 거라고 했던 쿠엔틴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전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니?”

“새벽 4시쯤에 샤토로 떠나셨어요.”

뭐, 4시? 청천벽력에 그리즈가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온몸이 뻐근한 까닭에 비틀대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말? 왜, 날 깨우지 않고….”

통증이 무뎌지는 느낌이다. 그가 벌써 떠났다니…. 쿠엔틴의 얘기로는 시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 다시 안내해 주겠다고 했는데….

깨우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며 방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의 방에서 잠들었었는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살아 돌아올게.”

꿈결에 들었던 저음이 심장을 싸하게 긁었다. 그게 꿈이 아니었다면, 그가 살아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거라면…. 덜컥 두려움이 앞선다.

하지만 어째서 이리도 갑자기…. 창백해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혹시 말이야. 전하께서 전쟁하러 가신 건… 아니지?”

“송구합니다만… 저는 잘, 잘 모르겠습니다.”

쿠엔틴은 샤토에 문제가 있으므로 대공이 직접 가야 한다고 했다. 하긴 타릴루치가 두 눈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 샤토와 전쟁할 리도 없으니까…. 그녀는 쿠엔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이제 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마차들이 마구간을 바삐 오가는 풍경이 보였고, 창과 방패를 실은 수레도 보였다. 쿠엔틴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리즈는 다급하게 세면을 마쳤다.

그때 로렐이, 열린 문을 노크하곤 말했다.

“아가씨를 뵈러 왔습니다.”

그동안 로렐은 좀처럼 만날 일이 없었다. 지금껏 할머니의 시중을 들고 있었고, 할머니가 무척 바쁘셨으므로.

“무슨 일이야?”

그리즈가 정원에서 사내들과 서 있는 쿠엔틴을 흘끗 봤다. 로렐은 바닥을 주시하며 담담히 대답했다.

“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로렐을 따라 도착한 곳은 저택 뒤편, 언덕 아래 1층짜리 건물이었다. 뾰족한 지붕에 십자가가 있는 걸로 봐서는 할머니의 기도실인 듯했다.

다만 빛이 들지 않아서인지 아침인데도 새벽처럼 느껴졌다. 풍경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는데. 어찌 이리도 감옥 같은 곳에 터를 잡으셨을까.

로렐이 하얀색 문을 조심스레 노크했다. 풀 냄새만 속절없이 맡는 사이, 끼이이익! 문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제가 나와서 그리즈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사제의 백발을 보다가 기도실 현관으로 발 들였다.

그동안 집을 보수하는 하인조차 들이지 않으셨던 건지, 나무 바닥이 들떠서 삐거덕거렸다. 왠지 불안한 느낌에 들뜬 바닥을 밟지 않으려 내려다봤다. 하지만 창문마다 커튼을 쳐 놓은 까닭에 온통 깜깜했다.

창백해진 그리즈가 기도실을 들여다봤다. 곳곳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4인용 벤치가 세 줄 씩 양쪽으로 놓인 풍경도 보였다.

그나저나 할머니는 어디 계시지? 사제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정면에 거대한 나무 십자가가 있었다. 다만 희한하게도, 벽에는 크고 작은 검은색 점박이가 자리 잡은 게 보였다.

대체 저게 무얼까. 숨을 꾹 삼킨 그리즈가 기도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제야 검은색 길쭉한 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십자가였다. 수십 개, 아니 수백 개가 넘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등줄기로 소름이 올라오는 듯해 숨을 훅 내쉬었을 때였다.

“왔니, 아가.”

뒤돌아보자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은 할머니가 보였다. 기품 있는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네? 네, 할머니….”

그리즈는 이렇게 많은 십자가를 모은 이유가 궁금했다. 할머니께서도 수집벽이 있으신 걸까. 이마의 진땀을 닦으며 물었다.

“십자가를 모으는 취미가 있으신가요?”

할머니가 십자가를 하나하나 살펴봤다. 입가에는 어두운 미소를 드리운 채였다.

“그래. 모아도, 모아도 부족하지.”

“…….”

“더 많은 십자가가 필요하단다. 나의 크나큰 죄를 짊어지려면 말이야.”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참회하려면 더 많은 십자가가 필요하다니….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노장의 여유 같은 걸까.

