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32)

***

어느덧 하루가 저물었다. 목욕을 마친 그는 다시 의상실로 향했다. 내일 오전, 샤토로 출진할 예정이므로 훈련소에 가서 최종 점검을 지켜볼 예정이다.

의상실에서 그가 옷을 입는 내내 브람은 안절부절못했다. 그 점을 느낀 그가 브람을 유심히 살폈다.

그에게 오전처럼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힌 하인들이 의상실을 나섰다. 그때가 되어서야 브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저… 조금 전에 벨린이 찾아왔었습니다.”

그리즈가 나타났을 때부터 비아누트는 벨린에게 특이점을 보고하라고 명했다. 다만 벨린은 아주 가끔 찾아왔고 그리즈에게 유리한 사실만을 알려 왔다.

퍽 맹랑한 하녀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너그럽게 지켜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그러고 보니 그리즈가 월경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오늘 알았지 않나. 가장 중요한 사실임에도. 그의 입술이 불쾌하게 맞물렸을 때였다.

“대청소하다가 아가씨의 방에서 이걸 찾았다고 가져왔습니다.”

그는 브람이 내민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날짜가 지난 외출증이다.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외출하기 위해 하인들이 때때로 빼돌리던 물품이었다.

“혹시 승인 없이 외출하시려던 걸까요? 대체 무엇 때문에….”

소파에 팔을 걸친 비아누트는 입술을 유유히 매만졌다. 그러다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시 뜬 눈동자에 새파란 독이 깃들었다.

“브람, 훈련소 방문을 취소해.”

서늘한 미소가 밴 잇새에서 짧은 탄식이 흘렀다.

“아가씨,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브람이 그리즈의 방을 노크했다. 그리즈가 사전을 찾아가며, 레녹스에 보낼 서신을 쓰다가 문을 바라봤다.

조금 의아했다. 지금은 저녁 8시인데. 일정보다 일찍 돌아온 걸까.

“금방 나갈게.”

그녀는 보안을 위해, 양피지를 둘둘 말아서 손에 쥐었다. 방을 나서는데 목이 칼칼하고 허리가 묵직했다.

할 말을 삼키기만 하는 스스로가 답답해서 홀로 항변해 봤다. 당당한 자세를 갖추면 자연스레 우러날까 싶어 허벅지에 쥐가 날 때까지 서 있기도 했던 탓이다.

고생 끝에 얻은 자세로 방을 나섰다. 늘 긴장으로 동그랗게 떴던 눈도 느슨하도록 힘을 뺐다.

복도를 여유롭게 거닐자 오늘 바스라졌던 정신이 채워지는 것도 같았다. 정말 최악의 날 중 하루였다.

티아는 자꾸 봄 송이 꽃을 먹으려고 하고, 늘 저열했던 스테판은 기어코 눈에 광기까지 번뜩였으니까. 마치 그랑디아의 막내 공주라는 대답을 듣기로 작정하고 들이닥친 사람처럼 말이다.

“비아누트와 붙어먹은 거 맞지? 네가 베네딕트의 막내 공주라면 너무 무능해서 홀로 설 능력이 없으니 비아누트한테 몸을 팔아서 복수할 거라고 말씀하시던데, 그랑디아의 왕녀께서.”

“…….”

“네가 매음굴 걸레라는 걸 전략상 말하지 않았는데도 왕녀께서 네 속을 너무 잘 알고 계셔서 놀랍더군.”

스테판의 생각을 알 수는 없으나, 가짜 율리아나가 매음굴에서 왔다는 정보를 클라우디아에게 언젠가 판매할 작정 같았다. 그게 얼마나 추한 일인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덜컥 겁이 났다. 해코지라도 당하면, 매음굴에서 왔다는 걸 그가 사람들에게 말해 버리면….

티아가 짖기 시작하자 입술이 더 굳었다. 대항했다가 스테판이 홧김에 티아를 걷어찰까 봐서. 매음굴의 사내들이 그랬듯.

그 순간 치욕을 갚아 주듯 화살이 날아온 것이다. 팔뚝을 피로 적신 채 나뒹구는 스테판을 보며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잘못 쏜 화살이 스테판을 맞힌 줄 알았으니까.

이런 행운은 다신 없을 테니 앞으로 대비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대공 비아누트가 2층 창문 밖으로 나타난 거다.

쿵 내려앉았던 심장이 벅차게 뛰었다. 스테판이 쓰러진 게 결코 행운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첫 만남, 피범벅 상태로 나타난 대공을 봤을 때의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강하고 찬란하고 아름답다. 그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그리즈는 자신의 무능함도 오롯이 느꼈다.

그래서 후련할 때까지 울고서 설움을 훌훌 털어 버렸다. 이제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변하고 싶었다. 그의 방으로 향하는 그리즈의 발걸음이 유독 기운찼다.

앞서던 브람이 대공의 방 앞에 도착해 방문을 노크했다.

“대공 전하,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웬일인지 방 안이 조용하기만 했다. 브람이 복도를 둘러보다가, 복도 가장 안쪽 방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전하께서 쿠엔틴 경에게 지시 사항이 있으셔 잠깐 자리를 비우신 것 같습니다. 곧 오실 것이니 먼저 들어가 계시지요.”

문이 열리자 그리즈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방 중앙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은 창문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것 빼고는 지난번과 다름없었다.

그의 지위와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방이다. 모든 가구가 장인이 공들여 만들었을 법하게 화려했고,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렇게 우아한 방에서 그녀는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중앙의 붉은색 의자를 보자, 지난날 성난 아래를 달래던 그가 너무도 강렬하게 떠올랐으므로.

