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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새벽 5시였다. 그리즈는 테이블 바닥으로 떨어진 손수건과 금화 열 개, 회중시계를 챙긴 후 그의 방을 나왔다.
그의 방에서 뒤척이다가 묘한 꿈을 꿨다. 그녀는 공주였을 때의 어린 모습으로 대공 비아누트를 만났다.
그는 아주 슬픈 눈으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눈을 마주치려 애썼지만 그는 눈이 먼 사람처럼 허공만 주시했다.
그러다 한쪽 무릎을 꿇고 어린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채 손을 매만졌다. 그녀가 손의 온기를 느끼려 했다.
그 찰나 성인이 된 그리즈가 옆을 유유히 지나갔다. 어디를 보는지 몰랐던 대공은 고개 돌려 그녀를 정확히 주시했다.
서서히 빠지는 그의 손힘을 느꼈던 게 그게 꿈의 끝이었다. 어른이 된 자신을 향해 당장이라도 떠날 듯한 그의 옆태를 봤던 게 기억에 남았다.
멍한 정신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왜 그런 꿈을 꿨는지 모르겠다. 잠들기 전 들었었던 그의 말 때문인가.
“왜….”
“…….”
“장난 그만해. …그리즈.”
혹시 그가 다른 단어를 말하려 했던 게 아닐지 추측해 봤다. 더군다나 그리즈라는 단어는 흔하디흔하지 않나.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을 때 그리즈의 이름은 빌리엄이었다. 그녀가 아들이라고 믿은 아버지가 왕세자에게 하사할 이름을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직후 딸이라는 걸 알게 됐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어찌 됐든 이름을 지어 줘야 했기에 그녀의 머리칼 색을 보고 ‘회색’이라는 뜻의 그리즈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쩌면 대공도 회색이란 뜻의 단어를 말하려 했거나 그리즈로 시작하는 다른 이름을 말하려 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가 가짜 율리아나의 본명을 알아냈을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떤 이름을 부르려 했던 걸까. 수집 방에 있는 그림의 장막을 걷어 낸다면 알 수 있을까.
어지러운 마음으로 1층까지 내려왔다. 하인들이 기상하기 전이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 찰나, 1층 서재 쪽 복도에서 당당한 발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나 아델, 디르크 아니면 스테판일 것이다.
그리즈는 불길한 기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잡았다.
“율리아나.”
스테판이었다. 그녀는 숨을 훅 뱉으며 다급히 뒤돌아 인사했다. 단지 무릎을 굽혔을 뿐인데 아랫배가 뻐근했다. 하긴 뒤에서 정신없이 치덕거리는 사내의 힘을 온몸으로 버텼으니 멀쩡할 수가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숙부.”
대공의 방에서 나오며 매무새를 정리했지만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예의는 차렸으니 방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였다.
“이 시간에 어디 가는 길이지?”
그리즈는 불안한 기색으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스테판을 만날 줄 알았다면 부스스한 머리라도 제대로 정리하고 나올 것을.
“잠이 오지 않아 바람을 쐬려다가 너무 이른 시간이라는 걸 깨닫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스테판은 평소와는 다르게 추레한 그리즈의 행색을 의아하게 훑어 댔다. 다만 그녀의 표정이 너무 무심한 덕분에 달리 의심하지는 않았다.
“만난 김에 얘기 좀 할까.”
의미심장하게 웃은 그가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무언가 긴밀히 나눌 얘기가 있었는지 복도 안쪽 서재로 들어갔다.
정오에 햇살이 환히 들어와 화실로 썼던 장소였다. 이곳에서 대공 비아누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었는데….
그러다 무심코 또 그를 생각한다는 걸 깨닫고 이마를 매만졌다. 그리즈가 피로해하는 사이 스테판은 창가 앞에 서서 밖을 내다봤다.
“디르크와는 어때?”
예상 못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뻐근한 허리를 가볍게 누르며 스테판의 등 뒤에 섰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함께 다른 나라로 떠나거나, 아델의 아이를 키우자는 제안을 그에게서 받았지만 아직은 결정 내리지 못했다. 비밀을 들킬까 싶어 그리즈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나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게 그녀의 입장이다. 스테판은 건방진 애완동물을 눈여겨보는 투로 그리즈를 훑어봤다.
“나쁘지 않다라…. 좋지도 않다는 의미군.”
냉혹한 지적에 흠칫 놀란 그리즈가 고개 숙였다.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 물론 어슴푸레 밝은 풍경에는 관심 없었다.
그러다 깊게 호흡하고는 공기를 곱씹는다. 다시 한번, 또 한 번. 이내 훅 뱉어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로즈마리군.”
밤새 잠자지 못해 노곤했던 정신이 바짝 깨어났다. 지금 로즈마리 향기가 난다고 말한 건가…? 설마 대공의 로즈마리 크림 향이 몸에 배어서…?
입안이 타닥타닥 마르는 순간 그가 뒤돌아 한 걸음씩 다가왔다. 사박, 사박. 규칙적으로 번지는 걸음 소리에 소름이 끼쳐 올랐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는 아주 여유롭게 멈춰 서서 살짝 고개 숙였다. 매끄러운 코끝이 회색 머리칼을 스치며 공기를 훅 빨아들였다.
발끝에 끈끈한 거미줄이 쳐지는 듯했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속절없이 걸려들고 말 터인데….
그때 로즈머리 향의 근원지를 찾은 듯, 뒤쪽 머리칼을 한 움큼 잡아 깊게 향기를 맡았다. 어제 진땀이 밴 손으로 그가 쥐었던 곳…. 느릿한 손길을 떠올리던 그리즈가 숨을 훅 마시곤 말했다.
“향… 향기가 좋다고 스치듯 말씀드리니 전하께서 크림을 조금 주셨어요.”
이 대답이 최선인 것 같았다. 스테판은 정말 크림을 주었는지 대공에게 캐묻기는 힘들 거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것이다.
“문제가 있는지요.”
다급히 내세운 변명에 스테판이 날카로운 의혹을 드러냈다.
“비아누트? 네가?”
지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면 곧장 대공과의 관계를 의심받게 될 것이다. 그리즈는 파리하게 떨리는 호흡을 들킬까 봐 여러 번에 걸쳐 내쉬고는 눈가에 어린 긴장을 풀었다.
