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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맞이가 마침내 끝났다. 피로한 기색의 비아누트는 눈가를 매만지며 집무실로 향했다.
연회는 좋아하지 않지만 감수해 왔다. 감수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끊임없는 현악 소리와 무질서한 연회장의 풍경 그리고 두통을 유발하는 술 냄새마저.
연회를 마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영위하곤 했다. 정오 내내 타인과 뒤섞여 있던 까닭에 찝찝하게 느껴지는 몸만 씻어 내면 달리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목욕 후에 옷을 갈아입고 나서도 불쾌감을 지을 수 없었다. 조금 전, 저택 문 앞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엉망진창으로 울 것 같았던 가짜 율리아나의 얼굴 때문에.
색이 뒤바뀐 듯 하얗게 질려 버린 입술과 붉어진 눈가가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멸시받을 때나, 단도 끝이 목에 닿았을 때도, 심지어는 침대에서도 그런 표정은 보지 못했는데.
비아누트는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가 적잖게 궁금했다. 자연스러웠던 사람이 돌연 변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어떤 당혹스러운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일관했던 마리아를 목덜미까지 새빨개지도록 동요시킨 게 사람인지, 상황인지를 알고 싶은 거다.
그러나 달아나듯 방으로 향하는 그녀를 붙잡으려는 순간 옷소매 사이로 드러난 붉은 자국을 보며 평정심을 잃었다.
고작 가죽 수갑을 찼다고 피멍울이 생길 만큼 약하면서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지. 심장 부근으로 닥쳐온 알 수 없는 통증에 멈칫하는 사이 거짓말쟁이 잡역부는 줄행랑쳐 버렸다.
2층 계단을 오르는 비아누트의 손에는 그녀가 떨어트리고 간 갈색 주머니가 쥐어져 있었다. 무질서하게 깨진 사탕 조각들과 부스러기가 손끝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가 느낀 불쾌감은 손끝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어디에서 오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 불쾌감을 고조시켰다.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깨진 사탕 주머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에서 멀어질수록 딸기 향기가 더 짙어진다. 책상 끄트머리에도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물기를 머금은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었다. 이내 느슨하게 쓸어 넘기며 책상 앞에 앉았다. 커튼을 쳐야 할 만큼 눈부셨던 햇살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시간, 오후 5시.
이맘때면 수련장으로 향했을 그는 무언가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러나 유려한 눈동자에 맺힌 것은 정작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무와 책 사이를 공허하게 훑는 눈이 가짜 여동생을 그렸다.
애처롭게 떨리던 두 손, 위태로운 숨결을 터트리던 입술,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던 눈을. 그 모습이 무언가를 한스럽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므로.
지금까지의 그는 타인의 상황에 관심 갖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는 언젠가 공론화될 것이다. 그때 들여다봐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당장은 머릿속을 잠식한 의문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가짜 여동생에 관한 것이라면, 요새는 늘 그랬다.
변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받아들인 변화는 계절과 날씨 정도. 피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그러면서도 전장에서 불가피한 폭우를 맞을 때면 허무함을 느꼈다. 비에 젖지 않으려 고려한 시간들이 허사가 되는 게 불쾌했다.
우습게도 비 온 후의 무지개는 그럴듯하게 아름다웠다. 몸에서 진동하는 한기와 피비린내가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해서 구태여 시선을 떼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짜 율리아나는 피치 못할 폭우가 아니지 않은가. 원하면 피할 수 있는데, 너를.
그는 식은땀으로 젖어 가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브람이었다.
“전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는 불규칙해진 숨을 억제하듯 이를 지그시 물었다. 턱 근육이 굳어지며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브람의 얼굴에는 퍽 난감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율리아나를 데려오라는 명을 받들기가 수월하지 않은 듯했다.
다급히 달아나는 뒷모습을 보며 예상했던 바였다. 그는 짐짓 여유롭게 브람의 보고에 귀 기울였다.
“저…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율리아나 아가씨의 방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피곤하시다며 벨린을 물리고 방문을 걸어 잠그셨다고 합니다. 잠드신 건지 노크해도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의 눈에는 의문이 어렸다. 문을 걸어 잠갔다고. 무엇을 피하기 위해서. 대공을 피하려 고작 문을 걸어 잠그지는 않았을 텐데.
의아함을 느낀 그는 저택 앞에서 불안정하게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목에 검을 들이댔을 때도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눈에서 생기가 사라져 가는 게 보였다. 타릴루치 남매는 각자의 이름을 제대로 소개했을 뿐이었는데.
심장 부근을 누르던 그는 브람에게 그녀를 주의해서 지켜보라 명했다.
브람이 나가자 기사단장 쿠엔틴이 들어왔다. 비아누트는 갑옷의 묵직한 쇠 마찰음을 들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책상 앞에 멈춰 선 쿠엔틴이 양피지 수첩을 쥔 손을 공손히 모으고 말했다.
“어비스로 보낸 정보원들에게서 서신을 받았습니다. 취합한 정보에 의하면 브리튼의 공주님께서는 최근 들어 유학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시어 주로 사내와… 밀회를 즐기고 계시다고 합니다.”
비아누트는 턱을 괸 손을 길게 뻗어 검지로 관자놀이를 느리게 압박했다.
