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32)

***

심란했던 밤이 지나갔다. 새벽녘까지 곁에 있어 주었던 오로라도 멀리 떠났다.

그리즈는 뻐근한 몸 때문에 힘들어하며 가까스로 치장을 마쳤다. 벨린에게 듣기로는, 예전에 주문했던 그녀의 석고상이 오늘 도착해 가족 전시실로 들어갈 거라고 한다. 시간 내어 보러 가자는 말이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가짜를 본 따 만든 석고상이 한자리를 꿰찬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한 그리즈는 할머니에게서 선물 받은 손수건이 사라진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벨린과 함께 방을 온통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제저녁 자수를 두며 테이블에 꺼내뒀었는데…. 그 후 아델이 찾아왔을 때 갖고 나갔었다. 혹시 나무집에 떨어트린 건가.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벨린과 언덕으로 나섰다. 가는 길에 잔디밭을 샅샅이 뒤져봤다. 나무집에도 올라갔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진 빠질 무렵 아델이 방문을 두드렸다. 아델은 디저트를 먹고 싶었는지 벨린에게 호박파이를 주문했다. 그러곤 그리즈의 창백한 낯빛을 살폈다.

“율리, 괜찮아? 어제 많이 걱정했어. 사다리에서 내려오다 다쳤다면서?”

손수건의 행방을 추측하기 급급했던 그리즈는 그제야 정신을 다잡았다.

“어? 응….”

“몸, 괜찮은 거야? 전하께서 걱정하시던데. 다친 곳 있는지 알아보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어.”

대공 비아누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또 멍해졌다. 어제 그에게 키스 또한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는 투로 말했지만 사실 그건 불가능했다. 입술에 그가 남긴 감촉이 지금도 남아 있었고, 귓가에선 나직한 호흡이 계속 맴돌고 있다. 그리고 허벅지에 닿았었던 그것의 감각도….

그것이 흥분한 그의 양물이었다는 건 방에 돌아와서 깨닫게 됐다. 놀랄 만큼 억세고 너무 커서 손인 줄 착각했었으니까.

하물며 그가 구태여 그걸 숨기지 않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태연히 키스했고 그는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천한 여인에게 키스할 만큼 비이성적으로 보였던 그에게 이성이 남아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리즈가 심장 부근을 매만졌다. 심장이 크게 부푼 채로 뛰는 것처럼 가슴 전체가 뻐근했다.

“손바닥만 살짝 까졌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아델.”

“아냐, 나보다 전하께서 더 걱정하시던걸. 브람을 통해 왕실 의사를 부르신 것 같아. 아마 내일 저녁때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을 거야.”

왕실 의사?”

“노르드발츠 왕실 의사가 의술로는 최고거든. 약초에 대해서도 잘 알아서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린다고 해. 율리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거야.”

그리즈는 푹 고개 숙이고 눈을 혼란스레 굴렸다. 그가 왜 의사를 불렀지. 매음굴에서 온 사기꾼을 치료해 주기엔 왕실 의사는 너무 과분하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제 그가 닿았던 입술만 다시금 뜨거워졌다.

이것도 괴롭힘이라면 괴롭힘이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그의 입술이 아른거려 미칠 것 같았다. 그의 숨결, 체온, 손길은 뺨을 집요히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물론 그는 충동적이었겠지. 왕명이 떨어진 이상 브리튼 공주와 혼인해야 한다는 건 그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따지자면 일탈 정도일까.

그럼 잠깐의 짜릿함을 준 보상으로 왕실 의사를 붙여 주는 건가. 며칠 전 가슴에 키스하고 루비 귀걸이를 준 것처럼.

그리즈는 서서히 원망스럽게 변해 가는 마음을 꾹 삼켰다. 이내 귀 언저리에서 맴도는 그의 숨결을 지우려 고개 저었다.

차라리 손수건을 찾는 일에 집중하자. 할머니께서 아시면 서운해하실 테니까. 손수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함부로 다룬 거라고 오해하신다면 속상할 것 같았다.

그리즈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혹시 나무집에서 손수건 못 봤니? 예배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화려한 손수건이야. 기도하는 성녀가 커다랗게 수놓아져 있어.”

아델이 초록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 어제 본 것 같아.”

“정말?”

“전하께서 쥐고 계셨던 것 같은데. 역시 네 거였구나. 언덕 위에서 말이야.”

“…전하께서?”

그리즈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하필, 어쩌다 그게 그의 손아귀에….

어젯밤 잔디를 주시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봤다. 그때는 그가 넋을 놨던 거라고 여겼지만 손수건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즈가 조용히 탄식했다. 비아누트가 스테판을 제치고 대공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다.

가령 그가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알고, 어떻게 가져야 할지 안다거나. 상대를 효율적으로 짓밟는 방법을 안다거나. 아마 사람을 재밌게 갖고 노는 방법도 알고 있겠지. 손수건을 이용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껏 그를 거스르려 한 적 없지 않나. 그의 여동생이라고 속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용서를 구했다. 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리즈의 붉은빛 눈동자가 혼미하게 흔들렸다. 그때 귓전에서 그의 목소리가 번졌다.

“이미 망치고 있어.”

“…….”

“더러운 네가. 나를.”

아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소리 없이 변명해 봤지만 그에게 닿을 리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대공 비아누트는 지금껏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천한 여인에게 흔들렸고 기어코 욕정했다.

어쩌면 창녀 주제에 그를 의도적으로 유혹했다고 여기고 보복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근심으로 가득한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아델, 미안한데 나 머리가 좀 아파.”

몸살 난 듯 온몸까지 욱신거리는 까닭에 아델을 돌려보냈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리즈는 브람을 불러 대공과의 만남을 요청했다. 손수건을 잃어버린 걸 할머니께서 아시기 전에 받아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한 시간 뒤 브람이 찾아왔다. 요청을 저버렸던 저번과는 다르게 편안한 얼굴이었다.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따라오시지요.”

그리즈는 안도하며 브람을 따라나섰다. 어제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타박상을 입은 건지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별수 없이 2층 계단을 오르려 했다. 그러나 브람은 1층 그녀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오른쪽 복도 안으로 더 들어갔다.

오른쪽 모퉁이를 돌자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이건 할머니의 방으로 가는 길이 분명했으니까.

기어코 할머니의 방 앞에 선 브람은 노크하겠다는 듯 그리즈를 돌아봤다. 그리즈는 파리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브람. 나는 전하를 뵙고 싶다고 했네만.”

퍼석하게 메마른 그리즈의 입술이 갈라졌다. 따끔함을 느끼는 찰나 브람의 대답이 들려왔다.

“전하께서는 마님과 함께 계십니다. 아마 아가씨를 초대해 단란하게 담소를 나누시려는 것 같습니다.”

브람은 뭐 잘못된 점이 있냐며 눈으로 묻고 있었다. 잘못된 점은 이 저택에 온 그리즈 베네딕트였다. 그리즈 베네딕트는 율리아나의 자리를 꿰찼고, 대공과 육체 접촉까지 했다.

현기증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 숙였다. 그가 왜 하필 할머니 방으로 부른 걸까. 혹시 할머니 앞에서 태연히 손수건을 돌려주려고 하는 건가. 피 말려 하는 모습을 즐기려고?

