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32)

***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맞았다. 자유로운 세상에서의 추억이 될 거라며 기뻐했지만 그건 아주 한때였다.

이틀간 몸살을 앓았다. 어쩐 일인지 브람이 소고기수프를 만들어 와 억지로 먹게 했다. 입 안이 온통 썼던 탓에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매번 후식으로 사과 반쪽까지 먹고 나서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잘 먹은 덕분인지 감기가 빨리 나았다. 사경을 헤매던 정신이 돌아오자 의문이 앞선다. 브람이 자유 의지로 아가씨의 방을 드나들었을까. 아니, 대공 비아누트가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리즈는 그가 가짜 여동생에게 가진 감정의 정체가 궁금했다. 외면하면 될 일인데 자꾸 파헤치려 하는 스스로의 감정도 마찬가지로 궁금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가지 소득이 있었다. 절차대로라면 행정실에 외출증을 반납해야 했지만 잃어버렸다는 핑계로 빼돌렸다.

앞으로 외출증을 잘 보수하면 관료의 승인 없이도 외출할 수 있을지 몰랐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그리즈는 날씨가 눅눅하다며 벽난로를 피우러 온 벨린을 제외하면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저 보석함을 머리맡에 올려놓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노부부가 양각된 보석함 뚜껑을 열자 사파이어 귀걸이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디르크는 귀걸이를 차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고 혼인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리즈는 그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했다. 혼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인가. 그에게는 아델이 있으니 사람의 온기가 절실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보석함 뚜껑을 닫고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얼 해야만 하는지.

그러자 요하네스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떠올랐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요하네스를 만나는 일 말고는 원했던 게 없는 것 같았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스테판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대공 비아누트와는 되도록 마주치지 말아야 했다.

디르크를 따라나서면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다. 아마도 세상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새로운 바람과 하늘을 상상하던 그리즈가 가만히 귀를 매만졌다. 검지 손톱처럼 타원형의 루비 귀걸이가 손끝을 스친다.

이제는 익숙해진 루비의 감각이 좋았다. 모르는 사이 이 감각이 묘한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불사조가 루비로 환생하였다는 말이 가슴에 남아 있던 덕분이다. 불사조의 축복을 받아, 대공저를 탈출해도 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외에도 이 감각을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이걸 만지면 귀걸이를 끼워 줬던 날의 대공이 떠오른다. 태연해 보이면서도 흔들리던 눈빛에 심장이 일렁인다. 그때의 긴장감, 아픔, 열기. 그것들이 계속 몸을 맴돌길 바라게 된다.

그리즈는 흑경에 귀걸이를 비추어 보았다. 며칠 전부터 귓불에 염증이 생겼다. 감당 불가능한 무게를 짊어지고 자유를 넘본 대가였다.

귀걸이를 빼내자 살 속이 따끔거렸다. 그녀는 면포에 연고를 발라 귓불을 닦아 냈다. 이대로 아물길 기다리고 싶었지만 고생하며 뚫은 귀가 막힐까 봐 걱정됐다. 가까스로 아문 상처에 대공이 또 귀걸이를 넣을지도 몰랐다.

“으…. 안 돼.”

한참을 고민하다 비교적 알이 작은 사파이어 귀걸이를 꼈다. 안 낀 게 훨씬 편했지만 그래도 선물 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착용하고 싶었다.

루비 귀걸이는 화장대 위 고풍스러운 나무 보석함에 넣어 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벨린이 들어왔을 때쯤 그리즈는 머리가 까치집이 된 상태로 침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그리즈는 팔뚝까지 흘러내린 네글리제 어깨끈을 쓰윽 올렸다. 얼굴에 드리운 불안한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루비의 안전이 걱정스러웠던 까닭이었다.

“으… 응. 저, 벨린.”

“네, 아가씨.”

“루비를 보석함에 넣어 뒀어. 잘 관리해줘.”

벨린은 눈치껏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후작 각하께서 돌아오시어 마님께서 점심 식사를 제안하셨어요. 장소는 1층 접객용 식당이에요.”

참, 스테판이 돌아왔구나…. 급속도로 파리해진 낯빛으로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과 치장을 빠르게 마치고 식당으로 향했다. 연회장 옆에 귀빈 접객용으로 쓰이는 장소에 걸맞게 14인용 식탁이 길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안쪽 상석에 대공과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디르크와 아델은 옆쪽에 앉아, 스테판을 마주 보고 있었다.

“먼저 와 계셨군요. 조금 늦었습니다.”

얼굴에 귀족적인 가면을 쓴 그리즈가 환히 미소 지었다. 대공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간 그는 먼저 쳐다보지 않았었는데. 조금 이상했다.

그리즈는 여전히 무심하고 근사한 그를 스치듯 보곤 스테판의 옆자리에 앉았다. 전쟁이라도 막다가 온 건지 스테판의 얼굴이 야위어 있었다.

그때 오른쪽 뺨으로 애타는 눈길이 와닿았다. 그리즈는 그 눈길의 주인이 디르크라는 걸 깨닫고는 그를 바라봤다. 새벽처럼 푸른 사파이어 귀걸이가 햇살에 반짝였다.

빛에 한쪽 눈을 찡그렸던 디르크가 놀랍도록 환하게 웃었다. 아델 역시 그리즈가 디르크의 선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미소 짓자 할머니가 이리저리 보다 물었다.

“왜 그리 즐거운 게야?”

행복한 에너지를 좋아하시는 까닭이다. 즐거운 일이라면 함께 나누길 바라시는 거겠지. 그러나 아델은 말을 아꼈다.

“바이렌하그 가문의 식사에 초대되어 기분이 좋아요.”

할머니는 이런 건 대단한 호의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 쳤다. 이내 그리즈의 귀걸이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못 보던 귀걸이구나. 광장에서 산 거니?”

손녀가 어떤 스타일의 보석을 좋아하는지 파악하고 싶으신 눈치였다. 그 순간 접시 근처만 배회했던 대공의 시선이 귀걸이에 확 꽂혔다.

서늘한 눈동자가 사파이어를 주시했다. 처음엔 붉은 루비가 어찌 사파이어로 바뀌어 있는지 추측하는 듯했다.

머지않아 디르크의 행복한 얼굴을 훑고는 혼탁해졌다. 달빛 한 점 들지 않은 새벽 같다고 그리즈는 생각했다.

왜인지 심장이 아릿해져 하마터면 헛기침할 뻔했다. 왜, 왜 이럴까. 왜 이리도 대공의 눈빛, 표정, 숨소리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는 건지….

아직도 몸살 기운이 감도는 까닭에 예민해진 것일 테지. 그리즈는 다른 이유는 있을 리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 아뇨. 디르크에게 선물 받았어요.”

“잘 어울리는구나. 정말 기분 좋은 일이야.”

그 순간 할머니가 곁눈으로 대공을 살폈다. 이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 감정을 읽으려는 듯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긴가민가하게도 다시 온화한 미소를 내비쳤다. 만사태평한 노인인지, 능구렁이 같은 책략가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도 기분이 좋단다. 율리아나가 연회에서 천사처럼 아름답게 춤추는 꿈을 꾸었어. 연습은 잘되니?”

그리즈는 할머니를 유심히 살피다가 뒤늦게 고갤 끄덕였다.

“네, 노력하고 있어요. 다만 주목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 걱정이에요.”

매음굴 손님에게 정체를 들킬까 봐 너무 걱정스러웠다. 그 마음을 정확히 읽은 대공이 낮게 조소했다.

“그래, 곤란하겠지.”

필요 이상으로 눈치 빠르고 냉정한 사람의 위험성이 뼈저리게 닥쳐온다. 그리즈가 창백해진 뺨을 매만지는 사이 집사들이 쟁반을 한 손으로 들고 일제히 들어왔다. 눈치를 보던 스테판이 어수선한 틈으로 화제를 돌렸다.

“연습? 무슨 연습이요?”

“조만간 열릴 데뷔 연회에서 율리아나가 왈츠를 추기로 했단다. 왈츠 선생님에게 리드해 달라고 요청할 거야.”

스테판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연회에서 주목받을수록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일 터.

테이블에 애피타이저용 빨간 무와 말린 감자칩이 놓였다. 스테판이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넌지시 말했다.

“꼭 왈츠를 추어야 한다면 디르크와 함께 추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니.”

할머니는 그리즈가 돋보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아직은 미숙한 춤 실력을 보완해 줄 왈츠 선생님이 파트너로 최적이었다.

“음…. 네 생각은 어떠니?”

내키지 않아 하던 할머니가 그리즈를 바라봤다. 그리즈는 곁눈으로 스테판의 살벌한 시선을 느끼며 어둡게 대답했다.

“그, 그래도 괜찮아요.”

스테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비열한 인간, 타인을 숙주로 삼아 몸집을 불리려 하는 기생충. 그리즈가 빨간 무를 덜어 와 으득 씹었을 때였다.

스테판이 감자칩을 접시에 덜며 그리즈에게 물었다.

“디르크와 데이트했다고 들었어. 즐거웠니?”

대공의 표정 변화는 더 이상 없었다. 천한 여인의 소식에 반응하는 건 이쯤 하겠다는 듯.

그러나 귓가를 건드리는 숨소리가 지나치게 사나워져 있었다. 심장이 뜨겁게 욱신거렸다.

그가 불쾌해진 이유를 캐묻고 싶은 마음 반, 알고 싶지 않은 마음 반. 그리즈가 귓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네, 즐거웠어요.”

스테판은 디르크와 그녀의 만남이 진전되고 있음을 기정사실화시키느라 바빴다.

“사파이어라니. 하긴 애인 선물로는 최고지.”

접시를 바라보던 대공이 싸한 눈으로 스테판을 주시했다. 그때 감자칩을 맛있게 먹던 아델이 명랑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한 시간 넘도록 골랐어. 최고일 수밖에 없지.”

