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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비아누트는 서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예정대로라면 바이렌하그로 들어온 서신들을 확인해야 했지만 당장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정오의 정원에서 하얗게 빛나던 가짜 율리아나가 거듭 아른거릴 뿐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는 유별히 아름다웠고 처연한 분위기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새벽이슬을 한없이 맞아 야윈 붉은 꽃 같았다. 잘 어루만져 방으로 옮겨 오고 싶은 충동을 느껴 본 사내가 한 명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은 세상 어디에나 깔려 있었다. 그들을 수없이 봤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늘 차가웠다.
지금껏 비아누트를 움직였던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열두 살 무렵,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해 주었던 소녀, 어린 시절의 약혼자.
비아누트는 앞으로 평생 같이 살아갈 사람이 그 소녀이길 바랐다. 바람과 달리 소녀는 시체가 되어 나타났고 그에게 상실의 비애를 깊게 안겨 주었다.
약혼자의 주검을 앞에 두고 맹세하는 것이 어린 그의 최선이었다. 네가 불러 주었던 베네딕트 자장가의 노랫말처럼,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너라도 내 품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겠다고.
그 맹세를 짊어진 채로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덧 스물셋이 된 그의 가슴속에는 죽어 버린 약혼자가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때 가짜 율리아나가 등장한 거다. 아주 찰나의 순간 비아누트는 약혼자의 인상착의와 가짜 율리아나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나쳐 버려야 했을 생각에 잠식당해갔다. 가짜 율리아나의 목소리, 노랫소리, 자연을 좋아하는 특징까지 겹쳐 보였다. 머릿속에 그녀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서는 제대로 느껴 보고 싶어졌고 갖고 싶어졌다. 끝끝내 곁에 두지 못했던 약혼자 대신에라도.
미간을 좁힌 그가 이내 바람 빠진 소리를 내어 웃었다. 스테판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퍽 더러웠다.
잃어버린 여동생을 대신할 아름답고 가여운, 약혼자처럼 회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 하필 건드리기도 쉽고 버리기도 쉬운 신분을 골라 온 것부터 의도가 너무 뻔하지 않나. 가능하다면 대공을 유혹해서 벗겨 먹으라고 그녀에게 시켰겠지. 그러니 가련한 척하며 어슬렁거리는 거고.
이미 짐작했으면서도 비아누트는 자신이 그녀를 살려 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실없이 귀까지 뚫어 주지 않았나. 그녀를 더 원한다면 파혼은 물론이고 국왕과 주교들에게서 불신임을 받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
느리게 자조한 그가 두툼한 털 망토의 안쪽 단추를 열었다. 근육으로 이뤄진 상체의 윤곽이 얇은 상의 겉으로 선명히 드러났다. 정갈한 식사와 극한의 운동으로 가꿔진 몸이다. 지금껏 쾌락을 느끼기 위해 나태해진 적 없기에 유지할 수 있었다.
그건 지금껏 쾌락을 맛본 적 없는 몸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부드러운 속살을 맛보고 잠깐 취한 거겠지.
입 안에 맴도는 자극이 사라지면 다시 이 삶에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게 될 거다.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비아누트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지우려 눈을 감았다. 그러자 불쾌하게도 귓가에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울렸다.
“저는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이라면 평생 헌신할 수 있습니다.”
인사차 디르크 남매를 만나러 갔었다. 틀에 박힌 격식만 차리고 집무실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목 뒤가 뜨거워질 만큼 피가 들끓었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비아누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심리가 궁금했다. 정말 여동생이라도 뺏기는 착각이 들어서. 아니면 퍽 갖고 싶었던 여인을 순순히 넘겨줘야 하자 미칠 것 같았나?
스산하게 아랫입술을 짓씹던 그는 가까스로 서신을 쥐었다. 한 달 뒤에 브리튼 공주가 올 테니 그때까지 견디다가 휩쓸리면 된다.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혼인하고 있을 거고 그때쯤이면 가짜 율리아나도 디르크의 아내가 되어있을 것이다.
툭. 서신의 봉인을 풀었다. 억지로라도 집중하려는 찰나 집사 브람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전하, 율리아나 아가씨와 디르크 님이 방에서 나와 산책 중이십니다.”
그는 디르크가 무얼 하는지 어김없이 보고하라고 브람에게 명했었다. 능력 없이 야망만 출중한 숙부라면 혼인을 빌미로 디르크와 협상하려 할 텐데 그게 눈에 거슬렸다.
지금껏 스테판이 거슬릴 때마다 비아누트는 탈스바그 후작 영지에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스테판을 내려보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스테판이 디르크에게 전서를 보낼지도 모를 일이기에 감시를 명했던 것이다.
그는 스테판이 원하는 걸 알아내어 그것만은 이루지 못하게 짓밟을 작정이다.
반란이 두려운 건 아니다. 모든 걸 가졌지만 정작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는 스스로를 위로하려면 숙부 또한 같은 처지로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고 듣고 싶지 않은 소식만 들려왔다. 그는 티 나게 불편해진 심기를 드러내며 집사를 돌려보냈다. 물론 집사는 다음날까지 보고를 계속했다.
“디르크 님과 율리아나 아가씨께서 저녁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디르크 님께서 고기를 잘게 잘라 주셨습니다. 커팅에 너무 공을 들이셔서 남길 수가 없었는지 입 짧은 아가씨께서 식사를 남김없이 드셨습니다.”
