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32)

***

두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리즈는 하녀 다섯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치마를 풍성하게 연출하기 위해 속치마인 페티코트를 세 겹이나 입었고, 최고의 고래수염으로 만들었다는 파팅 게일 치마를 그 위에 덧입었다.

그쯤 되니 스스로가 공들여 포장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스테판과 바이렌하그 가문에 부귀영화를 가져다줄 디르크라는 사내를 위한 선물일지 몰랐다.

치장을 마친 후 저택 앞에 서서 디르크를 태운 마차를 기다렸다. 뒤에 서 있던 벨린이 바람에 헝클어지는 그리즈의 머리칼을 계속 정리해 주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아름다우세요. 부군 되실 분께서도 분명 첫눈에 반하실 거예요.”

그리즈는 가벼이 고갤 끄덕였다.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라 심란했던 것이다. 디르크를 만나기 직전인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대공 비아누트가 맴돌고 있었다. 호숫가에서 처음 만나던 날 그의 모습과 티아를 안겨 줬던 순간, 목덜미에 단도를 들이대던 그의 모습도.

지나치게 야했던 밤의 비아누트, 금욕적이었던 낮의 비아누트를 번번이 떠올리며 설레고 속상해하고 아파하고 있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성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지금껏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준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 그뿐이겠지. 그리즈는 여전히 목덜미를 장악한 그의 숨결을 없애려 손으로 문질렀다.

멀리서 달려온 마차가 저택 앞에서 멈췄고, 곧 마차의 문이 열렸다. 가슴까지 오는 금발의 소녀가 먼저 내렸다.

소녀는 마중 나온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그리즈를 발견했다. 율리아나가 맞는지 긴가민가한 눈빛이었다.

“…율리아나?”

그리즈는 그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주춤주춤 다가온 소녀가 그리즈를 어렵사리 안아 주며 말했다.

“저기, 나 아델이야. 기억할 수 있겠니?”

그리즈는 아델의 등을 토닥여 주다가 얼굴을 마주 봤다. 피부가 밀가루처럼 하�R고 눈동자는 초록색을 띠었다. 웃는 모습이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아델을 기억한다는 대답은 할 수 없었지만 작은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다.

“안녕, 아델.”

뒤이어 마른 체형의 키 큰 사내가 마차에서 내렸다. 아델처럼 금발에 초록 눈을 가진 그는 갓 성인이 된 소년 같았다. 어색한지 머쓱하게 웃은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율리아나.”

그리즈는 선한 인상의 그를 마주 봤다. 온몸이 따듯해지는 느낌이 든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 느낌을 배가시켰다.

“말괄량이 아가씨가 정말 많이 변했구나.”

디르크의 인사가 흐를 때 스테판이 한발 늦게 나타났다. 막역한 사이임을 말해 주듯 아델이 옆 건물에서 나오는 스테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스테판!”

아주 여유롭게 걸어온 스테판이 아델과 포옹했다. 아마도 지금 무척 기분 좋을 거다. 미리 세워 둔 모든 계획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즈는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스테판은 그걸 아는 듯하면서도 무신경하게 아델 남매를 저택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 응접실로 가자.”

벌게진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누른 그리즈는 그들을 조용히 뒤따랐다. 앞서가며 스테판과 대화하던 디르크가 서서히 속도를 낮췄다.

그리즈는 문득 그를 올려다봤고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그럽게 웃었다. 권력과 출세에 혈안이 된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분위기가 무척 따스했다. 혹시 스테판처럼 사려 깊은 연기라도 하는 중일까.

어느덧 응접실에 도착해 소파에 앉았다. 미리 준비된 홍차로 입을 축인 아델이 맞은편에 앉은 스테판에게 물었다.

“대공 전하는 어디 계셔?”

스테판이 옆자리의 그리즈에게 차를 권하며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공무 차 항만에 가셨어. 한 시간 안으로 돌아오시겠지.”

그리즈는 찻잔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날씨도 화창하고 외모도 아름답게 꾸몄지만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저 앞에 앉은 디르크를 곁눈질하다가 홍차를 주시했다. 그리고 디르크, 또 홍차.

