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2)

***

네 시간 동안 비아누트는 기사 단장들을 불러 그랑디아와의 전쟁을 계획했다.

회의 시간이 되자 연회장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 왕위 찬탈자를 증오하는 보수파들이었다.

거대한 원탁에 원로와 장로, 관료 순으로 빙 둘러앉았다. 상석에는 파올라와 비아누트가 앉았다.

평소에는 브리언에게 진행을 일임했던 비아누트는 직접 타릴루치 왕에게서 받은 서신을 공개했다. 스테판이 탈스바그에 관문을 만들려고 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참석자들은 깊게 우려했다.

모두 그가 의도한 상황이었다. 비아누트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랑디아가 오래전부터 바이렌하그를 탐내고 있는 걸 그대들도 알고 있을 테지. 더 이상 그랑디아를 두고 볼 수 없소.”

이미 오랜 착취에 질린 그랑디아의 평민들이 타국으로 야반도주하는 실정이었다. 평민들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타릴루치 일가는 풍요로운 땅과 농작물을 구해야 할 터.

참석자들은 전쟁에는 조심스러웠지만 그랑디아에 바이렌하그의 자원을 뺏길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비아누트는 기다렸다는 듯 그랑디아와의 전쟁 의사를 드러냈다. 살기 가득한 저음이 연회장을 스산하게 메웠다.

“그럼 전쟁해야겠군. 더 늦기 전에.”

오늘 어두운 옷을 입은 까닭에 그는 사냥 직전의 검은 늑대처럼 보였다. 왕좌 같은 의자를 가득 채운 몸집 덕분에, 전 대공 발데마르의 20대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패기 넘기는 군주를 마다할 신하는 없지만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저마다 대공을 신뢰하고 있으나 대공은 미혼이고, 그 흔한 사생아조차 없었다. 만약 그가 전사하면 바이렌하그는 성군을 잃을뿐더러, 후계 승계에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고민하던 원로 회장 클로트가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전하, 국왕 폐하께서는 이 전쟁에 병력을 지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면에 그랑디아의 대공가들은 왕가를 지원할 터인데…. 우리 병력이 전쟁에 능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면 돌파로는 승산이 없을 거라고 봅니다.”

쿠엔틴이 때맞춰 나무 게시판을 들고 단상으로 올라왔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찰나였다. 문관 브리언이 게시판에 바이렌하그의 지도를 붙였다.

그랑디아는 바이렌하그 최북단의 플뢰도르와 타원형으로 접경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야만족의 척박한 땅인 샤토가 자리하고 있다. 쿠엔틴의 지휘봉이 샤토에 닿았다.

“대공 전하께서는 정면 돌파하시지 않고 샤토부터 점령하실 계획입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클로트가 물었다.

“방금 샤토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클로트 경. 바이렌하그 여덟 개의 기사단은 샤토를 통해 그랑디아 왕궁으로 직진할 것입니다. 궁병과 전차병이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샤토는 발데마르의 전사지이자 비아누트의 첫 출정지였다. 출정할 때마다 늘 대승하고 돌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가 샤토를 공격하는 이유가 부친의 복수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샤토의 최북단이 그랑디아 왕궁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약 44마일(70km). 기마병과 전차병을 이끌고 달리면 길이 험해도 두세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러니까… 플뢰도르 관문 쪽을 방어하는 병력을 뚫는 게 아니라 옆을 치겠다는 거요?”

발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쿠엔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전에 그랑디아의 병사들에게는 우리가 선공할 거라는 소문부터 낼 것입니다. 타릴루치 왕가의 폭정에 지친 병사들이 미리 탈영하거나, 일찍이 항복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쿠엔틴이 플뢰도르 관문에서 그랑디아와 이어지는 길을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플뢰도르에서 그랑디아 성까지 전쟁용 탑이 스무 개 넘게 있습니다. 아울러 외성도 드높아 뚫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샤토 방면으로는 탑 두 개가 전부입니다. 야만족들은 약탈할지언정, 대군을 이끌고 그랑디아를 침략할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려스럽게 의견을 나누던 사람들이 생각에 잠겼다. 승산이 있는 전략이라고 여기기 시작한 덕분일 터. 쿠엔틴이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플뢰도르 관문에는 창병과 방패병, 궁병들을 전진 배치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군사력이 티 나지 않도록 막사를 대량으로 설치하여 압박할 것입니다.”