“전하께서 제게 조금 너그러워지신 것 같아요. 제가 바이렌하그를 위해 혼인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 말조차 석연찮은 듯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여졌다.
“대공은 그 정도로 너그러운 위인이 아니야. 미인계에 현혹될 성정이었다면 내가 진즉 써먹었을 텐데.”
의문이 깃든 갈색 눈동자가 그리즈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꺼림칙한 의혹을 해소할 수 있다면 하루를 투자해도 상관없다는 듯.
그리즈는 귓속에서 삐익, 하는 이명을 들으면서도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내보였다.
“크림을 받으며 저도 조금 묘하다고 느끼긴 했어요. 저를 불결하게 느끼고 계실 텐데…. 혹시 제게서 숙부의 정보를 얻으려 호의를 베푸신 걸까요?”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스테판이 마침내 고갤 느리게 끄덕였다. 속을 알 수 없는 대공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 지나친 의심은 독이 된다는 사실을 느꼈는지, 다시 창가 앞에 섰다.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있으면 내게 곧장 얘기하렴.”
“…….”
“디르크의 가문과는 잘 조율하고 있어. 그쪽에서는 디르크가 마음을 바꿀까 봐 우려하는 눈치더군.”
다행히 대화가 부드럽게 전환했다. 제자리에서 부스러질 듯했던 그리즈는 이마의 식은땀을 숨기듯 훔쳤다. 그때 스테판의 미성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네가 디르크를 잘 붙들고만 있으면 모든 게 굴러 들어올 거야.”
굴러 들어온다라…. 대체 뭐가 굴러들어올 거라는 걸까.
그녀 역시 경치를 내다보려는 척 창틀 앞에 섰다. 이내 스테판의 눈을 들여다봤다. 지금은 그는 무얼 보고 있을까.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의 금화? 정말로 대공을 위협할 수 있을 만큼의 군대?
“혼인만 성사되면 엄청난 게 굴러 들어오는 건가요?”
탁한 갈색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창녀에게 계획을 드러내도 문제없을지 계산하는 게 분명했다.
“말해 준다고 이해하겠니. 너처럼 천한 것이.”
미간을 살짝 좁혔던 그리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매음굴에는 커다란 쓰레기통이 있다. 아니, 어쩌면 매음굴 자체가 커다란 쓰레기통인지 모른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성욕뿐만 아니라 숱한 비밀과 분노 등을 버리고 가곤 했다. 이미 누가 버린 지도 모를 쓰레기가 수북했으므로, 하나 더 버려도 티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곳에서 11년간 생존해 왔다.
“나으리들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좋은 점도 있죠. 어떤 비밀 얘기를 듣든 뒤돌아서면 곧바로 잊어버리게 되거든요.”
“…….”
“어찌 되든 상관없겠지요. 숙부께서 제 정체를 밝히시면 곧 죽을 목숨이니까요.”
그가 목숨 줄을 쥐고 있으니, 비밀을 알아도 발설할 수 없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는 일리 있다는 듯 유유히 미소 지었다. 그러다 지금껏 묵혀 둘 수밖에 없었던 오물을 툭 던지듯 말했다.
“조만간 아델이 내 신부로 굴러 들어올 것 같아.”
잠자코 집중하던 그리즈가 눈을 크게 떴다.
“아델이요…?”
벼락 맞은 것처럼 놀라는 반응이 재밌다는 듯 그가 웃었다.
“그리고 아델의 가문이 내게 영지와 군사를 지원해 줄 거야. 사위를 지원해 준다는 명목 하에.”
“…….”
“너는 디르크와 혼인해서 그곳의 상황을 내게 전하렴.”
아무래도 아델과 디르크, 가짜 율리아나를 체스 말처럼 이용해 대공을 무너트리겠다는 얘기 같았다.
그런데 아델의 가문 입장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다. 어째서 두 자녀를 모두 바이렌하그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 걸까. 한정된 자원일수록 효율을 따져 가며 쓰는 법인데….
다만 대공을 견제하고 스테판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도우려 하는 거라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짐작이 맞는지 스테판이 흡족하게 턱 가를 매만졌다.
“그쪽도 비아누트의 세력이 이 이상 커지길 바라지 않는 눈치야. 우리 국왕 폐하 빼고는 누구라도 그러하겠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누구에게나 적용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른 가문에 기생해서라도 혈육을 쳐 내려 하는 스테판이 정말로 이해되지 않았다.
“계획이 성공할 거라고 예상하시나요?”
반정은 사람 한두 명을 죽여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즈는 어린 시절 폐부에 깊숙이 각인되어 버린 피 냄새를 다시금 맡으며 괴로워했다.
그리즈를 하찮게 돌아보던 그는 다시 창밖 풍경으로 관심을 돌렸다.
“참 경치 좋아. 전 대공 전하의 석고상이 있는 곳 말이야.”
그녀는 뒤늦게 그의 어깨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평지가 계단식으로 이어진 꽃밭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석고상은 평지 끄트머리에 서서, 저 아래 호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 풍경은 신비로움이 강했다. 편히 일상생활을 할 때와 다른 긴장감을 새벽에게서 즐겼던 그리즈는 아주 당연하게 긍정했다.
“네, 좋아요. 경치.”
풍경 얘기를 하는 스테판의 갈색 눈동자는 기묘하게 석고상만 주시하고 있었다.
“저 석고상이 세워지기 전, 저 자리에는 내 연구실이 있었어. 7년 전쯤에는 학자가 되려 했거든.”
지금껏 그는 미래에 대해서만 얘기했었다. 그런 그가 돌연 과거를 꺼내 놓았다.
그리즈는 그가 콕 찍어 말한 7년 전, 그에게 있어 인상 깊은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걸 직감했다. 원망스레 석고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7년 전쯤이요?”
혹시나 그가 말을 멈출까 하는 걱정으로 조심스레 채근했다. 미리 안심시켜 둔 덕분인지, 그가 경계심 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때는 어렸을 때부터 내게 세상 이치를 가르쳐 줬던 스승과 함께 늘 저곳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어.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지만 스승과 함께여서 즐거웠지.”