어제 뚫은 귀가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점점 열이 오르던 대공의 손끝과 그의 숨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맴도는 듯했다. 정신이 점점 흐려지는 찰나, 아델을 걱정하는 디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전하께서 오실 때까지 조금 쉴래? 마차가 너무 흔들려서 계속 힘들어했잖아. 아델.”

그는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한 여동생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보이는 대로 상냥한 성격인가.

붉기가 감도는 눈동자가 디르크의 얼굴을 유심히 훑었다. 그 순간 아델이 깨끗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냐. 율리아나도 이렇게 만났는데 벌써 쉴 수야 없지.”

이내 기운을 끌어 올리려는 듯 홍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그리즈에게 물었다.

“율리,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기억을 잃었다고 하던데 진짜니? 그럼 우리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잠시 머뭇거리던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속인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목숨이 걸려 있었다.

“응. 사고로 기억을 잃었어.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

아델은 실망한 듯 소파에 축 늘어져 기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괜찮아. 너도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거 알아.”

대화에 귀 기울이던 디르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괜찮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

그리즈는 디르크의 말을 곱씹었다. 행복하다라…. 무척 좋아했던 단어였지만 오랫동안 쓸 수 없는 단어였다.

“행복?”

“그래, 당연하지.”

디르크는 정말로 확신에 차 고갤 끄덕였다. 그리즈는 왠지 눈가가 간지러워져 눈꺼풀을 살짝 매만졌다.

그때 눈치를 살피던 아델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그….”

“…….”

“전하께서 브리튼의 공주와 혼인하신다는 게 진짜니?”

며칠 전 그리즈는 교양 수업에서 귀족의 품격에 대해 배웠다. 귀족은 입이 무거워야 하며 타인의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교과서적인 가르침일 뿐, 귀족들 대부분이 호사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을 헐뜯기도 하고 중요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

다행히 바이렌하그의 율리아나가 가짜라는 소문은 아직까지 사교계에 퍼지지 않은 눈치였다. 그럼에도 그리즈는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혼인하실 것 같아.”

아델이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디르크에게 말했다.

“봐 봐. 그 아이를 잊으신 게 맞아. 이제 우리에게 불똥 튈 일은 없을 거야.”

혹시 대공에 대한 얘기인 걸까. 그리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

소득 없는 담소가 지겨웠는지 스테판이 아델을 가만히 주시했다.

“아델, 좀 쉬는 게 좋겠어. 입술이 창백하네.”

아델은 스스로의 건강이 염려되는지 디르크를 바라봤다.

“정말? 그래?”

디르크가 쉬어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조금 피곤해 보여. 당분간 바이렌하그에서 지내게 될 테니 오늘은 좀 쉬자.”

스테판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방까지 데려다줄게. 아델을 위해 특별한 방을 준비해 뒀거든.”

대화를 유심히 듣던 그리즈는 스테판의 음험한 속내를 읽었다. 성가신 아델을 떼어 놓으려는 수작 같았다.

그 의도대로 이뤄진다면 조만간 디르크와 단둘이 남게 될 것이다. 숨이 막혔지만 피할 수 없었다. 차라리 무사히 혼인해서 이 저택을 나가기를 바라야 할까.

그때 특별한 방이라는 것에 관심 가진 아델이 스테판을 따라나섰다. 그리즈는 테이블 안쪽까지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다시 홍차를 바라봤다.

붉은 차에 디르크의 얼굴이 비쳤다. 상체를 앞쪽으로 숙여 앉은 그는 창밖 풍경을 감사하는 것 같다가도 그녀를 하염없이 곁눈질했다. 처음에는 얼굴을 봤다가 붉은 귀걸이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쇄골을 느리게 훑고는 긴장됐는지 쿠션을 꽉 끌어안는다.

그리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홍차에 설탕을 넣었다. 디르크에 대해서 무어라도 묻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조금 전 나왔던 대공에 대한 얘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하께서 그 아이를 잊었다는 얘기, 알려 줄 수 있어? 처음 듣는 얘기거든.”

혼인할 사내를 앞에 두고서 비아누트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는 엮일 일도 없고, 엮여서도 안 되는 사람인데….

뒤늦게 이성을 차린 그리즈가 대답을 듣지 않고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그때 디르크가 숫기 없이 테이블만 바라보며 나긋하게 설명해 줬다.