갑자기 목에 목줄이 채워진 것처럼 갑갑해진다. 그가 방 안에서 목줄을 흔들며 오만하게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거스를 수 없었다. 침착하자. 그리즈가 호흡을 가다듬는 그때 브람이 노크했다.

“율리아나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단숨에 문이 열렸다. 문 앞에 할머니를 전담하는 하녀장 로렐이 서 있었다.

할머니는 대공과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가로운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그녀가 그리즈를 보고 이리 오라 손짓했다.

그리즈는 긴장한 채로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는 ‘ㄷ’ 자 모양의 담벼락으로 막혀 있었고 벽에 넝쿨이 있었다.

음지의 꽃이 만개한 배경 앞에 대공이 앉아 있었다. 서늘하던 눈가를 낙락하게 빛내고 있다. 나른한 저음이 이내 코앞에서 울렸다.

“율리아나가 왔군요.”

그리즈의 심장은 눈치 없이 빠르게 뛰었다. 불안한 건지, 설레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귀족식으로 인사하는 것뿐이다.

“초대해 주셔 기쁩니다.”

그리즈가 치마를 우아하게 펼쳐 보이며 뻐근한 무릎을 굽혔다. 어느새 할머니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왔구나. 어서 앉으렴.”

그리즈가 의자에 앉자 집사가 차를 따라 주고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는 가족끼리의 단란한 티타임을 몹시 즐거워했다.

“이렇게 오붓하게 모이니 참 좋구나. 그동안은 비아누트가 너무 바빠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게 아쉬워.”

그리즈는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곁눈질했다. 그는 검은 상의에 회색 외투를 입었다. 두툼한 가슴팍 때문에 외투 앞섶이 들려 있었다.

어제 저 가슴팍에 몸이 지그시 눌렸었는데…. 그 순간의 탄탄하고 뜨거운 감각이 되살아났고, 다시금 숨이 막혀 왔다.

그렇지만 그리즈는 대공의 몸에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손수건을 꺼낼까 봐 긴장한 것일 뿐이라고, 애써 자신을 세뇌했다.

그 생각을 알 리 없는 할머니의 관심은 전혀 다른 사내에게 있었다.

“디르크라는 아이는 어떤 것 같니? 소문대로라면 일등 신랑감이겠지만 신중해지는구나. 막상 손녀를 시집보내려니 아까워서 말이야.”

할머니는 벌써 손녀의 혼인식에 와 있는 듯 허전하게 미소지었다.

“그러지 말고 계속 할미랑 살래?”

그리즈는 캐모마일차로 입을 축이곤 할머니를 마주 봤다. 그녀 역시 가슴이 허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 혼인 때문이 아니라도 머지않아 이 저택을, 할머니를 떠나는 순간이 올 거다.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아니겠지. 아마도 천국에서…. 그때는 모든 진실을 담담히 풀어놓을 수 있을까.

그리즈가 어렴풋이 미소 지었다.

“할머니랑 계속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때 옆에 앉은 대공의 시선이 그리즈의 뺨을 어루만졌다.

서늘했던 며칠 전과 무언가 달랐다. 얼굴이 따가웠다. 아니, 뜨겁다. 찻잔을 쥔 그리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 무슨 얘기를 나누고 계셨어요?”

애써 상냥하게 물은 후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조차 섬세히 살펴보는 파란 눈동자 때문에 차를 아무리 마셔도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반면 할머니는 아주 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네 오라비의 혼사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 지금껏 브리튼의 공주로 살아온 아이가 네 오라비만 보고 바이렌하그에 터를 잡겠다잖니.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애정 있게 임해 달라고 부탁하던 참이었단다.”

이내 할머니는 포크로 사과 파이를 잘라 드시곤 말을 이었다.

“부부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절로 돈독해지겠지만 시작은 쉽지 않을 테니까.”

“…….”

“물론 나도 초반엔 힘들었단다. 네 할아버지가 너무 과묵한 까닭에 나를 좋아하는지도 몰랐지. 진귀한 보석만 선물해 주길래 재력으로 나를 길들이려 하는 줄 알았어. 그도 그럴 것이 그게 가장 편한 방법이니까.”

진귀한 보석으로 사람을 길들인다라…. 귀에 건 루비 귀걸이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다행히 할머니는 과거를 회상하느라 그리즈의 어두운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참다못해 성이 난 나는 네 할아버지를 찾아가 보석들을 모조리 돌려줬어. 나는 나를 사랑해 주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내를 원하니 그걸 달라고 말했지.”

어느샌가 할머니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날 네 할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발데마르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게야.”

그러니까 할머니는 피동적 대우에 저항했고 사랑을 쟁취했다. 그리즈는 그런 당당함을 동경하면서도 엄두 내지 못했다.

당당함은 건강한 자존감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 위치와 신분, 재력을 양분 삼아 번식한다. 이미 자존감이 박살 났고, 천민이 된 그리즈는 당당함을 키울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당히 가문의 기둥으로 자리 잡은 할머니가 멋있는 건 당연했다. 전장에서 부상 입은 남편 대신 갑옷을 입고 출정해 기사들을 독려했다는 일화도 있는 인물이니 말이다.

“참 멋있게 느껴져요. 아마 모든 이들이 그렇게 여길 거예요.”

그리즈의 얼굴에 진심이 깃들었다. 할머니는 흐뭇하게 웃다가 붉은 루비 귀걸이를 눈여겨보았다.

“못 보던 귀걸이구나. 디르크에게 선물 받았니?”

그리즈는 차를 마시려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에서 무수히 많은 생각이 증식했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게 좋을까. 차라리 얼버무릴까.

대공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캐모마일 향을 고고하게 음미하고 있었다. 시선은 그리즈를 관찰하는 중이다.

그리즈는 그가 왠지 거짓말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문제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할머니를 이 이상 속이고 싶지 않았다.

“아뇨. 오라버니께서 주셨어요.”

긍정해 버린 게 흥미로운지 그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할머니는 의외라는 듯 두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래? 정말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눈치였다. 그가 개인적인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상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다 애써 긍정적으로 미소지으셨다.

“비아누트가 동생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구나. 하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돌아왔으니 애틋할 만도 하지.”

“…….”

“비아누트, 그 마음으로 부인도 위해 줄 수 있겠니?”

노련한 할머니도 대공 비아누트는 대하기 어려운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대답 없던 그가 묵묵히 답했다.

“책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대공으로서 주어진 책임과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그 정도로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바이렌하그의 땅은 늘 비옥한 까닭에 탐내는 가문이 많았지.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배었는지 우리는 똑똑히 봐 왔어.”

그리즈 역시 바이렌하그가 유독 전쟁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대단한 가문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번의 반란에 무너져 내린 베네딕트 가문과 달리, 끝까지 승리하는 저력을 가진 게 부러웠다.

그때 할머니가 차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군대는 전쟁하기 위해 갖추는 게 아니야. 전쟁을 막기 위해 갖추는 게다. 적들의 전쟁 의지를 도려내기 위해서라면 막강할수록 좋고.”

그는 지루한 듯 찻잔을 가만히 보며 대답했다.

“이견 없습니다.”

그제야 할머니가 그의 표정을 읽고 겸연쩍어했다.

“나도 참, 다 큰 성인을 두고 실없이 잔소리했구나.”