“더 이상 새로 들일 자리가 없어 보이는걸요.”

작게 말한 그리즈가 기도실 정면을 바라보았다. 살짝 높은 단상 위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십자가마다 새카만 그림자를 짊어지고 있다. 곁눈으로 할머니의 헛헛한 미소가 보였다.

“그렇긴 하구나.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들인 것이 벌써 이렇게 되어 버렸어.”

그 미소에서 이유 모를 허무함이 전해져 왔다. 혹시 영지에 문제가 생긴 걸까. 못 보던 사내들이 수레에 창과 방패를 싣고 나간 이유는 무언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오늘따라 저택이 어수선해요. 할머니께서는 이유를 알고 계신가요?”

할머니의 초록 눈에 허탈함이 머물렀다. 처음 만났을 때의 비밀스러운 슬픔이, 그때보다 더 커진 것 같기도 했다.

“알다마다. 내가 신께 단죄 받고 있는 게지.”

“…….”

“앉으렴.”

단죄라니…? 이렇게나 많은 십자가가 필요할 정도의 죄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추운 것도 아닌데 가슴이 후들후들 떨렸다. 애써 숨을 길게 내쉰 그리즈가 맨 앞 벤치에 앉았다.

음지에 있는 기도실에 걸맞게 습하고 찬 기운이 엉덩이로 올라온다. 눌어붙은 곰팡이 향까지 폐부로 들어와 불쾌해졌을 때였다.

“요즘 들어 죽은 칼스카르가 부쩍 꿈에 보이는구나. 유독 그립기 때문일까. 하긴 돌아가신 지 24년 전이나 되었으니 말이야.”

할머니는 벤치 앞 1인용 테이블에 앉아서,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해 얘기했다. 초록색 눈동자의 시선은 꿈을 회상하듯 허공을 떠도는 중이었다.

“꿈에서 나를 책망하시더구나. 하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내가 미우셨던 게지.”

“…….”

“그 책망을 하루걸러 하루씩 듣다 보니 속이 다 썩어 문드러진 것 같아.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죽기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데 이대로 죽어 버릴까 봐서 두렵기도 하단다.”

주름진 목소리가 흐려지자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밖은 천국처럼 평화로운데 기도실은 지옥 같다. 할머니의 회한과 슬픔이 이 공간에 갇혀 위태롭게 맴도는 듯했다. 소리에 가만히 집중해 보면 무언의 절규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무릎에 얹은 손이 축축해졌다. 습기 때문일까.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걸까….

치마에 손바닥을 닦은 그리즈가 할머니를 주시했다. 촛불을 등지고 있어 온통 새카맸다. 다른 사람 같은 느낌에 무서움마저 들었을 때였다. 할머니가 과거를 곱씹는 듯하더니 오래전의 얘기를 꺼내 놓았다.

“살다 보니 벌써 일흔이 됐어. 13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리도 오래 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

“한때는 이 바이렌하그를 호령하고 칼스카르 대신에 전장에 나가기도 했지. 하지만 의지하던 벗들과 칼스카르 그리고 친척들을 하루하루 잃으니 삶이 허무해지더구나. 가장 허무하고 무력했을 때가 언제인 줄 아니?”

“아뇨. 저는 잘….”

“율리아나를 대할 때였어. 고작 열세 살이었지만 나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악랄한 성정을 가졌었지. 하인들이 자고 있는 창고에 불을 붙였을 때는 세상이 끝난 기분이었단다.”

율리아나…. 그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가 죄책감에 휘말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시선을 다시 집중시키듯 할머니가 부드럽게 물었다.

“창고에 불을 붙인 이유는 알고 있니?”

기분 탓일까. 율리아나를 제삼자처럼 말씀하시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혹시 돌아온 율리아나의 정체를 알게 되셔서 이렇게 부르신 건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그리즈는 일순간 눈앞이 새카매지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아뇨….”

그러곤 앞을 곁눈질했다. 할머니는 테이블에 한 손을 올린 채 편히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스테판과 몰래 외출하기 위함이었어. 불을 내서 시선을 돌리려 한 거야.”

몰래 외출하기 위해 불을 냈다니…. 놀란 그리즈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눅눅하게 젖은 공기가 폐부까지 들어가지 않고 애먼 기도만 적시며 헛돈다. 설마 꿈을 꾸는 중일까.