“말 그대로야. 전하께서 어렸을 적 혼인하고 싶어 했던 아이가 있었는데 허망하게 죽게 됐어. 얘기하자면 좀 기니 나중에 해 줄게.”

눈치상 오랜만의 만남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았기에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르크는 무릎에 올려둔 손을 초조하게 까딱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생각보다 너무 달라져서 기분이 이상해.”

그녀가 예전과는 달라서 이상하다는 얘기였다. 그리즈는 긴장하며 숨을 멈췄다가 애써 괜찮은 척 물었다.

“어떤 점이 달라졌어?”

디르크의 맑은 초록 눈이 그녀를 섬세히 훑었다. 이내 흑심 없이 순수한 대답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냥… 무척 여성스러워졌고 예뻐진 것 같아서.”

디르크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바닥을 배회했다. 그리즈의 시선도 뒤따라 갈 곳을 잃었다. 사내가 코앞에서 부끄러워하고 긴장하는 걸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일까. 왠지 그랑디아의 공주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찾아온 정적. 디르크는 안절부절못하며 찻잔을 들었다. 찻잔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걸 굳이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다시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 나는 어때?”

너무 아름다워진 소꿉친구 앞에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으니 칭찬해 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리즈는 융단 카펫 무늬를 헤아려 보다가 작게 대답했다.

“멋있어.”

너무 긴장했던 까닭에 그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결례가 또 있을까.

뒤늦게 고개 들어 그를 마주 봤다. 금색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넘긴 그는 훤칠한 청년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렸다. 상체를 덮은 검은색 털 망토 덕분에 무게감도 적당히 느껴졌다.

“멋있어. 진짜야.”

그제야 그가 보조개를 드러내며 웃었다. 기분 좋으면서도 머쓱한지 뺨을 쓱쓱 긁다가 다시 운을 띄웠다.

“저… 우리가 혼인할지도 모른다는 얘기, 들었어?”

“…응. 들었어.”

“네 생각은 어때?”

사실 그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스테판이 원하는 이상 혼인하게 될 테고 그녀는 신부의 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었다.

그리즈에게 주어진 것은 순순히 혼인할지 달아날지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목숨이 걸린 선택이라 아직 결정 내리지는 못했다.

“모르겠어.”

조심스러운 대답에 디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선택을 재촉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

“네 마음을 모르잖아.”

그리즈는 두 눈썹을 위로 올렸다.

내 마음? 내 마음이라…. 그런 걸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 마음…?”

그녀의 기분을 짐작할 수 없었는지 디르크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무, 물론 나는 네가 싫지 않아. 네게 맞춰 주고 싶을 뿐이야.”

혹시라도 마음과는 다르게 여인을 상처 줄까 봐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그리즈 또한 같은 생각으로 작게 대답했다.

“나도 그래.”

또다시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어색함을 달래려 차만 마시다 보니 어느새 찻잔을 깨끗이 비워 버렸다.

디르크의 찻잔도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이제 무얼 하면 좋을까. 산책이라도 하자고 하려는 찰나 다정한 질문이 들려왔다.

“방은 계속 그 방 쓰고 있어? 어렸을 때 썼던 그 방.”

“방? …으응.”

“구경해도 돼?”

마땅히 할 일도 없었기에 디르크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섰다. 디르크는 왠지 들뜬 모습이었다.

“나, 네 방 아직도 기억나. 창가에는 항상 들국화 꽃병이 있었고, 테이블에는 네모난 흑경이 있었어. 그리고 침대에는 토끼 봉제 인형이 있었지. 어머니가 생전에 만들어 주신 거라고 했어.”

그리즈는 깜짝 놀랐다. 디르크가 말한 방의 모습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다 기억해…?”

디르크는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네가 그 방에 나를 종종 가둬 뒀으니까. 나쁜 짓 못 하게 막는 나를 성가셔했었거든.”

얘기를 곰곰이 듣던 그리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1층이니 창문으로 탈출하면 되지 않니?”

디르크는 고개를 저으며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나는 늦게라도 네가 나타나서 안아 주는 게 좋았어.”

그는 그간 숨겨 왔던 비밀을 드디어 풀어놓았다는 듯 더없이 후련해했다.

“아….”

