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32)

***

그는 몇 시간 넘게 수갑을 풀어 주지 않았다. 옆방에서 누군가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보내 주었다.

새벽 5시쯤이었다. 이렇게 일찍 밖으로 나갈 만한 손님이 있을까.

어쩌면 스테판이 옆방에서 감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설마 밤잠을 마다하고 염탐할 정도로 집요할까. 밤새 비가 왔던 까닭에 어떤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을 텐데….

내내 가죽에 쓸렸던 손목이 아릿했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자국을 만지며 계단을 내려와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쯤 그가 주었던 딸기 사탕을 그 방에 두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놔두고 나온 물건을 확인했을 때는 보이지 않아서 챙긴 줄로만 알았는데…. 날이 밝으면 다시 가 볼까.

끼익. 방문을 열자 놀랍게도 테이블 앞에 벨린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방문을 닫은 그리즈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사이 벨린이 가슴께를 매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아가씨… 드디어 오셨군요.”

그리즈는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드레스 매무새를 자연스레 정리했다. 상체에 살집이 없는 덕분에 코르셋을 입지 않아서 어찌나 다행인지…. 어제 급한 대로 수선했음에도 대공이 다시 벗겨 내어 실밥이 느슨해진 드레스의 가슴 부근을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습관적으로 테이블을 정리한 벨린이 일어나 다가왔다.

“그야… 아가씨께서 보이지 않아서 걱정되는 마음에…. 마침 잠도 오지 않아서 아침까지 기다려 보려 했었죠.”

그러곤 밤을 지새워 퀭해진 자신의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어제 아가씨를 찾으러 4층 손님실까지 올라갔었거든요. 후작 각하께서 계시기에 여쭤 봤더니 아가씨께서 부군 되실 분과 대화 중이시라고 하셨고… 저는 그 점이 좀 우려스러웠어요.”

“아….”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아무래도 산속에서 살던 아가씨가 연회에 들떠서 사내와 밤을 보냈을까 봐 노심초사하던 눈치였다. 이미 혼담을 주고받는 사이이니 큰일이야 나지 않겠지만 법도는 지켜야 하니까.

“응,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리즈는 벨린을 안심시키듯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해 줘서 든든해, 벨린.”

피로를 풀 겸 목욕하고서 돌아왔다. 그러곤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어젯밤의 일을 스테판에게는 어떻게 말하지.

어떻게 해서든 이번 일을 무사히 넘겨도 스테판은 계속 도를 넘어서는 요구를 해 올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야금야금 계획을 이룰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대공은 스테판의 계획을 그다지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대공이 관심 갖지 않는다면 다른 누구에게라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

망설이던 그리즈는 청소하느라 어수선한 틈을 타 1층 서재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책상에 놓인 서신용 양피지를 가져왔다.

직접 말할 수 없다면 글로 적어서라도 스테판의 야망을 알리고 싶었다. 기왕이면 스테판을 콕 찍어 밝히고 싶었지만 스테판이 적극적으로 항변에 나설 것 같았다.

철저하게 항변하는 만큼 그를 두둔하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랑디아에서 타릴루치 가문의 파벌이 생겨나는 과정을 지켜봤던 그리즈는 예언처럼 에둘러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어둠이 짙어 방심하는 밤, 율리아나의 혼인이 불씨가 되어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혼인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볼 자를 주시하라.

이걸 본 사람들은 당장은 헛소리라고 생각하며 쪽지를 쓴 범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면서도 율리아나의 혼인으로 가장 크게 이득 볼 사람을 은연중에 추리해 보겠지. 그들이 떠올린 사람이 스테판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양피지를 둘둘 말아 노끈을 묶었다. 그 후 접객실 서랍장에 넣어 두고 돌아왔다. 마침 많은 손님이 접객실을 드나든 직후였다. 하녀들이 빈번하게 청소하는 곳이기도 하니 비교적 빨리 발견될 것 같았다. 제발 소문이 널리 퍼져 할머니와 대공의 귀에까지 들어가기를 바랐다.

스테판이 쪽지의 주인을 찾아 나설지도 모르고, 대놓고 그녀를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죽이지는 못할 터다. 어서 요하네스를 만나 그랑디아의 정세를 듣고 타릴루치 가문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겠지….

후덜덜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침대에 누웠다. 그나저나 디르크는 괜찮을까. 석상실에서는 가짜 여동생이 누구에게나 헤프게 굴어도 상관하지 않을 것처럼 말해 놓고 잠재울 줄이야….

지난 10년간 미쳐 돌아가는 줄 알았던 매음굴 속의 세상이 퍽 정상 범주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그때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주먹질을 당하는 게 두려웠을 뿐이었고, 손님들과 포주의 눈치만 보며 일하면 됐었는데….

이곳에 온 후로는 새카만 숲길을 매일매일 헤매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무리 헤매도 비슷한 자리에 와 있다는 게 공포로 다가왔다. 계속 발버둥 치면 빠져나갈 수 있게 될까.

답답함을 느끼다 무심코 테이블을 바라봤다. 예전에 대공이 선물해 줬던 검은 나비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박제 나비…. 그가 하늘을 비행할 기회를 빼앗고 액자 안에 가둬 버린 나비. 그리고 그녀의 곁에 남아 영원히 아름다움을 뽐내게끔 저주를 걸었다.

저 액자를 볼 때면 잔인한 일을 저지른 그에게 치를 떨었지만 때로는 고맙기도 했다. 평생 눈으로만 담았을 선물을 손에 쥐여 주어서. 보고 싶을 때면 볼 수 있게 되었지 않나.