예민해진 신경을 건드리듯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그제야 그리즈는 의자에 나신으로 앉은 사내 대신, 느긋하게 걸어 들어오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아까보다 그의 옷차림이 더 완벽했다. 검은색 재킷에는 단추가 무수히도 많았고, 옷깃과 소매는 금색 자수가 놓여 있었다. 팔뚝의 굵은 띠에는 그가 바이렌하그 대공이라는 표식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버지가 저런 걸 하셨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는데…. 외부로 나갈 때. 혹은 출진하기 전 왕궁에 들를 때….

쿠엔틴에게 들은 바로는, 대공이 간단한 일 때문에 내일 샤토로 향할 거라고 했다. 그러곤 자신은 저택에 남기로 했으니 괘념치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즈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샤토라면 대공이 지난번에 다녀왔던 곳일 텐데…. 샤토의 왕 목을 국왕에게 바쳤다고 했으니 적국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째서 다시 그곳으로….

아냐, 생각하지 말자. 타릴루치 때문에 예민해진 것뿐일 테니까. 그녀가 애써 평안하게 뒤돌아봤다.

그가 다가온다. 그의 외모는 더없이 빛나는데 주변은 어두워지는 듯했다. 그의 성격과 품행이 정적이기 때문에? 아니, 그가 눈길을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그녀의 앞 소파에 앉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샹들리에의 촛불 수십 개만 아스라이 빛난다. 그는 등받이에 왼팔을 걸치며 다리를 꼬고는 그녀를 주시했다. 눈동자가 유독 차가웠다.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걸까.

그리즈는 그를 오롯이 살펴보았다. 눈썹은 깔끔한 형태였지만 짙어서 왠지 날카로워 보였다. 속눈썹과 얼굴선은 수려했지만 역시나 예민한 느낌이 강했다. 서늘한 사제 같다고 해야 할지. 어쩌면 그가 모든 욕구를 억누른 듯해 보이기에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몰랐다.

“저, 준비는 다 되셨나요?”

평소보다 더 차분한 기운을 느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어두운 눈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하나 남았어.”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눈동자의 초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하긴 오늘 하루 내내 바빴겠지. 그래서 피로한 모양이었다.

“할 일 다 끝내셨을 때 다시 올까요?”

그때 그의 시선이 둘둘 말린 서신에 닿았다. 그리즈 역시 서신을 흘끗 내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레녹스에 보낼 서신이에요. 방을 비운 사이에 누가 볼까 봐서 가져왔어요.”

들뜬 대답에도 방 안이 고요하기만 하다. 정적이 심장을 서서히 짓누르는 것 같았다.

“저… 읽어 보실래요? 초입부밖에 쓰지는 못했지만….”

한 발, 두 발. 그리즈는 그의 무릎 옆에 서서 서신을 슬쩍 내밀었다.

그는 미동이 없다. 정말 열심히 썼는데…. 누군가에게 보여 줘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읽고 싶지 않은 걸까.

“하긴… 지금은 고작 몇 줄밖에 없어요. 다 쓰고 다시 보여 드릴게요.”

왠지 예전처럼 냉대받는 듯한 기분에 아랫입술을 물었다. 혹시 무엇을 잘못한 걸까. 아까 울었던 게 한심하게 보였던 건 아닌지….

신이 났던 그리즈의 목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저… 그럼 돌아갈까요?”

그때 힘이 빠지기 시작한 손을 그의 검지가 쓱 훑었다. 간지러워…. 아랫입술을 지그시 무는데 그가 손목을 부드럽게 긁더니 서신을 빼 갔다.

긴 손가락이 서신을 묶은 끈의 매듭을 풀었다. 등받이에 느슨하게 등을 기댄 그는 시선만 내리깐 채 서신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받이에 걸친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는 모습이 왜인지 초조해 보였다. 하지만 표정은 오만한데…. 그를 살피는 그리즈의 눈동자가 유독 바빴다.

서신은 고작 여섯 줄 남짓이었다. 이미 읽고도 남을 시간. 그는 좀처럼 서신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아니, 읽지 못하고 있는 게 맞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양피지만 애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올라와서는 그녀를 빤히 주시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아래쪽 속눈썹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아 그녀가 숨을 참았을 때였다.

“내 것도 줄까.”

그의 것? 그 역시 서신을 썼나?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검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둘둘 만 양피지를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여 줬다. 체온이 스며들어 손바닥이 온통 뜨뜻했다.

조금 추운 기분이 들었기에 당장은 양피지를 펼치기 싫었다. 안에 나쁜 게 있을 것 같은 예감도 들었기 때문에.

그러자 그가 양피지를 유유히 펼쳐 줬다. 망설이던 붉은 시선이 양피지로 향했다. 익숙한 글자가 그녀를 반기기 시작했다.

율리아나, 디르크.

위 사람의 외출을 허함.

- 3/13 행정관 른네. 행정관 보아느.

틈날 때 살살 긁어 냈던 까닭에 디르크의 이름은 반쯤 지워져 있었다. 13이라는 글자를 18로 바꾸려고 펜촉으로 긁어 본 흔적도 남아 있었다.

그리즈는 내쉬는 호흡을 죽였다. 당혹감에 뜨거워진 뺨이 쭈뼛거리며 타들어 갔다.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는 까닭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째서 외출증이 이곳에…. 허름한 동화에 끼워 뒀었는데. 누구도 볼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게 어떻게….”