그리즈는 행복하게 연구하는 소년 스테판을 상상했다. 고작 7년 전일 모습이지만 딱 떠오르지는 않았기에 그저 그의 옆에 서서 경청했다.
“몇 년 가지는 못했어. 전 대공 전하의 석고상 위치를 고심하던 관료들이 내 연구실을 허물고 석고상을 세우기로 했으니까.”
“…….”
“물론 비아누트는 그걸 문제 삼지 않았어. 대공으로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출정하느라 바빴거든. 결국 내 연구실은 마구간 옆으로 밀려났지.”
그리즈의 시선이 마구간 옆으로 향했다. 주변이 어슴푸레 했지만 이렇다 할 건물은 없어 보였다.
“어두워서 그런지 안 보이네요.”
“그래, 안 보이겠지. 너무 급하게 지은 까닭에 며칠 뒤 폭우로 무너져 버렸거든.”
“…….”
“그 안에 있던 내 스승은 기둥에 찔려 즉사했어.”
그가 권력을 탐내는 이유가 달리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했던 바였다. 목숨이 위태로워질 역적모의를 특별한 이유 없이 하는 바보는 없을 테니 말이다.
“혹시… 스승의 죽음을 복수하고 싶으신가요?”
폭우에 폐허가 됐을 연구실을 상상해 보던 그리즈가 나직이 물었다. 피식 웃은 그는 예상 밖의 대답을 던져 놓았다.
“아니.”
세상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달을 때였다.
“스승의 사망 소식을 듣고 비아누트에게 따지러 갔어. 얼굴에 주먹을 먹여 줄 생각이었지.”
스테판은 그때를 회상하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어렸을 때부터 비아누트는 내가 분풀이를 하면 적당히 져 줬거든. 나를 이겨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거야. 그때마다 나는 비아누트가 우군이라는 걸 번번이 확인했고.”
“…….”
“하지만 그날은… 기사들에게 막혀 손 하나 댈 수 없었어. 앞을 막아선 대대장이 나를 기어코 비아누트 앞에 무릎 꿇리더군.”
문득 본 그는 원망이 깃든 열일곱 소년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탁하게 웃으며 마구간 옆의 텅 빈 잔디를 바라보았다.
“변한 건 비아누트의 이름 앞에 대공이라는 직위가 붙었을 뿐인데. 나는 아니었고, 감옥에 갇혔지.”
“…….”
“어머니는 나를 도와주지 못했어. 율리아나를 잃은 충격 때문에 한동안 실어증을 앓으셨을 때라서.”
권력을 갖고 싶다는 그의 욕망이 적어도 7년 이상 쌓여 부패해 버린 것 같다. 죽어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짐작에 확신을 주듯 그가 말을 이었다.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너도 한 번쯤은 느꼈겠지?”
그러니까 그는 이 모든 계획이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자기 연민에서 시작된 탐욕이 커지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연회가 열리는 밤 4층에 방을 준비할 거야. 디르크와 네가 사랑을 나눌 방이지.”
별안간 그가 내비친 계획에 눈앞이 새카매졌다. 그리즈는 당황한 기색으로 스테판을 응시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지금껏 매음굴에서 붙어먹었던 실력을 발휘할 때야. 디르크가 네 몸속에다 아이를 만들고 있다는 걸 남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시끄럽게 굴어도 좋아.”
“…….”
“회임해. 이왕이면 아들로.”
그리즈는 정말이지 그의 명령이 죽기 전 유언이길 바랐다.
층 서재에서 나가며 등줄기가 쭈뼛해질 만큼 놀랐다. 먼지떨이 깃털을 든 브람이 서재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브람은 졸린 눈을 끔뻑대며 비몽사몽 인사했다. 스테판이 의심의 눈초리로 브람에게 말을 걸었고, 그리즈는 그 틈에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의 대화로 스테판이 자기방어를 이유로 군대를 꾸리려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만족스러울 만큼 꾸리면 대공의 자리를 노릴 게 불 보듯 뻔했다.
대공과 할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명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기에 걱정스러웠다. 어쩌지, 어쩌지. 초조하게 입술을 물기를 수십 번.
이대로 입 다물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스테판이 계획을 이뤄, 저택을 피바다로 만들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 할까.
어릴 적 겪었던 생지옥이 다시금 눈앞에 그려진다. 핏줄기가 사방으로 튀고 사람들의 비명과 적군의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게 뒤섞였던 그곳. 그랑디아.
다시금 괴로워져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때 언젠가 할머니와 나눴던 대화가 나직이 울렸다.
“신을 믿니?”
“네….”
“그것참, 다행이구나. 나도 믿고 있거든.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도 신께서 의도하신 일이란 것을 말이야.”
그 당시에는 할머니께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신앙심을 키우기 위해 신을 더 전지전능하게 포장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곱씹어 보니, 할머니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멸문당한 가문의 공주가 살아남아 타국 대공가까지 오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목숨 줄을 끈질기게 붙들려 고통받을 운명이 아니라면, 어떠한 역할로 하여금 오게 된 것일 터.
반평생 어두운 곳에 갇혀서 하찮게 살아왔더라도 옳고 그름은 알고 있었다. 비통한 죽음이 어딘가에 예정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막는 것이 신을 믿는 자의 도리일 것이다.
어쩌면 신께서 무자비한 살상을 막으라고 그리즈 베네딕트를 보낸 건지도 몰랐다. 나의 목숨이 그만큼 가치 있다는 착각 때문에 일어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신의 뜻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무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불안하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벨린이 방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그래. 좋은 아침이야, 벨린.”
익숙하게 목욕실로 향해서는 내내 스테판의 야망을 어떻게, 누구에게 알릴지 고심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대공에게 직접 고하는 것이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저택 사람들 전부가 스테판을 의심하고 눈여겨보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야 스테판의 행적이 모조리 대공에게 알려질 테니 말이다.
한참을 고심했지만 마땅한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그랬듯 조용했다. 그리즈는 대충 물기만 뺀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은 예배드리셨니? 오라버니 말이야.”
벨린은 창고 안 빨래 바구니에 노란 드레스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다행이에요. 무슨 문제가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해결하신 것 같아요.”
“그래…?”