그리즈는 부끄러워하는 디르크를 보며 으레 미소 지었다.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으깬 감자, 버섯 수프가 들어오자 식사가 시작됐다.

표면적으로는 화목했지만 그리즈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꼈다.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직면한 상황이 각각 달랐다.

스테판은 대공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고, 아델은 무사히 출산하길 바라고 있었다. 디르크는 아델을 보호하려 하며 동시에 율리아나를 원했다. 그리고 대공 비아누트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원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때때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짓는 할머니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맹수들의 식사 자리에 참석한 것처럼 긴장되어 입맛이 없었다. 그리즈는 잊힐 만하면 뺨을 건드리는 새파란 시선을 느끼며 스테이크를 억지로 씹었다.

그런데 활력 넘쳐 보이던 아델이 점점 창백해졌다. 점차 메스꺼워하다가 결국 입을 틀어막고 입덧했다.

“우웁…!”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아델에게 꽂혔다. 대공 비아누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즈가 아닌 타인에게 처음으로 주는 시선이다.

“음식이 입에 안 맞나?”

대공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던 아델은 냅킨을 집어 들며 침착하게 입가를 닦았다.

“아뇨. 속이 좀 더부룩하네요, 전하.”

무심했던 대공의 눈이 예리해져서는 아델의 외모를 살폈다. 푸석해진 머리, 뺨에 생긴 부스럼, 붓기 가득한 얼굴과 손까지. 깨끗한 환경에서 관리받으며 살아 온 귀족과는 거리가 먼 행색이다.

의문 어린 눈동자가 아델의 배를 확인했다. 이내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훑은 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 뭐, 입덧은 아니겠지.”

농담치고는 서늘한 음성이다. 당황한 아델이 포크를 툭 떨어트렸다. 디크르는 사색이 되어 아델을 살폈고, 멀찍이 자리를 지키던 집사가 새 포크와 냅킨을 들고 다가왔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매를 살피던 대공이 끝내 어둡게 웃었다. 적잖게 당황하는 아델의 반응으로 하여금 회임 사실을 눈치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슴 졸이던 그리즈가 모두의 관심이라도 돌리려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델, 괜찮니? 소매에 수프가 튀었어.”

고기를 천천히 드시던 할머니는 대공에게 어진 목소리를 냈다.

“대공, 무례를 삼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곤 아델이 받아 든 그리즈의 손수건을 유심히 살폈다. 방에다 쌓아 놓고 쓰는 민무늬 손수건이다. 제 발 저린 그리즈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할, 할머니께서 주신 손수건은 아끼고 있어요.”

할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 지었다.

“편히 써도 돼, 아가.”

상황이 수습되자 다시 식사가 시작됐다. 그리즈는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왕성하게 식사했지만 정작 무얼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더니 밤이 되자마자 하늘이 맑게 갰다. 온 대지에 달빛을 공평히 내리기 위해 그렇게 폭우를 쏟았나 보다.

십자수와 미술, 왈츠 수업을 마친 그리즈는 디르크와 정원을 산책했다. 디저트 가게에서는 부쩍 친해졌다고 느꼈는데 이틀 사이 각자 제자리로 돌아간 듯 어색했다.

“대공께서 아델의 회임 사실을 아신 것 같니?”, “알아도 큰일은 나지 않겠지?” 같은 질문만을 주고받았다. 귀걸이가 잘 어울린다는 칭찬에 그리즈는 하얀 미소로 화답하곤 방으로 돌아왔다.

폭우에 흠뻑 젖은 외출증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그리즈는 침대 밑에서 양피지를 꺼내어 확인하고는 강아지 티아를 안은 채 고뇌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 중인 걸까. 이 길이 맞기는 한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누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셨으면 이렇게 어렵지는 않을 터인데….

창밖의 황금빛 풍경 저 멀리 장대한 담이 보였다. 저것만 없었어도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즈는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예배당에서 밤 9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어느덧 자야 할 시간.

이만 벨린을 불러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그런데 호출 종을 울리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대공 전하의 집사 브람입니다.”

그리즈의 노곤했던 얼굴은 일순간 사색이 됐다. 비보만 전달하는 어둠의 사자가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인기척을 낸 직후라 잠든 척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불길한 마음속으로 설렘이 번지는 이유는 뭔지.

그리즈는 별안간 두근거리는 심장 부근을 매만졌다. 방문을 열자 브람이 갈색 로브의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전하께서 찾는다는 안내뿐, 이유를 설명할 기미는 없다.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테지.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

조용히 브람을 뒤따랐다. 사람 한 명 없는 화려한 로비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 창문으로 달빛이 새어들어 온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풍경이 감미로웠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풍경이나 즐길 때가 아니었다.

브람이 복도의 가장 안쪽에서 두 번째 방 앞에 섰다. 그리즈는 하녀장 로렐에게서 들은 얘기를 곱씹었다.

“2층은 대공 전하께서 사용하고 계세요. 복도 가장 안쪽 방이 전하의 방이고, 그 옆에는 창고가 있습니다. 창고도 전하께서 쓰고 계십니다. 수집벽이 있으시거든요.”

설마 이번에는 수집 방으로 부른 걸까.

눈을 질끈 감자 정신이 혼미해지며 심장 소리만 울렸다. 왜 이러지. 어쩌다 이렇게 길들여져 가는 짐승 꼴이 됐나.

그때 브람이 노크 후에 문을 열었다. 어두웠던 그리즈의 얼굴 반쪽이 주황 불빛으로 물들었다.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전하.”

그리즈는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여 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방을 둘러봤다.

넓지는 않지만 호화로운 방이다. 바닥에는 붉은색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장식장에는 여인의 목걸이와 귀걸이, 티아라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실크 천으로 포장된 물건들도 많았다.

그간 예상해 왔던 박제 동물이나 전쟁 전리품은 없었다. 그리즈는 방 안을 화려하게 수놓은 장식품이 누구를 위한 선물인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화려한 보석 이상의 가치를 가진 여인일 것이다. 이렇게 방을 따로 만들어 놓고 기릴 정도로 소중한 사람, 아마도 죽었다는 약혼자를 위한 선물들일 것 같았다.

그리즈는 그걸 모아 둔 방에 그가 다른 여인을 들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벽을 바라봤다.

벽에 큼지막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다만 누구도 볼 수 없도록 장막으로 가려 놓았다. 온전히 소유할 수 있도록 그가 그림을 세상과 단절시켜 놓은 것 같았다. 그리즈는 그림 속의 무언가가 장막 속에서 외롭게 휴식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림 앞 테이블에는 물감을 덜어 둔 크리스털 판이 있었다. 붓과 물통, 그 옆엔 이젤과 캔버스가 자리했다. 그가 이곳에 앉아 그림을 그렸던 모양이었다. 혹시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걸까.

벽난로의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며 그윽한 소리를 자아냈다. 뒤늦게 바라본 벽난로 앞 소파에 대공 비아누트가 앉아 있었다.

그리즈는 소파 앞으로 길쭉하게 뻗어 나온 다리를 보다가 작게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벽난로에 비친 그의 얼굴이 유려하게 빛났다. 누구라도 홀릴 법한 그 얼굴에서 손수건의 향기를 맡으며 수음했던 들짐승이 비쳤다. 나른하게 풀린 눈, 젖은 입술, 앓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던 목울대가 정신을 어지럽혔다.

며칠 전에도 그랬듯 그는 할 말이 많은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기묘한 정적을 깨기 위해 그녀가 애써 말 붙였다.

“그, 그림을 모작 중이신가요.”

그가 장막에 쌓인 그림을 응시했다. 매력적인 눈동자가 무슨 이유에선지 궁지에 몰린 듯 흔들렸다.

짐작하건대 긴장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왠지 위태로워 보였고 갈등하는 것도 같았다. 갈망, 애욕, 자괴 그리고 오래도록 이어진 순애가 어지럽게 드러났다.

그런 눈을 하고는 더없이 무심한 표정을 짓는다. 주변이 어두우니 그 정도로만 숨겨도 충분할 거라고 여겼을까.

그가 보여 주지 않으려 하기에 애써 보지 않으려 시선을 떨궜다. 문득 소파를 짚은 그의 손이 보였다. 탄탄한 손가락 마디에 붉은기가 돌았고, 손등에는 굵은 핏줄이 퍼렇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가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더 확실해졌다. 며칠간 차마 그가 신에게 다가갈 수 없어 수련에만 매진하며 얻은 결론이 궁금해졌을 때였다.

“모작. 그래, 비슷해.”

모작과 비슷한 어떠한 것. 그렇게 대답한 그가 장막에 닿았던 시선을 거둬 그리즈를 응시했다. 긴장한 그녀는 하염없이 타오르는 난롯불 앞에서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그림자만 바라봤다.

“어째서 부르셨나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과 한방에 갇힌 듯 아찔했다. 눈에 띄면 덮쳐질까 봐 숨죽였고, 장난감으로는 쓸모없다는 사실을 알리려 어깨를 힘없이 늘어트렸다. 그리고 짐승이 흥미 잃고 떠나는 모습을 상상하며 애써 차분히 입술을 열었다.

“특별히 용건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그때 그가 그렇다면 알려 주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체격이 다가오자 억지로 가라앉혔던 숨이 확 막혔다. 어서 시간이 훌쩍 흘러 버렸으면 좋겠다. 눈을 뜨면 요하네스가 보이기를. 제발….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를 듣다가 눈을 떴을 땐 또 그가 보였다. 2인용 테이블 앞에 선 그는 아주 서늘한 눈으로 사파이어 귀걸이를 주시했다.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나 봐?”

나른한 저음만 듣고도 티 나게 긴장하자 그가 의자에 앉아서는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괬다. 겁먹은 사냥감을 가엽게 여겨 사냥을 보류 중인 맹수 같았다. 당장은 해치지 않을 테니 달아나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다.