“함께 티타임을 즐기시는 중입니다. 아까보다는 어색함이 사라졌고 웃음소리도 종종 들려왔습니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시 산책하시고 계십니다. 강아지가 디르크 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율리아나 아가씨도 디르크 님을 편히 여기시는 것 같아요.”
그의 망막에는 가짜 율리아나의 웃는 얼굴이 번번이 스쳤다.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피가 한 줌씩 말라 가슴이 퍼석해졌다.
몇 년 만에 저녁을 걸렀다. 집사에게서 보고 받을수록 식욕이 떨어져 나간 탓이다. 그 틈으로 기이한 생각이 차올랐다.
그간 마주칠 때마다 벌벌 떨던 그녀는 어디 가고 그렇게 즐거운 건가. 심지어 그 작은 몸을 어떻게 하지 못해 미쳐 가던 순간에도 울려고만 했던 네가.
낮게 탄식한 비아누트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덥지도 않은데 피부가 진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손수건을 꺼냈다. 얼마 전 자수 판에서 빼내어 나비를 잡았던 가짜 율리아나의 손수건이다.
이내 그는 이걸 공들여 조물거렸을 손을 상상했다. 지금껏 타인의 체온을 오롯이 느껴 본 적 없었지만 추측할 수는 있었다. 뜨거웠겠지. 지난밤 서재에서처럼.
그날을 떠올린 비아누트는 다리 사이로 뭉근한 열기를 느꼈다. 눈매를 가늘게 좁힌 그의 호흡이 급속도로 나른해졌다.
“아….”
요새 늘 이런 상태였다. 문득 가짜 율리아나가 떠오르면 피가 뜨거워지고 바지 앞섶이 형편없이 묵직해진다.
새벽. 책상 앞에서 번민하던 비아누트가 침대에 누웠다. 풀벌레 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온다. 얼마 전부터 이 침대 밑에 숨어든 녀석의 인기척은 없었다.
“마리아.”
녀석은 가짜 율리아나가 키우는 손난로가 있어야만 밖으로 나온다. 나와서 들어가지 않는 걸 보면 계속 함께하기를 원하는 듯했다.
유감스럽게도 비아누트는 무작정 녀석의 바람을 이뤄 줄 만큼 선하지 못했다. 나와서 주인에게 꼬리 한 번 흔들고 안기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걸 알려 줄 생각이다.
녀석은 조만간 스스로 안기게 될 거다.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그래, 지금은 안 와도 돼.”
부쩍 나른해진 파란 눈이 옆자리를 응시했다. 요새 들어 이상하게도 침대가 넓게 느껴진다.
가만히 눈감은 그는 형체만 희미한 약혼자를 상상했다. 소녀의 자장가가 나직이 울렸다. 따스한 정원에 누운 작은 인영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런데 조금 나른해지려던 때 가짜 율리아나의 노랫소리가 겹쳐 울렸다. 무방비했던 그의 근육이 순식간에 탄탄해졌다.
상상 속 소녀는 가련한 창녀 마리아로 뒤바뀌어 있었다. 오늘처럼 적막한 새벽 안고 싶은 여인.
이미 맛봤었던 달콤한 피부와 체온, 향기가 신경을 일깨운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비아누트는 달궈진 숨을 내쉬었다.
속옷 하의 앞섶이 또다시 팽팽하게 들려 있었다. 그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다가 미간을 좁혔다.
자신도 욕정에 자유로울 수 없는 수컷이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잇새로 탄식이 흐른다. 신께서 정한 금기를 깨고 짐승처럼 교미하고 싶은 충동을 견뎌낸 게 수십 번. 죽은 약혼자에게 마음 준 채로 외도하려는 몸이 더럽게 느껴진 게 수백 번.
그 충동을 번번이 이겨 내지만 모순적이게도 패배감만이 밀려든다. 패배의 쓴맛을 처음으로 안겨 준 그녀는 내일도 다른 사내와 웃을 것이다.
비아누트는 그 웃음이 진심이 아니길 바랐다. 그동안 그녀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처한 상황이 자신보다 가엽기 때문이었으니까.
굳이 그녀의 마음을 뺏으려 하진 않겠지만 몸은 가질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욕망이 증식했다. 그 욕망이 신을 섬기는 마음을 넘어선다면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까.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그는 약혼자를 억지로 눈앞에 그렸다. 그리고 소리 없이 말했다. 계속 너를 그리워할 수 있도록 도와줘.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나를 데려가.
오늘도 소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
며칠 내내 그리즈는 디르크와 이젤 앞에 서느라 정신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마음은 어지러웠다. 냉정한 사내의 외설스러운 몸이 자꾸 눈앞에 덧그려지길 반복했다. 있는지도 몰랐던 것.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컸던 것. 그것을 가진 그가 짐승처럼 느껴지면서도 기묘하게 짜릿했다. 거리를 두면서도 원하고 있었나 보다. 그가 그랬듯이.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넋을 놓고 있었다. 기분이 안 좋냐고 물어 오던 디르크는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다고 결론 내리고 연거푸 사과했다.
그리즈는 그런 게 절대 아니라고 강조한 후 돌아왔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귀족 사회에서 보기 힘든 순수한 사내를 기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디르크를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무어라도 하고 싶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스테판의 눈을 피해 거절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기라도 하면 스테판이 흉포한 얼굴을 드러낼 것 같았다. 차라리 스테판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다가, 디르크와 이 저택을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대공에 대한 생각은 이만 거두기로 했다. 그와는 앞으로 엮여서도 안 되고 욕심내서도 안 되니까. 그리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대공을 만나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 앞으로 디르크에게 집중하고 싶으니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고. 그리고 스테판이 대공 자리를 노리고 있으니 유념하라고.
