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32)

***

사교계 데뷔는 문제없이 끝났다. 축하연을 빙자한 술자리가 시작됐다.

밤 11시가 넘자 피곤해하시던 할머니는 방으로 돌아가셨다. 손님들과 인사 나누던 대공도 어느샌가 자취를 감췄다.

스테판이 고대하던 시간이 온 거다. 그에게 이용당하는 게 죽을 만큼 싫지만 이렇다 할 방법을 찾을 수 없어 괴로웠다.

마지막 희망을 붙잡아야 했다. 아델까지 이용하기로 작정한 스테판의 속내를 디르크에게 알릴 것이다. 자신의 가문이 싫다던 디르크의 말이 진심이었다면 함께 걱정해 줄 것 같았다. 하나의 가문에다가 딸자식 두 명을 혼인시키려 하는 의도가 너무 명백하지 않나. 전쟁을 치러서라도 바이렌하그까지 세력을 넓이겠다는 의지 말고 무엇이 또 있을까.

그러니 스테판의 뜻대로 디르크를 만나러 가서 조용히 얘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그거와 별개로 그가 몸을 탐하려 한다면… 그때는 정신없이 달아나 석상실에 숨어 버려야겠지.

바람 쐴 겸 정원 벤치에 앉은 그리즈는 2층 대공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이 어른거리고 있지만 그의 흔적은 없다. 원하지 않는 찬바람만 불어와 심장에 서늘히 에였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본다. 그와 입장이 뒤바뀌면 어떨까. 대공인 내가 패망한 나라의 왕자인 당신을 원했다면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뒤늦게 연회장을 찾았던 아델이 벤치로 다가왔다. 오랜만의 북새통에 기분 좋아졌는지 얼굴이 밝았다.

“오늘 정말 인상적이었어, 율리.”

사탕수수에 라임을 졸여 만든 음료를 웃으며 내민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그리즈는 크리스털 잔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아델.”

그윽한 풍경을 감상하던 아델이 흐뭇하게 말했다.

“춤추는 네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바라봤지 뭐니.”

그때 멀리서 마른 체형의 키 큰 사내가 걸어왔다. 그게 스테판이라는 걸 알아본 그리즈는 티 나게 경직되었고, 아델은 그 이유를 찾다가 의아해하며 뒤돌아보았다.

“스테판?”

아마도 스테판은 앞으로 자신의 세력 확장을 도와줄 가문을 물색하느라 지금껏 바빴을 것이다. 마땅한 가문을 찾은 건지 표정이 환했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네.”

천성이 선한 사내처럼 자상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소름이 끼쳐 올랐다. 뭇 여인들을 한눈에 사로잡을 정도로 수려한 미소였지만 일그러진 영혼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 탓이다.

눈동자로 적의를 드러낸 그리즈가 크리스털 잔을 벤치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소롭다는 듯 보던 스테판이 입술을 차갑게 휘었다.

“얘기 좀 하자꾸나, 율리아나.”

올 것이 왔다 싶었다. 디르크를 유혹하기에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고 부르는 것일 터.

가진 능력이 없어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한스러웠다. 비통하게 입술을 물었던 그리즈가 고갤 끄덕이자 스테판이 아델에게 말했다.

“금방 올게, 아델.”

“응? 응….”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는 투였다. 설마 오늘 당장 아델에게 마수를 뻗치려는 건가?

아델은 사랑하는 사내가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이상 스테판이 일을 저지르도록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델과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덜컥 육탄전을 벌일지도 모르지 않나.

그가 먼저 앞장서자 눈치를 살피던 그리즈가 아델에게 속삭였다.

“아델, 스테판이 너와 혼인하고 싶어 해.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처음엔 의아해하던 아델의 안색이 새파래지는 사이 스테판이 뒤돌아봤다. 흠칫 놀란 그리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일전에 몇 번 와 봤던 가족 석고상실이었다. 햇살에 환하게 밝혀져 천국 같았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두워진 석고상실은 기억과는 달랐다. 티아라 베일을 벗자 촛불 수백 개가 밝혀진 공간을 채운 석고상이 눈에 들어왔다. 천국으로 가지 못한 영혼이 모여 영겁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두렵지도 않은 건지, 스테판은 석고상을 가벼이 등졌다. 그러곤 문 앞에 선 그리즈를 보며 편히 웃었다.

“왈츠 실력이 많이 늘었더군. 돈 쓴 보람이 있어.”

그리즈는 내키지 않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드려요, 숙부.”

하룻강아지를 깔보는 듯한 시선이 닥쳐온다. 그걸 피하려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는 사이 눈앞에 검은색 열쇠가 내밀어졌다.

“디르크와 하룻밤을 보낼 방을 준비해 뒀어. 4층 가장 끝 방, 문 앞에 화관이 걸려 있을 거야.”

“…….”

“테이블에 선물도 마련해 놨어.”

조용한 말투였지만 공간이 연회장처럼 뻥 뚫려 있는 까닭에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석고상에 깃든 영혼이 스테판의 속내를 읽고 분개하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저, 저는….”

빨리 받으라는 듯 그가 열쇠를 흔들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추잡한 일은 타인이 하고 이득은 그가 챙기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혹시 신께서 착각하시어 저자를 천국에 보내기라도 하면 얼마나 분할까.

선했던 그리즈의 눈이 그를 원망스럽게 쏘아봤다. 픽 웃은 그는 앙칼진 고양이를 상대하듯 웃어넘겼다.

“싫은 척하기는.”

이내 그리즈의 손을 억지로 펼쳐 열쇠를 쥐여 주곤 싸늘하게 읊조렸다.

“사실은 매일 밤 사내가 긁어 주던 밑구멍이 슬슬 근질거려서 미치겠지?”

“…….”

“더러운 몸뚱이로 고상한 척하는 건 죄악이란다.”

조금 전까진 그림자가 짙게 진 석고상이 무서웠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무서운 건 악의로 가득한 눈빛을 번뜩이는 저 사내였다.

평소였다면 피해 버렸을 붉은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이제 정말로 오도 가도 못 할 궁지까지 몰려 버린 까닭이다.

하물며 정작 더러운 몸뚱이의 소유자는 저 사내가 아닌가. 그릇된 신념으로 권력을 탐내어 오물을 온몸에 묻히고 있는 주제에 대체 누굴 평가 절하하지?

지금껏 어떤 사람이든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추악한 본성을 만방에 알리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세상을 더럽히는 게 불가능하도록 손수 숨통을 끊어도 괜찮았다. 만약 타릴루치 가문에게 복수한다면 지옥에 가게 될 테니 저자도 끌고, 같이.