당분간 성당 근처에는 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유일신의 교리대로라면 그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니까. 그녀 역시 같은 이유로 오늘 아침에는 기도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작게 대답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그는 다시 예배 드릴 수 있게 된 걸까.
방으로 돌아오자 일정이 바빠졌다. 내일 열릴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가 완성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할머니께서 하녀들과 새벽까지 바느질하시다가 잠드셨다고 한다. 의상실로 올라간 그리즈는 할머니의 정성이 담긴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탁한 분홍색 파팅게일 드레스였다. 둥근 치마 라인에 어두운 장밋빛 레이스가 치장되어 더없이 고급스러웠다.
“정말… 이 옷을 할머니께서 만드셨니…?”
그리즈는 한 나라의 공주가 입을 법한 드레스의 자태에 눈을 떼지 못했다. 손녀에게 선물하겠다는 일념으로 바삐 바느질하셨을 할머니가 흐리게 아른거렸을 때였다.
“네,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만드셨어요. 허리 품을 맞춰야 하니 한번 입어 보시겠어요?”
하녀장 로렐이 드레스를 옷걸이에서 가져와 단상에 올려놓았다. 일상용 원피스를 벗은 그리즈는 도넛처럼 둥글게 열린 치마 중심에 두 발을 넣었다.
하녀 다섯 명이 붙어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그리즈는 몸에 부드럽게 휘감기는 드레스의 촉감을 느끼다가 흑경을 바라보았다.
“한 송이 장미 같으세요.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치마가 만개한 장미를 아래로 뒤집어 놓은 매무새였다. 가슴이 ‘V’ 자로 파여 있어 어색했지만 그 덕분에 여성미가 풍겨 왔다.
“내겐 정말… 과분한 옷이야.”
가짜 주제에 뻔뻔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가슴이 죄의식으로 꽉 막혀 호흡하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보란 듯이 기뻐하여야, 하녀들이 할머니에게 편히 얘기 전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그리즈는 애써 미소 지었다.
“기뻐, 그래 정말 기뻐.”
눈치를 살피던 하녀들이 그제야 따라 웃었다. 자잘한 수선이 끝날 때쯤 의상실 안으로 브람이 들어왔다.
“피팅 중이시군요.”
브람은 네모난 선물 상자를 두 손으로 받친 채 로렐에게 다가갔다. 로렐이 상자를 바라보자 차분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아가씨께 사교계 데뷔 선물을 내리셨습니다.”
로렐이 상자를 받아 들고 그리즈 앞에 섰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그리즈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크리스털이 알알이 세공된 티아라가 들어 있었다. 티아라 아래에는 분홍빛이 도는 망사 베일이 달려 있었다. 베일의 끝단은 장미색 가넷 열 개가 균일한 간격으로 장식된 모습이었다.
왕궁에 살며 많은 티아라를 봐 왔지만 베일이 달린 건 처음 구경해봤다. 어떤 용도인지 그리즈가 알아보지 못하자 벨린이 브람에게 대신 물었다.
“티아라인가요?”
브람이 기다렸다는 듯 그리즈에게 대답했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베일과 티아라가 한 세트입니다. 원래는 티아라만 선물하려 하셨지만 어제 전하께서 다시 주문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게 불편하시다면 베일로 얼굴을 가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로렐이 조심스레 티아라를 꺼내어 그리즈의 얼굴 가에 대 보았다. 다들 예쁘다며 감탄했지만 그리즈는 그럴 겨를 없이 어제의 대화를 되새겼다.
“네, 노력하고 있어요. 다만 주목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 걱정이에요.”
그 말을 들은 어제의 그는 곤란하겠다며 조소했다. 그랬던 그가 오늘은 가짜 여동생의 걱정을 잠재우려 베일을 보내 왔다.
둘 중 하나는 진심일 거다. 나머지는 진심을 가리기 위한 연막일 터.
그리즈는 다시 베일을 바라봤다. 둘 중에 더 가치 있는 것이 진심이라면 이 티아라가 그의 진심이었다.
그동안 무수히도 많은 시간 동안 곱씹었던 의문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천한 신분으로 여동생 자리를 꿰찬 여인을 왜 그는 살려 두었을까. 강아지, 루비 귀걸이, 금화, 회중시계를 선물해 준 이유는….
심장이 찌릿해져 오는데 통증인지 벅참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리즈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벨린이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한번 씌워 드려 볼게요.”
벨린과 로렐이 올림머리를 하기 위해 옆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정성 들여 묶은 후에는 베일 티아라를 씌워 줬다.
그리즈는 분홍빛으로 물든 세상을 둘러봤다. 모든 사물이 흐리게 보인다. 그만큼 타인도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묘한 안정감을 몰고 왔다. 촘촘한 장막에 가려져 보호받는 것 같았다.
“와아… 정말 공주님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우세요.”
벨린이 두 손 모아 진심으로 기뻐했다. 긍정하듯 로렐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문밖에서, 잠깐 나갔었던 브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너저분하게 널려 있던 빗과 침핀 등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어수선한 틈으로 문이 열렸고 그리즈는 희미한 시야 중심에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모두 허리 굽혀 인사했지만 그녀는 무릎만 까딱였다. 귀족 여인이라면 당연한 인사였지만 그의 특별한 무언가가 된 듯한 착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베일이 뺨을 간질이자 그가 만지는 것처럼 심장이 타들어 갔다.
한 발 한 발 정확히 걸어온 그는 그리즈의 코앞에 섰다. 갓 목욕한 몸에서 풍기는 허브 향에 취할 것 같아 그녀는 호흡을 거부했다.
“자리 비켜 줘.”
그의 침잠한 음성이 의상실에 울렸다. 해야 할 일이 많다며 집요히 붙어 있던 하녀들이, 그 말 한마디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둘만 남은 방 안이 고요해지자 사내의 존재감이 진해진다. 그리즈는 쓰러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호흡했고, 그 탓에 더 진한 향기를 삼켰다.
방패 같던 베일을 그가 천천히 들추어 올렸다. 물기가 배어 더 진해진 흑발이 시야에 선명히 보였다.
“잘 어울리네.”