매음굴에서 왔다는 걸 알면서도 기회 준 그에 대한 보답이었다. 어쩌면 그냥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그리즈가 벨린에게 말했다.
“브람에게 내가 전하를 뵈려 한다고 전해 줘.”
벨린이 나가고 몇 분 후에 브람이 찾아왔다. 왜인지 그는 한동안 곤란해하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전하를 만나 뵈려 하신다고요.”
“그래.”
“사실 요새 전하의 심기가 좋지 않으십니다. 워낙 과묵하셔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밤에 잠까지 설치시는 것 같더군요. 전장에서도 그런 일이 없으셨다는데….”
그 말을 들은 그리즈는 달빛 내리는 창가에서 밤잠 설치는 그를 그려 보았다. 그의 고뇌를 들여다보면 무엇이 나올지 궁금했다. 영지 내 문제, 브리튼 공주와의 혼인, 혹은 충동으로 무너져 내렸던 그날 밤의 일.
갑자기 심장이 욱신거리며 조여들었다. 잘 여물던 귓불마저 화끈거려 그 주변을 만지며 거칠게 호흡했다.
“아아….”
가슴 부근이 아플 정도로 심장이 뛰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그가 두렵고 불편해서? 아니면 혹시 과거에 그와 정혼할 뻔했다는 이유로 특별한 감정을 가진 건가.
그리즈는 서글프게 자조했다. 배에 창녀 낙인이 새겨진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연심 품을 자격을 잃었다. 매음굴 출신에 어울리는 곳을 바라봐야 했다. 언젠가 했던 그의 말처럼.
“귀족 정부나 하면서 빌어먹고 살아.”
운이 좋아 봤자 귀족의 정부인 처지. 아이조차 가질 수 없는.
“알겠네. 돌아가도 좋아.”
그리즈는 담담한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따라 달이 밝아서 슬프지는 않았다. 달빛과 꽃들을 벗 삼아 가족 삼아 살아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브람은 눈치껏 말씀드리겠다는 얘기를 끝으로 방을 나갔다. 잠시 뒤에 돌아와서는 이미 예상했던 소식을 전해 왔다.
“전하께서 만남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리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고개 숙였다. 그러곤 여러 번 끄덕였다. 대공령에서는 모든 게 대공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알았어.”
의기소침한 그리즈를 살피던 브람이 티 나게 안타까워했다. 지금껏 무엇도 원하지 않았던 사람의 첫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저… 조금 전 당혹스러운 일이 발생한 탓인 것 같습니다.”
브람은 대공이 만남을 거절한 게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은 눈치였다. 그걸 읽은 그리즈가 물었다.
“당혹스러운 일?”
브람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몇 달 전 전하께서 오래전 세상을 떠난 첫사랑의 조각상을 주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조각상을 맡은 장인이 오늘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아… 그런 일이.”
뜻하지 않은 사망 소식에 그리즈는 유감을 표했다. 언뜻 바라본 브람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며 고개 젓고 있었다.
“그보다는 장인에게 주문할 정도로 전하께 중요한 물건이 완성되지 못하는 게 문제이지요.”
죽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게 대공과 어울린다 싶었다. 하긴 그는 무수히도 많은 이들의 죽음을 지켜봤겠지만 자기 것을 잃어 본 경험은 없을 테니까.
***
사흘이 지났다. 우연히라도 마주칠 수 있을 줄 알았던 대공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요새 그가 잠잘 시간도 없이 바쁘다는 얘기가 돌았다. 예산 집행, 주교회 관리, 외교, 혼인 준비까지 겹친 까닭에.
그리즈는 그가 일부러 자취를 감춘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자조했다. 가짜 여동생이 무어라고 그가 피한단 말인가. 거슬리면 치워 버리면 그만이지 않나.
아델의 초상화는 제법 그럴 듯이 그려지고 있었다. 불편했던 처음과는 달리 요즘은 초상화가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해졌다. 율리아나 역할에 점점 빠져드는 모양인지.
디르크와 평온히 저녁을 먹었다. 그리즈는 여행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종종 정원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밝은 날마다 찾아가 앉던 그곳. 그 벤치를 지금도 대공이 보고 있을까, 생각하며.
디르크라는 사람의 얘기를 아주 많이 들었지만 정작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스테판의 말대로 그가 선하다는 걸 느꼈고, 그런 그를 본의 아니게 속여 미안한 마음만 커질 뿐이다.
늦은 저녁, 방으로 돌아온 그리즈는 걱정을 비울 겸 자수를 뒀다. 막 집중하는 찰나, 피곤하다며 쉬러 갔던 아델이 방으로 찾아왔다.
“율리, 소식 들었어?”
하루 내내 찌뿌둥해했던 아델이 어쩐 일인지 들떠 있었다. 그리즈는 아델에게 왠지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소식?”
아델은 때때로 근심이 가득했던 초록 눈을 처음으로 맑게 빛냈다.
“오늘 밤에 오로라가 뜰지 모른대.”
“정말?”
오로라라니. 아홉 살 이후로 존재를 잊었던 풍경인데. 그리즈는 모든 일에 회의적이던 종전과 달리 그 나이대 소녀처럼 눈동자를 빛냈다.