손으로 매만진 뺨은 습기에 젖어 축축할 지경이었다. 꿈이 아닌 거다. 그때, 할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율리아나의 악랄한 성격을 교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단다. 체벌해 보고 감옥에 가둬도 봤어. 사제들을 불러 퇴마 의식도 해 봤지만 정말이지… 모두 헛수고였단다.”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데마르까지 세상을 떠나자 내 무력함만 강해지더구나.”

할머니가 메마른 입술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보였다. 노동은 하지 않아 고운 편에 속했지만 이상하게도 주름은 더 깊게 느껴졌다.

“아마 내 예순한 번째 탄신일이었을 게다. 사람들 앞에서 내 건재함을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구나.”

“…….”

“부인들을 초대해 사냥 대회를 열었다. 모두들 바이렌하그 숲에 모였어. 유독 사냥을 좋아했던 율리아나도 참가했지.”

그날을 회상하는 듯 초록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하지만 그날따라 사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더구나. 나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절벽이 가까워지자 들고 있던 쇠뇌로 나를 조준하더군. 자기를 감옥에 가둔 걸 앙갚음하고 싶었던 게지.”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할머니를 따라 상상해 보던 그리즈의 눈동자가 우두커니 굳어졌다. 섬뜩한 쇠뇌를 들고 서 있는 회색 머리 소녀가 보였던 까닭이었다.

너무도 선명한 까닭에 지우려야 지울 수도 없었다. 소녀가 쇠뇌로 자신을 조준한 채로 소름 끼치게 웃는 것 같았다. 소리를 막듯 귓가를 매만지는 찰나였다.

“오랜 시간 인내했던 나였지만 그날만은 견딜 수가 없었어.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던 비밀을 그 아이가 알고 있었거든.”

창밖에서 지저귀던 새들조차 기묘한 공포에 놀라 달아나 버린 듯했다. 헛도는 호흡 소리가 들릴 만큼 기도실이 고요해졌다.

“내가 그 아이를 죽였어.”

“…….”

“이미 9년도 넘은 일이란다.”

축축이 젖은 채로 붙어 있던 그리즈의 입술이 탁, 하고 열렸다. 급격히 거칠어진 숨이 다급히 터져 나왔다.

지금 이 순간, 초록색 눈동자가 넌지시 묻는 것 같았다. 내 손녀는 죽었는데 너는 어디서 나타난 거니?

둔기에 후려쳐진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아니, 정말로 뒤에 둔기를 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황급히 뒤돌아보았다.

보이는 건 새카만 어둠뿐이다. 다행히 저 멀리 출입구 아래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럼에도 숨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리즈는 쫓기는 기분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침착해야 했다. 할머니는 왜 저런 말씀을 하신 걸까. 진심이실까? 아니면 정체가 불분명한 손녀를 떠보시려는 걸까?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심호흡만 해 댔다. 흔들리는 숨을 연거푸 삼키던 할머니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 말 이해하지 못했니? 내가… 이 할미가 율리아나를 죽였단다.”

귓가에서 삐익, 하는 이명이 울린다. 기도실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그럴 리가. 어떻게…. 지, 진심… 이신가요?”

다급한 마음이 생각을 앞지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됐다. 손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할머니는 왜 가짜를 받아들였던 걸까?

달리 이유가 있는 건가? 함께 느긋이 산책하고, 티 타임을 갖고 사교계 데뷔를 도운 이유도?

하물며 드레스도 직접 만들어 주셨지 않나! 그건 분명히 애정이었는데….

그런데 왜, 왜 이제야 진실을 밝히시는 거지? 밝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어째서? 어째서! 혼란에 젖은 그리즈의 입술이 정신없이 떨렸다.

“진심이신가요? 그걸 어째서 지금에서야…?”

창백해진 그리즈와 달리, 할머니는 더없이 차분해 보였다. 고뇌와 번민으로 감정을 새카맣게 태운 듯했다. 영혼 없는 껍데기가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아이를 죽인 걸 후회하지 않아.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 아름다운 바이렌하그를 불바다로 만들어 놨을 테니 말이다.”

“…….”

“하지만 누가 알았겠니? 그 아이 없이도 바이렌하그가 이 꼴을 맞을 줄이야.”

