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2)

***

이틀이 지났다. 대공과 세 번 마주쳤고 그때마다 그리즈는 달아났다.

당분간은 계속 그를 피해 다니고 싶었다. 그 역시 그걸 바라는 것 같았고 굳이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어서 시간이 흘러 며칠 전의 사건이 없던 일로 치부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또 다른 사건이 벌어졌다. 모든 일과를 마친 저녁. 집사장 브람이 방으로 찾아와 불길한 소식을 전했다.

“아가씨,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할머니와 식사하고 모처럼 안정을 찾은 그리즈는 창백해졌다. 대공의 용건을 묻고 싶었지만 집사장이 알 리 없을 것이다.

무겁게 걸어 대공의 서재 앞에 도착했다. 벌레 울음소리만 아스라이 들려오는 곳. 그리고 그의 입술을 눅진히 느꼈던 그곳…. 혹시 설마 그가 또 그런 음심을 품고….

그리즈가 드레스 앞섶부터 황급히 여몄다. 브람이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전하, 율리아나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여보내.”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방금 환기했던 건지 목덜미로 찬 기운이 엄습했다. 그게 조금 다행이었다. 추위는 사람을 냉철하고 방어적으로 만든다. 그가 지난번처럼 무방비한 얼굴로 달려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안도한 그리즈가 안으로 들어갔다. 아랫입술을 만지는 척하며 팔로 가슴을 가린 채였다. 책상 앞에 서 있던 그는 그녀를 보며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끼익. 집사가 문을 닫았다. 그리즈는 책상 위에서 아롱아롱 흔들리는 기름 램프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때때로 얼굴을 훑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난번처럼 뜨겁지는 않았다. 그의 잇새에서 번진 목소리도 지나치게 냉랭했다.

“마리아.”

흔들리는 사물의 그림자 사이에서 그 이름만 곧게 뻗어 나온다. 마리아. 그가 존중하는 성녀의 이름, 혹은 그가 경멸하는 창녀의 이름.

사실 그 이름은 매음굴에서 더러운 행색으로 조용히 잡일만 했던 소녀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녀를 귀머거리, 더러운 마리아라며 손가락질했고, 피부병을 옮을까 봐 늘 경계했다.

물론 대공의 눈동자에도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다만 전염병을 경계하는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는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고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사내의 순결한 영혼을 더럽히는 악마라도 앞에 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악마를 친히 방으로 불러들이는 건 크나큰 모순이지 않나.

생각하던 그리즈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녀에게는 비아누트 반 바이렌하그 대공이 그런 악마였으니까.

“곧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어서 그의 용건을 해결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때 귓가에서 흐릿한 비웃음이 들렸다.

“잘 도망 다니는군. 오늘도.”

그 말을 듣자 무수히도 많은 의문이 번진다. 그가 집요한 추격자처럼 말하는 이유는 뭘까. 도망치는 목표물을 따라가기라도 했었다는 말인가. 눈매를 좁혔던 그리즈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이 있던 다음날부터 그가 먼저 냉담하게 굴었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것도 그였다. 꼭 그걸 바라는 사람처럼. 그리즈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떨렸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

“아닌가요.”

휘이잉. 스산한 바람이 창유리를 스쳤다. 손으로 자신의 턱선을 매만지는 그는 무척이나 이성적으로 그녀의 질문을 부정했다.

“그래, 아니야.”

그리즈는 이마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걸 느끼며 고개 숙였다. 그가 생각하는 최선은 무엇일까. 왜 그는 최선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째서요…?”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도망갈 이유가 없었잖아.”

그러니까 지금껏 흔하게 안겼을 사내의 품에서 줄행랑친 매춘부가 이상했던 거다. 이유를 샅샅이 수색하는 시선이 이어졌다. 출신을 의심받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변명해야 했다.

“보, 보수를 주지 않으셨어요.”

그의 저음이 느리게 탄식했다. 아주 짧은 찰나 푸른 빛 매력적인 눈동자에 실망감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복잡한 감정이 그리즈의 가슴속을 쥐고 흔든다. 가까스로 유지했던 가짜 남매 사이가 그 사건 후로 무너져버린 탓이다. 무너지니 형태가 모호해졌고, 무어라 정의하기도 애매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리도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와의 관계를 새로 정의하기 위해 밤잠 설치고, 가슴 졸이고, 설레하는 것이다.

그런 감정 소모를 멈추기 위해서라도 그와의 관계를 명확히 정립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그리즈는 어긋나던 관계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방법을 알고 있었다.

돈과 몸을 등가 교환하는 관계가 되면 된다. 말하자면 주인과 창녀의 관계.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에게서 합당한 대가를 받으면 그동안 느껴 왔던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자신을 안으려 했던 게 호감이 아니라 성욕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아도 되겠지.