이내 그의 시선이 닿은 귓불이 점차 뜨거워졌다. 그리즈는 그제야 그가 디르크가 선물한 귀걸이에 대해 묻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디르크의 선물이라서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다시 그를 바라봤을 때 파란 눈동자는 왜인지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검지로 눈썹을 느긋하게 매만진다. 왜인지 그가 깊게 영향받고 있다는 방증 같았다. 혼란스러워졌을 때 태연한 물음이 들려왔다.

“디르크가 좋아?”

그가 원하는 답이 있고 그대로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며칠간의 생각 끝에 그가 얻은 결론의 정체를 알아야 했다.

용기를 내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질서한 눈이 그녀를 마주 봤다.

그러다 귀걸이에 한 번씩 닿는 걸 느끼며 그의 목적을 짐작했다. 단지 디르크에게서 선물 받은 귀걸이가 거슬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늘 몸에 걸친 모든 것 중 유일하게 그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다른 수컷의 물건을 경계하는 건 짐승이 가진 습성이다. 누구보다 냉정한 이성의 소유자에게 그런 습성이 있을 리 없지 않나.

차라리 디르크와의 혼인이 성사될지 그가 알아보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혼란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던 그리즈가 최선의 답을 찾아 말했다.

“네, 좋아요.”

당연히 수긍할 줄 알았던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래? 고작 열흘 만에.”

웃음기가 빠진 얼굴은 새벽처럼 적요했다.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리즈는 수명이 깎이는 것 같았다.

“전하께서도 그걸 원하시지 않으셨나요.”

얼마 전, 디르크와 혼인해야 하냐는 질문에 그가 고민 없이 긍정했었다. 그 말을 따르는 중이라고 대답하려 하며 촛불에 음영 진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저는 그런 줄로….”

“좋아하라고는 안 했는데.”

그 말을 듣자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어 댄다. 애초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감정을 쏟았던 게 실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가졌던 감정과는 다른, 완벽히 예상 못 한 형태로.

가슴 부근을 꾹 누르자 델 듯 뜨겁고 닳는 것처럼 아려 왔다. 대체 이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감정 또한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를 선명하게 바라보았다. 촛불이 흔들리는 건지,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지 알 수 없다.

“좋아하면 안 되나요.”

잠시 불안정해졌던 그는 곧장 빈틈을 감지하곤 본래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가짜 따위가?”

아주 극악무도하게도 그녀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녀는 약점을 물린 작은 동물처럼 괴롭게 눈감았다.

사실은 치열하게 알리고 싶었다. 나도 마음이 있다고, 누구든 좋아할 수 있다고. 그 마음까지 통제할 수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저항이 클수록 좋은 장난감이라는 걸 알기에 입술을 다물었다. 버틸수록 기어코 눈물이라도 짜내려는 듯 그가 잔인해질 것 같았다. 그 말에 온몸이 찢기고 훼손되어 끙끙 앓다가 죽게 될까 봐 두려웠다.

“…송구합니다.”

그리즈는 짐짓 담담하게 고개 숙였다. 그러나 감각은 정상이 아니었다. 가슴이 뜨겁고, 아프고, 짜릿하기까지 해 미칠 것 같았다. 멸시는 충분히 당했으니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 봐야겠어요. 전하께 감기를 옮길까 우려스럽습니다.”

테이블에서 무의미하게 까딱거려지던 길쭉한 검지가 문득 멈췄다. 그가 그림처럼 굳어졌다. 팽팽히 당겨진 긴장 속에서 깊게 눈 감았다가 떴다.

“상관없어.”

“전하의 백성 중 한 명으로서 그럴 수 없습니다.”

그의 의지가 무엇이든 당장은 나가고 싶었다. 밤이 늦었고, 그는 지나치게 생기 넘쳤다. 호기심과 충동을 살짝만 자극받아도 툭 터트릴 것 같았다. 그의 자유이니 막을 수 없겠지만 장난삼아 헤집힌다면 그대로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가겠습니다.”

그리즈가 다급하게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대로 열려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흘렀다. 그가 망토 안주머니에서 화려한 색감의 손수건을 꺼냈다.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 며칠 전 그녀가 잃어버린 손수건이 보란 듯이 테이블에 놓였다.

“가져갈래? 이거.”

나가려던 그리즈의 두 발이 멈칫하며 멈췄다. 애초에 그는 이럴 작정이었는지도 몰랐다. 내키는 대로 멸시하다가 달아날 기색을 보이면 숨통을 움켜쥐려 했던 것이다.

선택권은 없었다. 바이렌하그 대공이 자비로이 물건을 찾아 주는데 어찌 거절한다는 말인가.

신경을 바짝 세우며 그의 앞에 섰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얻기 위해 쪼르르 달려온 강아지 꼴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비참해졌다. 아마도 무력한 천민을 감상하며 귀족만의 유희를 즐기려는 것 같았다.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그 찰나 시야에 언뜻 들어온 그의 눈은 적잖게 주의 깊었다. 상대가 좋아하는지, 두려워하는지 그런 감정들을 읽으려 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는 서늘했지만 어떻게 보면 천진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정말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손수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검지로 훑었다.

“감사 인사해야지. 정식으로.”

그가 정말 정식으로 인사받길 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여인을 관찰하고 싶은 것이거나, 애완동물처럼 길들이고 싶어할 뿐이다.

그러나 전자라고 치부하기에는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후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그가 원하는 대로, 정식으로 무릎 꿇고 앉아 감사를 표하는 것뿐.

“물건을 찾아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공손히 고개 숙였다. 그럼에도 그는 불만족스러운 듯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그대로 있어.”

섬세한 손이 보석함을 열어 귀걸이 한 쌍을 꺼냈다. 이내 그는 궁지로 몬 사냥감의 반응을 즐기듯 느릿하게 상체를 숙였다.

그리즈의 머리 위에 새카만 그림자가 생겼다. 불안한 마음에 고개 들자 그의 목젖과 턱밑이 보였다.

넓은 가슴팍에 밴 로즈마리 향기가 끼쳐온다. 숨을 참은 그리즈는 카펫을 내려다봤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몸이 벌벌 떨리는데 얼굴은 너무도 뜨겁다.

미열이 감도는 얼굴을 보며 그는 새로운 귀걸이를 엄지로 굴렸다. 그러곤 귓불로 손을 가져다댔다. 얼굴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손에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그의 얼굴이 느슨하게 웃었다.

“알지. 움직이면 죽는 거.”

기어코 디르크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는 것 같았다. 눈동자에 치밀한 것이 감돌고 있다. 차분한 애욕. 혹은 어둡게 응축된 집착이 풍겨져 왔다.

그런 눈으로 그는 물질적으로 가치 있는 물건을 주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생색내기는커녕 무심한 얼굴로 상처 주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제라도 그 이유를 캐묻고 싶었지만 대답 들을 수는 없을 터.

“저는 지금 귀걸이가 좋습니다.”

그리즈는 그가 만지지 못하도록, 뺨 가까이 닿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쿵쿵, 강렬한 맥박이 손바닥으로 전해져 온다. 온몸이 격렬히 밀리는 듯해 머리가 핑 돌았다.

솔직히 말하면 달콤하고 매혹적인 그의 향에 빠져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무언가를 치열히 갈망하는 그의 눈을 외면하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리즈는 꽉 막힌 목구멍에서 숨을 훅 내빼며 고개 들었다.

“가겠습니다.”

그는 아주 보란 듯이 귓불을 매만졌다. 손목이 움직일수록 손바닥에 스며드는 박동이 선명해진다.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아 손을 뗐을 때 그가 나직이 물었다.

“손수건은?”

“차라리 할머니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어요.”

디르크의 귀걸이를 잃느니 손수건을 포기하겠다는 얘기였다. 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무심함으로 겹겹이 쌓은 포장을 찢어발기려는 것 같았다. 거리낌 없는 도발이 심장을 푹 찔렀다.

“그럼 내가 손수건으로 또 그거 할 텐데.”

별안간 숨이 멎었다. 그거, 그거라니…?

불특정한 것을 지칭하는 단어였지만 단 몇 가지의 기억이 눈앞을 스쳤다. 손수건의 향기를 맡을수록 더 굵고 울퉁불퉁하게 발기했던 그의 성기와 달빛이 어린 근육질 육체, 그리고 지나치게 거칠었던 숨소리도.

“지, 지금 무슨 말씀을….”

설마 그의 모습을 엿 본 걸 알고 있었던 건가.

당혹감에 뺨이 급격히 달아오르자 그가 유심히 바라보았다. 반응이 재밌는 장난감에 대한 정보를 수집 중인 것 같았다.

신념을 깨고 음란한 행위를 한 건 저 사내인데 지나치게 느긋한 게 억울했다. 그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 가슴 졸였던 그리즈는 손수건을 낚아채듯 쥐었다.

가슴이 얼어붙었다가 펄펄 끓기를 반복하니 말라 죽게 될 것 같았다. 움직이면 죽이겠다는 말이 발목을 위협적으로 에워싸고 있지만 보란 듯이 떨쳐 내고 싶었다.

이제 견디는 것도 한계였다. 거슬려서, 분해서, 상대를 말려 죽일 생각이라면 차라리 지금 목을 꺾어 줬으면 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사냥 직전의 짐승처럼 목표물을 내내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즈는 혼란스러워졌다. 이 상황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다. 사토의 왕처럼 목이 잘리게 될까. 아니면 지난번의 그 단도로 목숨을 잃게 될까.

그것도 아니면… 오로라가 쏟아지던 밤, 나무집 아래에서처럼 다급하게….

그때의 감각이 떠오른다. 델 정도로 뜨겁고 부드러웠던 입술, 구름을 삼킨 듯 몽롱했던 기분도…. 다시금 눈앞이 아찔했다.

“소, 손수건, 찾아 주셔서 감사드려요.”