어떤 꼴…?

그리즈가 숨을 훅, 훅 내쉬었다. 춥지도 않은데 이가 타닥타닥 떨렸다. 턱에 힘을 주는 찰나 겸허한 목소리가 울렸다.

“궁금하더구나. 원래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지은 죄로, 신께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앗아 가려고 하시는 걸까.”

“…….”

“그 마차를 그냥 두었다면 무언가 달라져 있을까.”

마차…? 마차라니. 지금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걸까.

탁해졌던 붉은 눈동자가 정신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앞에 불타는 마차가 어렸다. 마부의 칼날 같은 비명이 귓가를 찢으려 했다.

안 돼, 안 돼…. 무력한 아홉 살 아이로 또다시 돌아가려 한다. 그러지 않고 싶은데. 앞으로 어떤 고난에도 맞서기로 마음먹기 시작했는데….

그리즈는 달아나고 싶은 심정을 꾹 참았다. 썩어 문드러진 세상에서 이미 11년이나 썩어 왔으니까.

그래, 이것도 견딜 수 있어. 더 험한 꼴도 봐 왔잖아. 그리즈는 폭발할 듯 뛰는 심장 앞부분을 손으로 꽉 짓누르며 이를 물었다.

“마차라뇨. 무슨 마차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 그리즈의 모습에 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한 철옹성 같았다. 할머니의 몸 주변에 어린 불빛이 희뿌연 먼지처럼 아른거린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굉음처럼 번졌다.

“11년 전쯤 비아누트가 멸문당한 왕녀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더구나. 하지만 나는 바이렌하그에 폭탄을 들일 수가 없었어.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후손들에게 아름답게 물려줘야 할 이 땅에. 감히, 감히….”

“…….”

“그래서 내가 용병을 고용해 그리즈 베네딕트를 죽이도록 지시했단다. 내게는 이 땅을 지켜야만 하는 의무가 있어. 설령 누군가를 해치거나,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라도 나는 해야만 했다. 이해할 수 있겠니?”

그리즈는 멍해진 눈을 깜빡였다.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마차를 누가? 누가 누구를 죽이려 했다고?

지긋지긋한 악몽이 눈앞에서 또다시 시작된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어린 그리즈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는다. 창문은 새카만 천으로 가려져 있고, 호송하는 사내들은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몸을 야릇하게 살핀다.

제발, 제발 멈춰 줘…. 삼키고 삼킨 절규가 역류할 지경이 됐을 때, 마부의 비명이 들려온다. 마차가 옆으로 기울고 창문으로 불화살이 꽂힌다.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치미는 절규를 터트리는 순간 마차의 문이 열린다. 신께서 그 소년을 만나라고 도와주시는구나. 환희에 차 마차를 탈출했을 때 새카만 사내가 손을 내민다.

그가 신처럼 보였다. 구원인 줄로만 알았지…. 바보처럼 그 손을 잡고 그 사내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사내가 했던 말이 생생히 울렸다.

“울지 않는다면 목숨만은 살려 줄게.”

살고 싶었기에 울음을 멈췄다. 그 소년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내게 이런 고난을 준 쓰레기들을 엄벌하고 싶어서.

살인자들과 타협한 대가로, 신음만 가득한 매음굴에서 11년을 버텼다. 그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 나를 죽이도록 했다고? 이 영지를 위해서…?

믿기지 않았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동안 머리를 걷어차이면서도 울음소리 한 번 내지 못했던 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 그렇게 얻어맞고도 괜찮은 척해야만 했던 게 모두 당신 때문….

지금도 비가 오면 온몸의 상처들이 욱신거리는데…. 나는 그게 살아 있는 증거라며 기쁘게 여겼어. 그런 내게,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진심이시라면 어떻게 그럴, 그럴 수 있어요? 할머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거칠게 내지른 원망이 기도실을 뚫고 나가 언덕배기에서 메아리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흔들리던 철옹성이 와르르 무너진다. 희뿌연 먼지가 사라지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노쇠한 노인이 선명해졌다.

“율리아나… 율리아나도 내게 똑같이 말하더구나.”

“…….”