생각하던 그리즈가 애타게 한숨 쉬었다. 그리고 바랐다. 만약 앞으로도 그를 피하지 못하고 갇히게 된다면 나 역시 자각하지 못하고 죽어 가게 되기를.

박제 나비가 살아나 액자 밖으로 나오는 꿈을 꿨다.

놀란 것도 잠시, 그리즈가 나비를 애타게 바라보다가 창문을 열어 주었다. 다시 나비가 아름다운 바이렌하그를 누비길 바랐다. 꽃구경을 하고 햇살을 즐기며 마음껏 생을 즐기다가 천국으로 떠나기를….

그러나 나비는 창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리즈의 곁을 맴돌았다. 마치 그리즈 베네딕트가 있는 컴컴한 방이 최고의 세상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가 침대에 눕자 나비가 베개에 내려앉았다. 안도감을 느낀 그리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스한 온기가 내내 곁을 지켜주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깼을 때는 어느덧 오전 9시였다. 벨린이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나타났다.

피곤한 얼굴을 보니 미안함이 앞섰다. 어젯밤, 기다리지 말라고 미리 말해 줄 것을.

으레 뒤척이던 습관을 버리고 단번에 일어나 간단히 세면을 마쳤다. 점심 식사를 마친 손님들을 배웅해야 하기에 부랴부랴 준비하니 어느덧 10시가 되어 있었다.

어제 연회에 대한 얘기로 간단히 담소를 나눴다. 그러다 대화가 뚝 끊길 무렵 그리즈가 흑경으로 벨린을 비추어 보며 물었다.

“저택에는 별일 없니?”

새벽에 접객실 서랍장에 넣어 뒀던 쪽지의 행방이 궁금했던 까닭이었다. 하녀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하는 곳이니 이미 쪽지를 발견했을 터인데…. 아직 벨린의 귀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은 걸까.

“손님을 많이 모셨으니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둘러댄 얘기를 듣고 벨린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옆쪽 머리를 땋으며 말했다.

“소란이라기보다는 좋은 일이 있어요. 마님께서 예전만큼 건강을 회복하신 것 같아요.”

“정말?”

“네, 부족한 체력 때문에 기도를 버거워하셨었지만 이제는 꼬박꼬박 기도실에서 기도하시거든요. 모두 아가씨께서 돌아오신 덕분입니다.”

그나마 할머니의 건강만큼은 제대로 회복되고 있구나…. 그리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마쳤을 때쯤 디르크가 찾아왔다. 뒷정리를 마친 벨린이 방을 나서며 디르크를 안으로 들였다.

“그럼 저는 밖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디르크를 찾아가 괜찮은지 살펴보려던 참이었다. 테이블 앞에 선 그녀가 드레스의 소맷단으로 수갑 자국을 가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디르크… 안 그래도 만나러 가려고 했어. 언제 일어났니?”

다행히 수면초에 부작용은 없었는지 숙면한 것처럼 혈색이 좋아 보였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디르크가 테이블 앞으로 다가와 대답했다.

“두 시간 전쯤에 정신 차린 것 같아. 브람이 깨우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잤을 거야.”

대공이 브람을 통해 상황을 수습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대공과 공범이 된 기분을 떨쳐 내려 그리즈가 창밖을 보자 디르크가 그 시선을 좇으며 말했다.

“어제 미안했어. 왈츠 출 때 너무 긴장해서 그랬던 건지 그냥 기절한 듯 잠들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니. 네 탓이 아닌데.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문 그녀가 작게 대답했다.

“아냐. 미안해할 필요 없어, 디르크.”

밤새도록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디르크는 빗물을 머금어 질퍽해진 땅의 상태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내일 중으로 출발하려 해. 예정은 오늘이었는데 아델의 몸 상태도 좋지 않고 땅도 질퍽거릴 것 같아서 좀 더 기다려 보려고.”

“…….”

“내 제안, 생각은 해 봤니?”

함께 도피하거나, 그의 본가로 들어가는 제안에 대해서 묻는 것이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대답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즈가 처연히 고개를 떨궜다.

“나는 갈 수 없을 것 같아.”

가능하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려 주고 싶었다. 가짜인 나는 네게 상처만 줄 거라고. 네가 가진 짐에 더 큰 짐을 얹게 될 거라고….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말이었기에 에둘러대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입술을 앙다문 채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보며 디르크는 애써 편히 미소 지었다.

“율리,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가 그렇게 선택했다면 이해할 수 있어.”

눈부시게 밝은 태양이 대지를 비췄다. 그러자 물웅덩이에 반사된 빛이 붉은 눈동자를 더 밝게 빛냈다.

디르크가 그 모습을 묘하게 응시하며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녀는 눈가를 비비는 척 다급히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그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노르드발츠에서 지내는 스승의 집에서 신세를 지려고 해. 장소를 옮길 때마다 편지할게.”

그리고 창문 쪽으로 향했던 몸을 완전히 틀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붉게 상기된 뺨과 입술 그리고 진짜 율리아나와 비슷한 듯 다른 눈동자….

조심스레 손으로 뺨께를 만지려 하다가, 곤란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천천히 뒷짐을 졌다. 그러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얀 미소를 내보였다.

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음이 바뀌면 바로 달려와도 돼, 율리.”

율리아나와 소꿉친구였다면 눈동자 색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너무 오래된 기억이기에 섣불리 단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일까.