그의 혼사에 대한 얘기가 몇 번 더 오갔다. 다만 그가 모든 질문에 단답하자 할머니는 그리즈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래, 이번엔 율리아나 얘기를 들어 보자. 사교 무대에 설 준비는 잘하고 있는 게야?”

그리즈는 다시 돌아온 관심에 극도로 긴장했다. 그가 손수건을 덜컥 꺼낼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고르고 고르셨을 손수건을 잃어버린 사실을 미리 알릴 수도 없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라고 오해하신다면 정말 속상할 것 같았다.

“네, 잘하고 있어요.”

작고 아름다운 그리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얼굴이라도 만족스럽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싫지 않은 게 정말 이상했다. 그리즈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그를 없애려 이마를 문질렀다.

사과파이를 드시던 할머니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다음 주 연회를 열 거란다. 정오에 부인들을 먼저 초대해 담소를 나누고 저녁에 만인에게 너를 소개할 거야. 무도회가 이어지겠지.”

“…….”

“그날 너를 보러온 손님들을 위해 함께 왈츠를 추는 건 어떻겠니?”

손녀를 위한 자리이니만큼 손녀가 돋보이길 바라시는 눈치였다. 그래도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매음굴 손님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즈가 소극적으로 고갤 끄덕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파묻혀 추는 정도라면 좋을 것 같아요.”

할머니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날 입을 드레스는 내가 직접 디자인할 거란다.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게야. 내가 데뷔했던 그날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시는 할머니에게서 사뭇 다른 모습이 비쳤다. 어린 날 잔뜩 긴장한 채로 사교 무대에 올라섰던 소녀 파올라. 그리즈는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감사해요, 할머니. 그리고… 죄송합니다.”

할머니는 그리즈의 말을 의아하게 곱씹다가 식곤증을 느끼며 티타임을 끝냈다. 그리즈는 비아누트를 뒤따라 방에서 나왔다. 그는 길어진 티타임에 업무가 밀린 듯 금색 회중시계를 꺼내어 보고 있었다.

곧 목적지로 향할 기세였다. 그리즈는 어제 그가 빨았던 입술 가를 검지로 훑으며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손수건…. 돌려주세요.”

그의 뒤태가 홀연히 멈췄다. 이내 그가 고개만 돌려서 그리즈를 내려다보며 말을 따라 했다.

“손수건.”

굵직한 음성이 그리즈의 귓가를 건드렸다. 숨소리가 짙어서 더 관능적으로 와닿았다. 그리즈가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이었다.

“지금 없어.”

이내 그는 상의 앞 주머니에서 체인이 달린 외눈 안경을 꺼내어 목 뒤에 둘렀다. 그리즈는 탄탄한 목 부근에 걸쳐진 안경만 꿋꿋이 주시했다.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손수건이 나타나 곤혹스러움을 주면 어쩌나. 이렇게 나서지 않는다면 손수건을 돌려받지 못할 것 같았다.

“위치를 알려 주시면 제가 찾아갈게요.”

그가 그 말에 묘하게 웃었다. 차가운 인상 때문에 그의 분위기가 지독히 도도했다.

“재밌겠네. 그거.”

“…….”

“그래, 찾아 봐.”

찾을 수 있다면 찾아가라는 도발. 그리즈는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물며 그를 응시했다.

외면적으로 더 없이 성숙한 어른인 그에게서 불완전한 소년의 모습이 비친다. 아니, 사실은 그랑디아에서 키웠던 그 늑대개 같았다. 그 개도 주인의 물건을 종종 돌 틈에 숨겨 뒀었는데…. 때로는 자신의 체취를 잔뜩 묻혀 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저 사내는 개가 아니라, 대공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가 아닌가. 피로 흠뻑 젖어 있는 대지를 지키며 거칠게 생존해 온 인물. 대공령에 새로이 들어온 장난감의 반응이 퍽 재밌는 것이겠지.

“저를 괴롭히는 게 즐거우신가요. 그래서 어제도 그렇게….”

혀를 야하게 굴리며 나른한 신음을 내던 사내가 지금도 입술에 남아 있다. 그가 불가촉천민의 무력함을 조롱한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설레는 스스로가 싫다.

“저도 영향받을 수밖에 없어요. 이러다 디르크와의 혼사를 망칠지도 모릅니다.”

디르크 가문과의 혼사로 이득 볼 그를 협박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는 동요하지 않았고 그리즈는 혼란스러워졌다. 귀걸이를 끼워 주고는 다신 안 볼 것처럼 잘 가라고 말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그거 괜찮겠네.”

나지막이 말한 그가 모호하게 미소지었다.

“그냥 내가 가질까. 이렇게 피 말리느니.”

그리즈는 그대로 호흡을 멈췄다. 가지다니… 대체 무엇을.

“무엇을요?”

그는 거침없었다.

“너를.”

파란 눈이 목 부근을 훑었다. 그리즈는 금세 달아오르는 피부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고개 숙였다. 하루 사이에 무엇이 변한 걸까. 잘 가라는 말을 끝으로 거리 두더니 왜 이제 와서…. 혼인을 앞둔 상황에 정부라도 만들겠다는 건가.

“아니면 제대로 건드려 주세요. …전하께서도 그걸 원하신다면.”

겨우 그런 유혹으로 그를 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순진한 사내가 아니었다. 지금껏 무수히도 많은 유혹을 받아 왔고 그때마다 가소로워했을 거다. 정부나 사생아 한 명 없는 그의 사적 영역이 그걸 증명했다.

“놀리시는 건가요.”

그리즈가 벅찬 숨을 길게 늘어트렸다. 그는 그 모습을 빤히 주시하며 즐겼다. 너의 본심을 느낀 마당에 나의 본심을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

“아니.”

그리즈는 서늘한 저음 속에 드리운 그의 감정을 읽었다. 자괴, 원망, 그리고… 여인을 향한 갈망.

그 감정의 끝날이 어째서 자신에게 겨눠진 건지 알지 못했다. 여인의 몸을 원한다면 어째서 늦은 밤 그의 방이 아니라, 티타임에 부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 티타임에는 왜 부르셨나요.”

질문이 들어오면 이유를 답해 주는 게 정상적인 대화 방법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건너뛰고 그녀의 감상을 물었다.

“왜? 손수건으로 면박 줄까 봐 끔찍했어?”

그를 뒤쫓던 걸음이 주춤하며 멈췄다. 어제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살짝 삐끗한 발목이 찌릿하게 아팠다.

“저, 저는….”

사실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옆에 앉은 그를 신경 쓰느라 정신없었다. 숨이 떨리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을 보며 극도로 긴장했었다.

다만 그리즈는 그 감정들을 차마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저 무던히 서 있었다. 그는 그리즈의 발목부터 얼굴까지 느릿하게 훑어보다가 시간을 확인하며 그녀를 놀렸다.

“차 한잔 더해 줘?”

시종일관 졸졸 따라오는 여인을 비꼰 거다. 서늘한 비소를 본 그리즈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타인에게 무관심한 그가 어떤 이유로, 무엇을 원하기에 이런 곤혹감을 주는 건지 알고 싶었다.

“왜, 왜 제게만 이리도 가혹하게 구시는 거죠.”