“아델, 정말이니?”
찬란한 오로라가 그랑디아의 하늘을 감싸 안았던 순간이 되살아난 까닭이다. 그날의 설렘, 벅참,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기분도.
“정말 뜨면 좋겠어.”
인형처럼 있다가 남들이 웃으면 따라 웃던 그리즈가 볼까지 붉히며 기대하자 아델은 더 신이 났다. 이내 무작정 그리즈의 손을 잡고서 방을 나서며 말했다.
“응. 이곳에서 육십 년 가까이 산 브람이 한 말이니까 거의 정확할 거야. 나무집으로 가자.”
“나무집?”
“아아, 율리와 내가 어렸을 적 자주 갔던 곳이야. 당장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기름 램프를 아델과 하나씩 나눠 들고 저택을 나섰다. 정말 오로라가 뜰 기미처럼 하늘에 초록빛 물결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즈의 가슴은 벅차 왔다. 아름다운 풍경을 목전에 앞둔 기대감, 그리고 티 없이 맑던 귀족 소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진해졌다.
“정말인가 봐.”
밤바람이 찬 줄도 모르고 아델을 뒤따라 걸었다. 저택 뒤편의 언덕을 하염없이 오르다 보니 어느덧 언덕의 끝,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여기야. 우리가 자주 놀던 곳.”
아델의 말에 그리즈는 기름 램프를 내려놓고 언덕 너머를 내다봤다. 지대가 높은 덕분에 호수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향취 깊은 호수 내음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화시켜 주는 기분이 들었다.
“와…. 이런 곳이 있었구나.”
아델은 그뿐만이 아니라는 듯 아름드리나무를 툭툭 쳤다. 그리즈는 오랜 세월 수호신처럼 언덕을 지켰을 나무를 올려다봤다.
사람 다섯 명이 팔을 둘러 안아도 부족할 듯한 기둥에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다리를 쭉 눈으로 따르자 굵은 나뭇가지에 새 둥지처럼 얹혀 있는 집이 보였다.
바이렌하그에 온 뒤 처음으로 그리즈의 눈동자에 생기가 깃들었다.
“나무집…. 아까 말했던 나무집이 저거야?”
“응!”
고개를 끄덕인 아델이 사다리를 올라갔다. 사다리는 그리즈 키의 두 배로, 꽤나 높았다.
망설이던 그리즈는 길쭉한 나무 막대기로 기름 램프를 올리고는 뒤따라 올라갔다. 손바닥이 따가웠지만 참을 수 있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바람이 상쾌해진다. 갑갑한 땅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끼며 나무집 앞에 섰다.
다행히 덱 앞에 난간이 있었다. 그리즈는 시야를 가로지르는 울창한 나뭇잎을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아델.”
아델이 먼저 들어가 방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영지에 초대해 줘서 내가 고마워, 율리.”
벽에 램프를 얹자 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작은 소파와 테이블, 침대가 있었다. 지친 영혼을 위한 안식처. 혹은 요정의 방 같았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그리즈는 싱그러운 풀잎 향을 크게 마시며 창밖을 내다봤다. 호수 수평선에 초록빛 선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와아….”
덕분에 근심을 지우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아델이 그 모습에 흐뭇해하며 창문을 열고 소파에 앉았다.
“디르크가 율리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아. 어릴 때부터 그랬거든.”
“…….”
“네가 실종됐다는 얘기를 듣고 디르크가 밤낮없이 울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리즈는 그 옆에 앉아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디르크…. 착하고 선한 사람.
서서히 그걸 느끼고 있지만 그 이상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율리아나가 아니니까. 진실을 알게 되고 상처받을 그의 모습이 상상되어 가슴이 찌릿하게 아팠다.
“나는 디르크한테 너무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리즈는 서러움이 깃든 붉은 눈으로 창밖의 하늘을 응시했다. 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만 죽거나 다치게 되는 거냐고 소리 없이 물었지만 신은 대답이 없다. 여전히.
그녀가 길게 한숨 쉬며 아델을 바라보았다. 내심 의아해하던 아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미안하니? 디르크에게 잘해 주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고. 그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지 못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리즈는 속마음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입술만 버벅거렸다. 다행히 아델은 캐묻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다는 듯.
“뭐… 나도 그런 감정이 드는 사람이 있어.”
흡사 답을 정하지 못해 느끼는 혼란을 이해하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아델은 1년 전쯤 파혼하고 새로운 혼인 상대를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소중한 사람이 따로 있는 건가.
“그런 사람?”
그리즈의 물음에 아델은 잠시 머뭇거렸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을 때에야 아델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울렸다.
“비밀 지켜 줄 수 있어?”
어차피 그리즈에게는 지금껏 쌓아 온 비밀이 이미 산더미였다. 하나쯤 늘어도 그리 무겁지 않을 것이다.
“응.”
아델은 바닥 카펫을 멍하게 바라보며 또다시 고민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몰라도 무거운 얘기 같았다. 얘기하기 힘들다면 다음에 해도 좋다고 말하는 게 나으려나.
그리즈의 입술이 안절부절못하고 들썩였다. 그 모습을 본 아델이 귀엽다는 듯 웃고는 이내 웃음기를 거뒀다.
“나… 배 속에 아이가 있어.”
아이, 아이? 그리즈가 초승달 모양의 눈썹을 혼란하게 올렸다.