그를 곁눈질하던 그리즈가 비로소 그를 정면으로 올려다보았다. 상냥함을 머금은 초록색 눈동자가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디르크… 나는 네게 걱정만 끼쳤는데 어째서 이리도 잘해 주니.”

정말 오랜 세월 이어진 고통을 멎게 해 줄 천사 같았다. 그가 내민 손을 잡는다면 한순간이라도 마음 편히 숨 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왜 눈앞에는 혼란을 몰고 온 그 사내가 아른거릴까.

생각할수록 의문만이 강해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디르크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네가 좋거든.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 완벽히 확신할 수 있었어.”

어려운 얘기였다.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니…. 그리즈는 유독 빛나는 디르크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디르크를 이성으로 바라본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순수한 애정을 받는 진짜 율리아나가 조금은 부러웠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의 애정을 훔친 듯한 기분에 죄책감을 느끼며 고개 숙였다. 이상하게도 눈앞에서 대공 비아누트가 아른거렸다.

자꾸 그를 떠올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면 좋아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들려왔다. 이유를 찾아야 했다. 다급히 기억을 더듬는 사이 디르크의 차분한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그런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되니?”

붉은 눈을 불안정하게 굴리던 그녀가 뒤늦게 반문했다.

“부탁?”

그는 좋아한다는 말보다 어려운 얘기를 꺼내려는 듯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야. 근거리에서 너와 만나며 관계를 다지겠다는 핑계로 본가에 가지 않고 있어. 회임한 아델을 데리고 도피할 방법과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시간이 필요하거든.”

“아….”

“장소를 결정지을 때까지만 우리가 여전히 혼인을 전제로 만나는 것처럼 본가에 알려도 되니?”

그녀 역시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혼인이 어긋났다는 걸 알게 되면 스테판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나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디르크.”

햇살이 점점 더 강렬하게 빛나며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렸다. 티아는 늦잠에서 깨어 나른히 기지개를 켰건만 그녀는 여전히 긴장한 상태였다.

“저… 사실 나도 부탁이 있어.”

스테판이 디르크에게 어젯밤의 일을 물어볼 것 같아 불안하던 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부탁하는 게 어렵지만 가만히 앉아 해코지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숙부께서 그… 우리가 어젯밤에 더 친밀한 사이로 진전하길 바랐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밝은 색 눈썹을 위로 올린 디르크가 뒤늦게 입술을 열었다.

“친밀한 사이? 그러니까 그… 그…. 그래서 방으로 가게 한 거야?”

그러더니 손으로 목 뒤를 주무르며 귀 끝을 붉혔다. 그가 이해하기 쉽도록 더 설명하려던 그리즈는 입술을 닫았고, 디르크는 당혹감을 드러냈다.

“미안해. 네가 곤란한 상황인 줄도 모르고 잠들어 버렸어.”

“아냐. 나는 숙부께서 이 혼인을 꼭 성사시키고 싶어 하신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잠시 의아해하던 디르크가 미간을 좁히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 우리 부모님이라면 스테판에게도 따로 지참금을 준다고 하셨을 거야. 바이렌하그를 유독 좋아하시거든. 물론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부모님을 속물적이라고 표현했던 디르크의 말이 맞다면 아마도 그들은 바이렌하그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디르크 역시 내심 짐작하고 있기에 적극적으로 혼인하려 하지 않는 게 아닐까.

“숙부께 우리가 친밀한 사이가 됐다고 말해 줄 수 있겠니? 그게 곤란하다면 술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라도 해 주면 정말 좋을 것 같아. 네가 괜찮다면.”

그는 그녀가 스테판에게 직접 상황을 전하지 않으려 하는 게 의아한 눈치였다. 그러다 피가 쏠린 귀 끝이 간지러운지 검지와 엄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할게. 그러면 너도 편해지는 거지?”

그러며 순수하게 웃는 그에게 대체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고마워… 디르크.”

디르크는 아델의 식사를 도와야겠다며 방을 나섰다. 할머니의 부름에 베일을 쓰고 연회장으로 향한 그리즈는 귀빈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감사 인사를 남겼다.

상석에 고고히 앉아 식사하는 대공과 스테판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아름다운 것들을 상상하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꽃, 나비, 새벽 그리고…. 마지막에 대공 비아누트가 떠올랐지만 가까스로 상상에서 지우며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고 돌아오니 어느덧 11시.

창가 소파에 앉아 한숨 돌리는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쪽 복도는 할머니와 그녀만이 쓰는 공간이라 하인들이 아니면 지날 리가 없는데 누굴까.

스테판이 오고 있다는 생각에 예민해진 상태로 숨죽였다. 그때 발소리가 코앞에서 멈췄고 곧장 노크가 울렸다.

“아가씨, 브람입니다. 안에 계시는지요?”

최악은 아니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대공이 율리아나를 데려오라고 명했으니 브람이 온 게 아닐까. 그리즈가 진땀을 닦던 손수건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일어나 문을 한 뼘 열었다.

그새를 못 참고 티아가 탈출하려고 문틈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나무 바닥을 긁어 대며 안간힘을 쓰는 티아를 보던 브람이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아가씨의 건강을 걱정하시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티아가 틈새를 비집고 복도로 줄행랑쳤다. 당황한 그리즈가 문을 활짝 여는 순간 브람의 뒤에 서 있던 인영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율리아나.”