거의 다 타 버린 장작불이 흐려지자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지러이 일렁였다.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반듯한 얼굴에 고상한 미소가 배었다.

“움직이면 죽인다고 했는데.”

기어코 난롯불의 불씨 하나가 툭 꺼졌다. 빛의 몸부림이 사라지기 무섭게 그의 눈길이 선명해졌다. 너 하나쯤은 정말로 이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다는 암시 같았다. 크고 단단한 손에 잡혀 허덕이게 되는 스스로를 상상하자 온몸이 딱딱히 굳어 버렸다.

“그 정도로 제가 거슬리시나요…?”

그는 아주 간단히 확인시켜 주었다.

“응.”

그때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고요한 새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 뜨겁고 묵직한 어떠한 것.

아주 짧은 찰나 그것이 사라졌다가 또다시 어둡게 드러났다. 억제하려 해 봐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저것의 정체가, 그가 가짜 여동생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가슴속에서 찌릿한 전율이 번진다. 그가 앓고 있는 기묘한 병증이 전염되어 온몸을 잠식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이미 지쳐 있었다. 그와의 입맞춤을 회상하고, 의도를 짐작하고, 무턱대고 가슴설레는 일이 날마다 이어져 왔다. 심장박동이 빨라질수록 불안감과 비참함도 커졌었다. 그리즈는 그의 파란 눈과 맞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죽여 주세요. 그럼.”

바라던 바였다는 듯 그의 얼굴이 흡족하게 웃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순간 그가 일어나며 정적을 산산조각 냈다.

“흣!”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휘감고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정신을 차렸을 땐 카펫 위에 누워 있었다. 햇빛에 바싹 마른 섬유 냄새가 올라왔다. 그리즈는 그보다 더 진한 로즈마리 향을 맡으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오로라 아래에서 키스했을 때처럼 몸 위를 그가 점령하고 있었다. 시종일관 금욕적이던 얼굴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생기를 띤다. 새벽녘의 별 같았다. 정체성을 잃은 채 가장 탐나는 별부터 씹어 먹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죽여줄까.”

흥분감과 불안감이 마구 뒤섞인 그리즈의 숨결이 탄탄한 목덜미에 번졌다. 그리즈는 일순간 입술을 닫았다가 숨을 마시며 작게 말했다.

“흣, 마음대로….”

“그럼 한 시간쯤 걸릴 것 같은데.”

그때쯤 그녀는 그가 말한 ‘죽인다’는 의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의미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안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품 안에 가둔 암컷을 격렬하게 핥다가 안으로 씨를 넣고 싶어서. 파르르 떨리기만 했던 입술이 일순간 다급해졌다.

“유, 유일신께서 혼외정사는 죄악이라고 하셨….”

몰랐던 일도 아니라는 듯 그가 뻔뻔히 대답했다.

“신께서도 내게 죄를 지었어.”

“…….”

“너를 내게 보내셨잖아.”

그러니 죄악을 저질러도 한번은 이해해 주시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 것 같았다. 오묘한 색을 지닌 그리즈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저는 죄, 죄악이 아니에요.”

설령 그게 맞을지라도 부정하고 싶었다. 신에게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그렇기에 살아있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저는 죄악, 그런 게 절대로….”

“나한테는 맞아.”

나른한 시선이 목덜미를 집요하게 훑는다. 그 자체로도 달궈지는 것 같았을 때였다.

“그래, 뭐가 특별할까.”

지금껏 조롱하고 비웃던 그가 처음으로 무방비한 얼굴을 했다. 그리즈는 정말로 특별한 것을 예의 주시하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그간 그가 줬던 모멸감이 사실은 관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판단력이 흐려진다. 뺨의 닿는 그의 숨이 너무 뜨거웠고, 목덜미에는 핏줄이 팽팽하게 일어선 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적잖게 풍겨 오는 관능미에 반응하지 않으려 일부러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 얼굴을 살펴보는 그의 눈에 불안정한 흥미가 깃들었다. 당신 역시 특별하다고 사탕발림할 시간이 그저 조용히 흐르는 걸 느끼는 거다. 그때 파란 눈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기어코 그의 외모, 재산, 작위를 탐내며 살랑거리는 광경을 봐야겠다는 듯.

“선택할래? 혼인할지, 그냥 여기서 살지.”

숨소리 가득한 저음이 귓가에서 번졌다. 탐나는 영혼을 손에 넣으려 하는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검은 앞 머리칼 사이에서 허기진 눈동자가 음울하게 빛난다.

그리즈는 그 눈을 훤히 들여다보며 진심을 읽고 싶다가도 덜컥 두려워졌다. 거부하듯 고개 돌려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브리튼 공주님께서 방문하실 거예요.”

새하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나자 그가 입술을 대며 숨을 느리게 들이마셨다.

“그래, 내연남이랑.”

“…….”

“어차피 계약이야.”

사나웠던 눈매가 살결의 향기에 취해 가늘게 좁혀진다.

“그 사람 찾아 줄게.”

그리즈는 영혼이 그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으로 숨을 헐떡였다. 심장이 바닥으로 철렁 곤두박질친다. 언젠가 그에게 했었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살고 싶다고.

그냥 흘려들었을 수도 있었을 그 얘기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고 오늘의 미끼로 삼아 흔들며 유혹 해왔다. 그러며 지금껏 고수해 왔던 금욕적인 삶을 손수 무너트리려 한다. 그를 멈추지 않으면 파국이 올 것만 같았다.

무엇이 변한 건지 헤아려 보는 사이 그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진한 암컷 냄새를 맡고 흥분한 수컷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교미할 준비를 마친 듯 몸조차 너무도 단단해 보였다.

얼마 전 몰래 엿보았던 커다란 성기가 머지않아 나도 몰랐던 곳으로 스멀스멀 들어올 것 같았다. 적잖게 축축하고 단단해 보였던 그것이라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리즈는 새카매진 시야에서 어른거리는 난롯불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그가 마음먹었다면 기어코 안쪽을 범해야 멈출 것이다. 다른 선택권은 없을 터.

젖은 숨만 내쉬다가 카펫에 무릎 꿇고는 네모난 패브릭 스툴 위에 엎드렸다. 그와 관계하게 되더라도 그의 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고, 능숙하게 받아들일 자신도 없었다.

“그럼 빨리 끝내 주세요.”

지나치게 동물적인 자세로 엎드려 있다는 걸 느꼈을 땐 이미 늦어 버렸다. 그가 일부러 앞섶을 엉덩이에 스쳤다. 굵게 발기해 있었다. 그녀에게 닿기만 해도 좋은 듯 나른한 숨소리가 등으로 번진다.

“이게 좋아?”

“흣… 네.”

“그럼 엉덩이 더 들어.”

딸각. 그의 목에 걸쳐진 금장 단추가 풀렸다. 진회색 망토가 넓은 등을 스르륵 훑으며 카펫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쩐지 흥미로운 대상에게 잠시 몸이 동한 것 같았다. 혹은 지난번처럼 반응을 떠보려는 걸지도 몰랐다. 절제를 중시하는 종교의 교리와 죽은 첫사랑으로 하여금 정절을 지켜온 그가 돌연 심경을 바꿀 리 없을 테니까.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둘러봤다. 그의 죽은 첫사랑, 그녀의 방. 이곳에서 무수히도 긴 시간 동안 그녀를 그렸다면 차마 더럽힐 수 없을 터인데….

“이 방의 주인께서… 보고 계실 거예요.”

그녀를 끌어들인다면 그가 동요해 멈출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비웃듯 공허한 저음이 번졌다.

“사라졌어. 얼마 전부터.”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사라졌다니… 원래부터 그의 곁에 존재했었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어떤 일을 계기로 사라진 걸까.

그때 어두운 방 안에서 나른히 손수건의 향기를 맡는 사내가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그녀를 그리는 일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이 연달아 상상됐다.

별안간 가슴이 저려 왔다. 대체 왜…. 흔들리는 숨을 꾹 참았을 때였다.

“다시 나타날 거야. 내가 네게서 흥미를 잃으면.”

아….

목구멍이 턱 막혔다. 그가 혼인을 앞둔 상태로도 다른 여인을 안으려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에 쌓여 버린 불순물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정결한 상태로 돌아간다면 첫사랑의 환영을 다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가짜 여동생은 불순물을 배출하기 적합한 도구일 뿐이다. 정말이지 그런 줄도 모르고….

눈물이 왈칵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치미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비참한 건지, 후련한 건지.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왜 바보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건지….

문득 돌아본 그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빛났다. 그러면서도 생기가 도는 게 묘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의 그는 무감각한 살인마처럼 보였었고,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기에 스스로 죽어가는 중인 것 같았었는데….

“그럼 이제 난 뭘 해야 될까.”

나지막이 물은 그가 뭉근한 열기를 드러냈다. 그리즈는 착잡함으로 조여드는 목에 억지로 힘주어 대답했다.

“저를 괴롭히지만 않으신다면 무얼 하셔도 좋….”

낮은 웃음소리가 등 뒤로 느슨히 떨어졌다.

“어쩌지. 그게 제일 재밌는데.”

일순간 긴장한 까닭에 엉덩이를 살짝 치켜들었다. 묵직한 그의 앞섶을 본의 아니게 꾹 누르게 됐다.

이내 굴곡진 복근이 움푹 들어가며 그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포악한 짐승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다. 작은 몸짓 하나에도 그가 반응한다는 사실이 비정상적인 감각을 고조시켰다.

“흣….”

불안해져 뒤돌아보았을 땐 그가 검은색 상의의 목 뒤를 손으로 잡아끌어 단번에 벗고 있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가 드러났다. 두꺼운 가슴팍에 자리한 작은 분홍빛 젖꼭지가 꼿꼿하게 일어서서는 얼마나 민감한 몸인지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지난번에 서재에서 왜 여인의 꼭지를 머금고 혀를 굴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 역시 그의 가슴팍에 입술을 대고 꼭지를 혀로 훑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에게서 좋은 소리를 들으며 헐떡이는 복근을 보고 싶었다. 적당히 어둡고 나른한 분위기가 그렇게 마음먹게끔 조종하고 있었다. 그래, 단지 그런 이유일 뿐.