“금화 한 닢을 주세요.”

바닥을 주시하던 시선이 그리즈의 얼굴에 꽂혔다. 그녀를 이해하려는 듯 선명해졌다가 믿기지 않도록 서늘해졌다.

“금화?”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은 그가 차갑게 웃었다.

“재밌네.”

그리즈는 살벌한 조소가 헤집은 귓가를 어루만졌다. 적어도 그가 고마워할 줄 알았다. 늘 차고 넘칠 금화 한 닢으로 그날의 실수를 무마해주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지그시 이를 물고 머리를 쓸어넘기다가 결국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씹어 삼킬 듯 사나운 눈으로 그리즈를 바라보았다.

“그거면 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차갑게 치미는 체기를 삼키며 한숨 쉬었다.

“네, 그거면 돼요.”

한몫 단단히 챙기려 혈안이 된 여인의 모습을 감상하지 못했기에 그의 심기가 불편해진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동안 출세를 노리고 그에게 접근했던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가 없이 하루만 사랑해 달라고 아양 떠는 걸 보지 못해서.

아쉽게도 그리즈의 마음속에는 출세욕이 없었다. 그저 요하네스란 사내에 대한 그리움과 타릴루치 가문에 대한 복수심뿐이었다.

“금화 한 개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는 못 줄 것도 없었는지 책상 위 주머니를 풀어 금화 한 닢을 내밀었다. 자신 또한 빨리 이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졌다는 듯 표정이 권태로웠지만 어쩐 일인지 두 눈에는 기묘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소리 없이 부르는 것 같았다. 가까이 오라고, 건방지게 굴어도 귀엽게 봐줄 수 있다고.

그리즈는 나른한 끌림을 느끼며 느릿하게 다가갔다. 이내 어둡게 빛나는 눈동자를 주시하다가 금화를 내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그때 그의 검지 끝에 걸려 있던 금화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의도적으로 놓아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즈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녀가 고작 금화에 한눈파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므로 차라리 떨어트려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니면 금화 한 닢은 대가로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 걸까. 치를 떨며 비굴하게 주워 가는 모습이라도 보이라는 의미일까.

“전하….”

그리즈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슬픔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금화를 받은 걸로 치겠다며 돌아서고 싶었다. 무감각한 그의 표정 속에 숨겨진 멸시의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어 두려웠고, 원통했다.

그렇지만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그를 만족시켜 줘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주워야겠지. 비참한 얼굴을 하고서.

그리즈의 눈동자가 카펫 위 금화를 서글프게 바라봤다. 그대로 무릎을 굽히려는 순간 그가 금화를 발로 지그시 밟았다.

“아니.”

촛불에 그늘진 입매는 어느새 잔악하게 휘어 있었다.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없어. 너는.”

몹시 절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순진한 여인의 몸과 마음을 더럽힌 대가로 고작 금화 한 닢도 줄 수 없다고, 아니 원하는 걸 줄 생각도 없다니. 어찌 이리도 사악한 사내가 있을까.

무수히도 많은 의문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애당초 그가 보수를 줄 생각은 있었을까. 단지 굴욕적인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건가.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매만지던 그리즈가 눈을 질끈 감았다. 피 말리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가 원하는 걸 모조리 주고 싶었다.

“…전하께서는 원하는 대로 가지실 수 있어요. 제게서 무얼 원하시나요.”

위태롭고 불안정한 하루를 사는 것보단 그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진심으로 마음의 준비까지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반응이 가소롭다는 듯 웃고는 품 안에서 보라색 보석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검지 손톱만 한 붉은 보석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동안 그랑디아에서 많은 보석을 접했지만 저렇게 붉은색을 가진 보석은 없었다. 마치 신성하고 깨끗한 생물의 피를 딱딱하게 굳혀 놓은 것 같았다.

잠깐, 생물의 피 색깔이라…. 벨린이 얼마 전에 그런 말을 했었는데….

“대공 전하께서는 값비싼 물건을 사셨대요. 루비라는 보석이 박힌 귀걸이인데 비둘기의 피처럼 붉고… 아니, 마녀의 눈동자처럼 붉고 신비로운 색이라고 하셨어요.”

“…….”

“영생을 가진 불사조가 삶이 지루해져 루비로 환생했다는 전설이 있대요. 그 덕에 루비를 소지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해요.”

그가 금화를 열 개나 들여서 그걸 샀다고 전해 들었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걸 주는 게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열 배나 비싼 보석을 꺼냈으려고….

“그, 그게 뭔가요.”