얘기를 가만히 듣던 클로트가 비아누트를 보며 말했다.

“그럼 플뢰도르의 병력은 눈속임일 뿐이라는 얘기로군요.”

비아누트는 다리를 꼰 채 의자 팔걸이에 여유롭게 기대었다.

“그랑디아 대공가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본성을 점령할 거요. 우리가 그랑디아 성을 수성할 동안, 플뢰도르의 병사들이 전진하며 지원 병력을 치면 승산이 있지.”

비아누트는 그랑디아 성을 점령하고 타릴루치가 이교도라는 증거를 찾을 생각이었다. 명백한 증거가 나오면 노르드발츠 국왕도 나설 것이다. 물론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지지 않을 전쟁이었다.

“질문 받도록 하지.”

그의 저음이 연회장을 유유히 떠돌았다. 한동안 턱수염을 만지며 고심하던 백전노장 클로트가 비아누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바이렌하그를 방어할 병력이 부족할 겝니다. 만약 우회군이 들어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도 모릅니다.”

비아누트가 쿠엔틴에게 눈짓했다. 쿠엔틴은 지휘봉으로 노르드발츠 왕궁을 가리켰다.

“노르드발츠에는 있습니다.”

쥐 죽은 듯했던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클로트의 얼굴 또한 사색으로 변했다.

“노르드발츠? 그게 무슨 뜻이요?”

쿠엔틴이 대답했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클로트는 손수건을 꺼내어 꽉 쥐었다.

“대공 전하, 그러니까 우리 병력은 그랑디아로 향하고, 본진은 국왕 폐하께서 보호하시도록 하시려는 겁니까?”

장로 발더마도 난색을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께서 아신다면 역정을 내실 만한 일입니다.”

비아누트는 역시 예상하는 바였다. 격노하며 그의 대공 작위를 박탈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럼 작위를 지키고 그녀를 잃을까.

“바이렌하그를 위해서 경들이 함구할 거라고 믿소.”

그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전쟁을 기대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선득한 광기마저 비쳤다.

원로들은 그 모습을 덧없이 바라보았다. 부인을 잃은 후부터 죽기로 작정한 사내처럼 전장에 뛰어들어서 서른 살에 승하한 그의 부친과 겹쳐 보였던 탓이다. 물론 결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연회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반응을 살피던 브리언이 대공을 옹호하며 분위기를 유도했다.

“작전만 성공하면 골치 아픈 왕위 찬탈자들을 절멸시킬 수 있겠군요.”

그러나 클로트의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전하께서 직접 지휘하실 겁니까?”

장로 발더마도 마찬가지였다.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승전할 수는 있겠으나… 이번 전쟁은 적진으로 뛰어드는 만큼, 전하께서 감당하시게 될 위험이 너무도 큽니다.”

자칫 잘못하면 전사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는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즉답했다.

“살아 돌아올 거요.”

모두 그를 신뢰하고 있지만 전쟁의 변수를 알고 있기에 우려를 거두지 못했다. 진땀을 닦던 클로트가 묵묵히 자리만 지키던 파올라에게 물었다.

“마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파올라는 근심으로 새파래진 입술을 움직였다.

“그랑디아를 두고 볼 수 없다는 전하의 의견에는 동의하네만….”

지금껏 파올라는 남편과 아들들을 잃었다. 실종된 줄 알았던 손녀딸은 되찾기는 했지만 그조차 정체가 모호하다는 소문이 도는 중이다. 하물며 막내아들인 스테판은 반역을 의심받는 상황이 아닌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바이렌하그의 명맥을 지키려면 가문의 기둥인 손자라도 붙들고 있어야 할 터.

