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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누트가 바이렌하그의 성지 플뢰도르로 향한 건 세 살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홉 해를 보냈다.
성서에도 표기된 신성한 곳이기에 누구도 파괴하거나 침략할 수 없었다. 평화의 땅. 부친은 그렇게 불렀다.
물론 비아누트에게는 고요한 초록색 땅이었다. 대성당과 기사단 그리고 국경 담 너머의 탑이 전부인 곳이다.
매일 사내들과 대련하며 충성과 용맹, 관용과 절제, 금욕을 익혔다. 무감무취의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았다. 삶에 재미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목표는 부친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고, 대주교는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당연한 것에 이유는 없었다. 지루하지만 비아누트 역시 그 점에 동의했다.
시간이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날 중에 하루.
그날은 그랑디아 왕가의 공주들이 플뢰도르 대성당으로 기도하러 온다는 얘기가 들렸다. 또래 수련생들이 기대에 차 있었다. 이곳에서 갇혀 자랐기에 여인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비아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친의 기일마다 향한 본가에서 하녀와 스친 게 전부였다.
“요하네스 님은 기대되시지 않는지요?”
오랜 벗 쿠엔틴은 그를 요하네스라고 불렀다. 수련생들이 대공의 영식과는 대련을 겁내는 까닭에 부친이 차명을 쓰라고 지시했다.
“그랑디아의 공주님들은 아름답기로 유명하잖아요.”
그 말에 비아누트는 감흥 없는 얼굴을 했다. 사실 그는 여인의 존재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생명을 잉태하는 존재. 보호가 필요한 것. 그뿐. 세상 그 무엇을 보아도 아름답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오로라가 뜨면 감탄하는 사람들을 통해 아름다움의 정의를 배웠을 뿐이다.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눈동자를 유려하게 빛냈다. 그는 아름답다는 게 뭔지 알고 싶었다. 그랑디아의 공주를 보면 알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알지 못했다. 그랑디아 왕궁에서 왕비가 다른 신을 섬긴다는 소문이 돈다고 했다. 왕가는 어수선한 성 내를 진정시키고 소문의 진원지를 찾느라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호기심은 이미 커진 상황이었다.
몇 달 후 베네딕트의 막내 공주가 정혼자를 구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아누트는 제사장을 통해 부친에게 그녀의 정혼자가 될 의사를 밝혔다. 그녀를 보면 느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름다움, 특별한 감정, 그런 것들을.
그러나 아주 보란 듯이 거절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미지의 아름다움과 미지의 소녀는 어느새 그의 목표가 됐다. 기사 서임을 받으면 그녀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열두 살의 초겨울이 찾아왔다.
플뢰도르의 초겨울은 가을과 다름없었다. 강해진 바람에 편백나무 향이 조금 더 진해졌고, 오전의 햇살이 더 강렬해졌을 뿐이다.
훈련병들이 저온 화상을 입자 검 수련 시간이 오후 3시로 변경됐다. 이미 피부가 탈 대로 탄 비아누트는 오전마다 플뢰도르 숲으로 향했다.
수련 장소는 그랑디아 국경선 탑 아래 반그늘이었다. 머리 위로 하늘이 동그랗게 드러난 장소. 주변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거대한 동굴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성인용 목검을 두 손으로 쥐고 주변을 둘러봤다. 나무만 무성한 곳이기에 공격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눈을 감고 적군을 그려 봤지만 딱히 살의는 없었다. 상상 속에서라도 몸에 피가 튀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다.
모친이 병에 옮아 세상을 떠났다. 폐렴에 걸린 하녀가 토한 피가 모친에게 튀지 않았다면 지금도 살아 있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모친은 폐렴에 걸린 이후 아들에게 하루에도 수백 번씩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그렇기에 시간이 날 때면 가늠해 보았다. 하루하루 죽어 가며, 어린 아들을 위해 성인용 스웨터를 뜨는 심정은 어땠을까. 그럴 때면 아주 미약하게나마 슬픔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나무숲 사이에서 번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막연히 적군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베고 또 벴다.
그때 어디선가 낯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숲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나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게 그랑디아의 탑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3일 내내 끊임없는 소음에 두통을 느끼던 그는 대주교를 찾아갔다. 대주교로부터 울부짖음의 주인이 베네딕트의 그리즈라는 사실을 들었다. 머지않아 굶어 죽을 테니 괘념치 말라고 했다.
그렇게 미지의 아름다움과 미지의 소녀는 열두 살의 그를 찾아왔다.
사흘이 지나자 소녀의 맑았던 울음소리가 쇳소리로 변했다. 쇳소리는 울부짖음 가득한 노랫소리가 되었다. 그랑디아 기사의 용맹함을 찬양하는 노래였다. 바이렌하그 영지 가까이에서 다른 나라의 진군 노래를 부르다니. 그건 전쟁 선포인데.
그랑디아의 타릴루치가 반란을 일으켜 왕실 사람들을 난도질했다고 한다.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비아누트는 차라리 그녀의 울음소리를 숲속 동물이나 벌레 울음소리처럼 여기기로 했다. 무수히도 많이 들었고, 무수히도 많이 지나쳐 왔던 소리, 아니 소음이었다.
그리고 익숙해졌다. 잠깐이라도 들리지 않으면 허전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이 플뢰도르에서 유일하게 찾은 유일한 생동감 넘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네딕트의 그리즈가 퍽 신기하기도 했다. 목소리가 닳아 간다는 걸 알 텐데도 그녀는 아끼지 않는다. 쓸모없어지기 전에 가진 것을 모조리 소모하듯 사랑한다는, 미안하다는 혼잣말을 반복했다. 숨넘어가는 기침 소리도 계속되었다.
그럴 때면 뜨개질하는 모친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반추할수록 고요한 슬픔이 밀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뭐라도 더, 더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음날 그녀의 울음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랑한다는, 미안하다는 흐느낌도. 신경을 건드리는 기침 소리도.
드디어 시끄러운 악몽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불안함이 밀려드는 이유가 뭘까.
검 수련에 집중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로 갔지, 탑을 옮긴 건가. 아니면 폐렴에 걸려 죽은 건가? 악을 쓰며 울어 댈 때는 언제고 이렇게 쉽게. 그가 드높은 탑 2층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무작정 작은 돌을 던졌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손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때 탑 쪽에서 무언가 툭 날아왔다. 돌멩이였다. 작게 난 창문으로, 쉴 새 없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아를 주체하지 못하고 돌멩이를 마구 던지는 것 같았다. 그랑디아의 공주. 베네딕트의 그리즈의 손이 선명히 보였다.
비아누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는 그게 묘한 안도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그런 안도감이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걸까.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탑 창문을 훑었다.
수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흙먼지로 범벅된 눈가가 선명하게 보였다. 눈이 부신지 앙칼지게 인상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러다 서서히 눈꺼풀을 열고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붉은빛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신비로운 보석 같다고 느꼈을 때 그 눈이 비아누트의 존재를 깨달았다. 놀란 건지 눈빛이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멈칫, 하며 멈춰 버렸다.
비아누트 역시 숨조차 쉬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소녀의 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가여워서? 혹은 죽은 줄 알았던 소녀가 나타났기 때문에?
탑과 숲 사이에 찬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공허하게 나부꼈다. 뭉게뭉게 피어난 흙먼지가 허공을 부유했다.
스산한 바람이 닿았을 뿐인데 그는 가슴 쪽이 뜨거웠다. 이런 게 아름답다는 감정이 맞다면 이제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새벽의 천둥소리를 들은 느낌이었다. 불시에 심장이 날뛰어서 호흡조차 서툴러지는.
밤새도록 겨울비가 내렸다. 해가 뜨자마자 그는 물과 빵, 기도하는 성녀의 청동상 등을 들고 가 소녀의 방 안으로 던져 넣었다.
전쟁용 거대 탑의 위용 때문에 반은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국경 담 너머에 떨어졌다. 다음 날은 연습용 활을 이용해 정확도를 높였다. 물과 감자, 기침약 등을 창 안으로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소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걸 깨달을 때면 그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창가 그림자 뒤에서 밖을 지켜봤던 소녀는 점점 창 가까이로 다가왔다. 때때로 밖을 빼꼼 내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정작 탑을 올려다보면 흙빛 이마와 회갈색 머리칼만 보였다. 그때마다 비아누트는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그리고 오후 두 시 반. 늘 그랬듯 그가 기사단 수련장으로 떠날 시간이 됐다. 며칠간 기척이 없던 소녀가 창 중앙에 입술을 대고 무어라 말했다. 여전히 생기 빠진 목소리와 기침 소리를 바람이 그에게 전해 주었다.
“저기… 있잖아. 저… 음식 고마워.”
목검에 묻은 먼지를 닦아 내던 그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역광을 받은 탑 옆으로 찬란한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그녀가 머무는 곳이 유독 새카맣게 보였다. 가장 선명하게 보고 싶었던 곳만. 그의 미간이 미묘하게 좁혀지는 순간이었다.
“있잖아, 나…. 죽지 않을 거야.”
누구를 위한 건지 모를, 다급한 다짐이 이어졌다.
“나, 나는 정말로 죽지 않을 거야. 다시 꽃밭을 꾸밀 거고, 강아지와 뛰어놀 거야. 어른이 되면 멋진 사내와 혼인해서 세쌍둥이를 낳을 거야. 나는, 나는…. …죽을 수 없어.”
살고 싶다는 절규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왜 나를 정혼자로 선택하지 않았지?
심장으로 아득한 감각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뻐근한 통증이었다. 아니, 벅찬 열통 같기도 했다. 당혹스러운 기색의 그는 대답 없이 숲을 빠져나갔다.
새벽이 되도록 열병을 앓았다. 시종의 간호로 열은 가셨지만 심장이 터질 듯한 느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대주교가 사색이 되어 찾아왔다. 그의 부친에게서 전폭적으로 지원 받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대주교는 걱정 어린 얼굴로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비아누트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영식,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그가 반응하지 않았음에도 대주교가 본론을 꺼냈다.
“혹시 베네딕트의 그리즈를 찾아가고 계시는지요.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지만 숙소 내에서 그런 소문이 돌더군요.”
비아누트는 창밖의 탑만 내내 주시했다. 아픈 기색은 없었지만 여전히 앓고 있는 듯했다. 대주교의 얼굴엔 짙은 우려가 어렸다.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대공 전하께는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다만 그녀에 대한 관심은 영식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줄 거라는 걸 아셔야 해요.”
소년답지 않게 서늘한 이목구비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 점을 살피던 대주교의 눈엔 심연이 어렸다.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과묵했고 감정 표현이 적었다. 그렇기에 그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은 채, 누군가를 막연히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직감해 왔을 뿐이다.
“내일부터는 식사량을 늘려서 드릴 겁니다. 부디 그녀에게 주기 위해 굶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베네딕트의 그리즈는 머지않아 죽게 될 겁니다. 우리 모두 그리고 그녀조차 알고 있어요.”
대주교가 방을 나서자 그의 손은 창문에 어린 탑을 만져 보았다. 그 역시 알고 있지만 그녀를 만나겠다는 처음의 목표는 흐려지지 않는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이끌리는 대로 걷다 보니 또 그랑디아와의 국경 담 앞.
촛불이 켜진 작은 창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서린 천장만이 공허하게 보였다. 그녀의 그림자가 조금씩 움직였다. 앉은 채로 손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만드는 것 같았다.
그때 나무숲 저편에서 어스름한 인영이 달빛에 비쳤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그쪽을 살펴보았다.
플뢰도르의 감시병 같았다. 아니, 사복 차림을 보니 기사 단원은 아니었다.
세 명의 사내들이었다. 비아누트를 발견한 그들이 상체를 낮추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랑디아에서 쫓기던 범죄자들이 국경을 넘어오기도 한다. 비아누트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반면 그들은 저마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지나는 길마다 도적질을 해 가며 도피 자금을 만들어 온 듯했다.
그 점을 깨달았을 때 가장 선두에 선 사내가 번개같이 달려와 비아누트의 목에 검을 겨눴다. 이미 170센티미터도 넘는 키 때문에 성인으로 착각하고 견제한 거다.
운 좋게 귀족 도련님을 발견했다며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미간을 좁힌 그가 검에 반사된 달빛에 한쪽 눈을 찡그리며 사내들을 살펴봤다. 날카로운 검날에 깃든 살의가 피부를 턱 찌르는 순간이었다.
“아악,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아아악! 콜록, 콜록!”
퍼석하게 상한 소녀의 목소리가 탑 안에서 다급하게 호소했다. 놀란 사내들이 위를 올려봤다. 그사이 그녀가 던진 돌멩이가 숲으로 날아들었다.
도와 달라는 울부짖음이 멈추지 않았다. 격렬히 와닿는 괴로움이 비아누트의 피를 달궜다. 목적지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검을 쥔 사내의 손을 두 손으로 쥐고 그의 목덜미를 관통시켰다. 사내가 뒤로 푹 넘어갔다. 검이 비아누트의 손에 쥐어졌다. 검날에서 뚝뚝 떨어진 피가 그의 손을 적셨다.
뜨끈한 감각이 역겨웠다. 그러나 울렁거리기까지 하는 심정을 그는 꾹 참아 내렸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가슴속 어딘가를 찌르는 기침 소리를, 비명을, 울음을 멈추고 싶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내 세 명이 난도질 된 채로 눈앞에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사내의 손가락이 몇 번 펄떡거렸다.
날카롭던 그녀의 비명이 일순간 종적을 감췄다. 그제야 그는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싸늘한 그의 눈동자가 자신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몸 전체가 찐득한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그를 잠식한 것은 역겨움이 아니라 불안감이었다. 그녀의 시선 때문이다. 반란군 타릴루치. 지금 나는, 그들처럼 섬뜩한가?
흔들리는 파란 눈이 오늘따라 유독 밝은 달을 주시했다. 그때 숲속의 고요를 뚫고,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진 채로 들려왔다.
“이 시간에 어째서….”
그 말에서 공포가 아닌 걱정이 묻어났다. 그제야 그는 굳어 있던 등 근육을 풀고 탑 쪽을 언뜻 돌아봤다. 그녀가 여전히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잠이 올 것 같아서.
“잠이 안 와서.”
그 상태로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그대도 기사인 거야?”
그의 손이 얼굴에 튄 피를 느릿하게 훔쳤다.
“아니. 아직.”
“그럼 언젠가 기사가 되면… 나의 기사로 일해 줄 수 있어?”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에게 보호가 필요한 건 명백한 사실이다. 훗날 책임지게 될 수백만 명의 목숨에 한 명 더 늘어나도 변하는 건 없을 터.
하지만 멸문당한 공주의 기사를. 그가 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녀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줄 수 있는 게 없어.”
“…….”
“자장가라도 괜찮다면 불러 줄게. 감시병이 오면 끊길지도 모르지만….”
자장가? 그 상한 목소리로. 그는 탄식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시간은 또 흘렀다. 그러다 달이 더 밝아질 무렵, 낯선 음률이 퍼졌다.
“새들도 잠든 밤 그대의 요람에 씨앗을 품고,
달콤한 찬양으로 꽃 피우리….
그대는 낙원을 거닐고 영원토록 안식하리라.
아아… 그대는 나의 노래를 듣지 못해도
그대는 나의 품에서 영원을 사네.”
자장가가 반복되자 그는 숨죽이고 귀 기울였다. 바람 소리가 거세질 때면 노랫소리를 찾아 좇았다. 더러운 피가 씻겨 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첫 살인으로 흥분했던 몸의 떨림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밝은 달빛에 소녀의 눈가가 환히 드러나 있었다. 자장가처럼 나른할 줄 알았지만 통증이 어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담담히 미소 짓는 모습이란….
그는 아름다움이란 것을 재정의할 수 있었다.
이틀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비아누트는 탑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눈매라도 볼 겨를은 많지 않았다. 요즘 들어 오래 서 있기가 힘들어진 건지, 그녀는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고 했다.
비아누트 역시 담에 기대어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늘 같은 하늘임에도 지루하지 않았다.
감시병의 교대 시간이 되자 그녀가 좋아하는 게 있냐고 물어 왔다. 비아누트는 한참을 생각하고서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없어. 너는?”
“꽃…. 그리고 나비.”
며칠 만에 바람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살아남아서 봄꽃을 볼 수는 없을 거라는 걸 예감했을 때였다.
“나비는 그대와 닮았어.”
“…….”
“계절을 잘못 알고 우화해 내게로 날아든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도 꽃을 피울 수 없는데….”
그 말을 곱씹던 그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잘못 날아든 게 아니야.”
“…….”
“아주 정확했어. 나는.”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잎이 떨어져 가는 나무와 퍼석한 흙만 가득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머물지 않았을 이곳이 그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곳을 바라보며 늘 생각했었다.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어서 숨넘어가도록 울어 대기만 하던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역시 플뢰도르에서 지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만간 본가로 돌아가 기사 서임을 받기로 했다. 그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언젠가 그녀의 기사가 되어 주기로 하고 대가를 받았다. 그 후부터 그는 그녀를 탑에서 꺼낼 방법을 고심해 왔다. 그리고 어제 시종에게 그랑디아 병사 갑옷을 구해 오라고 시켰다.
갑옷을 받는 대로, 감시병들이 교대하는 틈에 밧줄을 타고 담을 넘어갈 생각이었다. 저쪽의 상황을 살펴보면 답이 나오겠지. 저쪽은 전쟁 때문에 새로 들인 감시병들이 많을 테니 눈에 띌 위험도 적을 것이다.
“조만간 너를 데리러 갈게.”
비아누트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미소 지은 얼굴을 그려 보았다.
다음 날, 그는 약속의 증표로 박제 나비를 구해 그녀의 방 창문 안으로 넣었다. 평소라면 창가로 다가왔을 그녀의 기척은 없었다.
오후 5시. 이제는 탑 생활이 익숙해져서 낮잠을 자기 시작한 걸지도 몰랐다. 그는 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저녁 9시. 이곳에 올 때는 얼굴에 석양이 비쳤던 것도 같은데 그새 어둠이 내렸다. 오늘은 달도 밝지 않아서 숲이 어스름했다.
그럼에도 비아누트의 시선은 그녀의 창가를 떠나지 못했다. 이곳에 올 때면 늘 켜져 있었던 촛불이 꺼져 있었다. 그는 그 광경을 끊임없이 바라봤다. 원래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득했다. 깊은 환상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환상이었다면 한 번쯤 나타날 만도 한데 창가는 여전히 새카맸다.
그때 숲 끝에서 쿠엔틴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제야 비아누트가 그랑디아 탑 창가로 향했던 고개를 돌렸다.
“요하네스 님!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쿠엔틴이 다급하게 말하더니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비아누트는 그 모습을 차분하게 살피면서도, 차갑게 식은 손을 어쩌지 못했다. 안 그래도 사나운 눈가에 예민한 기색이 어리는 순간이었다.
“대주교님과 정보통의 얘기를 엿들었는데요. 폐위된 공주가 그랑디아의 성으로 끌려갔대요.”
일순간 앓는 듯한 얼굴을 했던 비아누트는 싸늘하게 이를 물었다. 쿠엔틴은 구하기 어려운 정보를 그에게 준다는 생각으로 신이 난 기색을 보였다.
“정보통의 얘기로는, 어린 왕실 자손들을 대놓고 죽이면 여론이 나빠질까 봐 탑에서 굶겨 죽일 생각이었던 것 같대요. 왕위 찬탈자 타릴루치 놈들이요!”
“…….”
“다른 자손들은 모두 죽을 시간에 막내 공주만 죽지 않아서 데려간 거라고 들었어요. 이렇게 된 김에 얼굴이 아름다우니 늙은 백작의 첩이나 밤 노예로 팔아먹어서 통치 자금을 챙길 생각이라고 하던데요? 생각보다 돈이 되지 않으면 이단 행위를 덮어씌워서 참수하고요.”
평소에는 수고했다는 등의 말을 남겼던 그였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때 쿠엔틴이 저 멀리에 떨어진 돌멩이를 발견하고 의아해하며 가져왔다. 돌멩이에 무언가가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돌멩이를 받아든 비아누트는 촘촘한 매듭을 풀었다. 쪽지였다. 처음 보는 필체였지만 그게 그리즈의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기… 무척 갑작스럽지만 좋은 소식을 전하려 해. 정말로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게 됐어. 무모하게 저항하지만 않으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나는 환영받지 못할 존재이니 어디에서든 정원을 가꾸며 조용하게 살아가려고 해.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행복한지…. 그대가 준 음식들이 헛되지 않았잖아.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정말 기뻐….
떠나기 전에 미리 서임식 선물을 만들었어. 그대를 영원히 기억하기로 하면서.
그런데 있잖아.
목숨을 구하면 한 번쯤은 그대를 만나러 가도 될까. 꿈을 꿔도 그대의 얼굴만큼은 보이지 않아서….
그는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공들여 쓴 글자 하나하나에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감시병들이 소녀를 편히 데려가기 위해 살 곳을 마련해 주겠다고 속인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엔 진실을 알게 되고 무너지는 붉은 눈동자가 그려졌다.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았다. 태어나 처음 보았던 아름다운 것이.
그때 새카매진 시야로 작은 물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쪽지 안에 들어 있었던 물건, 검은색 실을 엮어 만든 팔찌였다.
이내 비아누트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자신의 선물을 만들어 온 그녀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동안 스웨터를 뜨던 모친의 심정을 되짚어 왔기에 상상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목을 갑갑하게 조이는 상의 단추를 두어 개 열었다.
플뢰도르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부친이 그를 기사로 서임하겠다며 바이렌하그로 부른 상황이었다. 그는 날이 밝자마자 본가로 돌아갔다.