낮게 탄식한 그리즈는 미안함이 가득 어린 눈빛을 보냈다. 너…. 어렸을 때부터 율리아나를 좋아했구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그게 어색했는지 화제를 아델에게로 돌렸다.

“맞다, 네게 초상화를 선물해 주고 싶다면서 아델이 유화 도구를 준비해 왔어. 내일도 좋았으면 좋겠다. 날씨.”

어느덧 로비를 지나고 있었다. 무심코 바라본 출입구에서 대공 비아누트가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리즈는 흠칫 놀라 고개를 숙였다. 풍성한 분홍색 치마가 단연 눈에 띄었는지 곧장 대공의 시선이 닿았다.

그녀는 대공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창녀 마리아가, 바이렌하그에 도움이 되는 디르크를 하루라도 빨리 사로잡길 바라고 있을까.

어깨에 닿은 대공의 시선이 무척 따가웠다. 그리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으레 그랬듯 귀족 흉내를 내며 인사하는 것이었다.

“항만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전하.”

형식적으로 인사하고서 방으로 가려고 했다. 그때 계단으로 향하려던 대공이 방향을 살짝 틀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표정이 너무 차가워서 다른 날의 대공보다 더 낯설었다. 하긴 애초 남남인 사이에 따듯하게 굴 이유가 없지 않나.

뒷걸음치던 그리즈는 디르크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가 디르크와 인사를 나눌 것 같아 나름대로 자리를 비킨 것이었다.

머지않아 대공은 디르크에게 바이렌하그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말했다. 디르크는 그와 악수하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별로 수고스럽지 않았습니다, 전하. 저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과의 만남을 허락해 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찰나 그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냥 권태로움이 밴 잘생긴 얼굴을 상상했을 뿐이다.

그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지금껏 그랬듯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

그리즈의 하루하루는 눈 깜작할 사이에 흘러갔다. 디르크에게 정체를 들킬까 봐 가슴 졸였고, 어색해했고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어느덧 사흘이 지나 있었다. 그사이 스테판은 후작 영지에 생긴 문제 때문에 탈스바그로 떠났다.

뼛속까지 귀족으로 자라 깐깐할 것 같았던 아델과 디르크 남매는 생각보다 유순했다. 아델이 때때로 체했다며 식사를 거르거나 음식을 보고 헛구역질해 주방장을 긴장케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리즈는 하루에 반나절 이상 낮잠 자는 아델 덕분에 디르크만 주의하면 되게 된 점이 편했다. 긴장이 풀어지자 꾹 눌러 놓았던 걱정거리가 부풀어 버린 건 큰 문제였지만.

모르는 사이 귀걸이를 매만지는 습관이 생겼고, 귓불이 아릿한 감각을 즐기게 됐다. 상처는 다행히 잘 아물고 있었다. 그러나 귓불을 매만졌던 대공의 손길이 자꾸 느껴지고 갈망 섞인 숨결마저 끼쳐와 마음에 염증이 생겼다. 왜인지 의문을 풀어내기 전까진 낫지 않을 염증 같았다.

귀를 뚫어줄 때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정말 왜 그랬을지. 진득하게 키스하고도 남을 것 같은 입술로 왜 그런 말을 하고….

“잘 가, 마리아.”

그렇게 말하던 그의 얼굴을 봤어야 했다. 진심으로 가라는 의미였는지 혹시 반어법은 아니었는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오늘은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정원사들이 일을 쉬어 밖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리즈는 나른한 빗소리를 들으며 창가 앞에 앉았다. 창유리에 어린 물방울을 감상할 여력은 없었다. 대공 비아누트와 보냈던 시간을 회상하고, 귀를 뚫어 준 이유를 추측하고 반복해서 의미부여 했다.

하지만 그는 머지않아 브리튼의 공주와 혼인할 거고 공주를 애타게 바라보며 원할 것이다. 가짜 여동생에게 그랬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빈번히 원하겠지.

“아….”

찌르르한 통증이 심장에서 밀려온다. 지속적인 통증에 아파하다 보니 어느덧 비가 그쳤고 하늘이 맑게 갰다.

슬슬 찾아온 아델과 디르크가 그리즈를 응접실로 데려갔다. 그리즈의 초상화를 그려 주겠다는 목적이었지만 사실은 느긋이 담소를 즐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델은 그리즈를 붉은색 소파에 앉힌 후 앞에다 이젤을 펼쳤다. 준비하는 내내 기웃거리던 디르크는 적잖게 무료한 모양이었다.