입술을 서늘하게 다문 그리즈가 지그시 이를 물었다. 그 모습을 빤히 주시하던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당장 저자에게 달려들고 싶었지만 당장은 확실히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무기가 없다. 치욕적으로 눈 감은 그리즈는 손바닥을 불쾌하게 찌르는 열쇠를 던져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빤히 주시하며 그가 웃었다.

“가서 네가 잘하는 걸 해.”

굴욕적인 말을 듣고도 저항하지 못하는 신세가 비참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공들여 화장한 눈매가 무너지려 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스테판이 얘기가 길어질까 봐 걱정하며 멸시를 거뒀다.

“디르크의 아이를 회임하게 되면 곧장 귀족 부인이 될 수 있어. 그게 네게도 가장 좋은 일이잖아.”

아니,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좋은 일은 당신이 급사하는 거야. 그 말을 꾹 억누른 그리즈는 합리적인 구실을 찾아냈다.

“디르크가 배에 새겨진 매음굴 표식을 볼 거예요. 겉으로 저를 이해하는 척하면서 의심하기 시작하면요?”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슬슬 실랑이가 지겨워진 듯 그가 예민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니 딴생각 못 하도록 잘 붙잡고 있어.”

여우 같은 눈매 아래에 진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세상 모든 걸 씹어 소화하기를 원하는 악마 같았다. 말문이 턱 막혔을 때였다.

노련한 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가슴골을 쓱 훑고서 배 쪽을 응시했다. 언뜻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불길한 징조라고 느끼는 찰나, 메마른 손이 드레스의 어깨 부근을 낚아채 억지로 끌어내렸다.

드레스 가슴골 부근의 실밥이 툭툭 풀려 느슨해지는 광경이 보였다. 다급하게 가슴께를 가렸지만 네글리제의 한쪽 어깨끈이 내려간 지 오래였다. 비스듬히 드러난 허리 안쪽으로 매음굴 문양이 초라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존재감이 커지자 그리즈는 작아졌다. 대항하지 못했고, 스테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무력하게 떠다니는 생각을 곱씹을 뿐이었다. 왜 코르셋을 입지 않았을까. 어떤 핑계를 대고 드레스를 수선해야 할까. 할머니께서 보시면 속상해하실 터인데….

심장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는 사이 큭, 하는 웃음소리가 흘렀다. 스테판의 갈색 눈이 매음굴 문양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뭇가지 모양의 붉은 상흔이었다. 나무뿌리는 두 개로 갈라진 채로 벌어져 여인의 다리 형상을 했다. 그 아래에는 오르파담이라는 글자가 퍼렇게 각인되어 있었다.

깨끗한 검지가 나무뿌리의 한쪽 부분을 느리게 훑어 올린다. 그러다 다리 사이를 연상케 하는 곳에 멈춰서는 지그시 문질렀다. 금세 뜨끈해진 숨이 그녀의 정수리로 툭툭 떨어졌다.

“작대기가 많을수록 상대한 사내가 많다는 뜻인가? 도대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군.”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그리즈는 네글리제 어깨끈을 올렸다.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그에게서 새어 나왔다.

“하나쯤 늘어나도 티 나지 않겠군.”

“…….”

“네 생각은 어때.”

이미 저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예상보다 더 잔인했다. 조악한 미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귓가를 만지던 그리즈가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은 그가 문고리를 잡았다.

“먼저 가서 대기하고 있으렴. 적당히 술을 먹여서 보낼 테니까.”

그가 나간 후에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당연한 듯 던지는 희롱을 가만히 듣고 있었던 게 가슴 미어지도록 분했다.

“하아….”

요새 들어 하루가 참 길다. 특히나 오늘은 긴장하고, 가슴 졸이고, 희롱과 멸시까지 당했는데도 끝나지 않아 두려울 지경이었다.

힘없이 정면을 바라봤다. 스테판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눈을 크게 뜨자 그림자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남색 의복을 입고 훤칠하게 꾸민 사내였다. 비아누트….

정말이지 이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은 충동이 치민다.

“아….”

있어서는 안 될 곳에 그가 있다. 그런 그에게 스테판과 나눴던 모든 이야기를 들켜 버렸고, 괄시받는 모습까지 보이게 됐다.

별안간 부끄러워지다 못해 온몸이 찢어질 듯 쓰라렸다. 한 번도 손찌검당한 적 없었지만 바닥에 쓰러진 채 짓밟힌 듯 곳곳이 욱신거렸다.

그 이유는 알고 있다. 우습게도, 저 사내의 앞에서는 그럴듯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으니까. 타고난 귀족처럼 품위 지키고 싶었고 또 어떠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싶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갈가리 찢겨 바닥에 나뒹군다.

아마 눈치 빠른 저 사내라면 무언가를 모략 중이라는 걸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디르크와 잠자리하라는 스테판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도 느꼈겠지….

그와 입장이 뒤바뀌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 엄습했다. 이번에는 대공이 되어 그를 감싸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지금 그의 생각을 읽고 싶어서.

선 하나를 그어 놓고 대치라도 하듯, 그렇게 서 있었다. 시선의 온도가 차갑다. 치열히 부대꼈던 그의 감정들이 단번에 푹 가라앉아 버린 것 같았다.

그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하룻밤 대가로 보수를 받아 간 여인이 고작 스테판의 말 한마디에 다른 사내와….

눈앞이 암담해지는 순간이었다.

“아가씨, 저… 안에 계시나요? 후작 각하께서 아가씨의 옷매무새를 살피라고 명하셨는데….”

문밖에서 벨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즈는 대답만 하면 되는 일을 좀처럼 하지 못하고 대공만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정적이 하염없이 이어진다. 그 정적에 숨이 끊길 것 같았을 때 문이 끼익, 하는 마찰음을 내며 조심스레 열렸다.

“아가씨? 안에 계셨네요!”

문틈으로 벨린이 환히 미소 지은 벨린이 보였다. 그러다 앞섶의 실밥이 느슨하게 풀린 광경을 보고 두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리즈는 완벽하게 그어진 선을 넘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석상실을 나갔다. 애초에 넘볼 수도 없고, 침범하지도 못할 영역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

투두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창밖을 한참 내다보던 그리즈는 창문 밖에 스친 빗줄기를 검지로 훑었다.