그때 그가 치마를 쓱 걷어 올리며 물었다.

“좋아해? 교미.”

그리즈는 즉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껏 지겹도록 보고 자란 게 그건데 좋아할 리가 없었다. 어떤 때는 지극히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그 행위에 취해 교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두렵기도 했다.

“…아뇨.”

그는 의외의 말을 들은 듯 그녀의 목 뒤를 응시했다.

“그래?”

“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아질까.”

나른한 저음을 듣자 정인과 은밀한 밀담을 나누는 듯한 기분이 밀려온다. 좋은 기분이 분명했지만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뒤죽박죽, 엉망이 된 마음을 곱씹던 그녀가 애써 차갑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 번이니까.”

큰 용기에 그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너에게는 그저 그런 한 번이겠지만,”

“…….”

“나는 아니라서.”

왜인지 중심부의 쾌감만 원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원하는 것 같았다. 진득하게 말한 그가 눈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빤히 훑었다.

“애초에 나는 이 자세 싫은데.”

싫지만 그녀가 좋아한다니 맞춰 주고 있다는 의미였다. 거짓말, 그렇게 상냥하지 않으면서…. 막연히 괴로워지는 마음에 그리즈가 스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는 좋아요.”

그의 흡족한 숨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좋다는 말이 들려오자 퍽 만족스러운 것처럼.

“그래, 또 뭐가 좋아.”

그가 감정을 궁금해할수록 그리즈는 가슴으로 찌릿한 열기를 느꼈다. 이유를 잘 모르겠다. 왜 이리도 긴장되고 설레고, 또 비통하고 서러운 건지….

무언가로 목이 꽉 막힌 것 같아 빠르게 심호흡했다. 그때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을 도출해 낸 그가 물었다.

“저번처럼, 금화?”

늘 그래 왔듯 멸시 어린 음성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슴을 뻐근하게 헤집는다. 그가 하고 싶은 건 정말 교미뿐인 걸까. 아니면 자신조차 모르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걸까.

그러다 소리 없이 자조했다. 바이렌하그 대공은 오만한 냉혈한이다. 출정한 지 꽤 된 까닭에, 새로이 맛본 자극에 눅진하게 쌓인 혈기를 풀고 싶을 뿐이다. 매력적인 파란 눈동자에 지배되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네. …금화.”

그걸 원한다면 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듯 그가 금화 주머니를 꺼내어 스툴에 내려놓았다. 풀자마자 금화를 한 움큼 잡아서는 그리즈의 손위로 떨어트렸다. 열 개가 넘는 금화가 손 밖으로 좌르륵 흘러내렸다.

새파란 눈이 이 정도면 만족하겠냐고 묻는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이번엔 다른 것을 꺼냈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체인을 쥐며 나머지 손가락을 펼쳤다. 체인에 걸린 둥근 무언가가 툭 내려앉아서는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그리즈는 그게 황금과 사파이어로 만든 회중시계라는 걸 알았다. 그걸 그리즈의 손 사이에 끼워 주는 그에게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져.”

그리즈는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이 회중시계를 소지한 걸 종종 봤다. 손에 익은 물건을 줄 정도로 그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증거가 드러나자 그녀는 숨을 툭툭 흘렸다.

그는 그걸 뒷받침하듯 그녀의 눈을 주시하며 동의를 구했다. 교양 있는 짐승 같았다.

“좋아해? 이제.”

이내 노란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 올려놓고 엉덩이를 가볍게 쥐었다. 그리즈는 의외로 부드러운 손길에 흠칫 놀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마도 그는 불순물을 배출하는 대로 가짜 여동생에 대한 관심을 끄게 될 것이다. 사냥감 신세인 지금보다 나아질 테니 좋아해야 하는 거겠지. 그리즈가 흥분감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네. 좋아해요. 좋아하니까, 빨리….”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입술로 엉덩이의 봉긋한 부분을 느리게 훑었다.

“그래, 잘됐군.”

피부병의 상흔이 깃든 허벅지는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항상 멀찍이에서 바라보았던 미끈한 콧날이 엉덩이에 파묻혀 거친 숨결을 내보냈다. 그리즈의 손끝이 꼿꼿해져서는 스툴 표면에 박혔다.

“읏, 전하….”

잔악하고 고결한 대공에게 애무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생생해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간 스스로도 혐오했던 흉터를 거리낌 없이 핥는 혀놀림에 이성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그 교미라는 게 어떨지 저 사내 못지않게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대공이 도구로 쓰겠다니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계속 모멸감을 느끼다 보면 머릿속에 자리한 그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럼 영혼의 무게가 줄어들어, 아주 가뿐히 천국으로 날아갈 수 있겠지.

“전하, 저… 준비됐어요.”

그간 담담했던 목소리가 어느새 보채는 투로 바뀌었다. 그게 만족스러운 듯 그가 느슨하게 호흡하며 그리즈의 속옷 하의를 무릎까지 내렸다.

허벅지와 무릎을 딱 맞붙인 자세라서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다. 그러나 엎드린 채로 비부를 훤히 내보이는 자세가 부끄러워져 솜털이 곤두섰다. 긴장으로 엉덩이를 벌벌 떨다가 고개 들었다.

“아아, 읏….”

저 멀리 전신 흑경으로 그의 모습이 비친다. 그는 무릎 꿇고 길게 선 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인의 엉덩이와 비부를 관찰하고 있었다.

흥분한 가슴팍이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금욕적인 복장에 가려진 몸의 실체였다.

늘 봐 왔던 바이렌하그 대공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진한 암컷 냄새를 맡고 각성한 수컷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교미할 준비를 마친 듯 몸조차 너무도 단단해 보였다.

그래서 미칠 것 같았다. 가장 민감한 곳을 여인의 속에 결합하며 묘한 소리를 내고, 야릇한 표정을 짓고, 하반신을 짐승처럼 흔들며 헉헉대는 걸 저 고귀한 사내가 할 것이다.

그걸 기대하듯 아래가 버겁게 조여드는 게 이상야릇했다. 발끝이 움츠러드는 순간 그의 저음이 들려왔다.

“네가 직접 보여 줘.”

직접 보여 달라니….

어쩌면 당연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그와의 사이에서 생긴 오해를 풀지 않았고, 그렇게 그리즈는 매음굴에서 사내를 상대해 온 여인이 되었다. 사내에게 몸을 보여 주는 게 익숙할 거라고 그가 여기는 건 아주 당연했다.

축축한 기운이 감도는 아래로 기묘한 수치심이 올라온다. 아래만 드러낸 자세 때문에 정말로 교미용 도구로 전락한 것 같아 미칠 것 같은데 그게 나쁘지 않고 오히려 짜릿했다.

관찰당하는 걸 은연중에 좋아했던 건지, 상대가 비아누트이기 때문인지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네.”

그리즈가 작게 대답하며 무릎을 어깨너비로 벌렸다.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릴 만큼 긴장됐지만 그래도 가만히 엎드려 있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흑경에 비친 어두운 시선이 다리 사이를 느긋하게 훑었다. 길쭉하게 갈라진 붉은 틈새를 보고, 볼록이 솟아 있는 음핵을 보고…. 뜨끈한 입김이 다리 안쪽으로 끼쳐 왔다. 일순간 긴장한 아래가 바짝 조여들었다.

“으읏.”

담담하고 싶은데 질구가 음탕한 온기를 즐기며 움찔거린다. 점막을 보기 좋게 적셔 놓고 자극을 기대하고 있다.

그가 그걸 모르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저 비부를 성역 보듯 관찰하며 일부러 선명히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놀았어?”

그때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는 게 그의 취미라는 걸 깨달았다. 그 악취미를 만족시켜 줄 장난감을 찾아서 즐거운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단단한 손이 대답을 채근하듯 엉덩이를 부드럽게 쥐어 벌렸다. 비부가 팽팽히 붙어 있다가 기어이 열리자 눈앞이 새카매진다.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대공의 눈에 보여지고 있다는 생각이 기이한 열기를 몰고 왔다.

“읏….”

마땅한 대답을 찾다가 포기해 버렸다. 어서 격렬히 뭉개지는 걸 끝으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다.

“그, 그냥 아무렇게나 놀았어요.”

무방비한 엉덩이로 나른한 웃음이 툭툭 떨어졌다.

“그래, 아무렇게나.”

그가 흥분감이 가득 깃든 음성을 억누르곤 낮게 말을 이었다.

“등 뒤로 손 빼 봐.”

손은 왜….

머뭇거리던 그리즈가 스툴을 짚었던 두 손을 등 뒤로 뻗었다. 그 손을 쓱 잡아당긴 그는 그녀의 손으로 직접 엉덩이를 잡아 벌리게 했다.

흠칫 놀란 그녀는 손을 떼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벌리지도 못한 채 엉덩이에 대고만 있었다. 그러자 보기 편하도록 손수 위치를 정해 준 그가 힘주어 벌리라는 듯 손등을 부드럽게 눌렀다.

스툴에 한쪽 뺨을 댄 채 엉덩이를 쳐들고서 속살을 벌려 보여 주는 자세가 됐다. 매음굴의 사내들은 대부분 하반신을 맞추기에 급급했었는데…. 이성과 사랑을 나눌 때는 원래 이렇게 하는 건지 헷갈렸다.

“저, 전하, 어째서 이렇게….”

엉덩이는 높이 떠 있었고, 머리 위치는 낮았기에 허리가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며 휘어 있었다. 그가 깨끗이 정돈된 손가락으로 그 라인을 훑다가 엉덩이 부근에서 멈췄다.