늘 자신의 영역으로 사람을 불러내던 그가 친히 행차한 거다. 벨린이라면 대공께서 여동생을 정말 아끼시기 시작한 것 같다며 좋아할 사안이었지만 그리즈는 그러지 못했다.

“대, 대공 전하.”

핏기가 사라진 손부터 숨기려 두 손을 겹쳐 아랫배에 올렸다. 그녀가 극도로 긴장하는 이유를 알 텐데도 모르는 척 그가 방으로 발 들였다. 그걸로 모자라 태연히 호칭을 정정하고 의자에 앉았다.

“오라버니.”

그녀는 치맛단을 살짝 들고 고개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와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오라버니.”

방문이 소리 없이 닫히자 그가 회색 털 망토 안에서 갈색 주머니를 꺼내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제 다급하게 옷을 챙겨 입기 바빠 놓고 나왔던 딸기 사탕 주머니였다.

자연스레 감사를 표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가 사탕 주머니를 브람에게 전하지 않고 직접 발걸음한 이유를 찾느라 바빴고, 대공이 동생을 걱정했다는 브람의 말도 여유를 잃게 했다.

어쩌면 처녀라는 사실이 그의 성정을 부드럽게 만든 걸지도 모르겠지만 헛된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 매음굴 출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마리아를 원했고, 지금까지도 서늘한 눈빛은 여전했으니 말이다.

“바쁘실 텐데 어찌 이곳까지….”

생각해 봐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에 직접 물었다. 그때 문득 아침에 디르크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네가 좋거든.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 완벽히 확신할 수 있었어.”

그때의 그녀는 자꾸 대공을 눈앞에 그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었고 자신의 감정을 어제보다 더 의심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대공만큼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은 그의 감정까지 의심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오신 이유를 알려 주세요.”

긴장한 기색을 억누르고 담담해진 목소리가 그의 뺨을 건드렸다. 그는 못마땅한 눈동자를 드러냈다.

“물건 찾아 주러.”

단지 그뿐인데 경계하는 모습이 너를 더 괴롭히고 싶게 만드는 걸 아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건드릴수록 재밌게 반응하는 장난감을 갖고 싶은 거라고. 그가 내비친 모든 호의는 보상일 뿐이라고.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테이블에 올려진 사탕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주머니를 지그시 눌러 가렸다.

“앉아.”

그러니까 주머니를 가져가려면 그가 원할 때까지 장난감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얘기 같았다. 이상하게도, 다른 귀족의 장난감이 되어 놀아나는 건 아프지 않아도 그의 장난감만큼은 되기 싫은 마음이 앞섰다.

그를 응시하는 눈에 원망이 어린 것도 같았다. 그저 담담하게 반응해야 그가 멈출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이 자꾸 선 밖을 넘어서려 했다.

“시, 싫… 싫어요.”

힘없이 의사를 표현했지만 사실은 정말 신물 나도록 싫었다. 위태로운 이 저택 생활과 내 것이 아닌 모든 것들 그리고 그녀의 처지를 비참하게 만드는 그의 드높은 신분도 싫었다.

때때로 애가 타들어 가며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그의 눈동자도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머니 주세요.”

정확히 원하는 걸 말했지만 작은 목소리 때문에 우습게 보일 것 같기도 했다. 하물며 이 저택으로 오지 못했다면 매음굴에서 구타당하면서 살았을 잡역부 따위가 기어코 저항심을 드러내다니….

불쾌해할 줄 알았던 그는 종전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다.

“앉으면.”

새파란 눈동자에 묘한 흥미가 다시금 감돈다. 아… 또 그를 즐겁게 만드는 중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을 때 브람이 노크 후에 방문을 열었다.

“주문하신 식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대공 전하.”

요리사들이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이 저택에 온 후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수석 요리사가 모자를 벗고 그에게 예를 갖췄다.

“이렇게 불러 주시어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그는 그리즈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브람이 그녀에게 부드럽게 제안했다.

“앉으시지요, 아가씨.”

뒤돌아보자 요리사 네 명이 고개 숙인 채 그녀가 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순간 당황한 그녀는 주머니를 얻지 못하고 그에게 강력히 의사를 드러내지도 못한 채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요리사가 디쉬 커버에 덮인 접시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애피타이저로 최고급 흰 밀가루를 숙성해 만든 밀빵을 준비했습니다.”

이내 장미로 화려하게 수놓인 티 포트와 찻잔을 테이블에 올렸다.

“차는 얼그레이 티로, 피로한 아가씨께서 비교적 익숙하게 드실 수 있게끔 준비하였습니다.”

브람이 허리 뒤에 꽂은 위생용 면포에 손을 문질러 닦고는 차를 따라 주기 시작했다. 요리사들은 요리의 온도를 확인하고, 부족한 건 없는지 살피며 식사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는 그게 오늘만큼은 반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수고했어. 모두 올려놓고 나가.”

그의 말이 끝나자 요리사들이 저마다 눈치를 살폈다. 대공이 오늘은 조용하게 식사하길 원한다는 점을 느낀 브람이 수석 요리사에게 음식의 설명만 부탁했다.

수석 요리사는 준비해 온 음식의 디쉬 커버를 하나씩 열며 설명을 시작했다.

“메인 요리는 신선한 허브를 조합하여 나흘간 숙성한 소고기 스테이크입니다. 사교 무대로 지친 아가씨의 체력을 보강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드 요리는 올리브 오일과 치즈를 곁들여 구운 치즈 정어리 구이입니다.”

“…….”