무수히도 많은 고민 끝에 화관이 걸린 문을 찾아 들어왔다. 신혼부부의 방을 연상케 하듯 분위기가 야릇한 공간이다. 침대 위에 망사 캐노피가 설치되어 있었고, 사이드 테이블에는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 아직 디르크가 오지 않았다. 그리즈는 불규칙한 빗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정리했다. 디르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동조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이렇게 버티다가 스테판이 외출할 때를 노려 출입증을 쓰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대공과는….

아니, 생각하지 말자. 그는 이대로 평생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고고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

서글픈 한숨이 메마른 잇새로 새어 나왔다.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빗줄기가 거세졌다. 저 빗물에 떠밀려 호수로 빠져 버렸으면 좋겠다. 시체가 되어 강줄기를 유유히 떠도는 걸 상상해 본다. 그러다 그랑디아의 호숫가에 영원히 묻히기를….

냉혹한 감옥 문 같았던 방문이 느리게 열렸다. 하염없이 창밖을 보던 눈길을 돌려 창유리를 거울 삼아 주시했다. 금발 머리칼이 얼핏 비친다. 마침내 디르크가 온 것이다.

긴장으로 숨이 차오르며 손끝이 차갑게 떨렸다. 그때 무언가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옆을 흘끗 바라보는 순간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가 닫히며 잠겼다. 설마 말도 없이 나갔을까 싶었기에 뒤돌아보았다.

“디르크…?”

그를 기다리는 동안 어색하게 서 있는 디르크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한 채 그녀의 기분을 살피느라 바쁜 평소의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혼란스럽게 펼쳐진 상황을 보자 그 상상이 얼마나 하찮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침대에서 디르크가 눈 감은 채 엎드려 누워 있었다. 뒤늦게 들어온 사내가 어두운 배경 속에 완벽히 스며들어 차갑게 미소 지었다.

“안녕, 마리아.”

커다란 그림자를 에워싼 빛이 무질서하게 일렁인다. 어둠을 연료 삼아 느짓하게 타오르는 광염처럼 보였다.

“대, 대공 전하….”

고통도 지나치면 희열이 된다는 말이 있다. 당혹감, 위기감, 불안이 맹렬해지자 심장이 빠르게 뛰며 짜릿해졌다.

타들어 가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희열을 느끼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중이라고. 조용히 정리하고 싶었던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으니까.

그리즈가 초조하게 물었던 입술을 탁 놓아 버렸다.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

기품 있게 걸어오던 그가 어깨의 금장 단추를 열어 벨벳 망토부터 풀었다. 가문 문양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천이 사부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거추장스러운 걸 벗어 내도 그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했다. 지옥에서 온 악마 같았다, 혹은 궁지에 몰린 영혼을 구원하러 온 천사일지도 몰랐다. 그 어떤 것인지 몰라도 어째서 그가 이곳에 있는지….

모두 타들어 간 촛불 하나가 속절없이 꺼졌다. 한층 짙어진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덧씌워졌다.

“마리아.”

낮고 어두운 목소리가 이름을 부른다.

그를 바라본 그리즈는 집요한 감정이 일렁이는 눈동자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석상실에서는 무심하게 걸어 나갔던 그였다. 대체,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하물며 어제는 아주 여유로워 보였었는데….

“심란한 눈이네. 이게 오래 갈 것 같아서?”

의상실에서의 여유로운 얼굴이 지금 그의 모습에 선명히 겹쳐졌다. 확연히 다른 낮과 밤의 얼굴. 둘 중에 더 그럴듯한 쪽이 가면이라면 지금 그의 얼굴이 본모습일 것이다.

나른했던 그때의 가면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그를 자극한 이유가 무얼까. 변한 점은 햇살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둘만 있었던 그때와 달리 디르크가 있다는 점뿐인데…. 오랜 시간 진득하게 탐색하려던 먹이가 도망가려 하자 계획을 바꾼 걸까.

그가 한 뼘 거리까지 다가왔다. 관능적인 향기가 폐부로 엄습하자 그리즈는 한 발, 한 발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엉덩이를 창틀에 툭, 부딪혔다. 그제야 걸음을 멈춘 그는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이에서 그리즈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평소처럼 차가운데 호흡이 거칠었다. 감당 못 할 기운을 느낀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새파란 눈동자에 사나운 기운이 어렸다.

“예상대로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그리즈가 서서히 고개 드는 순간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몸 파는 평민이 될 거라던 얘기를 스스로 증명하는 중이군.”

아…. 언젠가 그가 했었던 말이 귓전에 아득하게 울렸다.

“평민으로 살겠다고. 가진 건 몸뿐인 빈털터리가.”

“…….”

“그럼 몸 파는 평민이 되겠네.”

불쾌할 때면 그의 얼굴에 깃들던 비소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너무 예상대로 움직여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질 지경이라는 듯….

그가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마 자신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디르크와 밤을 보낼지도 모르는 헤픈 여인이 눈앞에 있다고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면 그가 믿어 줄까. 아니… 어째서 변명해야 하는 걸까. 그에게 가짜 율리아나는 흔한 매춘부일 뿐인데….

변명할 의지를 잃고 입술만 떨고 있었다. 그때 미간을 좁힌 그가 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느리게 훑었다.

이내 검은 장갑이 성가셨는지 가운뎃손가락 끝을 이로 지그시 물어서 벗었다. 그러곤 장갑을 손으로 쥐어 바닥에 툭 떨어트리며 말했다.

“그러다 방심하면 허를 찌르고.”

“…….”

“피 말리는 게 목적이라면 성공했어, 마리아.”

하얗고 단단한 손끝이 그리즈의 턱을 지그시 위로 올렸다. 조종당하듯 그를 올려다보게 된 그리즈는 진땀으로 눅진해진 손길과 좋은 냄새에 온몸을 굳혔다. 그는 굳어버린 입술을 씹어 삼킬 듯 사납게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는 뭘까.”

“…….”

“대체 네가 뭔데….”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와 심장을 꽉 쥐는 것 같았다. 숨을 멈췄던 그리즈는 창밖의 빗소리에 애써 귀 기울이며 작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주 짧은 찰나, 촘촘한 속눈썹 아래의 눈동자에 원망이 배는 것 같기도 했다. 네가 뭔데, 대체 네가 뭔데….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즈가 불안정하게 눈감았다. 그때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잡역부 마리아.”

“…….”

“이제 놀랍지도 않아.”

눈감아 어두웠던 시야로 새빨간 번개가 난폭하게 내리쳤다.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쿵쿵 발작하는 심장 소리가 빗소리를 삼키는 중이었다.