그러곤 베네딕트가의 그리즈와 혼인하겠다는 의지만 남기고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당연한 것들조차 하고 싶은 의지가 없었다. 그녀가 없는 세상이 눈에 명확히 보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잿빛 세상.
8일째가 되자 대주교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그의 부친이 결단을 내렸다. 밀과 사탕수수 50수레로, 그녀를 사 오기로 한 것이다.
마침 전쟁으로 통치 자금이 부족했던 타릴루치 가문에서 약혼 확인서를 발행해 줬다. 다만 몇 가지의 조건을 내걸었다.
정치에 그녀를 이용하지 말 것. 외부인과 접촉시키지 말고, 외부에 노출시키지도 않을 것. 그러고도 불안한지 바이렌하그 영식과의 관계를 캐물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베네딕트 가문의 공주와 외아들을 정말로 혼인시킬 생각은 없다는 뜻을 드러냈다. 비아누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부터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오기로 한 날은 날씨가 좋을 거라고 했다.
정원에서 약소하게나마 환영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 뒤에는 기사 서임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인들의 분주함이 잦아들었을 때쯤 정오가 됐다. 그녀가 도착하기로 한 시각.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겨울 폭풍을 예감한 하인들은 정원에 차려 놓은 음식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사이에 키가 자란 까닭에 하의를 수선하고 있었던 비아누트 역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후 바람이 몰아치는 동안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아누트는 어렵게 구한 하얀 장미가 시드는 과정을 내내 지켜보았다.
그때쯤 그녀를 태운 마차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생존자는 없다고 했다.
하인들이 그녀의 시신을 수습해 왔다. 비아누트는 누구보다 시신이라도 기다려 왔지만, 누구보다도 시신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저 새카맣게 탄 인영을 보며 그녀가 아닌 이유를 찾았다. 장례식이 거행될 즘에야 그녀의 죽음에 무력해졌다.
그리고 장례식 당일. 사제들이 그녀의 안식을 기도했다. 비아누트의 눈앞에는 그녀가 남긴 쪽지가 잔상처럼 박혔다.
목숨을 구하면 한 번쯤은 그대를 만나러 가도 될까. 꿈을 꿔도 그대의 얼굴만큼은 보이지 않아서….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꿈을 꾸면 플뢰도르의 편백나무 향기와 새벽하늘의 별들이 선명히 느껴지는데 정작 그녀의 얼굴은 새카맣게 타 있었다.
비아누트는 꿈속에서도 얼굴을 볼 수 없는 그녀에게 매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가 네 얼굴을 돌려줄게. 그리고 찾아갈 거야. 늦지 않도록.
그녀의 무덤을 파는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나 새카맣게 탄 그녀는 깨끗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입술이 사라져 버렸다. 노래를 부를 수도 없게.
그녀의 눈앞에서 받을 예정이었던 그의 기사 서임이 무덤 앞에서 시작됐다. 무덤 양옆에 선 기사들이 검을 치켜들었다.
비아누트는 중앙 길로 걸어 들어와서 사제의 앞에 섰다. 이내 바닥에 검을 꽂고는 반 무릎 꿇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자장가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처절히 붙잡고 싶은 소리. 이제는 천국에서 하염없이 울리겠지.
그는 며칠째 먹지 않아 파리해진 눈가를 매만졌다. 만약 정말로 죽었다면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꽃밭을 꾸며 놓고 강아지와 뛰어놀면서. 새벽녘에는 담담한 자장가를 부르면서.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그의 젖은 흑발에 손을 얹은 주교가 성스럽게 말했다.
“유일신 앞에서 그대를 신의 기사로 봉하노라. 그대는 영원히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겠는가?”
“예.”
“그대는 영원히 신과 국왕과 정인을 위해서 목숨 바치겠는가?”
“예.”
“그대는… 영원히 한 여인만을 가슴에 품겠는가?”
그의 탁한 눈동자는 무덤을 집요하게 주시하며 맹세했다.
“그러하겠습니다.”
주교가 그의 머리에 얹었던 손을 떼며 축복을 내렸다.
“그대는 신의 앞에서 맹세하였다. 그러므로 땅에 묻혀서 천국으로 떠나리니.”
그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그녀가 운이 나빠 습격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폐위된 왕족을 살려 둘 수 없었던 타릴루치가 통치 자금만 삼키고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고요한 땅에서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들이 기어코 빼앗았다. 앞으로는 다신 없을,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었던 그녀를. 그러므로 그는 복수해야만 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부친이 전장에서 사망했다. 숙부와의 경쟁 끝에 대공 작위가 그에게 넘어왔다.
이제 그는 원한다면 뭐든 이룰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타릴루치가 이끄는 그랑디아와의 전쟁조차, 승리는 불투명하지만 시도할 수는 있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을 찾아 주겠다는 꿈속 약속이 그를 이 세상에 붙들어 놓았다. 그 역시 그녀의 얼굴을 알고 싶었다. 기억에 흐릿하게라도 남아 있던 것은 눈매뿐이니, 전장에서 전사해도 천국에서 그녀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는 대외적으로는 군사력을 불리며, 그 외의 시간에는 전국의 미술상을 수소문해 그리즈 베네딕트의 초상화를 찾았다. 다만 구할 수 있었던 건 새카맣게 탄 그림 한 점에 불과했다.
그 후부터는 기억을 더듬으며 직접 그녀를 그렸지만 그녀라는 확신이 드는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11년이 흘러갔다. 그의 시간은 여전히 멈춘 채였다.
두 번의 해가 뜨고 저물었다.
그동안 비아누트는 이렇다 할 식사도 하지 않고 찬물로 몸을 씻어 내기만 했다.
물론 급격히 더워진 날씨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어지러운 속도 그대로였다.
침대 앞 테이블에서 집무를 봤다. 어제 디르크의 부친이 또 서신을 보내왔다. 느닷없이 바이렌하그에 방문하겠다고 한다.
혼담을 나누는 척 그리즈를 보려는 속내를 설마 모를까. 그는 혼인을 재고하겠다고 답했다.
그 후에도 시간을 보내려 서신과 서류를 무작정 처리했다. 바짝 말라붙은 신경을 돌리기에는 적합한 일이지만 집중은 되지 않았다. 손으로는 깃털 펜을 쥐고, 눈으로는 그녀를 보느라 바빴다.
그녀는 아이처럼 웅크린 채 여전히 잠자고 있었다. 쌔근거리는 숨결이 그의 귀를 하염없이 건드렸다.
자신의 귓가를 매만지던 그는 예쁘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차가웠던 얼굴에 잠시나마 미소가 어렸다.
반면 반반했던 그녀의 미간은 와락 좁혀졌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꿈속에서 무엇을 보며 두려워하고 있을지 가만히 그려 보았다.
그때 테이블 위의 흑경이 그를 비췄다. 잔혹한 분위기의 사내가 차갑게 마주 본다. 그녀가 꿈속에서 이 얼굴을 보고 있을 것 같은 예감에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더 뜨거워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고 있을지도 모르므로.
초점이 엇나간 그의 눈이 방 안을 훑었다. 예전에는 고요한 이 방이 지옥인 줄 알았는데 보다 깊은 지옥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더 아름답고, 더 가혹한 곳. 차분했던 그의 호흡에 일말의 갑갑함이 어렸다.
그는 결국 하얀 깃털 펜을 입술로 물고서 미간을 좁혔다. 목을 옥죈 상의 단추를 풀자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근 이틀간 그랬듯 창틀로 가 물수건을 짰다. 한동안 물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깨어났을 때, 그녀가 엉망인 얼굴을 느끼고 당황하지 않도록.
다시 테이블 앞에 앉은 그는 오전에 따라 놓은 홍차를 바라봤다. 찻잎이 오래도록 우러난 까닭에 색이 진했다. 풋풋하고 담백한 맛이 사라진 지 오래일 거다.
한 모금 마시자 예상했던 맛이 풍겨 왔다. 향긋하고 싸한, 중독적인 맛. 그리즈 베네딕트를 생각할 때의 감각과 비슷했기에 그는 오래 우린 홍차를 좋아했다. 그러면서 정작 마리아로 나타난 그녀는 좋아하지 않았다니.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지우고 싶은 기억에서 유유히 멀어지듯.
언젠가 조모 파올라가 진부한 얘기를 했다. 살다 보면 과거의 행적이 파도처럼 닥쳐와 너를 삼키는 순간이 올 거라는, 그때 쓸려 가지 않도록 관용과 절제 그리고 금욕하라는 조언이었다.
비아누트는 그녀의 조언에 맞게 살아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져 가는 그리즈 베네딕트를 느끼는 일에 비하면 모든 것이 쉬웠다.
그렇게 11년. 그녀가 사라지는 게 어느덧 당연해졌다. 그 시기에 가짜 율리아나가 나타났다.
“이름.”
“유, 율리아나입니다.”
그는 붉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부터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외면하기는 편했다. 숙부가 그리즈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여인을 의도적으로 데려온 거라고 여기면서.
그리고 냉소했다. 언젠가 숙부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질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처리하면 대공 비아누트가 권력욕 때문에 숙부를 숙청했다는 풍설은 돌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동안 여유롭게 마리아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유로움은 쿠엔틴의 질문을 기점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번에도 나비를 유심히 보시더니…. 혹 나비를 좋아하십니까?”
“네.”
“역시 혈육이군요. 전하께서도 나비를 좋아하시거든요.”
문득 그는 자신이 나비를 좋아하는 이유와 그녀의 이유가 같을지 궁금해졌다.
충동적으로 나비를 박제하며 생각했다. 이걸 보면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만약 미소를 보인다면, 나는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밤새 숨이 차는 감각을 느끼며 잠을 설쳤다.
그 시간이 허무하게도, 마리아는 나비를 보고 자연스레 굳어 버렸다. 나비를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지만.
그는 심장 근처로 싸한 통증을 느꼈다. 그 후 오히려 편해졌다. 그리즈가 마차 사고로 사망한 게 결국은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구할 기회는 조금도 없었던 게 명확해졌다.
명확해졌으니 마리아는 돌려보내야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기분이 몽롱하게 치솟았다. 지금껏 그런 적 없는데, 하반신에도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때쯤 비아누트는 관심을 돌리려 했다. 흥미로운 일을 찾던 그는 마리아의 이목구비를 토대로 그리즈를 그려 보기로 했다.
그때 왜 알지 못했는지. 그는 쌉쌀한 홍차를 마시며 자조했다.
그녀에게로 향하는 호기심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통제한 적 있었던가.
사실 그는 사라졌던 소녀의 자리가 채워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 돌아서서는 밀려오는 자괴에 두통을 느끼며 숱한 밤을 지새웠다.
그 끝에 바라보는 건 그리고 또 그녀, 마리아.
창틀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게 어느새 그의 일상이 됐다. 정원에서 꽃과 나비를 감상하는 그녀를 관찰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그리즈 베네딕트가 살아서 돌아왔다면 저렇게 평온한 얼굴을 했겠지. 그렇게 그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덧없이 바라보았다.
그때쯤 깨달았다. 그리즈와 비슷한 그녀가 이제 와 나타난 이유는, 초상화를 완성하고 타릴루치를 멸하라는 신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걸.
겨울의 끝자락, 그는 초상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몇 시간을 이젤 앞에 앉아 있고 나서야 스케치를 시작했었지만 그날은 조금 특별했다.
마리아의 얼굴형을 떠올리자 모든 과정이 쉬웠다.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은 조각을 맞춰 가며 이마부터 회색빛 잔머리, 아름다운 눈매를 그렸다.
항상 부르터 있었던 입술까지 그릴 때쯤 비아누트의 눈은 희열로 물들었다. 기억 속의 소녀가 눈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하인에게 물감을 가져오라 시켰다. 그러나 그는 채색하지 못하고 스케치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림 속의 소녀가 슬프게 우는 것 같았다. 예술품 상점에서 구해 온 그림처럼 웃는 입술을 그렸음에도.
그때 브람이 수집방의 문 앞에서 마리아의 동태를 보고했다.
“율리아나 아가씨께서는 승마 수업을 마치셨습니다. 말을 탔던 기억은 남아 있으신지 아주 능숙하게 저택 주변을 달리며 풍경을 감상하고 계십니다. 처음으로 행복해하셔서 모두가 기뻐하고 있어요.”
비아누트는 들꽃 언덕과 편백나무 숲 일대를 노닐며 웃는 마리아를 그려 보았다. 애초에 본 적 없었으므로 가능하지 않았다.
올봄의 그는 새카만 초상화 옆에 새 그림을 걸어 두고 전장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늦겨울, 출정하기는 아직 일렀기에 조급하지 않았다. 그는 마리아의 미소를 기다리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겨울을 둘러봤다.
그리고 위태로워졌다. 마리아가 머릿속에서 선명해질수록 기억 속의 소녀는 빠르게 흐려졌기에.
어느덧 완성되어 가던 기억 속의 퍼즐이 다시금 뒤섞였다. 겁에 질린 채로 우는 예쁜 얼굴이 그리즈의 것인지 마리아의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겨울이 끝나 갔다. 그때쯤 그는 지난번보다 더 그럴듯한 그리즈 베네딕트의 얼굴 스케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보상으로 마리아에게는 귀족 신분을 주기로 했다. 그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까지 한때의 나른함을 취하려고 했다.
그렇게 결론 내린 후에는 생각을 멈췄다. 하루가 다르게 흔들리는 심경을 억누르고 단지 그녀를 가지면 끝이라고 여겼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그녀에게 준 것은 상처뿐. 그녀를 타릴루치의 디르크와 혼인시킬 뻔했다.
꿈에서밖에 만날 수 없었던 그리즈 베네딕트를 다른 사내의 옆에. 상상만으로도 비아누트는 질식하는 착각을 느꼈다.
테이블에서 일어난 그가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플뢰도르의 편백나무 향과 차가운 바람이 느껴진다. 가만히 자장가를 되새겼다. 그녀가 기침과 통증을 삼키며 만들어 낸 선물, 심장의 욱신거림이 서서히 무뎌졌다.
그제야 그는 느슨하게 호흡하며 빈자리에 누웠다. 그녀가 인기척에 깰까 봐서 일정한 간격을 둔 채였다.
조심스러움이 무색하게도 그의 손은 하얀 뺨으로 향했다. 그러나 속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머지않아 그녀의 뺨 앞에서 툭 멈췄다.
그의 눈이 그녀에게 태연히 화대를 건넸던 큼지막한 손을 주시했다. 이대로 잠에서 깬다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손끝이 뺨에 닿을 듯하면서도 닿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손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햇살이 환한 정오였다. 창밖의 태양을 느낀 그는 손을 천천히 움직여, 고운 눈가에 그늘을 만들어 봤다.
그러자 점차 그녀가 인상을 풀었다. 머지않아 꿈결에 미소 짓는 얼굴이 오롯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새파란 눈동자는 어지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스르륵 멈췄다. 문득 빠진 아름다움 속에서 헤어 나오기를 거부한 것처럼.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조심스레 노크하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쿠엔틴입니다. 붉은 늑대에게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비아누트는 이불로 그녀의 눈가를 가려 주고 방을 나갔다. 이내 조용히 걸어서 옆방 회의실로 들어갔다.
쿠엔틴이 뒤따라와서 문을 닫았다. 날씨가 따듯해져 수련 시간이 늘어난 까닭에 구릿빛으로 탄 얼굴이 웃었다.
“정말 좋은 소식을 갖고 왔습니다.”
비아누트는 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서서 팔짱을 꼈다. 좋은 소식을 들으려는 사람답지 않게 기대감이 없었다.
눈동자로 그를 살피던 쿠엔틴이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며 새로운 정보를 알렸다.
“붉은 늑대가 예정대로 오르파담 매음굴 전 주인을 만나서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전 주인이 말하기로, 마리아라는 여인은 11년 전, 그랑디아의 왕이 뒤바뀐 해에 온 것 같다고 해요. 계절은 겨울쯤, 마리아 축일에 온 까닭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더군요.”
“…….”
“약간 석연찮은 점이 있다면, 얼마 전에도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해 물으러 온 사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인상착의가 왠지 마님의 심복인 검은 천사 같습니다.”
“검은 천사?”
“예.”
“자세히 알아보도록.”
“그리하겠습니다.”
곧 회의실은 사람 한 명 없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가 질문할 거라고 예상했던 쿠엔틴은 의아함을 느끼며 그의 눈을 살폈다. 시선이 테이블 중앙 꽃병의 봄꽃에 닿아 있었다.
유난히 나른해 보였다. 그동안 꽃과 나비가 나타나는 계절에는 늘 어두웠음에도.
“그동안 살아 계셨다는 게 사실 믿기지 않습니다. 붉은 늑대에게 서신을 받고도 한동안 확인하고 또 확인했어요. 신께서 축복을 내려 주신 게 틀림없어요.”
쿠엔틴은 그녀를 냉대했던 순간을 잠시 떠올렸다. 어쩔 줄을 모르던 처연한 얼굴이 선명해지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 몸을 최상의 상태로 관리해 오던 대공 비아누트가.
기도와 수련, 집무밖에 없었던 그의 일상도 금 간 지 이틀이나 지났다. 쿠엔틴은 며칠 만에 더 날렵해진 그의 얼굴을 우려스럽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가 살아 돌아온 게 마냥 기쁠 수 없겠지. 연모하는 여인을 알아보지 못한 채 목에 검을 들이댔지 않았나.
그뿐만 아니라 대공의 숙부 스테판이 타릴루치 가문과 내통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그리즈 베네딕트라는 걸 알게 되면 이용하거나 죽이려 들 것이다. 폭정으로 민심을 잃어 가는 타릴루치가 왕의 혈통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을 테니까.
쿠엔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걱정이군요. 타릴루치가에서 그분의 존재를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인데.”
그가 긴 고심 끝에 대답했다.
“무작정 죽일 엄두는 못 내겠지.”
쿠엔틴은 그의 예상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 상황으로 그녀는 율리아나 바이렌하그이고, 노르드발츠 국왕의 먼 친척이다. 무작정 살해? 암살?
…아니, 그런 뻔한 계략보다는 그녀가 그리즈 베네딕트라는 걸 증명한 후에 처리하고 바이렌하그에 책임을 묻는 게 이득이라는 걸 알 것이다.
“그분의 정체가 드러나면 절대 안 되겠군요.”
쿠엔틴은 피해자일 뿐일 그녀를 멸시했던 순간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 약자를 보호하겠노라 맹세했는데. 조금이라도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택 경비대를 더 늘리겠습니다.”
“외부에서 볼 때 이상하지 않을 만큼만.”
“그리하겠습니다.”
“붉은 늑대는 그랑디아 왕궁으로 잠입시켜.”
지시 사항은 그뿐이라는 듯 대공이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멈칫한 쿠엔틴이 돌아서는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한 가지 사안이 더 있습니다. 후작 각하께서 탈스바그와 그랑디아의 국경지에 관문을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랑디아와 원활하게 교역할 거라는 명분인데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그는 조소하며 쿠엔틴을 돌아봤다.
“탈스바그? 바이렌하그 옆이군.”
“…….”
“무혈입성해서 뒤통수치겠다고 알려 주고 있어.”
“저 역시 그런 생각이 듭니다. 후작 각하께서 탈스바그에 관문을 만드는 대가를 받은 정황이 있습니다. 그랑디아에서 탈스바그까지 금화를 옮겼다는 마부를 찾았어요.”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회의를 소집해.”
비아누트는 오랜 회의를 마쳤다. 의외의 복병 때문이었다. 스테판에게 매수된 듯한 관료들이 탈스바그의 관문 공사가 합당하다고 대변했던 것이다.
그러나 증인 마부의 등장으로 판세가 기울었다. 장로들은 타국과 손잡고 개인의 이득을 취한 혐의로 스테판은 재판에 회부하기로 했다. 그날 스테판이 반박 자료를 준비해 오겠지만 비아누트 역시 그의 반역 행위를 증명할 증거를 준비해 참석할 계획이었다.
한낮이었는데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1층 집무실에 들른 그는 문관 브리언을 불러 메모를 건넸다.
“회의 때 숙부를 대변한 관료 명단이야.”
“아, 예. 대공 전하.”
“조사해. 뭐라도 나올 거야.”
브리언이 쪽지를 받아 들었다. 손을 거둔 비아누트는 피로로 어두워진 눈가를 매만졌다.
“탈스바그에는 작년에 빌려준 대출금 상환을 요청해.”
“예. 대공 전하.”
“갚지 못하면 그랑디아 관문 공사비를 회수하겠다고 해.”
그는 탈스바그의 관문 공사를 시작도 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이참에 탈스바그에 대한 숙부의 권리도 뺏어야겠지. 물론 방법은 많았다. 귀족적이고 느린 방법과 비열하고 빠른 방법 중에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고심할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비아누트는 회의하는 사이에 쌓인 과업을 한동안 처리했다.
그 후 노르드발츠 국왕에게 서신을 보냈다. 타릴루치 가문이 탈스바그의 후작을 매수해 바이렌하그의 정세를 흔들려고 하니, 근거를 제시하고 전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과연 국왕이 바이렌하그에 군대를 지원해 줄까.
비아누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보수적인 성향의 국왕이라면 안정적인 통치를 선택할 터.
그는 훤히 보이는 전시 상황을 눈앞에서 지웠다. 그리즈 베네딕트가 깨어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여유를 잃었다.
탁. 방문을 열자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가 커졌다. 바닥에는 깨끗한 카펫이 깔려 있고, 천장에는 촛불로 수놓인 샹들리에가 보였다.