지금껏 더없이 담담해 보였던 대공은 눈동자에 격렬한 감정을 드리웠다.

“그래, 이게 어떻게 네게.”

몸서리쳐지도록 낮은 질문에 그리즈는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물었다. 이 외출증으로 몰래 빠져나가려던 거라고 오해한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가 누구인지 알고 난 후부터는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

“나갈 생각 없었어요.”

침울한 눈동자가 그를 결백하게 바라봤다. 조각상처럼 미끈한 입술이 그럼에도 차갑게 움직였다.

“그럼 증명해 봐.”

증명. 나갈 생각이 없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면 좋을까.

증명할 수 없다는 걸 알고서 일부러 요구한 걸까. 어째서…. 갓 탈출했던 감옥에 다시 갇힌 기분이 든다.

더없이 삭막해진 공간에서 그리즈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의 눈동자만 바라봤다. 그 찰나 그가 무자비하게 물었다.

“몇 번 말할까.”

그리즈는 당혹감으로 떨려 오는 아랫입술에 힘을 줬다. 스테판의 멸시를 견뎌 낸 심장이 대공의 냉대에는 멈추는 것 같았다. 잡역부 마리아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가 너무 야속했다.

“찢을게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양피지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마음으로는 북북 찢고 있는데 힘이 없어서 늘리기만 했다.

이렇게 쉬운 것도 제대로 못 찢고,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고, 제대로 오해를 풀 능력도 없고.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찢긴 양피지 끝이 손톱에 살짝 걸렸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양피지를 마구 찢어서는 보란 듯이 움켜쥐었다.

시간만 하염없이 흐르던 찰나, 때마침 9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곳에서 샤토까지 반나절 이상이나 걸린다고 한다. 고되게 말을 타려면 그 역시 체력을 보충해야 할 터.

이렇게 궁지에 몰릴 시간에 그에게 줄 팔찌를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만 강해지니까.

그녀가 그에게 뒀던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출타하셔도 저는 떠나지 않아요. 샤토에서 돌아오시면 바로 아실 수 있을 거예요.”

“…….”

“내일 일찍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제야 오만했던 눈동자가 어둡게 흔들렸다. 지금의 상황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했다.

돌아선 그리즈는 애써 태연하게 걸었다. 찌릿찌릿 아파지는 심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가 원했던 증명은, 돌아오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방법으로 하고 싶었다. 그 안에 레녹스의 답신까지 받아 내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등 뒤는 고요하면서도 묘하게 뜨거웠다.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더 평평하게 펴는데, 그의 저음이 들려왔다.

“이대로 가려고?”

그녀는 두 발을 멈칫, 멈추며 뒤돌아보았다.

“네…. 오늘은 저도 피곤해서… 새벽에 배웅하러 올게요.”

이내 몇 걸음 더 걸어서 문 앞에 섰다. 다시 정적만 가득했던 방 안에 낮은 탄식이 번졌다.

멀어질 때면 늘 반응을 관찰하기만 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에 걸쳐 있던 외눈 안경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그게 거슬리는지 손으로 쥐어서 툭 잡아당긴다. 일순간 끊긴 체인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끊긴 줄의 끄트머리를 내려다보던 그가 그리즈를 주시했다.

“네가 가면, 나는?”

그가 숨을 크게 마시니, 단추가 빽빽한 겉옷이 흉통을 조였다. 긴 손가락이 단추를 쓱 훑었다. 갑갑했는지 그가 단추를 풀며 차분히 말했다.

“이리 와, 그리즈.”

그 목소리가 부드럽게도 들렸다. 귀여운 강아지를 부르는 것처럼.

하지만 강아지는 싫은데…. 하루 내내 방을 지키고 있다가 꼬리를 흔드는…. 그리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 묘하게 애타는 한숨이 울렸다. 여전히 흉통이 조이자 그는 겉옷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핏줄이 불거진 손이 앞섶을 움켜쥐고는 지그시 뜯었다. 무수히도 많은 단추가 데굴데굴 나뒹구는데, 파란 눈은 그녀만 주시했다.

“매번 네가 나가게 뒀던 것도 이제 후회되는군.”

이대로 나가려 하면 저 손이 목덜미를 쥘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문을 여는 그리즈의 손이 자신감을 잃었다.

그때 인기척이 울리더니 새카만 그림자가 그녀의 뒤를 유유히 덮쳤다. 손이 그녀의 머리 위로 쑥 튀어나와서 문을 닫았다.

쾅! 문에 달려 있던 종이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쨍, 쨍, 쨍, 쨍…. 그 소리가 심장을 쿡쿡 건드리는 것 같았다.

그의 그림자가 뜨거워서 목 뒤의 솜털이 바짝 섰다. 둥글게 파인 드레스의 등까지 따끔거리는 듯했다.

그때 단단한 검지가 하얀 등을 쓱 훑었다. 그러다 파인 드레스를 가로지르는 끈의 매듭을 꾹 눌러 밀었다.

드레스를 벗기려는 것 같았다. 그리즈가 숨을 참았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지, 지금은 싫어요. 이런 모습 싫어요.”

내 모습이 싫고, 당신도 무서워. 그녀가 문손잡이를 다시 잡아 열려고 했다. 리본 끝단을 누른 그의 손이 기어코 매듭을 풀었다.

드레스 앞쪽이 앞으로 쏠리며 가슴이 제 크기를 찾았다. 어디 가 보라는 듯 그가 문을 열려고 했다. 미쳤어…. 그런 사내에게 갇혔다는 걸 느꼈을 때, 나른한 저음이 들려왔다.