그렇지만 그동안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공을 후방으로 뺄 수도 없는 노릇일 거다. 역시나 파올라는 결정이 쉽지 않은 듯 텅 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가 국왕 폐하를 만나 뵙고 병력 지원을 다시 요청하겠네.”

몇 번의 대화가 오간 후, 안건이 대공의 혼인 문제로 넘어갔다. 파올라는 비아누트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꼭 우는 얼굴 같았다.

세 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났다. 대공의 압박을 못 이긴 원로들은 샤토 출진으로 의견을 모았다.

기다렸다는 듯 대공은 당장 내일 출진을 명했다. 기사들을 늘 전시 상태처럼 훈련받게 했기에 무리 없었다. 그랑디아와의 전쟁은 왕명을 기다린 후 결정하기로 했다.

그는 집무실로 돌아와 느긋하게 홍차를 마셨다. 오전에 타 둔 씁쓸한 홍차를 음미하던 입술이 담담히 미소 지었다.

“출진을 준비해.”

그런 그에게서 브리언은 비정상적인 광기를 느꼈다. 식은 홍차, 파혼, 전쟁, 심지어 지난달부터 매음굴의 포주들을 잡아들인 까닭에 바이렌하그 지하 감옥도 꽉 찬 상황이다. 도무지 웃으려야 웃을 수 없는 상황 아닌가?

“회의에서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도 걱정이 됩니다, 전하. 정말 브리튼 공주님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신 건지요?”

조금 전 회의에서 브리튼 공주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한 얘기가 나왔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장로들은 말문을 닫았고, 장로들 중 강경파는 대공의 혼인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공이 기다렸다는 듯 강경파의 입장에 동의했다. 그렇게 대화가 파혼으로 흘러간 거다. 그에게 휩쓸린 강경파들이 결국 국왕 폐하에게 대공의 혼인을 철회해 달라고 읍소하기로 했다.

그러자 눈치만 살피던 원로 회장이 갓 초경을 시작한 손녀를 대공과 합방시키려 들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대공은 손녀나 딸자식이 있는 관료들을 은근히 부추겨 경쟁시키기 시작했다.

“모두 아름다우니 고를 수가 없군. 경들끼리 결정하여 알려 주시오.”

쉽게 타협하지 못할 문제를 내걸어서 노장들의 관심을 돌린 거다. 대공과 합방할 여인이 결정되기 전에 전쟁은 끝나겠지. 대공을 잘 아는 브리언은 그가 그 상황을 유도했다는 걸 진즉 눈치챘다.

“정말 우려스럽습니다. 전쟁을 앞둔 마당에 역시나 후사를 준비하지 않고 출정하시다니요. 브리튼의 공주님께서 아무리 사내 경험이 많으시다 해도 결국 전하를 열렬히 사랑하시게 될 겁니다. 그 점은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대공의 교육을 도맡아 온 브리언은 부인을 기쁘게 만드는 건 사내의 의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비아누트에게 교육했고, 잠자리 기술 또한 교육했다. 그리고 브리언은 모든 교육에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교육 받으신 성애법이 아까우시지도 않으십니까?”

브리언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아깝지 않도록 쓰고 있다는 의미 같았다. 설마 근래에 돌기 시작한, 밤마다 누이동생을 품는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아니, 지금껏 정욕을 다스려온 대공이 그럴 리는 없다. 회의에서처럼 성가신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겠지. 브리언은 흔들리지 않았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여인에게 몸이 동하지 않기 때문이라면 흥분초라도 사용하시어 후사를 만드셔야 합니다. 효과가 강한 흥분초가 싫으시다면 각성 효과가 있는 봄송이라도 달여 드리겠습니다.”