나른한 눈동자가 화사하게 꾸며진 얼굴을 세심히 바라보았다. 치장이 잘 어울리는지 혹은 예쁜지 평가하는 시선이 아닌,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명확히 알고 싶어 했다.
흔들리는 심정을 들킬세라 눈을 피했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지금의 기분을 설명하고 싶었다. 모두가 의미 없이 흘려버린 얘기를 귀담아 들어줘서 고마운 마음을 알리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까워질수록 그의 명예와 명성을 갉아먹게 될 것이다. 그리즈는 욕심이 머무르려 하는 눈동자를 숨기듯 지그시 감으며 딱딱하게 말했다.
“선물 감사드립니다, 오라버니.”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무심코 바라본 그는 탐욕 어린 시선을 주었다가 창가 앞 소파에 앉았다.
햇살이 대각선으로 끼쳐 온다. 어둠과 빛이 혼재한 공간도 불편하지 않은 듯 그가 턱을 괴며 물었다.
“선택은 했어?”
어제도 그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선택할래? 혼인할지, 그냥 여기서 살지.”
그는 대공이었고,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이었다. 선택하라는 얘기도 빈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무분별하게 증식한 불순물을 어제 모두 배출했을 것이다. 정욕, 갈망, 호기심이 사라졌을 테니 흥미를 잃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알았는데….
“선택….”
“그래, 선택.”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제게서 하룻밤만 원하셨던 게 아니었나요.”
하늘에 구름이 드리우자 의상실이 한층 어두워졌다. 나른하게 풀렸던 그의 눈매가 선명해졌다. 베일 속에 숨겨진 얼굴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보겠다는 듯.
“부족해.”
그동안 쌓인 게 많아서, 한 번으로는 해소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럼 대체 몇 번이나…. 그리즈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서늘한 질문이 울렸다.
“심란한 눈이네.”
“…….”
“이게 오래 갈 것 같아서?”
앞으로 밤낮없이 살을 섞어 댄다 한들 창녀에게 줄 마음은 없다는 얘기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네 주제를 알라고 속삭인다. 치열히 욕망했었던 어제의 시간들을 깨끗이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즈가 침울하게 고개 숙였다.
“…아뇨. 그럴 리 없겠죠.”
조금 억울했다. 저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처지인지 이미 알고 있었는데. 너무 잘 알아서 그를 제대로 눈에 담을 수도 없었는데….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를 찬란하게 비쳤다. 그럴수록 역광을 받은 그의 모습은 더 어두워졌다.
“그래. 그럴 리 없어.”
초조히 아랫입술을 이로 긁던 그리즈가 입술을 열었다.
“제가 더럽지 않으신가요.”
고요한 공간에 느슨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때로는 강렬하지.”
“…….”
“더러운 게.”
“그래서… 그 더러움을 느끼고자 저를 이 저택에 두시려는 건가요?”
“응.”
칼로 자른 듯 대화가 뚝 끊겼다. 그리즈는 끝단에 달린 보석의 무게 때문에 흘러내린 베일을 벗었다.
그는 햇살에 쬐이는 목덜미가 따가운지 손으로 감싸며 말을 덧붙였다.
“너는 내 아이를 가졌어. 아주 귀중한….”
“…….”
“자산이기도 해.”
아이, 자산….
냉정하기로 유명한 바이렌하그 대공다운 발상이다 싶었다. 저렇게 정 없는 사내를 나는 왜…. 그리즈는 울컥 치미는 비애를 삼켰다.
“더러운 제게서 후사를 보셔도 괜찮으신가요.”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가 마땅하게 대답하며 조롱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오류를 깨달은 듯 입술을 닫았다.
그대로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료함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했다.
“제가 전하의 아이를 가진 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그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바로 앞에다 했거든.”
“…….”
“세쌍둥이도 가능해.”
보조개까지 드리운 그의 뺨을 보자 기막힌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가혹한 현실을 깨닫고는 씁쓸하게 눈을 감았다.
요새 회임에 대한 얘기를 부쩍 자주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자애롭고 상냥하다며 찬양하는 신은 사실 악마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스테판이라면 무서워서라도 수긍했을 그녀였다. 더 무서운 사람이 앞에 있는데 저항하고 싶은 게 이상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당장은 말을 섞고 싶은 걸까. 정말 비참하게도….
“정말로 제가 아들이라도 낳으면 어쩌죠.”
저항심 어린 음성이 너른 공간에 울렸다. 그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귀엽겠네. 너 닮았으면.”
아들이라도 낳으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었다. 정말로 덜컥 그의 아이를 회임해 버리면 많은 문제가 벌어질 텐데….
그러나 그는 복잡한 문제를 지금 꺼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즈가 입술을 애타게 물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아쉽게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당분간 회임할 수 없어요. 그러니 용심을 거두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게 흡족스러워 살랑살랑 꼬리 흔드는 짐승 같던 그가 그대로 멈췄다.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서서히 증발한다. 찰나에 실의가 어른거렸다.
“거짓말.”
그는 어떤 여인이든 회임시킬 능력을 당연하게 갖고 있었다. 그렇듯 그녀도 당연히 누구의 아이든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어떡하죠. 나는 그럴 수 없어서…. 그리즈의 잇새에서 침울한 음성이 번졌다.
“당장은 회임할 수 없어요, 저는.”
그 상태로 하염없이 시간만 흘렀다. 노란색 카펫에 어린 새카만 그림자가 옆으로 조금 옮겨간 듯도 했다. 묵중하게 앉아 있던 그가 그리즈를 빤히 바라봤다.
“손수건에 피가 묻어 있었어.”
많은 의문을 함축한 파란 눈이 얼굴을 훑는다. 일순간 허를 찔린 그리즈는 눈동자를 불안정하게 굴리다가 입 열었다.
“너무 오랜만이었고… 전하를 상대하기가 좀 버거웠어요.”
하얗고 화려한 얼굴이 애써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아무리 경험 많은 여인이라도 그의 크기를 받아들이기는 힘들 테니.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아아.”
그렇냐고 반문하듯 그가 짧게 감탄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의문을 풀지 못했다.
“매번 바들바들 떨었어?”
사내의 육감이 그녀가 처음이라고 믿는 것이다. 들켜서는 안 됐다. 속인 이유를 그가 궁금해할 거고, 매음굴마다 수소문하다가 그녀의 정체까지 알게 될지도 몰랐다.