“대답해 봐. 그렇게 가면, 나는.”

열을 띤 로즈마리 향기가 진하게 끼쳐 온다. 아찔해지는 순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를 그가 지그시 물었다가 놓았다. 마치 응징하는 것 같았다.

“몸 부풀리는 건 봐줄 만해. 그런데, 고작 이 정도도 못 버티고.”

뜨끈한 입김이 목을 지그시 옭아맨다. 조금 전,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던 사내가 아닌 것 같았다. 몸을 휘감은 그의 그림자가 어지러이 일렁였다.

“내일 클라우디아가 나타나서 추궁하면 어떻게 하게.”

“…….”

“‘증명해 봐, 네가 율리아나인 거.’ 이래도 끝까지 버터야 되는 거, 알지.”

그걸 왜 지금…. 혼란스러운 순간 목덜미에 슬며시 박힌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새 며칠이 꿈같았는데, 오늘은 악몽 같아. 막상 자리를 비우려니까.”

“…….”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군.”

화가 난 게 아닌 것 같았다. 불안함, 어지러움, 애욕, 그런 감정들이 느껴졌다. 감옥에서 살다시피 한 여인이 몰래 세상에 나가 험한 꼴을 당할까 봐서. 혹은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들에, 속절없이 당할까 봐서.

양피지 조각들을 쥔 채 문을 짚은 그리즈의 손이 툭툭 아래로 흘러내렸다.

“읏, 저, 대공 전하….”

“나, 싫어? 그냥 네 손난로처럼 굴까.”

조금 전, 싫다는 말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즈는 숨을 파르르 떨며 작게 대답했다.

“아뇨. 저는… 제가 싫어요.”

늘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고 애를 태웠던 그는 이번만큼은 뜸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좋은데.”

“그런….”

“그럼 내가 가져야겠네.”

그를 돌아보려는 순간 허리께에 그의 하반신이 살짝 닿았다. 굵다란 기둥이 단단해진 채로 그의 장골께까지 누워 있는 게 느껴졌다.

허리에 닿는 것을 느꼈는지 그가 침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쭉 차분했던 사람인데…. 아래는 언제부터 이렇게….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누군가 나타나서 정체를 의심하면 움츠리지 말고 일단 율리아나라고 주장하는 게 최선이라는 걸 그의 말을 통해 알았다. 조심스레 뒤돌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서늘했던 아까와는 달리 퇴폐적으로 돌변해 버린.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랫입술을 태연히 물었다가 풀고, 붉은색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탄식하며 스스로 애를 태운다.

정말로 그의 중요한 무언가가 되어 버린 느낌에 심장이 찌릿해졌다. 이상하게도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 사내에게만 약한 심장이었다. 내 몸에 붙어 있는데 남의 것만 같은 기분에 차라리 다시는 뛰지 않길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멈췄던 심장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은 듯 더 세차게 뛰곤 했다. 그래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한마디 하기가 어렵고, 그의 반응이 때로는 두렵고, 그가 차갑게 굴 때마다 원망스럽기만 한데. 이상하게도 그게 그를 좋아한다는 방증인 것 같았다.

외출증을 써 봤자 갈 곳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추궁하는 그의 심정 역시 비슷하게 느껴졌기에 억울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바닥에 달라붙은 양피지 조각들을 털어 내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가… 가지세요, 그럼.”

“…….”

“근데 끝까지 가지셔야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었는지,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이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발이 아주 쉽게도 땅에서 떨어졌다. 그의 키만큼 높아진 시야에 당황하다 정신을 차리니 문 옆의 1인용 의자에 앉게 됐다.

피하지도 못하게 앞에 선 그는 퇴로를 막듯 상체를 숙였다. 한쪽으로 쓸어 넘겨진 검은색 머리칼 사이로 새파란 눈동자가 일렁인다. 이내 그는 의자 끄트머리에 한쪽 무릎을 걸치고서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진짜 가져?”

느긋하게 휜 입술에 흡족함이 깃드는 것도 같았다. 그녀가 고갤 끄덕이자 흥분감을 억누른 저음이 번졌다.

“그래, 기꺼이.”

달아오른 혀가 입 속으로 와락 덮쳐 들어온다. 그 정도로 부족한 듯 그녀의 혀를 찾아 정신없이 비벼 대기 시작했다.

“으읍, 읍, 으….”

그녀는 목구멍으로 훅훅 넘어오는 숨결을 정신없이 삼켰다. 말캉한 혀가 입천장을 눌러 비비자 아랫배 속이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혀가 버거워서 피하고 싶은 마음 반, 기분 좋은 곳을 마구 핥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반이었다. 몽롱한 기분으로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쥐었다.

탄탄한 근육 사이에서 핏대가 펄떡인다. 그의 몸에 휘둘리기 시작한 건지, 목덜미를 머금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점점 거칠어지는 사내의 숨소리를 느낀다면 진득한 황홀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피하기만 하던 그녀의 혀가 적극적으로 반기자 그의 혀가 난폭하게 날뛰었다. 꾹 억눌려 있던 그의 본능을 잘못 건드린 건지도 몰랐다. 얼굴이 점점 뒤로 밀렸다. 그러다 뒤통수가 의자 등받이에 지그시 박혔다.

너른 어깨가 몸을 단단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갇힌 채로 범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입술을 떼고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흣, 아아, 하아….”