“바, 방금 무슨 말씀을….”

무력하게 무너지는 얼굴을, 새파란 눈동자가 샅샅이 살폈다. 원망스럽고, 애타고, 안달하면서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는데…. 그는 단지 유희를 즐기려 했던 거니까.

흔들리는 눈동자를 다잡은 그리즈는 그의 얼굴을 선명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실마리를 내보이면 그가 붙잡아 집요히 끌어당길 것 같았다. 그러다 폐위된 공주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

그녀는 빼앗긴 왕위를 되찾을 수 있는 적법한 혈통을 가졌다. 그가 정치학을 제대로 배웠다면 그랑디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를 한낱 밤 상대로 소모할 것 같지 않았다.

최대한 이용해서 가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게 맞았다. 그는 이 땅의 주인이고, 이 땅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냉혈한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그리즈는 대공 비아누트에게서만큼은, 매음굴 포주 빌튼과 스테판에게서 보았던 잔혹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까지 이용당했다간 심장이 퍼석하게 바스라질 것 같아서.

“저, 저는….”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리는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녀가 매춘부가 아니라 잡역부라는 걸 이미 확신하고 있고 몰아붙일 준비도 되어있지만 그녀가 인정할 때까지 고상하게 기다려 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집요히 바라보고 향기를 느낀다. 제아무리 거세지는 빗소리라도 험해진 그의 숨소리를 억누르지는 못했다.

숨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금욕적인 얼굴이 모순적인 관능을 불러 왔다. 핏대가 펄떡이는 목덜미를 주시하던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으며 대답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귓전에서 허무한 숨이 터진다. 이를 문 그가 흑발을 자연스레 쓸어 넘기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마리아.”

“…….”

“이제 내가 물으면 너는 대답하는 거야.”

막다른 골목에서 사냥꾼과 대치 중인 사슴이 된 느낌이 들었다. 느슨한 음성에 홀려 버리면, 모든 걸 실토하게 될 터.

“어째서 이리도 제게….”

어찌 대공께서 천민의 과거에 시간을 쓰냐고 물으려 했다. 그 순간 그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있던 손을 스르륵 내렸다. 이내 한 줌에 가까운 목덜미로 손을 가져다 대고는 느릿하게 휘감았다. 그녀가 뜨끈한 촉감을 느끼는 사이 서늘한 저음이 울렸다.

“매음굴에는 언제 들어갔지?”

손아귀의 악력이 조금 강해졌다. 대답하지 않으면 이대로 한 올 한 올 발라먹을 거라고 압박하는 듯했다.

“읏….”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울림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것 같았다.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창밖에서 벼락이 대지에 꽂혔다. 사내의 수려한 얼굴이 빛으로 물들었다. 그때 햇살이 밝았던 정오, 유독 선명했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되풀이됐다.

“세쌍둥이도 가능해.”

그때는 상황을 모면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서 흘려 넘기게 됐던 말이었다. 뒤늦게 곱씹어 보니 철없던 어린 시절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랑디아 공주로 지냈을 시절부터 세쌍둥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혼인한다면 아이를 세 명 이상 낳아야 할 텐데 출산의 고통이 무서웠던 거다. 그래서 한 번에 세 명을 낳을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우연일까. 아니면 당신은 대체….

“흣…. 아파…. 아파요.”

점점 지그시 목을 조이는 손길에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의 힘을 가늠하지 못했던 듯 그가 악력을 헐겁도록 풀며 물었다.

“매음굴에는 언제 들어갔냐고 물었어.”

헐떡이던 그리즈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매음굴에 잡혀 들어갔던 시기가 9살 때니 11년 전의 일이었다.

사실대로 대답만 하면 될 일인데, 베네딕트 왕가의 멸문 시기와 같아서 순순히 알리기가 망설여졌다. 가뜩이나 회색 머리칼도 흔하지 않은데… 혹시 그가 정말로 눈치채기라도 하면….

“으읏. 기억이, 잘….”

버겁게 말한 그녀는 목을 휘감은 그의 손을 겹쳐 쥐었다. 피부가 맞닿자 그가 미묘하게 눈꺼풀을 떨었지만 목덜미를 쥔 손은 풀지 않았다.

대답을 망설일수록 그가 정한 대화 수칙에 균열이 생긴다. 차라리 깨지기를 충동질하듯 벼락이 하늘을 찢고 발작하듯 내리꽂혔다.

매음굴에서는 귀를 틀어막고 탁자 아래 숨었던 그녀는 그의 손등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가쁘게 호흡하기만 했다. 더 두려운 게 앞에 있으니 천둥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살의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결하지도 않았으므로.

침대 옆 촛불이 흔들리자 어두운 눈동자에 어린 불빛이 기묘하게 변모했다. 그 눈이 곱게 화장한 눈가와 입술을 훑었다. 마치 베일에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저녁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치열하게 빛난다.

그러다 할머니의 권유로 끼고 있던 사파이어 귀걸이에 툭 닿았다. 좌우 대칭이었던 입매가 어둠에 이지러졌다.

“마리아.”

한 치의 오차 없는 이목구비가 천둥에 밝게 드러났다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등허리로 위험한 전율이 올라오는 찰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시간 끝났어.”

그 순간 금욕적이던 입술이 불순하게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폭발하는 열기에 떠밀린 그리즈는 창유리에 등을 부딪힌 채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턱을 위로 들어 올리며 키스하기 편한 자세로 만들었다. 곧장 뜨끈한 혓바닥이, 당황하는 잇새를 가르고 침범했다.

혀를 정신없이 뒤얽고 거친 숨결을 목구멍으로 넘겨 보낸다. 얼굴을 뒤로 빼자 추격자처럼 쫓아와서는 입천장을 엉망진창으로 훑었다. 종종 입 안에서 기분 좋게 터지는 저음에 허벅지 안쪽이 욱신거려졌다.

“읍, 으! 으읍, 흡…!”

발버둥 치는 손이 창유리에 탕, 하고 부딪히자 그가 손목을 지그시 잡아 누르고는 가슴팍으로 그녀의 몸을 가뒀다. 그녀는 단단한 감옥에 갇혀 그를 받아들인 채로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으읍, 흡, 흐, 으….”

미끈한 혀끝이 그녀의 혀를 거칠게 얽어서 비비며 몇 번이고 반응을 유발했다. 그녀가 애처롭게 고개를 비틀어도 굴하지 않았다.