“사과식초로 맛을 낸 빨간 무절임입니다. 기름진 요리의 느끼함을 잡아 주는 데에 탁월하니 함께 곁들여 드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요리는….”

얘기를 가만히 듣던 그가 고상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끊었다.

“충분해.”

이후로도 테이블이 꽉 차도록 음식들이 올려졌다. 임무를 마친 하인들이 방을 나서자 그가 본색을 드러냈다.

“먹으면 줄게.”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저항은 물 건너갔고, 호소력도 잃었다는 걸 느낀 그리즈는 포크와 나이프를 집었다.

역시나 그가 턱을 괴고 유심히 바라보는 까닭에 맛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가 방까지 찾아와 암묵적으로 겁박하며 식사하게 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그때 수갑 자국이 붉게 남은 손목이 살짝 드러났다. 그녀는 오늘 아침부터 그랬던 것처럼 소매로 자국을 숨기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안 드시나요?”

“먹었어.”

“그럼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기다리고 계신 건가요?”

“그래.”

그가 가진 생각들을 맞혀야만 끝나는 스무고개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느덧 접시의 음식들을 비운 그녀가 포크를 내려놓고 입가심했을 때에야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베네딕트의 자장가.”

“네? 흡….”

“네게 알려 준 사람의 이름을 말해.”

미적지근하게 식은 홍차가 역류해 머리를 날카롭게 찔렀다. 당혹스럽게 기침하는 그녀에게 그가 냅킨을 여유롭게 건넸다.

그러곤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을 천천히 살펴본다. 그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떤 대답으로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 글쎄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이 저택에 왔을 때부터 같은 대답으로 일관하며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느꼈는지 그가 서늘하게 웃었다.

“내 앞에서 그렇게 말했던 사람은 모두 죽었어.”

이미 두 번이나 그에게 거짓을 고했고 그걸 토대로 그는 정보를 얻었다. 그의 시선이 주로 무심했던 이유는 남들보다 예리한 관찰력을 숨겨야 하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그가 종을 울렸고 하인들이 들어와 테이블을 정리했다. 방 안에 다시 둘만 남게 되자 의문이 깃든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훑어봤다.

살기 위해서라면 숨겨야만 하는 과거를 들여다보려 한다.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쿵쿵 울리는 심장께를 꾹 누르며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이제… 금화는 안 주실 건가요.”

그가 잡역부를 기어코 창녀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상기시켜서라도 관심을 돌리고 싶을 만큼 다급했다.

그러나 늘 그랬듯 후하게 금화 주머니를 여는 대신 그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낮게 물었다.

“이참에 직업 바꿀 생각인가?”

이번 저항이 제법 불쾌했는지 아랫입술을 느리게 물었다가 풀어 내리는 그가 보였다. 화제 전환은 성공했지만 분위기가 더욱 냉각되자 그녀는 테이블로 시선을 떨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갈등이 오간다. 이대로 잡역부로 살고 싶은 마음 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랑디아의 폐위된 공주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지켜 주겠다며 그녀를 넘기라고 했던 말이 자꾸 맴돌아 마음이 흔들리는 까닭이었다.

결정하기는 무척 쉬웠다. 대공 비아누트는 앞으로 다른 여인의 남편이 될 거고, 바이렌하그를 더 부강한 영지로 키울 거다. 타릴루치라는 적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잡역부 따위는 넘볼 수 없을 만큼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찬란한 모습으로 혼인을 지속할 것이다. 잡역부에게 그랬던 것처럼 브리튼 공주에게 키스하고, 몸을 만지고, 기분 좋은 소리를 흘리며 진땀을 내고…. 끈적하게 젖은 몸으로 그녀를 안고 잠드는 모습을 상상하자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마 그녀는 건강한 후사를 안겨 줬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알게 되겠지. 나 따위는 평생 보지 못할 그런 얼굴을….

오래전부터 버석하게 메마른 상태에서 무리하게 뛰어 대던 심장이 굉음을 내며 무너지려 한다. 함락당할 거라면 타릴루치와 격전을 벌이다 장렬히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신께서는 또다시. 왜 내게….

형편없는 욕심으로 울면 정말 비참해질 것 같아 메마른 입술만 파르르 떨었다. 그러다 그녀의 감정을 읽으려는 듯 집중하는 파란 눈을 보곤 뒤늦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에게 이 이상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마땅한 보수를 받고, 그를 만족시켜 주고, 떠나는 그의 모습을 당연하게 바라보아야만 나중에 그가 진짜로 떠날 때 아프지 않을 테니까.

“네, 늘 저를 그렇게 대하셨으니까요.”

대답을 들은 그는 얼마를 지불해야 마땅한지 그녀의 얼굴과 몸을 살펴봤다. 단지 재밌는 유흥을 즐기는 듯 했지만 파란 눈동자는 너무 어두웠고 조금 흔들렸다. 이내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낮게 말했다.

“보수는 네가 정해.”

그가 느긋하게 기댔던 몸을 테이블 쪽으로 당기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내 턱을 비스듬히 괴고는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기다렸다.

스산한 눈으로 초식 동물을 쫓으며 사냥을 즐기는 맹수 같았다. 물론 초식 동물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사냥하는 과정을 즐기는 중일 것이다. 상대를 무장 해제 시키고 씹어 삼킬 때의 쾌감을, 느긋하게 앉아서 곱씹고 있겠지.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아 아찔해진 그녀는 그가 차라리 자신에게 질려 돌아서길 바랐다.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화대를 상세히 요구하는 게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할 수도 있었다.