예전 같았다면 겁먹은 강아지처럼 벌벌 떨었을 테지만 이제는 그의 눈을 제대로 볼 정도는 됐다. 커다란 손이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을 칭찬하듯 뺨을 매만졌다.

그러다 머리칼 안으로 손을 넣어 귓바퀴를 천천히 더듬었다. 귓구멍이 가려웠다. 신경이 팽팽히 당겨지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흥분감이 어려 있었다. 기분 좋은 것 같기도 했고, 괴로운 것 같기도 했다.

그리즈는 그를 괴롭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내일 떠나야 하는 현실? 아니면 성욕, 혹은 타릴루치 때문일까.

“괴로워 보여요. 대체 무엇 때문에….”

“괴롭다니. 좋은데.”

좋다니, 적어도 굶주린 짐승처럼 배고파 보이는데.

“좋으시다니, 지금 전혀….”

그가 의자에 걸쳤던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그녀는 자신의 앉은키랑 비슷한 눈높이를 바라봤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내가 기꺼이 몸을 낮추다니.

“좋아, 그리즈.”

그때 무릎에 그의 것이 지그시 닿았다. 여인의 안쪽이 얼마나 비좁든지 뚫고 씨물을 뿌릴 수 있도록 딱딱해진 상태였다. 흉흉하게 발기한 감각조차 즐기는 듯 그가 아래를 아예 일부러 댔다.

그녀의 검지를 천천히 핥기 시작했다. 젖은 손끝으로 입김이 느긋하게 끼쳐 온다. 그녀가 검지를 까닥이자 무릎에 닿은 성기가 본능적으로 꺼떡거렸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꿋꿋이 머리 안에서 맴도는 말을 그녀가 홀린 듯이 꺼내 놓았다.

“외출증은…. 흣, 이곳에 있다가는 어떻게든 죽을 것 같아서 빼돌렸어요. 요하네스를, 으읏,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전하라는 걸 알게 된 후로 잊은 거예요. 거기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 버렸을 텐데….”

평소 같았다면 진심인지 표정을 관찰했을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은 여인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로, 가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발기한 아래를 달래려 하는 짐승 같았다. 미끈한 눈꺼풀이 기분 좋게 감겼다.

결국 고삐를 푼 느낌이다. 그리즈는 휘둘리는 게 정작 누구인지 헷갈렸다.

“으읏, 하지만 지금은….”

브람이나 쿠엔틴이 언제든 찾아올 수도 있는데…. 이렇게 큰 공간에서는 소리가 울릴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조심해야 할 이유가 많았다.

그녀의 손이 팔뚝을 쥐었다. 그러자 그가 손등을 입술로 쭉 빨아들이며 말했다.

“이대로 보내면 며칠간 내 생각날걸.”

“저만요…?”

작게 묻는 사이 그가 드레스를 앞으로 당겨 벗기고 네글리제를 내렸다. 풍만한 가슴이 완전히 보이자 목소리가 더 나른해졌다.

“그래, 너만. 나는 바빠서.”

샤토, 그곳에서의 일 때문에 바쁘게 될 거라는 얘기 같았다. 하지만 쿠엔틴은 위험한 전쟁은 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의문이 드는 순간, 젖은 입술이 젖꼭지를 부드럽게 빨아 당겼다. 꼭지를 단단하게 세우는 걸로는 부족한지 입에 머금고 혀로 느릿느릿 훑었다.

소리가 복도에 울릴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말캉한 혀가 예민해진 유두를 능글능글하게 쓸었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빨라지자 그녀의 눈앞은 새카매졌다. 불안감이 강했던 첫 경험 때와는 감각이 달랐다.

그때는 대공이 성적 호기심을 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항 없이 받아들였었다. 무엇이든 소중히 여길수록, 잃으면 더 큰 충격을 받는 법이니 즐기려고 해 봤다. 그러니 즐거워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노력하지 않는데도 온몸이 후끈거린다. 가슴을 빨며 흥분하는 사내의 턱이 보였기 때문이다.

“흣, 으….”

입술로는 부족한지 손으로 부드럽게 주무르며 흥분한 숨을 삼킨다. 그의 다른 손은 치마를 허벅지 위까지 걷어 올리고 있었다.

“읏, …간지러워요.”

깜빡,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찰나 입술을 뗀 그가 그리즈의 무릎 안쪽으로 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상흔이 벤 다리가 벌어진 채로 양쪽 팔걸이에 걸쳐졌다. 탄탄했던 속옷이 곧장 북 찢겼다.

“으읏, 잠깐….”

그녀는 축축한 가슴을 느낄 겨를도 없이 손으로 비부를 가렸다. 그는 가슴 한쪽을 드러내고는 다리를 벌린 그리즈의 자세를 보는 걸로도 흥분되는지, 기분 좋은 저음을 흘렸다.

“잠깐?”

새파란 눈동자가 손 중앙에 꽂힌다. 그곳을 유심히 보던 그가 손을 슬쩍 치웠다.

그녀의 기분이 붕, 들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이 땅의 대공이라니. 그것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의 손이 초조하게 치마를 쥐었다. 시야 아래로 체모가 거의 없는 둔덕이 보였다. 피임차를 먹은 후로 줄곧 그랬던 것 같다. 아마 분홍빛 비부가 장애물 없이 드러났을 거다.

새파란 눈이 그걸 보고 흥분하는 듯했다. 갑자기 피가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빠, 빨리….”

이렇게 아래를 모조리 드러난 자세로 오래 있는 게 버거웠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검지로 비부를 길쭉하게 훑었다.