심기를 살피는 쿠엔틴과 달리 그는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브리튼 공주와의 혼인에 애정은 없었다. 혼인 조건을 담은 서신을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혼인은 성스러워야 한다는 교리 때문에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브리튼 공주는 원하는 조건을 숨기지 않았다. 사생활을 존중해 줄 것. 2세 계획은 2년 후부터. 콧대 높은 왕실 자손에 어울리게, 하던 대로 바이렌하그도 주무르겠다는 얘기였다.
그의 입장에서 나쁠 건 없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지 않나. 공주가 문제를 일으킬수록 혼인을 주선한 국왕은 곤란해질 것이고 브리튼 왕국도 참견을 줄일 것이다.
그의 할 일은 브리튼의 공주를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무덤으로 들어가게 인도해 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좋은 혼인이었다.
그런데 왜 끌리지 않을까.
파란 시선이 습관적으로 창문 너머 벤치에 닿았다. 그 모습을 살펴보던 쿠엔틴이 두 손 모아 쥐고 있던 양피지 수첩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
“후작 각하께서 탈스바그로 내려가 세금을 삼십 퍼센트까지 올리셨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그 돈으로 군수품을 비축해 두는지 주의해서 지켜보겠습니다.”
비아누트는 무감각하게 대답했다.
“그래.”
“오르파담 매음굴 여인들은 바이렌하그 수도원으로 가길 희망하여 모두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녀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그의 시선이 집무실로 돌아왔다.
며칠 전 붉은 늑대가 오르파담 접대부 명단에 있었던 아드리안이라는 범죄자를 찾아냈다. 떠돌이 생활이 힘들었는지, 금화 한 개에 마리아에 대한 정보를 술술 알렸다고 한다.
마리아가 잡역부로 일하며 처녀성을 지켰고, 그러기 위해 매음굴 주인과 관리자들에게 폭행당하거나 방치되어 몸에 상처를 입었고, 피임차를 마셔 회임할 수 없게 됐다는 정보들이다.
여인의 처음을 가졌다. 창녀에게 동정을 준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비아누트는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흥미로울 뿐이었던 시간들이 폭발해 신경에 박힌 것 같았다.
어째서 너는 평생 하나만을 원했던 나를, 미치게.
“때로는 강렬하지. 더러운 게.”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면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럴수록 강해지는 건, 어디서 오는지 모를 통증뿐.
“당장은 회임할 수 없어요, 저는.”
나는 왜 벽난로에 던져 넣은 손수건을 운운하며 네 거짓을 벗기려 했지? 늘 그래 왔던 대로,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어째서.
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떠냈다. 쌓여 가는 혼란을 지우듯.
“매음굴 관리자들은.”
쿠엔틴이 수첩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죽었지만 살아남은 자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중 몇 명은 이미 바이렌하그 감옥에 잡아 두었습니다. 아울러 오르파담 매음굴 전 주인도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이틀 거리에 있는 린튼 요양소에 있다고 합니다. 붉은 늑대가 그자를 만나러 갔으니 이틀 후쯤이면 서신을 보내올 겁니다.”
잡역부 마리아를 둘러싼 포장이 벗겨지는 중이다. 그 과정조차 즐겨왔던 그였지만 요새는 예전 같지 않았다.
“계속 보고해.”
“모든 건 전하의 뜻대로.”
쿠엔틴이 집무실을 나섰다. 어제 잠자지 못해 피로한 비아누트의 눈가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가를 문지른 그는 사탕 주머니를 가져와 입구를 열었다. 동글동글한 사탕이 열 개 들어 있었다. 그중 한 개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상큼한 딸기 향이 진하게 풍겨 온다. 어두운 나무 바닥과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가득했던 그의 시야에 가짜 율리아나의 미소가 살며시 내려앉았다.
“감사합니다…. 저… 기분 좋아요.”
그때 어째서 심장 주위가 뻐근해졌었을까. 고작 몇 초 동안의 미소 따위에.
커다란 손이 가슴 근육을 느릿하게 문질러 진정시켰다. 그는 이 감각이 유독 신경 쓰였다.
그 사이 녹아든 딸기 향은 그의 온몸을 제 것처럼 떠돌았다.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던 그의 눈매는 나른하게 풀렸다. 손바닥에 끈적하게 감기던 연약한 피부의 촉감이 다시금 생생해지는 것도 같았다.
유독 하얀 피부였다. 입술로 빨아들이는 족족 붉은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는 특징이 그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 입술 자국, 지금도 새겨져 있을까.
비아누트는 그 흔적이 영영 사라지지 않길 원했다. 그 흔적을 그녀가 보며 흔적의 주인을 떠올리기를 바랐다. 그녀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의 태도와 시선, 뜨겁게 달아오른 몸까지도.
왜냐하면 그는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작은 몸의 뜨거움을 느낀 후부터, 뜨거운 줄로만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미적지근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그 감각을 몰랐던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 길쭉한 손가락 마디에 붉은 기가 어렸다. 얼굴은 평소처럼 냉랭했지만 귀 끝도 붉어져 있었다. 넓은 가슴팍이 불규칙하게 오르내리고, 앞섶이 점점 팽팽해졌다.