그에게 결박되었던 손목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고서야 그가 눈을 살짝 뜨고는 입술을 뗐다. 그녀는 얼굴을 주시하는 눈동자를 피해 고개 숙였다. 이마로 거친 숨이 쉴 새 없이 내려앉았지만 그의 고고한 자세는 도무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분했다. 대답하지 못하면 응징하겠다는 규칙을 세우고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한다. 상대를 무방비하게 흐트러트렸으면서 정작 그는 고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울고 싶을 만큼 서러워진 그녀는 한 뼘 거리에 닿도록 숙인 그의 어깨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골로 뜨끈한 숨이 툭툭 떨어졌다. 어쩌면 가소로워하는 듯한 웃음소리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쯤에야 그가 손목을 풀어 주었다.

감옥 문이 열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그녀는, 숙였던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는 그를 보며 옆으로 빠져나왔다.

그때 흥분한 기색으로 들썩이는 사내의 가슴팍과는 다르게 태연한 목소리가 번졌다.

“다시 한번 기회 주지.”

그의 체온이 어제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몸속에서 우연히 피어오른 불씨가 종교적 신념을 태우고 몸집을 불린 듯했다. 지나치게 집요해진 눈이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하얀 재만 남은 폐허에서 서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다시 찾기라도 하듯.

그러나 그건 착각일 것이다. 단지 의문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불순물을 배출할 때까지 여인을 취하고 싶을 뿐이다.

이대로 그가 원하는 걸 주고 제대로 약속받는다면 타릴루치에게서도 보호받을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든다. 그가 명예와 신의를 중시하는 귀족이라면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터.

그렇기에 그에게서 약속을 받아 내기가 어려웠다. 만약 폐위된 공주 때문에 이 아름다운 바이렌하그가 쑥대밭이 된다면….

심란해진 마음에 대답이 망설여졌다. 그럴수록 그의 눈가가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지금 그에겐 사연 많은 여인의 침묵을 존중할 여력조차 없는 것이다.

“매음굴에 언제 가게 됐는지는 기, 기억나지, 않….”

그를 바라보던 그리즈가 다급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대로 뒷걸음질 치자 그가 기품 있게 걸어오며 거리를 좁혔다.

뒤를 살짝 돌아보자 침대에 디르크가 엎어져 있는 게 보였다.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한 그리즈는 발을 삐끗하며 사이드 테이블 위의 상자를 쳤다. 뚜껑이 날아가며 상자 안의 내용물이 침대로 날아들었다.

그때 종아리가 침대에 툭 걸렸다. 위험하다는 걸 인지했을 때는 눈앞에 넓은 가슴팍이 있었다.

“아, 흣, 대, 대공 전하, 그만….”

침대에 눕혀지자마자 드레스가 벗겨졌다. 그녀가 네글리제만 입은 자신의 꼴을 확인하는 사이 그가 매트리스에 두 무릎을 꿇었다.

서서히 고갤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애석하게도 여러 감정이 혼재되어 있다. 이 순간이 그래도 기분 좋은 듯, 침울한 듯. 흥분한 듯, 차분한 듯…. 갓 태어나 정체성이 모호한 별 같았다. 세상에 환한 빛을 내려줄 수도 있고, 모든 별을 삼키는 악의 근원이 될 수도 있는.

그러나 아름다웠다.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칙칙한 어둠 속에 홀로 고고히 빛나는 그를 갖고 싶었다. 그가 피범벅이 되어 나타났던 순간부터 느꼈던 두근거림을 평생 맛보고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원한다고 한들 그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의 소유물이 될 수는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귀족의 정부. 그게 한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제 과거를 물으시는 거죠?”

그의 시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허벅지를 훑고 있었다. 그러다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에 가까스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회피하는 거지?”

그녀가 무언가 숨기려 한다는 걸 이미 읽은 거다. 이내 그녀를 핥고 빨아서 불만을 해소하겠다는 것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곧장 살결을 머금고 진득하게 빨다가 느슨하게 물었다.

“마리아,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 줄까.”

옷을 벗은 건 그녀인데 평정심을 잃은 건 그였다. 단지 맨살에 입술을 댄 것만으로 피가 뜨거워지는지 낮은 신음을 흘린다. 아…. 다리 사이에 닿은 그의 앞섶이 지나치게 달아올라 있는 게 느껴졌다.

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연회장에서 모든 이에게 동경 받던 고귀한 사내가 엎드려서 무릎 꿇은 채, 아래를 빳빳하게 세우고….

“흣….”

그가 이런 상황에서도 흥분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조마조마 것 같기도 했고, 찌릿하게 아린 것 같기도 했다.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심정과는 다르게, 피부가 뜨거워졌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네글리제 어깨끈이 속절없이 내려갔다. 얇은 실크 안에 갇혔던 가슴이 출렁거리며 드러나자 탄탄한 목젖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목덜미의 핏줄이 불거지며 푸르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어깨끈을 다급히 올려서 가슴을 가렸다.

가슴 끝을 보던 파란 눈이 얼굴에 와 닿았다. 빗소리와 숨소리가 연달아 닥쳐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데 그가 하얀 플레어 속옷 하의 안쪽에 검지를 걸었다.

그러곤 빤히 눈 마주치며 속옷을 슬슬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네가 함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중이라고 암시하고 있지만 그의 몸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바지를 입은 허벅지 안쪽으로 굵고 길쭉한 기둥이 드러난 게 비쳤다. 그것이 이미 흥분한 남근이라는 걸 깨닫자 숨이 확 막혔다.

매음굴에서 사람들에게 맞고, 상처 입고, 피부병에 시달리며 통증에는 내성이 있었어도 오늘은 버거웠다. 첫 경험 당시에는 긴장감과 흥분감으로 감각이 마비되어 격정만을 느꼈지만 그 후로 속옷이 잘못 스치면 깜짝 놀랄 정도의 후폭풍을 겪고 있는데….

“전하… 그, 그만. 디, 디르크가…. 디르크, 살아 있는 거 맞죠.”

무엇보다 옆에 있는 디르크를 신경 쓰는 속마음을 무심코 드러내 버렸다. 그걸 견디지 못하겠는지 그가 서늘해진 눈가를 검지로 훑었다.

그때쯤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그가 얼마 있지도 않은 감정을 쓰는지 퍽 궁금했을 때였다.

“살아 있어. 너는 그러지 못할지도 모르지.”

당장이라도 속옷을 찢을 것처럼 그가 검지에 힘을 줬다. 그러면서도 대답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 시선을 맞춰 왔다. 그녀가 미동하지 않자 수려한 얼굴이 반응을 자아내듯 목덜미로 파묻혔다.