비부를 물리적으로 벌린 탓에 음순이 음란하게 들떠 있었다. 그가 그 사이로 훤히 드러난 붉은 속살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진짜 이런 게 좋아?”

굴욕적인 자세를 일부러 하게 해 놓고 흥분했으면서도 차분한 저음으로 묻는다. 그리즈는 단지 그의 얼굴을 보며 교감하길 원하지 않았을 뿐이었지만 정정해도 이미 늦었기에 무력하게 긍정했다.

“네… 흣, 좋아요.”

단단한 검지가 길쭉이 젖은 틈을 부드럽게 누르며 쓸어내렸다. 그러다 옆으로 비켜 내려가며 음순을 훑고 음핵을 건드렸다.

반응을 보일수록 그가 흥미를 느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너무 짜릿해져 허벅지를 부르르 떨고 말았다. 그러자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 하던 손끝이 가만히 멈췄다. 이내 볼록하게 튀어나온 그곳 주변을 둥글게 긁기 시작했다.

“여기가 유독 빨가네.”

단지 붉을 뿐이었던 음핵이 충혈되며 열매처럼 부풀었다. 그의 손끝이 그곳을 닦아 내듯 슥슥 문지르자 아랫배가 저릿해져 벅찬 숨이 터졌다.

“저, 전하, 으읏.”

“왜?”

“거, 거기는 그만…!”

두툼한 비부를 손끝으로 억지로 눌러 벌리며 간질거림을 해소하려 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흐르자 그가 음란한 욕망을 읽은 듯 그녀 대신 말했다.

“그래, 나도 좋아.”

첫 만남에서 피범벅 된 채로 나타났던 사내였다. 그런 냉혈한이 음침한 곳에서는 여인의 음핵을 애무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거다.

동전처럼 확연히 다른 양면성이 야릇한 흥분감을 몰고 왔다. 그럴수록 기세가 강해지는 검지가 음핵을 피해 가며 주변만 집요하게 훑었다.

“으읏, 아, 아, 전하, 흣, 저….”

황홀함이 점점 치밀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톡 튀어나온 곳이 지그시 눌렸다.

“아흣!”

손끝과 맞닿은 음핵이 짜릿하게 녹아내린다. 비부 전체가 기분 좋게 움찔거려져 미칠 것만 같았다.

“읏, 아아. 제발….”

허리가 부르르 떨릴 지경이지만 그에게 만족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애써 허벅지에 힘을 줘 경련을 멈추고는 애타게 애원했다.

“전하, 저는 이, 이런 건 힘들… 흣.”

말을 잠시 멈추고 버거워진 숨을 삼켰다. 그때 고조된 숨결이 엉덩이로 진득하게 떨어졌다.

“힘들어? 미끈거리는 게 자꾸 흘러나오는데.”

노골적인 지적에 진한 부끄러움이 올라온다. 마음과 달리 몸이 너무 그를 좋아해서 어서 가장 안쪽으로 들어와 씨를 퍼트려 달라고 애원하는 거다.

그만큼 음탕한 몸이라는 걸 확인시키듯 그가 음순을 부드럽게 비볐다. 질척질척. 노곤히 귓전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

“네 몸은 나를 좋아해.”

듣기 좋은 저음이 세뇌를 시도하는 것 같았다. 아예 각인시키려는 듯, 방탄한 숨결이 질구 쪽으로 떨어진다. 그곳이 그의 최종 목적지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더 미칠 것만 같았다. 냉혹하기로 유명한 바이렌하그 대공이 머지않아 그곳을 발기한 성기로 격렬히 열어젖히고 신음할 것이다. 손가락이 닿는 것만으로도 놀랄 만큼 짜릿한데 아래가 그 큰 것으로 가득 찬다면…. 상상만으로도 안쪽이 뜨겁게 욱신거려 왔다.

“아니,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번들거릴 만큼 아래를 적셔 놓고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늘 그랬듯 비웃을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그녀를 달래 주듯 웃었다.

그러다 무릎 꿇은 채, 커다란 상체를 숙여서는 입술을 비부에 가져갔다. 뜨거운 입김이 점막을 훅 덮친다. 잠시 몽롱해졌던 그리즈는 기겁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저, 전하, 지금 무, 무엇 하시는…!”

극도로 긴장한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아래를 활짝 벌렸다. 평평해진 점막 속에서도 볼록이 튀어나온 음핵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왕성한 혈기가 깃든 혀가 당연하게도 그곳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하읏!”

얼마나 다양한 소리를 그녀가 낼 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지그시 문지르기 시작했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던 민감한 곳이었다. 대공의 일부, 그것도 말캉한 혓바닥에 집요히 쓸리자 몸이 붕 뜬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하, 읏, 아….”

점막이 나른히 녹아내리는 것 같다. 헉 소리 나도록 나른해져 절로 눈이 감겼다.

저항하지 않고 이대로 앓고 싶은 기분이 앞섰다. 그러면 지나치게 뜨거운 혀가 성감을 집요히 자극해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 줄 것 같다.

급격히 차오르는 기대감을 들킬까 봐 스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한 움큼 쌓여 있던 금화 중에 몇 개가 반동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야 증발하려던 이성을 조금이나마 되찾을 수 있었다. 단지 그는 금화 덕분에 뒤탈이 걱정되지 않으니 원하는 대로 여인을 이용하는 것일 터.

결벽증처럼 깔끔한 그가 여인의 다리 사이에 혀를 넣어 휘젓고 있지만 그건 본능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발정해서 교미를 원하는 종마를 상대하는 것뿐이라고 여겨야 했다.

그 순간 혀끝이 꼿꼿해져서는 음핵을 여러 방향으로 쿡쿡 찔러 댔다. 평소보다 부푼 음핵이 바르르 떨리며 전율이 몰아쳐 왔다.

“흣, 아, 대, 대공 전하, 전하!”

울듯이 말했지만 아래는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당장 기분 좋은 곳을 찾아 강렬히 비비고 싶어져 손이 욱신거렸다.

그 순간 젖은 혀끝이 길쭉한 틈을 훑다가 질구를 푹푹 찔렀다. 그 상태로 그의 엄지가 음핵을 느리게 문질렀다. 부드러운 혀가 다시 들어올 듯 말 듯 점막을 훑자 질구가 좋아서 벌벌 떨렸다.

“아흣!”

하반신이 통제에서 벗어나 방탕하게 흔들린다. 살짝 입술을 떼고 노골적인 유혹을 본 그는 내내 낮추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회색빛 흑경으로 바지 매듭을 푸는 사내가 보였다. 핏줄이 굵게 선 팔뚝과 복근에 한눈팔았던 건 아주 잠시였다.

하의가 무릎까지 내려가자 중심부가 억세게 올라 왔다. 상체가 넓적한 체형에 어울릴 만큼 굵직한 성기가 배꼽에 닿을 정도로 발기해 있었다.

교미하고 싶어져 표피가 귀두 아래로 자연스레 끌려 내려간 모습이 더없이 음란해 보였다. 울퉁불퉁하게 핏줄이 선 아이 팔뚝 같았다. 이지적인 대공이 아니라 그는 종마가 맞았다.

그걸 느끼는 찰나 단단한 손가락이 음순 사이를 지그시 벌렸다. 불투명한 물이 질구에서 나와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듯 목덜미에 힘주면서도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의문이네.”

“읏….”

“여기에 이게 들어갈까.”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멈출 수 없겠는지, 아래로 흘러내리는 애액을 검지로 훑어 입구에 발라 준다.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뾰족한 목울대가 초조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초조했다. 그의 손길이 공들여 입구를 훑을수록 이렇게 수치스러운 꼴로 비부를 보여 주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안, 안 들어갈 리 없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을 모르는 성기가 비좁고 축축한 곳을 뚫고 들어갈 때의 부드러움을 갈구하며 꺼떡거렸다. 불그스름한 귀두에서 멀건 물이 주르륵 떨어진다. 흥분한 사내의 숨이 기어코 야하게 터졌다.

“하아, 그래. 그렇겠지.”

위압감에 놀란 입구가 와락 조여들어 있었다. 그곳을 엄지로 지분거리며 풀어 주던 그가 번들거리는 끝머리를 비좁은 틈새에 맞췄다.

“아아….”

느슨한 저음이 아찔하게 번지는 찰나였다. 흥분한 귀두가 팽팽하게 커지며 질구를 억지로 열어젖혔다.

“아흣.”

점막이 급격하게 뜨겁고 축축해졌다. 여인의 가장 은밀한 곳에다 씨물을 뿌리길 원하는 끝머리가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선액을 흘려 대는 탓이었다.

뭉툭한 귀두와 질구 사이에 물이 고이자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기어코 암컷을 갈망하는 몸이 수치스러운데도 흥분되어 참을 수 없어 보였다.

낮게 앓은 그가 두 손으로 엉덩이를 크게 쥐어 벌리고 중심부를 빠듯하게 밀어 댔다. 눅눅한 구멍에 걸쳐진 귀두가 주름진 길을 빡빡하게 벌리며 진입한다.

있는지도 몰랐던 몸 안의 열점이 음탕하게 달궈지자 그녀는 헉, 하는 신음을 삼켰다.

“아, 아! 저, 전하, 저, 전…!”

희열인지 통증인지 모를 감각이 전신으로 번져 이성이 흐려졌다. 더 깊이 들어오면 몸이 둘로 나뉠 것 같고, 나가 버리면 허전할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질벽에서 차오르는 충만함에 허벅지 안쪽이 형편없이 떨렸다.

이내 볼품없는 꼴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뺨이 뜨끈해졌다. 그런 모습이 더 흥분되는지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파?”

경험이 없어서 여인이 좋아하는 건지 아파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거다. 역시 마찬가지였던 그리즈는 숨넘어갈 듯 헐떡였다.