그의 동생 율리아나는 어렸을 적 강아지를 재미 삼아 죽였다고 했다. 정말 집안 내력대로라면 대공 비아누트 역시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 터. 어쩌면 굴러들어온 장난감을 통해 가학성을 충족하는 중인지 몰랐다. 원망 깃든 그리즈의 음성이 그에게 닿았다.

“왜 하필 제게만….”

가려던 그가 다시 멈춰 섰다. 이내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리즈와 시선을 맞추곤 눈을 나른하게 떴다.

“네가 거슬려. 그게 좀 분해서.”

그렇게 말하는 저음이 지나치게 퍼석했다. 무수히도 많은 밤 번민했던 사람처럼.

그리즈는 메마른 아랫입술을 느리게 베어 물었다. 거슬려서. 분해서….

깊은 새벽, 잠들지 못하고 창가에 기댄 그의 모습이 문득 상상됐다. 한순간이라도 그의 머릿속에 매음굴의 마리아가 존재했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달아올랐다. 무어라 대답하지도 못할 정도로.

왈츠 수업이 길어졌다. 머지않아 그리즈가 연회에서 춤추게 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님이 조금 더 욕심낸 탓이다.

그리즈는 발목의 시큰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수업에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연회에서 매음굴의 더벅머리 마리아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까 봐 두려워진 것이다.

누구에게 의심받든, 진짜 율리아나라며 시치미 뗄 생각이지만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스테판이 탈스바그에서 돌아오는 대로 이 문제를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친 상태로 돌아온 그리즈는 욱신거리는 발목을 주물렀다. 그때쯤 디르크가 찾아왔고 한동안 담소를 나누다 돌려보냈다.

이래저래 고민해 봐도 대공에게서 손수건을 돌려받을 만한 방법은 생각해 내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보았던 그의 얼굴만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네가 거슬려. 그게 좀 분해서.”

그 찰나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간의 번민을 그녀가 느끼게 되어 흡족한 것 같기도, 스스로 파괴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의 그를 보며 알 수 없는 위안을 느꼈다. 맥이 확 풀렸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팽팽하게 당겨졌었다.

지금 그가 어디에 있을지 그려 봤다. 그러다 근사하게 성숙한 몸을 떠올렸고, 그 몸의 감촉을 느꼈던 때를 회상했다.

솔직해지자면 그를 욕망했었다. 넓고 다부진 상체를 안아 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진땀이 났었다.

그는 그 욕망을 읽었고, 손길을 보채듯이 상체를 깊숙이 낮춰 줬다. 선을 넘을 빌미를 원하는 것 같았다.

한 발만 앞으로 나오면 낚아채 그의 영역으로 데려가 주겠다는 듯.

만약 두 팔로 그를 끌어안았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아….”

참 우스운 일이다. 왜 계속 그를 생각하는 건지.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 연심이라도 품게 된 건가.

입술을 초조하게 매만지던 그리즈가 고개 저었다. 그녀는 지금껏 함께 있으면 편한, 자상한 사내를 원해 왔다. 진한 긴장과 공황을 일으키는 비아누트에게는 절대로 반할 리 없었다.

차라리 이런 게 아닐까. 어렸을 때는 그와의 혼인을 거절하게 됐고, 커서는 비천한 신분인 채로도 그와 키스했다. 그럴 만큼 그녀가 매력적이라는 착각을 그 사내가 불러일으켜 준 거다. 덕분에 비참해진 처지를 위로할 수 있게 되었기에 잠시 들뜬 것뿐.

평정심을 되찾은 그리즈는 손수건이 있을 만한 장소를 떠올려 보았다. 벨린의 말로는 그는 기사 사무소 옆 공무실에 있다고 했다.

손수건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그의 방, 혹은 수집 방에. 그리즈는 티아를 품에 안은 채 손을 녹이며 고민에 빠졌다.

“위치를 알려 주시면 제가 찾아갈게요.”

그는 그렇게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었다. 어떻게 해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거나, 찾아가도 상관없다는 의미겠지.

그리즈는 손수건을 꼭 찾아야만 했다. 언젠가 다른 의도로 사용될까 봐서 불안했으므로. 모함, 혹은 협박. 그에게 다른 속내가 있는 건지도 모르니까.

한참을 망설이다 2층 그의 방 앞에서 서성였다. 하녀 다섯 명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먼지를 터는 중이었다. 하녀의 출입을 허한 곳이니 살짝 둘러봐도 되겠다 싶었다. 하녀에게 손수건을 찾아오라 시켰다가 괜한 피해를 입힐지 모르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그리즈는 티아를 탈출시켜 줬다. 신난 티아가 귀를 뒤로 젖힌 채 그의 방으로 직행했다. 아마도 형제를 만나러 가는 것이겠지.

그리즈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티아를 뒤따랐다. 때마침 청소를 마친 하녀들이 분주히 나갔다. 공교롭게도 그리즈는 강아지 두 마리와 남겨져 버렸다.

티아는 침대 밑에 들어가 형제의 얼굴을 핥아 주고 있었다. 그리즈는 뒤늦게 그의 방을 둘러봤다.

그녀의 방을 두 개 합친 것보다 넓은 방이다. 창가에 책상, 너른 침대 하나, 사이드 테이블과 티 테이블이 가구의 전부였다.

그나마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예술화와 황금 샹들리에, 금 십자가와 기도상이 공간의 허전함을 덜어줬다. 왕실처럼 호화로운 공간임은 확실했지만 그의 물건이랄 건 없었다.

그리즈는 의아함을 느꼈다 혹시 개인적인 물건은 수집 방에 둔 건가. 그럼 손수건도 거기에 있을 텐데….

불길한 기분으로 책상 앞에 섰다. 조금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서신용 양피지와 잉크, 깃털 펜이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었다. 옆 서랍에는 바이렌하그 내 관료들에게서 온 서신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손수건은 책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엔 호기로웠던 그리즈는 타인의 방을 샅샅이 뒤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돌아가야겠다. 분위기를 봐서 할머니께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것 같다.

티아를 데려가기 위해 침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순간 고요했던 계단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점점 가까워진다. 이 방의 주인을 떠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됐다. 사적 영역을 침범한 여인에게 그는 자비롭지 못할 거다. 그런 위험을 무릅쓸 만큼 손수건이 필요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티아는 나오지 않았기에 다급해져 방문 틈을 살짝 열어 봤다. 대공 비아누트가 죽음의 사신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등 뒤에 하인들을 줄줄이 단 채로.

괜히 의심 사고 싶지 않았으므로 책장 옆에 작게 난 방문을 열었다. 서고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책들을 위한 방에 알맞게 서늘하고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심장 뛰는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어쩌지. 혼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기름 램프를 내려놓았다.

그때 그의 방 출입문이 열렸다. 살짝 열린 서고 문틈으로 비아누트가 하인들과 들어오는 광경이 보였다.

목욕하고 온 건지 검은색 머리칼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무심히 물기를 털어 낸 그가 창가 앞 의자에 앉았다.