이런 자신을 그녀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정작 그녀를 받아들이고 싶어서 미쳐 가는 건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타들어 가는 호흡을 억누르며 사탕을 씹어 삼켰다. 거칠게 흔들리던 목울대는 도무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 되도록 지역 관료들이 보내온 서신을 확인했다. 세금 인상안이나 농노법 개정안 등 종류가 다양했지만 대부분 기존의 체계를 무너트리고 이익을 챙기기 위한 말장난들이었다. 그는 재고해 볼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서신을 모두 폐기했다.
다음은 타릴루치에 심은 정보원이 보낸 밀서를 확인했다. 베이트릭스 빈젤이, 마리아가 진짜 율리아나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번 연회에 참석한 거라고 한다. 확신이 생기는 대로 혼약을 추진할 예정이라니.
비아누트는 차갑게 웃었다. 생각이 바뀐 지 오래였다. 혼약? 가능할까.
타릴루치 남매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그들은 타릴루치 왕의 오촌 조카로, 타인을 이기려 들지 않는 성향 탓에 가문에서 소외당해 왔다.
부모에게 학대까지 받는다는 정보를 접한 조모가 그들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훗날 그랑디아와의 분쟁이 생기면 이용하기 위함인 거다.
비아누트는 막지 않았다. 타릴루치 가문의 숨통을 언젠간 끊어야 했으므로.
상황은 의도대로 돌아가는 중이다. 타릴루치는 국경에 인접한 바이렌하그를 눈독 들였고, 스테판을 매수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테판에게 자백받으면 명목 있는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랑디아 왕국과 바이렌하그 대공가의 전쟁. 운이 따라주면 승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패전. 왕권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전쟁에 노르드발츠 국왕은 지원을 망설일 거다.
그럼에도 비아누트는 여유로웠다. 애초에 타릴루치와의 전쟁에 승패는 가늠해 본 적 없었다. 전쟁에 목숨을 걸기 전에 마쳐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그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했다.
“전하, 손님들을 모셔 왔습니다.”
“들어와.”
그는 하얀 장미를 소녀의 무덤에 넣던 순간을, 왕위 찬탈자의 숨통을 기어코 끊어 주겠다는 약속을 다시금 새겼다. 그러곤 소파로 유유히 걸어갔다. 뒤이어 들어온 타릴루치 남매 중 아델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마침 떠날 채비를 마친 와중이었습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람이 홍차를 준비해 놓고 집무실을 나갔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그는 팔걸이에 한쪽 팔을 얹으며 디르크를 훑어봤다. 태어나 검을 잡아 본 시간이 채 한 달도 되지 않을 허약한 몸이다.
보호하겠다고? 네가, 누구를. 비아누트는 불쾌함을 차분하게 억누르며 낮게 말했다.
“시간 참 빠르군.”
어느덧 타릴루치 남매가 떠나기로 한 시간이 왔다. 그에게선 아쉬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지만 아델은 그렇지 않았다.
“맞아요. 바이렌하그에 온 지 일주일도 안 된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녀는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은지 창밖 풍경을 보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보였다. 그 얼굴을 살피던 비아누트는 어제 일을 회상했다.
“저… 노파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지만… 후작 각하께서 저를 디르크와 혼인시키려는 걸로 모자라 직접 아델과 혼인해서 영지를 넓힐 거라고 말했어요.”
사실 아델과 스테판의 혼인은 비아누트 역시 바라던 바였다. 숙부가 친히 타릴루치의 영지를 가져다준다지 않나. 그 땅 위에 바이렌하그의 깃발을 꽂으면 출혈 없이 영지를 얻게 될 터.
그러려면 타릴루치 남매를 바이렌하그에 더 머무르게 해야 한다.
그런데 내키지 않는 이유가 뭘까. 언젠가 조모가 사망하면 그때 숙부를 숙청해도 늦지 않는데. 당장 죽여도 시원찮은 심경이라니.
“작대기가 많을수록 상대한 사내가 많다는 뜻인가? 도대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군.”
고개를 비스듬히 튼 비아누트는 디르크를 주시했다. 어제 디르크에게 수면초를 탄 술을 건넸다. 그 술을 마신 디르크는 머지않아 의식을 잃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면서도 무례하게 의심할 수 없고. 입매를 휘어 웃은 그가 낮게 물었다.
“디르크, 수면초는 먹을 만했나?”
미소 짓던 아델이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눈썹을 위로 올렸다. 처음엔 의아해하던 디르크는 한참이나 그의 말을 곱씹다가 긴장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어제 단지 피곤해서 잠든 게 아닌가 보군요. 하필 전하께서 주신 럼주를 먹고 잠든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한동안 정적이 머물렀다. 무언가를 고심하던 디르크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율리아나와 제가 더 가까워지는 걸 막으시려는 겁니까? 제가 성에 차지 않으셔서요?”
비아누트의 입가엔 긍정의 기운이 어렸다.
“비슷해.”
디르크는 선하지만 모자라지는 않았다. 다만 소꿉친구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둔하면서. 누구를, 어디로?
짐짓 무심한 얼굴의 그는 아델의 배를 바라봤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분위기에 긴장한 아델이 두 손으로 배를 가렸다.
아무런 목적 없이 상대를 압박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어느덧 어둠으로 물든 하늘을 주시하던 그가 본론을 드러냈다.
“출산 예정일은 언제지. 때맞춰 선물 보내게.”