대공은 이 대화가 퍽 지루해 보였다. 한창 혈기가 넘칠 나이의 사내라면 당연한 욕망도 없는 걸까. 노르드발츠 동부의 젊은 대공은 혼인하고서도 정부만 네 명을 뒀다는데. 브리언이 의아해하는 사이 그가 입을 열었다.

“나의 스승조차 내가 그랑디아에서 전사할 거라고 생각하는군.”

“그만큼 위험이 큰 전쟁이라고 사료됩니다.”

브리언은 난감한 기색으로 말을 흐렸다.

“그렇다면… 만일의 상황에, 율리아나 아가씨께서 대공 작위를 승계 받기야 하겠지만….”

어느덧 찻잔을 비운 비아누트는 소파에 기대어 다리를 꼬았다. 이번 전쟁에서 전사할 리가 없지만, 만약 전사한다면 브리언의 말대로 그녀는 대공 작위를 얻게 될 것이다. 숙부가 오늘 내로 감옥에 갇히거나 사망하게 될 테니 말이다.

비아누트는 그 사실이 퍽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무덤 앞을 떠나지 못하는 그녀가 그려질 때면 숨이 막히지만. 그녀의 무덤 앞에 또다시 서게 되는 것보다는 무덤의 주인이 되는 게 나았다.

탁, 그가 찻잔을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충언을 멈추지 않던 브리언은 제풀에 지쳐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만의 휴식을 즐기던 그는 브람을 불러 개인 정원에 꽃밭을 만들라고 명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면 그녀와 함께 거닐 생각이었다.

이내 그는 장식장에 보관하던 단검과 활을 꺼내어 창틀에 앉았다. 생각을 정리할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무기 손질을 시작했다.

정원 벤치에 그녀가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하인들이 저택 1층을 대청소 중인 까닭이었다.

햇살이 받아 유난히도 밝아진 머리칼이 날린다. 잔디에서 날뛰는 하얀색 손난로를 보며 기분 좋게 웃는 뺨이 보였다. 비아누트의 눈에는 정작 그녀가 일광욕 중인 소동물처럼 비쳤다.

단검의 날을 가는 손길이 조금 빨라졌다. 이내 그는 화살을 입술로 문 채 활시위를 갈기 시작했다.

그때 저택 안에서 스테판이 나왔다. 비아누트의 눈앞에는 오전에 봤던 쪽지가 선명해졌다.

‘남매가 밀회하여 분란이 커지리니.’

숙부가 그렇게 나오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이미 그녀와 디르크의 혼인은 깨졌고, 그로 인해 숙부의 입지도 불안해지지 않았나. 율리아나가 그리즈 베네딕트라는 소문의 진상이라도 캐내려는 거겠지. 안 되면 쪽지로 소문을 내서라도 몰아갈 생각인 거다.

그러나 하인들이 쉽게 입을 열지 않아 애가 타는 모양이다. 그녀에게 유유히 접근한 숙부가 무어라 말했다.

그녀는 사색이 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피하려는 그녀를 막아선 그의 입 모양이 비아누트의 눈동자에 비쳤다.

‘네가 공주였다는 소문이 돌던데. 흥미롭더군.’

그녀를 향한 숙부의 멸시가 멀리서도 명백히 보였다. 비아누트는 지난날의 자신을 또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몸이 너무 뜨겁고, 무수히도 많은 사내가 품었을 그녀는 불결하게 느껴지고, 그녀를 원하는 자신의 몸을 부정했던 그때의 감정 또한.

일순간 살의가 올라왔다. 숙부에 대한 살의인지, 과거의 자신에 대한 살의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그는 입술로 물었던 화살을 활에 장착했다. 이내 한쪽 다리를 창틀에 올려 짚고는 기둥에 등을 기대며 활시위를 당겼다.

뾰족한 화살촉 너머로 숙부의 팔뚝이 보였다. 사냥에 취미는 없었던 그의 얼굴에 희열이 어렸다.