“나도 같이 그려 줘.”

그가 조심스럽게 그리즈 옆 소파에 앉았다. 붓을 정리하던 아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려줄 수는 있겠지만 율리와 더 다정하게 연출해 줬으면 좋겠어. 연인처럼 말이야.”

디르크는 무리한 부탁을 받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고작 한 뼘 당겨 앉았다. 그리즈는 가까이에서 풍겨 오는 포근한 향을 맡으며 고개 숙였다.

무수히도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초면인 이들이 불편하고 어려웠다. 본의 아니게 속여 미안한 반면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로 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사랑한 건 하층민으로 전락한 타국 공주가 아니라 율리아나 바이렌하그였다. 욕심내지 말자. 적당히 장단 맞춰 주기만 해도 되니까.

그리즈는 쭈뼛거리며 융단 카펫의 문양만을 헤아렸다. 서로를 놀리며 평온한 한때를 보내는 남매의 목소리 사이로 낯선 발소리가 끼어들었다.

묵직한 무게감. 당당하고 미끈한 걸음걸이. 눈앞에 흠잡을 데 없는 외모가 떠올랐다. 집요하고 끈적거리는 눈빛을 가진,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

그리즈는 뜨거워지는 목덜미를 느끼며 고개 들었다. 벌써 그의 발소리를 알아듣게 되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신세라도 된 듯했다.

심각해진 그리즈의 표정을 살피던 아델이 의아해하며 뒤돌아봤다. 준비를 돕던 하녀들이 일제히 고개 숙이고 물러났다. 최상위 포식자라도 나타난 듯 고개 숙인 건 아델과 디르크도 마찬가지였다.

“대공 전하, 오신 줄 몰랐어요.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를 등지고 있던 아델이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다행히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단 한 명, 그리즈가 자신을 알아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건지.

왼뺨에 보조개를 드러낸 대공이 창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으니 집사 브람이 홍차를 따라 주었다. 그의 앞에 선 아델이 무릎 굽혀 인사했다.

“전하, 안 그래도 만나 뵙고 싶었어요! 와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그는 태양처럼 노란 액세서리로 치장한 아델의 차림새를 훑다가 홍차를 마시며 물었다.

“별일 없지.”

아델이 다시 한번 손끝으로 치마를 살짝 추어올리며 무릎 굽혔다.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모두 건강하십니다.”

그리즈는 불안해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런 소득 없는 자리에 대공이 나타나 자리 잡을 줄은 몰랐다. 며칠 전, 그는 다시는 마주칠 일 없다는 듯 잘 가라는 말까지 했었다. 단지 가문 간 형식적인 외교 차 온 것일까.

대공의 등장 직후부터 그리즈의 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 모습을 본 디르크가 의아해하자 그리즈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한 박자 늦게 디르크가 그리즈 쪽으로 상체를 살짝 굽히며 작게 귓속말했다.

“아델의 첫사랑이 대공 전하였거든. 어제부터 전하를 뵙게 해 달라고 브람한테 떼를 썼었어. 그 때문에 오신 것 같아.”

“아아….”

그 순간 대공의 유수한 눈동자가 그리즈의 얼굴에 꽂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디르크에게도 닿았다가 기이하게 흔들렸다.

디르크는 보이는 것처럼 무딘 성격인지 귓속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델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니 안심해. 전하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을 거야, 나는 알 수 있어.”

그리즈는 애먼 고개만 연거푸 끄덕였다. 디르크의 따스한 숨결이 뺨을 덮쳐 오지만 새파란 눈동자가 닿는 곳만 달아올랐다. 그 속 깊숙한 곳까지 뜨거울 정도로.

앉은 자세가 불편하게 느껴져 몇 번이나 고쳐앉았다. 그 순간에도 대공의 눈은 그리즈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네 기분이 제법 흥미롭다는 듯. 온몸의 솜털이 쭈뼛쭈뼛 서고 나서야 그의 시선이 아델에게로 옮겨 갔다.

“그림, 계속 그려 봐.”

아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족 탈을 쓴 창녀가 평온한 한때를 보내는 희극을 그가 좀 더 지켜보려는 것 같았다.