비아누트의 눈동자는 곧장 침대로 향했다. 그곳에 있어야 할 그리즈는 보이지 않았다. 흐트러졌던 침대보가 반듯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나른했던 그의 눈이 서서히 식었다. 행복한 꿈에서 갓 깨어난 것처럼.
하인실에서 대기 중이던 브람이 인기척을 듣고 방으로 돌아왔다. 비아누트는 평소처럼 서늘한 얼굴로 물었다.
“율리아나는,”
브람이 공손히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잠에서 깨시어 몇 가지를 물으시고는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늘 허겁지겁 달아나기 바빴던 뒷모습을 떠올렸다. 돌아갔다고. 이틀 전처럼 그냥 그렇게.
결이 고운 속눈썹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브람이 조각상처럼 멈춰 선 사내를 곁눈질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가씨께서 초상화를 다시 볼 수 있냐고 물으셨고, 또… 대공 전하께서 수집 방에 전쟁 전리품도 모아 두고 계시냐고 물으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전리품 모으는 취미가 없으시다는 제 대답을 들으시고는, 씻고 옷도 갈아입으셔야겠다고 하시며 방을 나서셨습니다.”
“…….”
“그럼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비아누트는 길쭉한 손으로 얼굴을 훔치고는 겉옷을 벗었다.
“율리아나도 저녁 식사를 함께했으면 좋겠군.”
그러곤 뻐근한 목 뒤를 주무르며 목욕실로 향했다.
하인들이 다가와 옷을 벗기고 목욕 시중을 들 동안 비아누트의 눈에 초점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무수히도 많은 의문이 겉돌고 있었다. 그녀가 그랑디아 탑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 작은 창 안으로 음식을 던져준 사람은 기억하고 있을지.
물론 그 사람이 그녀에게는 단지 고마운 사람, 그뿐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 사람의 저택에 타릴루치의 개들이 드나들었지 않나.
달아나지 않을까. 그 여린 발목으로는 멀리 가지도 못하겠지만.
그는 물기가 어린 귓가를 느릿하게 매만졌다. 예전에 그녀에게 했었던 말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없어. 너는.”
설마 그 말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비아누트의 잇새에서 참담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던 하인들이 움찔하며 멈췄다. 비아누트는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다시 웃음기를 지웠다.
사실 그녀가 탑에서의 일을 기억하든 잊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상관없지 않나. 내가 지금 그녀를 필요로 하는데.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고 붙어 있으면 될 일이다. 그건 나비가 아니라 기생충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그는 그 또한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즈 베네딕트가 살아 있고 만날 수가 있다. 그는 사실로도 당장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몸을 말리고 돌아올 때쯤 식사가 준비되었다. 새파란 눈이 텅 빈 의자를 훑었다. 대기 중이던 브람이 단정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율리아나 아가씨께, 전하께서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을 말씀드렸습니다. 곧 올라오실 겁니다.”
비아누트는 의자에 앉아 음식들을 살펴보았다. 지켜보던 브람이 사슴고기와 치킨 수프, 소고기 버섯 미트볼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며칠간 식사를 거르신 전하를 위해서 근력을 북돋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기력이 쇠하신 아가씨를 위한 보양식입니다.”
비아누트는 고고히 냅킨을 펴 무릎 위에 올려놓고서 그리즈가 앉을 자리를 바라봤다.
그대로 30분이 흘렀다. 평소였다면 미간을 좁혔을 그는 기다린 지 1분도 지나지 않은 것처럼 입가에 미소 지은 채였다.
그리고 30분. 한 시간…. 밤 9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앉은 뒷모습을 지켜보던 브람의 낯빛이 초조해졌다.
브람은 열다섯에 아버지를 따라 바이렌하그로 오게 됐다. 운이 좋게 집사로 취직하여 예순이 되도록 세 명의 대공을 모셨다.
그 중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와는 유독 말을 섞을 수 없었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는 달리 거칠었고, 과묵했고, 감정표현도 잘 하지 않았다.
그랬던 까닭이었는지 브람은 그가 처음으로 미소 지었던 순간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가 기사 서임식을 치를 무렵, 전 대공 발데마르가 그의 약혼을 승낙하던 날이었다.
“브람, 나 열넷에 혼인할 거야.”
“…….”
“그 전에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을 거야.”
그러나 비아누트는 혼인하지 못했고, 부친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열넷에 부친을 땅에 묻었고, 장로들의 권력 다툼에서 선택받아 대공 자리에 올랐을 뿐이다.
그는 대공이라는 이름을 증명하려는 듯 무수히도 많은 전장에 올랐다. 때로는 전사하기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사람처럼 굴기도 했다. 무엇이 그리도 바빴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그가 처음으로 멈춰선 시기는 올해 늦겨울이었다. 실종되었던 율리아나가 묘하게 바뀌어 돌아온 해이기도 했다. 브람은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에서 왠지 모를 특별함을 느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게 한스러웠다.
생각하던 브람이 우려스럽게 말했다.
“대공 전하, 아가씨가 혹, 식사 약속을 잊으신 게 아닐까 하여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1층으로 나간 브람은 벨린에게 율리아나에 대해 물었다. 그러곤 창백한 안색으로 돌아와 그에게 상황을 전했다.
“벨린의 얘기로는 아가씨께서 오늘 내내 메스꺼워하셨고, 앓으시다가 잠드셨다고 합니다.”
브람의 생각에는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껏 그녀는 끝내 대공이 원하는 자리까지 걸어왔으니까. 혹시 의도적으로 피하려 하는 게 아닐까.
남을 믿지 않는 성격의 대공이라면 마찬가지로 의심할 법도 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왜인지 걱정과 안도감이 비쳤다. 그녀가 식사에 오지 않은 명백한 이유를 찾았기 때문인 걸까.
그의 눈치를 살피던 브람이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어서 식사를 다시 조리해 오겠습니다.”
대공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율리아나에게 약을 보내 줘.”
“예. 전하.”
대답한 브람은 그가 손의 식은땀을 냅킨으로 닦는 광경을 보았다. 왜인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지금껏 그가 저렇게 긴장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꼽는다면 11년 전, 그랑디아의 공주가 바이렌하그로 오기로 했던 날뿐인데….
브람은 그때의 열병이 다시 그를 덮친 것 같아 두려워졌다.
아침, 그리즈는 따스한 빛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지러운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현기증에 다시 눈 감았다.
어제부터 내내 속이 메스꺼웠다. 토기가 몰아쳐 달아나듯 그의 방에서 빠져나와서 숨을 돌렸다.
그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를 원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었다. 휘둘리게 되지 않을까.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는 저녁쯤 다시 잠을 청했었다. 꿈에 액자를 탈출했던 박제 나비가 나왔다. 며칠 사이에 퍼석하게 마른 모습이었다.
그리즈는 머지않아 나비가 죽을 것 같은 예감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왜 살던 터전으로 돌아가지 않아서는….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을 슬픈 꿈이었다.
사실 디르크가 타릴루치 가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 후부터 슬픈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 분노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타릴루치라는 것도 모르고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자신? 그와 혼인시키려던 스테판? 방조한 할머니와 대공 비아누트? 아니면 원수의 피를 지닌 디르크?
답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더 큰 질문이 닥쳐왔다. 수집 방의 초상화, 어둠이 새카맣게 서린 그림의 주인은 대체 누구였을까? 어째서 대공은 그런 그림을 보물처럼 소장하고 있지? 그림에 튄 핏자국을 보고 왜 피바람이 불던 날의 왕실을 떠올렸을까.
그녀는 한동안 그 당시의 충격과 두려움을 곱씹었다. 다시 도륙의 현장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째서 그런 그림이 익숙한 건지. 왜인지 그랑디아 왕궁에서 그런 초상화를 그린 것 같기도 했다.
만약 그게 그리즈 베네딕트의 초상화가 맞다면 대공 비아누트는 누구일까. 그녀는 매음굴에서 왕실 류트 연주가에게 들었던 얘기를 곱씹었다.
“요하네스라는 사내가 3년 전부터 그랑디아의 막내 공주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울러 초상화를 구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베네딕트 가문의 생존자나 추종자일 수 있으니 바이렌하그 예술품 상점에 가 보세요.”
요하네스…. 가명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혹시 모르니 대공에게 본명을 알려 줘 볼까. 그래, 그가 타릴루치와 손잡은 게 아니라는 확신만 생긴다면야….
그리즈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급한 마음에 몸부터 씻었다. 타릴루치 놈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사흘을 잠으로 보내다니….
돌아오는 길에는 접객실로 들어가, 서랍 속을 확인했다. 연회를 마치고 스테판을 밀고하는 쪽지를 여기에 넣었었다. 저택이 너무 조용하기에 아직도 있을까 했지만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연회에 온 손님 중 누군가가 몰래 가져간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지 않나. 딱 좋은 가십거리니까.
손님이 손대지 않았다면 하녀들이 발견했을 텐데 저택이 왜 이리 조용한지…. 스테판이 가장 먼저 쪽지를 발견하고 빼돌리지 않고서야….
석연찮은 기분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벨린이 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즈는 소리 없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서 숨겨 뒀던 외출증을 꺼냈다. 젖었다가 마른 상태라 쭈글쭈글해진 표면을 보자 암담해졌다. 책 사이에 끼워 두면 조금 괜찮아질까. 다급하게 책장으로 다가가 소설책에 양피지를 끼워 두었다.
그러곤 침대 맡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느 때처럼 평온한 풍경에 불안감이 가라앉은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즈는 문을 살짝 열었다.
“벨린?”
벨린이 그리즈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아가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리즈는 물기가 어려 짙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응. 괜찮아. 자꾸 이런 모습 보여서 참 유감이야, 벨린.”
방으로 들어온 벨린이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접시와 물컵을 집어 그리즈에게 내밀었다. 접시에는 동그란 환이 담겨있었다.
“왕실에서 온 소화제에요. 전하께서 내리셨다고 해요.”
소화제를 멍하게 보던 그리즈는 약을 삼켰다.
“아무래도 많이 걱정하고 계신 것 같아요.”
“전하께서….”
벨린은 그리즈를 테이블 앞에 앉히고는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 주며 대답했다.
“네. 이틀 내내 방에서 아가씨를 간호하셨다고 해요. 식사도 간단히 빵만 드셨어요.”
“잘 기억나지 않아서….”
그리즈는 기억을 더듬었다. 때때로 얼굴에 닿았던 손길이 기억나는 것도 같았다. 잠결에 누군지 확인하려 했지만 역광 때문에 까만 실루엣만 보였는데…. 따듯했던 그 손이 정말 대공 비아누트의 것이었을까.
쓱, 쓱. 머리 빗는 소리만 반복적으로 울렸다. 멍해진 그리즈의 붉은 눈은 흑경에 비친 벨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공이 어째서….
타릴루치 때문에 예민해진 탓인지 갑자기 모든 게 수상하게 느껴진다. 대공 비아누트도, 벨린도…. 돌아온 율리아나가 사실은 그랑디아의 그리즈라는 걸 알면서 안심시키려 하는 게 아닐까. 타릴루치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러다 예민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심호흡했다. 아직도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대공이 가짜 여동생을 타릴루치에게 넘기려 했다면 그냥 가둬 뒀을 텐데.
그리즈가 다시금 눈을 선명히 뜨며 물었다.
“혹시 내가 잠든 동안에 타릴루치 사람들이 온 적은 없지?”
벨린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없었어요.”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벨린의 미소가 너무 천진했다. 그래… 처음 만났을 때도 벨린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지. 뭔가 알고 있었다면 손부터 후들후들 떨었을 터.
“혼인을 앞두고 계셔 걱정되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벨린은 제 아가씨가 혼담을 주고받는 디르크의 가문을 신경 쓰는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리즈는 고갤 끄덕이고는 머리칼을 땋아 주는 벨린의 손을 거울로 비춰 봤다.
“저택에 특별한 일은 없었니? 숙부께서는 출타하셨어?”
쪽지와 스테판의 행방이 궁금했다. 그러나 벨린은 쪽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석연찮은 점이 있는지 미간을 살짝 좁히기만 했다.
“후작 각하께서는 탈스바그로 내려가셨는데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돌아오실 것 같아요.”
그리즈는 스테판이 없다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했다.
치장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메인 요리는 보양식으로 이용되는 사슴 고기였다. 처음엔 식욕이 없었지만 육질이 너무 부드러워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금세 접시를 비우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꽃병의 꽃을 관리하는 벨린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벨린, 혹시 전하의 첫사랑이라는 분…. 성함을 알고 있니?”
모르는 눈치가 아님에도 벨린은 난색을 표했다.
“그건…. 송구합니다만 저는 잘 모, 모릅니다.”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리즈는 대공을 만나야만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어렵사리 그의 집무실을 찾았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외교 문제가 생겨 오전부터 회의 중이라고 한다.
어느덧 태양이 석양으로 변해 안타깝게 지고 있었다. 그때쯤 브람이 그리즈를 찾아왔다.
“아가씨, 브람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그리즈가 문을 열자마자 브람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아가씨께서 초상화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말씀을 어제 전하께 전해 드렸었습니다. 전하께서 아가씨께 초상화를 보여 드리라고 하셨어요. 원래는 직접 보여 드리려 하셨지만 회의가 길어져 그러지 못하셨습니다.”
그리즈의 눈앞에는 잿빛 초상화가 아른거렸다. 그 그림을 하염없이 감상했을 사내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정작 알고 싶은 것은 그의 표정…. 그는 그 그림을 보며 슬퍼했을까.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가지.”
그리즈는 한참 걸어서 수집 방으로 들어갔다. 방을 둘러보던 브람이 정중하게 인사한 후에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 저는 하인실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종을 울려 주세요.”
혼자 남은 그리즈는 화려한 장신구와 드레스로 장식된 방을 둘러봤다. 고풍스러운 살롱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따스해진 날씨에도 벽난로를 켠 건지 등 뒤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울린다. 그 외에는 황량한 겨울처럼 사방이 고요하기만 했다. 창밖의 풍경을 봐야만, 오늘의 계절이 한낮의 봄이라는 걸 깨달을 수가 있다.
왠지 대공은 겨울에 머무르며, 느리게 봄을 준비하는 듯이 느껴졌다. 오래도록 준비한 만큼, 봄이 오면 그가 훌쩍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얼까.
그녀는 천천히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장막을 걷자 새카만 초상화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탄 냄새, 먼지 냄새…. 기분 탓인지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지난번처럼 심장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꾹 참아 내렸다. 그러곤 초를 하나 집어서 장작불을 통해 불을 붙였다.
초상화에 가까이 대자 그림이 환해지며 윤곽을 드러냈다. 웃고 있는 소녀의 모습…. 훼손된 배경으로 그랑디아 산이 보이는 것 같았다.
회색빛 머리 쪽에는 파란색 물감이 뭉개져 있었다. 사파이어 티아라…. 왕궁에서 즐겨 썼던 왕관인데….
하늘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초상화를 살펴보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즈는 더 확실한 증거를 찾고 싶은 마음으로 방을 샅샅이 둘러봤다. 사내가 출타하여 정인을 위해 샀을 법한 고가의 장신구들이 주를 이뤘다.
그리즈는 보석함을 열어 나비 반지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어디선가 편백나무 향기가 풍겨 오는 것 같았다. 가만히 집중하자 아이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해?”
“없어. 너는?”
“꽃…. 그리고 나비.”
아득한 기억이 심장으로 차올랐다. 흔들리던 그리즈의 눈동자가 보석함 옆의 액자에서 멈췄다.
바이렌하그 대공저 지도 같았다. 저택에 점 하나가 찍혀 있었고, 다른 쪽에도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가 무의미한 것을 이 방에 두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그리즈는 액자를 집어 들고 생각에 잠겼다. 하녀 숙소와 예배실 사이의 편백나무 숲 언덕….
이곳에 무언가가 있을지 모르니 한번 찾아가 볼까. 그래, 수집 방에서는 더 이상 찾을 게 없으니까.
방을 나가는 순간 브람을 만났다. 브람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대공 전하께서 곧 도착하실 겁니다. 오늘 식사는 문제없으시겠지요?”
그리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도를 본 김에 표시된 곳에 가 보고 싶었다. 어쩌면 대공과 대화할수록 휘둘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아, 저,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내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저… 약을 조금 더 먹어야 속이 나아질 것 같아서….”
말을 흐린 그리즈는 빠른 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잠잠해지길 기다리거나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가야 할 터인데….
방으로 돌아가 기다려도 비가 멎지 않았기에 평상복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이내 담요로 머리까지 뒤덮고는 저택을 나섰다.
“으….”
툭투두두둑, 툭툭. 담요 사이로 빗줄기가 꽂히기 시작했다. 폭우 때문에 눈을 뜨기도 힘든데다가 어두워서 시야도 흐렸다. 걸을 때마다 종아리에 물이 튀었다.
한참을 헤매고야 하녀 숙소와 예배실 사잇길에 도착했다. 눈앞에 언덕길이 펼쳐져 있었다. 길 양옆에는 편백나무가 구슬프게 비를 맞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언덕을 올랐다. 이곳이 맞겠지, 그가 이곳에 둔 것은 대체 무얼까. 첫사랑의 아름다운 조각상일까.
그녀는 첫사랑의 조각상을 바라보는 대공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애틋한 표정과 미소…. 그 시선 끝에는 어떤 여인이 닿아 있을까.
“하아, 하아….”
언덕에 가까워질수록, 젖은 담요가 무거워졌기에 바닥에 내려 두었다. 빗줄기가 머리를 얼얼하게 때렸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언덕 정상. 저 멀리, 먹구름이 낀 하늘과 호수가 어렴풋이 보였다. 머리 위의 편백나무는 하늘의 그림자처럼 새카맸다.
하늘이 너무 어두운 까닭에 언덕 위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조각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름표라도 적혀있지 않을까….
그리즈가 언덕 중앙에 희미하게 솟아오른 물체를 주시하며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움직이고는 있지만 두려움으로 발목이 덜덜 떨렸다.
그때였다. 우르릉, 콰콰쾅! 일순간 하늘이 격노한 듯 벼락을 내리꽂았다. 그리즈는 몸이 땅 밑으로 꺼지는 느낌에 상체를 낮췄다.
“읏!”
그 순간, 뒤늦게 번개가 치며 사방이 밝아졌다. 새카만 인영의 정체도 속절없이 드러났다.
무덤이었다. 꽃이 아름답게 핀….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그녀를 처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즈 베네딕트, 이곳에 잠들다.
벼락에 마비된 귀에서 삐익, 하는 이명이 울렸다. 빛이 사라지자 까마득한 어둠이 무섭도록 내려왔다.
쿵쿵! 발작하던 심장 소리에 빗소리가 정신없이 뒤섞였다. 흙냄새가 진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숨을 크게 마신 그리즈는 무덤가를 바라봤다.
잠깐이나마 믿을 수 없는 꿈을 꿨던 것 같았다. 그리즈 베네딕트가 잠들어 있다니…? 이 아름다운 바이렌하그에….
그 순간 다시 한번 번개가 내리쳤다. 번쩍! 하늘이 점멸했다. 붉은색 눈동자가 비석의 이름을 정신없이 훑었다.
그리즈 베네딕트. 이곳에 잠들다.
아무리 읽어도 그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일까. 죽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곳에 무덤이….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만든 걸까. 설마, 설마 대공 비아누트가….
그리즈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기억 속을 다급하게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목소리들이 웅웅 울렸다.
“대공 전하가 정혼하려 했던 소녀가 죽은 건 알고 있지?”
“요하네스라는 사내가 3년 전부터 그랑디아의 막내 공주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초상화를 구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바이렌하그 예술품 상점에 가 보세요.”
바이렌하그 예술품 상점? 요하네스…?
갑자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가 열두 살이었다. 3년 전이면 아홉 살, 탑에 갇혔을 시기인데….
넋이 나간 그리즈의 눈앞에 수집 방의 꽃과 나비 장신구가 아른거렸다. 아홉 살 무렵 흑발 소년에게 꽃과 나비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우연이 아니라면 설마 정말 그가….
다시 번개가 하늘을 밝히자 새카맸던 무덤에 빛이 드리웠다. 탑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이 잔상처럼 내려앉는 것도 같았다. 소년이 가끔 보여 주었던, 희미하게 미소 짓는 입술도 아득하게 그려졌다.
“조만간 너를 데리러 갈게.”
설마 그 소년이….
아…. 갑자기 심장 부근이 찌릿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언덕을 오르며 상상했었던 그의 첫사랑 조각상이 사라지고, 꽃이 아름답게 핀 무덤이 눈앞에 선명해진다. 그 앞에서 무덤을 바라보는 사내, 대공 비아누트의 공허한 눈이 그려졌다. 미동 없는 그를 상상할수록 온몸이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그 노래는 어디서 배웠지.”
“숙부가 알려 줬어? 그 자장가를 부르면서 어슬렁거리면 내가 건드려 줄 거라고.”
그럼 그가 초조한 얼굴로 베네딕트의 자장가에 대해 물었던 이유가….
“…자장가라도 괜찮다면 불러 줄게. 감시병이 오면 끊길지도 모르지만.”
피가 섞인 기침을 쉬지 않고 해 댔던 그날이 무덤가에 펼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볼썽사납게 쉬어 버린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던 소년을 보며 느꼈던 두근거림도 다시금 선명해졌다.
“아아… 그대는 나의 노래를 듣지 못해도
그대는 나의 품에서 영원을 사네.”
무수히도 많이 불렀지만 그날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세상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듯이 귀 기울인 소년의 모습이 마지막 선물처럼 느껴졌으니까. 줄 수만 있다면 소년에게 더, 더 많은 걸 주고 싶었다.
그 소년이 정말로 그가 맞을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아닌데….