그때 숙부의 입술이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비아누트와 붙어먹은 거 맞지? 네가 베네딕트의 막내 공주라면 너무 무능해서 홀로 설 능력이 없으니 비아누트한테 몸을 팔아서 복수할 거라고 말씀하시던데. 그랑디아의 왕녀께서.’

그 정도로 부족한 듯 말을 덧붙이자 그녀가 하얗게 질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대항하고 싶은 건지 목을 꼿꼿하게 세운 채로 입술을 연다. 강하게 주먹 쥔 작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저는, 저는….’

비아누트는 그녀의 말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숙부의 말을 저항하거나, 반항해도, 뺨을 때려도 그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덩치 큰 사내를 마주 보자 겁이 나는지 입술을 버벅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명줄을 늘려 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숙부가 말을 딱 잘랐다.

‘그래, 너는 단지 창녀잖아?’

살랑살랑 불던 봄바람이 멈췄다. 부드럽게 흩날리던 그녀의 머리칼마저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 정도의 자극에도 깜짝 놀란 그녀가 치욕적인 얼굴을 했다.

멈춘 듯한 시간 속에서 숙부가 그녀의 머리칼에 손을 대려 했다. 활시위를 당긴 비아누트의 손이 달궈진다. 그러다 탁 풀렸다.

날카로운 화살이 무섭게 돌진해서는 하얀 옷을 입은 팔뚝에 푹 꽂혔다. 조소하던 스테판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진다. 작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덮칠 듯했던 몸이 뒤로 꺾여 뒤집혔다.

고통에 물든 비명이 정원을 가득 메웠다. 저택 앞에 서 있던 로렐이 빵 바구니를 던지곤 스테판에게 달려갔다.

“에그머니나! 각하! 후작 각하!”

뒤따라 달려간 하인들이 화살이 날아온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가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창밖으로 머리를 슬쩍 내밀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손질하다 놓쳤군.”

스테판은 옆으로 누운 채로 피에 젖은 팔뚝을 쥐고 괴롭게 헐떡이고 있었다. 장관이군. 비아누트가 느슨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쩌지.”

“…….”

“화살촉에 독을 발라 뒀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보며 조소했던 스테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럴수록 비아누트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유난히 즐거운 미소였다.

저택이 비교적 조용해졌다. 하인들과 문관, 의사들이 스테판의 방으로 몰려간 덕분이다.

비아누트는 해독제를 찾겠다고 말하고는 가족 석상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틀에 앉아 창밖의 꽃을 바라보기만 했다.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날씨였으므로.

하지만 그의 눈은 온전히 풍경을 감상하지 못했다. 그리즈를 그리기 시작한 파란 눈동자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어둡게 침잠했다. 요새 들어 그의 눈은 늘 이런 식으로 변화했다.

느슨하게 탄식한 그가 창틀 옆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피 흘리는 숙부를 보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는 퍽 궁금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뒷모습이 불안정하게 떨렸었다. 숙부를 동정했을까. 그렇게 당하고도 너무 물러서. 아니면 단지 분란을 피하고 싶었던 건가.

그의 의문은 더 깊어진다. 그런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뭘까. 연애? 아니면 복종?

단지 갈등하지 않고자, 자신을 원하는 사내를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는 걸지도 모른다. 비아누트는 어두워진 눈가를 검지로 눈가를 훑었다.

그는 그녀가 순응할 뿐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를 곁에 두고 있으므로.

땡, 땡. 오후 4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숙부가 쓰러진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지금쯤 숙부는 죽음의 맛을 보고 있겠지.

유유히 집무실로 돌아간 그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투명한 병에 물을 채웠다. 그러곤 탈스바그 포기 각서와 펜을 집어 숙부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숙부가 팔뚝을 면포로 동여맨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정말 독이라도 퍼지고 있다고 느낀 건지 입술이 창백했다. 비아누트는 입가에 어리려 하는 미소를 삼키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숙부가 팔로 매트리스를 짚으며 살짝 일어나서 물었다.

“해독제는 찾았나? 대체 무슨 독을 바른 거지?”