“네, 전하.”

아델이 벅차게 웃으며 이젤 앞에 앉았다. 스케치가 시작되고 조금 몰두하던 아델이 이번엔 소리 내어 웃었다.

“보기보다 잘 어울리네. 율리랑 디르크.”

하얗고 빨갛고 회색인 그리즈와 그을린 피부의 디르크가 의외로 조화롭다는 얘기였다. 아델은 감탄에서 그치지 않고 대공에게 동의를 구했다.

“전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지요?”

그는 의자에 팔꿈치를 걸치곤 턱을 매만졌다. 늘 그랬듯 여유로움이 물씬 풍겨 왔지만 그의 눈은 어쩐지 가시 박힌 듯 미묘히 떨렸다.

“글쎄. 내 생각이 중요할까.”

“하긴 당사자의 마음이 중요한 법이지요.”

그리즈는 그들의 대화가 불편했다. 혹시나 아델이 디르크와 혼인하고 싶냐고 물어 오면 긍정할 수밖에 없고 그건 곧 거짓이니까

그리즈가 불안정하게 자세를 고쳤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대공이 입술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그러게, 궁금하네. 당사자의 마음이란 거.”

그 말을 끝으로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리즈에게 몰렸다. 그리즈는 취한 것처럼 핑 도는 머리를 감싸며 낮게 호흡했다. 어째서 그는 사람을 이리도 집요하게 들쑤시는 걸까. 꼭 억울함을 가진 사람처럼.

그리즈는 몹시 곤란해하며 디르크의 눈치를 살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걱정스러워하던 디르크가 먼저 사내답게 나섰다.

“저는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이라면 평생 헌신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나온 그 말에 대공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 찰나의 순간 턱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굳어지는 게 보였다.

이내 그는 여유롭게 웃었지만 그 표정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면이었다. 아주 튼튼하고, 견고한.

불현듯 가면 속 그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만약 조금이라도 상실감을 앓고 있다면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앞으로 그에게 어떤 수난을 겪어도 견딜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감정이 깃든 눈빛을 보내오기만 했다. 너는 어때, 그를 원해?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아델의 흐뭇한 웃음소리가 멎고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즈는 모두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걸 깨닫고 디르크를 바라봤다.

그가 소년 같이 천진한 얼굴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 사내를 원하지 않지만 보답해 주고 싶었다. 행복했던 공주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준 보답. 상냥하게 대해 준 보답. 그리즈가 긴 숙고 끝에 대답했다.

“저도 그래요.”

그 말을 들은 디르크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의 깨끗한 미소를 바라보던 그리즈 역시 사심 없이 웃었다.

그런데 상황을 쭉 지켜보던 파란 눈동자가 서늘한 불을 튀겼다. 삽시간에 한계점에 도달해 스스로 녹아내리며 명멸하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순간 그리즈의 웃는 입매에 당혹감이 어렸다. 아델은 그 광경을 보지 못하고 그리즈를 향해 짓궂게 물었다.

“그으래? 아이는 몇 명이나 낳을 거야?”

아이. 혼인의 산물. 남녀가 뜨겁게 사랑했다는 증거.

혼인하면 그리즈도 그런 방식으로 디르크와의 사랑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대공의 눈에는 섬뜩한 날이 섰다. 가짜 여동생의 아이 계획까지 듣는 건 견디지 못하겠다고 표상하는 것 같았다.

“아델.”

“예. 전하.”

“완성은 얼마나 걸려.”

화제가 순식간에 전환했다. 아델은 금세 관심 돌려 대공에게 대답했다.

“아마 열흘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완성하고 나면 특별히 전하의 초상화도 그려 드릴까요?”

“아니. 지금 그려 줘.”

그렇게 말한 대공은 고작 한 입 마시고서 내내 들고만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중들던 하녀들이 눈을 크게 떴다. 아델도 마찬가지였다.

“예? 전, 전하께서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시는 걸 매번 지겨워하신다고 들었는데….”

아델은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농담할 만큼 그가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상기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디르크의 옆에 한 짝처럼 있는 그리즈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율리아나랑 같이.”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아델이 고갤 끄덕였다.

“자상하셔라. 혼인 전에 동생과 추억을 남기고 싶으신 거군요.”