“뭐, …뭐?”
아델은 단지 감기에 걸린 것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푹 가라앉는 음성에서 그간의 고뇌가 전해져 왔다.
“생긴 지 얼마 안 됐어. 이 사실을 부모님도 모르시고 말이야.”
그리즈는 위로하거나, 궁금해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미혼 귀족 아가씨의 임신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머지않아 가문의 수치가 되어 쫓겨나거나 그전에 살해될 거라는 뜻이다.
축복이 아니라 사형 선고였다. 혼외 자식을 가진 귀족 여인의 운명은 늘 그래 왔으니까.
“어쩌다가….”
칙칙한 얼굴로 걱정할 줄 알았다는 듯 아델이 씁쓸하게 말했다.
“사실 그동안 입덧이 심했어. 체한 게 아니라.”
그동안 아델은 식사를 종종 걸렀었다. 식사하더라도 으깬 감자만 겨우 먹었고, 낮잠을 그렇게 자고도 유독 피곤해했다. 그리즈는 단지 아델이 눈으로 보이는 것처럼 연약한 줄로만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이곳까지 올 만큼 강했던 것 같았다.
“…그랬구나.”
아델은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고… 그 사람의 신분은 아주 천해.”
가라앉던 그리즈의 눈썹이 다시금 위로 솟아올랐다. 지금껏 불행한 여인은 매음굴의 동료들과 자신뿐이라고 여겼던 생각이 쩍쩍 금 갔다.
특히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아델은 고민이 없는 줄 알았다.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귀족이지 않나.
그리즈는 아델이 어째서 굳이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평온한 사랑에 대한 권태로움, 혹은 반항심일까.
“어떻게 그렇게 됐니.”
왜 천한 신분에게 마음 줬냐는 질문이었다. 아델이 흐릿하게 웃으며 바닥을 바라봤다.
“그냥… 그 사람이 너무도 특별했어.”
“…….”
“정원사의 막내아들이야. 이름은 빈센트고.”
이내 아델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 친구로서 창피하지?”
그리즈는 단박에 고개 저었다. 나는 매음굴에서 왔어. 너와 디르크를 속이면서도 진실을 알리지 못하는 내가 정말 부끄러운 인간이야. 매일매일 죽고 싶을 정도로, 라는 말을 삼키면서.
아델은 그렇게 자책하는 그리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깨끗했던 초록 눈동자 근처가 점점 불그스름해졌다.
“고마워, 율리. 네가 나를 경멸할까 봐 두려웠거든.”
이내 부드러운 손이 그리즈의 손등을 매만졌다.
낯설게 움직임을 멈췄던 그리즈는 손을 느리게 뒤집어 아델의 손을 맞잡아 줬다.
따스한 감각이 가슴에 피어오른다. …나도 누군가를 위로해 줄 수 있구나. 기어코 살아온 덕분에 조금은 쓸모 있게 됐구나. 그대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도, 나도 고마워, 아델.”
한참이나 말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코가 시큰한지 훌쩍이던 아델이 종전보다 편히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만난 건지 궁금하지 않니?”
그리즈는 아델과 맞잡을 손을 기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이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시작은 사촌 언니가 놀러 오고부터였어. 그간 빈센트를 눈여겨봤었나 봐. 율리도 알지? 풋풋하고 순수한 사내를 정부로 삼아 즐기는 게 부인들의 유행인 거.”
“응.”
“하지만 빈센트는 첫사랑이 있다며 거절했어.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그 첫사랑이 누군지 궁금해졌지. 귀족 부인을 하룻밤이라도 가져 볼 기회를 거절하는 사람이 흔치 않거든. 평생 정원사로 일해선 벌 수 없는 돈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래, 그런 유혹을 거절하기 쉽지 않을 거야.”
“그러다 운명 같은 일이 일어났어. 귀족들이 모여 뱃놀이를 하던 날, 내가 탄 배가 뒤집힌 거야.”
아델이 그날을 회상하다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나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던 내 약혼자는 뭍에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지 뭐니. 배신감과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오더라고.”
얼마 전 호수에 빠져 봤던 그리즈는 아델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물에 빠져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 가라앉는 기분을 늘 느껴 왔으니까.
“정말… 두려웠겠다.”
그리즈가 힘없이 말했다. 아델은 여전히 하얗게 웃고 있었다.
“그때 뭍 너머에서 빈센트가 달려왔어. 어찌나 다급했는지 신발 한쪽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더라고.”
“아아….”
“호수에 뛰어드는 빈센트에게서 망설임은 없었어. 그 애타는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지. 그 아이의 첫사랑이 나였던 것 같았어. 이렇게 죽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계속 좋아하는 걸 느꼈어.”
아델의 초록 눈동자가 지금껏 보인 적 없는 모습으로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 아이가 물속에서 가라앉던 나를 찾아 끌어안았어. 기분이 어땠는지 아니?”
“어땠어?”
“그동안 누구에게서도 얻지 못했던 짜릿함 같은 게 몰아쳤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너무 뜨겁고 벅차서 그만 눈물이 날 것 같더라…. 신기하지 하지 않니.”
그리즈는 그 말을 곱씹었다. 가슴이 너무 따듯하고 벅차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 그런 감정을 맛본 적이 있었다. 이름 모를 탑에 갇힌 후, 창문으로 들어온 빵을 보고 느꼈던 기분. 그리고 매일매일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나타나는 흑발 소년과 조우했던 순간.