“평민으로 살겠다고. 가진 건 몸뿐인 빈털터리가.”
“…….”
“그럼 몸 파는 평민이 되겠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릴수록, 소년의 청아한 분위기와 대공의 잔혹한 미소가 뒤섞여 형체를 잃었다. 전쟁을 겪어 망가진 초상화처럼 훼손된 것 같았다.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제발 흑발 소년이기를 바랐다. 가혹한 그를 두려워했고 미워했지만 마음이 가는 걸 막을 수 없었으므로.
지금 당장 달려가 그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만약 그가 인정한다면, 억눌러 왔던 과거의 기억들을 후련히 꺼내어 놓고 싶기도 했다. 이렇게 의욕이 생겼던 적은 없었는데…. 그동안은 모든 게 두려웠고 스스로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리즈가 얼굴에 묻은 비를 훔치고는 뒤돌아봤다. 창백해진 입술에 힘이 들어간다. 용기를 내는 중이었다. 그만큼 그 소년을 그리워 해왔으므로.
어둠에 적응된 눈으로 내리막길이 보였다. 그리즈는 한 발 한 발 그를 향해 내딛기 시작했다.
다리에 속도가 붙자 오히려 더 다급해졌다. 빨리, 더 빨리….
웅덩이에 발이 툭 빠지자 물이 철퍽, 하며 튀어 올랐다. 흠뻑 젖은 원피스가 허벅지에 척척 달라붙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까는 멀게만 느껴졌던 저택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그러나 속도를 주체 못 하고 계단 돌바닥에 쿵 미끄러졌다. 저택 앞에 서 있던 하녀장 로렐이 사색이 됐다.
“에그머니나, 아가씨!”
“하아, 하아….”
“오셨군요! 갑자기 사라지셨다고 해서, 지금, 사람들이….”
로렐의 부축을 받아 다급하게 일어난 그리즈는 로비로 달려 들어갔다. 시야가 얼룩졌음에도 그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만이 보였다.
“아가씨? 아가씨! 무릎에서 피가, 아가씨!”
타닥, 타다닥, 계단을 오르자 로렐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졌다. 그렇게 도착한 2층 집무실. 그리즈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문을 노크했다.
“전하, 전하! 계세요?”
다급한 마음에 문을 열자 텅 빈 집무실이 보였다. 그의 방도 찾아가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굴리던 그녀는 수집 방을 노크했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전하, 전하…. 계세요? 저, 저예요. 저, 저는…. 하아, 하아….”
정적이 전해져 오자 안타까움이 커진다. 그의 첫사랑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제발, 제발. 그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하지만 그를 만나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다급하게 뒤를 쫓아왔던 로렐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즈는 흠뻑 젖은 몸을 어쩌지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바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투둑, 투둑. 발밑에 빗물이 고인다.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흙 묻은 발이 덜덜 떨렸다.
똑, 똑.
그때 차분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럴 만한 사람은 이 저택에 한 명뿐인데….
그리즈의 눈가가 슬프게 흔들렸다. 안타깝게 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오한에 떨리는 얼굴이 문 쪽을 향했다.
그 순간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방문 틈새로 흠뻑 젖은 인영이 보였다. 방에서 새어 나간 빛이 밖을 비추었다. 문밖, 새파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 눈동자를 알아본 그리즈는 호흡을 멈췄다. 드디어 그가 나타나 주었다. 빗물에 젖은 그녀와 한 치의 다름없이 젖은 모습으로.
그리즈는 물방울이 뚝 떨어지는 속눈썹을 보다가 길게 호흡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다. 머릿속에 한가득 차 있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막상 하려니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뛸 때마다 몸을 쳐서 어지럽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때 그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문이 탁, 닫혔다.
목덜미에서 핏대가 펄떡이는 걸 보면 운동이라도 하다 온 눈치였다. 그런데 얼굴은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처럼 창백했다. 무언가에 혼란스럽게 질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입은 하얀색 상의는 물에 젖어 가슴팍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칼에 툭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뺨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빗속에서 한참을 헤맨 모습 같았다. 설마, 설마….
설마, 없어진 줄 알고 찾아다녔던 건가. 지금껏 가까스로 참았던 감정들이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무, 무덤…. 무덤. 그곳에 갔었어요.”
우르릉 쾅! 천둥이 내리쳤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했지만, 그의 눈은 그녀만을 주시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 무덤을 봤어요. 그 무덤에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 이름이, 이름이. 하아, 하아. 저, 전하의 첫사랑, 맞, 맞나요?”
제발, 제발…. 그의 대답을 듣고자 숨조차 죽였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어지러운 감정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절망. 빛보다 더 눈부신 환희. 눈동자가 새카맣게 죽었다가 격렬하게 부활한 듯 빛났다.
거칠어졌다가 멎었다가 더 거칠어지는 호흡이 들려오자 그리즈는 죽을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의 모든 게, 그 소년이 맞다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정말, 정말…. 일순간 왈칵 터지려는 눈물을 참으려 숨을 꾹 멈췄다.
그때 그가 목덜미로 핏대를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평소와 같았지만 눈가가 붉었다. 울고 싶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기어코 눈물을 속절없이 터트렸다. 잔혹하고도 행복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당신이 그 소년일 수 있을까. 순수하고 청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지냈기에…. 무려 11년…. 그 시간 속에서 그는 형체가 희미한 그 초상화를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느껴왔던 걸까.
벅차게 심호흡하던 그녀가 괴롭게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저, 저예요.”
“…….”
“저예요, 저… 제가 그, 그리즈. 제가 그리즈예요. 저예요. 제 이름인데….”
그동안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매음굴에서도… 말투가 이상하다며 어디의 누구인지 본명을 말하라고 발길질을 당했을 때도 비명 한 번 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숨겼던 진짜 이름을 이제라도 드러내고 싶었다. 그가 무덤을 만들고 기억해 주었으니까. 짧았던 겨울날을 추억하며, 지난 11년 동안을 홀로 그렇게….
“저, 저, 살아 있었어요. 저… 믿, 믿어 주시겠어요?”
그리즈는 문득 두려운 얼굴을 했다. 그가 믿지 않는 상황이 또 두려워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그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는 목울대를 본 그녀가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며 말했다.
“아세요? 아세요? 그럼, 언제, 왜? 왜….”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은데 목이 꽉 막혔다. 그때 그가 눈물 젖은 뺨을 손으로 닦아 줬다. 탄탄한 손목에 팔찌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흔하지 않은 검은색 팔찌…. 탑에서 추위에 언 손을 녹여가며 팔찌를 엮던 기억이 그녀의 눈앞을 스쳤다.
“이, 이 팔찌는….”
그녀의 얼굴에 꽂혔던 파란 시선이 팔찌를 쓱 훑었다.
“오늘 처음으로 찼어.”
그리즈의 눈은 증거를 확인하려 혈안이 된 채로 팔찌를 치열하게 살펴보았다. 오래되어 삭은 흔적이 보였다. 찢은 이불을 손으로 말아 엮었기에 끝 면도 우둘투둘했다.
아, 그가 정말로…. 그리즈가 얼굴을 괴롭게 무너트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어찌, 어찌… 이리도 가혹하게.”
지금껏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소년을 드디어 만나게 됐다. 벅찰 만큼 기뻤고, 또 가슴 무너지도록 슬펐다.
모두가 등을 돌렸을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줬던 그였기에 부디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바랐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볼품없는 팔찌를 11년이나 간직하며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고 있었다니….
“나의 기사로 일해 줄 수 있어?”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을 하지 않았어도….
목숨을 구하면 한 번쯤은 그대를 만나러 가도 될까. 꿈을 꿔도 그대의 얼굴만큼은 보이지 않아서….
탑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나는, 나는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를 계속 만나고 싶은 마음에 기사가 되어 달라고 말하고 억지로 보답을 주고…. 데리러 오겠다는 그의 마음을 거절하지도 않았어.
…최악이야. 그저 너무 무섭고 외로워서 누군가 나타나 주길 바랐을 뿐이었는데…. 잠시나마 곁에 있어 주길 바랐을 뿐인데….
“하아, 갑자기 너무 괴, 괴로워요.”
“…….”
“단지, 단지 그 탑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 가는 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한 명만, 한 명만, 제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을 뿐이었는데….”
소년이 울음소리를 듣고 나타나 주어서 오로지 기뻤다. 내일도 올까? 또 내일도 오려나? 그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매일 와 주기를 바랐었다.
통성명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교환하기 전까지는 친구가 아니니까. 어딘가에 끌려가서 죽어도 그는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이름을 묻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았었는데….
비아누트, 비아누트….
그게 그대의 이름이었구나.
그리즈는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 사이로 눈을 감았다.
아홉 살의 겨울날이 눈앞에 펼쳐진다. 늘 어두컴컴한 방에서 올려다보던 빛의 창문이 선명해졌다.
그리즈는 오전이면 늘 그가 전날에 준 빵을 먹고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그를 하염없이 기다렸었다. 그래 봤자 까만색 머리의 움직임을 보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기뻤다.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 이름 모를 허브 사탕이 유독 달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소년은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 낸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대가 없는 친절을 받아 본 기억이 없었으므로.
말을 걸면 바람결에 사라지지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환상이라면 언젠가는 사라질 텐데… 그때 느낄 절망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저기… 있잖아. 저… 음식 고마워.”
조심스러운 말에 그가 탑을 올려보았었다. 무성한 나뭇잎 때문에 얼굴은 흐릿했지만 눈동자가 유독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한다. 형체 없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그가 환상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걸 잊을 정도로.
그리즈는 손수건을 꼭 쥐었었다. 그가 환상이 아니라면 꼭 들어줬으면 하는 얘기가 있었다.
“있잖아, 나…. 죽지 않을 거야.”
“…….”
“나, 나는 정말로 죽지 않을 거야. 다시 꽃밭을 꾸밀 거고, 강아지와 뛰어놀 거야. 어른이 되면 멋진 사내와 혼인해서 세쌍둥이를 낳을 거야. 나는, 나는…. …죽을 수 없어.”
그대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다짐했었다.
애석하게도 몸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추위 때문에 열 감기를 앓았고, 먼지 때문에 기침이 멎지 않았다. 그가 준 약을 먹어도 회복이 더뎠다.
그래도 힘내어 작은 선물을 준비했던 밤이었다. 밖에서 사내들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사람이 잘 지나지 않는데….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밖에 흑발 소년과 검을 든 살인마가 대치 중이었다. 그리즈는 검을 보자마자 몸부터 굳어 버렸다. 어디에든 숨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살인마들이 탑을 올려다보고 쫓아올 것 같은 망상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소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예감….
다급하게 돌을 모았다. 창밖으로 내던지는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떨어져도 다시 올라갔다. 떨어져도 계속, 계속…. 그것밖에는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므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소년이 살인마들을 해치우고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즈는 왕궁에서 맡았던 친구들의 피 냄새를 떠올리며 다시금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뒤이어 가슴이 벅차 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나약하게 울기만 했던 내가 그를 도왔다니! 함께 살인마들을 처치했다니…!
피가 흐르는 무릎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리즈는 절망으로 향하는 길에 한 줄기 빛이 드리우는 환상에 홀려 있었다.
머지않아 그가 빛의 길에서 절망으로 빠져들 거라는 것도 모르고….
“사실 전하께서 지금껏 여인에 관심 없으셨던 터라 모두가 걱정이 많았어요. 후사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출정하시니 불안할 따름이었죠.”
그리즈가 아랫입술을 꾹 물며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누, 누군가를 오래도록 힘들게 할 줄 알았다면 말 걸지 않았을 거예요. 단지… 자유가 주어지면 그 숲을 찾아가서 소년을 떠올리는 걸로도 행복해할 수 있었는데….”
비에 젖은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손이 후들거리는 광경을 내려다보던 그가 이불로 그리즈의 몸을 감싸 주었다. 이내 기억하라는 듯 느리게 말했다.
“네가 나를 구했어. 그 목소리를 바쳐서.”
그날 보았던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아름다운 빛이었다. 그리즈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가 큰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휘감아 주무르며 나지막이 물었다.
“내가 원해서 머물렀어. 그게 왜 네 실수가 될까.”
원했기에 머물렀다. 그뿐. 그에게서 흑발 소년을 보고 있었던 그리즈의 눈에 대공 비아누트가 비치기 시작했다. 소년과 함께했던 추억이 흐려지고, 대공 비아누트와의 기억이 떠오른다.
숨 막히도록 긴장됐던 그와의 식사 자리, 드레스 앞섶을 억지로 열던 그의 모습, 그가 금화로 하룻밤을 샀던 순간까지…. 심장이 가슴 앞쪽을 아프게 치는 듯했다.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파란 눈이, 그런 그녀를 빤히 훑어봤다. 그 모습이 곁눈으로 보이자 그리즈는 이전처럼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몸이 추위에 떨리는 건지, 그의 시선 때문에 떨리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눈매를 좁힌 그가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께로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리즈는 길쭉한 손이 곁눈으로 보이자 긴장하며 목덜미에 힘을 줬다. 그가 어딘지 애타는 얼굴을 했다. 낯설지는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종종 그런 표정을 지었으므로.
차가웠던 공기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불 끝단을 잡아 여민 손에 힘이 들어가는 찰나, 그가 뺨에 붙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떼어 줬다.
그리즈는 그의 손이 멀어진 후에야 몸의 힘을 풀었다. 어깨높이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그의 눈에는 묘한 초조감이 어렸다.
“그리즈.”
그리즈, 그리즈….
그의 저음이, 이제는 낯설어진 이름을 부른다. 그리즈는 숨을 꾹 삼키곤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서늘함을 풍기는 잘생긴 얼굴이 그녀를 선명히 주시하고 있었다. 때때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 얼굴이, 지난날의 그와 겹쳐 보였다. 박제한 나비를 선물하고, 세쌍둥이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그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그리즈가 바싹 마른 입을 열었다.
“저와 탑에서 만났었다는 사실… 언제부터 아신 건가요?”
다른 생각에 잠긴 듯했던 그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네가 초상화 앞에서 쓰러진 날에.”
“하지만… 제게 나비를 주셨고, 세쌍둥이 얘기를 하셨잖아요. 제가 나타난 거라고 믿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었을 텐데….”
대답하는 그는 왜인지 실컷 희롱당했던 사내 같았다.
“어떤 날은 믿었고 다음 날은 그 반대였어.”
“…….”
“그러다 네가 웃을 때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어졌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리즈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앞으로 그녀가 짓는 표정을 머릿속에 새기기로 작정한 듯 세세히 살피며 말했다.
“나도 그래. 매 순간 그랬어.”
눈썹을 까딱거리며 경청하던 그리즈가 시선을 떨궜다. 또다시 복잡한 감정이 차오르려고 했다. 그때 그가 팔찌 낀 손으로 자신의 쇄골께를 매만졌다. 손목이 훤히 드러났다. 굵고 새파란 혈관을 보던 그리즈가 팔찌를 주시하며 물었다.
“작은 것 같은데… 안 불편하신가요?”
그는 팔찌가 작다는 걸 처음 깨달은 눈치였다.
“좋아. 누가 만든 건데.”
머리 위에서 느슨한 숨결이 떨어졌다. 움찔한 그녀는 눈동자로 그의 몸을 살폈다. 감정이 진정되자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건강미 넘치는 목덜미에 땀이 어린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탄탄한 상체와 허벅지는 평소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녀는 얇은 옷감 아래로 단단하게 굳는 가슴 근육을 보다가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새, 새로 만들어 드릴게요.”
그때 내리깔려 있던 짙은 속눈썹이 그녀의 얼굴로 확 올라왔다. 어두운 방 안에서 새파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래.”
그 눈이 그녀의 목덜미를 훑기 시작했다. 새로운 팔찌도 원하지만 당장은 그보다 눈앞 여인의 모든 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불을 꽉 쥐었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겁먹은 건지, 추운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보고 그의 얼굴이 묘하게 흔들렸다.
곧장 사내의 입술이 금욕적으로 맞물리는 광경을 보고 그리즈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찾아온 정적. 빗소리만 가득한 방 안에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
“목욕하고 젖은 옷부터 갈아입어. 벨린을 부를게.”
그 후에 다시 얘기하는 게 좋겠다는 듯 그가 돌아섰다. 그의 등을 보며 그리즈는 몸에 쌓인 긴장을 빼냈다.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보다는 계속 그와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젖은 발소리가 유유히 멀어지자 그리즈는 머뭇거리다 뒤따랐다. 탁, 방문이 열렸다. 망설이던 그리즈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그의 등에 흘렸다.
“그런데 저…. 저 때문에 앞으로 영지와 전하의 안위가 불안해질 수도 있어요.”
“…….”
“그게 좀 걱정돼서…. 혹시 타릴루치 가문에 적의를 가진 가문이 있다면 그쪽에 가서 후일을 도모해도 좋을 것 같고… 아니면….”
베아트릭스 빈젤이 가고 난 후부터 타릴루치 사람들에게 위치를 들켰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계속 이렇게 버틸 수는 없지 않을까. 그리즈가 붉은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말했다.
“사실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고고했던 그의 발걸음이 일순간 멈췄다.
또 정적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뜨끈해 보였던 그의 등이 그대로 굳은 것 같았다. 갑자기, 어째서…? 혼란스러워지는 순간 끼익. 문이 닫혔다.
이내 뒤돌아본 그가 상의를 위로 끌어 올려 젖은 얼굴을 닦았다. 그의 바로 뒤에 있었던 그리즈는 움찔하며 그의 배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복근과 장골 능선이 선명했다.
아…. 한 발 물러나는데 그가 상의를 그대로 놓으며 한 걸음 걸어왔다. 하얀 상의 아랫단이 허리춤에 비스듬히 달라붙었다. 그가 한 발 더 앞으로 오자 치골이 아찔하게 꿀렁거렸다.
그리즈는 육감적인 몸을 보고 놀라 막연히 뒷걸음치기만 했다. 그가 그녀를 수세로 몰듯 느릿하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무심한 얼굴 안에서 새카만 무언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이전부터 타오르고 있었던 듯했다. 다가가면 데일 듯이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즈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즈.”
“…네.”
다시 떠나겠다는 말이 아닌데도 대공은 무질서한 얼굴을 했다. 이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안 그래도 어지러웠던 흑발이 스르륵 흐트러졌다.
“타릴루치는 내게 그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지.”
“…….”
“내가 불안했던 건 삼십 분 전이었어. 네가 사라졌을 때.”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훑었다. 하얀 상의에 흙탕물이 배어 있었다. 그가 서 있었던 바닥에는 더 많은 물이 고여 있었다.
역시….
그녀는 여동생이 사라졌다는 말에 대공 비아누트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은 잘 되지 않았지만 묘한 안타까움이 심장 부근을 건드렸다. 고작 이 정도로도 버거운데… 그가 누구도 아닌 타릴루치 때문에 곤란하게 된다면…. 그리즈는 꾹 물었던 입술을 풀며 말했다.
“전하를 믿고 의지하고 싶지만 아직은 어려워서…. 어서 시간이 지나 마음 편해질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진득한 시선이 그녀의 몸을 쓱 훑었다.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아찔하게 문질렀다.
“간절히 바란다고 이뤄질까.”
“…….”
“그게 가능했다면 너는 이미 내 옆에 있었을 텐데.”
그리즈는 한 발 더 깊게 뒷걸음질했다. 조금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대공의 강렬한 얼굴에 먹구름 낀 달빛이 흐릿하게 비쳤다.
“하지만 타릴루치는….”
“타릴루치는 머지않아 죽을 거야.”
“…….”
“내가 죽이려고.”
그 순간 뒤꿈치가 침대 모서리에 탁 걸렸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침대 봉을 쥔 채로, 입술을 버벅거렸다.
그의 나른한 저음이 이어졌다.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어린 걸 보면 진심이었다.
“머리 잘라서 선물 상자에 담아 올게.”
그리즈는 그가 코앞에 있는 까닭에, 젖은 로즈마리 향기가 콧속으로 풍겨 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사이 그녀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가 두 팔로 허리를 휘감아 안고는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느슨하게 대며 말했다.
“그리즈, 그리즈….”
“읏, 네….”
“나는 매일 너를 찾아갔고, 먹을 것을 줬고, 그곳에서 빼내려 했어. 마차 사고로 너를 잃은 줄 알면서도 찾아다녔고, 잊지 못했어.”
“…….”
“그것만 기억하면 돼. 달아나고 싶어질 때면.”
그러니까 그는 그리즈 베네딕트에게 모든 걸 바쳤으니, 이제 멀어져서도, 도망가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다른 영지에 숨어 있을 생각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지금은 그의 몸이 너무 가까웠고, 진한 향기에 기분이 몽롱했다. 그리즈가 부드러운 숨결을 흘렸다.
그 소리에 반응한 그가 목에 힘을 줬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내 그리즈를 응시하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줬다. 촛불 빛을 흡수한 새파란 눈이 세뇌를 시도했다.
“그리즈. 기억해 봐, 지금.”
태연히 좁힌 눈매가 그녀를 빤히 주시했다. 애초에 이럴 작정으로 돌아온 건지 흔들림이 없었다. 목욕하고 옷 갈아입는 게 좋겠다고 했으면서….
그녀가 허리를 감은 팔을 풀기 위해 두 손을 등 뒤로 옮겼다. 그 순간 낮은 저음이 그리즈의 목덜미에서 다시금 뜨끈하게 번졌다.
“기억해 봐. 내가 뭘 했는지.”
그 찰나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한 몸이 뒤로 풀썩 넘어가 버렸다. 침대 봉을 쥔 손이 미끄러져서 다급히 매트를 짚었다.