“‘할머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런 할머니가 어떻게 나를 감옥에 가둘 수 있죠?’라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흡사 소녀의 것처럼 울려 퍼졌다. 그건 아득한 기억을 무수히도 많이 되짚어 본 사람만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가슴은 증오로 터질 것 같은데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할머니에게 정신없이 따져 묻고 싶었다. 아니, 자리를 박차고 달아나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목 놓아 울고 싶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입술이 얼어붙은 공기만 삼켜 댔다.

그 순간 할머니의 복받치는 흐느낌이 들려왔다.

“미안하다, 얘야. 미안해…. 미안하다. 정말, 가슴 아프도록….”

“…….”

“내가,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내가, 죽어서도 못 갚을 죄를. 너처럼 가련한 아이에게…. 네가 탄 마차를 습격하지만 않았어도…. 손자의 행복을 순순히 빌어 줄 여유만 있었어도….”

폭풍처럼 떨리는 할머니의 음성이 다급하게 이어졌다.

“그, 그러지 못해서 죽음으로도 참회하지 못할 죄를 지었다. 남은 평생 속죄할 생각이었어. 율리아나와 네 안식을 기도하며 신의 단죄를 겸허히 기다리려고 했어.”

“…….”

“하지만 단죄가 예상보다 빠르더구나. 스테판이 율리아나를 찾았다며 닮은 여인을 데려왔던 게야.”

“…….”

“나는 아들의 속내를 알아보고자 맞장구치면서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네 과거를 알아볼수록 내 죄가 떠올라 나를 죽여 가기 시작했어.”

노인은 자신이 옳았다고 말하면서도 괴로움에 질려 있었다. 오랜 세월 자신을 골방에 가둔 채 보였을 모습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조심스럽고 소심한 네가 날이 잘 선 칼날처럼 보였어. 매 순간 내 숨통을 찌르는 것 같더구나. 이것이 단죄가 아니라면 무엇이 단죄인지….”

늘 기품 있었던 할머니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그건, 한 시대를 호령했던 파올라 바이렌하그와 어울리지 않게 초라했고 볼품없었다.

“미안해, 얘야. 미안하다, 이 할미를… 할미를 용서해 다오.”

유난히도 작은 어깨가 슬픔에 젖어 흔들렸다. 테이블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보던 그리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떻게 이리도 쉽게! 저는 용서해 드릴 수 없어요.”

모든 게 미웠다. 할머니의 과오, 막연한 사과, 비통한 눈물, 늦어도 너무 늦은 고백까지.

가슴 한곳에 꾹꾹 담아 왔던 분노가 파르르 떨렸다. 터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제어할 수 없었다.

“저는, 제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시는 게 아니라는 거 알아요! 회개하지 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질까 봐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거잖아요. 그렇지 않고서는, 왜 하필 이때에…. 왜 하필 지금이죠?”

턱에 맺힌 눈물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담담하고 싶은데, 초라해진 할머니의 모습을 비웃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애가 끓었다.

“왜… 왜 그동안 그렇게 잘해 주셨어요, 네?”

하물며 왜 이제 와서…. 계속 비밀로 했다면 당신을 영영 믿고 의지할 수 있었는데. 증오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모든 게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늘 미친 일만 일어나는 이 세상도, 손이 해질 만큼 발버둥 쳐도 늘 제자리인 현실도, 권력을 유지하고자 살인을 저지른 당신도! 모든 게 사라져 버리길 바랐다.

입술을 타닥타닥 떨던 그리즈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불타는 곳에서 눈뜨는 꿈을 자주 꿔요. 그리고 겁에 질려서 그곳을 탈출하기 시작해요.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다리는 부러졌는데도 필사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죠.”

“…….”

“하지만 바보 같던 내가 해냈다고 기뻐하는 건 잠시예요. 다음 날 다시 눈을 감으면 또 같은 자리에서 눈뜨거든요.”

그게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일인지 당신은 모를 거야. 무수히도 많이 탈출하다 보면 차라리 죽고 싶어지게 되는데!

그 비루한 삶이라도 이어 가야만 했어. 나를 낳아 준 부모님을 원망하면서!

이제야 아주 정당한 의문이 든다. 왜 내 부모님을 원망했었을까. 정작 죄를 지은 건 당신들인데?

그리즈가 괴롭게 치마를 움켜쥐며 말했다.