“흣….”

허전했던 피부에 입김이 스며든다. 그녀는 온몸에서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하얀 캐노피만 주시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가 놓으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유명 화가의 작품처럼 느껴졌던 그가 살아 있다는 걸 깨달을수록 눈앞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이렇게 속절없이 안기게 될 바에는 거짓말로 둘러댈까. 아니… 매음굴에서 잡역부 일을 했다는 걸 정확히 아는 걸 보면 아마도 그는 정보원에게서 정보를 받았을 것이다. 잡역부로 일했다는 사실이라도 확실히 인정하는 게 나을까.

혼란스러워지는 사이 속옷이 허벅지에 걸쳐졌다. 그리즈는 그에게 아래를 보이지 않으려 무릎을 강하게 맞붙였다.

파란 눈동자가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가 느릿하게 올라왔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흔을 제대로 확인하려는 건지, 저번처럼 진득하게 입술을 대어 핥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때때로 정신없이 흔들린다. 엊그제의 관계가 그녀에게 어느 정도로 의미 있는지 읽으려 시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허무하고 그럴듯했다’라고 표현했던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허무한 기분보다는 그럴듯함이 더 컸을까. 대체 그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고, 무엇을 알고 싶은 걸까.

그게 무엇이든 그가 정보원을 통해 알아보고 있다면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갈등하며 버티던 그녀가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마침내 탁 풀었다.

“매, 매음굴에서는 잡역부로… 허드렛일을 담당했어요.”

“…….”

“한 10년 정도… 너무 오래 전의 기억이라 확실하지 않아요.”

조금 더 변명하자면, 그곳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 천한 자, 귀한 자가 뒤섞여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잡역부를 보호해 주지 않았기에 거짓말을 해서라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처녀성을 가진 가난한 여인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복하려 드는 승냥이 떼들로부터. 이제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졌으므로 처녀가 아니게 된 건 유감스러울 것도 없었다.

“송구합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흘러가는 중이라며 지루해할 줄 알았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진실이라는 걸 방증할수록 오만했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빗소리만 아스라이 번졌다.

한층 어두워진 눈동자가 허공에서 맴돌았을 때, 속옷에 걸어 뒀던 검지가 탁 풀렸다. 진땀이 밴 손끝이 허벅지를 훑으며 툭툭 내려갔다. 흥분한 사내의 숨이 다급히 번졌다가 지그시 억제됐다. 고요해진 방 안에서 격변하는 그의 감정이 여실히 닥쳐왔다.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옷을 벗겨 가슴에 입술을 대고, 멸시하고, 돈으로 몸을 샀던 순간들을 되돌아보는 것 같았다. 침대 시트를 짚었던 커다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할수록 선명해지는 시간들을 잡아 으스러트리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시트에 툭툭 걸리는 손을 보며 그리즈는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물었다.

그때 미끈한 잇새에서 비틀린 웃음이 흘러내렸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존심만은 지키려 발버둥 쳤던 잡역부를 기어코 창녀로 만든 게 자신이라는 게 충격적인 듯.

“잡역부 마리아를 매춘부로 만든 게 내가 맞다고.”

새벽빛 음울한 눈동자에서는 아무것도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단지 부유물이 혼란스레 떠다녔을 뿐이다. 충격받은 것 같기도 했고 기막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미끈했던 입가에 자조가 어리는 광경을 그리즈는 오롯이 바라보았다. 고결했던 귀족 비아누트에게 긴 흠이 남겨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납고 깊어 보였다.

그래서 그가 자신에게 낸 흠을 제대로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다. 보지 않으니 화끈거리는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때 비로소 느꼈다. 어쩌면 나는 외롭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아니라 비슷하게 절망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는 무엇을 바라 왔던 걸까. 나는, 나는….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엊그제의 관계가 좋았었고 그러므로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심정을 밝힐 수도 있었지만 그간 모욕감을 줬던 그가 원망스러워져서.

“그렇지만 변하는 건 없어요.”

고집스럽게 시선을 맞추던 그는 담담하게 말하는 그리즈를 보고는 기막힌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 상황에서도 당연한 말만 골라 한다는 듯. 네 말대로, 네가 매춘부였어도 개의치 않고 디르크를 쓰러트리고 이 방으로 들어왔을 거라는 듯.

“그래, 변하는 건 없어.”

그 역시 변하는 건 없다고 인정했다. 처녀성에 가치를 매기고 그에 맞게 대접해 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으므로.

기어코 그녀를 발견해 내어 지금처럼 자신의 몸 아래에 눕혀 뒀을 거라는 의미였다. 무수히도 많은 사내를 상대해 온 창녀였을지라도.

그의 의식을 들여다본 순간 뜨거운 멍울이 목구멍으로 울컥 밀려 올라왔다. 태연히 호흡하고 싶은데 숨을 쉴 수 없었다.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가슴 졸이던 상처투성이 마리아가 존재 가치를 잃고 죽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자 꽃을 좋아하고, 계절과 하늘, 새벽, 딸기를 좋아하는 특징을 가진 그리즈 베네딕트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째서 하필 냉혈한 당신 따위가 나를 이리도 무방비하게….

그녀는 왈칵 터지려는 눈물을 참으려 지그시 아랫입술을 물었다. 붉게 달아올라서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그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어붙어 깨질 것 같은 손으로 물을 긷고, 빌튼에게 얻어맞은 통증으로 몸서리치던 시간 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의 시선을 느낄 때면 늘 죄인처럼 고개 숙였던 그리즈는 처음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누군가를 이렇게 떳떳이 바라보는 게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좋을 줄 알았는데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턱 밑이 허전하기도 해서 다시 고개 숙였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그녀의 턱을 끌어당겨 번듯이 눈을 마주쳤다. 어떤 얼굴인지 제대로 확인하듯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어봤다. 고귀한 대공의 시선을 오롯이 받으니 목 안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마른 침을 삼킨 그녀가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기운이 물씬 풍기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폭설이 내리는 겨울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새벽 풍경이 눈앞에 겹쳐졌다. 누구도 발들일 수 없는 절대적인 성역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곳에 이미 작은 발자국이 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은 소녀의 발자국. 그가 오래도록 그려왔다던 첫사랑의 흔적….

그 흔적을 새기며 무수히도 많은 밤을 지새웠을 그가 풍경에 덧씌워지자 그리즈는 서글프게 눈 감았다. 호기심을 채우면 차갑게 변하겠지. 그리고 첫사랑을 위한 선물이 가득한 방으로 돌아가 심연에 잠길 것이다.