지금껏 맡았던 것 중에 가장 진한 로즈마리 향기가 그리즈의 몸 위를 장악했다. 그 향기를 맡은 그녀는 아래를 진득하게 파고들었던 그의 것을 떠올렸다.
“아흣, 그, 그만….”
눕혀진 시야에 그가 있었다.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흡사 교육 받은 짐승 같았다. 조금 전까지는 정중한 귀족 사내였는데…. 갑자기 조급해져서 그의 입술이 닿지 않도록 고개를 비스듬히 뺐다.
“저, 저를 매일 찾아왔고, 잊지 못하셨고, 또, 또…. 그래서 저는, 흣. 달아날 수 없어요.”
덕분에 드러난 가슴 위를 그가 끈적하게 빨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더 흥분하는 건지, 미간을 기분 좋게 좁혔다.
“그래. 듣기 좋군.”
그에게서 전에 볼 수 없던 격정이 느껴졌다. 치미는 그의 희열과 광기가 감각을 데웠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몸 안쪽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피부를 질척하게 애무하는 입술을 견디던 그리즈가 발끝을 오므렸다.
“흣, 대공 전하….”
“어렸을 때처럼 말해 봐, 그리즈.”
주종 관계에 불과한 호칭이 이제는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초조해하던 그리즈가 아랫입술을 이로 긁다가 대답했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방음 잘돼, 이 방은. 그리고 다 자러 갔지.”
이내 그녀는 당황해서는 목덜미까지 붉힌 채로 노력했다. 그러나 두려웠고 멀게만 느껴지던 사내에게 격의 없이 말하려 하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쫓기는 듯한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훑어봤다. 친근한 말투가 아니라도 뭐든 짜내고 싶은 듯, 집요한 빛을 드러냈다.
이성적으로 방을 나서려 했던 사내가 순식간에 이렇게…. 그리즈는 가슴 위로 떨어지는 입김에 허벅지 안쪽을 떨었다.
“흣, 당장은 힘들 것 같아요.”
그때 그가 위태롭게 세워진 무릎 사이에 하반신을 끼워 넣었다. 그러곤 그녀의 턱을 부드러이 쥐며 얼굴을 마주 보았다. 미끈한 입술이 아찔하게 열렸다. 긴장하는 순간 그리즈의 입술을 다급하게 머금었다.
“읍…!”
침대 시트를 쥐고 눈을 감자 입술의 감각이 온전히 느껴졌다. 그의 잇새에서 나온 혀가 입술을 훑자 뜨끈해져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 긴 손가락이 뒤쪽 머리칼 사이로 들어와 뒤통수를 받쳤다.
기분 좋아…. 그녀가 그의 옷자락을 쥐는 순간 혀가 입 안 깊숙이 닥쳐왔다.
눈을 감은 사내가 느슨하게 헉헉대며 보이지 않는 곳을 혀로 훑기 시작했다. 달아나려는 작은 혀를 엮어 비빌수록 등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묵직해졌었던 바지 앞섶은 버거울 정도로 팽팽해졌다.
그곳이 그리즈의 둔덕에 닿자 그가 낮은 신음을 터트렸다. 이내 입술을 살짝 떼고는 거친 호흡을 삼키며 말했다.
“그럼 내일 해. 안 되면 또 내일 하고.”
“으읏.”
“안 되면 또 내일.”
“…….”
“그렇게 여기서 계속 사는 거야, 알겠지.”
그가 입술로 그녀의 뺨을 훑으며 그녀의 손을 자신의 머리칼 뒤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이 살짝 떨어지며 목 뒤를 훑자 흥분돼서 견딜 수 없는 얼굴을 했다.
“하아….”
어깨에 바이렌하그 문양이 새겨진 상의가 이미 그의 턱밑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는 상의를 이로 물었다가 손으로 잡아당겨서 벗었다.
막 운동하고 온 몸처럼 상체가 더 단단해져 있었다. 그리즈의 시선이 두툼한 가슴팍을 훑었다. 이내 어깨까지 불거진 핏줄을 보고서는, 굴곡이 명확한 복근에 닿았다. 두려움이 강해진다.
지난번에는 그를 마주 보지 않은 덕분에 그저 몽롱하기만 했으니까. 이렇게 커다란 몸이 자신의 배 위에서 저번처럼 움직이려 하는 거 같다는 생각에 현기증이 났다.
그때 그가 그리즈의 노란색 원피스 앞 단추를 연 후 네글리제 어깨끈을 입술로 물었다가 팔 쪽으로 당겨 내렸다.
파란색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늘 드레스 속에 가까스로 숨겼던 큰 가슴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네글리제 앞섶 봉제선에 유두가 걸린 채였다. 어깨끈이 더 내려가자 봉제선이 유두를 긁으며 그리즈를 신음하게 했다.
“읏….”
상체가 흔들리자 가슴이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이리저리 방향을 트는 유두를 본 그가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묻었다.
미끈한 콧날이 살결에 푹 파묻혔다. 흥분한 숨결이 피부에 번진다. 그리즈가 고개를 위로 꺾으며 골반을 들썩였다. 다시금 발기한 것이 둔부에 지그시 눌리자 그가 낮게 신음했다.
“하….”
이내 탁 풀린 입술이 유두를 부드럽게 긁으며 입김으로 적셨다.
아, 미칠 것 같아. 몸서리친 그리즈는 손으로 그의 복근을 짚었다.
복근이 급격히 단단해지며 손바닥에 휘감겼다. 그리즈는 흥분해서 끈적해진 사내의 몸에 흠칫 놀랐지만 그는 그녀의 손길이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그가 가슴을 부드럽게 쥐자 분홍빛 유두가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광경이 보였다.
그때 그가 입술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비틀었다. 옆으로 쏠린 흑발에 시선을 뺏긴 건 아주 잠시였다. 입술이 유두를 물고 부드럽게 빨아 당기자 눈앞이 흐려졌다.
“아읏, 으, 흣!”
뾰족한 모양새를 온전히 두지 못하고 혀끝으로 느릿느릿 밀어 올린다. 질척질척. 가슴이 위아래로 떠밀릴 때마다 그녀는 다리 사이로 뜨끈한 게 드나드는 착각을 느꼈다.
“읏, 그만, 그만….”
애처롭게 허덕이는 그녀를, 그의 눈이 주시했다. 늘 이성적이던 눈빛이 뭔가에 중독된 듯 탁하게 빛났다. 혹은 갈망하는 것도 같았다.
그의 이성이 곧 완전히 무너질 것 같은 예감에 그리즈는 다급해졌다. 당장은 그에게 친근하게 말하는 게 어색해도, 이름은 불러 보고 싶었는데….
“저, 저, 전하의 이름, 불러 봐도 되나요?”
꿈속에서 소년이 나타나도 살갑게 이름을 불러 주지 못했으니까…. 벅차오르는 호흡을 간신히 죽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새파란 눈동자가 입술을 바라보았다. 기대감에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리즈가 들뜬 얼굴로 그의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비, 비아누트….”
달빛을 받은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 속에서 뜨겁고 강렬하고 어두운 무언가가 어지러이 뒤섞이는 듯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듯한 눈동자가 기이하게 떨렸다.
그 모습이 그리즈의 온몸을 희열에 물들였다. 그는 모든 일에 무감해 보였던 사람이었으니까. 죽이고, 쟁취하고, 짓밟는 건 잠깐의 유희일 뿐, 무엇에도 만족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다시 해 봐, 그리즈.”
“비… 비아누트….”
사로잡힌 듯한 사내가 그녀의 아래쪽에 하반신을 꾹 맞붙였다. 하…. 하. 금수 같은 숨소리가 귀 옆에서 번졌다. 점점 더 거칠어진다. 이성이 무너져 내릴 만큼 흥분하는 것 같았다.
“계속….”
“읍, 흣, 비, 비아누트. 비아누트….”
기어코 그의 침음이 터졌다. 아래쪽에 닿은 그의 것이 빳빳할 만큼 서 있었다. 그게 둔부에 비벼지자 바지 앞섶 매듭이 탁 걸려 풀렸다.
동물적인 허릿짓이 이어지자 바지와 속옷이 슬슬 내려가며 사내의 하반신을 드러냈다.
수용 무게를 넘은 침대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폭우에 가려져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즈는 아득한 기분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그녀의 플레어 팬티를 벗겨 내었다. 곧장 자신의 하의와 속옷을 쓱 내리고는, 관심을 돌리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물었다.
정작 그리즈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억세게 튀어 올라온 굵은 물건이었다. 위로 살짝 휜 굵은 것이 배꼽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기둥에는 분홍빛이 도는데, 끝머리는 불그스름했다. 아니, 점막처럼 빨개서 더없이 민감해 보였다.
도무지…. 다시 봐도, 저걸 어떻게…. 그녀는 지나치게 건장하고 축축한 듯한 그의 것을 보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읏….”
시야를 가리듯 그가 상체를 더 낮추며 그녀의 아랫입술을 입술로 머금고 부드럽게 당겼다. 아래에서는 굵은 것이 몸을 맞추려 했다. 아…. 가장 기분 좋은 곳을 찾듯 밀부를 길쭉하게 훑어 올리자 그리즈는 놀라 그의 어깨를 쥐었다.
“흣!”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눈을 감았다. 미끈거리고 단단한 끝머리가 어딘가를 지그시 문질렀다.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기분이 들떴다.
그때 그가 상체를 살짝 들고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미끈거리는 그의 끝이 클리토리스를 느릿느릿 문지르고 있었다. 과실 같은 음핵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자 그녀는 뜨거운 황홀감에 취해 입술을 벌벌 떨었다.
“아, 읏, 으!”
겨우 들릴 만큼 작은 소리가 사내를 더 자극했다. 그는 피가 마르는 듯 호흡하는데, 그의 끝머리는 점막을 부드럽게 훑어 준다. 좁은 입구를 빽빽하게 뚫고서 내벽을 정신없이 치덕거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였다.
그 찰나 그녀가 어렵사리 눈을 뜨고 골반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바뀐 위치로 인해 둥근 선단이 입구에 탁 걸렸다. 갑자기 뜨끈한 선액이 엉덩이까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하아….”
바이렌하그 주인의 은밀한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그녀의 가슴 끝을 뾰족하게 세웠다. 어쩔 줄을 모르던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초조함에 시트만 쥐어 당겼다. 그때 뭉툭한 선단이 아래를 지그시 눌렀다. 갑자기 아이 팔뚝 같은 것이 아래로 들어오는 느낌이 너무 선명해서 그녀는 감은 눈에 힘을 줬다.
“흣, 읏, 너무, 크, 큰 것 같….”
그리즈의 다리가 어쩔 줄을 모르고 허공을 배회했다. 손을 뒤로 뺀 그가 발목을 잡아 편히 위로 들게 만들었다.
“다 안 넣을 거야.”
낮게 신음한 그가 허리를 아주 느릿느릿 치댔다. 그럼에도 끝이 너무 단단해서 그녀는 뻐근함에 입술을 떨었다.
그때 빽빽한 입구에 끝만 살짝 걸친 그가 그대로 상체를 낮췄다. 이내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가, 아래로 내려 엉덩이를 쥐었다.
그의 얼굴이 그녀가 벤 베개 옆쪽에 자리 잡았다. 파란 눈동자에 흥분이 어려 있었다. 그대로 그가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낮게 신음했다.
입구만 살짝 맛본 끝머리가 위쪽으로 미끄러지듯 빠졌다. 이내 길쭉한 곳을 훑고는 다시 진하게 눌러 내리며 안쪽을 푹 찔렀다. 처음 맛본 색다른 쾌감에 그리즈는 작게 교성을 흘렸다.
“아, 아…. 읏, 아….”
그녀의 뺨이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은 무방비하게 벌어져 있었다. 도무지 어디를 보는지 모르는 눈이 허공을 다급하게 맴돌았다. 그 얼굴을 본 그가 더 흥분하며 낮게 탄식했다.
허릿짓이 빨라진다. 축축이 젖은 귀두가 점막을 푹푹 누르며 입구를 넓혔다. 하얗게 흐르는 물이 귀두에 쓸려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부드럽게 박혔다.
그녀의 얼굴이 황홀감에 물들었다. 가장 민감한 음핵 부근이 골고루 자극되자 너무 좋아서 눈앞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아응, 아, 아. 흣.”
부끄럽지만 점점 위로 향하는 발바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제약이 사라지자 그의 허리가 더 유연하게 흔들렸다. 근육질 하체만 부드럽게 들렸다가 열린 다리 사이로 빠르게 꽂혔다.
아…. 기분 좋아. 그녀가 조금만 더 깊은 포만감을 떠올렸을 때였다. 민감해진 음핵이 더 부풀어 오르자 젖은 선단에 툭 걸렸다.
“흣, 아!”
풀려 있던 그리즈의 얼굴이 다급하게 무너졌다. 기다렸다는 듯 추삽질이 빨라진다. 길쭉한 틈새를 정신없이 훑기 시작했다. 질척, 질척, 야한 소리가 그녀의 쾌감을 배가시켰다.
“아, 으읏!”
그녀는 몸서리치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손길에 몸을 단단하게 굳힌 그가 일순간 안쪽을 푹 찔렀다.
“하읏!”
비좁은 곳이 굵은 크기만큼 열리며 찌릿하게 아파 왔다. 열통이 한 번, 두 번, 반복되자 쾌감이 아랫배로 치민다. 한 번 더 살짝 찌르기만 해도 뭔가가 터질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숨을 꾹 참았을 때, 빳빳한 것이 질구를 거칠게 훑었다. 그러다 탐욕적으로 안쪽을 깊숙이 찌르자, 황홀한 절정이 그녀를 덮쳐 왔다.
“아응, 으응, 흣! 아, 아응!”
아래가 절로 흔들리며 그의 것을 더 빨아들이려고 했다. 단단한 선단이 버티다가 갑자기 커졌다. 이내 쑥 빠져서는 격렬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사내의 얼굴이 시야에 선명히 들어왔다. 남색 동공이 쾌감에 취해 흐려진 채였다. 그러다 격렬히 줄어들며 그리즈의 얼굴을 확인했다. 더 흥분한 그의 몸이 안을 깊숙이 찌르고 싶어 했다.
“하아, 그리즈, 그리즈….”
잘생긴 입술이 나른하게 벌어지며 그녀를 부른다. 대공 비아누트가 내는 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도록 끈적하고 음란했다.
그 소리가, 질구로 빠듯하게 차오르는 포만감에 열기를 더했다. 그녀의 다리가 그를 향해 서서히 더 열렸다.
“하읏, 아, 읏!”
그러자 그가 참을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만족스러울 만큼 깊숙한 곳을 찾고는 허릿짓을 멈췄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목울대도 멈췄다. 복근마저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순간, 선단 끄트머리에서 뜨거운 게 거칠게 터져 나왔다.
“하,”
일순간 복근이 유연하게 꿀렁였다. 숨을 멈췄던 그가 그리즈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는 허스키하게 신음했다. 추삽질이 더 깊고 야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흔적을 그녀의 안으로 끝없이 밀어 올리려는 몸짓이었다.
“하아, 하아, 아아….”
굵다란 것이 안에서 울컥울컥 떨렸다. 그 감각을 느끼자 그녀의 절정이 더 깊어졌다.
빗물이 맺힌 창유리에 진한 습기가 어려 있었다. 높아진 습도 때문에 촛불 하나가 툭 꺼졌다.
삐걱삐걱 울던 침대가 조용해지자 그리즈는 긴장을 풀었다. 뿌연 시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주르륵, 굵은 것을 빼내고서 그는 끝도 없이 새어 나오는 정액을 검지로 밀어서 안쪽에 넣는 중이었다. 더없이 무표정했기에 그리즈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내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리즈의 발목을 쥐어서는 위로 들게 했다. 그녀는 멍하게 그를 따랐다.
한참 뒤에서야 그는 그리즈의 젖은 옷을 벗겨 주고 옷장에서 새 이불을 꺼냈다. 그녀는 그가 덮어 준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가 얼굴만 쏙 내밀었다. 당장이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그는 한낮처럼 생기 넘쳐 보였다.
“오르파담. 거기서는 어떻게 지냈지?”
“오르파담이요?”
“응.”
오르파담…. 예상 못 한 질문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일까.
물론 조금 비참하고 비극적인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가 원한다면 해 줄 수 있었다. 그녀는 잠결에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에서는… 말 그대로 잡역부였어요. 물을 긷고, 부엌일을 하고, 구석에 앉아 있다가 다시 물을 긷고….”
“…….”
“겨울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손이 얼어붙어도 난롯불에 녹일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빴거든요.”
곁눈으로 보인 그의 눈이 그 광경을 상상하듯 흔들렸다.
“그리고?”
곰곰이 곱씹어 보니 그렇게 비극적인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주인공의 사망으로 끝나는 얘기는 아니니까.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하던 그리즈가 무의미하게 눈썹 부근을 만지며 대답했다.
“그 정도였어요.”
아니, 사실은 부엌의 쥐를 잡지 못해서 관리자들에게 걷어차인 적도 있었고, 몸살에 걸려 일하는 게 더딜 때면 뺨을 맞기도 했었다.
그나마 주인의 홍역을 병간호한 보상으로 계속 잡역부로 일하게 됐지만, 왕족으로 살았던 기억이 싸늘하게 죽어 버렸다. 살아남은 것은 육체적 고통에 무뎌진 마리아뿐이었다.
매일이 지옥 같았지만 조금 평화로운 날에는 부엌에 숨어서 손님들을 살펴보는 일로 위안했다. 손님 중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자의 손을 잡고 탈출하는 상상을 하염없이 했다.
하지만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늘 비슷한 멸시가 돌아왔다. 혹은 욕정 어린 시선이나. 그때마다 욕구만 남은 괴물들과 공생하는 중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주목받는 게 두려워졌고, 발에 차여야 안심이 됐던 하루하루. 폭력에 무뎌졌다. 몸에 자잘하게 생기는 멍과 웬만한 상처에는 통증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래도 힘들어질 때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떠올렸어요. 꼭 이루고 싶은 일도 있었고… 정말로 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거든요.”
그리즈는 그 점이, 이 얘기가 비극이 아닌 이유라고 생각했다. 동료들이 희망을 잃고 마약초에 빠질 때 그러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더 큰 희망을 상상하며 버텼다.
그 덕분에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소년과 재회하게 되었지 않나. 어쩌면 계속되었던 비극이 언젠가는 희극으로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가 있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숙부, 아니 스테판 나으리를 만나고 이곳으로 온 거예요.”
겪었던 일은 지옥이 따로 없는데 말로 끝내니 생각보다 짧았다. 말재주가 없는 걸까. 그곳에서 느낀 것만큼 비참하게 살지는 않았던 걸까.
그래도 마음이 홀가분했다. 조금 진정되니 다시 그의 존재감이 커진다. 그곳 생활을 묻는 이유와 감상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즈가 메마른 입술을 매만지며 그를 바라봤다.
그 역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 속에 어지러운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분노, 슬픔, 연민 같은 것들….
그 광경을 본 그리즈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슬픈 사람으로 비추어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보고 싶었던 사람이 누군지는 안 물어보시나요?”
그의 눈에 어린 감정들이, 계속 망막을 맴돌며 그를 들쑤시는 듯했다. 그리즈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나서야 그가 짧게 물었다.
“그래, 누구지.”
그리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도 유독 가혹했던 대공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런 그를 향했던 두려움과 원망이 아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다고… 소년을 그리워했던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녀가 흐리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어느 날 문득 날아든 나비 같은, 그런 사람이요.”
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표정을 제대로 보고 싶은데 달빛이 그의 뺨만 비추고 있다. 하얀 먼지만 허공에서 부유하는 광경이 보였다. 안타깝게. 그녀가 숨을 길게 내쉬는 순간이었다.
“그 사람 좋아했어?”
그 소년만 보자면 좋아했고, 그리워했고, 애틋한 마음도 있었다. 결국 좋아했다는 의미였다.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새카만 음지 속에서 그의 미소가 아득하게 보였다. 소년 같은 미소였다.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늘 그랬듯 아침이 왔다. 하늘을 가렸던 먹구름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오전 8시 30분. 비아누트는 의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채 햇살 아래 있었다.
새벽녘부터 예배실과 관료 회의를 다녀왔지만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침대에 가로로 길게 앉아, 그리즈에게 무릎베개를 해 준 모습은 나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의 어둠은 가시지 않았다. 바닥에 흙 묻은 신발 한 짝이 애처롭게 떨어져 있는 걸 뒤늦게 봤다. 물수건으로 발바닥을 닦아 주고 보니 한쪽 발바닥이 빨갰다. 네글리제 사이로 드러난 가슴 쪽은 사내의 입술 자국으로 울긋불긋했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목욕부터 시키고 대화하려 했지 않았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고려 중이라는 그녀의 말 때문에 무언가가 변했다. 그 순간의 그는 그녀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증거를 얻으려 했다.
그리고 몸을 탐했고 호색한처럼 반응했다. 욕구를 충족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녀가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흥분시켰으므로.
냉정을 되찾은 비아누트의 눈이 여린 몸을 살폈다. 어두울 때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무릎에 빨갛게 쓸린 딱지가 보였다.
정작 그녀는 이런 상처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채로 곤히 자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매음굴 생활의 단편이 보였다. 이 상태로 일어나 물을 길으러 가는 마리아. 하루를 마친 후에는 또 이렇게 천사 같은 얼굴로 잠들고.
그런 유순하고 순응적인 성격 덕분에 살아남았을 것이라 짐작 가능했다. 그러나 그 성격은 비아누트에게 많은 의문을 가져왔다. 어제의 그녀가 아프다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그녀는 지금껏 받았던 냉대에도 서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 잠들 것 같은 얼굴로 과거를 회상했을 뿐이다.