“저는… 사내들이 크게 소리 지르면 몸이 굳어요. 여기, 여기 상처들 보이세요? 맞거나 피부병에 걸려 생긴 상처들이에요. 매음굴에 팔려 가기 전에는 하얗고 예뻤어요. 저도 다른 여인들만큼이나!”

치마를 걷어 허벅지를 드러내자 찍히고 긁힌 상흔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흐느끼기만 할 뿐 상처를 보지 못했다.

“보세요. 할머니만은 보셔야 해요. 보셔야 해요, 꼭.”

그리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이런 상처도 직시하지 못하면서 용서를 구한다고? 당신이 방 안에 숨어들어서 고고히 참회할 동안 나는 무수히도 많은 사람을 저주하고 두려워했어. 그렇게 만들어 놓고 용서를? 그리즈가 치마 끝단을 떨어트렸다.

“그곳에서 병들고 망가지며 쓸모없어져 버렸어요. 이제는 밝고 구김 없었던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

“돌아갈 수 없다고요! 그러니 용서할 수 없어요.”

처음 겪는 분노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허망하게 허공을 주시하던 할머니가 눈물에 젖은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그렇게 되었어도 비아누트는 원했어.”

“…….”

“너를 원했으므로 파혼했고, 입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국왕 폐하의 승인 없이 적진에 뛰어들기로 결정했어. 곧 샤토와 전쟁할 게다. 한 시간? 두 시간 후? 아니, 비아누트는 이미 전장의 중심에 있을 게야.”

눈물이 가득 고인 붉은 눈동자가 할머니에게 향했다. 전쟁? 살기와 절규가 뒤범벅되어 거대한 외침처럼 들리는 그 전쟁? 시체 무덤을 앞에 두고 미망인이 오열하는 그 전쟁. 왜 그 중심에 그가? 왜 벌써…. 거칠었던 그리즈의 숨이 멎었다.

“전쟁이요…?”

“상상할 수 있겠니? 너를 사랑한 죄로 그 젊고 창창한 사내가 피 흘리며 죽는 광경을 말이야. 아니, 너는 상상해야만 해. 너를 이 세상에 놔두고 떠나는 걸 안타까워하며 눈감을 그 아이의 얼굴을, 애타는 숨소리를, 그렇게 숨이 끊기는 광경을! 너는 그걸 상상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어. 네가 그 아이를 그 피바다로 보낸 것과 다름없잖니?”

아니, 그럴 리 없어. 그 사내는 간단한 일로 샤토로 떠났는데. 내게 거짓말할 리가 없…. 얼굴도 보지 않고 출진할 리가 없잖아? 절대 그럴 리는….

참았던 숨이 정신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럴 리가 없….”

“어제 군사 회의를 했단다. 비아누트가 샤토를 점령하고서 곧장 그랑디아로 진군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어.”

“…….”

“내가 오늘 왕궁으로 가서 지원을 요청할 터이지만 국왕 폐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게다. 그래도 비아누트는 적진으로 향하겠지. 이미 그렇게 마음먹은 눈빛을 보았단다.”

그리즈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귓가에서 애타는 저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살아 돌아올게.”

아…. 이리도 갑작스럽게…? 살아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마지막 인사도 없이.

일순간 주체 못 할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나를 진심으로 살고 싶게 만들어 놓고 어째서 당신은 전장에.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어? 그러다 죽으면. 그러다 죽으면!

당장 달려다가 그를 막고 싶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무엇을 해야 하지?

암담한 공황 상태에서 숨만 헐떡였다. 그때 할머니가 테이블에, 액체가 가득 찬 작은 병과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다.

“비아누트를 살리고 싶다면 이 금화 주머니를 들고 저택을 떠나거라. 네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 아이는 돌아올 거야. 아마 너를 찾는 일에 모든 시간을 쓸 게다. 나는 알아. 그게 그 아이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야.”

“…….”

“네가 저택에서 남겠다면 이 약을 먹고 내가 죽을 수밖에 없구나. 나는 그 아이의 주검을, 무너지는 바이렌하그를 볼 수가 없어.”

그리즈는 지금의 이 제안을 하기 위해, 할머니가 지난 과오를 고백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를 저주해요! 제 숨이 끊길 때까지 지옥에 떨어지시길 빌 겁니다.”