그 순간마다 그리즈의 세상은 멈췄었고, 가슴속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났었다. 짜릿하고 숨 가빠서 미칠 것 같은 느낌에 물을 들이마셨지만 불씨를 끌 수 없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잔존해있을 것이다.
“그래, 정말 신기해.”
진심 어린 그리즈의 눈을 보고 아델은 안도했다. 이내 이제 긴장이 좀 풀린 건지 소파에 푹 기대며 작게 탄식했다.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날 죽일 거야.”
“디르크는 알아?”
“응… 처음엔 빈센트를 없애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하지만 점점 받아들이더라고. 월경이 끊기면 하녀들이 알게 된다면서 여기 와 있자고 한 것도 디르크야.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런저런 핑계로 외부에서 지낼 것 같아.”
“아이는 어떻게 키울 생각인 거야?”
아델은 그 말을 듣고 죄인처럼 고개 숙였다가 힘없이 들었다.
“아이만 무사히 낳아 주면 빈센트가 남부럽지 않게 키울 거라고 해. 그래서 고맙고 미안해. 아이도 가엽고… 마음 같아서는 같이 달아나고 싶어.”
정말 억울한 현실이다. 사내의 혼외 자식은 서자로 두지 않나. 어찌하여 혼외자를 가진 여인은 달아나거나, 죽어야 하는 걸까. 그리즈가 무겁게 한숨 쉬었다.
“달아나도 문제없겠어?”
그러니까 가문에서 달아나도 생명의 위협 없이 살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델에게는 자신감이 조금도 없었다.
“달아나면 아버지가 사람을 풀 거야. 디르크가 나를 도와주겠지만 그래도 빈센트와 아이를 잃을지 모르지….”
아델은 금빛 머리칼을 괴롭게 쥐었다가 놓으며 괴로워했다.
“아아… 남편이 대공 전하였으면 좋겠다.”
어떤 대화로 시작하든 대공 비아누트로 마무리되는 법칙이 이곳에서도 적용되는 건가. 그리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 전하?”
아델이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슬슬 걸어갔다.
“대공 전하가 정혼하려 했던 소녀가 죽은 건 알고 있지?”
그리즈는 고갤 느리게 끄덕였다. 며칠 전 벨린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었다. 대공 비아누트가 어릴 적 잃은 약혼자를 깊게 그리워했다고.
“…응. 알아.”
“전하께서는 아직도 그 소녀를 잊지 못했나 봐. 설마 했지만 이곳에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느꼈어.”
그리즈의 얼굴에 웃음기가 지워졌다. 그가 지금도 그 소녀를 잊지 못했다니. 그는 브리튼의 공주와 혼인할 예정이지 않나. 하물며… 가짜 여동생의 가슴에 입술 댔고 갈망하는 얼굴을 했었다. 그 순간 그의 감정에 거짓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리즈가 무기력하게 물었다. 아델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 소녀와 절절히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니 아직도 수집에 시간을 쓰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도 평생 예술품을 사랑하며 모으거나, 그 소녀를 닮은 정부를 만나며 홀로 시간을 보내실 것 같아. 부인이 정원사를 사랑해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아델은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사내와 혼인하고서 빈센트와의 사랑을 이어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내 무례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리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리즈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소녀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가짜 여동생이 그 소녀와 닮았기 때문에 그가 관심을 보인 걸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하는 게 우습지만 그 이유 말고는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그 소녀 말이야. 혹시 얼굴 본 적 있니?”
아델은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며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잘 기억나지 않아. 그때 나는 너무 어렸거든.”
하긴 괜한 질문을 한 거다. 소녀의 외모를 알아서 무얼 어쩌려고. 설령 그 소녀와 닮아서 그가 관심 가진 거라 해도 그를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즈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렇구나.”
그때 아델이 북처럼 창틀을 양손으로 번갈아 치며 까치발을 들었다.
“어어, 뜬다, 뜬다!”
어느덧 초록색의 굵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하늘의 왼쪽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오른쪽은 파란색이 선명했다.
“디르크 불러올게. 피곤하다며 자러갔지만 이걸 놓치게 둘 수 없지.”
신난 아델이 다급히 나무집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그리즈가 함께 나서려는 모습을 보고는 손사래 쳤다.
“율리는 하나도 놓치지 말고 구경하면 좋겠어. 금방 올게.”
이내 말괄량이처럼 신이 난 걸음으로 사다리를 내려가 버렸다. 고민하던 그리즈는 창가 앞에 서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비로운 오로라가 하늘을 기이하게 물들인다. 밝고 어둡고 불규칙하게. 마치 그간 무질서했던 자신의 마음이 하늘에 거울처럼 투영된 것 같았다.
그리즈는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향연을 감상하다가 두 손을 맞잡았다. 오로라 앞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작은 소원을 빌기로 했다. 큰 소원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서. 요하네스를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때 잔디를 사각사각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델이 벌써 돌아왔나. 그리즈는 조심조심 걸어가 나무집 아래 풍경을 내려다봤다.
당연히 아델과 디르크 두 사람을 상상했다. 그들과 오로라 앞에서 담소 나누는 시간을 기대하기도 했었다.
기대와는 달리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그게 대공 비아누트의 것이라는 걸 깨달은 그리즈는 황급히 집 안으로 숨었다. 그가 일 때문에 바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혹시 오로라를 보며 한숨 돌리기 위해 온 건가.