화살촉에 독은 없었다. 숙부는 스스로 극독을 삼켰을 뿐이다. 씁쓸하고 악취를 풍기는 야망이란 독을. 그는 스테판의 눈앞에 영지 포기 각서를 내밀며 서늘하게 웃었다.

갈색 눈동자가 서류를 다급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뒤틀렸다. 방 안에 거친 욕설이 울렸다.

“이, 망할, 그래, 사냥개 같은 네놈이 실수할 리가 없지. 흣, 망할, 망할!”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분노한 스테판은 멀쩡한 팔로 시트를 쾅쾅 내려쳤다. 비아누트는 입매를 유유히 휘어 올리며 스테판의 주먹에 펜을 쑤셔 넣었다. 그러곤 서류 판을 손수 쥐여 줬다.

“해독제가 필요하다면 서명해.”

석양이 진 방 안에 거친 호흡이 번졌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점차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숙부가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 거다.

숙부는 곧 얼굴에서 치욕을 지웠다. 서명하지 않고 버티면 목숨을 잃게 될 거라는 걸 짐작한 거다. 이내 후들거리는 팔로 서명하며 이를 물었다.

“권력욕으로 혈육의 피를 묻히고도 평안할 수 있을 거라고 보나?”

비아누트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피 묻힌 김에 죽일 걸 그랬군.”

조모의 입장 때문에 당장 숙부를 죽이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기는 할 거다.

그때 스테판이 서명한 서류를 건네곤 입술을 짓씹었다. 비아누트는 맹물을 담은 병을 건넸다. 그리고 바랐다. 숙부의 독이 지금이라도 해독되길.

물론 자비를 베풀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회복하는 대로 감옥으로 가게 될 거야. 반역자에게 마땅한 대접인 것 같군.”

돌아가는 길에 스테판의 작위를 박탈했다. 탈스바그에 대한 권리마저 잃었으니 이제 스테판은 손발이 잘린 셈이다.

그는 뒤따라오는 브람에게 다음 일정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늘 묵직하던 발소리를 숨긴 채였다. 눈앞에서 피를 보고 놀란 그녀가 지쳐 잠들었을지도 모르므로.

방문 앞에 선 비아누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그러곤 등 뒤에 서 있는 브람을 돌려보낸 후 문을 살짝 열었다. 잠들었을 줄 알았던 그녀는 흑경 앞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머리 위에는 두꺼운 책을 올려놓고 떨어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귀족 아이들이 하는 자세 연습이다.

언제부터 하고 있었는지, 목 뒤의 머리칼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허리가 후들후들 떨리는데도 자세를 풀지 않는다.

그때 머리 위의 책이 툭, 하고 떨어졌다. 발목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버티던 그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니까 왜? 그의 새파란 눈이 흑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손등으로 눈가를 가린 채 괴로워하는 얼굴이 보였다. 아주 작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나는, 창녀가 아니야. 나는 왕녀… 왕녀인데….”

“…….”

“무능해서…. 나 대신 비아누트가 그자를, 내가 무능해서….”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에서 괴로움과 무력함이 묻어 나왔다. 그 마음은 헤아릴 수 없었지만 비아누트는 아직은 그녀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내심 안도하고 있을 줄 알았다. 위협적이던 사내가 눈앞에서 쓰러졌으니까. 아니면 마음을 진정시킨 후 안락한 꿈을 꾸기 시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좋은 날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을 줄은.

누가 너를 무력해지게끔 짓밟았을까.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탄식했다.

“발 떼면.”

“…….”

“죽는 거야.”

그의 머릿속으로 조모의 얘기가 또다시 스쳤다. 살다 보면 과거의 행적이 파도처럼 닥쳐와 너를 삼키는 순간이 올 거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오늘, 그는 삼켜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어둠이 내린다. 시야 중앙에는 빛나는 것을 모조리 빼앗긴, 텅 빈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타릴루치에게는 왕좌와 가족을 뺏기고, 의문의 도적 떼들에게는 안락한 혼인 생활을 빼앗겼다. 포주들에게는 노동력과 자존감을 빼앗겼다. 그리고 바이렌하그의 대공에게는 몸을.