하인들이 그가 입은 로브의 앞섶을 젖혔다. 속옷 하의만 입은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달빛을 흡수해 윤이 나고 있었다. 옆구리와 하복부조차 근육으로 두꺼웠다. 교미에 특화된 몸에 긴장한 그리즈가 문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하인들은 귀중한 종마를 관리하듯 대공의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머리를 말려 줬다. 의자에 기댄 비아누트는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보고할 게 있나.”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침대 밑에서 티아가 튀어나왔다. 그걸로 모자라 그의 앞에 앉아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정작 그가 키우는 강아지는 나오지 않는다.

티아가 상냥한 성격이긴 했지만 주인 말고는 잘 따르지 않았다. 겁 많은 형제 대신 눈치껏 나온 건가. 아니면 목숨 줄을 쥔 사람을 알아본 건가.

그리즈는 티아가 문틈으로 자신을 알아보고 달려올까 봐 두려웠다. 그냥 문 닫고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 대공의 앞에 서 있던 집사장 브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탈스바그 후작 각하께서 내일 저녁에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하인들이 그의 몸에 허브 로션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그리즈는 그에게서 느꼈던 로즈마리 향을 떠올렸다. 그 향기의 정체가 저 로션 같았다.

일순간 목덜미가 홧홧해져 오자 그리즈는 바닥을 주시하며 자책했다. 그는 스테판에 대해 굳이 캐묻지 않은 채 브람만 주시했다.

스테판의 근황보다 더 궁금했던 것을 묻고 싶은 눈이었다. 그러면서도 묻지 않고 진한 눈빛을 주기만 했다.

한참 뒤에야 그의 저음이 번졌다.

“율리아나는.”

아…. 그리즈는 폐부에서 묵직하게 뭉친 숨을 훅 내쉬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건지 무너져내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오에도 함께 티타임을 갖지 않았나. 가짜 율리아나의 무엇을 또 알고 싶은 건지….

브람 역시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고개를 더 숙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송구하지만 전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대공은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며 물었다. 큰 관심은 없다는 듯,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투로.

“별 탈 없이 걷던가.”

브람은 대공이 물을지도 모르는 저택 내 문제를 수없이 파악해 온 기색이었다. 그러나 예상외의 질문에 허를 찔려 즉답하지 못했다.

“전, 전하께서 그 점을 직접 확인하시려 티타임에 부르신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해서 저는 주의 깊게 볼 생각 없이… 송구합니다.”

그가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다쳤는지 확인하려고 티타임에 부른 거라고…?

그리즈의 심장은 일순간 뜨겁게 조여들었다. 면전에서는 조롱을 즐기던 사내의 진실된 속마음이 저것 같았다.

할머니의 방에서 나오던 때 몸을 훑어보던 파란 시선이 눈앞에 어렸다. 욕망하는 줄 알았다. 설마 걱정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그럼 티타임에는 왜 부르셨나요.”

“왜? 손수건으로 면박 줄까 봐 끔찍했어?”

뒤틀린 저음이 귓속에서 연거푸 되풀이된다. 그는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까. 함께 정오를 보내어 좋았다고 답했다면 혹시 미소를 보였을까.

그리즈는 들떠 버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 그가 티아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쟤가 저렇게 작았나. 커다란 손에 잡히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티아의 형제가 숨은 침대 밑을 주시하고 있었다.

“약할수록 약점을 숨길 수밖에 없어. 방심하면 잡아먹히니까.”

나지막이 말한 그는 티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티아가 목을 긁어 주는 손길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이내 목가를 매만져 줬다. 상대가 좋아하는 부분을 알고 만져 줄 만큼 그는 상냥한가.

티아는 그의 품에서 잠이라도 들 작정인지 지그시 눈 감았다. 그는 티아를 들어 건강 상태를 살피다가 하인에게 내밀었다.

“데려다줘. 찾아다니지 않게.”

그때쯤 그리즈는 그가 손수건으로 모함할까 봐 불안해했던 시간이 무의미했음을 깨달았다. 모함하려면 손수건보다 티아를 이용하는 게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손수건을 돌려주지 않는 걸까.

하인이 티아를 데리고 나갔다. 브람은 그의 의중을 뒤늦게 파악했다.

“앞으로 아가씨를 유심히 살피겠습니다.”

그는 그제야 굳은 눈가를 누그러트렸다. 무방비한 얼굴이 머리를 어지럽히자 그리즈가 입술을 아프도록 물었다. 그 찰나 그가 관심 없다는 듯 창밖을 내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율리아나는, 오늘도 디르크를 만났나.”

브람이 당연하게 고갤 끄덕였다.

“예. 방에서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창에 비친 사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의 정체가 설핏 드러나자 그리즈는 숨이 막혔다.

“얼마나.”

“한 시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브람은 대공께서 동생의 혼사를 걱정하고 있다고 여겼다.

“두 분께서 예전처럼 각별한 사이가 되신 것 같습니다. 조용하신 아가씨께서도 디르크 님을 만나면 말씀이 많아지시더군요. 누구보다 디르크 님을 편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요.”

서늘한 눈가가 달빛 앞에서 침침하게 어그러졌다. 그는 구태여 얼굴을 내보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

방 안이 무서울 정도로 적막해졌다. 창밖만 내다보던 그가 뒤늦게 입 열었다.

“나랑 있는 것보다?”

기습 질문이었다. 브람은 그의 의중을 알지 못해 불안해했다.

“아… 무래도 소꿉친구로 지내며 디르크 님과 조금 더 교감하셨고 요새 부쩍 만나시다 보니….”

디르크를 편하게 여기는 율리아나 덕분에 문제없이 혼인이 성사되리라는 걸 알리려는 눈치였다. 그러다 지그시 이를 물어 두툼해진 대공의 턱 근육을 보고는 방향을 급선회했다.

“무, 물론 혈육보다 편한 사람은 없을 테지요.”

멀찍이 서서 대화를 듣던 문관 브리언이 그제야 입 열었다.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이 혼인 덕분에 양가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는 셈이니까요. 앞으로 대공령 내에 평화와 영광이 찾아올 겁니다.”

벨린의 얘기에 의하면 브리언의 가문은 몇 대에 걸쳐 바이렌하그를 보좌해 왔다고 한다. 선대가 해 왔듯 영지를 위해 충언하는 것일 터. 대공은 나지막이 대답하며 피곤한 기색으로 눈 감았다.

“그래, 알고 있어.”

마사지까지 마친 하인들이 일제히 방을 나갔다. 브람과 브리언도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휴식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는 침대로 향하지 않았다. 일교차가 큰 노르드발츠의 날씨 탓에 그리즈는 시려오는 손을 주물렀다. 그가 잠들어야 방을 나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간 예민해 보였던 대공이라면 인기척을 느끼고 눈 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별안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른한 얼굴의 그는 의자에 무방비하게 늘어졌다. 편한 자세일 터인데도 상체에 근육이 명확히 자리 잡혀 있었다. 그간 검을 얼마나 휘두른 건지 가슴 근육이 지나치게 두꺼웠다. 가슴 밑 선의 그늘진 곳을 바라본 그리즈가 숨을 훅 내쉬었다.

여인의 몸과는 정말 달랐다. 매음굴에서 봐 온 사내들과도 여지없이 다르고….

대공 비아누트의 몸은 뼈와 근육, 피부로만 이뤄진 것 같았다. 해로운 게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남성미가 진하게 닥쳐 왔다. 저 몸이 맞닿았을 때의 감각이 가슴께에 피어오른다.