“손잡는 건 한 개. 머리카락 만지는 것도 한 개. 그리고 같이 자는 건….”

“…….”

“같이 자는 건 다섯 개. 키스도 다섯 개요. 대화하는 건 안 주셔도 돼요.”

그는 조근조근한 음성을 가만히 듣다가 검지로 자신의 눈썹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

“점수 매기라고 한 적은 없는데.”

그제야 그와의 스킨십이 어땠는지 평가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 시야가 하얗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가 놀리는 건지, 불쾌해하는 건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아뇨. 점, 점수가 아니라….”

묘한 얼굴로 웃은 그는 망토 안에서 조막만 한 주머니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내 주머니를 열어 붉고 동글동글한 것을 꺼냈다. 어제 그녀가 맛보고 행복해했던 딸기 사탕이었다.

뒤이어 그녀에게 돌려주려고 가져온 주머니를 열어 사탕을 한 알 한 알 떨어트려 넣기 시작했다. 파란 눈동자로는 그녀를 빤히 주시한 채였다.

그 시선에 진땀을 흘릴 만큼 긴장하며 영문 모르게 사탕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일곱, 여덟. 총 여덟 개. 길쭉한 검지에 묻은 사탕가루를 손수건으로 고고히 닦아 낸 그가 순진무구한 아이를 놀리듯 픽 웃었다.

“어제 보수는 새로 넣었어.”

눈 뜬 채로 코를 베인 느낌이었다. 그리즈의 미간이 파들거리며 줄어들었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이, 이건 사기잖아요….”

그런데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비정상적으로 떨려 왔다. 그녀를 창녀로 만들어 줄 금화 대신에 그리즈 베네딕트로 만들어 줄 딸기 사탕을 보수로 받았으니까.

그를 보는 시선이 어지러이 떨렸다. 딸기 사탕에 깃든 의미도 모르면서 이런 장난을 칠 줄이야….

가쁘게 호흡하던 그녀는 갈색 주머니 두 개를 낚아채듯 쥐고서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물었다가 탁 놓았다. 그 모습을 보며 느릿하게 웃은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금화로 교환해 주지. 네가 요청하면.”

저택의 하인들에게 듣기로 대공은 효율을 중시하는 통치자였다. 한 번 주면 끝날 일을 교환하게끔 만드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얼까.

의문이 깃든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가 그 눈의 홍채를 하나하나 살피다가 검붉은 동공을 주시하며 아주 낮고 서늘하게 말했다.

“도망가고 싶을 때 알리라는 얘기야.”

떠난다면 굳이 잡지 않겠다는 얘기 같았다. 사탕을 금화로 미련 없이 교환해 주고는, 떠나는 뒷모습을 감흥 없이 바라볼 그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 내일이든 모레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갖겠다더니, 잘 지키겠다더니…. 가슴속으로 뻐근한 통증이 느껴지는 사이 그의 말이 이어졌다.

“굳이 찾을 필요 없게.”

그리즈는 그 말에 담긴 의미가 궁금했다. 떠나도 찾지 않겠다는 얘기인지, 찾지 않아도 되게끔 손을 쓰겠다는 얘기인지….

“실례합니다만 곧 귀빈들이 떠나실 시간입니다.”

문밖에서 브람의 말소리가 울렸다. 그는 검은색 상의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아직 손에 익지 않은 건지 세 번에 걸쳐 뚜껑을 젖히고서야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덧 정오였다. 느릿하게 일어난 그가 먼저 방을 나섰다. 한 박자 늦게 밖으로 나가자 방 앞에서 대기 중이던 브람과 문관 브리언이 뒤따라 걸어왔다.

대공과 동등한 선에서 걷는 걸 심리적인 부담으로 느낀 그리즈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그러자 긴 다리만큼 컸던 그의 보폭이 그녀와 비슷하게 줄어들었다.

문득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평소처럼 냉랭한 기운만 풍겨 왔다. 아마도 놀리는 중이겠지, 색다른 놀이를 즐기는 중이거나.

그리즈는 한층 가라앉은 기분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각형을 여러 각도로 겹친 카펫 문양이 퍽 느린 속도로 지나갔다.

저택 앞은 부산스러웠다. 각 가문의 마부들이 마차를 정비하는 일에 여념 없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정비가 지연되는 광경을 보자 브람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그리즈는 시간이 난 김에 풍경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요 며칠간 비가 오고 춥더니 어느새 완연한 봄에 가까워졌다.

매음굴에서 살았을 때는 계절 지나가는 것도 몰랐으니 무려 11년 만에 처음 맞는 봄이었다. 언덕 아래 호수의 향기가 따스한 봄바람과 섞이자 장인이 만든 향수보다 더 향기롭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청명하고 광활한 하늘 아래에 가득 찬 계절의 향취가 머릿속에 가득 찬 근심을 정화했다. 그리즈가 천천히 마셨던 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 서 있던 그에게서 조금 전보다 따스해진 바람이 불어오는데, 봄바람인지 그의 숨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정원 벤치 앞 들꽃 밭에서 목화솜처럼 몽글몽글하게 생긴 풀이 보였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손바닥 한 뼘만 했던 게 어느덧 팔뚝만큼 자라 있었다. 저 꽃과 투구꽃 뿌리를 섞으면 독이 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문득 이름이 궁금해졌다.

“브람. 저 풀 이름, 알고 있어?”