그는 시종일관 담담하던 여인이 당황한 기색에 흡족해진 모양이었다. 보석이 위치할 자리를 보듯 그리즈의 뺨으로 손을 슬쩍 넣어 머리칼을 들어 올리며 미소지었다.

“붉은 보석.”

남성성이 넘치도록 밴 낮은 목소리가 귓불을 긁었다. 속눈썹을 파르르 떤 그리즈는 자신을 보기 위해 기꺼이 고개를 낮춘 사내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금화 한 닢 대신 그걸… 주실 건가요.”

“응.”

모르는 사이 그의 시선이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 안쪽으로 훅 끼쳐 왔을 때 그리즈는 몸서리치고 싶은 충동을 견뎠다. 그의 목젖이 요동치고 있었다. 일순간 목덜미 근육이 굵어지며 핏대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어쩌면 저번처럼 살결을 머금고 음란하게 빨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중인지도 몰랐다. 그리즈는 그때의 아찔한 감각이 아랫배로 치솟아 미칠 것만 같았다.

“저, 저는 그렇게 과분한 건 원하지 않습….”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감각을 알아 버리는 것이 싫었다. 하필 냉혹하고 오만한 사내로부터. 거절 의사를 드러낸 건 거의 순식간이었다.

“받을 수 없어요.”

보석 상자를 책상에 올려둔 그는 기름 램프를 그 옆에 끌어 놨다. 이내 귀걸이를 하나 빼내어 불에 침을 달궜다. 그저 크기만 한 줄 알았던 손이 의외로 섬세했고 얼굴 옆선은 조각처럼 근사했다. 시선을 모조리 빼앗겨 버렸을 때였다.

“싫어. 나도.”

나지막이 대답한 그가 진정 지겹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여인이 싫다고 말한 건지, 하찮은 여인을 신경 쓰는 스스로가 싫다고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난번 숨통을 그윽하게 조였던 로즈마리 향이 코끝을 스쳤다. 향이 들어오지 못하게 숨을 참은 건 거의 본능적이었다.

그는 단단히 소독한 귀걸이 침을 주시하다가 손끝으로 그리즈의 귓불을 가볍게 쥐었다.

“움직이면 다쳐.”

그가 손수 귀를 뚫어 주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날 선 침이 귓불을 꾹 눌렀고 그리즈는 목덜미에 힘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싫, 그, 그만….”

침 끝이 생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피부가 뜨겁다. 서늘했던 공기도 달아오르는 착각마저 들었다.

“흣.”

그 역시 눅눅해지는 방의 온도를 느꼈는지 호흡을 낮게 내리깔았다. 작은 표정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에, 떨리는 숨결에, 눈앞에서 맥동하는 사내의 핏대에 그리즈는 온몸 근육이 조여드는 기분을 경험했다.

끔찍한 일이다. 사내로부터 몸을 뚫려 피를 내게 되다니.

“아, 아파요.”

그러나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지독히 은밀하고 야한 행위처럼 닥쳐온다. 여인의 귀를 뚫어 주는 사내의 무방비한 얼굴을 보자 그 느낌이 심해져 심장이 미칠 듯이 울렁거렸다.

“아읏….”

드득, 득. 속살을 완벽히 뚫은 침이 귓불 뒤로 빠져나왔다. 검지로 침을 더듬어 확인한 그는 침 뒤에 고정핀을 꽂았다. 그리고 곧바로 한 짝의 귀걸이 침을 불로 지졌다. 섬세한 손길을 봐서는 이 행위가 그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 일처럼 느껴졌다.

과연 여인의 생살을 뚫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통한 후계자에게 모든 걸 물려줘야 하는 대공으로서는 채울 수 없는 성적 욕망을 이렇게 충족하는 걸까.

그 순간 그가 반대쪽 귓불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즈는 숨을 참으며 그를 훑어봤다. 귓불을 주시하는 어두운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들끓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걸 닥치는 대로 삼키고 싶어 하는 식욕, 아니 끈적끈적하게 쌓인 애욕을 분출하고 싶은 충동.

그 욕망이 지나치도록 매혹적으로 빛나며 무어라 말했다. 너를 갖고, 맛보고 싶다고.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안쪽 깊숙한 곳까지. 그 욕망이 깃든 듯한 귀걸이 핀이 귓불을 푹 찔렀다.

“아아, 대공, 대공 전하. 아프….”

대공의 단단한 몸이 여인의 몸이라도 파고들듯 단단히 굳었다. 그의 반반한 이마에 식은땀이 짙게 배었다. 그때 그리즈의 뺨 근처에서 뜨거운 호흡이 터졌다.

“하….”