뜨겁고, 탄탄하고, 좋은 향기가 나던 몸. 은은하게 풍기던 로즈마리가 폐부에 차오르는 듯해 별안간 숨이 막혔다.

그때 그가 창틀에 놓인 상자를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특이한 문양의 손수건을 본 그리즈는 눈을 크게 떴다. 위험을 감수하고 찾아 헤맸던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이상하게도 끝내 찾지 못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냥… 그에게 돌려받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대공은 고개를 느릿하게 젖히며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시선 속에 어린 생각이 궁금했다. 왜 티아는 순순히 돌려보내 주었으면서 손수건은 갖고 있는 건지. 고작 손수건 한 장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눈매를 가늘게 좁힌 그가 손수건을 입가로 가져갔다. 이내 섬유에 깃든 향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다분히 본능적인 행동을 보자 절로 생각이 멈췄다. 두툼한 가슴팍이 느릿하게 위로 올라갔다가 서서히 내려앉는다. 번지는 숨소리가 귓가를 뭉근하게 주무르는 것 같았다. 기분이 몽롱해진다. 그의 상체가 지나치게 관능적이어서. 달빛에 빛나는 복근이 흐늘거리는 게 야릇하게 닥쳐와서.

그리즈는 쭈뼛쭈뼛한 목덜미를 손으로 휘감아 눌렀다. 그 찰나 그의 실크 소재 속옷 안에서 무언가가 느릿느릿 일어서다가 허벅지 쪽으로 툭 쓰러졌다.

그리즈는 아이 팔뚝만 한 윤곽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한계치까지 음란해진 사내의 성기라는 걸 직감했고 이내 터지는 숨을 손으로 막았다.

저것이 저렇게까지 커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여인의 깊숙한 안쪽에 씨를 퍼트려 회임시키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당장 충족할 수 없었기에 하반신을 살짝 들며 괴롭게 신음하기만 했다. 음란한 몸짓에 그리즈의 속눈썹이 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공은 서늘하게 빛났었다.

그랬던 그가 어두운 곳에서는 발정기의 수컷처럼 여체를 갈구한다는 사실에 현기증이 났다. 그것도 고작 손수건 하나에 의해서.

그때 그가 다리를 넓게 벌리며 밑을 내려다봤다. 커다란 기둥이 더 발기해서는 속옷을 대각선으로 찢을 기세로 솟아올랐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숨을 헐떡였다. 여인의 아래를 격렬히 찌르고 싶은 충동과 정절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그리즈도 비슷한 감각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의 욕망을 해소해 주며 음탕한 소리를 내고 싶은 충동이 앞선다. 그의 혀가 가슴을 핥았을 때부터 그랬다. 그날 그의 성기가 어떤 모양으로 커졌었는지 직접 보게 되자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친 것 같았다. 어찌 흥분한 사내를 엿보며….

점점 간지러워지는 허벅지 안쪽을 맞붙였다. 그러자 음핵이 지그시 눌리며 이상한 감각이 올라왔다. 안쪽이 저릿해져 와 묘한 소리를 흘릴 뻔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속옷 매듭 쪽으로 향했다. 그렇지만 차마 매듭을 건드리지 못하고 멈칫하며 멈췄다.

유일신의 독실한 신자는 쾌락을 금기시한다. 성기는 번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 번식 대상인 부인이 곁에 없는 이상 모든 발정을 무의미하게 여긴다.

마침 무수히도 많은 십자가와 성녀상이 대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곧 몸을 진정시키고 자러 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그때 그가 손수건으로 가슴팍을 훑었다. 작은 꼭지가 뾰족이 발기했다.

몸이 진하게 달아올랐다는 증거였다. 견디기 괴로운 듯 낮게 앓던 그가 다시 속옷 앞섶을 내려다봤다. 눈가에 초조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탄탄한 허리는 아래에 묵직하게 쌓인 씨물을 뿌리고 싶어져 척추 없는 생물처럼 흐물거렸다.

느릿느릿, 그의 복부가 떨리며 허벅지가 더 굵어졌다. 고결한 눈동자가 손수건을 주시하며 흔들린다. 그러다 툭 무너졌다.

“하아….”

배에 얹었던 손이 속옷 매듭을 다급하게 풀었다. 앞섶을 팽팽하게 채웠던 성기가 틈을 찾아 튕겨 올라왔다.

그리즈는 숨을 멈췄다. 늘 정숙한 복장 속에 숨겨져 있던 남근의 생김새가 선명히 보였다. 몹시 붉었으며 배꼽을 가릴 만큼 길쭉하고 굵직했다. 핏줄이 툭툭 불거진 기둥 위에서 뭉툭한 끝머리가 번들거렸다.

머리가 핑 돌자 소리 없는 호흡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멀건 선액이 여러 줄기로 흘러나와 기둥까지 흘러내렸다. 그가 젊고 건강하기 때문이라고 그리즈가 대신 변명했다. 그러나 평정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때 그가 손수건을 입술로 지그시 물며 기둥을 쥐었다. 단단한 엄지가 끝머리를 느릿하게 문지른다. 몸에 각인된 본능이 원하기에 손으로 사정을 부추기는 거다.

“아아….”

탄탄한 허리가 앞뒤로 유연하게 흔들렸다. 여인과 잠자리할 때 허릿짓을 엿보는 것 같았다. 지극히 동물적인 행위가 충격적이면서도, 느긋하고 나른하게 여인을 안는 그가 상상되어 기분이 몽롱해져 왔다.

저 굵은 것이 아래를 빠듯하게 열며 닥쳐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 의문만으로도 죄짓는 것처럼 불안하면서도 황홀감이 번진다. 아까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했던 그녀의 아래가 끝내 욱신거렸다.

아, 미칠 것 같아. 그리즈가 입술을 초조하게 물었다.

그때 그가 끈적한 선액을 윤활유 삼아 기둥에 발랐다. 이내 기둥을 손으로 휘감아 쥐고 당겨 올렸다.

“…하아.”

잘생긴 얼굴이 나른하게 풀린다. 녹녹하게 녹아 허공을 주시하는 눈은 십자가에 닿지 못했다.

그 상태로 손수건의 향을 맡으며 기둥을 아래로 쭉 끌어내렸다. 향기의 주인인 그리즈는 허벅지를 후들후들 떨었다.

욕정에 잠식당한 파란 눈이 그리즈 베네딕트를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듯했다. 전라가 된 몸을 만지고 핥다가 비좁은 곳까지 들어와 뭉근하게 치대는 것 같았다.

자글자글한 표피가 벗겨지자 귀두가 음탕하게 드러났다. 진한 쾌감을 느끼는 끝머리가 부르르 떨렸다. 여인의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도 저런 모양을 할 것 같았다.

일순간 아찔해진 그녀는 이미 축축이 젖은 밑을 조였다. 굵은 성기가 이미 깊숙이 와 닿아 있는 듯 근질거렸다. 음핵이 너무 뜨거워져 어딘가에 문지르고 싶은 충동이 번진다.

“아아….”

그때 대공이 흘린 낮은 신음이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왔다. 곧장 음핵을 부드럽게 핥아 대는 듯한 착각에 그리즈가 흠칫 놀라며 문을 닫고 눈 감았다.