그리즈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이내 벗겨지기 직전이던 속옷을 올려 입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또 그가 집요히 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꺼내 놓았다.

“저는 단지… 저를 보호하고 싶었습니다.”

스테판이 했었던 무수히도 많은 폭언 중에 유독 공감했던 얘기가 있었다.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말. 그 사실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는 뻔한 위로의 말 따위는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 보호하지 못했네.”

자신을 보호하려 기를 쓰며 거짓까지 고했지만 결국 실패한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실패하게 만든 게 자신이라는 사실이 퍽 만족스러운지 어둡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내게 넘겨.”

나른하고 안정적인 저음을 흘리며 몸의 권한을 넘겨받으려 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첫사랑을 품고 있으면서, 어째서….

그리즈가 헝클어진 회색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매만지며 말했다.

“엊그제 전하께서 잠결에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신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려 하는 순간 그의 눈을 보았다. 일순간 얼어 붙어버린 호수처럼 차가웠다.

그는 그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천한 신분의 입에 그 이름이 담기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기회가 되는대로 수집방의 그림을 보러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는 입술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내며 수집방의 풍경을 그려보았다. 그곳에서 그는 첫사랑의 환영이 사라졌다고 말했었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다면 그는 어떻게 나올까.

“그분께서 다시 나타나시면 저는 버리시겠죠?”

그때 그가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그러다 헛된 생각을 불식시키듯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드릴 수 없어요.”

그녀의 대답이 적잖게 단호했다. 그 찰나 달빛에 비친 근사한 얼굴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허락 맡는 거 같아?”

그러면서도 다시 잔혹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가 발버둥 친다면 철창 속에 가둬서라도 갖겠다는 듯.

그리즈는 불안정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때 침대 매트리스 위로 낯선 물건이 올려져 있는 게 보였다. 조금 전 사이드 테이블에 있던 상자 속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사내의 것을 본 따 만든 인공 성기와 포박용 가죽 수갑, 정체를 알 수 없는 크림…. 즐거움이 가득했던 스테판의 음성이 귓전에 감돈다.

“테이블에 선물도 마련해 놨어.”

그 말이 맞다면 저 물건들이 스테판의 선물이었다. 어찌 저런 흉물스러운 걸 가져다 놓을 생각을 했을까. 저 물건을 보고 놀랄 여인을 떠올리며 웃었을 얼굴을 상상하자 이가 으득, 하고 갈린다.

그는 그녀의 시야를 좇다가 모조 성기를 발견하고서 끄트머리를 잡아 들고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런 걸 봤을 리 만무한데도 거부감이 없었다. 어쩌면 자극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난밤 관계하면서도 쿠엔틴과 태연히 대화했던 그라면 그럴 수도 있을 듯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진갈색 모조 성기의 끝부분이 그녀의 허벅지를 쓱 긁었다. 그러다 금세 흥미 잃은 그는 그리즈의 허벅지 옆에 떨어진 포박용 수갑을 집어 올렸다. 스테판, 그 망할 자가 여인의 두 손을 결박하고 범해도 좋다는 의미로 가져다 둔 물건일 터.

예상치도 못하게 수갑의 버클이 툭 풀렸다. 아주 느리게 그녀의 손목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항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과시하듯 채우는 속도가 느렸다.

숙적과 밀담을 나눈 죄로 모멸감을 주려는 것 같은 예감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다. 설마 이번엔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 두고 어제처럼….

“저, 전하…. 어째서 제게 수갑을….”

그가 다른 쪽 수갑을 열었다. 그러곤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자신의 손목에 채웠다. 사용법을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손목을 탄탄히 얽은 그는 비로소 안정적인 얼굴을 했다.

“할 얘기가 많아서.”

한층 뜨거워진 숨결이 목덜미를 옭아맨다. 기분이 몽롱해지는 사이, 그가 손목을 슬쩍 위로 올렸다가 놓으며 수갑이 정말로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시종일관 빠르게 뛰던 심장이 기어이 찌릿해져 왔다. 매번 다급히 달아났던 여인에게 그는 어떤 기분을 느껴 왔던 걸까.

호흡이 빨라지자 네글리제를 스친 유두가 뾰족하게 일어서 버렸다. 그 부분을 본 그가 입술에 느긋하게 혀를 둘렀다. 부드러운 아랫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리자 저릿한 전율이 젖꼭지로 뭉근하게 차오른다. 저 입술이 유두를 핥아 줬을 때의 감각이 떠오른 거다.

“흣….”

치미는 신음을 삼킨 그리즈가 고개 돌려 디르크만 바라봤다. 그러자 새파란 눈동자 또한 디르크에게 관심을 줬다. 그리고 그녀. 다시 디르크.

수갑을 찬 그의 손이 그녀를 집중시키듯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리즈의 붉은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밖에는 비가 오고, 방문은 잠겨 있고, 방안은 더없이 아늑했다. 그와 연결된 수갑이 손목을 부드럽게 옥죄어 정신이 아득해지지만 그렇게 한가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러다 디르크가 눈 뜬다면 걷잡을 수 없는 스캔들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건 정말이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를 밀어내려는데 뜨끈한 입술이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수갑 채운 걸로는 부족해 보였다.

“으읏….”

어째서 갈증을 내는 것처럼 느껴질까…. 아슬아슬하게 침대 시트를 쥐며 그리즈가 입술을 떨었다.

그대로 몸을 탐할 것 같았지만 그는 예상외로 가죽 수갑 안에 갇힌 손목을 쥐었다.

이내 가볍게 들어 올려서는 입술로 손등을 느릿하게 훑었다. 아찔할 만큼 뜨거운 숨이 살결에 박힌다. 피부 속으로 들어와 피를 말리기까지 하는 건지, 심장이 저려 왔다.

“읏….”

피부의 향을 폐부에 새기려는 듯 천천히 호흡하던 그가 눈매를 나른하게 좁혔다. 애욕이 흉흉하게 쌓인 앞섶과는 달리 느긋했다. 이대로 며칠을 보내도 견딜 수 있어 보였다. 그건 그거대로 즐겁겠다는 듯.

그러다 그녀의 허벅지에 자리 잡은 흉터를 세세히 살펴보았다. 이내 이를 지그시 물었다가 풀며 낮게 말했다.

“잡역부라도 보수는 줘야겠지.”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막만 한 작은 주머니가 그녀의 손바닥에 얹어졌다.