그리즈가 금화 주머니를 선택하며 했던 말이었다. 할머니는 겸허히 받아들이셨다.

무수히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이 저택을 무턱대고 나갔다간 타릴루치에서 보낸 첩자에게 암살당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국왕의 조카 손자인 율리아나를 타릴루치가 죽일 수 있을 것 같니? 아니, 쉽게 죽일 수는 없을 게다. 타릴루치는 어떻게 해서든 너를 가짜로 몰아갈 것이며, 정식으로 재판 받게 한 후 공식 석상에서 처형할 게다. 그리고 우리 영지에 보상을 요구해서 식량난을 해결하려 하겠지.”

그 말을 듣고서도 할머니를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이미 한번 마차를 습격했던 전적이 있는데 어떻게 믿을까. 가짜 손녀를 저택 밖으로 끌어내어 죽일 마음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보호해 주겠다는 제안과 달리 위험에 방치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그리즈에게 할머니는 자신의 심복인 검은 천사를 붙여 주겠노라고 말했다. 검은 천사는 영토가 없는 자작이자 기사로, 전 대공 발데마르의 하룻밤 실수로 태어난 사생아라고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출신을 모르지만 할머니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키운 손자였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을 보호자로 동행시키니 믿으라는 얘기였다.

목적지는 노르드발츠 수녀원. 그곳은 인적도 뜸하고 기사단과 수도원이 있어 안전하다고 한다.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1년이든 10년이든 타릴루치 가문이 멸망할 때까지.

할머니는 그 전이라도, 정세가 안정되면 대공 비아누트를 만나게 해 줄 거라고 약속했다. 쿠엔틴과 저택 감시 인력의 시선은 몇 시간 이내로 따돌려 주겠다고 했다.

할머니를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즈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밉지만 무턱대고 독약 병을 건네서 무얼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게 저주를 퍼부으며 금화 주머니를 선택한 이유였다.

대신에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이 상태에서 수녀원으로 가도, 부질없는 자세 교정밖에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즈는 정세에 능한 책사에게 교육받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원할 때면 그랑디아의 레녹스도 방문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랑디아 성과 바이렌하그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려 주기를 원했다.

할머니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더 요구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즈는 다른 요구는 나중을 기약하고서 기도실을 나섰다. 출입문 앞에 쿠엔틴이 서 있었다. 그리즈는 오열한 까닭에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울어서 불거진 눈가를 자연스레 가렸다.

“쿠엔틴 경, 여기 계셨군요.”

쿠엔틴이 짧은 갈색 머리칼을 정리하며 살짝 고개 숙였다.

“없어지신 줄 알고 한참 찾았습니다, 아가씨.”

평소 같았다면 어색해했을 그녀였지만 오늘은 그를 담담히 지나쳤다. 할머니가 마차를 습격하고 율리아나를 죽여야 했던 이유, 스테판이 저 꼴이 된 이유, 대공 비아누트가 전장으로 향한 이유까지 모두 타릴루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찢어 죽이는 상상을 다시 시작했다. 시간이 부족할 따름이었다.

“미안해요. 대화가 좀 길어졌습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회색 긴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 끝을 바라보던 쿠엔틴이 그녀의 옆에서 걸었다.

갈색 시선이 그녀의 눈가를 훑는다. 평소라면 시선을 모르는 척하고 달아나 버렸을 붉은 눈동자가 문득 그를 주시했다.

늘 눈 속에 가득했던 불안과 긴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새빨갛게 타올랐다가 증발해 버린 듯했다. 그러자 눈동자에 선명히 드러난 것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복수심이었다.

“아가씨,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다른 사람 같았는지 쿠엔틴이 고개를 갸웃했다. 슬쩍 눈을 감았던 그리즈는 하늘을 유유히 올려다봤다.

“혼자 보내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요.”

“…….”

“전하께서도 샤토에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예…. 아마도요.”

거짓말….

늘 선했던 그리즈의 얼굴에 서글픔과 독기가 어린 것도 같았다. 그 점을 의아해하던 쿠엔틴이 부은 눈꺼풀을 살펴봤을 때였다.

“만약 제가 전하께 돌아와 달라고 서신을 보내면… 돌아오실까요?”