“흣!”

그러다 음핵 주변을 둥그렇게 긁으며 움찔거리는 감각을 느낀다. 마치 굵은 것이 안을 부드럽게 건드릴 때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피는 듯했다.

“아뇨, 그렇게가 아니라….”

이건 싫냐는 듯 바라본 그가 옆의 테이블을 끌어서 그리즈의 앞으로 옮겼다. 그러곤 거울로 아래를 비췄다. 수치스러운 자세에도 입구가 움찔거리며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보다 그를 더 좋아할 여지도 있는 몸이 흡족한지 기꺼이 상체를 낮췄다.

“잘 보이게 해 줘.”

이내 그리즈의 두 손을 끌어 손수 아래를 벌리게 했다. 어떡해…. 그녀가 어쩔 줄을 모르다가 놓쳐 버리자 그가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맞췄다.

“그래, 내가 할게.”

달아오른 입김이 민감한 곳을 습하게 건드렸다. 그 순간 단단한 검지와 중지가 비부 바깥쪽 살을 벌려서 꾹 눌렀다.

아래가 팽팽히 당겨지자 들뜨기 시작한 그녀를 돕듯, 대공의 혀가 음핵을 질척질척 밀어 올렸다. 아…. 그가 닿으면 유난히 짜릿했던 곳이었다. 그녀가 입을 틀어막은 채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으읍, 읏, 읍, 흡!”

열 오른 음핵이 바르르 떨리자 혀끝이 끈질기게 문지른다. 기분 좋으면서도 어쩔 줄을 모르는 그녀가 지나치게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조금 전 좋다고 했던 말이, 아마 이 순간을 기대하고 했던 말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의 아래를 벌리고, 핥으면서 흥분하고…. 서늘한 외모 속에, 이런 성벽이 있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정말 소리를 흘릴 것 같아서 입을 더 틀어막았다. 그때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가 조용한 걸 보면 하인이니 갑자기 문을 열 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숨을 죽였다.

대공은 한눈파는 걸 응징이라도 하듯, 음핵을 부드럽게 쥐어 돌렸다. 안쪽까지 짜릿해질 만큼의 쾌감이 그녀를 덮쳤다. 몇 번만 더 해 주면 절정에 오를지도 몰랐다.

“으읍, 읍, 읏!”

통제력을 잃은 몸 때문에 의자가 쿵쿵 흔들렸다. 그가 그대로 입술을 떼자 마구 애무당한 비부가 거울에 비쳤다. 그가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입구에 불투명한 물이 너저분히 맺혀 있었다.

“예쁘네. 가질 만해.”

이대로 이성을 놓게 할 작정인지, 그의 혀가 입구를 슬쩍 훑었다. 일순간 그리즈는 황홀한 신음을 흘렸다.

“아….”

엊그제 굵은 성기가 느릿느릿 드나들었던 감각이 유독 살아난다. 어서 그때처럼 문질러 달라고 보채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게 또 부끄러워져서 온몸이 빨갛게 타올랐다. 손으로 비부라도 가리려던 찰나, 그가 이번에는 입구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미끈한 코가 닿는 느낌에 놀란 건 잠시였다. 그의 혀가 살점을 부드럽게 훑더니 안쪽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음순이 두툼하게 벌어지는 광경이 거울에 비쳤다. 받아들이기가 너무 음란했다. 그리즈의 눈앞이 핑 돌았다.

“흣, 그렇게는….”

꼿꼿한 혀가 아까부터 허전했던 입구를 기분 좋을 만큼 채웠다가 빠져나갔다. 곧장 예민해진 음순이 게걸스럽게 빨렸다.

코에 밀린 점막이 들썩거리기까지 하자 그는 더 흥분했다. 여인의 아래를 짐승처럼 핥으면서 나른한 신음을 흘린다. 엊그제처럼 바지 속에서 선액을 흘리고 있을 것 같았다. 딱딱하도록 발기한 그것을 만족스럽도록 느끼고 싶어져 안이 더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으읏, 전하, 저….”

어쩔 줄 모르고 그를 부르는 순간 그가 흐트러진 겉옷을 벗어서는 둘둘 말았다. 그러곤 팔걸이에 닿은 그녀의 무릎 아래에 끼워 넣어 줬다. 상의까지 찢듯이 벗어서 반대편 무릎 아래에도 넣었다.

“그리즈, 허리 움직여 봐.”

목소리가 의외로 부드러워서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될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완전히 풀린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요?”

“내가 움직였던 거랑 비슷하게.”

그녀의 눈앞에 그의 음란한 추삽질이 스쳤다. 그걸, 어떻게 해…. 그녀가 머뭇거리자 그의 손이 살짝 떠 있는 엉덩이를 부드럽게 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축축하게 젖은 항문이 당겨진다.

싫어…. 그녀는 다리를 바깥으로 펴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공의 혀가 다시 질구를 살살 긁더니 입구를 헤집고 쑥 들어왔다.

“하읏!”

뜨겁고 말캉한 게 어딘가를 난폭하게 문지른다. 이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훅훅 닥쳐오자 허리를 흔들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아, 아! 아읏, 흐읏!”

바르르 떨리기만 하던 허리가 미친 듯이 앞뒤로 움직여졌다. 자신의 몸과 자신의 감각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녀가 회색 머리칼을 괴롭게 쥐었다.

“으응, 읏, 전하, 흣, 저, 저 이상해요.”

“어디가 이상한데?”