아델이 안색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물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비아누트는 찻잔 손잡이에 검지를 걸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곤 차향을 느긋하게 음미하다가 한 모금 마셨다. 아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껏 아델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었다. 주일마다 그녀가 광장으로 가서 산파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도피를 원하는지, 아레하로 가는 배편도 알아봤다고 한다.
바이렌하그의 모든 백성이 그의 눈과 귀를 자처하고 있으므로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다. 그 점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닌 눈치임에도 타릴루치 남매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대공 전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마땅한 변명이 생각나지 않는지 아델이 불쾌한 기색으로 일어났다.
“제, 제가 회임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이런 모욕은 참을 수 없어요. 가겠습니다.”
곤란하니 자리를 피해 버리려는 거다. 비아누트는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도피 장소를 제공해 주려고 물었어.”
새파란 눈동자가 타릴루치 남매를 유유히 바라봤다. 두 사람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네? 도피라니….”
비아누트는 피로가 어린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그러곤 어느새 뜬 달을 무감하게 주시했다.
멈칫했던 아델이 그제야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도피 장소….”
그에게 신세 지는 게 편치 않아 보였고, 그가 제안하는 이유도 알 수 없어 불안해했지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소파에 앉아 디르크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바이렌하그와 갈등을 만들지도 몰라요.”
아델은 바이렌하그와 타릴루치 가문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말이 비아누트를 웃게 했다. 갈등은 아주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설마 그렇게 뻔히 보이는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고 손 내밀었을까.
그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걱정해 줘서 고맙군.”
계속 눈치만 살피던 디르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려는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한 가지를 도와주기로 했으니 하나의 대가를 원해야 했다. 비아누트는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걸 원했다.
“네 가문에서 율리아나의 존재를 의심한다더군.”
며칠 전 타릴루치 남매 또한 율리아나의 눈동자 색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갈색이던 눈동자 색이 나이를 먹으면 바뀔 수 있냐고 서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하던 디르크가 원래부터 율리아나의 눈 색이 붉은색이었던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고 했다. 그랑디아로 돌아가 그렇게 말해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본가로 돌아가, 디르크.”
“…….”
“율리아나에 대한 의혹을 풀고 내게 상황을 전해.”
아델을 지키고 싶다면 율리아나가 진짜라는 걸 보증하고 오라는 얘기였다. 소꿉친구인 타릴루치 남매의 말이 소문으로라도 퍼진다면 누구도 마리아를 의심하지 않을 터.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디르크가 의아하게 묻자 비아누트는 그런 그를 빤히 주시했다. 왕위 찬탈자들이 바이렌하그 가문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건 몹시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마리아에게 그럴듯한 보상을 주고자 했다. 요새의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럼 계속 흠집 내게 둘까.”
여유 있던 눈동자에 선득한 살기가 어렸다. 이미 타릴루치 가문 때문에 첫사랑을 잃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델과 디르크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듯했다. 그러다 아델이 무언가 결심한 듯 눈가에 힘을 줬다.
“대, 대신에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이미 도피를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비아누트가 차갑게 물었다.
“부탁. 또?”
아델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 제 부모님을 주, 죽여 주세요. 전쟁을 일으키셔도 좋아요.”
일순간 놀란 디르크가 벌떡 일어났다.
“아델!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디르크의 무릎에 밀린 테이블이 흔들리며 홍차가 쏟아졌다. 출렁거리던 찻잔 속 홍차를 주시하던 새파란 눈이 서서히 아델에게 닿았다.
“왜 그래야 할까.”
“그 일 때문에 저희 가문을 증오하시잖아요. 이곳에 온 직후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지금도 여전하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비아누트는 당장은 이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아델의 입장이 퍽 만족스러울 뿐이다.
“증오는 자원이 들지 않지.”
식은땀을 닦은 디르크가 아델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델, 회임해서 그런지 지금 너무 극단적으로 겁을 먹었어. 너와 네 아이에게는 아무 문제없을 거야. 다 잘될 테니 전하께 실언이었다고 말씀드려. 응?”
“아버지가 나를 스테…. 아니 조만간 누구에게든 시집보내버릴 거야. 도망쳤다가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어 우릴 죽이면?”
아델의 얘기가 가능성 있는 건지 디르크는 말을 흐렸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정말 그렇게까지 하실 리가….”
비아누트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남매를 지켜봤다. 그러다 전 대공 발데마르가 새겨진 금화를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내일 새벽, 바이렌하그 항만에 아레하로 가는 배가 뜰 것이다. 남매가 지낼 저택과 돈은 그가 친히 지불할 테니 결정만 하면 될 일이다.
“아델, 쿠엔틴에게 금화를 전해. 아레하로 보내 줄 거야.”
그때 초조한 기색의 아델이 소파 테이블로 손을 뻗어 금화를 낚아챘다. 거래는 그렇게 끝났다.
다음 날까지 가짜 율리아나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휴일 저녁마다 수련하거나 초상화를 그렸던 그는 창가를 떠나지 못했다.
조금 전 디르크의 부친 헥토르 타릴루치에게서 석연찮은 서신이 들어왔다. 지금껏 조심스러웠던 기조를 바꿔 혼약하겠다고 나섰다. 가짜 율리아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아직 디르크가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바이렌하그에서 그랑디아까지 여섯 시간이 걸린다. 베아트릭스 빈젤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 베아트릭스는 헥토르에게 무슨 얘기를 전한 걸까.