“그곳에서는… 말 그대로 잡역부였어요. 물을 긷고, 부엌일을 하고, 구석에 앉아 있다가 다시 물을 긷고….”
그는 어린 그리즈를 가만히 그려 보았다. 상흔이 가득한 손으로 부엌일을 하고, 사내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될까. 십여 년간 그렇게 살면. 그는 느리게 이를 물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틀에 화초 칼라데아 화분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대각선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은 칼라데아는 잎이 풍성했지만 음지의 칼라데아는 성장을 멈췄다.
칼라데아를 번갈아 응시하던 그는 음지의 화분을 양지로 옮겨 주었다. 무능력한 칼라데아는 그저 순응한 채로 햇빛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새파란 시선이 이번엔 그리즈에게로 옮겨갔다. 그녀 역시 순응하고 있을 뿐은 아닌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문관에게 받아 온 유칼립투스 연고를 열어 그리즈의 무릎 상처에 발라 줬다. 그러곤 손수건을 꺼내어 무릎에 느슨히 묶어 뒀다.
그녀는 오랜만의 단잠에 빠진 듯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잘 정돈된 비아누트의 손은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러다 그녀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확인하듯 뺨을 훑어 내려 본다. 보드라운 그녀의 속눈썹이 살며시 떨렸다.
태양이 더 밝아지자 그의 얼굴에는 더욱 진한 그림자가 생겼다. 흑색 상의를 입은 어깨가 뜨거워질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쿠엔틴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비아누트는 그리즈의 목 뒤를 손으로 휘감아 들고는 아래에 베개를 대 줬다. 폭, 파묻히듯 베개를 벤 그녀가 잠결에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세상 모든 게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그 나이대 소녀의 얼굴 같았다.
그의 눈은 눈을 떴을 때도 하얗게 미소 짓는 그녀를 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모습은 그와 눈을 마주치자 긴장감에 굳어 버리는 그림으로 변했다.
그 순간 처음엔 속삭임이었던 쿠엔틴의 목소리가 한층 진해졌다.
“전하, 안에 안 계시는지요?”
비아누트가 눈앞에 어린 광경을 지우듯 손으로 눈가를 만지며 방을 나섰다.
오전 8시 50분. 이 시간에 나타난 쿠엔틴이 썩 반갑지 않았다. 지금쯤 훈련하고 있어야 할 자가 왔다는 건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이므로.
그가 문밖으로 나가자 쿠엔틴이 주인에게 마땅한 경의를 표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공 전하.”
그런데 그때 왼쪽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그와 쿠엔틴의 시선이 로비 반대쪽 복도로 향했다. 기다렸다는 듯, 조모 파올라가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비아누트.”
“좋은 아침입니다.”
파올라는 오랜만에 만난 손자에게 다가와서는 귀족적으로 미소 지었다. 이내 하녀장 로렐에게 햇빛 가리개를 건네고는 그리즈의 방문을 흘끗 바라봤다.
“그래, 좋아 보이는구나.”
파올라는 무엇이 좋아 보인다는 건지 특정하지 않았다. 이내 우려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율리아나의 병간호를 손수 했다는 말이 사실인 게니?”
하얀 나무껍질 같았던 파올라의 피부에 윤기가 흘렀다. 앙상했던 몸에도 살이 붙은 덕분에 베이지색 드레스의 품위를 더했다.
당장 사교 모임을 가져도 더할 나위 없는 건강 상태지만 파올라는 좀처럼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늘 예배실로 향해 밤까지 기도를 반복해 왔다. 그녀가 무엇을 염원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서로 살갑게 지내는 건 좋지만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부디 주의하렴.”
파올라의 얼굴에 기품 있는 미소가 번졌다. 마침 편백나무 언덕 근처 예배당에서 종이 울리자 대화를 마치려는 기색을 보였다.
“기도 드리러 갈 시간이야. 너와 스테판을 위해서도 기도하마.”
그러곤 로렐을 데리고 비아누트를 지나쳤다. 꼿꼿이 서 있던 그는 점점 멀어지는 파올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율리아나도요, 할머니.”
파올라가 아주 느릿하게 그를 돌아봤다. 복도 끝, 로비 모퉁이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새어 들어오는 눈부신 빛에 그녀의 모습이 삼켜져, 그녀가 아직도 웃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던 비아누트는 쿠엔틴과 함께 2층 집무실로 향했다. 그가 책상에 앉자마자 쿠엔틴이 우려스럽게 운을 뗐다.
“저 외람되오나 급하게 보고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얘기해.”
“조금 전, 디르크 님의 부친인 빌리어트 타릴루치가 플뢰도르 관문을 지났다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목적지가 이 바이렌하그 저택이라고 합니다. 후작 각하께서 초대하신데다가, 관문에서 합류한 건지 마차에 함께 타고 있다 하여 초소병들이 막지 못하고 보냈다고 합니다. 후작 각하께서 대공 전하의 명이 있었다고 말씀하신 까닭에….”
비아누트는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본가에서 쫓겨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대공저로 데리고 오겠다는 스테판의 의지가 엿보였으므로.
반역의 불쾌한 향기가 점점 진해진다. 한낱 권력욕으로, 바이렌하그에 왕위 찬탈자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다니. 조모의 입장을 생각하여 정식으로 재판 받을 기회를 준 게 지나친 자비가 아닐까.
“브리언에게 숙부의 반역 행위에 관한 모든 자료를 준비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쿠엔틴이 기다렸다는 듯 스테판의 최근 행적을 보고했다.
“하물며 후작 각하께서 아델 님이 아레하로 떠나신 이후, 며칠간 노르드발츠를 수색하느라 혈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아델 님이 일부러 종적을 감춘 거라는 걸 눈치챘는지, 다른 여인과의 인연도 염두에 두는 것 같습니다.”
“다른 여인이라니.”
“요 며칠 사이에 그랑디아의 왕녀, 클라우디아 타릴루치와 부쩍 교류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탈스바그 관문 개설 건으로 이전부터 많은 얘기를 나눴던 것 같습니다.”
클라우디아는 스물다섯의 과부로, 사별 후 본가로 돌아와 그랑디아의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다. 사내 못지않게 야심이 크며, 뭐든지 최고를 선호한다고 한다.
“몇 년 전 노르드발츠 왕실 연회에서 마주친 적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남편과의 불화가 심하다는 소문이 무색하게도, 다정하게 보였다는 소문을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금 나른해졌던 비아누트의 얼굴이 일순간 서늘해졌다. 그리즈의 자리를 꿰찬 여인이 존재가 튀어나오자 가시처럼 거슬렸던 탓이다. 그의 눈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클라우디아라.”
쿠엔틴의 얼굴에 우려가 깃들었다.
“소문의 진상이야 어쨌든, 남편이 병으로 죽었으니 재혼을 계획 중일지 모릅니다. 부부의 연을 맺어도 될 만큼 후작 각하가 가치 있다고 판단되면 당장 나설지도 모르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멀리에서 저택 문이 열리고 초소병이 들어왔다. 아마 타릴루치 가문의 마차가 접근 중이라는 서신을 전해 온 것일 터. 쿠엔틴이 입술을 재촉했다.
“아울러 클라우디아 타릴루치도 후작 각하와 동행 중이라고 합니다. 명분은 율리아나 아가씨의 병문안 겸, 혼담입니다. 그리즈 공주님과는 한때 자매처럼 지냈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혹시 직접 만나 얼굴을 확인하려고 온 걸까요?”
그것밖에는 달리 이유가 없었다. 비아누트의 눈에는 선득한 날이 섰다.
“그런 것 같군.”
아마 타릴루치가 바이렌하그 대공의 여동생을 반역자로 의심한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타릴루치를 피할수록 소문을 긍정하는 꼴이 된다. 차라리 그들이 증거를 찾지 못한 채 실수하게 만들어, 전쟁의 명분을 제공하도록 유도하는 게 나을 터.
“접객은 별채에서 준비해.”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비아누트의 관심은 타릴루치 소굴인 그랑디아 성으로 향했다.
“붉은 늑대는 어떻게 됐지?”
“그랑디아 왕궁에 무리 없이 잠입했습니다.”
그는 지금껏 모았던 타릴루치에 대한 정보를 곱씹었다. 타릴루치 가문의 일원, 갈등 관계, 전쟁할 때 선호하는 지형까지 파악했지만 유독 진위를 확인하지 못한 낭설이 있었다.
주일이면 타릴루치 일가들이 왕궁에서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정말 낭설일 뿐인가. 아니면 정말로 어딘가로 향하는 건가. 그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왕궁에서 떠도는 낭설에 대해 더 조사하라고 전하도록. 디르크의 행방도 알아보고.”
“예, 전하.”
그리고 늘 그랬듯,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마지막으로 꺼냈다.
“그리즈, 잘 보호해. 저녁 전까지 의사도 불렀으면 좋겠군.”
마지막 명만 완벽히 수행하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즈는 뒤늦게 일어나, 그의 체형대로 가라앉은 깃털 매트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눈에 초점을 풀자 잠들기 직전에 봤던 그의 미소가 다시금 선명해지는 듯도 했다. 순수한 소년 같으면서도 끝 맛은 침울한…. 그녀는 그 미소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왜인지 무릎이 갑갑했다. 골반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내리자 무릎에 손수건이 묶여 있는 게 보였다.
무릎에 발려진 끈적한 액체를 검지로 훑어서 코에 대 봤다. 유칼립투스…. 의사가 온 줄도 모르고 잤던 걸까.
10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벨린이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나타났다.
“아가씨, 일어나셨네요! 어제 비를 맞으셨다고 하던데 무슨 일 있으셨는지요?”
벨린이 바닥의 신발 한 짝을 발견했다. 그리즈는 이불로 무릎을 슬쩍 가렸다. 밤새도록 맞은 것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하반신으로 내려갈수록 뻐근한 통증은 더했기에 당장 일어나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평소대로라면 집사들이 느긋하게 마당을 쓸 시간이다. 그러나 창밖은 사람 한 명 없이 고요했다. 폭풍 전야가 계속되는 것 같았다.
“벨린, 밖에 무슨 일 있니? 늘 보던 풍경과는 다른 것 같아.”
벨린이 뒤늦게 그리즈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곧 손님께서 방문하신다고 해요. 손님 앞에서 청소하는 무례는 삼가야 하기에 다들 별채로 옮겨 갔어요.”
“…….”
“타릴루치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아가씨께서는 방문 소식을 미리 들으셨나요?”
햇살이 환한 날씨였다.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그리즈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 버렸다.
“뭐…? 타릴루치…?”
벨린은 그리즈가 놀랐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집사장님께서 오시더니 아가씨를 방 밖으로 나오게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전하께서 그리 명하셨다고….”
그리즈는 긴장으로 메마른 입술을 매만졌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중인 걸까. 타릴루치가 어째서 다시 나타난 거지? 타릴루치 중에 누가 온 걸까? 답은 나오지 않고 몸만 차갑게 식어 갔다.
잠깐 나갔었던 벨린이 세숫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즈는 안절부절못하며 세면과 환복을 마쳤다. 온 신경이 타릴루치에게 쏠려 있었다. 그때 문 앞에서 묵직한 노크가 울렸다.
“쿠엔틴입니다. 아가씨를 뵈러 왔습니다.”
어째서 쿠엔틴이 왔을까. 그리즈가 의아해하며 고갤 끄덕였다.
벨린이 방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가장 앞에 서 있던 쿠엔틴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벨린이 눈치껏 자리를 피하자 그가 긴장한 기색의 그리즈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난번의 무례를 사과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잠시 말을 멈춘 쿠엔틴이 바닥에 반 무릎을 꿇었다. 그리즈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을 때였다.
“아가씨께서 그랑디아의 왕족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늦게 알게 됐습니다. 제가 아가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하고 냉대했던 부분에 대해서 어떤 비난을 하셔도 달게 듣겠습니다. 일전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갑옷을 입어, 그녀의 몸보다 두 배나 큰 상체가 몸을 낮추고 있었다. 당황한 그리즈는 한걸음 물러나서 쿠엔틴이 사과할 만한 일을 떠올렸다.
매음굴 출신이라는 사실을 들켰던 날이었다. 무릎이 후들거릴 정도로 두려웠고, 억울한 마음도 있었던 날…. 바이렌하그에 원해서 온 것도 아니었고, 매춘하지도 않았었기에.
하지만 사과받는 게 낯설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가 쿠엔틴의 짧은 갈색 머리칼을 불안정하게 내려다보기만 했다.
대답이 없자 쿠엔틴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제야 그리즈가 입술을 버벅거리며 말했다.
“이제라도 오해가 풀려 다, 다행이군요. 제가 사실을 숨겨 벌어진 일이기도 하니, 괘념치 마세요.”
긴장한 입술과는 달리,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는 빛나기 시작했다. 매음굴로 팔려 간 후, 누군가의 사과를 받는 게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사과의 안온한 감각을 곱씹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리즈는 다시 똑바로 선 쿠엔틴이 차분하게 말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오늘 타릴루치 가문에서 방문한다고 합니다. 저희 기사들은 이 방 주변에 숨어 대기하며 상황을 지켜보려 합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그리즈는 창밖을 흘끗 내다보며 우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도 벨린에게 얘기 들었어요. 그런데 이곳에 방문하는 이유, 혹시 알고 계신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쿠엔틴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외교적인 문제로 온 것 같습니다.”
왠지 무언가 숨기는 눈치였다. 초조해하던 그리즈가 조심스레 물었다.
“따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니… 근처에서 대화를 들을 수 있을까요?”
쿠엔틴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아가씨를 보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는 그 명을 지켜야 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수긍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리즈는 질문을 조심스레 바꿨다.
“그럼 타릴루치의 누가 오는 건지만이라도 알려 주세요.”
“디르크 님의 부친과 클라우디아 타릴루치가 방문할 거라고 합니다.”
그리즈가 눈을 크게 떴다. 클라우디아, 클라우디아 타릴루치?
창밖을 내다본 쿠엔틴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문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부디 안심하십시오.”
홀로 남은 그리즈는 차갑게 식은 손을 주물렀다. 연회 때는 디르크의 친척이 나타나더니, 이제 부친과 클라우디아까지….
아버지께서 타릴루치를 성에 들이지만 않았어도…. 그리즈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타릴루치는 무역업을 하는 후작가에 불과했다. 그 후작 작위조차 없는 돈을 친척끼리 끌어모아 구매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문이야 어쨌든, 신앙심이 깊고 총명한 마할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대화하는 걸 좋아했다. 너무 어렸던 그리즈는 그때의 기억이 흐릿했지만, 남루했던 마할의 옷이 면포에서 실크로 바뀌었고 점점 화려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 마할은 아버지의 책사가 되어 있었다. 그다음 해, 발발한 해전에서 대승한 후에는 책사와 재상을 겸직하기 시작했다.
연회 날이 되어야만 입궁했던 마할의 가족들도 왕궁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기어코 방을 배정 받고 눌러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타릴루치의 친척과 사촌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손톱만 한 크기로 시작한 병이 온몸으로 세력을 키우며 득세하는 과정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아홉 살의 그리즈는 열네 살의 클라우디아, 그녀의 동생인 메릴리트와 살가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차츰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즈가 처음으로 짝사랑하게 된 일곱 살 연상의 대공 아들과 클라우디아가 사랑을 나눴다는 소문이 왕궁에 돌았던 것이다.
소문을 인정한 클라우디아는 대공의 아들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즈에게 설명했다. 마침 혼기가 가까워진 김에 혼인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즈는 클라우디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신의 말씀을 어기고 혼인하지도 않은 사내와 접촉할 수 있을까.
그리즈는 그 사실을 시녀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며칠 뒤, 그녀는 질투심에 클라우디아를 모함한 거짓말쟁이가 되어 있었다.
종아리가 퉁퉁 붓도록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았다. 그리고 돌아온 방에서 그리즈는 소름 끼치는 광경을 보았다. 클라우디아가 그녀의 사파이어 티아라를 몰래 끼고는 왕녀보다 더 왕녀 같은 눈으로 흑경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쯤 왕비인 그리즈의 어머니가 밤의 신을 모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어머니의 방에서 머리가 세 개에 등에는 날개가 있는 기도 상이 나왔다.
그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정세가 완전히 뒤집히고 부모님이 처형당한 것으로 기억한다. 죄명은 이교 행위였다.
물론 그리즈의 생각은 절대적으로 달랐다. 죄명은 마할 타릴루치를 너무 믿은 죄었다.
그 죄가 연좌제처럼 지금도 온몸을 조이고 있었다. 반면 지금쯤 클라우디아의 몸에는 아름다운 드레스가 입혀져 있겠지. 울분이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벨린이 들어왔다. 벨린은 커튼을 쳐 놓고 커튼 틈을 불안정하게 내다보는 그리즈를 살펴봤다.
“아가씨, 아가씨? 안색이 창백해지신 것 같은데 편찮으신가요?”
그리즈는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괜찮아. 타릴루치 가문에서 손님들이 왔다고 해서 조금 긴장했을 뿐이야.”
무언가를 고심하던 벨린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역시… 디르크 님과의 혼담 때문에 신경 쓰이시는 거로군요.”
과년한 아가씨를 모시는 하녀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참을 생각하던 벨린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엿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데….”
엿들을 수 있다고? 괜찮을까. 그리즈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지금 손님맞이 예정인 별채 응접실 한쪽 벽 위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둘러져 있어요. 안이 보이기도 하고 대화 소리도 들려요. 하지만… 밖에 기사분들이 계시는 까닭에 나갈 수가 없으니….”
이내 벨린이 창문 쪽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커튼을 살짝 열고는 밖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며 말했다.
“경망스럽겠지만 창문으로 나가서 다녀올까요? 병사들이 저택과 별채 복도에 집중되어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거예요.”
그리즈는 긍정만 하면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상황에도 조금 머뭇거렸다. 엿듣다가 들키면? 클라우디아가 알아보면? 벨린이 곤경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하지만….
이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려 했던 요하네스를 이미 찾았다. 탑 앞의 소년도 만나게 되었으니 매음굴에서부터 이루려 했던 목표는 거의 이룬 거다. 이제 남은 건 복수밖에 없는데….
그리즈는 식은땀으로 젖은 손을 치마에 닦았다. 꿈에서 어머니를 만나 했던 다짐이 머릿속에 떠도는 듯했다.
그래, 앞으로 계속 패배자처럼 숨어 버릴 수는 없으니까.
부모님께서 보고 계신다면 그리즈 베네딕트를 얼마나 부끄러워하실까. 그리즈는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에 애써 힘을 줬다.
“그래, 가 보자.”
벨린이 창문을 열자 열린 창문 사이로 빛이 길처럼 깔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계속 피할 수만은 없어…. 그리즈가 앞장서며 말했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네 부탁을 무시하고 내가 뛰쳐나온 걸로 하자.”
저택 벽으로 붙어 걷다가 저택과 별채 사이의 응달로 향했다. 이내 조심조심 몸을 낮춰 응접실 옆방의 창문으로 들어갔다. 벨린은 화단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안을 둘러보던 그리즈는 창문의 커튼을 쳐 놓고는 방문을 잠갔다. 곧장 테이블을 벽으로 살살 끌어 밟고 올라갔다.
벨린의 말대로 벽 끝의 두 뼘 가량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즈는 노란색 유리창을 빼꼼히 들여다봤다. 너른 소파에 세 사람의 정수리가 보였다. 디르크의 부친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과 스테판 그리고 여인 한 명이었다.
찬 기운과 벽의 석고 냄새 때문에 온몸이 메스껍게 떨렸다. 그사이 응접실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과연 바이렌하그 대공이 순순히 보여 줄까요?”
그리즈의 호흡이 멈칫, 하며 멎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즈가 까치발을 들고는 시야 밑에 있는 여인이 그녀가 아는 클라우디아가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때 대각선 쪽 소파에 앉은 스테판이 여인을 보며 작게 대답했다.
“보여 주지 않아도 보실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왕녀 저하.”
탁해진 붉은 눈동자가 여인에게 닿았을 무렵, 여인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화려한 미인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역시 후작이로군요. 후작이 나서 주시니 내 진심으로 든든합니다.”
그 순간 그리즈의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떠돌았다. 마할 타릴루치의 장녀 클라우디아의 목소리였다.
“공주님의 신뢰를 받게 되어 진심으로 든든하옵니다.”
그리즈는 소파의 여인과 클라우디아의 얼굴을 비교해 보았다. 오래된 기억이기에 흐릿했지만 클라우디아는 웃는 눈이 유독 뱀같이 스산했다. 응접실 여인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즈는 분노와 근심이 뒤섞인 얼굴로 숨을 휙 내쉬었다. 이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감히! 감히 왕관을 뺏은 도둑 주제에 수치도 모르고 이곳까지 당당히 찾아오다니!
“하지만 어떻게 말이죠?”
클라우디아가 스테판에게 뻔뻔히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스테판이 율리아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기회를 봐서 용무가 급하다 하시고 본채로 들어가세요. 왼쪽 복도 세 번째 방이 율리아나의 방입니다. 저하께서는 방을 잘못 찾아 그리 가신 겁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율리아나를 따로 숨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만일 경비가 삼엄하다면 그 또한 빌미가 될 수 있기에 별다른 인력을 배치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역시 후작이에요.”
그들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벽에서 웅웅 울렸다. 역시 얼굴을 확인하러 온 거구나. 스테판과 타릴루치, 이 죽여도 시원찮을! 그녀가 거칠어진 호흡을 꾹 눌렀다.
그 순간 대공 비아누트가 방으로 들어왔다. 영원할 것 같던 웃음소리가 일순간 산산 조각났다.