느긋하게 물은 그가 머리칼을 쥔 손을 끌어다 음핵을 문지르게 했다. 하얀 손끝이 그의 숨결과 축축한 애액으로 순식간에 젖어 들어갔다.

“그, 그건…. 흣!”

그녀는 이미 망가졌다는 생각으로 음핵을 건드렸다. 그러며 허리를 앞쪽으로 당기는 순간 꼿꼿한 혓바닥이 육벽을 깊숙하게 비볐다. 안쪽의 열점이 바르르 떨리며 서 버리는 것 같았다.

“으읏! 아, 아!”

질퍽질퍽, 혀끝이 그곳을 정신없이 찌르자 숨 막히도록 기분 좋아져 음핵을 비비는 손을 재촉했다.

아, 어떻게 해…. 안쪽으로 뜨거운 전율이 다급히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혀를 더 깊숙이 박고 난폭하게 돌렸다.

“으으응, 으읏, 아, 아! 읍.”

가녀린 손끝이 음핵을 급박하게 긁어 댔다. 일순간 오르가즘을 느끼는 질구가 대공의 혀를 물고 음란하게 벌름거렸다.

“하응, 읏, 아, 아응!”

그제야 그가 바르르 떨리는 입구를 달래듯 손가락으로 살살 비비다가 느릿하게 찔러 넣었다. 흠뻑 젖은 탓에 두 개가 빠듯하게라도 들어간다. 그녀는 혀가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쾌감에 입술을 벌벌 떨었다.

“이제 그만 움직여도 돼.”

단단하게 세워진 손가락이 안쪽을 능란하게 긁어 줬다. 가라앉은 듯했던 내벽의 전율이 다시금 솟구쳐 올랐다.

“흣, 전하도, 그, 그만, 흡!”

다급한 부름이 들리지 않는지 굵은 손가락이 끝까지 박혀서 안을 넓히듯 쑤셨다. 가슴이 부르르 떨리자 이상하게도 온몸이 짜릿해졌다.

“하읏, 읏. 아, 아!”

그는 그게 좋은지 흥분한 얼굴로 그녀를 칭찬했다.

“잘했어.”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녀가 다행인지, 아쉬운지 모를 감정을 느끼는 사이 순식간에 몸이 침대로 옮겨졌다.

그녀는 땀으로 흥건히 젖은 얼굴을 닦아 내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완전히 벌려서 젖혀놓고는 바지와 속옷을 연달아 벗었다.

옆으로 기울어져 있던 성기가 빳빳하게 일어섰다. 손가락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압도적으로 굵고 길쭉했다. 이미 표피를 벗어난 귀두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짐승의 것 같은 제 양물을 아무렇지 않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다 들어갈까.”

아무래도 그건 무리일 것 같았다. 그는 여느 때보다 흥분한 것처럼 보였고, 구멍을 엉망진창으로 범할 듯한 기세였다. 만약 외출증을 써서 그녀가 저택을 떠나더라도 다른 사내가 시시해져 다시 돌아오게 되도록.

“무리일지도 몰라요….”

느슨한 얼굴을 한 그가 기둥을 손으로 쥐어 봤다. 사내의 손으로도 다 잡히지 않을뿐더러, 씨물이 가득 찬 분홍빛 고환이 묵직하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벌써.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그의 성욕만큼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생각을 읽은 듯했지만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네가 그만하자고 하면, 멈추는 거야.”

멈춘다고. 성난 페니스가 비좁은 구멍을 드나들기 편하도록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는데. 그녀가 믿지 않는 얼굴로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제가 그만하자고 하면….”

“그래.”

그가 상체를 낮추고 기둥을 쥐었다. 뜨끈한 귀두가 질구를 억세게 문질러 준다. 찌걱찌걱, 처음에는 빨랐지만 갑자기 느려진다.

“으읏, 아….”

벌름거리는 구멍에 귀두가 딱 맞았다. 기다렸다는 그가 젖꼭지를 부드럽게 빨았다.

“아, 읏…. 전하….”

그리즈는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아득했다. 이미 달아오른 그녀의 허리는 커다란 성기를 맛보려 음탕하게 흔들렸다. 작은 구멍은 어서 음순을 열고 빠듯하게 들어와 달라는 듯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사내의 널따란 상체가 믿을 수 없이 단단해졌다. 반면에 갇혀 있던 그의 입술은 나른하게 풀렸다.

“이름 불러 봐.”

“비, 흣, 비아누트.”

그 순간 근육질의 하반신이 그리즈의 다리 사이로 치달았다. 그녀는 아래를 지그시 찌르는 끝머리의 단단함에 놀라 시트를 쥐었다.

“흣!”

굵은 것이 입구를 버겁게 문지른다. 그 정도로도 기분 좋았지만, 비좁은 통로를 급격히 열고 무서울 정도로 들어오자 미친 듯한 전율이 쭉 들이닥쳤다.

“아흡!”

머릿속으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안쪽이 생각보다 미끌거렸다. 아래에 힘을 빼 버리면 두꺼운 뿌리까지 제대로 들어올 것 같은데, 그게 두려운 반면 기대돼서 혼란스러웠다.

그때 그대로 멈춰 있던 기둥이 능란하게 꺼덕이며 성감대를 압박했다. 아까부터 요동치던 질벽이 빠듯하게 자극된다. 뜨거운 파도가 덮쳐 안쪽이 짜릿하게 끓는 것 같았다.

“흡, 뭔가 지난번과는….”