“어제는 추웠어요. 두렵기도… 했습니다.”
아주 적은 미소라도 배어 있던 얼굴이 서늘해진다. 눈매를 가늘게 좁힌 그가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훑었다.
“그리고 또?”
좋았던 적은 없었냐고 묻는 듯했다. 그리즈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
어제의 그는 좋아하는 게 뭐냐고 집요히 물었었다. 그리고 작은 몸을 안고, 보듬고, 공들여 키스했다.
그녀는 홀린 듯이 그에게 몸을 맡기고, 나른한 소리를 내고, 그의 손을 잡았었다. 영혼이 그와 강하게 얽힌 느낌을 느꼈다. 사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었다.
하지만 그걸 티 내서는 안 되지 않나. 바이렌하그의 모든 사람이 그의 혼인을 고대하고 있었다. 무엇도 망치기 싫은 마음은 지금도 같았다.
“추웠고, 두려웠고… 그뿐이었어요.”
평소처럼 여유롭게 웃으려 하던 그였다. 그게 불가능한지, 입술은 웃는데 눈은 서늘했다. 불신 어린 저음이 전해진다.
“숨넘어갈 듯 울었으면서.”
필요 이상의 감정 소비를 하지 않던 이전과는 달랐다. 따갑게 드리우는 햇살에 그의 원망이 담긴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신의 앞에서 한 치의 오점 없이 살아왔다는 그가 어긋난 판단을 내린 거다. 그래서 혼자만의 공간에서 수음했고, 엿보이는 걸 즐겼다.
게다가 어제는 한계치까지 발기한 자신의 아래를 더럽다는 듯 내려다보면서도 황홀한 얼굴을 했다. 새파란 눈동자를 치욕으로 물들인 채로 말이다. 처음 겪어 보는 성적 쾌락을 갈망하며 허리를 흔들어 여인의 곳곳을 탐했다.
그의 정결한 세계는 파괴되었고, 그가 두려웠노라 말하는 여인만이 남았다. 그의 감정이 무질서하게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그의 집사인 브람이었다.
“전하, 말씀 중에 송구하지만 재상께서 급한 일로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즈는 어수선한 틈으로 일어서는 그에게 인사했다. 로즈마리 향이 진하게 다가오다가 서서히 사라지자 가슴이 와장창 깨질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를 만나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 후 하녀장 로렐에게서 연회의 순서를 설명 듣고 동선을 맞춰 봤다.
저녁에는 디르크와 왈츠 연습을 했다. 그의 손이 몸 이곳저곳에 닿았지만 불편한 느낌은 없어 다행이었다.
어둠이 서려 오자 그리즈는 하녀로부터 자수용 실을 구해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선물 드릴 손수건을 아직도 만들지 못했다. 떠나기 전에는 완성해야겠지.
달빛 어린 복도를 조용히 걸었다. 그러다 문득 바라본 복도 창밖 저 멀리에서 수련하는 사내가 보였다.
기사 숙소 앞 수련장이었다. 사내는 사람처럼 세워 놓은 볏짚을 단계적으로 베고 있었다.
그가 비아누트라는 걸 깨달은 그리즈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검술 수련하는 모습을 보는 게 아주 오랜만이다. 탑에 갇혔을 때가 마지막이니 딱 11년만.
그런데 그 소년, 지금쯤 어떻게 자라 있을까. 살아 있기는 한 걸까.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듯, 소년은 검을 좋아했으니까.
그리즈는 그 소년이 상냥하지 않다 해도 좋아했으므로 살아 있기를 바랐다. 특별히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는 날에도 꿋꿋이 탑 앞을 지키고 있던 그가 좋았다.
굶어 죽은 형제들과 달리 홀로 살 수 있었던 것도 소년 덕분이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벽에 부딪혀 깨진 돌 파편에 맞아 상처가 났던 이마를 매만지다가 다시 비아누트를 바라봤다. 그는 창문을 등진 채 검을 검집에 넣고는 호흡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비친 창문을 살짝 건드려 봤다. 감각을 느꼈을 리도 없는데 그가 거짓말처럼 뒤돌아봤다. 시간이 멈추고 그와의 사이에서 달빛만 흐르는 것 같다.
다급히 방으로 돌아왔지만 머릿속에 한가득 찬 그를 떨쳐 낼 수 없었다.
연회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시작한 준비를 마치니 벌써 정오가 됐다. 간단히 브런치를 먹고 손님맞이를 시작했다.
먼저 나와 있던 디르크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 때문인지 얼굴을 훑는 초록 눈이 정신없이 오르내렸다.
“저, 정말로 할머니께서 손수 만드신 거야?”
그는 그렇게 물었지만 무슨 질문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초조함이 여실히 느껴져 그리즈는 뺨을 붉히고 말았다.
“으응. 손수 만들어 주셨어.”
말끔하게 차려입은 집사들이 로비에 열 맞춰 서 있었다. 악사들까지 로비 중앙에 자리 잡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몸이 떨리도록 긴장됐다. 오늘 밤 디르크와 밤을 보내라고 스테판이 명령했었다. 지금으로서는 스테판이 급사하길 바라는 게 최선일 터.
“연회가 열리는 밤 4층에 방을 준비할 거야. 디르크와 네가 사랑을 나눌 방이지.”
아무래도 디르크와의 관계를 손수 진전시키고 싶은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기회가 되면 디르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거짓말을 부탁할까.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같이 동침했다고 거짓말해 달라고 하면, 디르크를 사내로서 싫어한다고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디르크는 그저 천진하게 웃었다.
“우리가 혼인한다면 할머니께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반듯한 얼굴을 본 그리즈는 애틋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혼인한다면.”
여덟 명의 악사들이 합주를 시작했다. 여유로운 정오를 연상케 하는 잔잔한 연주에 차분함이 전해져 온다.
“율리, 좀 미안하지만 내 부모님은 참석하지 못하실 거야. 아버지가 수련 중에 발목을 다치셔서 멀리 이동하기 힘들 것 같다는 서신을 보내셨거든.”
“다치셨어? 괜찮으시니?”