비아누트는 거칠어진 숨을 지그시 삼켰다.

무능력한 빈털터리 왕녀 그리즈 베네딕트.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굽은 자세를 교정하거나, 자책하거나, 몰래 쪽지를 쓰거나, 적들의 대화를 엿듣는 등의 하찮은 일뿐이다. 그녀 스스로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어둠 속으로 침잠시켰다.

그때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그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뒤돌았다.

얼마나 흐느꼈는지 눈가가 엉망진창으로 불거져 있었다. 그 꼴로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불렀다.

“대공 전하.”

방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은 그는 호칭을 정정했다.

“비아누트.”

“비아누트….”

그 이름이 안도감을 주는지 그녀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지 무너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낮게 호흡하며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이내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태연하게 물었다.

“힘들었어? 오늘.”

그 말에 대답하고 싶은지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는 듯하더니, 그의 팔뚝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끄덕이며 흐느꼈다. 그게 대답이었다.

예쁜 진회색 눈썹이 슬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을 본 그의 눈가가 서늘한 모양새 그대로 굳어졌다.

그는 내일 샤토로 떠날 것이다. 샤토를 점령하면 지체 않고 그랑디아로 진군할 예정이다. 일주일 안에는 돌아올 테지만, 만에 하나 운이 나쁘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절규만 가득한 피 바다의 일부가 될 것이다. 홀로 외롭게 울게 될 그리즈 베네딕트를 두고.

“어떻게 해 줄까.”

평소처럼 느긋한 저음이 방에 번졌다. 그러나 그 끝이 무질서하게 떨렸다. 이상하게도, 오늘 당장 뭐든 얘기해 달라며 애를 태우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속눈썹을 눈물로 적신 채 그를 바라본다.

아홉 살 남짓한 소녀의 눈 같았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보였다. 애초에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눈이었다.

그에게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의 무력감이 찾아왔다. 얼마나 많이 가져야 그녀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을지. 태어나 처음으로 그는 가난한 자의 기분을 곱씹었다.

헤어 나올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랑디아의 왕좌. 그는 그걸 갖기로 하며 물었다.

“없어?”

그녀가 눈물을 닦았다. 세상 무너지도록 울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은 채였다.

“이미 전하의 존재가 선물 같아요. 신께서 마지막으로 내려주신….”

그는 그녀를 미동 없이 주시했다. 새파란 눈이 천사에 홀린 듯 유려하게 빛났다.

낯설지만 아름다운 감각이 그의 혈관을 떠돌기 시작했다. 서서히 잠식해 간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 중독될 것 같은 예감을 느끼면서도 그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노크가 울렸다. 브람의 목소리였다.

“전하, 말씀 중에 송구하지만 마님께서 찾으십니다.

조모가 스테판의 부상 소식을 듣고 손자가 보고 싶어진 모양이다. 그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손수건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밤에 다시 올게.”

방을 나선 그는 쿠엔틴에게 그랑디아의 정세와 레녹스에 대한 얘기를 그녀에게 알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앞으로 필요해질 수 있으니 레녹스에 협조를 요청하는 서신을 쓰게 하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게 갑갑해하는 그녀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조모와의 대화는 그가 예상한 대로 흘렀다. 조모가 노르드발츠 국왕에게 기병을 얻어 오는 대가로 스테판의 선처를 부탁한 것이다.

조모 파올라는 늘 그런 식이었다. 감정에 호소해서 설득하는 것보다는 거래를 택하는 인물이다. 종종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방관하기도 한다.

조모를 잘 아는 비아누트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모가 스테판을 사랑하는 건 맞지만 그보다 바이렌하그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조부가 남겨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바로, 바이렌하그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선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조모는 국왕에게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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