압박감과 강렬함이 달랐다. 굵은 것을 깊숙하게 문 질벽이 지그시 줄어들었다.

“하아, 좋아.”

나른한 탄식과 함께 빠져나간 귀두가 연거푸 거칠게 들어왔다. 아…. 미칠 것 같아. 숨 막히는 전율이 아랫배까지 끼쳤다. 입을 틀어막고 있을 여력도 없었다.

“으읏, 전하, 너무, 흣 커요.”

그는 흥분감을 누르듯 허벅지에 힘을 준 채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봤다.

“지난번보다 큰가? 아니면, 말해 봐.”

부드러워진 저음이 아프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상냥한 면이 있긴 있구나.

그가 버거우면 멈춰 주겠다고 했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듣기 좋았고, 잘생긴 얼굴이 보기 좋게 이지러진 것도 좋았다. 그녀가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저는 괜, 괜찮은 것 같아요.”

붉은색 눈동자가 어디로 향하는지 그가 확인했다. 그게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는 더 구멍을 더 깊숙이 탐했다. 질벽이 포만감에 울부짖는 것 같았다.

“아읏, 으응, 아, 읍.”

몸이 쑥 올라갔다가 살짝 내려갔다. 다시 느릿하게 올라가자 열통이 아랫배까지 들이닥쳤다. 자궁구가 포식자에 떠밀려 끝까지 올라간 것 같았다. 빳빳한 페니스가 그 자리까지 탐욕적으로 독점했다.

“너무 깊! 이, 이상해요. 아니, 좋, 읏.”

이상한 게 아니라 좋은 게 맞았다. 뜨거운 그의 몸도 좋았고, 안쪽을 정신없도록 문질러 대는 감각도 좋았다. 갈망이 여전한 그의 눈동자도 좋았다. 복잡한 문제들을 기억에서 지워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더, 더 많은 것을 잊고 싶었다. 그리즈가 다급하게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멈칫, 하며 멈췄던 그가 입술을 더 대 줬다. 그녀의 입술이 안간힘을 쓰며 그의 아랫입술을 쭉 빨았다.

흥분한 그가 낮게 신음하며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줄어들려는 안쪽을 질퍽질퍽 쑤셔 준다.

십수 년간 수련해 온 사내의 몸이라 너무 단단해서 미칠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밀어내려 해도 흔들리지 않고 내벽을 음란하게 찧어 올린다.

급속도로 뜨거워진 구멍 속이 바르르 떨렸다. 또 절정이 올 것 같았다. 그녀의 다리가 발바닥이 보이도록 들렸다.

본능적인 몸짓에 그의 눈은 이성을 잃었다. 탄탄한 허리가 뒤로 빠졌다가, 꽉 다물린 구멍이 제 것임을 확인하듯 귀두로 열어젖혀서 푹푹 찔렀다. 엉망진창으로 쑤셔지는 질벽 전체가 벌벌 떨렸다. 팽팽한 귀두가 그곳을 정신없이 훑어 대다 기어코 오르가즘으로 물들였다.

“아응, 으으응! 아, 아!”

무자비할 정도로 큰 성기는 점막을 긁어 대는 걸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가장 어두운 곳까지 치달아서 자궁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조각 같은 사내의 얼굴이 급속도로 황홀해졌다.

“하아. 여기,”

입술을 지르문 그가 다시 자궁구를 빠듯하게 비벼 대기 시작했다. 안 돼, 이젠. 한계치까지 차오른 전율이 범람해서 온몸을 적신다. 이대로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런데도 상스러운 허릿짓이 너무 좋아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아으응! 읏, 비, 비아누트. 으응.”

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를수록 추삽질이 짐승처럼 난잡해졌다. 그때 자궁구에 꾹 밀린 귀두가 격분하며 씨물을 뿌려 댔다. 여인을 회임시키려는 하반신이 방탕하게 흔들리며 그녀를 찾았다.

“하아, 하아. 그리즈, 그리즈.”

그는 누구에게 그런 짓을 하는지 직접 이름을 부르며 확인했다. 잘생긴 얼굴이 희열로 무너진다. 차분하던 저음조차 관능적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그제야 사람들이 아름다운 걸 박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대공 비아누트의 숨결, 열기, 목소리를 그대로 굳혀 가까이에 두고 싶었으므로.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요한 꿈을 꿨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그가 그녀의 방 침대맡에 앉아 있는 꿈이다.

그리즈는 흐릿한 시야로 사슬 갑옷을 보았다. 속에 입는 갑옷.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갈 때 입는 걸 봤는데….

잠결에 살며시 뜬 눈을 다시 감았다. 그가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 주고는, 밖으로 삐져나온 손을 만지는 게 느껴졌다.

다시 피로한 눈을 뜨자, 작은 손을 뺨에 대고 나른히 눈감는 그가 보였다. 평소처럼 차분했다. 다만 눈가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혹시 또 안 좋은 일이 생긴 걸까.

속이 텅 빈 상태라 귓속이 웅웅 울렸다. 그 찰나 어렴풋한 음성이 들려왔다.

“살아 돌아올게.”

“…….”

“그리즈… 그리즈.”

상대를 깨우고 싶어 하는 부름인데, 정작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낮았다. 묘한 모순에 불길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그가 매만지던 손이 이불 안으로 되돌아왔다.

흐릿한 시야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게 왠지 아주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잠결에 찌릿한 심정을 느끼던 그리즈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역시 꿈이겠지. 지금껏 집요해 마지않았던 그가 이렇게 홀연히 떠날 리는 없으니까.

그는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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