지난달까지만 해도 황량했던 정원이 녹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계절이 바뀌었다.
봄. 그 역시 봄을 좋아했다. 고된 행군에도 동사자가 없고, 손발이 동상으로 떨어져 나갈 일도 없는 전쟁의 계절.
이맘때쯤 피어난 꽃을 보고 그는 영지 확장을 계획했다. 그러나 오늘 그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생각들이 머물러 있었다. 봄 송이를 바라보는 가짜 율리아나의 얼굴, 담담한 미소, 위태로운 숨소리. 그리고 타릴루치의 미심쩍은 움직임 같은 것들이.
출처를 알 수 없는 갈증과 불안이 치밀었다. 다만 그녀를 안으면, 아니 당장은 얼굴을 보는 정도로도 해소가 될 것 같았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브람의 노크가 울렸다.
“전하, 안에 계시지요? 브람입니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들어와.”
명이 떨어지자 문을 연 브람은 기름 램프를 손목을 건 채 들어왔다.
“다름이 아니오라 율리아나가 아가씨께서 드디어 벨린을 부르셨습니다. 어제오늘 몸살을 앓으셨다고 합니다.”
비아누트는 눈매를 지그시 좁혔다. 아팠다고. 디르크의 성이 타릴루치라는 걸 알고 나서 갑자기?
그가 움직일 기색을 보였다. 브람이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저… 전하, 송구합니다만 아가씨께서는 디크르 님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벨린에게 물어보니 어젯밤에도 똑같이 요청하셨다고 하더군요. 디르크 님과 아델 님이 심각하게 얘기 중이라는 소식에 만나지는 못하셨지만….”
“…….”
“아가씨께서 바이렌하그에 타릴루치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냐고 물으시고는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새벽에 종종 흐느끼는 소리와 노랫소리 같은 게 들렸다고 하는데…. 혹시 타릴루치 가문에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신 걸까요?”
그때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빛이 무색하게도, 비아누트의 얼굴은 더없이 어두웠다.
“무슨 노랫소리.”
“익숙하지 않은 노래였고 자장가 같았다고 합니다.”
그는 가짜 여동생이 불렀던 베네딕트의 자장가를 떠올렸다. 기억 속 소녀의 목소리가 왜인지 겹쳐 들리는 듯했다.
“있잖아, 나…. 죽지 않을 거야.”
“나, 나는 정말로 죽지 않을 거야. 다시 꽃밭을 꾸밀 거고, 강아지와 뛰어놀 거야. 어른이 되면 멋진 사내와 혼인해서 세쌍둥이를 낳을 거야. 나는, 나는…. …죽을 수 없어.”
그렇게 다짐했던 소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검으로 나타났다. 주검이 되었으니 죽은 게 맞았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손은 책상 위의 양피지를 불안정하게 매만졌다. 갈색 끝단이 허연 속살을 내보이며 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드득 끊어져 나갔다.
덧없는 정적 속에서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리즈 베네딕트는, 죽었지.”
“예? 예….”
“어떻게.”
갑작스러운 질문에 브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함께 주검을 보았음에도 제 주인은 종종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려 했다.
무감각한 얼굴 속에 가려져 있던 미련이 드러날 때면 브람은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소녀의 주검을 바라보지도 못하던 그 찰나에 그가 계속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브람이 하얀색 상의 끝단을 초조하게 매만졌다.
“그게…. 화마에 휩싸이셔서 새카맣게….”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면 안정적으로 가라앉곤 했던 숨소리가 여전히 위태로웠다.
“그래. 새카맣게. 얼굴까지.”
그는 거대한 탑에 작게 난 창문으로 소녀의 두 눈만을 보아왔다. 그조차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주검이 그녀가 맞는 것 같냐는 질문에 긍정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쌓여 간 의혹이 뒤늦게 불어났다. 잡역부 마리아는 단지 천민일까. 회색 머리칼과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건 단지 우연인가.
타릴루치 남매의 이름을 듣고 동요한 이유는? 베네딕트의 자장가는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입에서 늘 쓴맛을 내던 이름을 천천히 뱉어 보았다. 마리아…. 마리아. 네 본명은 뭘까. 그 이름을 내가 알고 있을까.
설마, 하는 의혹에 그는 낯설게도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의 목을 겨눴던 검의 날이 되돌아오는 듯했으므로.
아름다운 지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그리즈는 하루 내내 창밖을 무력하게 바라보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금방 어둠이 쏟아져 내렸다.
구원처럼 쏟아지는 달빛을 보면서도 불안함은 여전했다. 만약 베아트릭스 빈젤이 그랑디아의 공주를 알아봤다면…? 그런 가정만으로도 그리즈는 숨이 멎는 착각을 느꼈다. 타릴루치가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신을 수없이 원망했다. 하루살이 목숨이 뭐라고 이런 장난을 하시는지…. 원망하고,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다시 원망을 반복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다음 날 저녁.