주머니의 끈을 푼 그는 내용물이 잘 보이도록 입구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새파란 눈으로 그녀의 반응을 살핀다.

“키스 값.”

침울해진 그리즈의 눈동자가 갈색 주머니 안을 들여다봤다. 붉은색의 동글동글한 것이 열 개가량 있었다. 안에서 하나 꺼내어 향을 맡아 봤다. 상큼한 딸기향이 폐부에 진하게 쌓인다. 딸기. 언젠가 벨린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과일….

흔들리는 붉은 눈이 사내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걸로도 괜찮냐며 눈빛으로 물어 오는 듯했다.

왜인지 눈앞에 흑발 소년이 어른거린다. 그 소년도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아낌없이 가져와 매일 창문으로 넣어 줬었는데….

그리즈는 그간 꾹꾹 쌓아 왔던 감정의 둑이 쩍쩍 갈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뜨겁고 벅차오르는 가슴 부근을 꾹 눌렀다. 자꾸 마음을 휘두르는 대공 비아누트가 미웠다. 그런데 싫지 않아서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붉어진 눈시울을 가리기 위해 눈감으며 딸기 캔디를 입 안에 넣었다. 그가 의도했던 건 아니었겠지만 고마웠다. 고맙다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딸기 향을 맡으니 멸문당하던 날 파괴되었던 교각을 천천히 되돌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기억들이 입 안에서 녹아내린다. 눈 내리는 밤, 가족들과 나누어 먹었던 딸기 케이크. 정찰용 창문 안으로 떨어져 깨진 딸기 캔디를 먹으며 흑발 소년을 내려다봤던 기억….

사랑받았고, 사랑할 이가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어둠 속에서 숨죽여 울던 찾아다녔던 사람들이 마법처럼 찾아와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긴장감을 녹여냈다. 가슴 벅차올라 눈물이 흐를 것 같으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슬픈 기억들이지만 그래도 행복해서.

“감사합니다….”

귀걸이, 금화, 회중시계를 받을 때도 담담했던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떨렸다. 그는 그 속에 밴 먹먹함과 기쁨을 단번에 읽어내지 못하고 표정을 유심히 주시했다.

그녀 또한 그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순수하게 와 닿는다.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 짐승 같았다. 아주 성마르게 그녀의 감정을 해석하려 시도했다. 느껴 본 적 없어 공감할 수 없기에 이해라도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조금 묘했다. 지금껏 그는 상대의 공포와 불안을 기막히게 감지하지 않았나. 그만큼 동물적 감각이 뛰어나다면 어째서 기쁨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지금껏 크게 관심 없었던 영역이라서? 혹은 타인의 기쁨에 무딘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에게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앞섰다.

“저… 기분 좋아요.”

좋다고 말하자 섭리처럼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지금껏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따라 웃을 줄 알았지만 그는 신기한 광경이라도 본 듯 사로잡혀 있었다.

파란 눈동자가 어지러이 일렁인다. 겨우내 혹한에 시달리다가 봄꽃을 마주친 것 같았다. 억세게 버텨온 하찮은 생명의 가치를 새삼 느끼는 시선처럼 보였다.

뒤이어 정제되지 않은 열망이 서서히 망막에 깃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폭발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뜨끈히 달아오른 시선이 그녀의 허리 부근을 막연히 맴돌았다. 그러다 허리까지 올라간 네글리제 아래로 드러난 매음굴 문양을 문득 살폈다. 문양 아래 천박한 글자가 그의 눈동자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오르파담…. 순간 새파란 눈에 날이 서며 사나워졌다.

숨을 꾹 참은 그리즈는 그의 의복 팔뚝 부근에 새겨진 금빛 자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바이렌하그의 주인이라는 걸 의미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문양에 비교하자 매음굴 표식이 그렇게 천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급히 네글리제를 내려 문양을 가렸다.

다시 찾아온 정적을 느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하나 더 꺼진 촛불의 심지에서 한줄기의 새하얀 영혼이 하늘로 유유히 날아갔다.

한층 짙어진 어둠 속에서 그가 애틋한 시선을 주었던 것도 같았다. 반면에 그의 앞섶은 여전히 성이 난 상태였다. 그걸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지도 않으며 그는 몸으로 여인을 뒤덮고만 있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입 안이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걸 느끼던 그녀는 어렵사리 입술을 열었다. 그와 독대하게 되면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저… 노파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지만… 후작 각하께서 저를 디르크와 혼인시키려는 걸로 모자라 직접 아델과 혼인해서 영지를 넓힐 거라고 말했어요.”

충분히 놀랄 만한 얘기에 그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걸까. 그녀가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그는 전혀 다른 부분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

“살고 싶다더니.”

그의 말대로 돈과 권력을 가진 자의 야망을 밀고했다가는 죽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피바다가 되리라는 걸 예감하면서도 지켜만 보는 건 비겁한 짓이었다. 훗날 가족들을 떳떳하게 볼 낯도 없겠지.

그러므로 목숨이 위태로워지더라도 막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바이렌하그와 할머니와 저택 사람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도 반란으로 전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대공 비아누트를 상상하면 조금 가슴 아프기도 해서.

“바이렌하그의 풍경은 아름답고… 잠시라도 제 불행을 잊게 해 줬어요. 지켜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길쭉한 손이 조심스레 뺨을 매만졌다. 폐허 속으로 빨려드는 착각이 들었다. 날것의 감정들이 피부로 전해져 오는 듯했다. 따갑고, 맹렬하고, 저릿한 감각이 감돌아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곧 떠날 사람처럼 말하네.”

“…….”

“내가 갖겠다고 했는데.”

잠시 숨을 멈췄던 그녀는 긴장감에 입술을 떨면서도 말을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떠나게 되잖아요.”

그리즈의 세상 속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정든 고향을 떠나 다른 세상 속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 땅속의 흙으로. 미련 많은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그녀는 그런 일들이 내일 당장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공허해지지만 받아들이기로 다짐한 게 오래였다.

“어찌 예외가 있을까요.”

어느새 거세진 빗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긴 손가락으로 눈가를 훑던 그는 아주 쉽게도 대답했다.

“잘 지켜야겠군.”

지킬 거라고 했다. 네게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갖기 위해서.

하지만 그의 눈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아름답고, 사람의 불행을 잊게 해 주는 존재를 지켜야 마땅하다면 네게도 그래 줄 의향이 있다고.

한줄기 새벽빛과 폭우가 뒤섞이는 혼돈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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