의자가 삐걱대는 소리가 고조되어 간다. 나지막이 헉헉대는 신음이 들려오자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굵은 것으로 그녀의 비좁은 곳을 찌르며 나른하게 우는 얼굴이.

미쳐 가고 있었다. 이미 그와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껏 예민해진 안쪽으로 단단한 끝머리가 드나들고 있었다. 음핵이 파들파들 떨려 오자 몸이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그의 신음이 더없이 가빠져 간다. 의자의 삐걱거림이 귀를 찢고 몸속을 파고든다. 허벅지를 부들부들 떨던 그리즈가 기어이 안쪽에 힘을 줬다.

“아흣….”

그러자 뜨거운 절정이 터져 온몸을 잠식했다. 평생 기억될 만큼 짜릿하고 파괴적인 쾌감이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피로한 눈을 떴다. 잠잔 것 같지도 않은데 꿈속을 하염없이 헤맨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정신을 차리는 와중에 벨린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매일 미소지소 지으며 나타났던 벨린의 얼굴이 오늘은 어쩐지 어두웠다.

“좋은 아침이네요, 율리아나 아가씨.”

뻑뻑한 눈가를 비비던 그리즈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벨린,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 혹시 무슨 일 있는 거니.”

으레 주는 관심이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벨린이 한참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큰일은 아니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서요. 그게… 전하께서 오늘 좀….”

그리즈는 벨린이 가져온 물수건으로 눈가를 닦고 있었다. 그러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벨린을 바라보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오늘 왜? 유난히 저기압이라는 얘기인가. 그리즈는 벨린의 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했다

“…전하께서 좀?”

벨린이 목욕실로 가자는 듯 방을 나서며 속삭였다.

“전하께서 처음으로 새벽 기도를 거르셨어요. 그 후 목욕하시고는 수련장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계시대요.”

“…….”

“혼인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라고 집사장님이 못 박으시긴 했지만 그간 이런 적은 없으셔서 다들 긴장하고 있어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리즈의 심장은 바닥에 쿵 떨어졌다. 어제 그와 나눴던 대화가 귓가에서 계속 반복됐다.

“이미 망치고 있어.”

“…….”

“더러운 네가. 나를.”

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걸 그는 알았던 건가.

그리즈는 어제 일을 회상했다. 그는 사정하자마자 치욕적인 얼굴을 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몸을 씻으러 간 것 같았다. 그사이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왔다.

그랑디아의 공주로 지냈을 때부터 그녀는 호기심이 많았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동식물에게서 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러나 어제 맛보았던 새로운 감각은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웠다. 외설스럽게 범해진 듯한 착각도 함께 맛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지 않나. 그를 몰래 엿보고 멋대로 아찔한 전율을 느낀 여인이 시선으로 그를 범한 것이다. 바이렌하그 대공의 실수는 신께서 정한 금기를 깬 것뿐이다. 그래서 기도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 터.

어찌 됐든 그는 브리튼 공주와 혼인해야만 하니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그리고 대공 작위와 바이렌하그를 지키기 위해 혼약을 이행할 것이다. 그게 이곳의 주인에게 주인진 책임이니까.

그러니 그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스테판이 오늘 저녁에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나.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지 몰랐다.

우선 예술품 상점에 가 봐야겠다. 전 주인이 요하네스의 소식을 가져다 놨을지도 몰랐다. 자꾸 떠오르는 비아누트를 지운 그리즈가 벨린을 바라봤다.

“벨린.”

“네, 아가씨.”

“목욕하고서 외출할 생각이니 절차를 밟아 줘. 바이렌하그 성당에 갈 거야.”

목욕을 마치고 방에서 30분 남짓 기다렸다. 행정실로 향했던 벨린이 어두운 얼굴로 나타났다.

“저 아가씨… 행정관 나으리께서 말씀하시길, 밖이 너무 험하니 아가씨를 내보내지 말라는 후작 각하의 명 때문에 외출증을 끊어 줄 수 없다고 해요.”

그리즈는 눈가를 초조하게 매만졌다. 역시 스테판이 곱게 갔을 리가 없지. 그럼 스테판보다 더 높은 사람에게 부탁해 볼까.

“할머니는 방에 계시니?”

“기도실에 가셨어요. 아마 저녁때쯤 나오실 것 같아요.”

할머니 역시 유일신을 모시는 신자였다. 종종 기도실에 오래 머물며 바이렌하그의 평안을 기도해 왔다. 할머니를 만나려면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즈는 힘없이 창가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머릿속에서 불길한 생각이 맴돈다. 스테판이 마음 바꿔 일찍 돌아오면 어쩌지. 아니면 할머니께서 저번처럼 훌쩍 외출해 버리실지도 모를 일이다.

반평생을 위협당하며 갇혀 지내 왔기에 무기력하게 앉아 가슴 졸이는 일이 차라리 편하다. 신물 나는 고질병이다. 병을 떨쳐 내기 위해서라도 뭐든 하고 싶었다.

그때 머릿속에 한사람이 떠올랐다. 말 한마디로 정문을 열어 줄 수 있는 인물, 대공 비아누트.

하지만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외출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외출해야만 하는 이유를 덧붙여 볼까. 대공이 외출을 승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에게 이득이 되는 일….

그래, 디르크. 디르크와 함께 나간다고 하면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율리아나와 디르크와의 혼사가 중요하다는 건 관료들도 다 아는 사실이니 말이다.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이 혼인 덕분에 양가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는 셈이니까요. 앞으로 대공령 내에 평화와 영광이 찾아올 겁니다.”

“그래, 알고 있어.”

그리즈는 왠지 모르게 찌릿하게 아파 오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전하께 요청드릴 것이 있어. 수련장에 데려다줘.”

행정실에서 외출증을 받아오지 못해 의기소침한 벨린이 고개 숙였다.

“송구하지만… 수련장은 여인이 출입할 수 없어요. 제가 하인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리즈는 벨린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디르크와 바이렌하그 성당에 가려고 해. 안 그래도 디르크가 함께 외출하고 싶어 했거든. 그리고.”

“…….”

“그리고…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다친 곳이 다 나았어. 왕실 의사를 불러 주시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드려 줘.”

키스의 대가로 그가 불렀던 왕실 의사는 물렸다. 크게 다치지 않았고, 필요치 않은 대가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벨린은 이번엔 꼭 외출증을 받아 오겠다며 브람에게 향했다. 한참 뒤에 돌아와서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정말 간신히 받아 왔어요.”

손바닥만 한 양피지였다. 그 안에 외출증 양식이 그려져 있었고, 율리아나와 디르크의 이름과 함께 행정관 인장이 찍혀 있었다. 고작 이 쪼가리가 없어서 그동안 그리도 부당한 일을 당하며 살았구나. 잘 갖고 있다가 훗날 활용하면 좋을 텐데.

그리즈가 외출증을 보물처럼 바라보았다. 흐뭇해하던 벨린이 그 옆에 섰다.

“외부에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중무장한 기사들을 붙여 주실 거래요.”

“중무장한 기사들….”

예상 못 한 바도 아니었기에 다른 게 궁금했다. 외출을 허락했던 때 대공의 표정과 생각이다. 그가 연심을 품기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요즘 계속 이랬다.

“저… 벨린. 전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니?”