“어떻게 보면 다행이지. 여기 오셔서 아델과 나를 데려가려 하면 곤란하니까.”
“아아….”
“그래도 부모님 대신에 이모님이 오시기로 했어. 이따가 소개해 줄게.”
그때 단장을 마친 할머니가 하녀들과 함께 나왔다. 로비의 샹들리에와 커튼, 예술품들이 모두 새것으로 교체되었지만 할머니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리즈뿐이었다.
“아무리 값진 장신구라도 네게 둘러놓으니 고작 장신구에 불과하구나. 공들여 드레스를 만든 보람이 느껴져.”
가짜가 받기엔 과분한 칭찬이었다. 그리즈는 죄의식에 짓눌리듯 고개 숙이며 나직이 대답했다.
“정말 아름다운 드레스에요. 오늘이 평생 기억될 거예요.”
정오의 안단테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심란한 마음을 아름다운 선율로 위로하는 사이 로비에서 여인의 부름이 들려왔다.
“디르크!”
고상하게 머리를 올려 묶은 여인이었다. 나이는 40대 중반으로 디르크와 아델처럼 백금발의 소유자였다. 디르크가 그녀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이모님!”
기품 있게 미소 지으며 다가온 여인이 할머니에게 무릎 굽혀 인사했다.
“베아트릭스 빈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건강을 회복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뵈러 왔습니다.”
할머니가 화답하듯 손 내밀자 베아트릭스가 손등에 입 맞추는 시늉으로 존경심을 표했다. 그러곤 머지않아 관심을 그리즈에게 돌렸다.
“네가 소문의 율리아나구나. 천사처럼 아름다운 아이라더니 사실이었군.”
그리즈는 베아트릭스를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빈젤…. 웬일인지 귀에 익숙한 이름이다.
“저보다 더 아름다우세요.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형식적으로 인사하고는 그랑디아에서의 기억을 곱씹기 시작했을 때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즈의 얼굴을 살피던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희한하구나.”
그리즈는 웃음을 잃지 않고 물었다.
“어떤 점이요?”
“얼굴이 익숙해. 혹시 우리 만난 적 있니?”
바닥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벌써부터 일면식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건가.
“그, 글쎄요. 저는….”
그렇지만 귀족 여인이 매음굴에 드나들었을 리는 없지 않나. 만났을 거라면 그랑디아에서였을 터인데….
입술이 바싹 메말랐다. 그 찰나 대화를 유심히 듣던 할머니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몇 번 봤을 테지.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야.”
주름이 잘게 진 손이 그리즈의 손을 맞잡았다. 왠지 말 못 할 사정을 짐작하고 응원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그건 기분 탓이겠지만.
여인들의 티타임이 시작됐다. 스무 명 가까운 부인들이 식당에 모여 율리아나의 데뷔를 축하했다. 그들이 준비한 선물이 그리즈의 옆자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선물 상자를 열기 시작한 그리즈는 매번 눈부시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신비로운 문양의 파우치와 화려한 장신구 등의 선물이 방으로 옮겨졌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담소가 시작됐다. 차분한 분위기를 즐기던 마르투스 부인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다음 연회는 언제쯤인가요?”
홍차 향을 음미하던 할머니가 두 눈썹을 위로 올렸다.
“다음 연회?”
마르투스 부인은 모두를 대표해 말하듯 부인들을 빙 둘러봤다.
“훗날 열릴 브리튼 공주님의 환영식도 다들 고대하고 있거든요.”
바이렌하그 대공의 혼인은 이제 기정사실이 됐다. 그러니 다른 가문의 입장으로는, 브리튼 대국과 연합하여 더 부강해질 바이렌하그가 슬슬 견제되는 것이다. 하여 혼인에 대해 안주인에게 직접적인 얘기를 듣고 싶은 거겠지.
그걸 아는 할머니는 그저 온화하게 웃었다. 각 가문의 견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슬쩍 발을 빼시려는 것 같았다.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할 수 있겠지. 몇 달 후에야 확정 지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집중한 채로 경청하던 데트만 부인이 과장된 웃음을 보였다.
“바라건대, 혼인이 성사되었으면 좋겠어요. 대공 전하와 브리튼 공주님이 혼인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2세가 태어날 테니까요.”
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화목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리즈의 눈은 침울했다.
또다시 2세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간절히 바라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는 얻을 수 없는 것.
물론 아이를 간절히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가질 수 있는데 갖지 않는 기분과, 아이를 갖기 불가능하다는 걸 번번이 느끼며 비참해하는 기분은 천지 차이였다.
대공에게는 ‘당장은 회임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평생 회임할 수 없을 것이다. 이용 가치가 떨어지는 게 두려워져 둘러댄 거였으니까.
생기 넘치는 분위기에 신이 났는지 부인들이 활기차게 대화를 나눴다. 다만 울적해하던 그리즈는 대화에 끼지 않고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베아트릭스 빈젤의 시선을 한없이 느꼈다.
저녁. 하늘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연회의 화려함이 낮보다 선명해졌다.
방에서 화장을 고치고 나온 그리즈는 미리 연회장에 가 있었다. 단상 옆 어두운 곳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사람들의 눈에 인상적으로 등장하기 위해 할머니가 제안한 방법이다.
접객실에서 체스 두며 친목을 다지던 사내들이 하나둘씩 연회장에 나타났다. 왁자지껄한 말소리와 고소한 음식 향을 맡으니 오랜만에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진다. 그보다는 잇속을 챙기려 어슬렁거리는 짐승들의 냄새가 더 강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바이렌하그 일가와 관료들이 단상 옆 상석에 하나둘씩 앉았다. 문관과 재상, 기사단장 쿠엔틴도 보였다. 반대쪽 단상 옆에는 열다섯 명으로 구성된 악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잔잔한 노랫소리가 어느덧 귀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일순간 뚝 끊기더니 음울한 선율로 바뀌었다.