그는 디르크의 부친과 클라우디아의 얼굴을 한 번씩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곤 목에 맸던 스카프를 느슨하게 풀며 기품 있게 걸어왔다.
“타릴루치 대공. 내 답신, 받지 못했습니까.”
그가 환대하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눈치였다. 디르크의 부친이 능구렁이처럼 말했다.
“안타깝게도 일찍 출궁하게 되어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영매의 건강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 겁니까? 이것 참, 걱정되는군요.”
그가 상석에 앉아 유유히 다리를 꼬았다.
“응접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분위기를 살피던 스테판이 디르크의 부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율리아나가 매몰찬 아이는 아니지요. 친히 이곳까지 와 주셨으니 인사드리러 올 겁니다. 조만간 가족이 될 사이기도 하니 말이죠.”
“독단이 지나친 것 같군요, 숙부.”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대공 전하?”
스테판의 반박으로 대화가 뚝 끊겼다. 그때 디르크의 부친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저로서도 이해되지 않는군요. 바이렌하그 대공께서 영매를 과잉보호하시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착각입니까?”
그의 서늘한 비소가 이어졌다.
“저로서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율리아나의 혼인을 재고하겠다는 의사는 이미 서신으로 밝혔지 않습니까.”
디르크의 부친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건 상의해야 할 문제이지 않습….”
“디르크는 어디 있습니까?”
유유히 입술을 매만지던 그가 디르크 부친의 말을 딱 잘랐다.
여러 사람이 있을 응접실이 곧장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해졌다. 창문에서 새어드는 바람이 테이블의 양피지를 사각사각 건드리는 소리만 아득했을 때였다.
“그건, 약간의 문제가 생겨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디르크의 부친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건 대공 비아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군요. 기껏 방문해 주셨지만 샤토 근방의 야만족들이 봄만 되면 활개를 칩니다. 잠잠할 때 돌아가는 게 좋을 겁니다.”
“…….”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타릴루치 대공.”
다시 만나게 될 거라니…. 친목을 도모하자는 얘기는 아닐 테고. 설마 선전 포고를 하는 걸까.
그리즈가 손끝에 생긴 땀을 치마에 닦는 사이 비아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잠잠히 있던 클라우디아가 따라 일어나서는, 돌아서는 그를 잡았다.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그랑디아의 왕녀 클라우디아입니다. 노르드발츠의 연회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
“그대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요.”
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 돌려 클라우디아를 내려다보았다. 클라우디아는 스테판과 디르크의 부친에게 눈짓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쪼록 자리를 비워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그가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라….”
스테판과 디르크의 부친이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인기척에 몸을 숙였던 그리즈는 복도가 조용해지자 다시 옆방을 흘끗 바라봤다.
대공은 장식장에 가볍게 걸터앉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클라우디아가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벌어진 디자인의 치마 앞섶 사이로 다리를 느릿하게 뻗으며 아주 보란 듯이.
대공의 시선이 하얀 다리를 쓱 훑었다. 클라우디아는 그 시선을 즐기듯 치마 앞섶을 손으로 슬쩍 열고는 허벅지를 드러낸 채 그의 앞에 섰다.
“좀처럼 그대와 만날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아주 기쁘군요.”
그는 두 손을 내려 뻗어서 장식장을 짚은 채였다. 그리즈는 앞으로 길게 뻗어진 그의 다리를 흘끗 보다가 시선을 서서히 올렸다. 검은색 상의를 입은 몸이 보였다. 앉은 자세 때문에 넓은 어깨가 비스듬히 올라가 있다.
늘 가까이에서 봐 왔던 그의 모습 앞에 클라우디아가 있자 기분이 이상했다. 앞으로도 외부 사람들이 온다면 이렇게 숨어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걸까. 언제까지고 이렇게 유령처럼….
그런 그리즈를 비웃듯, 클라우디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대는 강인하고 용맹하고 명석합니다. 게다가 미모도 출중하고… 육체적으로 우월하기도 하지요.”
클라우디아의 손이 그의 허벅지를 안쪽까지 휘감아 아찔하게 훑어 올렸다. 미간을 살짝 좁힌 그가 클라우디아를 빤히 주시했을 때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대의 아주 큰 흠이 보이기에 따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흠이라는 것은, 우월한 씨를 뿌리지 않고 삭히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내 가문이 폐위된 공주를 습격했다고 오해하여 그랑디아와 벽을 쌓은 점입니다.”
“…….”
“이런, 말하고 보니 내가 다 안타깝군요.”
대공의 허벅지에 살짝 얹어져 있던 손이 그의 복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리고 가슴팍을 지나 어깨를 천천히 쓸었다. 조금 들뜬 목소리가 이어졌다.
“밤마다 외로움에 앓다 보면 어떤 사내든 예민해지는 법입니다. 내가 그대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도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속삭이듯 말한 그녀가 그의 어깨에 있었던 검지로 가슴팍을 쓱 긁었다. 이내 손자국으로 상의에 길을 만들며 바지 앞섶에 다다랐다.
앞섶을 아주 느릿하게 더듬기 시작했는데 그는 미동이 없다. 그저 관찰하듯 클라우디아를 살펴보고 있을 뿐이었다.
클라우디아는 긴장과 당혹감이 반반 섞인 기색으로 그의 앞섶을 내려다봤다. 그는 아주 성가시고 하찮은 것과 대면한 듯한 눈으로 클라우디아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클라우디아가 당황할수록 눈동자에 즐거움이 어린다. 아니, 언뜻 보면 그랬지만 실은 서늘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뒤늦게 그의 눈을 마주한 클라우디아가 아랫입술을 굴욕적으로 짓씹었다.
“아주 큰 도,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물론 언젠가 그대의 몸이 제게 반응하는 날이 오면 말이죠.”
그러곤 정복욕이 새삼 생긴 듯 다시 이를 질끈 물었다. 그때 차가운 조각처럼 존재하던 그가 손을 그녀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리즈의 붉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대공 비아누트는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그때마다 그리즈는 겁을 먹고 위축됐었다. 그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잡역부 한 명 죽이는 건 일도 아니므로.
그러나 지금은 다른 이유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생각일까. 무엇을 하려는 걸까.
클라우디아의 뺨에 닿은 손이 서서히 목 뒤로 옮겨 갔다. 그의 손길이 좋은 듯 클라우디아가 뒤늦게 목을 뻣뻣이 폈다. 그는 손끝에 피부를 살짝 대더니 목걸이 버클을 매만졌다.
노란색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숨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즈는 급변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모르고 창틀을 꽉 쥐었다.
그의 손이 클라우디아를 만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막아서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순간 그의 손이 목덜미 버클을 툭 풀었다.
금줄 다섯 개에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하얀 목을 긁으며 투두둑 떨어졌다. 드레스의 가슴 장식에 걸려서 덜렁덜렁 흔들리는 듯해 보였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클라우디아의 새하얀 목에 닿아 있었다.
“대공? 이게 무슨….”
잘생긴 입술이 느슨하게 웃으며 냉혹한 저음을 흘렸다.
“나 역시 큰 흠을 보고 있습니다.”
“…….”
“이 아름다운 목걸이를 걸 수 있는 목이, 하나라니.”
그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긴 손으로 자신의 스카프를 풀었다. 그러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는 클라우디아를 빤히 주시했다.
아주 찰나였지만, 새파란 눈동자가 깊은 살의를 드러냈다. 이어진 숨 막히는 정적. 굳어 있었던 클라우디아가 뒤늦게 목걸이를 잡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바, 바이렌하그 대공, 어찌, 왕녀에게 이런 무례를 보일 수 있습니까?”
그는 클라우디아의 말을 아주 오만하게 곱씹었다.
“왕녀라.”
뺨에 잠깐 어렸었던 보조개가 사라지며 서늘함이 배어 나왔다.
“나의 왕녀는 한 명뿐입니다만.”
그의 왕녀가 한 명….
그리즈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왕녀…. 설마, 설마… 나를 말하는 걸까.
아주 오래전, 왕녀로 살았던 꿈을 꿨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지옥에서 11년을 연명하다 보니 그 꿈이 아주 흐릿해져 버렸다.
이제는 왕녀도, 그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복수하겠다는 꿈을 품어 왔어도,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연히라도 타릴루치라는 이름을 들으면 몸부터 딱딱하게 굳는 증상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졌고 서서히 죽어 가는 기분을 느껴 왔다. 겁먹은 개처럼 구석에 숨어서, 이 공간이 안전한 이유를 찾고서야 죽음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우를 누구에게 막아 달라 하소연할 수 있을까. 스스로 굳게 마음먹고 막지 않는 상황에 대체 누구에게….
“노, 노르드발츠 국왕께 대공이 왕녀를 협박했다고 알리겠습니다.”
그 순간 클라우디아가 잔뜩 부아를 냈다. 그는 더 이상의 시간을 허비하기 싫다는 듯, 걸터앉았던 몸을 떼며 말했다.
“협박일까, 예고일까.”
“…….”
“다시 헤아려 보시죠.”
대화가 끝날 무렵 밖에서 벨린과 집사장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즈는 테이블에서 내려와 숨어 있다가 벨린과 함께 돌아왔다.
목적지는 가족 석상실이었다. 이제 클리아우디아는 방으로 들이닥쳐도 율리아나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즈는 몸을 장악했던 긴장을 풀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머릿속에서 그의 저음이 아득하게 울리는 듯했다.
“나의 왕녀는 한 명뿐입니다만.”
그리즈는 일순간 가슴 앞쪽에서 뛰는 심장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어두운 시야로 그가 그려졌다. 오랜 시간 동안 새카만 초상화 앞에 앉아, 단 한 명의 왕녀를 그리워했을 모습. 공허함을 가리려 지었을 태연한 표정도….
갑자기 온몸이 부끄러움으로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자신을 잡역부라고 여기는 게 편했다. 왕녀로서 짊어진 짐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고단했으므로.
쥐들이 들끓는 부엌에서 왕녀로 눈뜰 때면 죽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젠 잡역부로 전락했으니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잠자리라고 스스로를 세뇌해 왔다. 그 세뇌가 사슬처럼 온몸을 칭칭 감은 게 비로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숨도 쉬기 불편할 만큼 갑갑해졌다. 사슬을 산산조각 내고 싶었다. 예전처럼 당당해지고 싶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당연하게 내려다보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즈의 눈동자가 창틀 옆 흑경으로 향했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긴장으로 손을 파들파들 떠는 마리아가 보였다.
일순간 손에 힘을 줘서 떨림을 멈췄다. 초라함은 가시지 않는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세상을 고결하게 내려다보듯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거울을 응시했다. 언뜻 귀족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부족하게 느껴졌다. 오랜 부엌 생활로 목과 어깨가 앞으로 기울어진 게 보였다.
숨을 꾹 참고 목을 뒤로 폈다. 그리고 더, 더 뒤로, 더 당당하게.
우득, 우득. 재정립되듯 목뼈가 격렬히 부대꼈다. 통증을 그대로 견디며 버티자 이번에는 숨이 막혀 왔다.
점차 목을 칼로 쿡쿡 찌르는 듯 아파서 자세를 확 풀었다. 어찌 당당하게 서는 것도 제대로 못 할까…. 그녀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불거진 눈을 깜빡이며 다시 어깨와 목을 똑바로 폈다. 그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석상실의 문이 묵직하게 열리고 벨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들께서 떠나셨어요. 후작 각하는 배웅을 나가신 것 같습니다.”
그리즈가 뜨거워진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누르곤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구나.”
의아한 눈으로 그리즈의 눈가를 살피던 벨린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랑디아의 왕녀 저하가 갑자기 아가씨의 방으로 들어가시는 까닭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어요. 옆방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분들이 나오셨거든요. 그래도 다행히 문제없이 해결됐습니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브람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브람은 벨린을 따라 나오는 그리즈의 앞에 멈춰 서서는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저… 아가씨, 전하께서 점심 식사를 제안하셨습니다. 오늘은 어떠실지 여쭙습니다.”
늘 피하지 못해 안달이었던 그리즈는 오늘만큼은 망설이지 않았다.
“응. 좋을 것 같아.”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쳤다. 다른 날보다 유독 환하고 따스했다.
어두운 석상실에서 오래도록 있었던 까닭에 뺨이 따가웠지만 애써 손으로 햇살을 가리지 않았다. 적응되면 더 밝은 곳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언덕 아래 호숫가에 도착했다. 그와의 첫 만남이 있었던 곳. 물에 빠진 기억도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다운 장소였다.
계단의 블루 루핀이 개화하여 호숫가에 색채를 더했다. 진한 남색인 아래쪽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연보라색으로 물든 꽃잎이 봄날을 신비롭게 만드는 듯했다.
호수 옆 나무 그늘에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벨린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 탁 트인 경치를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야외에서 식사하시기에 이보다 좋은 날씨는 없을 거예요. 머리카락이 흩날리지 않게끔 땋아 드릴게요.”
미리 대기 중이던 하인들이 그리즈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들을 향해 미소 짓던 그리즈는 뒤따라 내려가 벨린에게 머리 손질을 받으며 절경을 감상했다.
잠시 뒤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가 어느새 유유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장수라는 단어가 떠오를 만큼 체격이 크고 탄탄한데, 얼굴은 그림처럼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햇빛이 밝으니 그 점이 더 부각되어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풍성한 흑발이 바람결에 보드랍게 날리며 그의 얼굴을 드러냈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는데 그의 뺨에 옅은 미소가 깃들었다.
“일찍 왔군.”
따스한 날씨 덕분인지 목소리조차 부드럽게 들려왔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그리즈는 테이블로 향하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역시나 다시금 온몸이 긴장됐다. 그의 작위 때문일까. 아니면 냉혈한 그를 겪어 보았기 때문일까. 그녀는 또다시 떠오르는 선득한 그의 모습을 지우듯 눈을 감았다.
테이블에 앉으니 브람이 차를 따라 주었다. 곧이어 요리사가 카트에서 디쉬 커버로 덮은 접시를 하나씩 꺼내며 요리에 대해 설명해 줬다. 물론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메인 요리는 럼주에 숙성한 소고기 스테이크였다. 브람이 스테이크를 한 덩이씩 접시에 덜어 주었을 때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자리를 비켜 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인들이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는 고기를 나이프로 자르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가 접시로 떨어지고 나서야 그리즈는 긴장을 풀었다.
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서늘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 어제 그와 밤을 보내는 꿈을 꿨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그때 그가 깔끔하게 자른 고기 접시를 앞에 놓아 줬다. 서늘한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원하는 만큼만 먹어.”
나이프를 쥐어서 붉어진 검지가 보였다. 어제 일이 꿈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 네.”
심장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탕 다섯 개, 기억해 둬.”
그리즈가 그를 마주 보았다. 사탕…? 아…. 그와 스킨십할 때마다 사탕을 달라고 했었는데…. 마찬가지로 고기를 잘라 준 대가를 달아 놓은 걸까.
“손잡는 건 한 개. 머리카락 만지는 것도 한 개. 그리고 같이 자는 건… 다섯 개….”
그녀가 한층 긴장을 풀며 고기를 포크로 찍었다.
“다섯 개를 원하기에는 그냥 고기 자르신 건데….”
그가 소심한 반론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이내 집게로 감자를 집어 앞접시에 놓으며 대답했다.
“다 먹으면 주겠다는 얘기였는데.”
“…….”
“고작 다섯 개에, 내가.”
원하는 만큼만 먹으랬으면서. 그리즈가 살짝 미소 짓다가 다시 멍해졌다.
웬일인지 그는 식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은 식탁 위에 가볍게 걸쳐져 있었다.
이미 식사하고 온 걸까. 꼿꼿한 자세를 보던 그리즈는 스파게티를 덜었다. 그때 문득 금색 컵에 비친 그의 눈과 마주쳤다. 흐릿한 파란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관찰되고 있었다는 걸 느끼자 일순간 숨이 벅찼다.
저렇게 무심한 얼굴로…. 바람이 신경을 살랑살랑 건드리는 것 같았다.
“안, 안 드시나요? 맛있는데….”
그제야 그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며 나른하게 물었다.
“맛있어?”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없이 보기만 했다. 평소처럼 아름다운 파란색 눈동자가 음울하게 빛났다.
그녀는 궁금해졌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때 그의 뺨에 형식적인 보조개가 드리웠다. 그리즈는 그를 탑 앞의 소년과 겹쳐 보려고 노력했다.
그가 식사하기 시작했다. 늘 살기 위해 초조하게 식사했던 그리즈가 그의 모습을 흘끗 보고는 똑같이 어깨를 폈다. 조금 전에 연습한 덕분인지 통증이 덜한 것 같았다.
꼿꼿한 자세로 있으니 왕실에서의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언젠가 왕좌를 되찾아서 그와 이렇게 식사하면 얼마나 좋을까.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날을 그리며 식사를 마쳤다. 그는 티타임이 시작되고 나서야 오전에 있었던 얘기를 꺼냈다.
“쓰러질까 봐 우려했는데 잘 돌아다녔나 보더군.”
홍차의 향기를 음미하던 그리즈는 숨을 꾹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그를 훔쳐본 게 마음에 걸려서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금이 좋은 기회 같았다.
“벨린과 쿠엔틴 경에게 얘기를 전해 듣고 타릴루치가 무엇 때문에 온 건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저…. 응접실을 엿보게 됐어요.”
그는 그 역시 알고 있었던 듯 여유롭게 대답했다.
“대담하군.”
무심한 저음이었지만 반어처럼 들려왔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리즈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저와 관련된 일이라면 알아야만 할 것 같아서…. 돌아가는 정세를 알 수 있게 해 주시면 저도 전하의 뜻에 따를게요.”
뜻에 따르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가 눈빛으로 묻는 것 같았다. 그리즈는 입술을 꾹 닫았다가 열었다. 탑 앞의 소년을 그리워했고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건 의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므로.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아서…. 사실 후작 각하가 타릴루치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는 게 걱정돼서 서랍장에 밀고 쪽지를 넣어 뒀었어요. 저는 그런 일밖에는…. 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리즈가 울적하게 말을 이었다.
“쪽지가 증발해 버렸거든요.”
쪽지가 누구의 손에 들어간 건지 알 수 없으니 하루하루 불안했다. 역시 그는 쪽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표정이었다. 역시 스테판일까.
그때 쿠엔틴이 급히 다가와 그의 귀 쪽에 입술을 대고 작게 말했다.
“저, 대공 전하. 외람되지만 급한 용무로 찾아뵈었습니다. 붉은 늑대가 디르크에 관한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은 그리즈가 침울했던 눈동자를 밝혔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그가 의자에 느리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여기서 얘기해.”
잠시 당황했던 쿠엔틴이 수첩 뒷장을 펼쳐 읽었다. 그리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귀 기울였다.
“우선 붉은 늑대가 그랑디아에 성공적으로 잠입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디르크 님이 정원사 한 명과 성을 몰래 빠져나가려 하다가 잡혀 구류되었다는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디르크가 그랑디아에서 구류되었다고? 그리즈가 두 눈썹을 위로 올렸다.
“디르크가 노르드발츠가 아니라 그랑디아로 갔던 건가요?”
쿠엔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델 님은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기 위해 아레하로 밀항하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리즈가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비아누트가 태연히 말했다.
“정원사라. 디르크가 태어날 조카에게 아빠를 데려다주려고 했나 보군.”
그 역시 아델의 정인에 대해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즈가 흠칫 놀라는 사이 쿠엔틴이 그의 말을 긍정했다.
“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타릴루치 사람들은, 디르크 님께서 율리아나 아가씨를 대변하시고 정원사와 달아나려 했던 정황을 반역으로 염두에 두고 조사하는 것 같습니다. 디르크 님께서 바이렌하그에 다녀간 직후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디르크가 나를 대변하다가 첩자로 몰렸다는 얘기인가? 그리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붉은 늑대가 디르크 님에게 익명으로 쪽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델 님을 바이렌하그 대공 전하께서 데리고 있으니 잘 처신하라고 말이죠. 그랬더니 디르크 님께서 감옥 창에 이런 답신을 끼워 두었다고 합니다.”
말을 마친 쿠엔틴이 수첩 뒷장에 꽂혀 있던 쪽지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저와 정원사를 그랑디아 밖으로 탈출시켜 주시고 안전을 보장해 주세요. 그럼 전하께서 좋아하실 만한 비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디르크 님이 가문을 위해 대공 전하를 함정으로 끌어들이려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델이 아레하에 있는 이상 그럴 수 없지. 먼저 알려 주면 탈출시켜 주겠다고 전해.”
식사를 마치고 저택으로 함께 돌아왔다. 그리즈는 쿠엔틴의 말을 곱씹느라 멍한 상태였다. 디르크가 가문 내에서 첩자로 의심받고 구류되었다고 했다. 그만큼 타릴루치가 그리즈 베네딕트의 존재에 예민해진 상태라는 의미일 터….
계속 바이렌하그에 머물러도 괜찮을까. 시간이 주어졌으니 타릴루치에 악감정이 있는 가문을 찾아 아군으로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무슨 수로…. 혼자서는 도적 떼도 두려워하는 처지에….
“그러나 내 눈에는 그대의 아주 큰 흠이 보이기에 이렇게 따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흠이라는 것은, 우월한 씨를 뿌리지 않고 삭히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내 가문이 폐위된 공주를 습격했다고 오해하여 그랑디아와 벽을 쌓은 점입니다.”
그리즈는 밋밋한 배를 손바닥으로 쓸며 고개를 떨궜다. 사실… 대공 비아누트에게 흠을 내는 건 그리즈 베네딕트라는 존재가 아닐지….