그는 깊이를 알 수 없이 음울한 미소를 드러내었다.

초상화의 배경 장소는 정원 벤치였다. 검은 나비가 납치됐던 곳으로 대공이 정했다.

쨍쨍한 햇빛이 피부를 파고들건만 그리즈의 눈앞은 어두컴컴했다. 그가 순수히 초상화를 남기자고 시간을 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시커먼 의중을 세세히 몰라도 만 한 가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율리아나의 갈색 눈이 아닌 붉은 눈동자를 그림으로 남기려 한다는 점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리도 햇빛이 환한 곳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그만의 방법 같았다. 그리즈는 분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을 삼키며 정면만 바라봤다.

이젤 옆, 풍성하게 차린 티 테이블 위에는 우아한 캐노피가 설치되어 햇빛을 막아 주고 있었다.

하인들은 쿠키와 차를 나르느라 바빴고 그들이 분주히 다녀간 길마다 꽃들이 짓밟혀 죽었다. 모두 대공의 말 한마디로 벌어진 일이다.

그리즈는 안타까워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지 물었다. 죽은 꽃들이 가여운 마음 반, 자신 또한 대공의 한마디에 저렇게 짓밟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 반이었다. 대공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건가.

앞에서 둘을 지켜보던 아델이 남매가 너무 어색하다고 불평했다. 묵묵히 앉아 있던 그는 애써 다정한 척할 의지조차 없었다.

“화가 능력에 맡길게. 율리아나부터 그려.”

그리즈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역시 붉은 눈동자를 그림으로 남기려고…. 정말 잔인하게.

아마도 흐트러진 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만든 여인을 말려 죽이려는 것 같았다. 한 명의 목격자만 죽이면 없던 일이 될 테니까.

그리즈는 남들보다 약한 피부가 햇빛에 타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서 항거하듯 눈을 또렷이 떴다. 그에게 맞서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에게 수난을 당해 시름시름 앓으며 말라 죽고 싶지 않을 뿐이다.

정말로 간절히 살고 싶었다. 지금껏 연명해 온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살아서 요하네스를 만나야만 했다.

조만간 디르크나 아델에게 부탁해 밖으로 나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운이 좋으면 탈출하게 될 거고, 아니면 다시 예술품 상점에라도 가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계속 힘을 내야지.

용기를 북돋듯 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에게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머리카락이 눈치 없이 그의 얼굴 근처로 다가가 나풀거렸다.

그리즈는 그제야 그가 생각보다 가까이 앉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바람이 반대 방향에서 불어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의 큰 몸을 휩쓸고 온 바람에서 체향이 묻어난다면 여동생답지 않게 귀를 붉힐지도 몰랐다.

찰나 불어온 바람을 타고 흐르는 머리칼이 이번엔 그의 뺨을 간질였다. 물론 그는 견고한 석상처럼 흔들림 없이 정면만 주시했다.

곁눈으로 본 그의 옆선이 단연코 아름다웠다. 그리즈는 이상적인 피사체를 한 번만 완전히 보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그때 새파란 눈동자가 아래로 속절없이 내려갔고 때맞춰 그리즈가 그의 시선을 따랐다. 그러다 검은 바지 앞섶에서 확 멈췄다.

앞섶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었다. 그녀는 그 의미를 깨닫고 일순간 숨을 멈췄다. 아래가 열망으로 빳빳하게 뭉친 걸 확인했으면서도 그는 굉장히 따분한 얼굴을 하고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즈의 이성은 와르르 무너졌고 곧장 저 멀리 증발해 버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그가 태연히 망토로 앞섶을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중요한 문제가 있었어. 가 봐야겠군.”

회색 머리카락이 내내 간질인 사내의 귓불은 못 본 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즈가 그걸 보는 찰나 아델이 무척이나 서운해하며 물었다.

“중요한 문제요?”

그는 어언간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을 바라보며 대답하고 있었다.

“정리하지 못한 일. 아직도.”

심신이 복잡한지 그가 히스테릭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리즈는 차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서성였고, 그사이 그는 아델에게서 미완성인 그림을 구매해 저택으로 들어갔다.

정리하지 못한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가 가짜 여동생을 경멸하면서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미래의 아내를 위해 지켜 온 그 순결한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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