드드득. 핀이 단번에 살을 뚫었다. 그리즈는 흥분해 들썩이는 사내의 가슴팍을 보느라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고개 숙인 그는 보석 상자를 더듬어 고정핀을 집었다. 이내 고정핀으로 귀걸이 뒤를 막아 주고는 느리게 말했다.

“끝났네. 울기 전에.”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몰아칠 것 같았던 폭풍 전야가 그렇게 끝났다. 소매로 이마를 닦은 그가 용건이 끝났다는 듯 보석 상자 뚜껑을 덮어 내밀었다.

그리즈는 화끈거리는 귓불을 느끼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머릿속을 떠도는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어째서 금화 한 닢 대신에 귀한 귀걸이를 준 건지, 왜 손수 귀를 뚫어 준 건지, 귀를 뚫는 내내 타들어 가는 눈빛을 준 이유는 무엇인지.

결국 무엇도 묻지 못하고 상자를 받아 들었다. 대공 역시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기에 그저 돌아섰다. 등 뒤에서 느릿한 인사가 들려왔다.

“잘 가.”

“…….”

“마리아.”

마치 작별하는 사람의 목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흘끗 돌아본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 앞에 앉았다.

그제야 그가 며칠 전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일탈을 깔끔히 정리했다는 걸 깨달았다. 금화 열 개에 달하는 귀걸이를 대가로 받은 여인은 그 일을 떠벌릴 수 없을 거고, 그렇게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잘된 건가. 그래 잘된 거겠지. 이제 정말로 없던 일로 치부할 수 있게 됐잖아.

그리즈는 아무쪼록 바라던 일이었다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알 수 없는 슬픔이 울컥 터져 나왔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잠을 설쳤다. 차가운 손끝이 닿았던 귓불이, 그의 선물이 뚫고 지나간 속살이 밤새도록 쓰리고 아렸으므로 없던 일로 치부하기 불가능했다.

***

날이 밝자마자 찾아온 벨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회색 머리칼 사이에서 붉게 빛나는 루비 귀걸이를 보고 놀란 것이다.

“어머, 아가씨. 귀, 귀가….”

그리즈는 침대에 앉아 귓가를 매만졌다. 찌르르한 통증 탓에 밤새 잠을 설쳤다. 다행히 지금은 열감이 사그라들었지만 쓰라린 건 여전했다.

“아파….”

상처가 덧날까 봐 목욕은 내일로 미루고 머리만 감았다. 그리즈는 테이블 위 흑경으로 귀걸이를 유심히 살피다가 머리를 말려 주는 벨린을 보았다.

아마도 대공께서 무역상에게 샀다던 루비 귀걸이가 눈앞에 있다는 걸 벨린이 눈치챘을 것이다. 피처럼 붉은 보석이 햇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나 한참 뒤에 벨린의 질문이 들려왔다.

“전하께서 친히 귀도 뚫어 주셨나요?”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벨린은 회색 머리칼을 조심조심 빗겨 주다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정말 상냥하시네요. 아가씨의 혼인을 이 정도로 축복해 주시다니!”

바닥을 주시하던 그리즈가 문득 넋 놓았다. 그가 혼인을 축복해 주었다고?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얘기니?”

그리즈가 붉게 달아오른 귓불을 매만지며 물었다. 어느새 벨린은 신이 나 있었다.

“노르드발츠에서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온 전통이잖아요. 아버지는 딸을 부족함 없도록 가르치고 어머니는 혼인을 앞둔 딸의 귀를 뚫어 주며 여인으로서 사랑받길 기도하는 거죠. 어머니가 안 계실 경우엔 아버지나 형제가 대신 뚫어 주기도 하고요.”

“정말…?”

“전하께서 루비 귀걸이를 사실 때 이미 아가씨를 염두하셨었나 봐요. 정말 아름다워요.”

벨린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리즈는 인정할 수 없었다. 대공과는 혈육이 아니지 않은가. 마지막 인사만 곱씹어 봐도 그는 실수를 정리하고 싶었을 뿐일 터다.

“잘 가.”

“…….”

“마리아.”

어찌 됐든 잘된 일이겠지. 가짜 여동생에게 품었던 감정이 무엇이었든 그는 정리했다. 이제는 앞으로 만나게 될 디르크라는 사내와 스테판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즈는 왜인지 공허해진 기분으로 귀걸이를 흑경에 비춰 보았다.

“그래, 아름다워. 정말.”

벨린은 흐뭇하게 웃고서 창밖을 바라봤다.

“마침 아가씨의 부군 되실 분이 곧 도착하실 거예요. 최고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혀 드릴게요.”

어쩐 일인지 그리즈의 시선은 그가 선물해 준 붉은 루비에서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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