“그건… 너무 바쁘신 까닭에 확인하시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리즈는 떨리는 눈꺼풀을 힘주어 감았다가 떴다. 자신이, 진실을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될 백치 같았다. 게다가 우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대공의 작고 예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

그런 건 싫은데.

그럼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리즈는 궁금했다.

“잠깐 바람을 쐬고 싶어요.”

나날이 활동력이 강해지는 티아가 먹을까 봐서 정원의 봄 송이를 뜯기 시작했다. 하인들이 도와준 덕에 제거하는 속도가 빨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사 단원으로 보이는 소년이 봄 송이를 뜯는 쿠엔틴에게 허겁지겁 달려왔다.

“저… 저택에 검은 천사가 방문한 것 같습니다. 빨간 마차가 들어왔는데 기사들이 검문하지 않더군요.”

“그래?”

쿠엔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또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다른 기사가 달려와 보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후작 각하, 아니 스테판 님께서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그리즈는 봄 송이를 한 다발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엔틴과 감시병을 따돌리겠다는 할머니의 말뜻을 이제야 알게 됐으므로.

“아가씨, 방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곧 방을 지킬 인력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쿠엔틴 경.”

“노파심으로 말씀드리지만 스테판 님께서 타릴루치 출신의 사내들을 이곳의 하인으로 추천했다는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어두워지면 절대 방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다급하게 말한 쿠엔틴이 기사를 따라나섰다. 그리즈의 얼굴은 유독 어두워졌다. 타릴루치의 첩자가 이곳의 하인으로 고용됐다니. 저택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더 명확해진다.

그리즈는 봄 송이를 한가득 쥐고서 방으로 돌아갔다. 아까 미처 둘러보지 못한 베개 옆에 사탕 주머니가 놓여 있다. 대공 비아누트가 놔두고 간 것 같았다. 안에 사탕 열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엊그제 스테이크를 모두 먹었으니 다섯 개 그리고 어젯밤의 일 다섯 개를 포함하면 열 개면 될 터인데. 나머지 다섯 개는 뭘까.

생각하다가 사탕 하나를 입 안에 넣고 굴렸다. 눈을 감자 대공 비아누트의 나른한 숨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살아 돌아올게.”

담담했던 그리즈의 얼굴이 느릿하게 일그러졌다.

누구보다 당신을 지키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떠나는 것뿐이라니….

손등으로 눈가를 꾹 누른 그리즈는 그가 준 금화와 귀걸이, 회중시계를 챙겨 그의 방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에게 편지를 남기고 싶었다. 잠시 떠나 있을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할까. 아니, 기약할 수 없는 기다림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가 이곳저곳 찾아 헤매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상상만 해도 가슴이…. 그가 행복하길 바랄 뿐인데….

“상상할 수 있겠니? 너를 사랑한 죄로 그 젊고 창창한 사내가 피 흘리며 죽는 광경을 말이야. 아니, 너는 상상해야만 해. 너를 이 세상에 놔두고 떠나는 걸 안타까워하며 눈감을 그 아이의 얼굴을, 애타는 숨소리를, 그렇게 숨이 끊기는 모습을! 너는 그걸 상상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어. 네가 그 아이를 그 피바다로 보낸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살짝 열린 대공 방의 창문 틈으로 무기를 정리하는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머지않아 저들의 얼굴에도 피가 튀기겠지. 운이 나쁜 소년들의 심장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그렇게 숨이 끊기고….

소중한 아들들을 가슴에 묻고 피눈물을 흘릴 어미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 비극이 나 때문에…. 차라리 전쟁을 단념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 그녀는 유난히 무거운 펜촉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가 너무 주제넘은 꿈을 꾼 것 같습니다. 행복하세요. 그뿐입니다.

쪽지를 남긴 후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마구간에 도착했다. 손에는 할머니에게서 받은 금화 주머니와 그에게서 받은 사탕, 봄 송이 한 다발, 박제 나비 액자를 싼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마침 스테판을 찾기 위한 수색대들이 저택 밖으로 나서는 중이다. 검은 천사가 타고 있을 거라는 빨간 마차는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그림자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즈가 마차에 오르자 바퀴가 유유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커튼 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햇살에 손바닥을 대자 신과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리즈는 신께 겸허히 기도드렸다.

신이시여, 그 사람을 지켜 주세요.

이번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앞으로는… 당신께 무엇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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