다행히 그는 아름드리나무를 지나서 언덕 난간에 기댔다. 제법 안전해 보였던 난간이, 그의 건장한 체격 탓에 유아용 장난감 같아졌다. 혹시 어두워서 호수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오색의 물결이 기묘하게 시야를 물들였지만 그리즈의 눈동자는 비아누트의 뒤태를 떠나지 못했다. 왜인지 위태로워 보이기 때문이라고, 떨어질까 봐 걱정한 것뿐이라고 변명해 보지만 사실은 오로라보다 그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뿐.
하지만 지금은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또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를 향해 속으로 연거푸 묻기만 했다. 정원에서 초상화를 그렸던 날, 그날 왜 그런 모습을 보였냐고.
눈앞에 비정상적으로 부풀었던 그의 앞섶이 스치자 그리즈는 달아나듯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땐 그가 사다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다리를 명백히 쳐다보는 걸 봐선 나무집으로 올라오려는 기색이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그와 태연히 말할 자신 없던 그리즈는 다급하게 집 밖으로 나갔다.
미처 램프도 챙기지 못한 채 사다리를 내려갔다. 한 발, 두 발…. 조금 사나워진 바람이 종아리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커다란 벽이 다리를 가리며 바람이 잦아들었다.
그리즈는 밑을 내려봤다. 코앞에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삐걱거리는 사다리를 주시하다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즈가 깜짝 놀란 건 아주 잠시였다. 그녀는 며칠 전보다 핼쑥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입술을 닫았다. 야윌 만큼 업무가 바빴나. 아니면 혼인 준비 때문에? 불필요한 의문이 범람하자 그리즈는 숨을 꾹 참았다가 입을 열었다.
“자, 잠시 휴식하러 왔습니다, 전하.”
잠잠하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치마 끝단이 무섭도록 솟아올랐다. 당황한 그리즈는 치마를 잡으려다 사다리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흣!”
무서울 만큼 시야가 덜덜 흔들렸다. 이러다 손바닥이 갈릴 것 같아 사다리를 놓아 버렸다.
“아읏!”
몸이 잔디로 풀썩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탄탄한 그물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즈는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잔디에서 두어 번 굴렀다. 당혹감에 달아오른 얼굴이 부글부글 끓어 녹아내릴 것 같았다.
“하아, 으윽….”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오로라가 드리운 하늘 중심에 대공의 얼굴이 자리했다. 다채로운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당황한 그리즈가 아래를 내려봤다. 그가 자그마한 몸 사이에 무릎 꿇은 채 엎드려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굳이 비키지 않았다.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저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눈, 뺨, 입술을…. 이내 눈매를 좁히며 낮게 탄식했다.
매음굴에서 줄곧 들어 왔던 들뜬 숨결이 목덜미 깊숙이 닥쳐온다. 그리즈는 축축 처지는 숨결을 피하려 고개 돌렸다. 이건 위험했다. 달아나고 싶은데 원망 깃든 음성이 심장을 쿵 때렸다.
“왜 너는 어디에든 있어? 왜 자꾸 나타나서 아주 미치게.”
커다란 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떻게 피하든 대화를 이어 나가겠다는 그의 의지 같았다.
하지만 그리즈는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질문부터가 논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며칠간이나 자취를 감췄던 그가 별안간 나타나 염증 내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반문하려 했다. 이곳에 내가 먼저 있었다고. 그런데 어째서 뒤늦게 나타난 당신이 나를 붙잡고 책망하는 거냐고. 그리즈가 파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가, 입술을 선명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위험하게 느껴져 숨을 멈췄다. 파란 눈동자가 더 진한 빛을 띠었다.
“숙부가 알려 줬어? 그 자장가를 부르면서 어슬렁거리면 내가 건드려 줄 거라고.”
첫 만남 때만 해도 그의 시선은 관망에 가까웠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질됐고 급기야 경멸에까지 이르렀다.
그리즈는 자신의 출신 탓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 대공 자리를 치열히 지키며 살아왔을 그에게 자신 따위는 조금의 안정감도 줄 수 없는 게 애석할 뿐이다.
“그런 적 없어요. 이만 보내 주세요.”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대로 있다간 부서지든지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아서.
그러다 또 실수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말을 멈췄다. 달아나길 바란다면 그가 이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반대로 말해야 했다. 그가 흥미를 잃고 먼저 떠나 버리도록.
그리즈는 혼란스럽게 눈을 굴리며 마땅한 단어를 찾았다. 보내 달라는 말의 반대는 함께 있자는 말이다. 그와 멀어지길 바란다면 반대로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된다.
계속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보다는 잠시간 우습고 헤픈 여인이 되는 게 나았다. 차라리 앞으로 다신 안 볼 사이가 되고 싶기도 했다.
“아니면 제대로 건드려 주세요. …전하께서도 그걸 원하신다면.”
기묘한 기분이 닥쳐 왔다. 정말 진심을 고하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 안이 말랐다.
빈정거리려던 그의 표정이 스르륵 굳었다. 서늘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반대로 휘날렸다. 반쪽 얼굴이 오로라에 드러나자 촘촘한 눈썹과 속눈썹 결이 일순간 선명해졌다.
“건드려 줘?”
그 잘생긴 얼굴로 이제 비웃을 차례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세게 물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었다. 그가 지금껏 지켜 왔던 무언가를 깨트릴 것 같았다. 오만했던 눈동자에 생긴 균열 틈새로 어두운 충동이 드리워졌다. 뜨겁고, 질척하고, 집요한 향기를 풍기는.