그녀가 초록색 깃대에 하얀 솜뭉치를 열매처럼 품은 풀을 가리켰다. 안절부절못하던 브람이 풀을 살펴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희는 봄 송이라고 부릅니다. 함박눈과 비슷한 까닭에 지역에 따라서 모양이 눈꽃 송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쁘네.”

시종일관 묘한 눈으로 그녀를 살피던 문관 브리언이 예를 갖춰 물었다.

“율리아나 아가씨께서 꽃을 좋아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좋아하시게 되었는지요?”

왠지 돌아온 율리아나의 취향과 행동이 의심스러워져 확인할 겸 묻는 것 같았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긴장이 일순간 팽팽한 실처럼 당겨졌다.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가 브리언을 돌아보았다.

대공은 즐거운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예전처럼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즐기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그녀 자신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관찰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다 한계를 느끼고 무너지는 그녀를 기대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과 존재감을 드러낼 생각인 거다.

그 찰나 그리즈는 깨달았다. 가짜 율리아나를 가질 거라고 했던 그의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음을.

이런 식으로 그에게 의지하게 만들고, 정복하고, 엉망진창이 되도록 휘두르다가 질리면 놓을 작정인 거다. 그 전에 그의 감정이 정리되어도 버리고, 첫사랑의 환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어도 버리고, 브리튼 공주가 바이렌하그에 오게 되어도 버리고….

입술을 꾹 문 그리즈는 얼굴에 드리운 당혹감과 침울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브리언을 돌아보았다.

“노란 꽃도 좋고, 봄도 좋아해…. 오두막에서 살게 된 후부터 좋아하게 됐어.”

진짜 율리아나가 좋아했던 노란색을 유독 강조해서 말하고는 고개를 꼿꼿이 든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만큼 나약하지 않다는 걸 보이고 싶었지만 어느새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이 느껴졌다.

봄 송이를 보는 척하며 눈을 공허하게 감았다가 떴다. 햇살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건만 주변이 어두컴컴하게 와 닿았다. 그 사이로 대공의 시선만 선명히 느껴진다. 탁해진 시야 때문에 그의 푸른 시선 역시 어둡게 침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하께서도 봄을 좋아하십니다. 아가씨께서 봄을 좋아하시는 이유와는 명백히 다를 테지만요.”

등 뒤에서 브리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공이 봄을 좋아한다고…? 겨울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서늘한 사내가 봄을 좋아한다니….

그리즈는 대공을 곁눈질했다. 정말로 봄을 좋아하는지 궁금했고, 좋아한다면 그 이유가 따로 있는지 궁금했다. 대지에 푸르르게 피어나는 녹음이 좋은 걸까. 따스한 봄바람이 좋은 걸까.

잠시 추측해 보다가 브리언의 말이 곱씹었다. 봄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녀와 다를 거라면… 아마도 바이렌하그 내의 농작물이 무성하게 자라게 되는 덕분일까.

어느덧 정비가 끝나고 마차들이 저택 문 앞에서 일렬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나온 귀빈들이 저마다 인사를 나눴다.

그 후 대공 비아누트 앞에 모여서 그와의 친분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가짜 율리아나에게는 대부분 어긋난 눈빛을 주었던 그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반듯하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얼굴을 가려 줄 베일 없이 나왔기에 그리즈는 방에 다녀오려 했다. 그때 스테판과 디르크가 함께 나왔다. 먼저 그리즈를 발견한 디르크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율리!”

그의 뒤에 있던 스테판은 요새 밀 무역으로 많은 금화를 번 에티스 후작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멈칫하며 그들에게 약식으로 인사한 디르크가 남색 상의 매무새를 만지며 그리즈의 앞에 섰다.

“여기 있었구나. 아까 잠깐 네 방에 들렀었어.”

그리즈는 얼굴로 떨어지는 햇볕이 따가운 척하며 이마 위로 손을 올려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내 방? 아… 나는 날씨가 좋은 김에 일찍 나와 있었어.”

이렇게 대화를 시간에 방으로 돌아가 베일을 가져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예의에 어긋나더라도 대화를 끊고 다녀오고 싶었다. 그 전에 벨린이라도 보이면 당장 부탁할 텐데….

그리즈의 눈동자가 저택 안을 살피며 바쁘게 돌아갔다. 그 찰나 디르크가 노란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천천히 살펴보다가 고개만 숙여 소곤거렸다.

“저… 율리, 스테판이 어제 괜찮았냐고 묻길래 좋았다고 대답했어. 내가 거짓말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다행히 그대로 믿는 눈치였어.”

햇살을 오롯이 받은 초록색 눈동자가 칭찬을 바라며 유려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리즈는 베일을 포기하고 까치발을 들었다. 디르크의 귓가를 손으로 가리고 속삭이려 했다.

그때 한 폭 거리에 서 있던 대공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내내 그의 눈에 비쳤던 묘한 열기와 반의는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감흥 없는 서늘함이 눈동자 안에서 아득하게 맴돌았다.

긴장한 그녀는 디르크에게 더 다가가지 못하고 입술만 움직였다. ‘고마워, 디르크.’ 온 신경이 대공에게 쏠리자마자 북새통에서도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대공의 앞에 선 중년 부인이 바이렌하그 북쪽 산기슭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먹고 젊어졌다고 말했다. 그녀와 디르크의 얼굴 거리가 멀어지자 대공은 부인을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말씀처럼 10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군요, 에스텔라 부인.”