그동안 타릴루치 가문에 무작정 복수하리라고 다짐해 왔다. 방법도 명확하지 않았고, 복수 후에는 무얼 할지도 정하지 않았다. 단지 아버지의 왕좌를 되찾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 따위가. 무슨 수로…. 그는 방법을 알고 있을까.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걸 준비는 늘 되어 있었는데 과연 그가 받아들여 줄지….
아니, 생각하지 말자….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 평화로움을 누리는 게 어떨까.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내일 당장 타릴루치가 또 나타날지도 모르고… 공격해 올지도 모르니까.
복도를 걷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옆에서 걷던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시선을 줬다.
그리즈의 얼굴은 아까보다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걱정을 애써 잊으려 녹녹한 봄바람을 좇고 있었다. 복도 창문으로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있었고,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도 떠올리고 있었다.
“기분… 좋아요. 정말 오랜만에, 이 정도면.”
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깃들었다. 머지않아 싱그러운 미소가 어렸다. 차갑기만 하던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누그러졌다.
그리즈는 그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저 사내 역시 지금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
그때 그의 새끼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을 스치자 그녀는 문득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대공의 몸이 온몸으로 정신없이 얽혀 오던 느낌….
일순간 다시 긴장하는 찰나 그가 손을 와락 잡았다. 그 정도로는 부족한지 손을 살짝 풀었다가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고작 손깍지일 뿐인데도 그리즈는 옭아매지는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검지를 살짝 움직이자 굳은살이 많은 사내의 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때 저 멀리 복도 끝, 모퉁이 안쪽에서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할머니, 아니면 로렐 같았다. 그리즈는 깍지 낀 손가락을 쭉 펴며 그의 손을 놓으려고 했다.
발소리가 점점 커지는데 그는 오히려 더 강하게 잡았다. 이러다 의심을 살 수도 있는데. 그리즈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가 그 얼굴을 태연히 주시하다가 그녀 앞의 방문을 열었다.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고 유일한 도주로를 만들어 준 셈이다.
그리즈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가서 맞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가 아주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창문 하나 없는 기도실, 잡티 하나 없이 하얬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어둠이 서린다. 오늘 내내 가득했던 금욕이 까맣게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닌지, 촛불만 가득한 어둠 속에서 그가 비로소 편한 얼굴을 했다. 끼익. 문이 닫혔다. 눈을 반쯤 내려 감은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곧장 입술을 덮쳤다.
“흣! 으읍.”
그리즈가 뒷걸음질 치다가 책장 옆면에 등을 맞붙였다. 딱딱하고 찬 기운이 등에 서리는데 입술은 버겁도록 뜨거웠다. 눈앞이 새카매진 까닭에 그의 혀가 잇새를 가르고 들어오는 느낌이 너무 선명했다. 아…. 목덜미가 쭈뼛, 하며 근질거려 왔다.
그가 입 안을 훑기 편하도록 턱을 당겨 올려놓고 입술을 깊숙이 겹쳤다. 길쭉한 혀가 안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거친 숨결이 목구멍으로 진득하게 넘어오자 그녀는 허벅지 안쪽을 맞붙였다.
밖에서는 지극히 냉철한 그의 이성이, 둘만 남으면 왜인지 어긋나 버리는 느낌이 든다. 벅차게 전해져 오는 심장의 울림과 뜨거운 체온, 거친 손길이 모두 정상이 아닌 것만 같다.
꼿꼿한 혓바닥이 입천장을 부드럽게 훑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깍지 낀 채로 책장에 결박당한 손이 아찔히 그의 손등을 긁었다.
“으읍, 읍….”
복도의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안 돼. 만약에라도 이런 관계를 들켰다가는….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그가 손목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을 만지게 했다. 야하게 열린 잇새로 그가 여인을 탐하는 감각이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누가 입 맞추고 있는지 똑똑히 느끼길 원하는 것 같았다.
기도실을 덮쳐 올 것 같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그녀가 긴장해서 숨조차 쉬지 못하자 그가 입술을 부드럽게 떼고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조금 전까지 무심했던 사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한 기색이 비쳤다.
어제 아래로 들어오려 하기 직전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그리즈는 숨을 몰아쉬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일, 일부러 손 안 놓은 거죠. 이러시려고….”
살짝 고개를 들자 불안정하게 웃는 입술이 보였다. 가늠할 수 없는 사내였다. 평소에는 냉혈한이지만 때때로 광기를 드러내는…. 이상한 점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였다.
그때 그가 미소를 거두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새파란 눈동자가 일렁인다. 마치 무언가를 진득하게 갈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눈을 마주 보던 그리즈가 상기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며칠 동안…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요?”
사실 오늘 타릴루치가 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과연 며칠을 평화롭게 보낼 수 있을까. 하루? 이틀…?
짧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으니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끝을 알 수 있기를 바랐다. 오늘 내내 뙤약볕 아래의 살얼음판을 아슬아슬하게 걷는 기분이었으므로.
발밑에는 신기한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얼음이 녹으며 장관이 펼쳐진 것 같았다. 아름다워서 계속 누리고 싶지만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바로 추락이 아닌가. 그러니까 제발 누가 끝을 알려 주기를 바랐다.
그때 그가 고개 숙여 그리즈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조만간 전쟁할 거야.”
“…….”
“왕궁을 불시에 장악하면 승산이 있어.”
정말 타릴루치와 전쟁을…? 그리즈의 얼굴에 어둠이 서렸다.
“그랑디아 내의 대공가에서도 지원을 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이 저 때문에 죽게 될 텐데 어찌….”
그는 입술을 옮겨 귓불을 입술로 머금으며 숨결 터트렸다.
“이 땅의 기사들은 타릴루치에 악감정이 많아. 그뿐이지.”
“하지만 위험….”
“살아 돌아올게.”
나른하게 풀린 저음이, 별일 아닌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가까운 곳을 여행 가듯 가벼운 말에 그리즈는 사색이 됐다.
“그런…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사실 그가 탑 아래의 소년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그는 어떤 이유로 폐위된 공주를 그리워했던 걸까.
혹시 그에게는 첫사랑이라는 게, 자신을 소모해서라도 가져야만 하는 목표로 변해 버렸던 건 아닌지…. 그런 이유로 전사하면 마지막 순간 얼마나 큰 허무함을 느낄까.
지금 그에게 주는 게 애정이 아니라 독이라는 걸 느끼게 되면 나 역시…. 그리즈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허무한 눈을 보일까 봐 두려워졌다.
“어째서…. 고작 짧은 인연 때문에….”
그는 깍지 낀 손을 힘주어 쥐며 그녀의 눈을 선명히 바라보았다.
“외로웠어.”
“…….”
“너도 그렇게 보였어.”
꾸밈없는 대답이었다. 외로웠고, 외로워 보여서 곁을 지켰다. 그러므로 서로가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었다.
그날의 순수한 기억들이 눈앞을 빠르게 스쳤다. 아름다운 기억인데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 걸까.
갑자기 목이 메어서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눈을 꽉 감았다.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위로하듯 머리를 매만져 주는 손길이 유난히 부드러웠다.
새벽. 늘 그랬듯 하늘이 연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풍스러운 대공의 방은 창틀조차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드나들 뿐이다. 커튼이 사각사각 흔들리는 소리, 사내의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방을 채웠다.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는 침대에서 깊게 잠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는 중이다. 속옷 하의만 입은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체격 좋은 몸과 어울리는 큰 손이, 넓은 흉곽을 가로지른 이불을 걷어 냈다. 원래부터 남들보다 높은 체온이 요새 더 뜨거웠다. 꿈속으로까지 찾아오는 그리즈 베네딕트 때문이다.
비아누트는 그게 그녀의 탓인지, 자신의 탓인지에는 관심 없었다. 그녀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 중요한 건 그뿐이다.
화려한 붉은색 눈동자 속, 홍채가 떨리자 그의 잿빛 세상에 색채가 돈다. 멈춰 있던 바람은 그의 피부를 훑었고, 새들의 지저귐은 귓속을 긁었다. 무엇에도 흥미 없던 그에게는 하나의 갈망이 피어났다.
그런 그를 뒤흔들 듯, 유독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비아누트….”
“…….”
“좋아.”
작은 몸이 그의 가슴팍으로 폭 안겨 들어왔다. 금욕적인 입술에서 낮은 탄식이 흘렀다.
이내 가녀린 두 팔이 목을 휘감고 매달리자 결국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그녀는 가장 어두운 곳에 묶어 둔 그의 욕망을 유일하게 건드리곤 했다. 수면 중인 몸에 힘이 들어간다. 갈비뼈를 둘러싼 빗근까지 두꺼워진 채로 가쁘게 오르내렸다.
그는 잠결에 머리칼을 느슨하게 쥐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선명해진 장골 능선 옆으로 핏대가 일어선다. 평상시에도 육중했던 속옷 안쪽으로 피가 쏠렸다.
쉬고 있던 기둥이 일어서자 속옷 밑단이 위로 들리기 시작했다. 탄탄한 허벅지가 관능적으로 드러나서는 여인을 안을 준비가 됐다는 걸 알렸다. 비아누트는 물었던 입술을 느릿하게 놓으며 잠든 채로 호흡했다.
“하아….”
탄탄한 허리가 부드럽게 들썩여지자, 크고 굵은 끝머리가 속옷 허리선을 벗어나 배꼽 부근을 긁었다. 그 정도의 자극으로도 끝단이 섬유를 찢을 듯 팽팽해진다. 선액마저 주르륵 흘러나왔다. 굵은 성기가 여인의 몸속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때 작은 목소리가 꿈속에서 다시금 그를 부르며 보챘다.
“비아누트, 비아누트….”
그는 유일하게 아는 여인의 몸을 아래로 느끼기 시작했다. 축축한 곳을 뚫고 들어가는 감각이 선명해지자 복근과 쇄골이 더 뚜렷해졌다.
홍조가 깃든 그녀의 얼굴이 보이자 굵직한 페니스가 속옷 안에서 더 장대하게 발기했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렸다.
“으읏, 좋아. 기분 좋아요….”
투두둑, 거친 손길이 매트리스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는 잠긴 저음을 흘리며 방탕하게 앓기 시작했다.
그의 허리가 본능적으로 흔들리자 침대가 삐걱거렸다. 복근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일순간 팽팽해진 침대 시트가 북 찢겼다. 굵은 성기가 속옷에 쓸린 채로 야하게 날뛴다. 목적지를 찾지 못한 정액이 덩어리진 채로 남색 천을 질퍽하게 적셨다.
“하아, 하아, 아아….”
한동안 복근이 거칠게 펄떡거렸다. 수축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나서야 그가 땀에 축축이 젖은 채 눈을 떴다.
그는 찢어진 시트를 보고서야 잠든 채 사정했다는 걸 인지했다. 아래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니까 또. 몇 번째인지.
그녀가 나타난 후, 있는지도 몰랐던 애욕이 늘 정점이다. 모르는 사이, 밤새도록 그녀를 괴롭혀도 풀리지 않을 만큼 쌓인 듯했다.
그는 목욕실로 향해서 몸을 씻고는 새벽 운동을 시작했다.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고야 아래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날이 밝자 다시 땀을 씻어 낸 그는 의상실로 향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그의 몸에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얼굴이 작고 어깨가 넓고 팔다리가 긴 체형이다. 무엇을 걸쳐도 근사하지만 브람은 검은색 상, 하의를 선택했다. 흑발과 잘 어울릴뿐더러, 그를 보수적이고 금욕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요새 들어 퍼지기 시작한, 대공이 여동생을 품는 것 같다는 소문을 의식한 것이다.
이내 브람은 그에게 단추가 촘촘한 검은색 조끼를 입혔다. 그러곤 벗기도 귀찮을 정도의 액세서리로 그를 치장했다. 비아누트는 조끼 앞주머니에 걸린 회중시계 체인을 성가시게 주시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8시. 평소처럼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모서리에 몇 개 쌓아 둔 사탕 주머니가 보였다.
그는 어제 스테이크 접시를 싹 비운 그리즈를 떠올리며, 빈 주머니에 사탕 다섯 개를 옮겨 담았다. 그리고 오늘, 꿈에서의 정사를 떠올렸다. 또 사탕 다섯 개.
총 열 개가 든 갈색 주머니를 상의 안쪽에 넣었다. 그 찰나 오늘 유독 창백해 보이던 브람이 그의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양피지 쪽지였다. 쪽지에는 율리아나의 혼인을 지켜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 필체가 약간 다른 문장이 덧붙여져 있었다.
‘남매가 밀회하여 분란이 커지리니.’
브람은 이른 아침 하인들이 저택을 청소하다 로비에서 이 쪽지를 발견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곤 평소에는 행정 건물 안 집무실에 있었을 후작이 하필 로비에 있었다는 말을 강조했다. 그의 숙부인 탈스바그 후작이 쪽지의 주인으로 의심된다는 얘기였다.
비아누트는 어제 그리즈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사실 후작 각하가 타릴루치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는 게 걱정돼서 서랍장에 밀고 쪽지를 넣어 뒀었어요. 저는 그런 일밖에는…. 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
“쪽지가 증발해 버렸거든요.”
안 그래도 어제 숙부가 브람과 로렐에게, 대공과 율리아나의 관계에 대해 캐묻고 다녔다는 얘기가 있었다. 대공이 이틀 동안이나 율리아나를 간호했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그녀를 방으로 들였던 순간부터 벌어질 줄 알았던 일이다. 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왜 성가신 방해물 때문에 그녀를 피해야 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차가운 인상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연회가 열렸던 날, 석상실에서 들었던 숙부의 말이 귓가에서 울리는 까닭이었다.
“작대기가 많을수록 상대한 사내가 많다는 뜻인가? 도대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군.”
비아누트는 그때 보았다. 그녀를 희롱하며 묘하게 흥분하던 숙부의 모습을. 그녀가 더러운 창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몸을 섞으려 들겠지. 그는 쪽지를 천천히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마침 책상에 영지 포기 각서와 탈스바그의 장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마차와 말 외에도 대부분의 물건을 시세보다 다섯 배 이상 비싸게 구매한 정황이 있다.
전년에 비해 접객비도 열 배 이상 늘어난 걸 보면 장부를 조작해 돈을 빼돌리는 게 확실했다.
한 뼘 분량이나 되는 서류를 넘겨 보던 그는 이번엔 증언록을 훑어보았다. 숙부가 그랑디아 출신 용병들을 탈스바그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곤 숙부로부터 가로챈 서신들을 살폈다. 발신인은 마할 타릴루치였다. 차고 넘치는 증거가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다.
그때 쿠엔틴이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브람이 자리를 피했다. 보고할 것이 많은지 쿠엔틴이 서둘러 말했다.
“어제 늦게 왕실 의사가 도착하였습니다. 지금 율리아나 아가씨를 검진하고 있습니다.”
“잘됐군.”
“그런데 저… 검진 전 벨린이 의사에게 아가씨의 건강 상태에 대해 설명하는 걸 엿들었는데 아가씨께서 저택에 오신 후로….”
매끄럽던 보고가 서서히 흐려졌다. 숙부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던 비아누트가 쿠엔틴을 빤히 주시했을 때였다.
“아가씨께서 지금껏 월, 월경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쿠엔틴은 말하고도 당혹스러운지 창밖을 내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그리즈가 회임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비아누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녀가 소극적으로 굴 수밖에 없는 이유처럼 느껴졌으므로.
다행히 그에게는 그녀의 건강과 지위를 되돌릴 수 있는 시간과 돈과 의지가 있었다. 그의 눈은 제자리로 돌아가 미소 짓는 그녀를 그려 보고 있었다.
“치료 방법을 찾으라고 하고 비용을 대 주도록.”
쿠엔틴이 그의 지시 사항을 수첩에 적었다. 그러곤 뒷장을 펼쳐 다음 내용을 말했다.
“다른 내용으로는, 그랑디아 각지에 있는 우리 정보원들이 정보를 보냈습니다. 그중 유의미한 것은, 최근 타릴루치가 사돈지간이던 그랑디아의 레녹스 공작가와 갈등하는 중이라는 정보입니다. 레녹스의 장남이자 클라우디아의 남편이 병사했는데 클라우디아가 독약으로 살해했다는 정황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좋은 소식이군.”
“그렇습니다. 현재 그랑디아는 레녹스 일가를 성에서 쫓아낸 후 압박하는 중이고, 레녹스는 군사력을 보강하며 날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비아누트의 얼굴이 흡족함으로 물들었다. 정보대로라면 레녹스는 타릴루치에게 악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가만둬도 언젠간 일어날 내전이 아닌가. 이 상황에 베네딕트의 왕녀가 친서를 보내 협조를 요청한다면?
그럴싸한 명분이 굴러들어 왔으니 어떻게 해서든 도우려 하겠지. 걸림돌이 하나 줄었다는 사실에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심정이 들었을 때였다.
“붉은 늑대가 그랑디아 왕궁의 소식도 전해 왔습니다.”
쿠엔틴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마할 타릴루치가 디르크의 정원사를 육체적으로 고문하여 율리아나 아가씨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소득이 없자 디르크 님까지도 잠재우지 않고 압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유유히 생각에 잠겼다. 그랑디아 왕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그리즈 베네딕트가 살아 있다고 완전히 믿는 모양인데. 마차 습격에 실패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인가? 의문이 커지는 순간 쿠엔틴이 수첩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 일로 인하여 디르크 님께서는 가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돌린 것 같습니다. 바이렌하그 대공 전하께 직접 전달하라고 쪽지를 보내셨어요. 저희도 봉인은 풀지 않았습니다.”
쿠엔틴이 촛농에 지장이 찍힌 서신을 내밀었다. 비아누트는 봉인을 열고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옥중 편지치고는 진부한 인사가 그를 반겼다. 아래쪽에 가서야 본론이 적혀 있었다.
이미 전하께서 아델을 보살피고 계시니 전적으로 신뢰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비밀이라는 것은, 타릴루치 일가가 유일신이 아닌 밤의 신을 섬기며 주일마다 그랑디아 성 내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랑디아의 베네딕트 가문이 이교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봉투 안에는 까마귀의 날개 모양의 나무 조형물이 들어 있었다. 조형물을 살피던 비아누트는 타릴루치 일가가 주말마다 사라진다는 소문을 곱씹으며 다음 줄을 읽었다.
그러나 제물을 손수 도살해 바친 자만 밤의 신을 모시는 예배당으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저와 아델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찾아내시어, 타락하여 썩어 들어가는 혈육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밤의 신이라. 결국 타릴루치가 이교도가 맞았다니.
아주 오래전부터 찾고 있었던 증거를 손에 쥐자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희열로 뒤범벅됐다. 혈통 없는 개들을 적법하게 도살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벌써부터 살의가 진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베네딕트 왕의 누명을 벗기면 전 왕가의 복권도 가능했으므로.
감옥의 경비가 날로 삼엄해지고 있습니다. 율리아나가 그랑디아의 막내 공주라는 걸 제가 인정하기 전까지는 감옥을 나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만약 고문으로 죽는다면 아델을 부탁드립니다.
그는 서신을 끝까지 읽은 후 쿠엔틴에게 넘겼다. 그러곤 디르크와 정원사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명하고는, 첩자를 더 풀어 그랑디아 성내에 있을 예배당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쿠엔틴의 보고가 끝날 무렵, 문관 브리언이 꽃바구니를 들고 왔다. 안에는 노르드발츠 왕궁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 담겨 있었다.
“국왕 폐하의 전언을 받아 왔습니다. 며칠 전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의 답신인 것 같습니다.”
비아누트는 서신의 봉인을 풀었다.
그랑디아와의 전쟁을 불허한다. 명확한 근거로 반측자만 숙청하도록.
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예상 못 했던 바는 아니었다. 명확한 걸 좋아하는 국왕은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전쟁만을 선호한다. 지금껏 조카 손자의 요청이어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나마 숙부 스테판이라도 숙청하라고 지시한 점을 황송하게 생각해야 할지.
비아누트는 숙부의 반역 증거를 넣은 가죽 봉투에 촛농을 붓고는 대공 인장을 찍었다.
“국왕 폐하께 전해. 숙부는 오늘 오후 감옥에 구류하고 재판받게 할 거야.”
봉투를 받아 든 브리언이 우려스러운 기색으로 또 하나의 서신을 건넸다.
“그랑디아 왕실에서도 대공 전하께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봉인을 뜯은 그가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클라우디아를 박대한 일에 대한 불쾌감과 그가 불능이라는 우려가 적혀있었다. 표정 변화 없이 그는 마지막 문장을 빤히 응시했다.
친애하는 바이렌하그 대공, 그대가 그랑디아의 반역자 그리즈 베네딕트를 친동생으로 받아들여 보호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억울하다면 누이를 공개하고 항변하십시오. 기회를 놓친다면 파괴적인 전쟁으로 바이렌하그의 명운도 끝날 것입니다.
말하자면 선전 포고였다. 그는 서신을 소리 없이 책상에 놓으며 눈매를 지그시 좁혔다.
파괴적인 전쟁이라. 그 역시 바라던 바였다. 왕위 찬탈자들이 자화자찬하며 고상 떠는 걸 너무 오랫동안 봐줬지 않나.
“군사 회의를 열어야겠군. 관료들을 소집해.”
생각이 많아 보이는 브리언은 말을 아꼈다. 요새 들어 그랑디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기에 막을 수 없을 터.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고개 숙인 브리언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울러 브리튼의 공주께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향하실 예정이신 것 같습니다. 마님께서 혼담을 나누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비아누트는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들은 듯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원로와 장로들도 함께 소집하도록.”
브리튼 공주와의 혼인에, 신앙심 깊은 신자들이 간섭하게 만들겠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