그의 턱 근육이 단단히 뭉쳐진 게 보였다. 일찰나 그곳이 다급하게 풀리며 숨결이 터졌다.
뜨거운 기운이 얼굴을 맴돌았다. 아랫배가 조여드는 순간 그가 상체를 낮추며 덧없이 무너졌다. 턱선이 비스듬히 틀려 있었다. 미끈한 입술이 초조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리즈는 그 몸짓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뜨겁고 부드러운 감각이 입술에 내려앉으며 잇새를 갈랐다.
곧장 기습적으로 침범하는 게 그의 혀라는 걸 알았다. 그동안 그녀를 멀리서 상처 주고 괴롭혔던 그것. 여인을 능멸하듯 가슴을 빨기도 했던 것. 그것이 이제는 입 안 깊숙이 들어와 안을 정처 없이 휘젓고 있었다. 이내 질척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천장을 느리게 쓸었다.
“으읍, 읍, 흡, 으!”
그리즈는 대공의 어깨를 급박히 밀어냈다. 지금껏 반대로 움직여 왔던 그였다. 건드려 달라는 말에 진저리치고 경멸하고 자리를 떠났어야 했다.
그러는 대신 그는 굶주린 승냥이처럼 입술을 덮치며 이성을 와르르 허물어트렸다. 사내의 뜨거운 혀에 정신없이 시달리며 그리즈가 골반을 비틀었다. 등허리가 근질거리고 축축해진다. 뺨도, 목덜미도, 그리고 어둡고 비좁은 몸속도 젖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낯선 짐승의 혀로 샅샅이 해부되는 듯했다. 두려우면서도 이상한 욕구가 치민다. 더 격렬히 억눌리고 싶었다. 아래가 난폭하고 집요하게 다져져야 비로소 황홀해질 것 같았다.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즈는 미쳐 가는 스스로를 느끼며 눈을 떴다. 입술을 느릿하게 비비적거리며 신음하는 대공이 보인다.
단정한 구레나룻 아래에서 능란하게 움직이는 턱 근육, 근육 잡힌 목덜미, 빨개진 귀 끝을 보자 심장이 요동쳤다. 흥분으로 무방비해진 사내의 모습이 혼란을 자아냈다.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하게 될까 봐서 그리즈가 다급히 고갤 비틀었다.
“으읍, 읏, 읍.”
그는 비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품에 가둬 안으며 취한 짐승처럼 흐늘거렸다.
그리즈는 어지러운 시선이라도 피하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오로라가 아름답게 춤추고 있었다. 신께서 하늘을 한 꺼풀 벗겨 내고 천국을 미리 보여 주시는 것 같았다.
온몸에 진한 감각이 퍼진다. 그동안 누구에게서도 얻지 못했던 짜릿함, 가슴이 너무 뜨겁고 벅차서 눈에 눈물이 어릴 것 같은 느낌. 열정에 점령당해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는 아델의 기분을 이해할 것만 같다. 그리즈는 깊은 두려움을 느끼며 진저리쳤다.
“으읍, 읍, 으. 으으…!”
그동안 마음을 쥐고 흔든 것도 모자라 기어코 가지려 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부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어깨를 치며 한계를 느끼면서도 또 쳐 댔다.
그제야 그가 입술을 떼며 시선을 마주쳐 왔다. 뺨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귓전에 흥분한 호흡이 터진다. 그리즈는 그것이 자신에게 옮겨질까 두려워하며 몸을 뒤로 빼내어 무릎으로 땅을 짚었다.
정말 문제없이 해내고 싶었다. 가짜 율리아나 행세, 디르크와의 관계 유지. 대공 비아누트의 혼인도 망치기 싫었다. 그래서 늘 예상 밖이었던 그의 행동을 이용하려 했다.
미리 그걸 꿰뚫어 보고 당혹감을 주려던 거겠지. 대공이 미천한 여인의 입술에 자발적으로 입 맞출 리는 없으니. 그리즈가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진심을 드러냈다.
“하아, 하아, 저, 저는 살고 싶어요. 그 무엇도 망치기 싫어요.”
그는 흐트러진 상의 앞섶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길게 무릎 꿇었다. 이내 티 나게 붉어진 자신의 아랫입술을 검지로 쓱 훑으며 읊조렸다.
“이미 망치고 있어.”
그리즈가 사내의 흔적이 깃든 입술을 매만지며 일어섰다. 망치고 있다니 무엇을? 그의 입가에 어린 감정의 의미를 헤아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 순간 그가 흐트러진 그녀의 행색을 샅샅이 훑다가 낮게 말했다.
“더러운 네가. 나를.”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내가 당신을 망쳤다고?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힘은 11년 전에 잃었어.
그리즈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꼴을 내려다봤다. 이슬에 젖은 치마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등도 축축하게 젖었다. 머리칼에선 흙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반면 그는 손에 흙이 조금 묻었을 뿐이다. 씻으면 지울 수 있었다. 몇 초면 깨끗해질 것이다.
“다시 깨끗해질 수 있으실 거예요.”
그때 멀리서 아델과 디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저택 뒤편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리즈는 다급하게 반대쪽 내리막길을 향해 걸었다. 찰나 뒤돌아본 그는 잔디 쪽을 주시하며 무언가를 갈등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