“읏, 으, 모,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명백히 구분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듯 육중한 성기가 쭉 올라와 박혔다.

“으읏, 아, 흣!”

굵은 것이 아랫배까지 닥쳐와 존재감을 드러내자 구멍 속이 열통과 희열에 차 울부짖듯 벌름거렸다. 스툴에 박힌 손톱이 아래로 득득 밀렸다. 교미에 최적화된 짐승에게 범해지는 것 같은데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지나치게 굵은 성기가 열점을 진득이 눌러 주자 통증조차 쾌감으로 변하는 탓이었다.

그때 끝까지 들어간 걸 확인하듯 그의 골반이 엉덩이를 꾹 밀어 올렸다. 등 뒤에서 흥분한 숨이 느리게 번졌다.

“하아.”

반사적으로 안쪽을 지그시 조여 주자 그가 딱딱히 굳은 것도 같았다. 들어가기도 빠듯한 질벽에 촘촘히 드리운 주름이 예민한 귀두로 하나하나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 감각이 신기한 듯 맛보던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눈매를 좁혔다.

그녀 역시 입술을 물며 고개 숙였다. 쾌감이 자궁구까지 빠듯하게 치달아 있었다. 유두가 저릿하도록 황홀해서 신음 소리가 무방비하게 새어 나왔다.

“아흣, 전, 전하, 거기는, 너무 깊, 흣!”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 내고 유두를 거침없이 자극하고 싶은 충동이 몇 번이고 치민다. 애초에 짐승은 그가 아니라 그리즈 베네딕트였는지 몰랐다.

가까스로 충동을 참고는 흑경을 통해 그를 바라봤다. 풀린 얼굴의 그는 교접부를 바라보며 느리게 앓았다.

누구든 쉽게 볼 수 없을 모습이다. 처음 교미를 맛본 수컷의 모습. 그걸 볼수록 시각적 탐욕이 점점 커졌다. 그림처럼 잘생긴 저 얼굴이 사정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허물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비정상적인 쾌감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하아, 거기가 어딘데?”

지금 그의 성기가 어디에 닿아있냐고 묻는 것이다. 반듯한 얼굴에 가학심이 깃들어 있다. 이상하게도 그조차 조금 어긋난 관심으로 여겨져 좋았다.

“거, 거기….”

하도 숨을 몰아쉬어 메마른 입술이 떨렸다. 아기가 생기는 곳 목전에 발정 난 성기가 닿아 있지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다.

대답을 기다리다 못한 그가 그녀의 등에 가슴 근육이 닿도록 상체를 낮췄다. 이내 헝클어진 회색 머리칼을 쥐어 옆으로 넘기고는 목덜미를 핥았다.

“밤마다 이러고 놀았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았다. 그러다 불공평하다는 듯 눈매를 살짝 일그러트리더니 질문을 바꿨다.

“왜 거기서 일했어.”

매음굴에서 일하게 된 사연이 불현듯 궁금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멸문당해서 팔려 갔다는 사실을 순순히 토해 낼 수 없었기에 침묵을 택했다.

평소였다면 대답을 들으려 궁지로 몰아갔을 사내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겨를이 없어 보였다. 불규칙한 호흡이 뒤통수를 간질였다. 이내 뜨끈한 손이, 배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래. 그냥 하던 대로 기분 좋게 놀고 싶겠지.”

낮게 말한 그가 숱이 적은 체모를 매만지다가 위로 들춰 냈다. 이내 깔끔하게 드러난 점막을 가벼이 문지르며 더듬거리더니 볼록한 열점을 찾아냈다.

“읏….”

굳게 닫혀 있었던 그리즈의 입술이 열렸다. 그 안에서 밭은 숨이 터지는 순간 음핵이 엉망진창으로 문질러졌다.

“아읏, 아, 아흣!”

꾹 눌렸던 살점이 스르륵 올라오면 또다시 느슨하게 긁으며 전율을 부추긴다. 빳빳한 양물이 가장 안쪽을 채워 준 까닭에 힘주는 것만으로도 열점이 자극돼 절정에 다다를 것 같았다.

“흣, 전하, 저, 전하, 그, 그만.”

그가 움직이지 않아도 자궁까지 무언가가 치달으려 한다. 짜릿하고 묵직한 열기를 맛보자 몸이 발정이라도 나는 것 같다.

애액이 흘러내려 그의 손을 형편없이 적셨다. 찌걱찌걱. 그 소리가 더한 쾌감을 부추겼다.

“아흐!”

반사적으로 엉덩이가 쳐들렸다. 그 틈으로 반쯤 빠졌던 기둥이 얕게 삽입되기 시작했다. 성감대 두 곳이 동시에 정신없이 치덕거려진다. 위로 찧어 올려 대던 그의 허리가 점점 유연해지자 피가 초조히 타들어 갔다.

“아응, 으읏, 저, 전하, 아, 아, 흣!”

그를 부르는 신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허릿짓을 멈춘 그가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물었다.

“울 것 같네. 아파서?”

희열에 찬 신음이 그에게는 비명처럼 들린 듯했다.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사람 같았다. 아프다며 긍정한다면 아까처럼 아래에 혀를 댈 것 같아서 사실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뇨, 조, 좋아요.”

그제야 그가 흡족하게 그녀의 뺨을 머금었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한 듯 입술을 옮겨 귓전에 가져가며 나지막이 요구했다.

“그래? 듣기 좋네. 더 해봐.”

이내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고정하고서 척추 없는 생물처럼 허리만 흔들었다. 번들거리는 기둥이 스멀스멀 빠져나갔다가 푹 박혀 온다. 진한 만족감이 질벽 곳곳에 열병처럼 번져 음순이 바르르 떨렸다.

“시, 싫….”

반항하듯 소리를 꾹 참아내자 허릿짓이 점점 깊어진다. 스툴에 엎어진 몸이 훅 앞으로 밀려 나갔다. 등 뒤에서 허스키한 저음이 터졌다.

“아….”

이내 혈기 넘치는 손아귀에 의해 하반신이 쭉 당겨졌다. 그러기 무섭게 굵은 것이 방탕하게 박혀 들었다. 그리즈의 발끝이 격렬히 오므라들었다.

“전하, 으읏! 너무 깊, 깊….”

안에서 맴돌던 불안정한 모든 게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집요하게 추궁받으며 궁지로 몰아 세워지는 게 좋았다. 정신없이 피어나는 열기, 치미는 쾌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어째서, 아주 음란하게 부서지고 있는데….

어쩌면 내심 파괴되고 싶었을지 모른다. 살기 위해 내딛는 걸음조차 불완전하다는 걸 느낄 때면 차라리 산산조각 나기를 바라곤 했다. 그 후 그의 손으로부터 새로 빚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완벽한 그의 손을 빌린다면 완벽한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을 테니까. 갑자기 잇새로 번져나가는 위험한 욕망을 붙잡을 수 없었다.

“흣, 조, 좋아요….”

좋았다. 땀으로 끈적하게 젖은 그의 피부도 좋았고, 흔들릴 수 없도록 허리를 쥔 커다란 손도 좋았다. 한눈팔 수 없도록 영혼을 옭아매는 숨소리도 좋았다. 모든 게 너무 좋아서, 그래서 미칠 것 같았다.

“아, 흣, 아, 기분 좋아, 좋아요. 읏!”

온몸에 모든 구멍이 눅눅하게 풀려 버렸다. 입술을 타고 침까지 흘러내리지만 그를 견뎌 내느라 닦을 여력이 없었다. 팽팽한 끝머리가 가장 기분 좋은 곳을 찔러 주자 미칠 듯이 황홀해져서 허리가 방탕하게 흔들렸다. 이 정도로 삽입을 기뻐하는 몸이 수치스러워졌을 때였다.

“그래, 나도.”

짧게 말한 그가 허스키한 저음을 내며 신음했다. 처음 맛본 여인의 안쪽이 냉혹함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거다.

흠뻑 젖은 사내의 성기가 몹시 흡족해하며 억센 기세로 꺼덕거렸다. 이내 느리게 빠져나갔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닥쳐오자 그리즈는 질벽이 녹아내리는 착각을 느꼈다.

“아읏, 전하, 전하.”

그만해 달라는 투로 그를 불렀지만 몸은 구멍을 정신없이 찔러 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그때 복도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흣!”

굵은 성기를 기분 좋게 머금을 수 있을 만큼 열렸던 질벽이 위기감을 느끼고 조여들었다. 이제 와 침입자를 내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자 빽빽한 질구에 푹 박힌 뿌리가 부르르 떨렸다. 손으로 외롭게 달래 주기만 했던 기둥을 빠듯하게 조여 주자 안을 정처 없이 쑤시며 정액을 뿌리고 싶어진 거다.

복도에 사람을 두고서 그가 정말로 그럴까 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순간 문 앞에서 쇠 긁는 소리가 나더니 단정한 노크가 이어졌다.

“전하, 안에 계시는지요?”

젊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스툴에 뺨을 대고 있었던 그리즈는 황급히 스툴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런 그녀를 유심히 응시했다. 흥미롭게 휜 잇새에서는 평소처럼 차가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래, 쿠엔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추삽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허리를 고정했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이내 그 손이 머리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며 쿠엔틴의 등장을 막았다.

“거기서 얘기해.”

“율리아나 아가씨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녀가 흠칫 놀라자 그가 픽 웃었다.

“그래.”

여유로운 그와 달리 문밖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람의 얘기로는 전하를 만난 후 돌아간 것 같다는데… 혹, 어딘가로 샌 걸까요?”

바들바들 떨던 그녀가 뺨을 슬쩍 돌려 그를 곁눈질한다. 애욕에 잠식당한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고 예쁜 붉은빛 입술이 꾹 닫혀 파들파들 떨리는 광경을 주시한다.