“전하께선 불허하셨다고 해요.”

“불허?”

“문관께서 간곡히 요청하여 허락받아 오신 것 같아요”

하긴 그녀의 부탁을 순순히 이뤄 주는 비아누트는 좀처럼 상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디르크와의 외출을 불허할 이유는 없지 않나. 중무장한 기사들을 붙여 두면 달아나기 힘들 터인데.

그렇다면 어째서….

이유를 짐작할수록 마음만 어수선해져 왔다. 그리즈는 머릿속에 박히려 하는 그를 가까스로 지워내며 벨린을 돌려보냈다. 외출증 발급에 너무 신경을 썼다. 정작 디르크의 의사를 물어보지 못하고….

“디르크, 방에 있어?”

디르크가 머무는 3층 방을 노크했다. 문이 열리자 디르크가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자유분방했던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그리즈는 눈썹을 위로 들었다. 머리칼을 한쪽으로 넘겨 고정한 탓인지 강인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특별한 약속이 있는 건가.

“저… 오늘 바이렌하그 성당에 가고 싶어서 외출증을 받아 왔어. 그런데 혹시 선약이 있니?”

그리즈의 얼굴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그런 그녀를 달래 주듯 디르크가 다정히 미소 지었다.

“그 얘기를 듣고 준비 중이었어. 안 그래도 율리를 찾아갈 참이었는데 먼저 와 줬구나.”

다채로운 초록 눈동자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온몸에 가득했던 불안이 왠지 모르게 스르륵 녹아내렸다.

“정말…?”

“응. 행정실 사무관이 찾아왔었거든. 너와 성당에 가기로 했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했지.”

귓가에 맴도는 저음이 미묘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느슨하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그리즈가 나지막이 답했다.

“하지만 내가 미리 말해 주지도 못했는데….”

“나랑 가려고 받으려는 게 아니어도 뭐 어때. 율리가 외출증을 얻겠다는데.”

디르크가 장난삼아 말하며 환히 웃었다. 그리즈는 그가 오늘 유달리 하얗게 보이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정오의 역광을 흡수한 덕분일까. 어쩌면 어제 엿보았던 비아누트의 음란한 모습과 대비됐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디르크….”

잠시 혼란스러워하며 고개 숙였다. 어떻게 해야 너를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을까.

디르크가 편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커질수록 미안함이 부풀어 간다. 그를 속여야만 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끼리 만나야 하는데 어쩌다 미천한 나를 만나게 되어서….

“미안해, 디르크.”

그리즈가 눈가를 매만졌다. 디르크는 미안해하는 그녀가 낯선 듯 눈매에 살며시 힘을 줬다가 화제를 돌렸다.

“마차는 준비시켰어? 언제 나가면 돼?”

이내 미안해하지 말라는 듯 그리즈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아이가 된 듯한 느낌에 넋 놓았던 그리즈가 복도로 향하며 물었다.

“마차보다는 말을 타고 가려고 해.”

의아해하던 디르크가 그리즈의 복장을 눈으로 훑었다.

격식 있게 차려입은 디르크와 달리 그리즈는 파팅게일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일상용 원피스에 속바지를 입은 차림이었다. 디르크가 눈을 크게 떴다.

“진심이야? 탈 수 있겠어?”

귀족이라면 어릴 때부터 승마를 배우지만 대부분 허울 좋은 교육이었다. 편의 시설을 갖춘 마차와 마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 여인이라면 굳이 말을 타서 고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면 그리즈는 속이 뻥 뚫리도록 빠르게 질주해 보고 싶었다. 무거운 고뇌와 어둠을 떼어 내고 완전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었다.

“응. 탈 줄 알아.”

“희한하네. 어렸을 땐 말을 괴롭히는 걸 더 좋아하더니.”

그저 애석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어렸다.

각자 외출 준비 후에 마구간에서 만나기로 했다. 뒤늦게 나온 디르크는 무언가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마구간 앞에 내려놓았다. 안에는 팔꿈치와 무릎 보호대, 장갑과 머플러 등의 장비들이 있었다.

“율리, 네가 꼭 해야 할 것들을 구해 왔어.”

디르크는 뒷걸음치는 그리즈를 붙잡아서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어린아이를 대하듯 눈높이부터 맞추곤 무릎 보호대를 채워 줬다.

“네 승마 실력이 미심쩍은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래. 알지?”

그리즈는 세심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초록 눈동자에 기쁨이 어려 있었다.

귀족 신분으로 몸을 낮추면서도 기쁠 수 있는 그가 신기했다. 타인을 챙겨 주며 행복감을 느낄 뿐인가. 아니면 마음이 깊어지고 있다는 의미일까. 그 찰나 그리즈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

“아냐. 내가 할게.”

반대쪽 무릎 보호대를 차기 위해 옹송그리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되돌아온 율리아나가 사실은 가짜라는 걸 알게 된 디르크의 눈으로부터 도망치게 된 것 같았으므로.

그리즈가 손수 몸 낮춰 장비를 차자 디르크는 자신의 목 뒤를 머쓱하게 주물렀다. 시선은 하얀 얼굴에 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기분 상했는지 살피는 눈치였지만 머지않아 하얀 목덜미로 옮겨 갔다.

그때 그리즈가 그를 주시했다. 몽환적인 붉은 눈이 매력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디르크? 왜?”

디르크는 순식간에 귀 끝을 붉혔다.

“응? 왜? 그냥 잘 차는지 보고 있었어.”

당황했으면서도 그는 그리즈의 얼굴에 꽂히는 햇빛을 큰 몸으로 막아 주고 있었다. 덕분에 빠르게 준비한 그리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출발하자. 하고 싶은 게 많아.”

마필관리사가 하얀 말을 꺼내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그리즈는 하얀 말의 안장에 올랐다. 엊그제 다친 발목이 시큰했지만 왈츠 연습으로 허벅지에 부쩍 근육이 붙은 덕분에 자세가 제법 안정적이었다.

땅에 갇혀 있던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 좀 더 가까워진 하늘을 올려보다가 찬연하게 미소지었다. 무언가 색달랐다. 원한다면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치솟았다.

“와아… 디르크, 나 한 번에 올라탔어!”

몹시 들뜬 채로 바이렌하그 대공령을 돌아봤다. 구름 없이 깨끗한 하늘 아래 꽃들이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다. 땅에서는 보이지 않던 수국밭과 호수, 성당 위의 십자가가 찬란히 빛났다.

아름다운 대지를 보니 넋이 나갔다. 그때 저택 둘레길에서 새파란 시선이 느껴졌다.

검 수련을 마친 대공이 둘레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옷 안으로 탄탄한 실루엣이 비쳤다. 넓은 어깨와 좁은 골반을 본 그리즈는 숨을 멈췄다. 어제 발기한 아래를 스스로 달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던 그가 눈앞을 스친 까닭이었다.

“아….”

말에서 내려 예의 갖추며 대공에게 인사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쿠엔틴을 선두로 한 기사단이 나타났고 그리즈는 그들을 따라 정문으로 향했다.

호숫가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공의 잔상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다른 사내와 저택을 나서는 여인을 보며 그는 심정을 갖고 있을까.

아주 찰나의 순간, 어제 창유리로 비쳤던 애타는 얼굴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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