대공 비아누트는 가짜 여동생과 디르크를 주시하면서도, 에스텔라 부인의 말을 들으며 대공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즈가 그걸 깨달았을 무렵, 에스텔라 부인이 무수히도 많은 전장에서 승전보를 가져온 젊은 대공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느끼곤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정말 그런가요? 대공께서 그리 말씀하시고 미소 지으시니 20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말이 끝나자 서늘했던 그의 얼굴이 미소 지었다. 그때 다른 부인이 저택 안에서 나와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곤 손등을 내보이며 건네자 그가 느릿하게 고개 숙이며 손등께로 입술을 가져갔다.

미끈한 콧날이 부인의 손에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결이 촘촘한 속눈썹이 보였을 때 짙은 흑발이 옆으로 스르륵 흘러내리며 떨어졌다.

목까지 단추를 반듯하게 잠가 입은 상의 덕분에 상체가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목덜미의 근육이 탄탄하게 일어선 것만 확연히 보였다.

무심코 호흡을 멈춘 그리그가 눈동자로 바닥의 카펫을 주시했다. 어찌 그는 올바르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관능을 풍기는 건지. 단지 고상하게 격식을 차리고 있을 뿐인데….

그녀가 붉어진 뺨을 식히는 사이 그는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뺨에 으레 보조개를 드러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틸튼 부인. 부군께도 안부 전해 주시죠.”

침착하고 낮은 저음이 닥쳐오자 그리즈는 귀 부근을 검지로 꾹 눌렀다. 그녀와 대공을 번갈아 보던 디르크가 두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찰나 할머니께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저택 앞으로 나왔다.

각자의 영지로 떠날 채비를 마친 사람들이 저마다 할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할머니는 이곳에 초대된 모든 사람과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고 인사하며 덕담을 건넸다.

디르크의 이모, 베아트릭스 빈젤도 모습을 보였다. 그녀를 알아본 그리즈는 베아트릭스의 살색 드레스를 살펴보는 척하며 얼굴을 곁눈질했다. 할머니가 뒤늦게 그리즈를 발견하고는 햇빛 가리개를 들고 서 있던 로렐을 데리고 다가왔다.

“아가, 점심 식사는 오라버니와 함께했다고 얘기 들었단다. 식사는 맛있었니?”

벌써 하인들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으신 모양이었다. 짐짓 미소 지은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맛있었어요, 할머니.”

“그래, 다행이구나.”

온화한 미소로 화답한 할머니가 베아트릭스에게 관심을 돌렸다.

“이렇게 빨리 떠나니 아쉽구나. 언제 또 볼 수 있는 게야?”

“브리튼 공주님의 환영식 때도 뵈러 올게요.”

“그러렴.”

베아트릭스와 할머니가 우아하게 포옹을 나눴다. 이내 베아트릭스는 그리즈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만나서 반가웠어, 율리아나. 다음에 또 보자꾸나.”

선의로 관심을 가져 주는 게 불쾌할 리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탐탁지 않은 기분이 앞섰다. 곰곰이 이유를 짐작하던 그리즈는 애써 환히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빈젤 부인.”

베아트릭스가 상냥한 웃음을 내보이며 호의를 드러냈다.

“날씨가 더 따듯해지면 우리 영지에도 놀러 오렴. 온 김에 그랑디아 성의 정원도 구경시켜 줄게.”

만개한 회색 꽃 같던 그리즈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 버렸다. 다행히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든 까닭에 선명히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그랑… 디아요?”

“아차, 기억을 잃었다고 했지? 결혼 전에는 빈젤이 아니라 타릴루치였는데, 그것도 기억나지 않니?”

잠시 넋이 나간 듯한 그리즈의 눈동자가 폭풍을 맞은 파도처럼 요동쳤다.

“네…? 방금 타릴루치라고 말씀하셨….”

평화로웠던 귓전에서 폭탄이 강렬히 터지는 것 같았다.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리쬐는 정오의 햇살 아래서 즐겁게 웃는 사람들이 꿈결의 한 장면처럼 인식됐다.

쿵, 쿵! 가슴을 치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모든 소리를 좀먹고 이성을 잠식해 나갔다. 타릴루치라니? 타릴루치라니! 공손히 맞잡고 있던 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타, 타… 릴루치…. 타릴루치요?”

내내 유지하고 있던 웃는 입술이 볼품없이 요동쳤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디르크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왜 그래, 율리? 어디 아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공이 공작가 사내들과 대화 나누다가 문득 뒤돌아 그리즈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늘 그의 시선을 의식해 왔던 그리즈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보기 좋게 줄을 선 마차에 귀족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저택 앞 사람들의 밀도가 느슨해지자 디르크의 뒤까지 다가온 아델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며 말했다.

“미안. 치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까닭에 조금 늦었어.”

그러곤 무슨 얘기 중이었냐며 디르크를 어깨로 슬쩍 밀었다. 사색이 된 그리즈의 얼굴을 살피던 초록 눈이 아델에게로 옮겨 갔다.

“율리가 우리 가문 이름까지 잊고 있었나 봐. 그래서 다시 알려 주고 있었어.”

정말 그렇냐며 걱정스레 탄식하던 아델이 자연스레 대답했다.

“늦었지만 정식으로 소개하면 되지.”

그러곤 파랗게 질려 처참하기까지 한 그리즈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나는 아델라이드 루체 타릴루치고, 오라버니 이름은 디르크 비크 타릴루치야. 이번엔 안 잊을 거지?”

그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리즈가 새카맣게 타 버린 숨을 내쉬며 소리 없이 헐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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