대공의 하수인이 들을 수도 있기에 절대 소리 내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엿보였다. 조금이나마 풀려있었던 그의 얼굴에 묘한 반의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회색 머리칼을 옆으로 넘긴 그가 하얀 목덜미를 지그시 머금었다. 정말로 소리를 끌어낼 작정인지 느슨하게 핥기 시작했다.

방안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알리려 하는 것 같았다. 짜릿한 스릴을 즐기려는 건지, 가짜 여동생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은 건지 그런 건 알 수 없었다.

“으읏….”

입술이 저항을 잃고 벌어지고 나서야 그가 흡족한 눈을 했다. 이내 버티지 말라는 듯 그녀의 뒤통수를 가볍게 물었다가 놓으며 쿠엔틴에게 대답했다.

“율리아나, 어디선가 울고 있겠지.”

때 귀두만 살짝 걸쳐지도록 빠졌던 성기가 빠르게 박혀 왔다. 이내 살점 속에 파묻혀 있던 열점을 찾아내어 긁어 대기 시작했다.

“아…!”

일순간 전율이 차올라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난잡하게 쑤셔지는 아래로 열통이 올라오면서도 너무 기분 좋아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육감으로 그 점을 알아챈 그가 바르르 떨리는 열점만을 꿀쩍꿀쩍 문질렀다.

“하, 아, 읍, 하으!”

이미 집요히 치덕거려졌던 안에서 기어이 불꽃이 터지려 한다. 쿠엔틴이 듣고 있다는 생각에 버틸수록 추삽질이 빨라진다. 가장 민감한 곳만 저릿저릿 자극되자 미칠 만큼 좋았다.

안 돼, 안 돼! 견디려 했지만 허리가 볼품없이 흔들리며 굵은 물건을 보챈다. 그 순간 쿠엔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외에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 요청에 눈앞이 새카매졌다. 대공의 하반신에 맞춰 엉덩이를 쳐들고, 육중한 성기가 들어오기 쉽도록 힘주어 안쪽을 열어 주고 있었다. 뜨끈한 전율이 아랫배까지 차오르는 게 너무 좋아서 허리를 천박하게 흔들며 흐느끼기까지 하는 중이었다.

그걸 쿠엔틴이 빠짐없이 볼 것이다. 굵은 물건을 흡족하게 삼키며 애액을 줄줄 흘려 대는 아래도 전부 보겠지. 존경하는 대공께서 부인도 아닌 여인을 엎드리게 해놓고 다급히 치마만 올린 후에 교미하는 광경으로 인식할 것이다. 그것도 매음굴에서 온 창부와.

치미는 배덕감이 비정상적인 희열로 변해 안에서 겹겹이 쌓인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숨을 참는 찰나 그가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며 말했다.

“그건 내일 해.”

신음을 삼키려 애쓰는 여인을 보자 더 흥분했는지, 빳빳한 중심부가 안에서 더욱 딱딱히 발기했다. 그때 조용하던 쿠엔틴이 뒤늦게 대답했다

“그럼 내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는 타인에게서 그녀를 숨기듯 상체를 더 낮췄다.

다시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문 채로 깊숙한 안쪽까지 채워 준다. 이내 잘생긴 얼굴을 무너트리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고환이 음핵에 닿도록 깊게 닥쳐왔다. 사정하고 싶어진 끝머리가 격분해 꿈틀거렸다. 여인의 가장 은밀한 곳을 느끼는 그는 지독히 황홀한 얼굴을 했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는지 그녀를 스툴에 딱 붙여 안아 가두고는, 터질 듯이 부풀어 버린 질벽의 열점을 귀두로 가쁘게 문질러 댔다.

“하읏, 읏, 아, 전하, 흣!”

어두운 흑경으로 탐욕적인 허릿짓이 비친다. 검 수련으로 다져진 근육질 옆태만 보이건만, 야하게 휜 끝머리가 깊은 곳을 정신없이 훑어 대는 광경이 눈에 훤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그가 그녀의 다리를 어깨 두 배 너비만큼 벌리게 하고는 두 손으로 허벅지 안쪽을 휘감았다. 이내 음순을 지그시 만지며 안을 푹푹 찔러 줬다.

“아, 읏! 대, 대공 전하, 아, 흣.”

미칠 것 같았다. 뜨끈한 귀두가 가장 안쪽에 푹 박혀서 음탕하게 벌름거리고 있었다. 질벽에 쌓여 있던 전율이 가장 격렬히 괴롭힘당하는 곳에 몰렸다. 그 순간 굵은 것이 빽빽하게 맞물렸다.

뜨거울 쾌감이 아랫배까지 훅 치솟으며 절정이 몰아쳐 왔다. 난잡하게 벌름거려지는 구멍이 더 큰 자극을 얻으려 굵은 것을 사정없이 물어 댄다.

“아으응! 으읏! 아아, 아, 응!”

그가 낮게 앓으며 스툴로 무너졌다. 그러면서도 하체를 짐승처럼 엉망진창으로 치덕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아슬아슬하게 불렀다.

“하아. 마리아, 마리아.”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가장 깊숙한 곳에 씨물이 흩뿌려졌다. 뜨끈한 성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맥동하는 감각이, 안쪽 깊숙한 곳에 각인되는 듯했다.

벅찼던 호흡이 침잠하자 평온이 찾아왔다. 안간힘을 써서 그의 힘을 버텼던 까닭에 당장은 숨 쉴 힘도 없었다.

사실은 정사가 끝나면 빠르게 도망치려 했다. 물론 10년 넘도록 장검을 휘둘러 온 사내를 상대하고 걸어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간 까닭에 스툴을 끌어안은 자세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땀으로 온몸이 끈적거리고 얼굴엔 잔 머리칼이 달라붙어 있지만 그럼에도 움직이기 싫었다.

잠시 사그라들었던 굵은 것의 기세는 다시 안에서 점차 커졌다. 다만 그는 널따란 상체로 그녀의 등허리를 뒤덮은 채로 흡족히 호흡할 뿐이었다.

“마리아. …마리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소년처럼 부르는 음성이 왜인지 천진했다. 한 번쯤은 상냥하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기력이 없어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굵은 성기가 안에서 느리게 빠져나갔다. 좁은 틈새로 정액이 끝도 없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그가 손수건으로 닦아 줬다. 그러곤 탄탄한 팔로 허리를 휘감아서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즈는 축 처진 인형처럼 들려 벽난로 옆 어두운 곳에 자리한 침대 옆에 눕혀졌다.

이불이 따뜻하고 뽀송뽀송했다. 이 방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눈 녹듯 녹아내리고 나른해졌다.

“아….”

당장은 아주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싶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인 듯 그리즈를 벽 쪽에 가둬 놓고 침대 바깥쪽에 누웠다.

깃털 매트리스가 푹 가라앉으며 포근함을 선사했다. 그리즈가 등 돌려 벽을 바라보자 그가 곡선이 부드러운 허리를 팔로 휘감으며 목 뒤에 입술을 묻었다.

묘한 착각이 그리즈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정말로 그와 연애라도 하는 것 같았다.

착각을 키우듯 그가 느슨하게 웃었다. 오감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리즈는 문득 궁금해졌다.

“재밌으신가요?”

“응.”

풀렸던 그녀의 눈이 다시 떠졌다.

“무엇이요?”

퍼석하게 갈라진 그의 호흡이 침대 위를 맴돌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만히 추측해보았을 때였다.

“허무해.”

“…….”

“그리고 그럴듯해.”

그리즈는 허무하고 그럴듯한 기분이란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완벽히 대비되는 두 감정을 하나로 묶는 게 쉽지 않았다.

이내 노곤함을 느낀 그리즈는 벽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크고 진한 심장박동이 등을 건드린다. 어둠 속에 서식하는 짐승과 몸을 맞대고 누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벌써 잠이 든 모양이다. 아무리 예민한 사내라도 잠자리를 거칠게 하면 흡족하게 잠든다는 아드리안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리즈는 배에 얹어진 그의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떤 사람이든 구해 줄 수도, 짓뭉갤 수도 있는 손이다. 어떨까. 이 손의 주인이 내 것이 된다면….

그러다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린다는 걸 깨닫고 힘없이 탄식했다. 조만간 그는 제자리로 돌아가 첫사랑을 그릴 것이다.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고 깨끗하게 눈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슴이 찌릿하게 아파져 오지만 그냥 순간의 감정일 뿐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손을 머리 뒤로 뻗어 그의 머리칼을 매만져 봤다. 색깔이 무척 짙어서 거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럽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내렸다. 그러자 그가 아이처럼 목 뒤에 얼굴을 파묻으며 부드럽게 안겨 왔다.

그리즈는 잠결에 품으로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그를 느끼며 눈 감았다. 그때 그가 잠결에 무어라 속삭였다.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꿈결에 말하는 것 같다. 그리즈는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 떴을 때의 그는 사납고 서늘한 분위기가 강했다. 폭정을 일삼는 군주 같아서 매번 두려웠다.

반면 무방비한 상태의 눈감은 얼굴은 감정 표현에 서툰 사내처럼 보였다. 섬세해서 더없이 예민해 보이는 속눈썹 탓인가.

그리즈는 자신만큼 작은 얼굴에 수려하게 자리한 이목구비를 세심히 훑어봤다. 그때 곱게 감겼던 눈매가 흔들리며 불안감이 어렸다.

한 치의 오차 없는 얼굴을 불안하게 만드는 꿈속의 상대가 누군지 궁금했다. 조금 전의 사건으로 하여금 브리튼 공주,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죄의식을 느끼는 걸까.

그리즈는 그가 감정을 표하는 상대가 자신이기를 바라는 욕심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는 불안정하게 호흡하다가 허물어지듯 낮게 읊조렸다.

“왜….”

“…….”

“장난 그만해. …그리즈.”

어느새 진정됐던 호흡이 덜컥 멈췄다. 놀라 세게 문 입술에서 진한 피 냄새가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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