담소 나누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무수히도 많은 전장에서 치열히 울려 퍼졌던 바이렌하그의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찬란하게 꾸며진 복도에서 대공 비아누트가 관료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모든 귀족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남색 의복을 입고 흑발을 한쪽으로 넘긴 그는 오늘따라 유독 고고하고 고결했다. 척박한 땅에서 양분을 독점한 나무 같았다. 남들보다 크고 훤칠한 몸으로 미끈하게 걸어 들어오는 그를 보자 온몸에서 심장이 뛰었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놀랍도록 느려진다. 그 속에서 새파란 시선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때 벨린이 다가와 티아라를 씌워 줬다. 그리즈는 시야가 탁해졌음에도 그의 실루엣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상석에 앉자 단상에 문관 브리언이 올랐다.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바이렌하그 연회에 참석해 주셔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를 대신해 감사 말씀 올립니다.”
저마다 착석한 손님들이 일제히 박수쳤다. 흐뭇하게 웃은 브리언이 그리즈가 서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럼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한 율리아나 바이렌하그 아가씨를 소개하며 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아가씨, 올라오시지요.”
로렐이 이제 올라가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한 얼굴을 한 그리즈는 치마를 살짝 들고 계단을 올라가 단상 중앙에 섰다.
단상을 유독 밝게 꾸민 까닭에 내빈석이 어두워 보였다.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얼굴을 가린 베일 덕분에 긴장감이 덜했다.
“율… 율리아나 바이렌하그입니다.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애써 침착하게 말한 그리즈가 베일을 들추어 얼굴을 내보이며 인사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울렸고, 다시 한번 그리즈는 기품 있게 말을 이었다.
“모두가 공들여 준비한 자리이니 아무쪼록 즐겁게 즐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됐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으니 앞으로 반만 견디면 된다. 차분한 걸음걸이로 가족석에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대공 비아누트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난번의 연회 때는 그가 두려웠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의지가 되었다. 머리가 그를 같은 편으로 인식한 모양이다. 바보같이…. 수틀리면 당장 그녀를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잔학한 사람인데….
그때 그가 베일을 만족스럽게 훑어봤다. 베일 속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심장으로 차오르는 설렘이 그에게 전해질까 두려웠다. 그 찰나 문관이 공손히 배에 손 올린 채 입을 열었다.
“다음은 국왕 폐하의 사신이 축하 서신을 낭독하겠습니다. 국왕 폐하의 말씀이니 모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갈색 머리의 키 큰 사신이 올라와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내심 지루하게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대공을 건너뛰고 그리즈에게 나직이 물었다.
“아가, 무대는 잘 준비했니?”
디르크와의 왈츠를 말하는 것이다. 곁에서 얘기 들은 그는 내심 불쾌한 눈을 했다. 눈치를 살피던 그리즈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열심히 해 볼게요.”
참 모순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공 비아누트의 돈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그의 하녀로부터 치장 받고, 마음에 그를 품은 채 다른 사내와 춤춰야만 하는 현실이 싫다.
그래도 뻔뻔하게 해내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 어제부터 디르크와 혼인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대공의 뒤에 숨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매음굴에서 살았을 때는 누구보다 강했는데 이제 와 나약해진 거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그의 뒤에 숨는다면 단 하룻밤이라도 편히 잠들 수 있을 테니까.
사신의 낭독이 끝났다. 할머니가 단상에 올라 오늘의 감회를 말했다.
곧장 다과회가 이어졌다. 먹고 마시고 얘기하는 분위기 속에서 할머니가 왈츠를 제안했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다.
앞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디르크가 단상으로 올라왔다.주목받지 않게 되어 안심한 그리즈가 뒤이어 디르크 앞에 섰다.
왈츠의 전주가 고상하게 흘러나왔다. 디르크가 먼저 인사하고는 손을 내밀자 뒤늦게 그리즈가 그 손을 맞잡았다.
이제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해도, 꾸준히 연습해 온 그와는 수준이 다를 테니까.
느릿했던 템포가 조금 빨라졌다. 상기된 분위기 속에서 그리즈는 디르크의 손을 강하게 쥐며 얼굴을 올려다봤다.
함께 연습할 때도 느꼈지만 왈츠는 이성의 몸을 탐색하고 의지하고 음미하는 몸짓이 주를 이룬다. 그 외설적인 행위를 얼마나 기품 있게 포장하느냐가 중요했다.
그 점을 연거푸 상기시키며 고고한 걸음걸이로 단상을 누볐다. 그때 네 개의 발이 같은 보폭으로 걷다가 잠시 엇나갔다. 일순간 멈칫하며 당황한 디르크가 그녀 쪽으로 고개 숙이며 속삭였다.
“나 너무 긴장한 것 같아. 미안해.”
일생에 한 번 있는 그녀의 무대를 망칠까 봐 걱정한 눈치였다. 그의 부담을 덜어 주고 싶었던 그리즈는 고개 저었다.
“나도 긴장했어. 그렇지만 둘 다 같은 곳에서 틀리면 아무도 모를 거야.”
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농담이었다. 디르크가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그럼 실수해도 서로 봐주기로 하자.”
“당연하지.”
드높은 천장의 샹들리에를 기준으로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었다. 움직일 때마다 화려하게 흩날리는 드레스 끝단이 어설픈 춤 실력을 가려 주어 안심이 됐다. 그 못지않게 의지되는 디르크에게 그리즈가 감사를 표했다.
“나와 함께 춤춰 줘서 고마워, 디르크.”
“…….”
“정말 기뻐, 나는.”
그리고 미안해. 끝까지 속일 수밖에 없어서. 그랑디아의 공주 신분으로 만났더라면 너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었을 텐데….
그에게 정말로 하고 싶었던 그 말은 꾹 삼켰다.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는데 새파란 시선이 여과 없이 닥쳐왔다. 무어라 진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젯밤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은 적어도 그렇게 순수하게 웃으면 안 된다는 듯.
그런 그에게 흔들리는 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눈을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로 안정감이 몰려왔던 건 아주 찰나였다.
아주 탐욕스럽고도 위험한 생각이 가슴속에서 증식한다. 지금 손을 맞잡은 사내가 디르크가 아닌 대공이었다면 어땠을까.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서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치고, 은밀한 목소리로 대화하고…. 그리고 또 어제 그랬던 것처럼 밀어를 속삭이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던 그녀의 몸이 디르크에게 기울어졌다. 그때 살짝 들린 베일 아래로 대공의 눈동자가 보였다.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조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듯 불안정한 표정이 가슴을 격렬히 쥐어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