지난 11년 동안 타릴루치 가문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할지 상상해 왔다. 처음에는 차례차례 참수하기로 했지만 잡역부로 고생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참수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온몸을 천천히 찢어서 고통을 새겨 주려 했다. 아니, 그걸로도 부족할 것 같아서 뜨거운 물에 던져 넣고 참회의 울부짖음을 듣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상상 속에서는 수만 번도 넘게 죽여 왔던 가해자들을 보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겁먹은 개처럼 후들후들 떨면서, 마차에 오르는 빈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순간이 가장 부끄러웠고 분했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디르크와 아델에게 해코지하는 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원수의 가문이라는 걸 알지만 디르크와 아델은 너무 어렸으니 상관없지 않냐고 자문했다.
그리고 죄를 지은 건 타릴루치라는 걸 알면서도 가장 가까웠던 사람을 원망했다. 어머니, 엄마, 엄마…. 왜 나를 이리도 미련하게 낳으셔서…. 이런 내게 어째서 천 근의 짐을 남기셨는지….
당연하게 가슴 아파하며 사과하고 위로해 줬을 어머니는 이 땅에 없다. 그렇게 만든 타릴루치에게 사죄받아야만 했다. 참수당한 부모님, 굶어 죽은 형제들, 찢겨 죽은 충신들을 위해서.
그들의 비참한 죽음을 내내 머릿속에 새겼다. 미적지근했던 피가 좀 들끓는 것 같았다.
이제 냉철해져야 했다. 목숨은 하나고 복수의 방법은 많았다. 타릴루치 가문 일원이 아주 가까이 있으니 그들을 이용해서 그랑디아 성에 입성한다면?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봐 왔던 배신자 마할 타릴루치 왕이라면 그리즈 베네딕트의 얼굴을 알아볼지 모르지 않나.
무엇도 결정하지 못한 채 급하게 목욕부터 했다. 목욕할 때는 괜찮았는데 나오면서 현기증으로 머리가 핑 돌았다. 제대로 잠자지 않은 까닭이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벨린이 수프를 가져다줬다. 하지만 그리즈는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타릴루치와 바이렌하그가 얼마나 긴밀한 사이일까. 혼담을 나눌 정도면…. 이곳 기사들의 검에도 베네딕트의 피가 스며들어있을까.
그리즈는 뜨거워지려는 눈가를 손등으로 눌렀다.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직접 묻거나 보는 것 외에는…. 대공의 수집방 그림 안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을까.
벨린에게 대공을 만나기 전에, 머지않아 떠날 디르크부터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랑디아의 상황을 먼저 물어보고 싶었다. 그 후에는 타릴루치에 위협이 되는 적대 세력이 있는지 묻기로 했다. 요하네스를 만난 후에 그 세력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얼마 동안이나 초조하게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차갑게 식은 손을 주무르며 심호흡하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브람이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벨린 대신 온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벨린 대신…? 벨린은 어디 있어?”
브람은 질문을 듣지 못할 정도로 생각 많은 얼굴로 앞장섰다. 뒤늦게 그리즈가 브람을 따라나섰다. 벨린에게 부탁했는데 어째서 브람이 온 걸까.
정신없이 걷다 보니 2층, 대공의 수집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왜 이곳에…. 그리즈가 핑 도는 머리를 가누는 사이 브람이 방문을 노크하고는 공손히 말했다.
“율리아나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그러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며 비켜섰다. 끌어 당겨지듯 들어간 그리즈는 왼쪽 벽을 바라보았다. 장막으로 덮인 그림이 걸려 있다. 이 방에서 가장 어두운 색을 띠지만 바로 시선이 가는 게 신기했다.
이내 고개 숙였다. 바닥에는 창유리로 들어온 달빛이 녹아들고 있었고, 하얀 식탁보로 싸인 테이블 쪽에서는 갓 만든 음식 향기가 났다.
음식 향기라니…. 유독 찬란했던 햇살 아래서 빛나던 대공 비아누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주머니 주세요.”
“먹으면 줄게.”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어떤 사내보다 다부진 실루엣이 창가에 서서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리아.”
등 뒤에서 방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그가 비아누트라는 걸 깨달은 그리즈는 내쉬는 호흡을 죽였다. 몸 밖으로 심장이 튀어 나가려 했다.
“대, 대공 전하.”
요청이 잘못 전달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창문 너머 마차 대기소를 내다봤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흐릿한 윤곽 속에서 디르크의 붉은색 마차를 찾기는 힘들었다.
“디르크는 떠났나요? 아니면 언제 떠나기로 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창가에 서 있던 그가 창틀에 비스듬히 기대며 시야를 가렸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시선을 뺏은 것일지도 몰랐다.
“내일 오전에 떠날 거야.”
조각상처럼 미끈한 입술이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그리즈가 초조함을 삼키며 시선을 떨궜을 때였다.
“오늘 브람, 몇 번 만났지.”
“브, 브람이요?”
브람…? 눈을 어지러이 굴리다가 그를 바라봤다. 디르크를 찾는 이유부터 물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브람은 왜….
얼굴을 본 건 한 번이지만 브람의 노크 소리에 숨죽인 건 네 번이었다. 오전에 식사를 거른 이유를 묻는 목소리 한 번, 아픈 곳을 묻기도 했고, 불편한 게 있으면 알려달라고도 했었다.
그게 이 사내의 지시 때문이라는 걸 짐작하면서도 대답하지 못했다. 베아트릭스가 알아봤을까. 모른 채로 떠났을까. 그걸 가늠해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브람을 돌려보내며 마음 편치 않았다는 건 자신할 수 있었다. 겁쟁이처럼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서 숨죽이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침대 밖에 낯선 신발이 있는지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날의 악몽에 시달려, 무력한 아홉 살로 퇴행한 자신을 돌아보고…. 그러는 사이 브람이 네 번이나 왔다 갔던 것인데….
“브람… 네 번 찾아왔었어요. 송구합니다….”
그는 의구심을 드러낼 뿐, 평소처럼 몰아붙이지 않았다.
“정확히 아는군. 앓았다면서.”
“정, 정신은 있었어요.”
그뿐이었다. 얼마나 앓았던 건지, 앓기는 했는지 가늠하는 게 그의 목적이었던 것 같았다.
그가 테이블 앞으로 걸어왔다. 기품 있던 걸음걸이가 왜인지 미묘하게 흔들렸다.
“식사할 정신도 있겠지.”
그리즈는 완벽하게 차려진 식탁을 봤다. 그의 시선은 힘이라고는 없는 손목에 닿아 있었다.
오만한 분위기는 여전해도 앉으라는 협박은 없었다. 당장은 그거면 충분했다. 그의 가문이 타릴루치의 반정에 동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전에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식사부터 한다면 그에게 또 휘말릴 것 같았다. 그가 원한다면 어차피 식사하게 될 테니 그녀도 원하는 걸 요청하고 싶었다.
장막에 가려진 그림을 보길 원했다. 지금껏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기를 수백 번.
“왜….”
“…….”
“장난 그만해. 그리즈.”
나른한 저음이 울릴 때면 하염없이 울고 싶어지곤 했다. 아홉 살 이후로 줄곧 달아나기 바빴던 몸을 붙잡는 것 같아서. 그와 약혼한 적 없으므로 그럴 리는 없을 터인데….
“저… 장막 뒤의 그림을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새카만 어둠이 내릴수록 달빛이 밝아진다. 미끈한 사내의 얼굴이 창백한 빛을 띠었다.
그는 그 상태로 그리즈의 눈동자를 훑기만 했다. 한 번, 또 한 번. 그러다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훑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래, 보여 줄게.”
“…….”
“알지. 보고 도망가면,”
말이 끝나기 전에 그리즈가 고갤 끄덕였다.
“네. …죽는 거요. 이번에는 도망갈 생각 없어요.”
그는 묘하게 흔들리는 얼굴로 말을 정정했다.
“아니. 그냥, 막을 거야.”
그러곤 의자 등받이를 쓱 훑고는 그림 쪽으로 걸어갔다. 주의력을 잃은 그의 다리가 흔들의자를 툭 쳤다. 끼익, 끼익. 불안정한 소음을 들으며 그리즈가 뒤따랐다.
베일에 싸인 그림 앞에 두 개의 그림자가 생겼다. 기대감에 찬 것은 그녀의 것. 심연에 찬 것은 사내의 것이었다.
커다란 손이 장막을 쥐었다. 손등을 바라보곤 했던 그녀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장막에 가려둘 만큼 소중한 그림이 무엇일지 상상해 보았다.
그의 첫사랑이 이 방의 주인이라 했으니 그녀의 초상화가 있을 것 같았다. 아름다운 여인을 상상했다. 봄꽃처럼. 별처럼.
그때 들쭉날쭉 구겨진 장막이 스르륵 떨어졌다.
끼익. 끼익. 흔들의자의 그림자가 벽에서 일렁인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그녀는 숨을 꾹 참았다. 그리고 그림을 직시하며 머릿속으로는 햇살 같은 여인을 그렸다.
그런데….
“이게, 이게 무엇….”
검은색과 회색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광경이 보였다. 매캐한 탄내가 미약하게나마 함께.
그을음이 심해서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치열한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 전쟁 통에서 찾은 보물. 아니면 전리품.
“저, 전하, 이것이, 무슨….”
헛것을 본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때 그가 촛대의 초를 들고 그림 가까이에 댔다.
신경을 긁는 의자 소리 때문에 무엇도 볼 수 없었다. 집중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시야가 한 단계 확 밝아졌다.
초상화인 것 같았다. 뜨거운 곳에 있었는지, 얼굴의 물감 곳곳이 흘러내려 기괴함을 자아냈다. 그 안에서 갸름한 얼굴 윤곽과 회색 머리칼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왜인지 낯설지 않았다. 특히 저 미소 지은 입가의 모양….
그때 그리즈의 눈앞에 그랑디아의 풍경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아침, 밤, 새벽, 그리고 종종 초상화를 그리던 정오. 순간 차가워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림에 진한 갈색 자국 같은 게 튀어 있었다. 그게 핏자국이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입가를 틀어막았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쾅 내리쳤다. 번쩍! 피의 새벽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불타는 왕실의 비명이 사정없이 터진다. 역한 피비린내가 격렬히 차올라 숨통을 조였다. 눈물 가득한 시녀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나는 것 같기도 했다. 공황으로 미친 듯이 흔들리던 목소리마저도.
“하아, 하아, 공, 공주님! 공주님, 쉿, 쉿! 소리 내지 마셔요. 그리고 부디, 부디… 살아남으셔요.”
“아아…. 하아, 아아….”
기억에 압도된 그녀는 혼란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겁에 질린 건 그녀인데 거칠게 숨 쉬는 건 그였다.
“저 그림은, 그림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
왜 저런 그림을. 왜 저렇게 흉측한 그림을?
끼익, 끼익. 의자 소리가 신경을 갈가리 찢었다. 정신이 꿈결처럼 아득해진다. 사내의 숨소리만 거칠게 닥쳐왔다.
그때 그의 손이 그리즈의 얼굴께로 서서히 올라왔다. 차갑게 식은 손등이 뺨을 문질렀다. 이내 축축한 손바닥이 입과 코를 가렸다. 그는 오롯이 드러난 눈매를 정신없이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새파란 눈동자가 확신에 차 빛나기 시작했다. 은하수를 자처한 별들이 포화 상태를 이룬 것 같았다. 그 빛들이 치열하게 싸우다가 격렬하게 폭발했다.
광기였다. 여인을 궁지로 몰아가는 그가 오히려 궁지에 몰린다. 그녀가 동요할수록 절망과 희열로 자멸해 갔다.
그 순간 그의 혼란이 넝쿨처럼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내 벗어날 수 없도록 그녀를 칭칭 감았다.
그녀는 내쉬는 숨이 손바닥에 부딪혀 되돌아오자 거칠게 헐떡였다. 질식할 것 같았다. 눈앞이 핑 돌며 의식이 흐려졌다.
도망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소리 내어 울고 싶은 밤이었다.
새벽 2시. 비아누트는 자신의 방 침대에 여인을 들였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녀가 쓰러졌고, 그는 의사를 불렀다. 허벅지에 검날이 박혔을 때도 끈으로 무심히 묶고 기사단을 지휘했던 사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사에게 질문이 많아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안색이 창백해졌다.
의사는 그녀가 단지 피로와 충격으로 의식을 잃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실인지, 그가 원하는 답을 해 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체온이 낮다는 말에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그는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기대었다. 테이블에 한쪽 팔을 걸치고서 바닥으로 다리를 길게 뻗었다. 근육으로 굴곡진 상체가 미끈하게 빛났다.
어두운 눈동자는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깊게 잠자는 중이다. 회색 머리칼이 침대에 무방비하게 퍼져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는 묘한 불안감 느꼈다. 미동 없이 자는 모습이 꼭 죽은 것만 같아서.
그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듯 그녀가 크게 숨 쉬었다. 그러나 작은 몸은 여전히 웅크린 채였다. 비아누트는 그게 그녀가 휴식하기에 가장 익숙한 자세라는 걸 알았다. 매음굴에서부터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이 그 정도인 것이다.
침대가 넓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면 깨겠지. 아니, 차라리 깨울까.
그러다 피로로 물든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몇 시간째 같은 생각을 반복하다니.
이렇게 앉아 있는 매분 매초마다 피가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의 존재를 알아 가며 느꼈던 위기감이, 이 순간을 먼저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짧게 탄식한 그는 초상화의 장막을 걷던 찰나를 상기했다. 어떤 그림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불탄 검은색 초상화였다.
그런데 그걸 본 그녀의 눈은 일순간 혼란으로 물들어갔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그동안 불현듯 느꼈던 의혹들을 되짚었다. 모든 정황이 하나의 답을 가리키는 듯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 그녀가 베네딕트의 자장가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가 타릴루치라는 성을 듣고 달아난 이유, 디르크의 부친이 그녀를 만나고 싶다며 서신을 보낸 이유까지.
그 순간 그는 천국 같은 지옥을 보았다. 메말랐던 피가 급격히 솟구쳤고, 멈췄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체온이 뜨거워졌고, 몸 곳곳이 단단해졌다. 죽었던 몸이 살아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시였다. 그렇게 그려 왔던 여인이 결국 멸시했던 마리아였었다는 걸 느끼자 서서히 질식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의 눈동자가 여전히 그녀를 주시했다. 노란 불빛을 머금은 피부가 감각을 자극한다. 그녀는 그가 더 이상 헤매지 않도록 지옥으로 찾아온 천사 같기도 했다. 그걸 느끼자 안도감이 파편처럼 몸에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처연하게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훑어봤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 가는데 더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입술을 배회하던 손이 장골 능선 아래를 쓸었다. 딱딱하게 발기한 기둥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며칠 전부터 이 상태였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몸과 마음이 전혀 다른 걸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리키는 것은 다름없이 그녀.
창녀 마리아. 처음의 그는 그렇게 불렀다. 모든 순간의 멸시와 비난, 협박, 희롱을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로 희석할 수 있었으므로.
유독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도 그 수식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현혹당했고, 거기에 응했다. 그뿐.
탁해진 그의 눈이 그녀의 종아리를 훑어보았다. 반들거리는 흉터가 이제 묻는 것 같았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아물어서 상흔으로 변할 동안 너는 뭘 했지.
감히, 네가 비난을. 작은 몸에 불안과 두려움이 한없이 담기는 광경을 그저 신기하게 봤던 네가. 이제 와서.
그녀에게 겨눴던 검 끝이 기어코 돌아왔다. 차라리 바라 왔던 일인 듯 그는 의자 등받이로 고개를 기댔다. 목덜미로 들이닥치는 검 끝을 상상했다. 그러나 정작 서슬 퍼런 날이 꽂힌 건 뼈마디 사이사이였다.
그는 치미는 통증으로 낮게 신음하며 눈 감았다. 지난 11년간 멈춰 있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